[eBook] 골든아워 2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13-2018 골든아워 2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이국종 교수님이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기록한 외상외과 현장 이야기가 《골든아워》 2권에 담겼다. 이 교수님의 그동안의 헌신이, 선진적인 중증외상 의료체계가 우리나라에 확고히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간호사나 일반 행정직 역시 승진 여부에 희비가 날카롭게 엇갈렸다. 직급과 직함의 차이일 뿐인데도 모두들 직위 변화에 예민했다. 조직 내에서 승진이나 진급이 갖는 의미는 직위에 따른 처우 차이도 있겠으나 한국 사회 분위기와도 연관돼 있다. 대부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에 걸맞은 직급을 원하고,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상사가 되는 경우를 꺼린다.
런던에서 근무할 때 병동의 수간호사는 불혹(不惑)을 갓 넘긴 나이였다. 그 아래에서 일하는 말단 간호사들 중 몇몇은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으나 누구도 나이에 따른 직급의 수직 서열화를 말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나마 의사 쪽은 젊은 교수들이 주임교수가 되면서 실제 일이 가장 많은 연령층으로 보직이 내려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간호와 행정 쪽은 변화가 적어 연공서열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헤어져 돌아와보니 변변한 위로 한마디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짧은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휴대전화 메신저 창을 열었다. 조현철의 이름 옆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고귀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겐 보상이다.’
스스로를 향한 위로였을 테지만 이정엽이 한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국가관이 투철하다고 해도 진급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을 것이다. 조현철은 흔들리는 자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몇 글자를 적다 말았다. 말 없는 세상이 어울리는 그에게는 그 어떤 말도 불필요할 것 같았다.

시간은 없고 환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보호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환자는 크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보호자들은 가진 재산을 총동원해서라도 환자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환자의 자녀들은 부친에게 받은 사랑이 컸다며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모았다. 돈이 많다고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환자가 좋은 아버지였고 좋은 가정을 꾸려왔음을 짐작했다.

수개월이 지났다. 환자는 안정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회복되지는 않았다. 보호자들은 모든 심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환자에게 쏟아부었다. 종국에는 실험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에까지 나섰다. 그러나 더 이상 호전되지 않았다. 환자는 살아 있으나 다시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보호자들의 지치지 않는 노력이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전하자 보호자들은 되레 내 처지를 걱정했고, 결국 환자를 재활 전문병원으로 전원시키겠다고 했다. 보호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결정을 막지 않았다.

전원 간 지 반년이 지나 환자의 딸은 환자가 편히 영면했다고 알려왔다. 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환자의 사고를 둘러싸고 수많은 말들이 떠돌았으나 환자는 끝내 사망했다. 사고 당시의 상황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당사자가 없어졌다. 나는 그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환자는 행복한 마지막을 보냈을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그것 하나만은 선명했다. 죽음이 누구에게든 동일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오지는 않는다. 나는 버려진 죽음을 수없이 보아왔다. 가족이 없고 돈이 없어서 쓸쓸하게 허물어져 가는 목숨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이 이처럼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상황은 아무나 받는 축복이 아니다. 그 지점에서만큼은 분명히 행복했을 환자였다.

김재근과 저녁 약속이 있던 날, 그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함께 직원 식당으로 이동할 참이었다. 그의 연구실 앞에 도착했을 때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님이 찾아온 듯했다. 이어지는 대화에 나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섰다. 들려오는 이야기로 손님이 학생임을 알았다. 김재근은 의과대학 학생 부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학생들과 면담할 자리가 더 많았을 것이다. 김재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생은 나도 아는 친구였다. 계속 유급을 당하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더는 의과대학 생활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다지기 위한 의과대학 시절의 교육 과정은 살인적이다. 학업의 양마저 주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에 의과대학 시절은 한계에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 값으로 삼아 겸손해져야 하는 때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늘 잘하는 축에 속했던 학생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 지옥을 건너며 많은 학생들이 방황하고 좌절하다 진급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한두 차례의 유급은 극복이 가능하지만 낙오가 거듭되면 정신적으로 의대 학업을 지속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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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3-30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베텔게우스 님의 서재에서 다시 읽으니 새롭습니다.
베텔게우스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베텔게우스 2019-03-31 20: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남은 주말과 새로운 한 주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