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긴티 부인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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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52년 소설이다. 크리스티가 가장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을 쓸 무렵이 이 때인 것 같다. 푸아로와 올리버 부인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기서 올리버 부인은 푸아로의 오랜 친구로 설정된다. 아리아드네 올리버는 누가 보아도 크리스티 자신이다. 아마도 수십 편의 추리 소설을 쓰면서 작가 본인도 이래저래 지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작품 활동 자체에 대한 것도 있겠고, 본인이 쓴 소설과 캐릭터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그 때문에 피곤한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리아드네는 크리스티에게 하나의 쉼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입으로 직접 말을 하는 장면은 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단순히 등장인물의 생각이 아니라 크리스티 본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작가의 즐거움은 독자에게도 전달되는 것일까. 만약 이 소설이 온전히 푸아로에게 떨어진 사건이었다면 재미는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소설의 별 한개는 아리아드네의 몫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별 반 개 정도는 이 책에도 등장하는 '에그녹'에 주고 싶다. 달걀과 우유를 섞은 술이라고 설명이 나오는데, 등장할 때마다 맛이 궁금해지면서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조금 지나친 추론을 통해 상상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오. 몽 셰르 스펜스(친애하는 스펜스), 만약 맥긴티 부인이 그냥 평범한 파출부라면 범인은 틀림없이 비범한 자일 거요. 그래, 이렇게 생각하니 확실해지는군.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피살자가 아니라 범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오. 그것이 대부분의 범죄와 다른 점이지. 대개 피살자의 성격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소. 그래서 나는 보통 아무 말이 없는 피살자에게 관심을 갖는다오. 피살자의 애정 관계나 원한 관계, 행동 등에 대해 말이오. 희생된 피살자에 대해 깊은 것까지 알아 가다 보면 나중에는 피살자가 말을 하게 된다오. 죽은 자가 입술을 움직여 어떤 이름을 알려 주는 거지. 우리가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이름을.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것과는 정반대란 말이지. 우리는 베일에 쌓인 누군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말이오. 맥긴티 부인이 어떻게 해서 죽었지? 죽은 이유는 뭘까? 그 해답은 맥긴티 부인의 삶을 조사해 봤자 얻을 수 없을 거요. 해답을 얻으려면 살인자의 특성을 알아봐야 하오."

 

맥긴티 부인이 사망했다. 유산도 없고, 원한 관계도 없고, 지극히 평범한 노부인. 그래서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사건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어요. 어머니는 과거에 집착하는 분이거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있죠."

푸아로가 맞장구를 치면서 조금 전 갔던 방의 모습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렸다. 웨더비 부인의 방에 있는 책상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서랍 속에는 비단으로 만든 바늘꽂이, 살이 부러진 부채, 은제 커피포트, 오래된 잡지 몇 권 등등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마도 물건이 너무 많아 서랍을 닫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푸아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물건들을 소중히 모아 두곤 하죠. 댄스 차례표, 부채, 먼저 세상 떠난 친구들 사진, 심지어 메뉴판이나 극장표까지 간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옛 추억들이 되살아나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요. 저는 어떤 물건이든 오랫동안 간직하는 법이 없어요."

"당신은 미래 지향적인 분이군요. 과거는 결코 되돌아보지 않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이 부분은 사실 작품 전체의 모티브와 관련이 있다.

 

집 밖으로 나온 푸아로가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로빈 업워드의 밝은 테너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아리아드네. 다 좋다고요. 하지만 그 콧수염 하며 차림새를 좀 보세요. 그 사람을 보고 누가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심으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푸아로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

 

이 부분은 웃음이 나왔다. 작가도 이 부분은 즐거워하며 쓰지 않았을까 싶다.

 

스펜스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막막하군요. 우리가 이 사람들의 과거사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전쟁은 여러 가지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죠. 각종 기록들이 멸실되었고, 그러다 보니 남의 신분증을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생긴 겁니다. 특히 시신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동란 뒤에는 그런 일들이 더욱 비일비재했죠."

 

이 소설이 1952년에 나왔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확실히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언제 나왔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당시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떄문일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른다섯, 그 이상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그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써 온 지 벌써 30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첫 작품에서 이미 그는 서른다섯이었다고요."

"하지만 아리아드네. 만약 그가 예순이라면 그와 여자 사이에 성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없어요. 그 여자 이름이 뭐더라? 잉그리드!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남자는 자연히 몹쓸 노인네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니까 그는 반드시 서른다섯이어야만 해요."

로빈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스벤 예르손이 될 수 없어요. 그냥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노르웨이 출신의 한 청년이라고 해두자고요."

"하지만 아리아드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스벤 예르손이에요.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이 스벤 예르손을 사모하는 만큼, 이번 연극을 보러 올 사람들도 모두 스벤 예르손의 팬들이란 말입니다. 그벤 예르손이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제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청년을 만들어 놓고, 그를 무조건 스벤 예르손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봐요, 아리아드네, 제가 이미 설명 드렸잖습니까? 이건 책이 아니라 연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객들을 홀리는 마법을 부려야 한다고요. 만약 스벤 예르손과 이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캐런! 그러니까 스벤 예르손과 캐런 사이에 성적 긴장감을 불어넣기만 하면, 서로 대립하는 가우데 어마어마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이......."

"스벤 예르손은 원래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라고요."

올리버 부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렇더라도 그를 동성애자로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특히 이런 연극에서는 더욱 불가능해요. 우리 작품은 심각하고 칙칙한 내용이 아니에요. 살인 사건을 둘러싼 숨 막힌느 스릴과 신선한 바깥 공기 같은 재미를 주어야 한다고요."

 

이 부분은 확실히 크리스티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작품은 상당수가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재닛 그룸이 불평을 좀 하더라고요. 하지만 별로 이상할 것 없잖아요? 재닛도 젊은 나이가 아닌 데다 동풍이 불 때는 류머티즘이 지독하게 도지거든요. 하지만 상류사회 사람들은 관절염에만 걸려도 휠체어다 뭐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죠. 저라면 제 두 다리를 사용하지 않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암, 그러고말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가벼운 동상에만 걸려도 의사에게 달려간다니까요.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거죠. 건강 관련 사업이 너무 발달했어요. 자신의 몸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고민해 봤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에요."

 

전쟁 직후 영국은 여러 부분에서 법률을 개정하였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로 미루어보건대 세금을 더 많이 거두었고, 외국인의 고용이 늘었으며, 경제 용어로 치자면 이른바 '큰정부'를 지향하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올리버 부인이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왜 그런 혐오스러운 남자를 만들어 냈는지 나도 모른다고요. 아마 내가 미쳤었나 보죠! 핀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하필 그를 핀란드 인으로 설정했는지, 왜 채식주의자라고 했는지, 왜 그런 바보 같은 매너리즘에 빠진 인물을 만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한번 만들어 보란 말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걸 좋아한다 싶으면 계속 그렇게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당신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빌어먹을 스벤 예르손 같은 인간이 당신을 평생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요. 심지어 사람들은 글과 말로 당신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들어 대겠죠. 흥, 그를 좋아한다고? 만약 내가 현실에서 풀만 먹어 비쩍 마르고 키만 껑충한 그런 남자를 만난다면, 지금껏 내가 고안해 낸 그 어떤 것보다 더 잔인한 수법으로 그를 죽이고 말 거예요."

로빈 업워드가 존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 그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예요! 현실의 스벤 예르손을 작가인 당신이 살해한다....... 당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쓰면 멋지겠는데요. 사후에 출판되는 것으로 하고요."

"말도 안 돼! 그 원고료는 어쩌고요? 살인 사건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내가 살아 있을 때 받고 싶단 말이에요."

"아, 그러신가요?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면박을 당한 희곡작가가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 부분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아마 실제로 크리스티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벨기에 출신의 다소 독특한 탐정을 설정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푸아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인가. 작가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라는 것은 때로는 업보처럼 느껴지기도 하나보다.

 

"네? 뭐라고요?"

올리버 부인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되물었다.

그녀는 잠시 그리운 집을 꿈꾸고 있었다. 이국적인 새와 나무들이 그려진 벽, 소나무로 만든 튼튼한 책상, 그녀가 아끼는 타자기, 향기로운 블랙커피, 곳곳에 놓인 사과....... 그 얼마나 거룩하고 고독한 행복이란 말인가. 작가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성채로부터 벗어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본래 작가들이란 수줍음 많고 사교성 없는 인간들로서, 스스로 친구를 만들어 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사회성을 벌충하는 법이었다.

 

아마 이 책을 쓸 때의 크리스티는 인생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가 아닐까 싶다. 아리아드네의 등장 비중이 높은 것도 그렇지만, 전체적인 소설 톤이 유머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수록 스스로 방어막을 세우고 뒤로 숨기 마련인데, 자신있게 앞에 등장하여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작가의 인생에서 이 때가 가장 평화롭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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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5 (완전판) - 장례식을 마치고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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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겠네. 자네는 자네 친구인 리처드 애버네티가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게지? 그 의심, 또는 추정은 단 한가지, 리처드 애버네티의 장례식에서 코라 랑스크네가 한 말에 근거를 두고 있고 말이야. 그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근거고 없지....... 그 다음 날 코라 랑스크네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네. 리처드 애버네티가 갑자기 죽은 건 사실이지만, 그를 돌보던 명망 높은 주치의는 사인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시신은 매장했나, 아니면 화장했나?"

"화장했네....... 본인의 요청에 따라."

"그래, 법률상 그렇지. 그렇다면 두 번째 의사가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했다는 뜻인데....... 뭐 그것 또한 이상 없이 절차 그대로였겠지. 따라서 본질적인 점, 즉 코라 랑스크네가 한 말을 살펴봐야 해. 자네는 그곳에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지. '하지만 오빠는 살해된 거잖아요, 안 그래요?'라고 말했다고?"

 

1953년에 쓰인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이다. 푸아로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영국이라는 나라는 큰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변화의 흐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노인들이 등장하고, 크리스티의 초기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발랄하고 솔직하지만 개인적이고 거침없는 젊은이들이 대거 등장한다. 끝까지 누가 범인인지 예측하기 힘들었던 소설이었고, 읽는 내내 몰입해서 읽었기에 크리스티의 소설 중 열 손 가락 안에 꼽히기는 충분한 것 같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게 하는 부분이 많았다. 크고 고풍스러운 대저택, 노쇠하지만 카리스마로 일가 친척을 지휘하는 거부, 그에게 순종하거나, 혹은 반발하는 친지들. 멀리 있다가 몇십년만에 만나게 되는 친지, 그리고 오랫동안 그 집안에서 봉사해온 늙은 집사. 거기에 타인과 가족을 구별해내지 못했다는 가장 큰 트릭까지.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푸아로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을 정도로 읽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도록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오히려 결말 부분에서는 <누명>과 살짝 닮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누명>이나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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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4 (완전판) - 백주의 악마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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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이 섬은 낭만적인 곳입니다. 태양은 평화롭게 빛나죠. 바다는 푸르고....... 하지만 브루스터 양, 명심하셔야 할 것은 태양 아래 모든 곳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푸아로가 말했다.

 

<백주의 악마>라는 제목이 시선을 확 끄는데, 원제는 Evil Under the Sun, 즉, '태양 아래 악마'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대체 백주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찾아봤더니 '환하게 밝은 낮'이라는 뜻이라고. 우리 나라에서는 분명히 잘 안 쓰는 단어라서 생경한데, 보통 이런 단어는 70년대 쯤, 외국 소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종종 등장하는 단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번역되는 책들의 경우는 실생활에서 잘 쓰는 단어를 사용하지, 이런 낯선 단어를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백주대낮이라고 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크리스티의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상당 부분이 기시감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여인 때문에 일어난 치정 사건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건의 핵심에서 비껴져 있다는 점에서는 <뮤스가의 살인>에 수록되었던 <로도스 섬의 삼각형>이 떠올랐고, 푸아로가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도중에 사건이 생겼다는 데에서는 <엔드하우스의 비극>이 연상되었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의 <동행>은 이 소설과 똑같은 트릭이 쓰였으며, 트릭의 핵심이 수영복이라는 점,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았던 남녀가 알고 보면 남자의 속임수였으며, 그 남자는 공범이자 애인인 다른 여자가 주변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는 점이 완전히 동일하다. 아마도 핵심 아이디어를 이 단편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보니 그러고보니 <나일 강의 죽음>과도 꽤 비슷한 부분이 있다. 피해자에게 남자를 뺐겼다는 이유로 가장 의심을 받지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여자.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익숙한 요소를 한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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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거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한은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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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이 넓게 떠다닌다.

거울이 양쪽으로 깨졌다.

"내게 저주가 내렸다."고

레이디 샬럿이 외쳤다.

-앨프레드 테니슨

 

추리 소설의 핵심은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이렇게 세 가지이다. 보통 '어떻게'에 대해서는 소설 초반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밝혀질 수 밖에 없는데, 일단 시신을 부검하게 되면 변사체가 아닌 이상 사인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보다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특히 누가, 왜 죽였는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심리적인 부분이 더 강하게 서술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첫번째 소설이 1887년에 나왔다. 마지막으로 셜록 홈즈가 나온 것은 1927년이다. 크리스티의 첫번째 소설이 1920년에 나왔고 마지막에 나온 소설이 1976년이다. 당연히 그 동안 과학 기술의 발달로 수사 기법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을 것이고, 사인을 알아내는 것은 점점 더 쉬워졌을 것이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후기로 갈수록 어떻게 살인이 이루어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왜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도,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1887년이면 아직 세계 최초의 영화가 나오기도 전이다. 물론 당시에도 사진은 있었지만, 그만큼 사진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며,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들처럼 용의자의 사진을 가지고 목격자들이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일은 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지문이 수사에 처음으로 사용된 때가 1892년이었다. 인간의 혈액형이 최초로 발견된 때는 1901년이다. 혈액형을 분석하는 방법이 좀 더 발달하고, 수사 기법에 응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보다 더 뒤일 것이다. 인류의 과학사를 되돌아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이 가장 밀도 있고, 널리 쓰일 수 있으며, 일반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연구 결과가 쏟아진 시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고를 가장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힘들어졌을 것이며, 범죄자에게 뛰어난 머리와 민첩한 행동이 갈수록 요구되었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CCTV나 통화 내역, SNS 내용만 살펴보아도 홈즈 시대의 소설들 속의 웬만한 사건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만큼 최근의 추리 소설가들은 사건 하나를 짜내는 것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크리스티가 전무후무한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는 사실은 자명할 것이다. 그녀는 추리 소설의 전성기를 완벽하게 누린 사람이니까.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앞세대의 추리 소설가들로부터 생겨난 추리 소설의 열광적인 독자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세계적으로 인터폴의 활약이 두드러지던 세계를 살았던 것도 아니니까. 타고난 재능이 그녀가 살고 있던 시대와 맞아떨어진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1962년에 나온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첫 소설이 나온 것은 1920년이고, 그녀가 사망한 것은 1976년이므로, 작가의 말년에 나온 소설이다. 마플 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이므로, 당시에도 젊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이 소설에서는 사람을 상주하게 하고 늘 도움을 받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의사의 권유이며, 마플 양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패딩턴발 4시 50분>을 읽으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었는데, 이 소설은 그보다도 5년 뒤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읽은 마플 양의 이야기 중 가장 뒤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녀의 친구인 밴트리 대령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것도 마음 아프고.

 

이 소설은 살인 동기를 알고 나면 매우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이야기가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는 것도 알고 나면 더 놀랍다.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더 믿기 어려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종종 확인할 때면,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무서운 존재이며,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깨달을 때면 무서워지기도 한다.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를 보고, 거기에 나온 이름을 검색해 보았는데, 그 이야기 자체는 물론 놀라웠지만, 소설을 읽기 전에 절대로 보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 만약 이 이야기를 온전히 크리스티가 생각해냈다면, 크리스티는 천재적이라고 불릴 기회를 한 번 더 가질 정도의,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완벽하게 크리스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크리스티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되었겠지만, 너무나 유명한 사람의 너무나 유명한 일화를 그대로 차용했기에,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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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승리자들 - 콜럼버스에서 마릴린 먼로까지 거꾸로 보는 인간 승리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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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두께는 어마어마하다. 참고한 문헌의 종류의 목록만 나열했는데 총 18쪽이며, 등장한 인물을 작은 글씨로 나열만 했는데 총 13쪽이다. 전체 701쪽, 이 두꺼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사 속에 기록된 승리자들은 어떻게 인류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는가, 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떤 것이든 재능은 있어야 하고, 그 재능이 발휘될 만한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충분히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람이 누락될 수도 있고, 길이 기억될 만한 사람은 아닌데 지금까지 이야기되는 사람이 있으며,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적은 뛰어날 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에디슨'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한국의 교육은 수많은 '에디슨'을 놓쳐버리고 있다는 말들도 많았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벤처 산업의 현황을 예로 들면서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크'가 등장하기 힘들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도 많다.

 

읽다 보면 수많은 예들에 압도당한다. 책 자체가 절대 어려운 내용은 아닌데, 모든 장에 최소 수십 명에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예를 다루고 있으며, 비슷한 내용이 조금씩 되풀이 되기 때문에 읽으면서 지치기도 한다. 솔직히 여기 실린 인물들의 절반만 가지고도 이보다 더 몰입도 있고 강한 인상의 책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하면 저자도 책 중반에서 스스로 중간 정리를 해 주었을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명성은 재능과 우연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산물이다. 대개 고약한 성격과 함께 나타나는 고도의 재능이 우연히 시공간의 은총을 입는 순간 가치 평가의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타나 자의적 기준에 따라 명성을 부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자격 있는 사람이 명성을 얻은 경우도 많지만,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명성을 얻은 경우는 훨씬 더 많으며, 또 재능은 있지만 나머지 요소들이 없어서 역사에 묻힌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1장). 쿠르트 투홀스키는 말한다. "중국에만 우리가 모르는 나폴레옹이 스무 명이나 있다. 에디슨도 여덟 명이나 있지만 특허권은 아무도 없다.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다른 것 말고도 행운까지 따랐다. 과거의 큰 휴지통에서 그의 시들이 우연히 맨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2. 앞의 테제에 가장 적합한 보기 가운데 하나가 아메리카의 발견자로 알려진 콜럼버스이다. 그의 최대 재능은 확고한 생각 하나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능력이었는데, 그는 고등 사기꾼의 솜씨와 인정사정없는 성정으로 역사 시계에 딱 맞는 시각에 딱 맞는 군주의 발 앞에 그 생각을 갖다 놓을 줄 알았다(2장과 3장).

 

3. 우리에게는 위대한 행위를 위대한 남자들에게 귀속시키려는 욕망이 있다. 우리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거나(셰익스피어) 거의 없더라도(호메로스), 혹은 그들이 집단적 성취의 얼굴마담이거나 막후 실력자의 복화술 인형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흉상에다 화환을 걸어 주길 좋아한다. 1914년 8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은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 참모장, 호프만 중령, 그나이제나우, 몰트케, 독일 병사 15만명, 독일 교사 1만 명, 독일 통신 기술자, 독일 철도원들인데, 이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힌덴부르크'라는 이름 하나만 거론하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면서 간편하고, 또 역사 서술도 쉬워진다. 게다가 바로 그런 이름이 힌덴부르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히틀러의 부상에도 도움이 되었다(4장).

 

4. 사람을 두고 위대하나도 말하는 것은 신화에 뿌리가 있다. 텔 같은 신화적 주인공들은 얼마 전까지도 실존 인물로 여겨졌다. 쇼페하우어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위대성의 척도로 대체 불가능성을 들었다. 물론 그리되면 세상의 모든 발견자와 발명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들을 위대성의 범주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분야별로 엇비슷하거나, 아니면 그가 아니라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대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는 하프너가 핵심적으로 잘 표현했다. "인간을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운동선수에 비유한다면 그 선수가 온 힘을 다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가 위대성이다.

 

5. 백과사전에 오르거나 노벨상을 받은 사람 중에 여성은 극히 적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능력과 명성 같은 개념들은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가치이고, 이 방면에서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남성들의 생각이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기록으로 표현될 수가 없어서 백과사전에 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적 의미의 능력을 보였을 때도 남성들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희박하다. 설사 여성이 그런 성공을 거머쥐었을 때도 역사가와 백과사전 편찬자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 즉 병성을 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6장).

 

6. 세상의 모든 중요한 발명들은 많은 사람이 서로의 이론이나 성과를 토대로 하거나 아니면 동시에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A가 B를 발명했다'는 식의 모든 진술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131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최소한 여덟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발견의 경우도 결코 더 일목요연하지 않다. 아메리카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유럽인이 누구인지, 북극에 처음 도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7장).

 

7. 헤겔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세계정신의 경영자라고 불렀고, 역사가 그들에게 미리 보여 준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태제를 감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계정신은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즉 세계정신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의 경영을 망쳐 버리는 눈먼 우연과 강력한 개인들의 힘이 그것이다.

 

8. 위대성은 도덕과 어떤 관계일까? 한편으로는 분명해 보인다. 스탈린과 히틀러, 마오쩌둥 같은 대량 학살자들에게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오는 지하에 누워 있을 때 "세계정신의 등대"라는 칭호를 받았고, 히틀러는 1974년 미국의 『타임』지가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정치 영역에서는 도덕과 부도덕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9장).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의심스러운 행태를 보였고, 처칠은 드레스덴의 무의미한 군사적 차괴에 책임이 있었다. 그 밖에 예술가들 중에도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악인들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은 명성의 사다리에서 맨 꼭대기에 올라가기가 무척 어렵다(10장).

 

9. 유다는 인간 사회의 척도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린 인물이다.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한 사람이 어떻게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조처한 사람이 아니던가? 클롭슈토크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이후 유다의 행위는(그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전제한다면) 더욱더 대담하게 해석되었다. 즉 후대에 사탄으로 평가받을 정말 어려운 역할을 떠맡은 예수의 동맹자이거나, 아니면 망설이는 예수에게 어서 메시아로 현현하라고 독려하는 인물로 해석된 것이다. 이런 모순적 해석들 속에서 이 책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이다. 더 이상 도덕적 평가는 없고, 살해당한 것은 분명 명성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카이사르에서부터 룩셈부르크를 거쳐 존 F.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11장).

 

10. 지금까지는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2부에서는 '천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위대성과 마찬가지로 천재의 개념도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에 이 개념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괴테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1775년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이렇게 기술했다. "천재라는 말은 일반적인 표어가 되어 버렸다. 어디를 가든 이 말을 자주 듣기 때문이데, 그만큼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것도 일상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천재의 증표로 주로 독창성이 거론되지만 이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천재는 불명확한 의미에다 화려하고 야단스럽게 포장한 말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이런 정의도 가능할지 모른다. 천재란 공중 줄타기를 하는 인류의 곡예사들이다(12장).

 

11. 천재들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기형적이거나 못생긴 사람이 많고, 대부분 육신의 병을 안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질병은 간질과 결핵이다. 천재와 질병 사이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관에 대해선 작품 창작을 위한 무자비한 육체적 찾취가 원인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조심스럽게 키운 순종 말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면역 결핍증이 원인이거나, 아니면 질병의 고통으로 인한 창작의 자극제 역할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어쨌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은 천재가 아니라 몸매 만드는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13장).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는 모차르트의 전기에서 이렇게 쓴다. "육체를 만드는 것이 정말 정신이라면, 위대한 정신이 육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을 필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2. 거의 모든 천재들이 건강 염려증과 우울증, 상처 난 영혼, 혹은 루소처럼 추적 망상증에 시달리거나, 고흐처럼 지독한 광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천재적 성취와 우울증, 정신병, 환각증의 관련은 플라톤 이래로 유명하다. 심리 분석가 아이슬러는 천재성이 현실 관련성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광기라고 했고, 벤은 "천재는 생산성 유발과 연결된 순수한 변종의 특정 형태"라고 밝혔다. 정신 의학자 크레치머는 발명가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공하지 못한 발명가를 사람들은 편집증 환자라고 부른다."(14장) 증거가 가장 충분하면서도 가장 충격적인 광기를 보인 사람은 니체였다(15장). 광기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행복한 상황일 경우 당사자의 내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불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재에게 경탄하는 사람들에게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13. 대부분의 위인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지극히 오만하고 비판에 과민하다. 이들은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 외에는 스스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새로운 이론을 관철하려는 철학자와 학자들에게는 오직 혼자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필요하다. 어떤 위인들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믿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을 앙연시했다. 하이네가 그랬고, 바그너와 마르크스가 그랬다(16장). 예술가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경향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준 이는 폴란드 소설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이다. 그는 1924년에 노벨상을 받았는데, 파리 주재 폴란드 대사가 그를 국립 도서관으로 안내했을 때 딱 한 문장만 말했다고 한다. "당장 이 책들을 전부 불태워 버리고 내 책들을 놔둘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14.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이루려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위인들의 삶은 대부분 근면함과 강철 같은 작업 규율이 특징을 이룬다. 거기다 작업 과정에서 고도의 효율성까지 보인 사람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수천 쪽의 메모를 모아 두고 활용하는 방법이 그렇다(17장). "문학으로 먹고사는 이는 균형을 잃은 사람이고, 엄청나게 큰 거위간은 아무리 먹음직스럽더라도 병든 거위를 전제로 한다."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자신의 단편 소설에서 한 말이다.

 

15. 연구자와 사상가, 철학자는 무엇보다 세 가지 능력에서 특출하다. 첫째,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놀라워하고 의아해한다. 둘째, 인식한 것들을 토대로 사고 체계를 세워 나갈 힘이 있다. 셋째, 적대적인 외부 환경으로부터 이 체계를 지키는 일에 강고한 의지를 보인다. 전형적인 보기가 코페르니쿠스와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였다(18장).

 

16. 창조적 예술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들의 착상이 어디서 솟구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신적인 영감이라고 빋은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가들이 무의식의 샘에서 창조의 착상을 길어 올리고 있다는 것에 다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프로이트는 예술가 자신의 무의식을, 융은 그보다 더 깊은 층, 그러니까 인류의 근원 상상과 근원 경험이 저장되어 있는 집단적 무의식 층을 창조의 샘으로 보았다. 무의식에서 양분을 공급받은 판타지가 예술 작품으로 태어나려면 통일적인 질서 원칙이 작용해야 한다. 그런 질서는 어느 정도까지 습득할 수 있고, 연습을 통해 발접할 수도 있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판타지와 강철처럼 차가운 논리를 생산적으로 잘 결합시킨 예술가가 포였다(19장).

 

17. 여런 방면에서 천재적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불가사의한 것을 느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E.T.A. 호프만, 괴테가 그랬다. 하지만 괴테 자신은 번다한 일들로 정력과 시간을 소모했음을 한탄했다. 시작은 해놓고 아무것도 제대로 끝내지 못할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을 많았던 사람은 다빈치였다(20장).

 

 

처음에는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고, 중반부터는 나는 위인이 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김이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제 와서 내가 위인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워낙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던 시절이 생각나면서 조금 씁쓸해졌다고 할까. 만약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이름이 역사의 한 쪽 구석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달콤한 슬픔, 혹은 희망 고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수없이 넘쳐나는 역사 속 승리자들의 예를 보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결국 우리가 죽고 나서 얼마나 우리의 이름이 뒤에 남겨질지는 내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지위도 아니며,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할 지라도 얼마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다.

 

이 책은 1993년에 출판되었다. 책에 실린 모든 예들을 위해 작가는 직접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간단히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할 내용을 위해 작가는 아마도 위인에 관한 모든 책을 다 꼼꼼히 살폈을 것이다. 그 결과물로 나온 이 책. 자주 들여다 볼 책은 절대 아니지만, 꼭 백과사전처럼 방대한 양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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