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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승리자들 - 콜럼버스에서 마릴린 먼로까지 거꾸로 보는 인간 승리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8월
평점 :
이 책의 두께는 어마어마하다. 참고한 문헌의 종류의 목록만 나열했는데 총 18쪽이며, 등장한 인물을 작은 글씨로 나열만 했는데 총 13쪽이다. 전체 701쪽, 이 두꺼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사 속에 기록된 승리자들은 어떻게 인류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는가, 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떤 것이든 재능은 있어야 하고, 그 재능이 발휘될 만한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충분히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람이 누락될 수도 있고, 길이 기억될 만한 사람은 아닌데 지금까지 이야기되는 사람이 있으며,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적은 뛰어날 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에디슨'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한국의 교육은 수많은 '에디슨'을 놓쳐버리고 있다는 말들도 많았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벤처 산업의 현황을 예로 들면서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크'가 등장하기 힘들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도 많다.
읽다 보면 수많은 예들에 압도당한다. 책 자체가 절대 어려운 내용은 아닌데, 모든 장에 최소 수십 명에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예를 다루고 있으며, 비슷한 내용이 조금씩 되풀이 되기 때문에 읽으면서 지치기도 한다. 솔직히 여기 실린 인물들의 절반만 가지고도 이보다 더 몰입도 있고 강한 인상의 책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하면 저자도 책 중반에서 스스로 중간 정리를 해 주었을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명성은 재능과 우연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산물이다. 대개 고약한 성격과 함께 나타나는 고도의 재능이 우연히 시공간의 은총을 입는 순간 가치 평가의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타나 자의적 기준에 따라 명성을 부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자격 있는 사람이 명성을 얻은 경우도 많지만,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명성을 얻은 경우는 훨씬 더 많으며, 또 재능은 있지만 나머지 요소들이 없어서 역사에 묻힌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1장). 쿠르트 투홀스키는 말한다. "중국에만 우리가 모르는 나폴레옹이 스무 명이나 있다. 에디슨도 여덟 명이나 있지만 특허권은 아무도 없다.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다른 것 말고도 행운까지 따랐다. 과거의 큰 휴지통에서 그의 시들이 우연히 맨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2. 앞의 테제에 가장 적합한 보기 가운데 하나가 아메리카의 발견자로 알려진 콜럼버스이다. 그의 최대 재능은 확고한 생각 하나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능력이었는데, 그는 고등 사기꾼의 솜씨와 인정사정없는 성정으로 역사 시계에 딱 맞는 시각에 딱 맞는 군주의 발 앞에 그 생각을 갖다 놓을 줄 알았다(2장과 3장).
3. 우리에게는 위대한 행위를 위대한 남자들에게 귀속시키려는 욕망이 있다. 우리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거나(셰익스피어) 거의 없더라도(호메로스), 혹은 그들이 집단적 성취의 얼굴마담이거나 막후 실력자의 복화술 인형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흉상에다 화환을 걸어 주길 좋아한다. 1914년 8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은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 참모장, 호프만 중령, 그나이제나우, 몰트케, 독일 병사 15만명, 독일 교사 1만 명, 독일 통신 기술자, 독일 철도원들인데, 이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힌덴부르크'라는 이름 하나만 거론하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면서 간편하고, 또 역사 서술도 쉬워진다. 게다가 바로 그런 이름이 힌덴부르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히틀러의 부상에도 도움이 되었다(4장).
4. 사람을 두고 위대하나도 말하는 것은 신화에 뿌리가 있다. 텔 같은 신화적 주인공들은 얼마 전까지도 실존 인물로 여겨졌다. 쇼페하우어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위대성의 척도로 대체 불가능성을 들었다. 물론 그리되면 세상의 모든 발견자와 발명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들을 위대성의 범주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분야별로 엇비슷하거나, 아니면 그가 아니라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대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는 하프너가 핵심적으로 잘 표현했다. "인간을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운동선수에 비유한다면 그 선수가 온 힘을 다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가 위대성이다.
5. 백과사전에 오르거나 노벨상을 받은 사람 중에 여성은 극히 적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능력과 명성 같은 개념들은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가치이고, 이 방면에서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남성들의 생각이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기록으로 표현될 수가 없어서 백과사전에 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적 의미의 능력을 보였을 때도 남성들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희박하다. 설사 여성이 그런 성공을 거머쥐었을 때도 역사가와 백과사전 편찬자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 즉 병성을 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6장).
6. 세상의 모든 중요한 발명들은 많은 사람이 서로의 이론이나 성과를 토대로 하거나 아니면 동시에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A가 B를 발명했다'는 식의 모든 진술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131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최소한 여덟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발견의 경우도 결코 더 일목요연하지 않다. 아메리카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유럽인이 누구인지, 북극에 처음 도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7장).
7. 헤겔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세계정신의 경영자라고 불렀고, 역사가 그들에게 미리 보여 준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태제를 감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계정신은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즉 세계정신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의 경영을 망쳐 버리는 눈먼 우연과 강력한 개인들의 힘이 그것이다.
8. 위대성은 도덕과 어떤 관계일까? 한편으로는 분명해 보인다. 스탈린과 히틀러, 마오쩌둥 같은 대량 학살자들에게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오는 지하에 누워 있을 때 "세계정신의 등대"라는 칭호를 받았고, 히틀러는 1974년 미국의 『타임』지가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정치 영역에서는 도덕과 부도덕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9장).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의심스러운 행태를 보였고, 처칠은 드레스덴의 무의미한 군사적 차괴에 책임이 있었다. 그 밖에 예술가들 중에도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악인들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은 명성의 사다리에서 맨 꼭대기에 올라가기가 무척 어렵다(10장).
9. 유다는 인간 사회의 척도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린 인물이다.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한 사람이 어떻게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조처한 사람이 아니던가? 클롭슈토크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이후 유다의 행위는(그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전제한다면) 더욱더 대담하게 해석되었다. 즉 후대에 사탄으로 평가받을 정말 어려운 역할을 떠맡은 예수의 동맹자이거나, 아니면 망설이는 예수에게 어서 메시아로 현현하라고 독려하는 인물로 해석된 것이다. 이런 모순적 해석들 속에서 이 책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이다. 더 이상 도덕적 평가는 없고, 살해당한 것은 분명 명성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카이사르에서부터 룩셈부르크를 거쳐 존 F.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11장).
10. 지금까지는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2부에서는 '천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위대성과 마찬가지로 천재의 개념도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에 이 개념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괴테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1775년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이렇게 기술했다. "천재라는 말은 일반적인 표어가 되어 버렸다. 어디를 가든 이 말을 자주 듣기 때문이데, 그만큼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것도 일상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천재의 증표로 주로 독창성이 거론되지만 이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천재는 불명확한 의미에다 화려하고 야단스럽게 포장한 말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이런 정의도 가능할지 모른다. 천재란 공중 줄타기를 하는 인류의 곡예사들이다(12장).
11. 천재들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기형적이거나 못생긴 사람이 많고, 대부분 육신의 병을 안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질병은 간질과 결핵이다. 천재와 질병 사이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관에 대해선 작품 창작을 위한 무자비한 육체적 찾취가 원인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조심스럽게 키운 순종 말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면역 결핍증이 원인이거나, 아니면 질병의 고통으로 인한 창작의 자극제 역할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어쨌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은 천재가 아니라 몸매 만드는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13장).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는 모차르트의 전기에서 이렇게 쓴다. "육체를 만드는 것이 정말 정신이라면, 위대한 정신이 육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을 필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2. 거의 모든 천재들이 건강 염려증과 우울증, 상처 난 영혼, 혹은 루소처럼 추적 망상증에 시달리거나, 고흐처럼 지독한 광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천재적 성취와 우울증, 정신병, 환각증의 관련은 플라톤 이래로 유명하다. 심리 분석가 아이슬러는 천재성이 현실 관련성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광기라고 했고, 벤은 "천재는 생산성 유발과 연결된 순수한 변종의 특정 형태"라고 밝혔다. 정신 의학자 크레치머는 발명가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공하지 못한 발명가를 사람들은 편집증 환자라고 부른다."(14장) 증거가 가장 충분하면서도 가장 충격적인 광기를 보인 사람은 니체였다(15장). 광기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행복한 상황일 경우 당사자의 내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불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재에게 경탄하는 사람들에게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13. 대부분의 위인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지극히 오만하고 비판에 과민하다. 이들은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 외에는 스스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새로운 이론을 관철하려는 철학자와 학자들에게는 오직 혼자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필요하다. 어떤 위인들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믿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을 앙연시했다. 하이네가 그랬고, 바그너와 마르크스가 그랬다(16장). 예술가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경향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준 이는 폴란드 소설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이다. 그는 1924년에 노벨상을 받았는데, 파리 주재 폴란드 대사가 그를 국립 도서관으로 안내했을 때 딱 한 문장만 말했다고 한다. "당장 이 책들을 전부 불태워 버리고 내 책들을 놔둘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14.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이루려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위인들의 삶은 대부분 근면함과 강철 같은 작업 규율이 특징을 이룬다. 거기다 작업 과정에서 고도의 효율성까지 보인 사람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수천 쪽의 메모를 모아 두고 활용하는 방법이 그렇다(17장). "문학으로 먹고사는 이는 균형을 잃은 사람이고, 엄청나게 큰 거위간은 아무리 먹음직스럽더라도 병든 거위를 전제로 한다."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자신의 단편 소설에서 한 말이다.
15. 연구자와 사상가, 철학자는 무엇보다 세 가지 능력에서 특출하다. 첫째,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놀라워하고 의아해한다. 둘째, 인식한 것들을 토대로 사고 체계를 세워 나갈 힘이 있다. 셋째, 적대적인 외부 환경으로부터 이 체계를 지키는 일에 강고한 의지를 보인다. 전형적인 보기가 코페르니쿠스와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였다(18장).
16. 창조적 예술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들의 착상이 어디서 솟구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신적인 영감이라고 빋은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가들이 무의식의 샘에서 창조의 착상을 길어 올리고 있다는 것에 다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프로이트는 예술가 자신의 무의식을, 융은 그보다 더 깊은 층, 그러니까 인류의 근원 상상과 근원 경험이 저장되어 있는 집단적 무의식 층을 창조의 샘으로 보았다. 무의식에서 양분을 공급받은 판타지가 예술 작품으로 태어나려면 통일적인 질서 원칙이 작용해야 한다. 그런 질서는 어느 정도까지 습득할 수 있고, 연습을 통해 발접할 수도 있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판타지와 강철처럼 차가운 논리를 생산적으로 잘 결합시킨 예술가가 포였다(19장).
17. 여런 방면에서 천재적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불가사의한 것을 느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E.T.A. 호프만, 괴테가 그랬다. 하지만 괴테 자신은 번다한 일들로 정력과 시간을 소모했음을 한탄했다. 시작은 해놓고 아무것도 제대로 끝내지 못할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을 많았던 사람은 다빈치였다(20장).
처음에는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고, 중반부터는 나는 위인이 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김이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제 와서 내가 위인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워낙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던 시절이 생각나면서 조금 씁쓸해졌다고 할까. 만약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이름이 역사의 한 쪽 구석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달콤한 슬픔, 혹은 희망 고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수없이 넘쳐나는 역사 속 승리자들의 예를 보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결국 우리가 죽고 나서 얼마나 우리의 이름이 뒤에 남겨질지는 내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지위도 아니며,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할 지라도 얼마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다.
이 책은 1993년에 출판되었다. 책에 실린 모든 예들을 위해 작가는 직접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간단히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할 내용을 위해 작가는 아마도 위인에 관한 모든 책을 다 꼼꼼히 살폈을 것이다. 그 결과물로 나온 이 책. 자주 들여다 볼 책은 절대 아니지만, 꼭 백과사전처럼 방대한 양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