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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거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한은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평점 :
거미줄이 넓게 떠다닌다.
거울이 양쪽으로 깨졌다.
"내게 저주가 내렸다."고
레이디 샬럿이 외쳤다.
-앨프레드 테니슨
추리 소설의 핵심은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이렇게 세 가지이다. 보통 '어떻게'에 대해서는 소설 초반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밝혀질 수 밖에 없는데, 일단 시신을 부검하게 되면 변사체가 아닌 이상 사인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보다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특히 누가, 왜 죽였는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심리적인 부분이 더 강하게 서술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첫번째 소설이 1887년에 나왔다. 마지막으로 셜록 홈즈가 나온 것은 1927년이다. 크리스티의 첫번째 소설이 1920년에 나왔고 마지막에 나온 소설이 1976년이다. 당연히 그 동안 과학 기술의 발달로 수사 기법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을 것이고, 사인을 알아내는 것은 점점 더 쉬워졌을 것이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후기로 갈수록 어떻게 살인이 이루어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왜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도,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1887년이면 아직 세계 최초의 영화가 나오기도 전이다. 물론 당시에도 사진은 있었지만, 그만큼 사진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며,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들처럼 용의자의 사진을 가지고 목격자들이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일은 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지문이 수사에 처음으로 사용된 때가 1892년이었다. 인간의 혈액형이 최초로 발견된 때는 1901년이다. 혈액형을 분석하는 방법이 좀 더 발달하고, 수사 기법에 응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보다 더 뒤일 것이다. 인류의 과학사를 되돌아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이 가장 밀도 있고, 널리 쓰일 수 있으며, 일반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연구 결과가 쏟아진 시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고를 가장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힘들어졌을 것이며, 범죄자에게 뛰어난 머리와 민첩한 행동이 갈수록 요구되었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CCTV나 통화 내역, SNS 내용만 살펴보아도 홈즈 시대의 소설들 속의 웬만한 사건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만큼 최근의 추리 소설가들은 사건 하나를 짜내는 것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크리스티가 전무후무한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는 사실은 자명할 것이다. 그녀는 추리 소설의 전성기를 완벽하게 누린 사람이니까.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앞세대의 추리 소설가들로부터 생겨난 추리 소설의 열광적인 독자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세계적으로 인터폴의 활약이 두드러지던 세계를 살았던 것도 아니니까. 타고난 재능이 그녀가 살고 있던 시대와 맞아떨어진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1962년에 나온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첫 소설이 나온 것은 1920년이고, 그녀가 사망한 것은 1976년이므로, 작가의 말년에 나온 소설이다. 마플 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이므로, 당시에도 젊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이 소설에서는 사람을 상주하게 하고 늘 도움을 받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의사의 권유이며, 마플 양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패딩턴발 4시 50분>을 읽으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었는데, 이 소설은 그보다도 5년 뒤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읽은 마플 양의 이야기 중 가장 뒤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녀의 친구인 밴트리 대령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것도 마음 아프고.
이 소설은 살인 동기를 알고 나면 매우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이야기가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는 것도 알고 나면 더 놀랍다.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더 믿기 어려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종종 확인할 때면,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무서운 존재이며,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깨달을 때면 무서워지기도 한다.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를 보고, 거기에 나온 이름을 검색해 보았는데, 그 이야기 자체는 물론 놀라웠지만, 소설을 읽기 전에 절대로 보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 만약 이 이야기를 온전히 크리스티가 생각해냈다면, 크리스티는 천재적이라고 불릴 기회를 한 번 더 가질 정도의,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완벽하게 크리스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크리스티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되었겠지만, 너무나 유명한 사람의 너무나 유명한 일화를 그대로 차용했기에,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줄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