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손가락의 아픔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홍현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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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와 터펜스는 잘 있나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죠?' 라며 내게 안부 편지를 보내온, 영국과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자에게 이 책을 바친다. 여러분 모두에게 안부를 전하며 토미, 터펜스와 즐거운 해후를 나누길 바란다. 더 늙긴 했지만, 영혼은 조금도 시들지 않은 이 부부와!

 

애거서 크리스티

 

1968년에 나온 이 소설은 토미와 터펜스가 나오는 네 번째 책이다. 20대 초반의 친구였던 <비밀 결사>가 1922년, 서른 살 전후였던 <부부 탐정>이 1929년, 장성한 1남 1녀를 둔 중년이었던 <N 또는 M>이 1941년. 정확하지는 않지만 둘 다 확실히 60은 넘었을 이 소설에서는 자식들마저 결혼하고 손주까지 본 것으로 나온다. 아마 크리스티 조차도 이 한 쌍을 자신의 소설에서 오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 부부는 이 소설 이후 <운명의 문>이라는 1973년 소설로 한 번 더 등장한다.

 

엄지가 쑤시는 걸 보니, 뭔가 불길한 일이 닥치려나 보다.

-셰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크리스티는 종종 셰익스피어의 글에서 제목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 <슬픈 사이프러스>도 그랬고, <밀물을 타고>도 그랬다.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테니슨의 글에서 인용한 <깨어진 거울>도 있다. 이 제목들은 사실 이 소설의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약간 어거지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다른 소설에 갖다 붙이거나 서로 바꾸어 제목을 붙여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엄지손가락'이라는 것이 큰 복선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요양원에 있던 토미의 친척이 사망한다. 친척이 머물던 방에 있던 그림은, 부부가 3주 전에 친척을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보지 못했던 그림이다. 친척이 아니라, 같은 요양원에 있던 노부인이 주었다는 그림. 터펜스는 그 노부인과 3주전 방문했을 때 대화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다시 한 번 노부인을 만나려고 하나 얼마 전 친척이 데려갔다는 말을 듣는다.

 

"우스워요.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이 그림을 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이상한 게 이 풍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그림 속의 집이 내가 본 어떤 집과 닮았을 수도 있고. 어쨌든 이 집이 생생히 기억나요....... 우스운 건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모른다는 거지만."

 

그림을 선물했다는 노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녀를 데려갔다는 친척의 주소는 엉터리였다. 3주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이 이상했지만, 단순히 노망으로 여겼던 터펜스는 이상한 것을 감지한다.

 

"랭커스터 부인도 떠나셨다고 들었어요."

"네, 친척 분이 데려가셨죠.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는데, 안되셨어요."

"그분이 제게 접견실에 있는 벽난로 얘기를 하셨었는데,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그분은 이야깃거리를 많이 갖고 계세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또 자신만 아는 비밀까지......."

"어떤 아이에 대한 내용도 있엇어요. 납치된 아이인지, 살해된 아이인지......."

"노인들은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꾸며내세요. 텔레비전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그런 노인들과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피곤할 것 같은데."

"아뇨, 전 노인들을 좋아해요. 아니면 제가 왜 노인 돌보는 일을 자청했겠어요."

"여기 계신지는 오래 되셨나요?"

"일 년 반 정도요....... 다음 달에 떠나긴 하지만요."

오키프 간호사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대답했다.

"왜죠?"

처음으로 오키프 간호사가 뭔가 감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글쎄요, 베레스퍼드 부인, 누구나 변화가 필요한 법이라......."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열정만큼은 청춘인 터펜스는 그림 속의 집을 직접 찾아나선다. 어디서 보았을까, 온 기억을 총동원해내 떠올린 그녀는 3년 전, 대녀의 딸이 다니는 학교로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곳을 보았던 사실을 기억해낸다. 주인은 있을 테지만, 아무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집. 터펜스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밖으로 나가 수색을 했어요. 아이의 시체를 금방 찾은 적도 잇고, 몇 주씩 찾지 못한 적도 잇엇죠. 어떨 때는 우리가 이미 수색을 끝낸 아이의 집 근처에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더랬어요. 미치광이의 짓이 분명해요. 끔찍, 끔찍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다 쏴 버려야 해요. 그 인간드로 똑같이 목 졸라 죽여야 한다고요. 누가 내게 그런 기회를 준다면, 나라도 직접 그런 인간들을 죽여 버리고 싶어요. 어린아이를 덮치고 죽이는 더러운 인간이라니. 그런 인간들을 정신 병원에 넣고 가정처럼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치료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그 인간들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정신병원에서 기어나오죠. 치료가 되었다면서 집으로 보내는 거예요. 노퍽 어딘 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죠. 거기 사는 여동생이 얘기해 줫는데,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 뒤에 똑같은 짓을 저지른 남자가 있었대요. 미친놈들이죠. 의사들도 똑같아요. 치료되지도 않은 사람을 다 나았다고 하니까요."

 

친절하지만 어딘가 묘한 느낌을 주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마을의 온갖 이야기들을 들으며 다니던 터펜스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다. 그러고 보니, 이 부부는 꼭 번갈아가면서 작품마다 뒤통수를 맞고 쓰러지는데, 볼 때마다 기절할 정도로 세게 머리를 맞는데 어떻게 나중에 문제가 전혀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부 중 한쪽이 머리를 맞고 실종되면, 다른 한 쪽이 찾아다니는 구성을 매번 쓰는 작가가 좀 게으르다는 생각도 들고.

 

돌아오겠다는 아내는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는 가운데, 요양원의 의사가 토미를 찾아온다. 얼마 전에 사망한 요양원의 한 노인의 부검 결과 다량의 모르핀이 검출된 것이다. 원래 모르핀을 투여받는 환자가 아니었기에, 어떤 사건이 있음을 짐작한 의사가 과거 정보부에서 일했던 토미에게 상의한 것이다. 토미는 요양원을 떠나 종적이 묘연한 노부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부부의 활약의 내용은 늘 국가와 국가를 넘나드는 첩보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1차세계대전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의 시간이 겹쳐 있기 때문에, 외국의 스파이, 영국의 고위직이 등장하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뭔가 이야기가 크게 될 것 같다고 주저앉아 버린 느낌이다. 물론 종전후 꽤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두 주인공의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외딴 곳에 있는 주인을 모르는 저택,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변호사의 범죄행위, 이미 사망한 유명 화가의 그림과 미망인, 연속되는 살인과 실종 등 재미있는 요소를 그냥 나열만 하고 끝내버린 느낌이랄까. 사건이 밝혀진 직후, 그 전말은 좀 허무하기도 했다. 단순히 광기로만 모든 범죄의 이유를 설명해 버린다면, 왠지 반칙 같은 느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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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기억한다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근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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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 양은 기억력이 참 좋다니까. 그래서 걔들이 그랬잖아. 하나는 아리아드네 양을 '코끼리 여사'라고 부르고, 또 하나는 '백조 여사'라고 불렀던 집에 놀러오던 남자애 둘 말이우. 그러면 아리아드네 양은 그 남자애를 등에 태우고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긴 코로 물건을 집어 올리는 시늉을 했어."

"많은 것들을 기억하시는군요. 그렇죠, 유모?"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아, 코끼리는 잊지 않는다잖아. 옛날 속담에 말이야."

매첨 부인이 말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니 제목이 참 특이했다. 혹시 <벙어리 목격자>와 같은 작품이 아닐까, 사건 현장에 코끼리가 있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영국에는 코끼리와 관련된 속담이 내려오는 것 같은데, 코끼리가 기억이 좋다는 게 그 내용인가 보다. 우리나라 속담에 '코가 개코다' 이런 것과 비슷한 류 같은데, 아마도 오랫동안 인도 지방을 식민지로 다스렸던 나라였기에 나온 이야기인가보다.

 

여기서 코끼리란 아리아드네 올리버 부인. 푸아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소설 첫부분부터 끝까지 전부 아리아드네가 책임지며 푸아로는 약간의 도움만 줄 뿐이다. 아리아드네의 캐릭터 때문인지 그녀가 등장하면 늘 소설의 톤이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분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아요."

실리아는 주저하는 어조로 말했다.

에르퀼 푸아로는 '제 이름을 안 달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라고 단호히 말하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참았다. 과거에야 그 말이 사실이었겠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에르퀼 푸아로의 이름을 들어보고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교회의 묘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2년에 나온 소설. 위키피디아의 크리스티 소설 목록에 따르면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부터 네 번째 소설이다. 중간 중간 다른 필명을 가지고 소설을 내기도 했고, 단편도 냈지만, 어쨌든 장편의 발표 시기를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가 또 한 번 느껴지는 부분이다. 워낙 오랫동안 글을 쓰는 작가이다보니 어느 정도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1942년에 출판된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유사하다. 이미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사망한 어머니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찾아온 딸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아들의 결혼 상대의 부모가 의문사한 것에 대해 알려달라며 찾아온 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사실 소설 속 사건 경위에 대해서는 빨리 눈치챌 수 있는 편이다. 네 개씩이나 되는 가발,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크리스티의 소설답지 않게 쉽게 풀려버린다. 더구나 당시 어렸던 딸이 사건 전후로 외국에서 생활해 정확한 앞뒤 사정을 알기 힘들다는 것과, 이미 십여년 전 끝나버린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계기가 그 딸의 결혼이라는 것, 또 그 딸의 어머니가 자신의 여자 형제를 보호하고자 했던 마음이 이 사건의 뒤에 있으며 그 이유는 다른 한 자매의 소중한 부분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까지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너무나 흡사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가의 나이가 들어서 예리함이 둔해진 탓일까. 이보다 뒤에 나온 <커튼>은 물론 훌륭하지만, 사실 그 작품은 수십 년 전 작가가 젊은 시절 써 놓은 작품을 훨씬 뒤에 출판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소설 전체적으로 팽팽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70년대에 나온 다른 소설들을 읽어 보면 어떨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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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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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소령님이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본 게 아닌가 싶어요. 소령님의 얼굴이 아주 붉어지더니 그 스냅 사진을 황급히 지갑에 도로 쑤셔 넣고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거든요."

"누구를 보았기에?"

"나도 그것을 아주 많이 생각해 보았답니다. 나는 내 방갈로 밖에 앉아 있었고,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엇어요. 그리고...... 누구를 보았는지 내 오른쪽 어깨 너머를 본 거예요."

 

이 책의 원제는 A Caribbean Mystery이다. 캐리비안의 비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활동하는 바로 그 무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다룬 책이다. 

 

"만약 다른 살인 계획이 있었다고 가정해 봐요. 팔그레이브 소령님이 말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의심쩍은 상황에서 아내가 죽은 남자 이야기요.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이 일어났어요. 남자의 이름은 달랐지만 아내는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고, 그 이야기를 한 의사는 그가 이름은 바꾸었어도 같은 남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지요. 자, 그러면 이 살인자가 그런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살인자일 수도 있다는 건 아시겠죠?"

"욕조 속의 신부 사건의 스미스 같은 자들 이야기군. 그래요."

"내가 이해하는 한은, 그리고 내가 듣고 읽은 것에 따르면 이런 사악한 일을 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간 사람은 슬프게도 기가 살아난답니다. 그는 그런 일이 쉽다고, 또 자기가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 일을 되풀이해요. 그리고 결국은 말씀하신 욕조 속의 신부 사건의 스미스처럼 그것이 습관이 된답니다. 매번 다른 장소에서 이름을 바꿔 가며 일을 벌이지요. 하지만 범죄 자체는 아주 비슷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렇지?"

라피엘 씨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마플 양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만약 상황이 그런 데다가 이...... 이 사람이 여기서 또 한 명의 아내를 없애기 위한 살인 준비를 전부 마쳤다면, 그리고 이런 범죄가 서너 번 벌어졌다면 소령님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죠. 살인자는 조금이라도 비슷하다는 소리가 나오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스미스도 그래서 붙잡혔잖아요. 기억하시죠? 범죄 상황이 어떤 사람의 주의를 끌었고, 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건의 신문 스크랩과 비교했지요. 이제 아시겠죠? 만약 이 사악한 사람이 범죄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곧 저지를 참이었다면, 팔그레이브 소령님이 그 이야기를 말하고 스냅 사진을 여기저기 보여 주면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마플 양은 지금 휴양을 간 상태다. 다정하고 능력 있는 조카 레이먼드의 도움으로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다. 지루할 정도로 한가로운 이 곳에서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음, 《타임》에서 내 부고를 읽고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을 런던에서 대략 대여섯 명은 추릴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은 내 죽음을 앞당기려고 무슨 짓을 저지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을 거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겠소? 나는 조만간 죽을 텐데. 사실 그 버러지...... 그 악당들은 내가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걸 보고 무척 놀랄 거요. 의사들도 놀라고."

"당신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이에요."

마플 양이 말했다.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라피엘 씨가 말했다. 마플 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삶은 잃어버릴 것 같을 때 더 살 가치가 있고, 흥미로 가득 차게 되지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답니다. 젊고 강하고 건강할 때, 남은 시간이 당신 앞에 길게 뻗어 있을 때는 사는 것이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아요. 사랑의 절망 떄문에, 때로는 과도한 불안과 초조 때문에 자살하는 건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죠. 나이 든 사람들은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흥미로운지 알고 있답니다."

라피엘 씨가 코웃음을 쳤다.

"하! 한 쌍의 늙은이들이 잘도 떠들어 대고 있구먼."

 

휴양지에서 만난 라피엘 씨와 마플 양의 대화다. 이 부분이 재미있었다. 1964년에 나온 이 소설은 크리스티에게도 말년에 쓴 소설이지만, 소설 속 마플 양 입장에서도 상당한 노년 시기이다. 두 노인의 날카로운 대화가 재미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불행한 사연을 가진 남자에게 쉽게 빠져 버리지.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이해해 주는 여자뿐이라고 빋고 일단 자기와 결혼하면 기운을 내고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오. 그렇지만 그런 남자들은 절대로 그러지 못하지. 어쨌건 그녀의 성에 안 차는 남편은 다행히 죽었소. 어느 날 밤 파티에서 너무 술을 많이 마시소 버스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하더군. 에스터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딸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하던 비서 일을 다시 해야 했소, 나하고는 5년을 같이 지냈지.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해 두었소. 내가 죽어 봤자 유산 같은 건 바랄 수도 없을 거라고.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주 많은 월급을 주었고, 매년 그 월급의 4분의 1씩 올려 주고 있소. 아무리 품위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이란 믿을 것이 아니라오....... 그래서 나는 에스터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소. 내가 죽어 봣자 그녀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이오."

 

라피엘 씨의 성격이 어떤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쓸데없이 사건을 꼬지 않고 명확하게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여기서 모호하게 흘렀더라면, 실재의 사건은 다른 관점에서 존재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익숙한 패턴으로 흘러갔을 텐데, 애시당초 이 부분에서 차단해버린다. 즉, 초반의 팔그레이브스 경의 살인이 맥거핀이 아니라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마플 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든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고 쉴 만한 한숨이었다. 에스터에게 부족한 것은 마플 양의 생활 반경에서는 아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나한테는 그다지 매력이 없어.', '섹시하지 않아.', '눈매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걸.' 금발 머리, 멋진 피부색, 밤색 눈, 훌륭한 몸매, 쾌활한 미소를 소유하고 있지만 남자가 거리에서 머리를 돌리게끔 만드는 그 무엇이 없었다.

"그녀는 재혼해야 해요."

마플 양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물론 다시 해야지. 그녀는 아주 좋은 아내가 될거야."

 

이 부분은 나중에 복선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대체로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이렇게 언급되는 여주인공은 꼭 로맨스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그 익숙한 공식이 배반된다.

 

"누가 이런 것을 그녀에게 주었지요?"

"뉴욕의 의사예요. 몰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알겠습니다. 최근 우리 의사들이 이런 약을 마음대로 내준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잠을 못 자는 젊은 여자에게 양을 세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요. 아니면 일어나서 비스킷을 먹거나 편지를 한두 통 써 보고 도로 침대로 가라고도 하지 않죠. 요즘 사람들은 당장 치료하는 법을 요구하니까요. 때로 나는 우리가 그런 치료법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유감이라오. 인생에서 어떤 일들은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말이오. 우는 것을 그치게 하려고 애기 입에 고무 젖꼭지를 밀어 넣는 거야 괜찮지요. 하지만 그런 걸 일생 동안 계속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로맨스로 성급히 마무리되거나, 살인자의 퇴장이나 마지막 변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어쩌면 크리스티 소설 전체에서 손꼽힐 만한 캐릭터 중 하나로 마무리된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되었을 대 에스터 월터스만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플 양은 억지로 작별 인사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라피엘 씨가 마지막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앗다.

"아베 카이사르, 노스 모리투리 테 살루타무스.(황제 만세, 죽을 운명의 우리들이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이 시합 전에 했던 말-옮긴이)."

"제가 라틴 어를 잘 몰라서 유감이네요."

"하지만 이 말은 무슨 뜻인지 알지요?"

"예."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활주로 위로 걸어가 비행기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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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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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은 다 읽고 나면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은 법이다. 함께 책을 읽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든지, 아니면 나 혼자 곰곰히 생각을 정리해 글로 요약하든지,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 책을 다룬 다른 서평을 찾아보든지.

 

그러나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괜시리 먹먹해져서 말로 하는 순간 왠지 나의 이 감정들이 발화되어 날아갈 것만 같아서, 묵직한 그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 그저 조용히 이 상태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그런 소설도 있다.

 

명백히 이 소설은 후자다.

 

이 책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유명한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 들었을 때 애거서 크리스티를 잘못 발음한 것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 3부작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애거서의 추리소설보다 아고타의 소설이 훨신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유명한 철학자가 이 책을 높게 평가한다고 해서 나까지 덩달아 이 책이 좋을 이유는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서, 대중적인 추리 소설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그녀가 이 책의 작가에 비해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지젝 또한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훌륭하다. 비슷한 이름의 유명 작가, 이 책을 언급하는 유명 철학자의 예를 들어가며 이 책의 뛰어남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묵직한 제목, 총 560쪽에 달하는 두께를 보고 내가 과연 이 책을 지치지 않고 다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결과는 기우였다. 이런 책이 좋다. 묵직한 주제를 가장 쉽고 간결하게 풀어내는 소설. 절대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루지만, 언제나 그 출발과 끝은 개인에서 시작되고 개인으로 귀결되는 소설.

 

알고 보니 이 책은 각각 1986년, 1988년, 1991년에 나온 세 소설을 합본한 것이라고 한다. 애초에 작가는 '커다란 노트', '증거', '세 번째 거짓말'이라는 소설을 2~3년 씩 시차를 두고 발표하였다. 즉, 이 책의 1부인 '비밀 노트', 2부인 '타인의 증거', 3부인 '50년간의 고독'은 사실 따로 따로 발표된 독립된 소설로, 전부 연결되는 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따로 따로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소설이다. 물론 각각 읽는 것보다 한꺼번에 읽는 것이 훨씬 좋기 떄문에 합본해서 출판한 출판사의 결정은 현명해 보이며, 만약 애초에 작가가 처음부터 전체적인 이야기를 3부로 구성하여 이런식으로 썼더라면 그야말로 '천재적인 작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첫번째 소설을 썼을 때 자신은 후속작을 쓸 계획이 없었다고 했으니까.

 

일단 재미로만 따지면 1부>2부>3부 순서이다. 1부는 굉장히 독창적이며, 다소 충격적이다. 한 장은 최대 2~3쪽 정도로, 재미있는 것은 필요없는 묘사는 극히 제한했는데도 책 속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2부와 3부도 충분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다룬 다른 소설들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어쩌면 작가 자신에게는 다행이었을 것이다. 1부 덕분에 2부, 3부가 나올 수 있었으니까. 비록 재미는 떨어질지라도 이 소설은 2부, 3부까지 나와야 완전해지는 것 같다. 1부의 독창성과 재미도 2, 3 부가 있어서 돋보인다고 생각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파이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과 허구의 모호함, 그리고 생존하려면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현실을 위해 허구를 만들어냈다는 것, 과연 실재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1부에서는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나온다. 늘 '우리'로 등장하는 그들은 1부 전체에서 단 한번도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 때문에 도시의 부모를 떠나 시골의 할머니에게 맡겨진 그들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아이다운 잔인함과 위악함으로 위장한 생존 본능으로 살아간다. 늘 함꼐였기에, 그래서 늘 '우리'로 등장했던 그들은 1부의 마지막에서 한 명은 국경을 넘고, 한 명은 죽은 할머니의 집에 남으면서 처음으로 분리되어 존재하게 된다.

 

2부에서는 할머니의 집에 남아 있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이제 아이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쌍둥이의 한 쪽인 '루카스'를 비롯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이름을 부여받는다. 1부에서 모든 인물이 이름 없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소 우화적인, 마치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잠자기 전 아이들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전래 동화 같았던 느낌이 들었던 반면에, 2부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이름을 부여받으며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방황하는 야스민, 남편의 억울한 죽음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사서 클라라, 책을 쓰겠다는 꿈을 가진 채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서점 주인 빅토르, 출생의 비밀을 모르는 영리하지만 불구인 소년 마티아스, 미남이고 지적이지만 동성연애자인 공산당 간부 페테르. 이 중 한 명을 주인공으로 삼아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상황은 구체적이며, 또한 평범하지 않다. '루카스' 또한 마찬가지. 마치 실존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던 '우리' 중 하나인 그는, 1부에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던 그 아이는 2부에서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실재적인 어른으로 변모한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나치 협력국으로서 패전 상태를 맞았고, 종전 후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졌으며, 이후 수많은 시위와 운동을 거쳐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서기까지 혼란한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마지막에 국경을 넘어서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던 쌍둥이의 한 쪽인 클라우스가 등장한다. 

 

3부에서는 50년이 흐른 후, 헝가리에 입국한 클라우스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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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부랑배! 조무래기! 똥고집! 불결한 놈! 돼지새끼! 깡패! 썩어문드러질 놈! 고얀 놈! 악독한 놈! 살인귀의 종자!"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귀가 윙윙거리고, 눈이 따갑고, 무릎이 후들거린다.

우리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히거나, 떨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고 싶엇다.

우리는 부엌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들을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점점 심한 말을.

하나가 말했다.

"더러운 놈! 똥구멍 같은 놈!"

다른 하나가 말한다.

"얼간이! 추잡한 놈!"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게 될 때까지 계속했다.

우리는 매일 30분씩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고 나서, 거리로 바람을 쐬러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떡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너희만 사랑할 거야...... 영원히...... 너희는 내 인생의 전부야......."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외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서점에 나가 카운터 앞에 앉았지. 손님은 한 사람도 없고, 아직 여름이었거든, 학교는 방학 중이고. 그러니 책이고 뭐고 필요한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엇지. 거기 앉아서, 책꽂이의 책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누나가 말했던 내 책이 떠올랐어. 내가 젊은 시절에 구상했던 내 책 말이야. 나는 작가가 되어서 책을 쓰고 싶었거든. 그건 내 젊은 시절의 꿈이었어. 누나와 나는 종종 그 꿈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누나는 나를 믿었고, 나도 나 자신을 믿었는데, 결국 나는 책을 쓰겠다던 꿈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어.
나는 이제 쉰 살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책 한 권쯤은 쓸 수 있을 거야. 몇 권 더 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이곳에 남아 있으면, 나는 영영 책을 못 쓸 걸세. 나의 유일한 희망은 집과 서점을 팔고 누나 집으로 돌아가는 거라네. 누나는 내가 담배나 술을 못 하게 말릴 것이고, 우리는 건전한 생활을 할 것이고, 누나는 일을 열심히 하겠지. 나는 일단 알코올 중독과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면 내 책을 쓰는 일밖에 할 일도 없을 테고. 자네도 책을 한 권 쓰게. 누구에 대해서인지,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글을 쓰게. 어린 시절부터 자네는 종이와 연필과 노트들을 열심히 사갔지."

 

"자네는 내가 우리 집 우리 방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낀 행복을 이해 못 할 걸세. 그리고 주디트를 도와주는 일도 물론 행복이지. 그녀도 고생을 많이 한 여자야. 남편은 전쟁 통에 실종되고, 그녀 자신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지옥의 문턱에까지 갔었제. 이건 비유법을 쓴 게 아니야. 실제로 수용소 건물 문 뒤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네. 인간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인간이 피워놓은 불이었다네."

루카스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저도 알아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요, 바로 이 도시에서."

"자네는 아직 어렸을 텐데."

"저는 물론 아이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처음에는 내가 그녀 때문에 이곳에 오곤 했는데, 이제는 주디트, 살아 있는 여인 때문에 이곳에 오네. 자네가 보기엔 우습겠지, 루카스, 하지만 난 주디트를 사랑해. 자기 자식도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쏟는 그녀의 사랑, 은혜, 힘을 사랑하네."

루카스가 말했다.

"하나도 우습지 않아요."

"내 나이를 생각해도 말인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질만이 중요해요.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많은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죽은 남편을 기다리며 울고 있어요. 하지만 노인께서 방금 말했듯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있지요.'"

불면증 환자는 눈을 뜨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희미해지고, 줄어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나는 여기에 아이를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어요. 더구나 밤에. 걔는 밤을 무서워해요. 아직 너무 어리거든요."

"아니야, 지금은, 이제 무섭지 않을 거야. 가세, 루카스."

루카스는 일어나면서도 무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애를 자기 엄마와 함께 떠나도록 내버려뒀어야 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은 욕심에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어요."

페테르가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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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작가는 1936년에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헝가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전쟁에 동원되었고, 작가의 오빠와 남동생은 자유롭게 쏘다녔는데 그 시절의 상당 수 일화가 그대로 쓰이기도 하고, 작가가 유난히 좋아했던 오빠는 쌍둥이 형제의 모티브가 되었다. 전쟁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어른들은 힘들었겠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렸기에 그 시절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성장하고 난 이후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열네 살 때 기숙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좋아했던 오빠와 떨어져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열여덟 살에 자신의 역사 선생과 결혼했고, 스무 살에 아이를 낳았다. 1956년 소련이 헝가리로 들어오자, 반체제 운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갓난아기를 데리고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했다. 친구도 친척도 없는 곳에서 난민으로서 철저한 외로움과 궁핍한 생활을 겪어야 했으며,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헝가리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이혼 후 대학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웠고, 재혼도 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11년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작가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이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적인 요소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았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잔혹하고 쓸쓸한 쌍둥이의 생애, 그리고 그만큼 혹독한 시절을 겪었을 작가의 생애. 개인적인 불행은 작가에게는 엄청난 자산이지만, 과연 나에게 그런 삶이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자신이 없다는 쪽에 좀 더 가까웠다.

 

전쟁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인간의 본성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는 것 자체가 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살기 위해 상상 이상으로 잔인해지기도 하며, 의외의 상황에서 전혀 상관없는 남을 돕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악의 문제는 단순하게 구분되거나 판단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며, 전쟁이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또 삶이란 어디까지 가혹해질 수 있는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한편으로 고요히 가라앉는 것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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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들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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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마시 양, 이번 사건은 아주 특이합니다.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요 사항들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틀렸다면 정정해 주세요. 펩마시 양은 오늘 만나기로 한 방문객도 없고, 보험에 관한 문의를 하신 적도 없으며 보험회사에서 오늘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펩마시 양은 속기사를 부를 이유가 없었고, 캐번디시 협회에 전화를 걸지도, 3시까지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 또한 맞아요."

"대략 1시 30분쯤 집을 나갈 당시 이 응접실에는 뻐꾸기시계와 괘종시계 두 개만 있었습니다. 다른 시계는 없었고요."

 

이 책은 1963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야말로 크리스티 말년의 소설로, 푸아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책의 절반쯤에 가서야 등장하며, 오히려 경찰인 하드캐슬과 그의 친구이자 정식 경찰은 아니지만 정부를 위한 비밀스런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램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하드캐슬은 마치 푸아로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재프 경감에 대응할 수 있겠고, 푸아로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물어다주는 램은 마치 헤이스팅스에 대응할 수 있겠다. 시간이 흘렀으니, 재프 경감은 아마도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남미로 이주한 헤이스팅스는 한동안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 <커튼>에서야 등장한다. 그러나 역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유머가 없지는 않지만 재프 경감에 비해 하드캐슬은 좀 더 진지한 캐릭터이며, 헛발질을 날리던 헤이스팅스에 비해 램은 매우 영특하다. 1930년대와 1960년대가 같을 수는 없겠지. 캐릭터가 더 신중하며 예리해지고, 거기에 따라서 소설 또한 더 냉정해졌다고 할까.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모피와 보석, 머리 장식과 오트구튀르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그 여자 본인의 모습은 절대 보지 못해!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지....... 그리고 내 친구 콜린에게도 말했지....... 이번 살인 사건은 지극히 간단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화려한 장치를 설치한 거라고. 내가 그러지 않았던가?"

 

돌아다니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서도 푸아로는 역시 사건의 핵심을 짚어낸다. 의문의 시계, 신원을 알 수 없는 피해자, 눈 먼 노부인, 젊은 속기사....... 그러나 복잡해보이는 사건이야말로 실은 단순하다는 푸아로의 말이 적중한다.

 

"그 아이 사진이 있어요...... 아기 때 찍은......."

그녀가 서랍을 열자 난 그 뒤에 가 섰다. 자동 권총이 아니었다. 작고 치명적인 칼이었다.......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칼을 빼앗았다.

"제가 좀 순할지는 몰라도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자 펩마시 양이 손으로 의자를 잡고 앉았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제안은 사양하겠어요.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여기 머물 거예요....... 그들이 올 때까지. 기회란 항상 있는 법이죠....... 감옥에서도."

"교화 말씀인가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며,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는 일을 그만 뒀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려고요....... 해양생물학이오. 호주 대학에 자리가 나서요."

"현명한 선택 같군요. 당신에게는 이 직업에 필요한 자질이 없어요. 당신은 마치 로즈마리의 아빠 같아요. 그 사람은 '부드러움을 경계하라.'는 레닌의 격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는 에르퀼 푸아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저는 인간이라는 데 만족합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의견이 다르다는 확신을 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복잡해 보이지만 일견 단순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티 초기 소설에서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명료하면서도 모든 주인공들이 정확한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사건의 대단원을 마치는, 그런 즐거움이 있다. 영화로 치자면, 웰메이드 상업영화라고 할까, 매끈하게 잘 만들어졌다는 그런 느낌. 후기로 올 수록 캐릭터는 더 복잡해지고, 사건은 더 지저분해진다. '이런 사건을 만들어내다니!' 혹은 '역시 재미있는 소설이야!'하고 이야기의 참신성에 감탄하기보다는, 너무나 실제적인,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건들,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이 다뤄진다. 아마 작가 개인의 취향이나 관점의 변화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젊은 시절 거대하고 화려한 부분을 동경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소박하고 단순해진다고 할까. 아마도 크리스티의 대부분의 대표작들이 초반이나 중반에 몰려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좀 다른 부분이었다. 살해 사건과는 무관하게 램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는 소설 막바지의 부분이 좋았고, 또 이런 거대한 사건이 직업적으로 소설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속기사에 의해 꾸며졌다는 내용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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