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포인트 - 작은 아이디어를 빅트렌드로 만드는
말콤 글래드웰 지음, 임옥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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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의 앞날개를 보니 바로 이 책이 말콤 글래드웰의 첫번째 저서인 것 같다.

내가 읽은 책은 <아웃라이어>인데,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과 그의 글솜씨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이런 책은 시의성이 중요하다. 책 앞의 추천의 글에 보면, 싸이월드에 대한 예가 나오는데, 만약 지금 나왔다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꽤 낡은 예가 되겠지만. 깨진 유리창 법칙이나 케빈 베이컨 게임 등 상당수가 이미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고, 저자가 연구한 결과도 아니지만, 아마도 이 책이 나왔을 무렵에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연구 내용들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사회 현상을 설명하거나 경제 동향을 따라잡기 위해 수많은 이론이 등장하고,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이론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기에 나에게 적용하기란 어불성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수많은 비전문가들에게 유용했던 책이었을 것이며, 지금의 말콤 글래드웰을 만들어 준 책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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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재활용 - 당신이 몰랐던 사체 실험 리포트, <스티프> 개정판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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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 한 사람을 꼽는다면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학문적인 이유로, 그분이 선종하셨을 때 명동성당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수많은 신자들로 인해서 명동을 빙 둘러서 사람들의 줄은 끊이지 않았고, 한 명에게 허용된 시간은 단 3초 정도였다. 너무나 짧았기에 애도를 표현할 시간도 스스로 감정에 젖을 시간도 부족했지만, 이미 의학적으로 사망한 그 분을 뵈면서 그 짧은 시간에도 느꼈던 생각은, 생전에 그 분이 아닌 것 같다는 것. 물론 내가 생전에 그 분을 실제로 뵌 적은 없고, 늘 화면으로만 보았지만, 어쨌든 내가 머릿속으로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 모습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 때는 사람이 죽고 나면 살아 있는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지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관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 매장하기 전 1시간 정도 어머니 옆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경험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얼굴에 약간 화장도 한 상태이고 머리에 웨이브도 넣었다고 적고 있는데, 본문에 나오지만 장의사들의 경우 유족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고 김수환 추기경을 보면서 '다르다'고 느꼈다면, 시신을 돌보았던 분들의 작은 배려 덕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뗼레야 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분이 자신의 각막을 기증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뉴스로도 크게 보도가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죽기 전 장기 기증을 기피하는 우리 나라의 정서상, 단시간이었지만 그 덕택으로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늘었다는 기사도 있었고, 주치의의 인터뷰도 있었다. 각막 이식을 하려면 상피 세포가 2000개 이상이어야 가능한데, 워낙 고인이 고령이라서 혹시나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추기경의 소중한 뜻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했는데 다행이 2008개가 나와서 수술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그 이후에 시간을 일부러 내어서 케냐로 의료 봉사를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책의 원제는 Stiff. 사후 경직 상태를 의미한다. 죽고 난 후, 남아 있는 우리의 신체에 대한 글이다. 한글판 제목은 인체재활용. 평생 인체를 활용하며 살다가, 사망 후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인체 전체, 혹은 일부가 어떻게 다시 활용되는지 여러 케이스를 보여준다. 의과대학이나 병원에 기증되는 경우도 있고, 뇌사자의 경우 장기 이식을 통해 다른 이의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다. 과거의 엽기적인 사례들부터, 현재의 숭고한 사례까지 훑어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불쾌감을 표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맨 마지막, 저자가 자신이 죽고 난 후 시신을 해부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기증할 계획을 세운 장면에 다다르면, 이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으며,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고, 그 결과 이 결론을 내렸구나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절대로 명시하지는 않았고, 돌려서 암시하지도 않았지만, 작가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 김수환 추기경도 그 면에서는 똑같지 않았을까 싶다. 추기경이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면, 저자는 저서로 설득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 역시 사후 행동으로 자신의 글을 실천할 것이다.

 

이 책은 2003년에 나왔다. 미국에서 나온지 12년이 흘렀다. 아마도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업데이트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총, 균, 쇠>와 같은 책처럼, 증보판을 기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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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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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Neither here nor there>의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고 쓴 책이 이 책이다. 빌 브라이슨이 워낙 많은 책을 냈기도 했고, 책이 번역되면서 제목이 상당히 의역된 책이 많을 뿐더러, 개정판이 나오면 그 제목도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도 빌 브라이슨의 책을 뭐뭐 읽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가 읽은 책 중 하나는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라는 책으로 처음에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으로 출판되었고, 개정판의 제목은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의 한국에서의 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도 인상깊게 읽은 책이다. 언젠가 마음먹고 빌 브라이슨의 모든 책을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면 국내도서로는 21종이 나온다. 그 중 개정판이 나와서 겹치는 책을 빼면 17종 정도인 것 같고, 그 중 이 책까지 3권을 읽었으니 14종이 남은 셈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좋다.

 

A Walk in the Woods라는 원제가 책의 내용을 더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된다. <나를 부르는 숲>만 보았을 때는 소로우의 <월든>과 같은 책을 생각했는데, 이 책은 원제처럼 그야말로 숲을 걸어서 횡단하는 내용이니까. 2100마일이면 3380킬로미터 정도인데, 대한민국의 길이가 약 1000킬로미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길이가 아닐 수 없다.

 

또 부러운 게 있다. 그들의 상상력을 받쳐주는 자연의 광활함이다. 조지아주에서 메인주까지 산길로만 가는 대장정을 결심하는데 뭐 그리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쉽게 광대한 모험으로 끌어들이는 다양한 천혜의 혜택을 타고났다.

 

옮긴이는 책 앞에서, 미국에서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종주 등반객(Thru-Hiker)을 만났을 때의 일화를 적고 있다. 대학 졸업 기념으로 종주를 시작했다는 젊은 남녀를 보면서 옮긴이는 젊은 나이에 벌써 인생의 행로를 꿰뚤어 보고 있는 그들이 부럽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만약 통일이 되어서 육로로 중국과 러시아, 나아가 유럽까지 횡단할 수 있다면,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지금의 젊은이들과는 사고의 틀부터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카츠에게 바친다

 

책의 첫머리에서 밝힌 카츠는, 빌 브라이슨이 어릴 때 유럽 여행을 함께한 친구로,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44세의 나이로 아내와 아들이 있는 빌 브라이슨이, 25년 동안 명확하게 갈라진 인생의 길을 걷고 있던 친구와 다시 한 번 여행길에 오른 책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빌 브라이슨은 오랜만에 만나게 된 이 친구와의 여행에서 억지로 감동을 짜내지도 않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인생의 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인생이 죽을 때까지 걷는 길이라면, 그 중의 한 때를 카츠와 함께 걸었고, 한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 또 걸었고, 그리고 헤어진 것이다. '발칙한~' 시리즈가 때로는 불편할 정도의 유머를 구사했다면, 이 책은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한 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전형적인 미국사람으로서 미국이 아닌 것들에 대해 더 풍자의 잣대를 들이대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면 잠시나마 불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기에는 빌 브라이슨의 책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해, 타인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곰과 같은 야생동물의 습격, 한탄바이러스와 같은 질병,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 의한 살인 등등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애팔래치아를 종주한 그 노력을, 감히 따라할 용기는 나지 않지만, 머릿속으로나마 풍경을 그려가며 빌 브라이슨을 따라가는 만족감은 충분하다.

 

바깥에 나가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불길한 운명 중 기묘할 정도로 예기치 못하는 현상이 저체온증이다. 저체온증에 의한 사망 치고 불가사의하지 않은 게 없다. 《자연법》이라는 책에서 저자 데이비드 퀸먼이 쓴 사례를 보자.

1982년 늦여름, 청소년 4명과 어른 2명이 밴프 국립공원에서 휴일 카누를 즐기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구조 탐색반이 그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들은 실종된 6명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숨진 채 호수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 얼굴을 위로 한 채 차분한 표정이었다. 슬픔이나 공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른 1명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아직도 쓰고 있었다. 근처에 떠다니는 카누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고, 간밤의 날씨도 온화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6명은 조심스럽게 카누에서 내려 그들의 시체가 발견된 호수의 찬물에 몸을 눕혔다. 한 탐색 반원 말에 의하면 '마치 자러 간 것처럼' 보였다. 어떤 의미에선 자러 간 게 맞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죽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 눈보라 속에서 비틀거리거나 북극의 바람과 맞서 싸우다 죽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우선 그런 날씨엔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밖으로 나가고, 설령 그렇더라도 준비를 잘 갖추고 나가게 마련이다. 저체온증의 피해자들은 주로, 보다 멍한 환경에서 온화한 계절에 얼음이 전혀 얼지 않는 온도에서 당한다. 보통, 그들은 예상 못한 조건의 변화나, 또는 이런 변화가 중첩될 때-기온의 급강하라든가 세차게 내리는 찬비, 길을 잃었다는 자각에-당한다. 왜냐면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거의 언제나 그들은 뭔가 멍청한 짓-지름길을 찾기 위해 잘 표시된 길을 버린다든지, 가만히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더 깊은 숲으로 잘못 들어간다든지, 시냇물을 건너려다 몸이 더 젖고 차갑게 된다든지-을 해서 상황을 더욱 꼬이게 한다.

(중략)

저체온증은 서서히 파고드는 간교한 충격이다. 그것은 체온이 떨어지고 신체의 반응이 느려지고 통제 불가능해지는 정도에 따라 차츰차츰 몸을 갉아먹는다. 그런 상태에서 샐리너스는 자신의 소지품을 버렸고, 곧 빗물로 불어난 강물을 건너야겠다는 절망적이고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렸다. 아마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가 길을 잃은 그날 밤, 날씨는 맑았고 기온은 4°c 안팎이었다. 재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는 불편한 정도의 추운 밤을 보내고 다음날 무용담 하나를 챙겼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대신에, 그는 숨졌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은 몇 단계를 밟는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우선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근육을 수축함에 따라 점점 심하게 몸을 떤다. 그러다 심각한 피로감을 느끼고 몸이 무뎌지고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감각을 잃기 시작한다. 그래서 판단 착오를 일으켜 신중치 못하고 비논리적인 결정을 내리려는 경향을 보이거나 명명백백한 것을 보지 못한다. 점점 방향 감각을 잃고 위험한 환각에 빠져 드는데, 그중에서도 몸이 얼어붙고 있는데도 타는 것처럼 덥게 느끼는 착각이 대표적이다. 많은 희생자들이 옷을 벗고 장갑을 던져 버리며 슬리핑 백에서 기어나온다. 트레일에서의 사망 사건에 대한 연대기를 보면 텐트 바로 앞의 눈 더미에서 반쯤 옷을 벗은 채 숨져 있는 등산객에 대한 얘기로 가득 차 있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몸을 떠는 것을 멈추고 무감각 상태에 이른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뇌파는 대초원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차처럼 낮게 직선을 이룬다. 이때가 되면 희생자를 발견해 응급 처치를 한다고 해도 몸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

<아웃사이드>라는 잡지의 1997년 1월호에 게재된 사건은 이 같은 경우를 깔끔하게 보여 주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1980년 덴마크 선원 16명이 배가 가라앉자 긴급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낸 뒤 구명조끼를 입고 북해로 뛰어들었다. 거기서 구조선이 와서 건져 낼 때까지 90분을 물 속에서 버텼다. 여름이었지만 북해는 숨막힐 정도로 차가워서 30분만 그 안에 있어도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16명이 생환했다는 것은 축제라도 벌여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담요에 싸여 옮겨짐 뒤 따뜻한 음료를 마시자마자 16명 모두가 돌연 사망했다.

 

이 부분은 애팔래치아 종주를 위협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저체온증에 관한 서술 중 일부이다. 실제로 빌 브라이슨이 저체온증으로 판단력이 상실되고 위험한 순간까지 갔던 부분도 이 부분 뒤에 나온다.

 

버몬트 주와 뉴햄프셔 주는 서로 편안하게 마주보고 있을 뿐 아니라 면적이나 기후, 사투리, 그리고 생업-주로 스키와 관광-도 비슷해서 종종 쌍둥이로 같은 괄호 안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사실 두 주는 아주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버몬트 주에는 볼보(스웨덴 회사의 상표) 차와 골동품 가게가 많고 귀엽게 고안한 이름의 여관들이 꽤 있다. 이를테면 메추라기 골짜기 산장(에추라기는 미국에서 성적 매력이 있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속어. 여기에 골짜기라는 은유까지 곁들여 연상한 것)이라든지 바이올린 통 농장 여관-바이올린 본체 부분의 생김새가 무엇과 비슷한지를 연상하라-과 같은 것들이다. 뉴햄프셔 주에서는 사냥 모자를 쓰고 픽업 트럭을 몰고 다니는데, 호기롭게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다'는 문구가 적힌 번호판을 단다. 지형적인 특징도 판이하다. 버몬트 주의 산들은 비교적 온유하고 기복이 완만하며, 곳곳에 나타나는 목장들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반면, 뉴햄프셔 주는 주 전체가 하나의 숲이다. 주 면적 9,304평방마일 중 85%-영국의 웨일스보다 넓다-가 숲이고, 나머지는 호수거나 아예 숲이 들어설 수 없는 수목한계선 위이다. 이 주는 때때로 마을이나 스키 리조트가 나오기는 하지만, 까마득한 자연 일색이다. 산들은 높고 바위는 울퉁불퉁 튀어나왔으며, 버몬트의 산들보다 훨씬 까다롭고 험악하다.

《스루 하이커의 안내서》-애팔래치아 트레일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책, 이제야 털어놓는다-에서 위대한 댄 '윙풋'(Wing foot은 무지하게 걸음이 빠르다는 뜻) 브루스는 밑에서 올라오는 북상 스루 하이커들이 버몬트 주까지 마치면 트레일의 80%를 걸어온 셈이지만, 걷는 데 드는 품을 감안하면 반밖에 안 된다고 썼다. 화이트 마운튼을 관통하는 뉴햄프셔 주의 259km 구간에는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고봉만 35개나 있다. 뉴햄프셔 주는 정말, 어렵다.

 

빌 브라이슨의 특징 중 하나는 비유와 대조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이다. 쌍둥이 주라고 까지 불리는 두 주의 특징이, 단 한번도 이곳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나조차도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래, 트레일을 포기해서 기운이 언짢니?"

카츠가 한참 후에 물었다.

확실치가 않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대해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갖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트레일이 지겨웠지만 여전히 이상하게도 그것의 노예가 됐고, 지루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았지만 불가항력적이었으며, 끝없이 펼쳐진 숲에 신물이 났지만 그들의 광대무변함에 매혹됐다. 나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싶기도 했다.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고 텐트에서 자고 싶기도 했다. 봉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했고, 다시는 봉우리를 안 봤으면 싶기도 했다. 트레일에 있을 때나 벗어났을 때나 항상 그랬다.

"모르겠어.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고. 너는 어때?"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소한 상념에 잠겨 몇 분 간 더 걸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걸 했어."

카츠가 마침내 올려다보면서 입을 뗐다. 그는 궁금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내 말은, 메인 주를 등산했었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를 쳐다봤다.

"카츠, 우리는 마운트 캐터딘을 못 봤잖아."

그는 내 말을 사소한 말장난으로 무시했다.

"다른 산은 봤잖아. 브라이슨, 너는 얼마나 많은 산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작게 웃었다.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카츠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는 한 말이야.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어. 눈 속에서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남부에서도 걸었고 북부에서도 걸었어. 내 발에 피가 나도록 걸었어.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어. 브라이슨!"

"우린 많은 구간을 걷지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그건 사소한 것들이지."

카츠가 코방귀를 뀌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물론, 내가 옳아."

그는 달리 생각할 수는 전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결국 애팔래치아 완주는 여기서 끝나고 만다. 그러나 빌 브라이슨은 카츠와 헤어진 후에도 혼자성 종종 등산을 게속한다.

 

뉴잉글랜드에서 가을은 달아나고 있었다. 킬링턴에 오른 지 며칠도 안 돼 겨울이 불어닥쳤다. 등산의 계절은 확실히 끝 무렵에 이르렀다. 얼마 안 지나 일요일에 식탁에 앉아 트레일 기록과 계산기를 들고 내가 걸어온 거리를 합산했다. 나는 숫자를 두 번 확인했다. 그런 뒤 카츠와 내가 수개월 전 개틀린버그에서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전히 종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을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나는 1,392km를 주파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절반도 안 되는 거리다. 모든 노력과 땀, 그리고 구역질나는 지저분함, 터벅터벅 걸었던 끝없는 나날들, 딱딱한 바닥에서 보낸 밤들, 이 모든 것이 더해져 겨우 트레일의 39.5%밖에 안 됐다-전 구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야? 종주한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의심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래도 1,392km는 적지 않은 거리다. 뉴욕에서 시카고까지 가고도 남는다. 만약 다른 곳으로 이만큼 걸었다고 하면 나는 훨씬 더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나는 요즘도, 때로 뭔가 일이 잘 안풀리면 집 근처의 트레일로 등산을 다녀오곤 한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상념에 잠기지만, 항상 어떤 지점에 이르면 숲의 감탄할 만한 미묘함에 놀라 고개를 들어 본다. 기본적인 요소들이 손쉽게 모여서 하나의 완벽한 합성물을 이룬다. 어떤 계절이든 간에 멍해진 내 눈길이 닿은 곳은 모두 그렇다. 아름답고 찬란할 뿐 아니라 더 이상, 개량의 여지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 이걸 느끼기 위해 수킬로미터를 걸어 산 정상에 오를 필요도 없고, 눈보라를 뚫고 기신기신 걸을 필요도, 진흙 속에 미끄러질 필요도, 가슴까지 차 오르는 물을 건널 필요도, 매일 매일 체력의 한계를 느낄 필요도 없지만, 그게 도움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아쉽다. 캐터딘까지 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비록 나는 언젠가 갈 거라고 다짐한다고 해도. 곰이나 늑대를 보지 못한 것도. 느릿느릿 소리 없이 뒷걸음 치는 자이언트도롱뇽을 보지 못한 것도. 살쾡이를 쉬이 하고 쫓아내거나 방울뱀을 피해 옆걸음 치지 못한 것도. 놀란 멧돼지를 맞닥뜨리지 못한 것도 아쉽다. 나는 딱 한 번만이라도-살아남을 수 있다는 서면 보장만 있다면-정면으로 죽음과 대면하고 싶다. 어쨌든 많은 경험을 축적했다. 텐트칠 줄도 알게 됐고, 별빛 아래서 자는 것도 배웠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자랑스럽게도 몸이 날렵하고 튼튼해졋다. 삼림과 자연, 그리고 숲의 온화한 힘에 대해 깊은 존경을 느꼈다. 나는 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세계의 웅장한 규모를 이해하게 됐다. 전에는 있는 줄 몰랐던 인내심과 용기도 발견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친구를 얻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요즘 산을 쳐다볼 떄마다 나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도려낸 화강암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라본다.

우린 3,520km를 다 걷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게 있다. 우린 시도했다. 카츠의 말이 옳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다소 난잡하고 중구난방같던 소설의 세세한 부분이 끝에 가서 한 점으로 수렴하며 커다란 감동을 던져준다. 꼭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의 마지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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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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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몰랐던 작가의 아름다운 소설을 알게 되어 기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엉뚱한 생각. 이 책에 나오는 중국의 이 당시 현실은 지금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통일 이후, 이런 문학이 우리 나라에서도 쏟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살짝 들었다. 소설 분야에서 베스트 순위 내에 우리나라 소설이 한 권도 없는, 요즘의 현실이 답답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이 시지에의 자전적인 소설 같은데, 등장인물들의 뒷얘기가 궁금하다. 두 소년도, 소녀도,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훌륭한 소설의 여러 가지 기준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수십 년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을 조심스레 잘라내어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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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양장) - 개정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소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때문이었다. 일단 소설 제목이 눈에 확 띄었고,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대성당>은 레이먼드 카버의 마지막 책이면서, 그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기도 하다. 생전에 대부분이 고통스러웠고, 죽기 마지막 몇 년만 반짝했던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들이 이렇게나 따뜻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밑바닥까지 절망해보았던 사람이기에 이렇게 타인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가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고통은, 마치 진주조개가 고통 끝에 진주를 품어내는 것처럼 작품만 놓고 보았을 때는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작가가 과연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 문학에 대한 내 상식은 매우 좁고 얕아서 이런 생각이 편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평탄하게 살아온 소설가들에게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감정의 최대치를 +10~-10이라고 본다면, 양극단을 경험해 본 작가에게는 -7에 대해서도, +8에 대해서도 물흐르듯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겪은 감정의 최대치가 +7~-6 정도라면, 그 사람은 -7에 대해서도, +8에 대해서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야기한다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거나, 필요 이상으로 냉정해지리라고 생각된다.

 

카버는 아마도 양극단을 전부 경험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어린 시절에 가난했거나, 일찍 부모를 잃었거나 하는 작가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을 카버는 겪었다. 알콜 중독으로 일생의 많은 순간동안 고통스러웠고, 결국 입원까지 하게 된다. 스스로 술을 끊지 못해 강제로 다른 사람의 손에 결정권을 맡긴 것인데, 이만큼 인간의 존엄성이, 스스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 스스로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지 않았을까. 그 시간을 견뎌내었기에, 카버의 글은 세상 모든 슬픈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저기요, 나도 그랬어요, 괜찮아요, 나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어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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