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26
뒤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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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p 첫사랑이라는 열병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시인들이 무어라 해도 그것은 일종의 열병이며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21세 된 즈음의 나날은 결코 대담한 것은 못 된다. 공연히 풀이 죽고 아무것도 아닌 불안에 차 있다. 그리고 마음은 사려 분별도 없이 부서져 흩어지고 상처를 잘 입는다. 가시 돋친 말을 한 마디만 들어도 그만 풀이 죽어 버리지만, 차차 다가올 중년이라는 마음 편한 갑옷을 몸에 걸치게 되면 그날그날의 자잘한 가시에 찔려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런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린 소녀의 마음은 아주 하찮은 한 마디의 말도 심한 낙인이 되어 언제까지나 마음에 남고, 어깨 너머로 던져진 한 번의 눈길도 마치 영원한 것인 듯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한 번의 거절이 암탉이 길게 빼는 울음소리와도 같이 울리고, 단 한 번의 불성실함이 유다의 키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년에 접어들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처녀의 마음은 아주 하잘것없는 거짓말을 해도 혓바닥이 끊어지는 듯하고, 마치 화형당하는 기둥에 꽁꽁 묶이기라도 한 듯이 울리는 것이다.

 

96p "우리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세. 이 아가씨와 나는 이제 곧 결혼한다네." 다른 종업원들도 그 말을 듣고 모두 나에게 절을 하고 미소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흥분의 파도와 기대의 소음을 뒤로 하고 휴게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발코니를 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앞을 지났으나 아무도 우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무원은 서류 뭉치를 앞에 놓고 어깨너머로 젊은 사무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드 윈터 부인이 되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나는 조금 뒤 만더레이에 살게 되는 것이다. 만더레이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갔다. 그는 걸으면서 내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갔다. "42살의 나이는 당신이 보기에 너무 늙었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아뇨, 조금도"하고 나는 급히, 그리고 아마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말했다. "전 젊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은 젊은 남자를 아직 한 사람도 모르지 않소"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방문 앞까지 왔다. "내가 혼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 전에 잠깐 물어 두고 싶은데……. 당신은 언제 결혼을 해도 좋겠지? 혼수니 뭐니 그런 시시한 것들을 설마 갖고 싶어하지는 않겠지? 왜냐하면 4,5일 안에는 모든 일이 문제없이 처리될 테니까. 결혼 허가증만 있으면, 사무책상 위에서 말이오……. 그런 다음 자동차를 타고 베니스든 어디든 당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요."

"교회에서 식을 올리는 게 아닌가요?"하고 나는 물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마치 절대적인 명제이자 도덕책의 내용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차이가 어떤 것인지, 서로 끌림을 느끼고 결혼을 앞두는 단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그 차이를 이렇게 서술하여 보여줌으로써 나이 차이가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번 결혼한 아버지뻘의 남자.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 순수하지만 강단있는 여자 등등 여러 모로 제인 에어를 연상시킨다.

 

레베카를 처음 봤을 때 이 레베카가 그 레베카인지 몰랐다. 히치콕의 그 유명한 영화 레베카, 그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여기까지 알았지 원작 소설이 있는지를 몰랐다. 소설이 워낙 두껍다.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 중 최고가 아닌가 싶다. 영화부터 보았다.

히치콕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유일한 아카데미 수상작. 데뷔작이다보니 제작자인 셀즈닉 입김이 많았다. 그 덕분에 아카데미를 수상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히치콕의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 촌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이 존재감이 약하고 조연도 잘 살리지 못했고. 그것조차도 의도한 것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댄버스 부인과 반호퍼 부인을 뮤지컬에서 다룬 방식을 보면 맛깔나는 재료가 이렇게나 많은데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음식 같다는 느낌.

재료가 워낙 좋으니 음식이 맛이 없지는 않은데 기대보다는 밋밋하다는 느낌이다.

가정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히치콕이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거장의 위치에 올랐을 때 이 작품을 스스로 리메이크해서 다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영화와 비교했을 때 동명의 뮤지컬에서 댄버스 부인이 어떤 위치인지 생각하면 여러 모로 아쉬운 부분이다. 뒷이야기를 보면 뮤지컬의 제작진 입장에서도 배우들에게 영화보다는 책을 더 권했다고 하고. 그래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대본에는 그 부분에 해당하는 책의 쪽수가 적혀 있다는 인터뷰 내용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배우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지는데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의 관계가 어떤 공연에서는 모녀관계로 보이고 어떤 공연에서는 연인관계로 보이고. 또 파벨이 진심으로 레베카를 사랑했는지도 공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어쩐지. 책하고 비교했을 때 파벨의 감정선이 영화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더라니.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영화로 보면 물 흐르듯 흘러가지 못하고 퉁퉁 튄다는 느낌을 받는데 역시 이 작품은 소설로 읽어야 한다.

서로에 대해 끌린 첫 만남, 그리고 그 이후 만남으로 인해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고, 오해했던 부분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부분이 교정된 후에도 새롭게 끌리는 로맨스가 한 축.

그리고 스릴러가 한 축.

둘 다 팽팽해서 치우치지 않는다.

 

푹 빠져서 읽은 책. 시차를 두고 또 읽고 싶은 책.

너무 좋아서 오히려 객관적으로 이 책을 바라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다시 한 번 감상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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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화살의 집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25
앨프레드 메이슨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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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p

제임스 플로비셔는 한동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젊은이는 지난해 허즐릿의 공동 경영자 지위를 이어받은 26살의 변호사였다. 일을 재빨리 처리해야 할 때에는 꽤 민첩하지만 다른 사람의 성격을 평가할 때에는 신중하게 도사리는 성격이었다. 더욱이 허즐릿 노인을 존경하는 나머지 사무실에서는 타고난 신중성이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키가 크고 휘청휘청하는 걸음걸이의 사나이로 이마가 좁고 눈초리가 아주 거칠었으며, 철사 같은 흰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뻗쳐 있었습니다. 어쩐지 잘 다루어지지 못하는 인형극의 인형처럼 움직이더군요. 얼마쯤 격렬해지기 쉬운 감정적인 사람 같았습니다. 담배로 더러워진 손끝으로 자꾸만 쉬지 않고 콧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더군요. 언제 어느 때라도 위험한 곳에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은 사나이였습니다."

 

16p

셰익스피어 연극에나 나오는 것 같은 소동은 원칙적으로 플로비셔 & 허즐릿 법률사무소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곳의 일상 생활용품이 오래된 것처럼 여기에서 하는 방법은 위엄 있는 것이었다.

 

17p

제임스 플로비셔는 그를 잘 아는 사람이나 친구들로서도 겉으로밖에 알 수 없는 듯한 조금 색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독한 사람으로 이제까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과 교제를 가졌다.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조차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은 정도였다. 자기의 생활과 생활 수단이 좀 수준 높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덕을 입지 않고도 해 나가려고 하는 게 그의 신조였다. 여유가 생기면 그는 몇 달이고 이 신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썼다. 일인승 반갑판 돛단배, 얼음 절벽에 발판을 새기는 아이스 액스(얼음 깨는 도끼), 엽총, <<반지와 책>> 처럼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는 한 두권의 흥미진진한 책. 이러한 것들은 자신의 사상처럼 별하늘과 더불어 그가 종종 시도하는 고독한 탐험여행의 길동무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풍모에는 기묘하게 초연한 빛이 더해져서 얼른 보기에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보였다. 이 풍모는 곧잘 사람을 속이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에게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허즐릿이 지금 와베르스키 같은 남자와 교섭하게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나이다라고 생각한 것도 이 믿음직한 풍모 때문이었다.

 

21p

"제임스, 이런 사건에는 99퍼센터 뭔가 감추어진 비밀이 있는 법이라네. 입 밖에는 내지 않지만 표면에 나타난 비난의 뒷면에 협박자가 단단히 쥐고 있는 비밀 말일세. 대개 대수롭지 않은 부끄러운 비밀이나 집안 명예에 관한 추문 같은 것이지만, 공적인 재판 사건이 되면 순식간에 표면화되고 만다네.

와베르스키의 경우도 그런 종류의 사실이 숨겨져 있을 게 틀림없어. 그 사나이의 고발이 터무니 없이 맹랑하면 맹랑할수록 그는 헐로우 집안 사람들이 남모르게 덮어 두고 싶어하는 집안 명예에 관계되는 사실을 쥐고 있는 것이 확실해. 다만 그 괘씸한 사실이 과연 무엇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안 가네만."

 

162p

"나는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지요. 조금 마음이 괴로울 때 산을 보고 있으면 친구와 말없이 마주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친구와 마주앉는다. 이 말은 제임스에게 눈 덮인 비탈이며 바위 등성이 따위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아노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을 한 것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산이 전하고 싶어하는 포착하기 어렵고 거의 전달하기가 불가능한 온갖 미묘한 감정의 하나를 그는 이 말로 표현한 것이다.

 

독화살의 집. 원제는 The House of the Arrow.

 

위의 구절들은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이라서 적어 놓았다. 평이하게 읽어나가다가 중간에 아, 하고 뭔가 마음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적어놓았는데, 따로 저 문장만 보아도 인상적이고 전반적인 내용을 읽어나가면서 왠지 이 부분을 기억해 두면 사건을 풀어나가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복선으로 작용하지도 않고.

내가 잘못 읽었나 싶을 정도로 다 읽고 나면 처음에 인물에게 받았던 느낌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게 범인에 국한할 때에는 소설 전체가 매력적이 되지만, 범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이 된다면 작가가 치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푸와로든 마플이든 홈즈든 왓슨이든 헤이스팅스든 루팡이든 레스트레이드든 대체로 인물은 누가 되었든 큰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행동하는 편인데 이 소설은 어떤 인물이든 처음 등장할 때와 나중에 퇴장할 때 느낌이 너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랄하고 경쾌한 유머가 뭘까 궁금했는데 읽는 도중에 느낄 정도는 아니고, 다 읽고 나면 아하! 하고 느끼게 된다.

 

용의자의 수도 적고, 의외로 누가 범인일지 쉽게 추리가 가능해서. 초반에 생생한 묘사가 아까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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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싸이월드 - 내가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일촌이 되었다 ㅣ 아무튼 시리즈 42
박선희 지음 / 제철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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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한 친구는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내적 갈등을 겪는다고 했다. 올리고 싶은 사진이 많은데, 인스타그램에는 가장 좋은 이미지를 최소한으로 선별해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글도 짧을수록 좋았다. 댓글도 구구절절 쓰는 대신, 작고 깜찍한 이모티콘으로 대신했다. 새로운 시대가 원하는 콘셉트였다. 간결함, 명료함, 분명함. 하지만 '싸이 감성'인 그녀에겐 하고 싶은 말과 나누고 싶은 사진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우리는 멈춰야 할 때, 그만 둬야 할 때를 잘 몰랐다. 

싸이월드는 그 시절의 분위기와 많이 닮은 매체였다. 절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닌데 업로드를 멈추거나 분량을 줄일 이유가 없었다. 여행을 하거나 행사가 있었던 날이면 하루에 백 장 넘는 사진도 올렸다. 게시판 글은 길수록 좋았다. 싸이월드에서 가장 부족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것은 절제미였다. 

그것은 나의 가장 큰 취약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나는 직장에서도, 관계에서도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한 곡 더"라고 앵콜을 외치는 사람이었고, 떠난 버스를 괴력으로 쫓아가 마침내 얻어 타고 마는 '집념과 진상 사이'의 승객이었다. 때로는 굴욕적으로, 때로는 자기합리화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세상과 혼연일체가 돼 살아왔다. 그게 좋았다거나 나빴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그땐 그랬고, 그렇게 버텨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시절' 싸이월드의 몰락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었던 어떤 노래의 진짜 끝처럼 느껴진다. 한 시대의 막이 내리고 저 멀리로 사라지는 느낌, 이제는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 온 것처럼 말이다.


작가분 내 나이 또래 맞다. 그리고 내 나이 또래라면 이 작가분 글 읽으면서 공감 많이 할 테지. 싸이월드는 이제 우리 세대에는 추억이 된 걸까. 


철 지난 싸이월드에 유독 오늘따라 꽂힌 이유는 뭘까.


아마도 특별히 힘들고 지친 날 내 감정을 토로하고 싶을 때 인스타그램으로는 부족해서일 것이다.

그 밝고 화사한 세계에는 이런 감정 자체가 걸리적거리게 느껴진다. 인스타에 감정 토로 안 해봐서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

조용한 밤의 세계. 침묵과 고독의 세계. 혼자만의 생각으로 일기를 쓰는 시간과 싸이월드는 어울린다.


힘든 감정을 한 두개의 단어로 축약해버리면 그 감정이 너무 가벼워지고, 또 그만큼 내가 가벼워지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아닌다.

이러한 감정을 토로하기에는 싸이월드가 딱이다.

그 매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이러한 감정을 토로할 곳이 없어졌다는 것 뿐 아니라, 시대가 그만큼 바뀌었고 이 감정을 수용해 줄 수 있는지, 눈치를 봐야 하는지까지 생각이 가는 것이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진지충이라는 말을 왜 쓰나 했는데 이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요즘 시대에는 동떨어진 걸까?


어쩌면 싸이월드가 다시 열릴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설레면서도 싸이월드 백업은 죽어라하지 않는 우리 세대의 모순이 여기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한 때 존재했던 추억이 아름답게 박제되어 있기를 바라면서도, 싸이월드에 매달리는 철 지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싫다고, 아직 우리 나이에 옛날을 그리워하는 어른으로 규정되는 것은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양면의 마음이 다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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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양말 - 양말이 88켤레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ㅣ 아무튼 시리즈 18
구달 지음 / 제철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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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속담에 이런 표현이 있다.

'천성은 문으로 내쫓으면 창문으로 들어온다'는.


22쪽에 나온 말이다.


그래, 천성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천성은 본래 타고난 성품이나 성격을 의미한다. 앞에 있는 천은 하늘 천. 그러니까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영어로는 nature. 자연 그 자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양말은 사실 나에게는 실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예쁜 양말을 보면, 특히 여행지에서 보면 사오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사온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양말이니까.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니까. 그렇지만 알베르 카뮈처럼 흰 양말을 깔끔하게 신은 사람, 아니면 캐나다 총리처럼 양말에 메세지를 담아 신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디테일에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누구나 호감을 갖는 것은 쉬운 일 아닌가. 그렇지만, 내 천성으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양말은 결국 막 신는 사람이고, 양말을 신지 않는 상태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다. 그게 편하니까... 


아무튼 시리즈를 띄엄띄엄 읽고 있는데, 나의 천성으로는 상상을 하기 어려웠던 삶을 한 자락씩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편협한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사소한 것에서부터 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편협한 어른이 되는 것 아닌가. 양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양말이 아닌 다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이들은 상관없이 내가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도 삶의 재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재미있는 삶이 결국 삶의 본질이 아닌가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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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리커버 에디션)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김인순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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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를 틈틈이 읽고 있던 중 아무튼 양말 을 읽다가 거기에 등장한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는 책을 소개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제목도 독특하고, 내용도 궁금해서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읽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여우와 신포도'를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어서 다소 민망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부분을 읽다 보면 겉으로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추구하지만 속으로는 우아하게 사치하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 없기에, 어떻게든 우리는 만족하며 사는 법을 알아야 하기에, 작가의 생각이 억지라도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몇 구절은 분명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부는 악하고 빈은 선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드러나는 부분이 그랬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특히 그랬다.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비즈니스 클래스,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비행기 맨 앞의 퍼스트 클래스에는 진하게 화장을 하고 붉게 립스틱을 바른, 머리에서 발끝까지 베르사체로 친친 감은 부인들이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비행기 단골 고객으로서 마일리지 회원권을 지닌 콤비 차림의 신사들이 자리하고서, 여승무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여행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어느 정도나마 교양 있게 처신하는 사람들은 오직 이코노미 클래스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고풍적인 의미에서 '우아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비행기 앞부분의 승객들처럼 상스럽지는 않다.(p212~213)



이런 몇가지 부분을 제외하면 그래도 재미있는 부분은 많다. 개인적으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고 하면 모 연예프로에 나오는 한 연예인이 생각나는데, 한때 최고의 부와 명성이 있었던 그가 지금은 빚을 열심히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치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도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연어 머리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대접하는 장면이었는데, 그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현실적으로 잘 응용한 예가 아닌가 싶다. 


영국 사회 형태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신분제도가 존재하지만 누구나 신분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고 또 오로지 돈에 의해 신분이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차이는 행동과 언어인데 이 두 가지는 배워 익힐 수 있다. 마거릿 대처의 젊은 시절 언동은 훗날 보수당에서 정권을 잡았을 때와 사뭇 달랐다. 이를테면 노동계급 출신이라도 누구나 성인 오락실에 가는 대신 속보 경마장을 관람하는 등의 시민적인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서 중산층에 합류할 수 있다. 그리고 중산층에 기반을 둔 사람들은 어느 날 상류층의 생활 방식과 언어, 행동을 받아들여서 속보 경마 대신 갤럽 경마를 관람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국인들은 지배자의 민족이다. '지배자라는 것'이 항상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독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헝가리인들과 영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자기 극기', 비록 상상의 세계라 할지라도 '자기 세계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지배자이다.(p 50)


'복권 로타르'는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 불과 5년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반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신은 인간들을 벌하려는 경우에,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

역설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여기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실패를 성공의 비결로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가난한 망명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부유한 나비 채집가와 2류 서정 시인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어쩌면 본인을 위해서도 다행히 나보코프는 모든 것을 잃었다. 웅장한 승리와 처참한 실패는 종종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상실과 실패, 심지어는 이른바 불행이라는 것도 훗날 역경을 뚫고 모습을 나타내는 승리의 참된 전제 조건을 이룬다.

듣기 좋은 말로 행복을 이야기하는 진부한 감언이설을 뒤쫓는 사람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진정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의 결핍이 아니라 건강이나 아름다움, 부유함, 무엇을 좇든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삶의 기복을 평가할 줄 알고 위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p 59)



책을 읽다가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 이 생각나는 부분도 있었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도가 지나쳐서, 베르사유의 정원에 작은 마을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농부의 아낙처럼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서, 젖소의 신선한 우유를 마시고 손수 빵을 굽고 버터와 치즈를 만들었다. 바스티유가 폭풍에 휩쓸린 날에도 세브르의 우유통과 자신의 가슴 모양을 본따 만든 우유 컵을 들고서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컵에 '왕비의 가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지나친 태도는, 대부분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잠시나마 부의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망적인 소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 소원을 품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p 185)


그와 반대로 상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나 이따금 넘치는 풍요의 세계에 탐닉하는 경험은 아주 자극적일 수 있다. 다만 상반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하고, 복권 사는 사람처럼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은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불행만을 가져올 뿐이다.(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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