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동서 미스터리 북스 26
뒤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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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p 첫사랑이라는 열병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시인들이 무어라 해도 그것은 일종의 열병이며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21세 된 즈음의 나날은 결코 대담한 것은 못 된다. 공연히 풀이 죽고 아무것도 아닌 불안에 차 있다. 그리고 마음은 사려 분별도 없이 부서져 흩어지고 상처를 잘 입는다. 가시 돋친 말을 한 마디만 들어도 그만 풀이 죽어 버리지만, 차차 다가올 중년이라는 마음 편한 갑옷을 몸에 걸치게 되면 그날그날의 자잘한 가시에 찔려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런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린 소녀의 마음은 아주 하찮은 한 마디의 말도 심한 낙인이 되어 언제까지나 마음에 남고, 어깨 너머로 던져진 한 번의 눈길도 마치 영원한 것인 듯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한 번의 거절이 암탉이 길게 빼는 울음소리와도 같이 울리고, 단 한 번의 불성실함이 유다의 키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년에 접어들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처녀의 마음은 아주 하잘것없는 거짓말을 해도 혓바닥이 끊어지는 듯하고, 마치 화형당하는 기둥에 꽁꽁 묶이기라도 한 듯이 울리는 것이다.

 

96p "우리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세. 이 아가씨와 나는 이제 곧 결혼한다네." 다른 종업원들도 그 말을 듣고 모두 나에게 절을 하고 미소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흥분의 파도와 기대의 소음을 뒤로 하고 휴게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발코니를 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앞을 지났으나 아무도 우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무원은 서류 뭉치를 앞에 놓고 어깨너머로 젊은 사무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드 윈터 부인이 되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나는 조금 뒤 만더레이에 살게 되는 것이다. 만더레이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갔다. 그는 걸으면서 내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갔다. "42살의 나이는 당신이 보기에 너무 늙었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아뇨, 조금도"하고 나는 급히, 그리고 아마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말했다. "전 젊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은 젊은 남자를 아직 한 사람도 모르지 않소"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방문 앞까지 왔다. "내가 혼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 전에 잠깐 물어 두고 싶은데……. 당신은 언제 결혼을 해도 좋겠지? 혼수니 뭐니 그런 시시한 것들을 설마 갖고 싶어하지는 않겠지? 왜냐하면 4,5일 안에는 모든 일이 문제없이 처리될 테니까. 결혼 허가증만 있으면, 사무책상 위에서 말이오……. 그런 다음 자동차를 타고 베니스든 어디든 당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요."

"교회에서 식을 올리는 게 아닌가요?"하고 나는 물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마치 절대적인 명제이자 도덕책의 내용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차이가 어떤 것인지, 서로 끌림을 느끼고 결혼을 앞두는 단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그 차이를 이렇게 서술하여 보여줌으로써 나이 차이가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번 결혼한 아버지뻘의 남자.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 순수하지만 강단있는 여자 등등 여러 모로 제인 에어를 연상시킨다.

 

레베카를 처음 봤을 때 이 레베카가 그 레베카인지 몰랐다. 히치콕의 그 유명한 영화 레베카, 그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여기까지 알았지 원작 소설이 있는지를 몰랐다. 소설이 워낙 두껍다.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 중 최고가 아닌가 싶다. 영화부터 보았다.

히치콕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유일한 아카데미 수상작. 데뷔작이다보니 제작자인 셀즈닉 입김이 많았다. 그 덕분에 아카데미를 수상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히치콕의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 촌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이 존재감이 약하고 조연도 잘 살리지 못했고. 그것조차도 의도한 것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댄버스 부인과 반호퍼 부인을 뮤지컬에서 다룬 방식을 보면 맛깔나는 재료가 이렇게나 많은데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음식 같다는 느낌.

재료가 워낙 좋으니 음식이 맛이 없지는 않은데 기대보다는 밋밋하다는 느낌이다.

가정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히치콕이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거장의 위치에 올랐을 때 이 작품을 스스로 리메이크해서 다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영화와 비교했을 때 동명의 뮤지컬에서 댄버스 부인이 어떤 위치인지 생각하면 여러 모로 아쉬운 부분이다. 뒷이야기를 보면 뮤지컬의 제작진 입장에서도 배우들에게 영화보다는 책을 더 권했다고 하고. 그래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대본에는 그 부분에 해당하는 책의 쪽수가 적혀 있다는 인터뷰 내용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배우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지는데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의 관계가 어떤 공연에서는 모녀관계로 보이고 어떤 공연에서는 연인관계로 보이고. 또 파벨이 진심으로 레베카를 사랑했는지도 공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어쩐지. 책하고 비교했을 때 파벨의 감정선이 영화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더라니.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영화로 보면 물 흐르듯 흘러가지 못하고 퉁퉁 튄다는 느낌을 받는데 역시 이 작품은 소설로 읽어야 한다.

서로에 대해 끌린 첫 만남, 그리고 그 이후 만남으로 인해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고, 오해했던 부분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부분이 교정된 후에도 새롭게 끌리는 로맨스가 한 축.

그리고 스릴러가 한 축.

둘 다 팽팽해서 치우치지 않는다.

 

푹 빠져서 읽은 책. 시차를 두고 또 읽고 싶은 책.

너무 좋아서 오히려 객관적으로 이 책을 바라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다시 한 번 감상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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