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마이크 니콜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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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다는 착각이 사랑을 닫는다


Closer: 끝맺는 이 혹은 더 가까이. <클로저>는 사랑의 시작과 끝만을 포착해서 보여준다. 사랑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끝맺음으로 종결되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누가 과정이 중요하다 그랬던가. 유행가 가사마냥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인 사랑은, <클로저>에서 기적처럼 시작되어 잔인하게 끝난다. 그리고 4명의 주인공들은 진실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클로저>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영화다. 카메라는 오직 사랑의 시작선상과 끝자락에 서있는 주인공들의 모습만 비춰준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인 스토리의 전개는 완전히 지워진다. 관객은 주인공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오직 한, 두 마디의 대사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영화 속 시간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훌쩍 뛰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 불친절한 화법은 과정을 생략하는 동시에 관객의 상상에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정의 불필요함, 그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과 호감을 조금씩 노출시키는 설렘의 단계에서 주인공들은 빛난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거리 속에서도 서로를 찾아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그 사람만 보인다고 했던가, 영화 오프닝에서 댄과 앨리스가 서로를 찾아내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부분이다. 그 슬로우 모션과 함께 어우러지던 대미언 라이스의 노래란.) 사진기 플래시 겨우 터질 짧은 시간에 서로 반해 가장 오래된 연인의 키스를 나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순간은 순간일 뿐이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주인공들의 관계는 어긋나고, 무엇이 진실인지 상대방에게, 결국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묻지만 해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클로저>의 사랑은 우리가 영화에서 봐오던 육체적인 교감도 감정의 소용돌이도 아니다. 영화는 네 남녀의 첫 만남, 어긋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고 사랑의 끝만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사랑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모든 소소한 과정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사랑인가? 아직은 사랑이 아닌 단계인 만남과 이별은 사랑이라 할 수 있나? 아니면 단지 출입구일 뿐인가?

<클로저>는 원작의 특성상 다분히 연극적이다. 연극은 불가피한 제약과 생략을 동반한다. 일반적인 영화화라면 틈새를 채워 넣는 과정이 따랐겠지만, 노장 감독은 오히려 더욱 연극적으로 영화를 꾸려나간다. 몇 야외 촬영을 제외하면 <클로저>는 대부분 폐쇄된 공간에서 두 명 정도의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로 채워진다. 이것은 심지어 오픈된 공간 (안나의 전시회, 식당에서의 안나와 래리의 대화 등)에까지 적용된다. 트인 공간은 카메라가 주인공들에게 극도로 가깝게 다가서는 순간 닫혀 버리고 인물들은 주변과 분리된다. 카메라는 얼굴과 얼굴만을 번갈아 가며 잡아내고 그들의 대화를 더욱더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순간 관객은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차원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몰래 숨죽이고 혼자 엿듣고 있는 기분 말이다.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연극성의 정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인물 주변은 다 닫혀있지만 관객에게만은 단 하나의 통로가 열려있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통상적으로 영화는 일방적 전달이지만 <클로저>는 연극적 요소를 더해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이들은 인물들의 상황에 쉽사리 빠지지 않는다. 지하철역에서 실랑이 하는 연인을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상황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물들의 행위 뒤에 전개된 이야기를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적으로 관계의 추이에 대한 단서를 던지지만 우리는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감정 이입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정확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모든 인물들을 훑게 되는 것이다. 물론 깊이 들여다 볼 수도 없다. <클로저>는 그럴 찰나를 주지 않는다.

결국 음악으로 치자면 곡 전체에서 단 몇 마디씩만 떼어내 이어 붙인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다소 낯설고 불편했던 <클로저>의 진행은 내용으로 다시 돌아온다. 껍데기만, 형식만을 보고도 우리는 어떤 행위를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사랑의 시작과 끝은 제대로 갖춰졌지만 알맹이는 알 수 없을 때 말이다. 아니면 도리어 감독은 사랑 자체가 원래부터 껍데기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클로저>는 떠오르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려주지 않고 달라진 엘리스의 모습만을 비춰주면서 끝맺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100분 남짓한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관객에게 인물들은 여전히 낯설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길이는 무관하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에 빠진 첫 순간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Stranger) 일뿐이다. 사람이든 대상이든 무언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오만이자 착각일 뿐이다. 감독은 사랑도 낯선 이와 하는 낯선 행위임을 넌지시 얘기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주인공 3명은 (안나, 래리, 댄)의 결말은 슬프거나 바보 같다. 하지만 이를 너무나 잘 알았던 앨리스 (나탈리 포트만), 아니 제인은 영화 마지막에서 빛난다. 천천히 걷는 그녀는 참으로 빛난다.


[ 뉴스 글_전하영 ]  | Daum 영화 평론가 | 2005.02.27 16:06:56 







진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




사랑하려면 진실하라는 말.

 사랑 앞에 진실이 우선한다는 얘기. 과연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까? 진실은 언제나 최대의 효과를 거두게끔 만들어줄까? 최소한 <클로저>는 그렇지 않다고 건넨다. ‘진실’이라는 명분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받는 풍경. 마음과 마음이 충돌해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순간. <클로저>는 그 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의 함정이 있다. 스스로 파고선 빠지고야 마는 함정. “진실을 말해달라”는 요구 혹은 부탁. <클로저>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 함정으로 빠져드는 인간부류가 있다. 그 쓸쓸한 내면 풍경과 어리석음이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것도 고작 “그랑 잤어?” “나보다 좋았어?” “오르가슴은 몇 번이나 느꼈어?” 따위의 일고의 답변 가치도 없는 허접함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에게 쿨한 애정은 없다. 당연 담백한 이별도 없다. 스스로 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회의를 품게 만드는 네 남녀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은 하나같이 다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멈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낯선 사람”이란 인사는 때론 사랑의 시작 혹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고 담당 기자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다(고 믿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댄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해 그토록 갈망하던 소설 출간을 앞두고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다.

댄은 첫 눈에 반한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른다. 알리스가 옆에 있지만 불쑥 나타난 낯선 사람, 안나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댄은 속마음을 알리스에게 들키고 양 갈래 길에서 “그래 결정했어”를 외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에 있는 종이 울린 결과다.

뭐 이정도 사랑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명제처럼 새로운 사랑 앞에 흔들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일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끝을 예상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효시한도 영원함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정신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가 개입되면서 거짓과 진실의 숨바꼭질, 유혹과 거절의 쳇바퀴, 기만과 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큐피드가 됐다가, 연적도 됐다가, 다시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한다. 그 와중에 사랑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토로하고 울부짖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의 존재 앞에 그들은 기뻐하고 슬퍼했다가도, 노여움에 분노하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사랑, 참으로 어렵다.

극은 거의 네 사람의 동선에 의해서만 지배된다. 자세한 디테일은 생략된다. 원작의 연극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했다. 보이고 들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사랑의 네 스펙트럼

네 배우의 앙상블은 그 사랑의 정체를 하나둘 까발린다. 또한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 사랑과 진실은 동일체가 아니다. 그 간극 앞에서 관계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사랑은 질투 혹은 집착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수천수만 번 읊조린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나 알면서도 때론 인정하기 싫은 사랑의 본질.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 낯선 사랑에 취해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댄은 고인에겐 완곡어법으로 예의를 갖추는 반면 살아있는 사랑 앞에서는 완곡어법을 쓰지 못한 채로 우유부단함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말(글)과 행동이 다른 어떤 지식인의 전형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갈구하면서도 진실 앞에 좌절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안나는 사랑 앞에 움츠리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댄의 소설이 알리스의 인생을 ‘이용’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도 정작 눈물 흘리는 알리스의 사진을 자신의 전시회에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사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알리스의 통찰은 어쩌면 너무도 적절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안나는 먼저 다가서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 관조자다.

반면 알리스는 직설적이되 끝까지 내놓지 않는 히든카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통보 앞에 울부짖기도 하지만, 말없이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스트립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연적이 버린 남자를 상대로 그가 주는 지폐를 받아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댄의 글(말)보다 알리스의 몸이 보여주는 언어가 더 진실 되고 솔직해 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남자들에게서 훌쩍 떠나곤 하는 그녀의 행보가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는 댄디한 의사, 래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쏟아낼 줄만 알지, 이를 주워 담을 줄 모르는 미성숙함. 연적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반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한다면 한없이 거만해지는 단순함까지.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  

 

 ‘사랑한다면 이들 같지 않게’라고 부제를 붙일만한 <클로저>는 사랑한다면, ‘진실’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알려준다. ‘때론 진실이 다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70대에 도달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생뚱맞으면서도 아프다. 그게 사랑의 ‘진실’일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말이다. 스산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풍경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주목하는 그가 그려낸 <클로저>는 사랑을 회의한다. 실제 4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는 그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고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의 답변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깊이 알수록 소외되고 상처받는 것이 사랑일는지도.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는 데 불과 3초밖에 안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단다. 그런데 그 3초 이후, 사랑은 진실이란 껍데기를 쓰고 의심의 길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너의 과거를 말해줘. 사랑하니까 모든 것이 용서돼”라는 그 진실 같은 거짓말. 그 흔해빠진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시라. 영원히 사랑할 거란 믿음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어쩌면 시작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한편으로 마이크 니콜스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도 두 남자는 끊임없이 ‘진실’을 들먹이며 본능에 현혹되는 단세포다. 이별 앞에 징징 짜기만 하는 응석받이들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감안하지 않고 떼를 쓴다.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 남자들 말이다. ㅎㅎㅎ

[ 뉴스 글_ToTo ] | Daum 영화 평론가 | 2005.02.12 16: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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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 감독판 박스세트 (8disc) - MBC 주말특별기획드라마
안판석 감독, 송선미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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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준혁, 일본의 자이젠’을 통해 돌아본 바람직한 의사상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대생들이 모이면 꼭 한번은 나오는 화제가 있었다. 의대생이라면 다들 관심 있게 보았을 드라마 ‘하얀 거탑’ 이다. 아마도 ‘장준혁’이 유서를 남기며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시청자도 많았을 것이다. 원래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78년 방송 당시 의료사고, 교수가 되고자 하는 야망, 대학병원의 뒷모습 등 그때까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내용을 세밀한 취재에 의해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의학계의 실상을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25년 만에 일본에서 연속극으로 리메이크한 작품 역시 원작이 지닌 압도적인 에너지, 그리고 철저한 취재와 치밀한 구성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냉철하고 비정한 대학병원의 조교수 자이젠 고로와 그의 라이벌이자 인간미가 넘치는 의사 사토미 슈지의 대비되는 삶을 그려내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MBC에서 방송된 ‘하얀 거탑’을 관심 있게 시청했는데 이번 방학 과제를 기회로 일본 판 ‘하얀 거탑’(2004년 리메이크 작품)을 보고 의학계의 이면과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인공의 성격, 지위 등은 거의 비슷했지만 한국의 장준혁은 간담췌외과를, 일본의 자이젠은 식도외과를 전문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드라마 ‘하얀 거탑’의 한국 시청자들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장면은 아무래도 장준혁이 유서를 남기고 죽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또 자문 교수님이 우리학교 선배님이어서 1, 2부의 수술 장면과 5부에서 간, 신장, 췌장 이식을 동시에 하는 장면, 그리고 10부에서의 세계외과학회 회장 부인의 담낭말기수술 장면은 바로 우리학교 부천병원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들어서 이번에 볼 때에는 더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중간에 법정 장면이나 정치적인 면을 묘사한 부분은 아마도 일반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을지는 모르지만 대다수 의대생이나 의사들에게는 보기 좀 불편한 장면이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랬다.




주인공의 캐릭터와 대부분의 에피소드까지 일본 판 원작과 매우 흡사하지만 원작과는 다른 몇몇 부분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식도외과를 전문으로 했지만 한국판에서는 간담췌외과 전문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그 분야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을 수 있지만, 드라마 방영 전까지 생소하게 느껴졌던 이 분야가 최대한 잘 그려졌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수술해야 하는 간담췌외과의 질환들은 예후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의 환자들이 수술하지 않고 포기하려 한다고 들었다. 또 간담췌외과 자체가 대부분의 수술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간 자체가 신체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간부전인 환자는 간이식을 못 받으면 죽게 되는 등 매우 힘든 분야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보상을 받지 못해서 외과 중에서도 특히 간담췌외과는 지망을 잘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물론 드라마가 나온다고 해서 현실의 반전이 클까하는 생각은 들지만 드라마를 감명 깊게 본 수많은 의대생들이 조금이라도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이른 시기부터 이 분야에 대한 꿈을 키운다면 이 드라마가 갖는 의의가 더욱더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 MBC에서 ‘하얀 거탑’이 방영 중일 때, 원작에 비하여 장준혁이 최도영보다 훨씬 더 부각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번에 일본 판을 보니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에 기획을 할 때부터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드라마가 진행되어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장준혁을 미워하기보다는 그에게 공감하게 되면서 흐름이 그렇게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거탑’이 방영중일 때는 매 회당 70분 정도로 상당히 자세하고 길게 방송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편집상 빠진 장면이 좀 있다고 한다. DVD에는 아마도 편집된 부분이 추가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좋은 드라마를 DVD를 구입하여 언제든지 재미있게 보면서 오래오래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신문 ‘청년의사’ 참고)에서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최도영보다는 장준혁에 공감이 간다고 응답했다. 일반 시청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최도영보다는 장준혁에게 치료받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 드라마 ‘하얀 거탑’의 자문 교수님인 주종우 교수님께서 하신 인터뷰 기사에도 바람직한 의사는 장준혁과 최도영의 비율이 6:4이어야 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환자를 소홀히 보았다는 점, 또 너무 야욕을 부렸다는 점만 빼면 임상적인 스킬이나 의사로서의 자질로만 보면 최도영보다는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된다. 최도영은 너무 냉철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했고, 특히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외과의로서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 하고 생각된다. 물론 드라마를 보던 중에는 장준혁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항상 높은 데로만 올라가고 싶어 하는 장준혁의 욕망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음 한 구석에 다 야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얀 거탑’이 의사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들에까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이 드라마가 병원 뿐 아니라 어느 사회의 누구에게도 충분히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장준혁의 죽음을 그의 모든 라이벌이 다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 사람이 죽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을 반성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살아서 계속 야욕을 부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보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그가 살아서 남아있는 것이 의료계의 상당한 발전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드라마 내내 그와 격렬하게 대립했던 사람들도 드라마의 막바지에 가서는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에 장준혁이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관심이 있어서 한번 찾아보니 의외로 의사들은 자신의 시신을 잘 기증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의대생일 때의 실습과 의사가 된 후 수많은 수술을 거치고 나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내어 주는 것에 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된다. 아직 예과생인 내가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나도 나중에 장기나 시신 기증 서약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품게 되었다.




‘하얀 거탑’과 비슷한 시기에 ‘외과의사 봉달희’라는 또 다른 메디컬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둘 다 인기를 끌어서 인터넷상에서는 두 드라마를 비교도 많이 했고, 나 역시 두 드라마를 모두 즐겨 시청했던지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의대생인 나로서는 ‘봉달희’가 좀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학교 모임에서도 병원 실습을 도는 본과 선배들로부터 ‘봉달희’가 재미있고 현실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마도 ‘봉달희’는 레지던트 1년차의 이야기이고 ‘하얀 거탑’은 전문의가 대학교수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의대생들과는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봉달희’보다는 ‘하얀 거탑’이 정치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낸 것도 의대생들이 더 멀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 방영 시기가 의료법 개정 때문에 전공의들이 많이 민감했던 때라서 ‘메디게이트’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하얀 거탑’이 많이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하얀 거탑’을 재미있게 봤고, 정치적인 부분도 솔직히 흥미롭게 보기는 했지만 의대를 다니는 학생으로서는 우리 의료 현실을 좀 더 반영하고 병원 내의 생활이 더 중심이 되는 그런 드라마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의대를 다니지 않는 주변의 친구들 중에서는 ‘봉달희’를 보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하얀 거탑’에 비해서 ‘착한 의사’들을 많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의사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기존 시각이 부정적인 것에서 다소나마 ‘봉달희’를 통해 좋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인터넷상에서는 두 드라마 모두 ‘재미를 위해 현실을 과장했다’는 비판과 함께, 비슷한 외국의 메디컬 드라마나 원래의 원작과 비교하여 부족한 점에 대한 질타가 방영 내내 이어졌다. 아마도 단순히 드라마적인 재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의학 전반 분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은 최고의 외과의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가 그런 삶의 목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의 첫 단계는 바로 정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 최고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세계최고가 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길이었다. 현재 빠르게 변화하는 의료 현실에 적응하고, 그 앞에서 선두주자로 나아가려면, 장준혁처럼 평생 동안 계속 공부하며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하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장준혁은 그 과정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새로운 질병의 케이스들을 만나고 그것을 정복하는데 희열을 느꼈다는 점에서 약간 소름이 끼치기는 하지만,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만큼은 나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장준혁이 오로지 개인의 명예와 권력만이 목적이었다면 외과, 그 중에서도 남들이 다 기피한다는 간담췌외과를 굳이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담낭암, 담관암, 췌장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게 할까하는 나름의 사명감과 소신 때문에 그 분야를 택하고 거기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하고 생각된다. 가장 훌륭한 의사는 최도영의 마음과 장준혁의 기술이 조합된 의사일 것이다. 환자에 대한 애착과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는 노력, 거기에 체력까지 덧붙여진다면 아마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생각보다 여자의사에 대한 이야기나 비중이 좀 적은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과, 정치적인 면을 부각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내가 여자라서 지나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 의사, 또 여자 외과 의사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어느 정도 드라마에서 짚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존재하는 여자의사에 대한 선입견이 바뀌는데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하얀 거탑’의 영향은 너무나 큰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외과는 돈도 많이 못 벌고, 힘들고, 가족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또 선배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어서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진정한 의사는 아마도 외과의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오랜 시간 동안의 수술 이후 죽기 직전의 환자가 살아나는 장면에서 짜릿한 감동을 느꼈을 정도인데 실제로 생명과 관련된 장기를 다룬다는 것은 정말 의사로서의 멋진 모습이고 큰 매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된다. 편한 것을 좋아하고 물질적인 것을 많이 따지는 요즘 세상에 단순히 이런 점 때문에 외과를 선택하는 현직 외과 의사 분들이 모두 존경스러웠다. 외과가 다른 과에 비해서 자기 분야에 대한 애착이 훨씬 강하고 특히 환자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외과에 대한 현재의 대우가 나중에는 달라지고 언젠가는 보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 반드시 꼭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거탑’은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가 컸다. 그래서 단순히 병원이 무대인 정치드라마라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아마도 중년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최근 들어 메디컬 드라마와 영화가 많이 나오고, 또 그 내용이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거탑’처럼 다양한 내용이 담기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반감이 매우 큰데 의사를 무조건 신성시하는 것보다 장준혁처럼 의사도 불완전할 수 있고 충분히 공감갈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이 오히려 의사를 친근하게 느끼고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기 있는 드라마를 통해 지루함을 달래고, 약간의 감동과 재미를 느끼는 것은 어떤 시청자라도 할 수 있다. 나도 처음에 ‘하얀 거탑’을 시청했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 방학 때 이 드라마를 다시 한 번 돌려 보면서 생소했던 간담췌 분야에 대해서도 아주 약간이지만 알 수 있었고, 의사로서, 또 앞으로 의사가 될 의대생으로서 현재와 앞으로의 내 자세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다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서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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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일반판 박스세트 (9DISC)
김철규 감독, 김영애 외 출연 / KBS 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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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새 황진이 보는 게 너무 재미있다.

 

외모도 아름답고 예술로도 높은 경지까지 올랐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끄는 것은

 

항상 당당했다는 점.

 

 

 

세상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고,

 

타인이 자신에게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본인이 하고자 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그렇게 살다 갔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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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딩 더 로드 메이드 (TV) - Something the Lord Mad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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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신이 만든 어떤 것”
제목부터가 끌렸다. 당연히 의사에 관련된 영화라는 것은 의료 정보학 수업이니까 알고 있었지만 흑인과 백인이 가운을 입고 함께 나오는 포스터를 보고 과연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했다. 영화 파일을 찾느라 꽤 힘들었다. 겨우겨우 파일을 찾았는데 찾는 과정에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영화에 대한 평들을 볼 수 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명작이라는 찬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칭찬 일색이었다. 더구나 이 영화가 실화라는 것을 알면서 영화 시작부터 집중이 되었다.
특별한 해고 사유 없이도 쉽게 해고당하는 흑인 청년. 그것도 비비안이라는 여자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대부분의 미국 영화는 백인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영화는 흑인 주인공의 시각에서 풀어간다는 점부터 신선했다.
비비안이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찾아 간 백인 외과 의사 블레이럭은 지나치게 거만하다. 대중 매체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의사의 모습이었다. 까다로워 보이는 의사 밑에서 일하던 비비안은 의사의 연구실에서 의학책을 보고 어렸을 적부터 항상 의사가 되고 싶었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느끼는 부분인데 의학책의 인체를 보고 집중할 때의 그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처음에 ‘닥터’라는 호칭을 강조하던 블레이럭이 너무 권위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자꾸 보면서 느낀 점은 ‘닥터’라는 호칭을 자꾸 사용하게 함으로써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비비안에게 무의식중에 의사로서의 꿈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는 권위적이지만 의사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항상 생각하고 진정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한 사람에게 진정한 멘토가 되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 한편으론 그 당시에 자신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고졸 흑인을 기존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을 떨치고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백인 의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갓 선배가 된 나는 좋은 후배보다 좋은 선배가 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서서히 느끼고 있다. 단순히 잘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이끌어줄 위치에 있다는 것, 또 그 방식에 있어서 상대에게 다소 엄격하게 그러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대한다는 것이 약간 어렵게 느껴졌었는데 블레이럭을 보고 진정한 스승, 멘토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또 비비안의 경우,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있어서만큼은 비록 하찮고 보잘것없어도 완전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모은 돈이 한꺼번에 없어진 절망적인 상황.(아마도 대공황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힘든 것은 상황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상태에서 더 나아질 가망이 없다고 느낄 때이다. 그의 실망이나 허전함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의과대학의 꿈이 좌절되었지만, 단순히 이 일이 좋아서 힘들어도 그 일을 추구하는 비비안의 모습을 보며, 요새 의사 자체보다는 편한 미래에 안주하고픈 마음으로 의대에 오는 대다수 의대생들의 반성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꼭 의대가 아니더라도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생들 중 자신의 학교나 전공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그들이 정말 모두 국가에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대학에 들어올 때의 동기가 무엇이든 일단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의대생이나 의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어느 정도는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이 블레이럭의 조수로서 대학에 출입하자 외부인 이니 펀치를 찍으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펀치를 찍는 그 공간에는 흑인밖엔 없었다. 흑인이 가운을 입자 신기하게 쳐다보는 의사와 간호사들. 또 의사 한 명은 커피와 도넛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과연 그가 백인이어도 그랬을까. 이 몇 장면만 보고도 그 당시 흑인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앞부분에서 여자 의사가 심장에 관련된 이야기를 블레이럭에게 하자 훨씬 나이어린 백인 남자 의사들이 비웃던 모습도 나왔다. 그만큼 이 시기에는 흑인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편견에 시달리고 있을까. 물론 예전보다는 확실히 많이 나아졌고 앞으로도 우리가 많이 바꿔가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심장 이상으로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이 파란 아기도 나왔다. 의사들의 대화 중 심장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심장을 정지시켜야 하는 수술의 위험성 등에 대해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당시 의사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만 급급해서 자신이 배운 지식과 반대되는 쪽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현재에도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현재는 심장 수술에 대해 꽤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고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많은 수술들이 행해지고 있다. 모든 직업, 모든 사회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의사들은 아집이나 편견에 빠져서도 안 되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수정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인체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직도 매우 일부분에 불과하고 환자를 위해서라면 의사는 항상 기존의 지식에서 자꾸 나아가고 발전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전부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수정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영화나 드라마의 의사들은 외과 의사라는 점이다. 아마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일 것이다. 차라리 자라서 환자가 되겠다고, 그럼 바쁜 아빠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블레이럭의 딸의 모습에서, 또 항상 바쁜 비비안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아내의 모습에서 외과의의 삶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신부와 함께 온 블레이럭 앞에서 개를 끌어안고 있는 비비앙의 모습. 누가 봐도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를 안고 있던 비비앙의 모습은 단순히 허탈함이나 좌절감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파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비록 동물이지만 환자처럼 느끼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 충격 때문인지 그는 악몽까지 꾸게 된다.
개를 대상으로 한 실험의 실패와 그 이후에 얻은 깨달음으로 인한 기쁨. 외과 의사의 삶이란 얼마나 많은 환희와 절망을 오가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 때문에 비인기과라는 외과를 그래도 아직 많은 학생들이 희망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나는 과연 할 수 있을까, 감히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수도 없이 많이 했다. 물론 사람을 살려내었다는 기쁨 때문에 보람은 다른 의사보다 더 클 수 있겠지만 그것을 위해 거쳐야 할 수많은 불안과 긴장과 또 죄책감을 내가 과연 견뎌낼 수 있을지, 감당해 낼 수 있을지 두려운 느낌도 들었다. 책임감 없이는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블레이럭의 대사 중 “야망이 나를 무모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최근 방영하고 있는 의학 드라마 ‘하얀 거탑’의 장준혁이 겹쳐졌다. 과연 순수하게 환자의 안위를 위하는 마음이 의사의 전부일까. 정말로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한 적은 전혀 없는 것일까. 아직 여기에 대한 결론은 잘 모르겠다.
의사 자격증은커녕 의과대학에 들어가지도 않은 비비앙이 수술하는 모습을 보고, 물론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고, 13년동안 최고 외과의사 바로 곁에서 보조를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한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비안이 의과대학에 진학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을 겸비하고 있어서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눈을 감고 수술하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비앙의 천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영화적 설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에 그의 재능이 그렇게 천부적이라면 블레이럭은 비비안을 의과대학에 가서 정규 수업을 받고 의사가 되도록 도운 후에 수술에 참가하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게 실화라고 생각하니 그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두 번 있으면 그다지 좋을 일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의과대학에 들어간 다른 의사들보다 그의 능력이나 열정이 더 뛰어났다는 점을 보면서 현재 의대생들이 각성하는 정도로 삼아야지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좀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블레이럭 팀, 그러나 모든 영광은 블레이럭에게 돌아가고, 정작 중추적인 역할을 한 비비안은 의사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블레이럭이 동료들에게 하는 인사에 이름조차 올라가지 않는다. 보면서 느낀 것이 의사 자격증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유전학 시간에도 들었지만 ‘라이센스’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것, 나중에 나도 그런 위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새삼 내가 나중에 의사가 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고 한편으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었다.
결국 일한 만큼 대우받지 못하는 비비안은 폭발하고 실험실을 뛰쳐나온다. 외판원으로 떠돌던 그는 결국 실험실을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는 보상받지 못한 자존심보다 일 자체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물론 뛰어난 기술 덕분에 실험실의 디렉터라는 위치까지 나중에 올라가지만 일단 그 당시에는 차별과 편견과 불합리한 대응을 스스로 극복했을 비비안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비록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의 노력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약한 장애에도 쉽게 꺾이고 억울해하는 우리의 모습에 비하면 수십 년 동안(영화에서는 1964년까지의 일이 나온다.) 꾹 참아가며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 보인 비비안은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비비안을 알아본 블레이럭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닥터’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중요성이 있을까. 그 당시 그를 정말로 괴롭혔을 그 문제는 이제 의학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그에게 있어서는 작은 보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처음 들어올 때 펀치를 뚫어야만 들어올 수 있었던 바로 그곳에 이제는 블레이럭의 초상화와 함께 그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리게 되는 장면은 정말 뭉클했다.
쉽게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금방 포기하고 싶어 하는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개인의 명예를 우선하기보다는 의사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면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그것에 대한 보상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하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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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코이즈미 타카시 감독, 후카츠 에리 (Eri Fukatsu)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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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의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하는 ‘착한’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인 수(數).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수학의 세계에 매혹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순수한 것이야말로 수학의 세계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말로 설명하거나,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절대적인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박사의 말처럼 ‘용기와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느껴야 한다, 마음으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순수한 수학의 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리고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따뜻한 영화다. 부드럽게,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인도해주는.

10살인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쿄코. 배운 게 없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육체노동 즉 가정부 일뿐이지만 언제나 프로페셔널하게, 누구보다 활기차게 살아간다. 몇년간 수없이 가정부가 바뀌었다는 박사의 집으로 파견된 쿄코는 박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사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유지하는 시간이 80분밖에 안 된다. 더이상 박사에게는 추억이란 것이 없다. 한때 수학교수였던 박사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하루를, 외롭게 ‘수’만을 벗 삼아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멈추어진 채, 그저 반복되는 하루를 지워버리는 것뿐.

박사는 처음 본 쿄코에게 묻는다. 신발의 수치가 어떻게 되냐고. 24라고 답하자, 24는 4의 계승이고 고결한 숫자라고 말해준다. 이렇듯 박사는 언제나 수학 이야기만을 한다. 쿄코의 생일이 2월20일이라고 하자, 자신의 시계에 적혀 있는 284라는 숫자와의 관계를 말해준다. 220의 약수의 합은 284이고, 284의 약수의 합은 220이 된다. 그런 관계를 우애수라고 한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220과 284는 기묘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박사는 교코의 아들을 보고는, 루트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루트는 어떤 숫자이건 공평하게 감싸준다면서.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숫자로 설명할 수 있고, 숫자로 치환할 수 있다. 박사에게 수학의 세계는,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그 자체다.

처음에는 어딘가 괴팍한 사람이 아닐까, 라고 걱정했던 쿄코는 박사가 너무나도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쿄코가 박사의 저녁 식사를 해주는 동안 아들이 혼자 있다는 것을 안 박사는 매일 아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한다. 그날부터 박사와 쿄코 그리고 루트는 기묘한 가족이 된다. 모든 것이 달랐던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수학과 야구다. 그들이 누구이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건, 수학과 야구는 그들을 통하게 하는 다리가 된다. 박사가 수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타인과의 교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수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지역이나, 나이나, 성별 같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박사가 왜 수학을 택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박사가 왜 수학에 선택받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수학문제를 푸는 것은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수학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박사는 수학과 가장 닮은 것이 농업이라고 말한다.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고 보살피는 것이 농업이다. 수학도 자신의 필드를 정하고, 사색을 시작한다. 온갖 노력을 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은 씨앗의 자라는 힘이다. 농부는, 수학자는, 그저 그것을 북돋워주고, 발견할 뿐이다. 이런 통찰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사는 수학을 통해, 이 세계의 본질을 깨달은 현자다. 하지만 박사는 이미 이 세계에서 이탈된 존재다.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과거는, 여전히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슬프다. 아침마다 일어나 양복에 매달린 쪽지에 붙어 있는 ‘내 기억은 80분간만 지속된다’란 말을 보았을 때, 그는 탄식할 것이다. 날마다, 날마다 그 탄식은 반복된다. 박사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지나간 과거에서, 박사 혼자만이 머물러 있다. 그 쪽지를 본 박사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수학뿐이라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한 것은 수학뿐이라고.

수학의 본질은, 그것 자체로 완전하다. 완전수처럼. 수학이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수학의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수학을 하는 목적은, 진실을 찾는 것이라고 박사는 말한다.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박사와 똑같다. 박사는 더이상 현실과는 아무런 연계가 없지만, 박사는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용기와 현명함은,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쿄코와 루트는, 박사를 통해서 세계의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바로 오일러의 공식이다. ‘e를 π와 i를 곱한 수로 거듭제곱하여 1을 더하면 0이 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가 e 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 모순되는 것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결국은 무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정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박사와 쿄코와 루트가 만나 서로의 마음을 연결할 때, 영원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건 절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원작은 아쿠타가와 수상 작가인 오가와 요코가 2004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정수, 소수 같은 수학 용어가 서서히 시의 언어로 다가왔다’라는 평처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얼핏 차가워 보이는 수의 세계에 상존하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한껏 전해준다. 영화도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차분한 소설을, 정갈하게 영상으로 옮겼다. 조금 지루한 구석도 있지만, 수의 세계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그것 모두가 아름다움의 한 표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어른이 되어 수학 선생이 된 루트가 아이들에게 박사의 이야기를 전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영화판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무난하고, 정석을 따른 각색을 보여준다. 수학의 형식적인 딱딱함처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평범하게 관객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수’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순간, 쿄코와 루트가 그랬듯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늘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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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박사가 사랑한 수식>-보지 못하던 무(無)의 아름다움

 

쿄코는 9번이나 가정부를 바꾼 한 박사의 가정부로 취직한다. 박사는 교통사고로 인해 지난 10년간의 기억이 없고, 매번 단 80분밖에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 박사와 쿄코는 언제나 숫자로 된 같은 인사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박사는 쿄코에게 10살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친구가 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영화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전혀 가치 없어 보이던, 의미 없다고 느끼던 것들에 대한 생각을 단 117분 안에 바꿔놓으며, 우리를 멍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영화의 힘을 느끼기 위해서일 거다.
사고로 인해 1975년 이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용량이 단 80분밖에 안 되는 박사 때문에 쿄코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 매일 아침 ‘새로 온 가정부’라고 인사해야 하고, 그때마다 신발 사이즈를 얘기해야 하고, 박사가 직접 지어준 ‘루트’라는 별명을 가진 아들이 있으며, 그가 프로야구 팀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알려줘야 한다. 싫은 내색 한 번 안 한다. 쿄코와 루트, 루트의 야구 친구들끼리는 ‘박사님이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박사님에게 말하지 않기’라는 약속을 지킨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의미 없고 시간 낭비인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 작품은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비록 같은 일일지라도 반복할 수 있는 그 상황, 80분이 지나 모든 것이 백지로 돌아가 버린 그 상황,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분명히 불변의 진실은 존재하는 바로 그 상황.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전한다. 쿄코가 반복하는 대답과 루트의 순수한 마음을 빌려서 천천히. 조용하고 잔잔한 이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우리가 보지 못한 그 진실, 하지만 존재하는 그 진실이 울림을 주기 때문일 거다.
영화는 도저히 말로 정리할 수 없는 느낌을 준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중 첫 부분,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아라’를 처음 접할 때의 그 느낌 같은. 박사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느낌 같은. 정말 절묘하게 영화 마지막에 그 시구가 자막으로 흐르고,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수는 만물의 근원’이라는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영화는 수가 얼마나 완벽하고 아름다운지 다양한 수식을 통해 보여준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고고함을 유지하는 소수, 신의 의도로 운명적으로 묶인 우애수, 수천년 동안 단 30개밖에 발견하지 못한 완전수. 그럼, 박사님이 사랑한 수식은 무엇일까? 레오널드 오일러가 발견한 ‘e^πi+1=0’이다. 무한한 숫자인 e(네피어수)와 π(파이), 상상의 수인 i. 전혀 관계없는 이 숫자들이 결합한 수에 1을 더하면 0이 된다는 공식. 영화가 전달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모두 설명한다.-무비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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