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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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영어 회화 시간에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끝까지 다 보지도 못했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잡아끌만한 박진감 넘치는 장면도 없었던 이 영화는 한 친구가 아니면 아마 내 기억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조니 뎁을 무척 좋아하는 그 친구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면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그 때문인지 영화 보는 내내 긴 머리의 조니 뎁과, 타이타닉을 통해 좋아하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저능아 연기와, 이름은 모르지만 짧은 머리의 귀여운 캠핑족 아가씨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던 거대한 어머니와, 예쁘고 늘씬했던 여동생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른 영화들을 통해 이후에 조니 뎁의 팬이 되고 난 후, 그의 예전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 보던 중에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원제는 What's Eating Gilbert Grape 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먹고 있는가, 라는 제목은 책 전체와 참 잘 어울린다. 스물 넷, 한참 꿈을 가지고 키워나갈 나이에 가족 때문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길버트는 정말 누군가에게 먹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조니 뎁도 전형적인 할리우드 배우는 아니지만 극 중 길버트도 일반적인 미국 청년 같지는 않다.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훨씬 비슷하다. 

비록 절반도 보지 못했지만 인상적이었던 영화의 장면, 넘치는 좋은 평들에 불구하고도 별을 짜게 준 것은 답답함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길버트가 집을 불태우고, 베키를 만나 아픔을 극복해나가고, 가족들도 약간의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그런데 그게 뭐 어쨌냐는 것이다. 책 뒤 작가의 후기를 보니 17살 짜리 대학생이 감명 받았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 나이가 그 즈음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도 그 나이였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는 길버트의 나이와 비슷하다. 단순히 마음가짐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비록 눈 가리고 아웅식의 희망이더라도 두 세 시간의 독서 끝에 얻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인데, 이 책의 결말만으로는 그것을 꿈꾸기 어렵다. 여전히 어니는 길버트의 희생을 필요로 할 것이고, 다른 그레이프들은 제각기 갈 길 갈 것이다. 베키와는? 아마도 헤어지겠지. 극 중 베키는 열 다섯 소녀에 불과하니 나이가 한살 한살 먹어갈 수록 세상과 타협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세상이 워낙 팍팍하고 내가 고민이 많아서인지 어떻게든지 밝은 빛을 찾고 싶은 게 요즘 내 마음인가 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10대의 나에게는 막연한 동경이었지만 요즘은 빨리 끝내고 싶은 현실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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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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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존 쿠삭 주연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원작 소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책을 다 보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은 어떤지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이 상당히 좋아서 언젠가는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감명깊게 봤던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작가 닉 혼비가 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소년"에 불과한 남자 주인공의 성장기, 그 과정에서 사람들, 특히 여인들에 의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많이 닮아 있다.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은 유명한 작곡가를 아버지로 두어서 그 저작권료로 살아간다는 점이나, "하이 피델리티"의 주인공은 음반 가게를 운영한다는 점 등 두 작품 사이의 세세한 연결고리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저자 닉 혼비의 분신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이에게는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글쎄, 그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어바웃 어 보이"를 이미 접해서인지 다소 어린아이같은 면이 있는 남주인공이 두번째에도 크게 매력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에서의 휴 그랜트는 이기적이어도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어서 귀여웠는데. 만약 원작 소설이 이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영화가 소설을 효과적으로 풀어내었을 것이다. 아니면 휴 그랜트의 연기력이 그만큼 뛰었났겠지. 아마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도 비슷할 것 같다. 한글 영화 제목을 참 잘 붙였다는 느낌이 드는데, 원제에 비해 더 세련되고도 많은 것을 함축했을 듯한 느낌이 든다. 존 쿠삭의 연기도 좋을 것 같고. 한번 영화를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어바웃 어 보이"를 보고 난 만족감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아쉬운데, 원본을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번역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가 남발되어서 그런지 느낌상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 않고 중간 중간 끊어지는 느낌이 강했는데 비록 원본에 조금 어긋난다 하더라도 융통성있게 번역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생소한 브릿 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밑의 주석과 비교하면서 읽느라 전체 내용을 쫒아가기도 급급했다. 아마도 그 노래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끼는데 그쳐야만 했다. 하다못해 소설에서 언급된 장소를 사진으로 실어 놓거나 소개된 가수나 음반들을 뒤에 별도 주석을 달아 좀 더 상세히 언급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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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리플레이 ㅣ 판타 빌리지
켄 그림우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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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놀랍고도 괴이한 시간 이동의 현실이 이대로 쭉 계속된다면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반복해서 삶을 다시 살아가는 수밖에. 이 대체된 현실은 시시각각 한층 구체적이고 견고한 삶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흔세 살까지 산 그는 이제 여기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학 1학년생이며 열여덟 살이라는 것,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나이이며 졸업할 때까지 유치하고 지긋지긋한 수업 수십 개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이룬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어마어마한 부의 제국도, 더체스군의 집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호리호리한 몸집에 숙녀로 완성되어 가던 그레천,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눈빛의 귀여운 딸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는 지독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딸은 죽은 것도 아니고 이번 생에서는 아예 태어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다리를 부순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었다. 하지만 디어더 선생은 그를 용서해주었고 그 일로 곤란을 겪지 않게 보호해 주었으며 섣부르게 용서해주겠노라는 말을 해서 그를 모욕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분별 있는 분이었다. 그가 그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이 외로움과 까닭 없는 분노 때문이고 남편과 아기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일종의 배신으로 해석했기 때문임을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인생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제프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았고 남자로서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 물질적인 성공, 낭만적인 사랑,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벽하게 해냈으나……결국 무(無)로 돌아가고 그는 빈손으로 무력하게 홀로 내던져졌다. 최선을 다해 살아도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간은 이렇게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는 걸까?

 

“당신이 만든 작품만 사라지는 거죠.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노력에 있는 것이고, 그 노력은 삶이 재생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내면에 있으니까.”

 

“어떤 인생이든 잃는 부분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상실감을 감당해 내기까지 나 역시 정말 오랜 세월이 결렸고, 삶이 재생될 때 잃는 부분에 대해 앞으로도 완전히 달관하진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외면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대충 살아서도 안 되겠죠. 우리 몫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보람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언제 이 아이들을 잃을지 정확히 아는 거잖아요.”

 

“우린 세상에 변화를 주고 나아지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그저 매번 세상을 그 전과 달라지게 만들었을 뿐이에요.”

 

처음에 그들은 무한한 선택과 기회를 제공받으며 영원히 살 줄 알았다. 그래서 재생 때마다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을 비통함과 죄책감, 존재하지도 않는 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낭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찾아야 하는 답은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다 잘 해결될 것 같아요. 생각해 볼 여유도 많고요. 시간은 넘치도록 많으니까요.”

제프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착각인지 알고 있었다.

 

매번 삶이 재생될 때마다 그들은 늘 다른 선택을 했고 세상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늘 예측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쪽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제프는 잠재적인 실패를 감내하는 법을 배웠다. 실패로 얻은 것도 많았다. 그가 보기에 가장 완전하고 슬픈 실패는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인생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더 이상 ‘다음번’은 없다. 오직 ‘이번’이 있을 뿐이다. 방향과 결과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유한한 시간이 있을 뿐. 단 한순간도 낭비하거나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접한 시간 여행에 대한 역대 문학이나 영화 중 단연 이 책을 으뜸으로 놓고 싶다. 1986년, 내가 태어나던 그 시기에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그 어떤 시간 여행에 관한 작품도 판타지라고 치부할 수 있었으나 이 책은 현격히 다르다. 나또한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시간 여행을 경험할지 모르며, 어쩌면 지금 몇 번의 리플레이를 겪고 있는 도중이지만 아직 재생의 시점이 아니어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후세의 많은 시간 여행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다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제일 감탄한 점은, 매번 생이 리플레이 될 때마다 그 시점이 점점 뒤로 늦춰진다는 점이다. 즉, 두 번째 재생에서는 첫 번째 재생보다는 바뀔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며, 세 번째 재생에서는 두 번째 재생보다는 더 줄어들게 된다. 즉 재생이 반복될수록 재생 이전의 최초의 삶으로부터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최초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최초의 삶에서 좀 더 다르게 살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게 하며, 나또한 이게 내 최초의 삶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들게 하는 이유이다. 사실 모든 시간 여행에 대한 작품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Carpe diem.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라.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치게 만들었던 작품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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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D] 프라임 러브
대경DVD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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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 러브>의 커플은 참으로 남다르다. 여자는 9년간의 결혼 생활을 막 끝낸 37세 이혼녀 라피(우마 서먼). 패션업계에 종사하고 있어 감각이 장난이 아닌데다가 잘 가꾸어진 외모는 3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엄격한 유태인 가정에서 자란 23살의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 데이브(브라이언 그린버그). 화가가 되는 게 꿈이지만 집안에서 반대하고 있고 결혼도 꼭 유태인과 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이들의 사랑 앞에는 장애물이 많다. 제일 큰 문제는 나이. 아무리 미국이라도 14살 차이의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다음은 종교. 데이브네는 독실한 유태교 집안이다. 가족들은 혹시나 그가 ‘신앙심’을 잃을까 노심초사 한다. 또 있다. 경제적 격차. 여자는 멋진 집에서 사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고 남자는 자기 앞가림도 못해 부모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여자는 재즈와 와인을 즐기며 안정을 원한다. 남자는 힙합과 맥주를 즐기며, 닌텐도에 빠지면 잠자리도 잊어버린다. 여자는 아이를 갖고 싶고, 남자는 아버지가 되기엔 너무 어리다. “아아, 이게 과연 될까?”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두 사람이 딱 맞는 게 있다. 바로 속궁합!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프라임 (Prime)’이란 단어는 ‘제 1의’, ‘으뜸가는’, ‘훌륭한’, ‘더할 나위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섹슈얼 피크 (Sexual Peak)’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여성은 37세에, 남성은 23세에 가장 성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뜻이다. 사회문화적으로 완벽한 커플과 성적으로 완벽한 커플이 이렇게 다르다니, 정말 가혹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침대 밖에서 종횡무진하며 열렬하게 연애를 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위치한 사람이 바로 라피의 상담치료사이자 데이브의 엄마인 리사(메릴 스트립)다. 리사의 존재는 그냥 그런 연애담이 될 수 있는 이 영화에 특별함을 부여한다. 라피에게 ‘현재를 즐기라’며 적극적으로 영계와의 사랑을 부추겼는데 알고 보니 그 영계가 자기 아들이었다는 기가 막히는 상황. 여기서 리사는 엄마와 상담치료사 역할 사이에서 갈등한다.

 

설정은 독특하지만 <프라임 러브> 역시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들의 공식을 따른다. 첫눈에 반하고, 사랑하다가, 갈등하고, 다시 만났다가 하는 것의 반복. 그 와중에 라피는 “시들어 가는 자아를 다시 찾고”, 데이브는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다. 리사가 아들에게 해준 조언대로 “사랑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다”라는, 당연하지만 안타까운 진리를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준다.

 

나이 어린 남자와 나이 제법 든 여인이 맺어지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다만 바람일 뿐이다. 14살 차이가 나지만 남자는 성공하고 여자는 개종하고 그 나이에 애도 펑펑 잘 낳고 행복하게 늙도록 살았대요, 라는 건 어른들을 위한 동화일 뿐, 고개를 끄덕일 공감은 줄 수 없다. 인생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정말로 소중한 것은 나이 따위가 아니라는 지당한 사실은 우리보다도 이 두 사람이 먼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라피는 결국 데이브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라피는 데이브와의 미래를 여러 차례 곱씹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게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 사랑한다고 해서 불확실한 미래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 막 사회에 나온 데이브에게 세상을 가르치는 소리 따위는 귓가에만 울릴 뿐 머리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비록 인생 선배가 되어 줄 정도의 연륜은 없을지라도 말이 통하고, 삶에 위로가 되는 비슷한 연배의 누군가가 더 절실했을 것이다.

 

그 둘이 처음 만날 때 사랑에 빠지는 이유나 계기 같은 것은 없었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다. ‘프라임 러브’니까. 사랑 그 자체가 생겨나는 것에 이유가 있을 리 있다. 둘은 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결국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완벽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 2년 후, 혹시나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과 미소가 교차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다.

 

세 배우의 연기는 모두 훌륭하다. 킬빌의 여전사 우마 서먼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연상녀가 정말 잘 어울린다. 브라이언 그리버그도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이 훈훈하다. 23살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는 8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백미는 단연 메릴 스트립이다. 말할 수 없이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소파에 드러누워 수선스레 가슴을 쓸어내리는 걸 보고 있자면 그 능청스러움에 입이 떡 벌어진다. <맘마미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어디에서도 <프라임 러브>의 리사를 찾을 수 없다.

영화 곳곳에서 뉴욕의 잔잔한 모습은 아름다웠다. 미국 유태인들의 풍습을 엿볼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다. 배경음악인 레이첼 야마가타의 'I wish your love'는 덤이다.

 

 

 

David Bloomberg: [lying in bed, making love] I want to make a baby with you.

Rafi Gardet: I can't. I can't do this to you. You don't want to.

David Bloomberg: You want to. It's what you want so I want it.

Rafi Gardet: But you don't. You would regret it.

David Bloomberg: I want to give you this gift.

Rafi Gardet: I know. And it's the sweetest gift anyone has every given me. The fact that you are willing to do this for me shows how deep your love goes. That's the gift I'm taking from you inst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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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D]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자크 헬름 감독, 나탈리 포트만 외 출연 / 대경DVD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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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참 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가장 울리는 법이다. 또 하늘 아래 뻔하지 않은 사람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지금 나의 상태는 그 뻔한 이야기가 가장 절실한 때다.

 

신기하게 주인공 몰리의 나이는 스물셋이다. 지금의 나와 동갑. 거기다 배우는 내가 좋아하는 나탈리 포트만. 스물셋의 나이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어릴 적에 피아노 신동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지금은 장난감 가게의 매니저인 몰리. 자기만의 곡을 작곡하고 싶어도 마음만 앞설 뿐 자기 스스로도 포기 상태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스물셋의 나이는 아마 그럴 것이다. 현재 자기가 있는 곳은 만족스럽지 않고, 내가 정말로 가고자 하는 길은 마치 마법처럼, 달콤하고 환상적이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같고. 내가 품고 있는 꿈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여기서 접어야 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훨씬 나이 많은 어른들처럼 마냥 버릴 수는 없는 것. 딱 그 상태이다. 나나 몰리나.

 

마음먹은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비록 마법처럼 불가능해보일지는 몰라도 이루어지고야 만다고, 네가 믿어야 할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너 자신이라고. 참 뻔한 이야기인데도 이렇게 와 닿는 이유는 성인이 된지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동화 속 마술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잊지 못하는 내가 화면을 보며, 아 정말 저런 장난감 가게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할 정도로 화면 속의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들이 너무 귀여웠고, 예뻤기 때문이다. 색색깔의 장난감 가게는 회색으로 변해버린 이후의 모습이 마음 아플 정도로 너무나도 귀엽고 예쁘게 화려했다. 에릭이라는 꼬마도 귀여웠고, 몰리 역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와 닿은 건 그녀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나이이기 때문이겠지. 인기 있는 배우라도 몰리의 고민은 할 테니까.

 

5년, 10년이 흐른 뒤 이 영화를 보아도 이렇게 감동 깊을까? 아니 1년 전에, 불과 한 달 전에라도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지금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분명한 것은 영화 속 회계사처럼 다 큰 어른들에게도 마법을 믿었던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 그건 없어지지 않고 깊이깊이 간직되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은 알겠다.

 

아마도 이 영화는 몰리의 나이대의 사람들이 보아야 가장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얼핏 보면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이 영화의 안에 담긴 내용은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이다. 영화 안에서 몰리가 난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니라며 장난감 가게를 팔 결정을 내렸을 때 에릭은 그게 바로 마고리엄이 가게를 물려준 이후라고 답한다. 과연 나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 철부지일까, 아니면 끝까지 쥐고 있는 것이 철부지일까.

 

과연 몰리는 어떻게 했을까? 그녀가 마법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백화점을 운영하게 되었을지, 아니면 자신의 꿈을 가지고 계속 음악을 했을지. 계속 음악을 해야 논리상으로 맞을 것 같은데 영화만 보면 장난감 가게에 남았을 것 같기도 하고. 이 궁금증은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이 영화를 떠올렸을 때 저절로 해답이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까.

 

그나저나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 나오는 더스틴 호프만 장면은 무슨 뜻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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