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2학년 영어 회화 시간에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끝까지 다 보지도 못했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잡아끌만한 박진감 넘치는 장면도 없었던 이 영화는 한 친구가 아니면 아마 내 기억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조니 뎁을 무척 좋아하는 그 친구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면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그 때문인지 영화 보는 내내 긴 머리의 조니 뎁과, 타이타닉을 통해 좋아하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저능아 연기와, 이름은 모르지만 짧은 머리의 귀여운 캠핑족 아가씨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던 거대한 어머니와, 예쁘고 늘씬했던 여동생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른 영화들을 통해 이후에 조니 뎁의 팬이 되고 난 후, 그의 예전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 보던 중에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원제는 What's Eating Gilbert Grape 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먹고 있는가, 라는 제목은 책 전체와 참 잘 어울린다. 스물 넷, 한참 꿈을 가지고 키워나갈 나이에 가족 때문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길버트는 정말 누군가에게 먹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조니 뎁도 전형적인 할리우드 배우는 아니지만 극 중 길버트도 일반적인 미국 청년 같지는 않다.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훨씬 비슷하다. 

비록 절반도 보지 못했지만 인상적이었던 영화의 장면, 넘치는 좋은 평들에 불구하고도 별을 짜게 준 것은 답답함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길버트가 집을 불태우고, 베키를 만나 아픔을 극복해나가고, 가족들도 약간의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그런데 그게 뭐 어쨌냐는 것이다. 책 뒤 작가의 후기를 보니 17살 짜리 대학생이 감명 받았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 나이가 그 즈음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도 그 나이였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는 길버트의 나이와 비슷하다. 단순히 마음가짐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비록 눈 가리고 아웅식의 희망이더라도 두 세 시간의 독서 끝에 얻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인데, 이 책의 결말만으로는 그것을 꿈꾸기 어렵다. 여전히 어니는 길버트의 희생을 필요로 할 것이고, 다른 그레이프들은 제각기 갈 길 갈 것이다. 베키와는? 아마도 헤어지겠지. 극 중 베키는 열 다섯 소녀에 불과하니 나이가 한살 한살 먹어갈 수록 세상과 타협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세상이 워낙 팍팍하고 내가 고민이 많아서인지 어떻게든지 밝은 빛을 찾고 싶은 게 요즘 내 마음인가 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10대의 나에게는 막연한 동경이었지만 요즘은 빨리 끝내고 싶은 현실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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