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빈둥 환타스틱 유럽여행기
환타(김환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 여행, 여행...

 

각종 여행서는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여행 블로그는 왜 저렇게 많은 건지,

 

또 가고 싶은 곳은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유럽 여행이 더 이상 사치나 로망이 아닌 일상으로 자리잡은지 어느 정도 되었기에,

대학생들의 한달 가량 유럽베낭여행, 그리고 그때 야간열차를 타며 수많은 나라를 거쳤던 대학생들이 취업한 후 직장인이 되어 1년 휴가를 최대한 붙여서, 혹은 황금연휴에 열흘 정도로 학생 때 갔던 유럽의 국가 들 중 한 두 개 국가를 집중적으로 보고 오는 이른바 탐사적 여행은 내 주변에서도 종종 보게 되는 경우이다.

 

글쓴이도 학생 때 유럽 여행을 처음 다녀오고 나서 7년 후, 사회인이 되어 다시 유럽을 가게 된다. 계기가 좀 특이하다. 결혼을 앞두고 그 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별 후, 마음을 추스리고자 유럽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친구의 일정을 짜 주다가 멋도 모르고 갔던 7년 전에 비해 이제 아서 유럽에 간다면 더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하자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이유로 차이게 되었다고. 이왕 이렇게 된 것, 결국 그 친구와 같이 유럽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긍정적인 사람인 걸까, 아니면 시간이 흘러 전부 추억으로 웃음지을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걸까, 계기도 계기지만, 책을 읽다보면 절대로 여행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개그요소를 찾아내는 능력때문인지 계속 행복하게 웃으면서 여행기를 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지금도 연재중인 한 포털의 웹툰 때문인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머 있고 밝은 내용이 참 사랑스러웠다.

 

이 책만의 특장점이 여러 가지가 있다.

첫번째, '빈둥빈둥'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은 여타 다른 여행기와는 다르게 읽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숨가쁜 일정이 짜여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유롭게, 때로는 마음이 가는 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읽으면서도 여유롭다.

두번째, 책의 사진은 직접 저자가 찍었다고. 그래서인지 다른 여행기에 비해서는 유명한 건축물이나 풍경들이 강렬하게 다가온다거나 시선을 잡아끈다거나 하는 사진들은 많지 않다. 대신 꼭 내가 여행 다녀왔을 때 찍었던 사진들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정감이 가고, 눈이 편안하고, 천천히 음미하게 한다.

셋째, 글과 사진으로만 차 있는 여행기가 아니라 만화로 일정이 전부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꼭 웹툰을 보는 것처럼 재미도 있고, 순간순간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또 글 한 두줄을 아무래도 만화로 풀어서 그리다보니 책은 두껍지만 내용은 벅차지 않고, 그만큼 사진의 양은 또 줄어서 그만그만한 여행기들에 비해 개성이 있다.

넷째, 이 여행기에서만 볼 수 있는 유용한 팁들. 환전, 맛집, 할인, 물가, 날씨 등은 어떤 여행책에도 많이 나오기도 하고 또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금방 뜨는 정보들이다. 그런데 몇몇 정보는, 아, 정말 유용하면서도 재밌기도 하다. 예를 들면,

 

짐싸는 요령, 에서 애매한 멋내기용 옷과 신발은 안 가져가는 게 좋고, 화장품은 샘플로 챙기라는 것 정도는 한두번 여행한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입술이나 손, 발, 팔에 전부 바를 수 있는 바셀린을 추천하거나, 까만색 쫄티와 레깅스는 평소 내복처럼 입다가 잘때는 잠옷으로 입을 수 있다는 말에는 빵 터졌다. 그러다 혹시 레스토랑이나 클럽에 가려는데 가져온 옷 중 마땅찮은게 없다면 망고나 H&M에서 저렴하면서도 핫한 아이템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니 해외 패스트패션 업체들이 국내에서 지나치게 비싸다고, 오히려 외국에서 더 저렴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루이비통 본점의 매장은 아주 큰데다, 세일까지 겹치면 한국보다 최고 몇십만원은 더 싸지만, 꼭 사지 않더라도 세일 기간에는 워낙 사람이 많아 윈도 쇼퍼도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다고. 매장 안 아트북 코너도 있고 화장실도 쓸 수 있으니 쇼핑 아니더라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는 부분에서는 내가 20대 초반, 학생 시절에 갔을 때는 전혀 몰랐던 부분이라 다시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가면서 예전에 내가 갔던 장소를 다시 떠올리는 기분도 쏠쏠했는데, 눈에 들어온 부분이 노트르담 성당 정문 앞 '푸엥 제로'. 파리 거리 측정의 기점이 된다는 대목을 읽자마자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이미지 확인을 해 보았더니 역시나! 당시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재수가 10년 좋다고 그렇게 들어서 발을 디디고 사진을 찍었는데, 돌아와 보니 재수가 좋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대체 이 장소가 어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대체 몇 년 만에 알게 되었는지! 아무튼 기분이 좋다. 다시 파리에 가게 된다면, 나도 글쓴이처럼 자전거를 빌려 마트 다녀오며 바구니에 바게트도 꽂아보고도 싶고, 일정 때문에 결국 못 가 보았던 퐁피두도 가고 싶다.

 

프랑스 파리-스페인 바르셀로나-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이 여행기에서 상대적으로 스페인의 비중은 작은데 그 이유는 글쓴이가 즉흥적으로 프랑스에서 2주동안 더 머문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페인에 도착한 첫 날, 할부도 끝나지 않은 아이폰을 집시에게 도둑맞은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활발하게 돌아다니지 못한 까닭도 있다. 내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때도 우리 일행 중 카메라를 도둑맞은 사람도 있었고,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 사람도 있었다. 매사 경계하고 의심하는 성격 때문에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도 받았고, 좀 더 과감한 여행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지 않고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어 신기하기도 하고 새삼 뿌듯하기도 했다.

 

도난 사건만 없었다면 스페인 이야기가 좀 더 풍성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생겼다. 내가 안 가본 국가가 스페인이라서 더 그랬던 듯.

 

항공권 연장이 되지 않아 고민하다 그냥 귀국 비행기표를 날리고 편도를 새로 사면서 이탈리아에 2주를 머무르게 되었는데,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숙소에서 매일 아침 베드로 성당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가는 길에 샌드위치나 조각피자를 사서 성당 광장에서 점심을 먹으며 일광욕을 하고, 그러다 심심해지면 성당미사도 들어가보고 끝나면 베드로 성당 내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근처에서 어슬렁대기도 하고... 저자 생애 이렇게 고급스러운 산책이 또 어디 있겠냐고 했는데, 아, 정말 정말 부러웠다.

 

개인적으로 다시 유럽을 갈 수 있다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스페인도 가고 싶지만, 로마와 베네치아 두 도시만 보고 돌아왔던 이탈리아 전국 일주를 해보고 싶다. 밀라노에 가서 말로만 들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보고 저자의 말대로 말로 할 수 없는 그 느낌도 받아보고 싶고,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고 가슴 두근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폼페이 유적지도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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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자전거여행 - 전2권 ㅣ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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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전거에 풍륜이라고 이름 붙였다니 역시 작가는 다르다. 

자전거 타지도 못하지만 만약 잘 탄다고 하더라도 이름까지 붙이기에는... 

아니 어떤 물건이든 아무리 애착이 가더라도 이름을 붙이는 건 

아이도 아니고 이 나이에 너무 오그라든다고 생각되는데 

자세히보니 초판 출간 당시 작가의 나이가 52세다.

 

 

 

2. 어릴 때는 왜 김훈이 찬사를 받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뜨겁고 열정적인 문장도 없고 시선을 잡아끌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오로지 그 부분만 생각나는 강렬한 장면도 없는 것 같아서였다. 

나이가 들수록 재료 본연의 맛을 찾게 되는 것처럼 

김훈의 글은 처음 접했을 때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읽으면 읽을수록 곱씹게 된다. 작가가 펼쳐놓은 세상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다보니 함부로 빨리 빨리 책장을 넘기지를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극적인 맛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은 음식 뿐만이 아닌가보다.

 

 

3. 이 책은 김훈의 다른 책보다 더 심심한 편이다. 

아무래도 화자인 '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여행기는

소설이나 시처럼 작가의 창작된 세계를 접할 때보다

독자 입장으로서는 인간대 인간으로 작가를 접하기 마련이 아닌가.

더구나 책 속에 나와 있는 지명 또한 전부 이 반도에 분명히 있는 곳,

한때는 내가 머물렀고, 우리 부모의 고향이며, 내 친구가 살고 있는 곳.

이런 이유로 작가와 개인적인 밀착을 원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내가 약간 그런 편이다. 

 

 

4. 초판 27쇄, 5년 후 나온 개정판 11쇄. 

그 이후 출판사를 옮겨서 다시 재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 이후 불어닥친 국내 여행의 붐, 1박 2일 같은 프로그램의 인기와 

각종 올레길, 둘레길, 그 외에 수많은 이유로 인해 이 책은

국내 여행자들, 꿈꾸는 자전거 주인들의 바이블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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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1disc) - 리마스터 버전
론 하워드 감독, 에드 해리스 (Ed Harris)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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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였을까, 얼마 전에 포털사이트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제니퍼 코넬리'의 모습이 메인에 등장했다. 당시 10대 소녀로 주인공의 첫사랑으로 등장했던 제니퍼 코넬리의 모습은 브룩 쉴즈를 닮은 것 같기도 했고, 올리비아 핫세의 느낌도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칭송도 한 때 들었다고.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영화 개봉 후 단박에 스타덤에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올 해 초에 개봉한 영화 '노아'에서도,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영화인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에서도 제니퍼 코넬리는 출연했었다. 그 영화들을 보았는데도 제니퍼 코넬리의 이름은 특별히 기억에 나지 않았다. 절정으로 아름다웠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시들어버리는 것일까. 오히려 전형적인 미인에서 벗어나 있던 여배우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고혹적이 되거나 원숙해져서 그 아름다움이 풋풋했던 시절보다 더 발하는 것 같은데, 젊은 시절 정석으로 아름다웠던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밋밋해지고 평범해진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절대 편견이나 선입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제니퍼 코넬리 개인에게 아주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러셀 크로우야 이 영화 이전의 LA 컨피덴셜, 인사이더, 글래디에이터, 프루프 오브 라이프, 그리고 이 영화 이후의 신데렐라맨, 어느 멋진 순간, 로빈후드, 레미제라블, 그리고 노아에 이르기까지 영화 자체의 흥행뿐 아니라, 한번 영화를 보면 관객의 머리에서 그 모습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출연하는 그 어떤 배우보다 강하게 기억에 남는 배우이지만, 제니퍼 코넬리는 뛰어난 미모는 물론이고, 예일과 스탠포드의 졸업장을 받은, 아마도 할리우드에서 흔치 않을 지성을 보유한 배우일텐데, 인상깊은 작품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 영화는 제니퍼 코넬리라는 한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인 20대 후반에 촬영되었고, 영화의 성공은 물론, 호평과 함께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의 상까지 획득했다. 이 영화에서의 제니퍼 코넬리는, 정신분열병인 남편을 끌어안고, 한동안 수입이 없는 남편을 위해 일을 해야 했으며, 육아까지 혼자 전담해야 하는 역할이다. 심신이 바닥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버텨내며, 끝까지 남편 곁을 지킨다. 러셀 크로우는 굉장히 기가 센 배우라서 웬만하면 상대역이 압도당하기 마련인데, 남편이 전적으로 아내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제니퍼 코넬리의 외유내강의 캐릭터가 상대를 끌어안으며 정점을 찍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분이 가장 영화에서 빛나는 부분이며, 또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의 제목(이며 동시에 이 영화의 원작의 제목)에 가장 부합한다.

 

눈물 흘리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고, 남편을 떠나고 싶은 마음, 그로 인한 죄책감, 그리고 애써 걱정이나 슬픔을 누르는 모습은 보석같이 느껴져서, 참 재능있는 여배우가 생각보다 활발하게 활동을 못 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그 장면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요소는 정신병, 사랑, 성공,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이 영화에는 맞춘 것처럼 들어있다. 실제 존 내쉬는 영화에서보다 사생활에서 더 비판받을 부분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평생을 환각에 시달렸고 정신병원을 몇차례나 드나들었던 존 내쉬의 불행에 공감과 안타까움이 몇 그램 덜해진다 하더라도, 노벨상을 수상한 그 순간까지 옆을 든든하게 지킨 아내의 헌신의 무게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실화라는 것이 정말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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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 오드리 헵번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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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마릴린 먼로가 1순위였다고. 원작자도 처음에는 먼로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의외로 오드리 헵번이 한다고 해서 관계자들이 놀랐다고, 마릴린 먼로가 했어도 굉장히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아마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2. 이 영화는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이 되었다. 티파니 유리창을 들여다보며 크루아상과 커피를 먹고 있는, 검정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한, 오드리 헵번의 모습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긴 담뱃대를 손에 들고 정면을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은 이제 오드리 헵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되었다.

 

3. 개인적으로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에 가장 맞는 영화는 로마의 휴일이 아니었나 싶다. 유럽의 공주, 우아하고 고상한, 또 보호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이같이 순수하면서도 귀엽고 발랄하고 청순한 느낌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 콜걸치고는 오드리 헵번은 지나치게 우아하고 고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보는 내내 마릴린 먼로가 했더라면 먼로 특유의 백치미와 잘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길이길이 남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창녀이면서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묘한 분위기 때문에 이 영화가 자꾸 잔상에 남는 것 같다.

 

4. 대사 중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하는 귀걸이는 그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뜻이라는 대사가 와닿았다. 진주 귀걸이가 어울릴 것 같다며 선물한 남자가, 여자를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니 흐뭇하다.

 

5. "Moon river"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남는 명장면 하나! 영화를 안 봐도 알고 있는, 창문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 개인적으로 유럽 여행 갔을 때 네덜란드 풍차마을의 기념품 가게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던 오르골이 생각이 났다. 음악은 가장 강력한 기억의 매개체이다.

 

6.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 훌륭하다기 보다는 음악, 패션으로 오래오래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드리 헵번이 창가에 걸터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그 유명한 장면은 영화사 사장은 삭제하자고 했으나 헵번의 고집으로 살아남은 장면이며, 영화 속 헵번의 의상 또한 당시의 글래머러스한 미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던 헵번이 자신의 매력을 가장 잘 살려낼 수 있는 디자이너 지방시를 선택하고, 끊임없이 그와 교류하며, 스스로도 엄청나게 연구한 결과로 현대까지 사랑받는 스타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정말 오드리 헵번이 온전히 좌우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극적인 사건이 있거나 눈을 떼지 못할 배경이 펼쳐진다거나 기가 막힌 대사가 나온다거나 하지 않는다. 늘 등장하는 장면도 극히 단조롭고, 나오는 사람도 제한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영화와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하는 할리우드에서 왜 그녀가 당대의 스타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는 아이콘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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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선현경의 일일일락
황인숙 글, 선현경 그림 / 마음산책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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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요법이 신앙치료나 정신의학보다 중요하다. 기술을 습득하게 되면 그 기술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해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삶의 의미도 형식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령 노숙자에 대한 에릭 호퍼의 처방이다. 기술이란 뭔가를 고치거나 만드는 재주다. 그러니까 삶의 기반이 되는 물질세계에 가장 쓸모 있는 재주다. 설사 별 쓸모없더라도 어떤 기술이 있다는 것은 머리와 손끝이 팽팽하게 소통하고 있다는 건데, 그건 생명감을 자극한다.

내게도 뭔가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 재미있고 너무 고되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은 기술, 뭐 없을까? 알량하나마 내가 가진 유일한 기술, 기술記述하는 기술技術이 그렇긴 하지만 다른 진짜 기술 말이다.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돈벌이도 되는 양재, 미용, 요리, 제과, 도배, 스포츠 마사지 등등 소프트한 기술. 그런게 그런 기술양성 학원들은 왜 하나같이 곧 사라질 듯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상가 건물에 숨어 있는 걸까?

그곳에서 습득한 기술로 영세 자영업자가 된 사람들이 홀연히 모여들어 파트릭 모디아노 소설의 배경같은 상가를 이룬다.

-> 짧은 글에 소중한 내용이 가득하다. 에릭 호퍼의 처방도 그렇고,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도읽어보고 싶다. 무엇보다 재미있으면서 고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소프트한 기술에 대한 로망은 나도 있었기에 공감이 갔다.

 

1년여 틈틈이 전화통화를 시도하다 지쳐서 더 이상은 전화를 걸지 않게 된 친구가 있다. 그녀와 친하게 어울리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문득 생각나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됐다. 너무 기뻤으나, 그녀는 남편과 모처럼 외식 중이라며 오기를 거절했다. 그전 같았으면 마주 반기며 남편과 함께 나중에라도 합류했을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통화였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내가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이용해서 나인 줄 모르고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 인생에서 퇴출된 모양이다. 나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도 내게 과분할 정도의 호감을 가졌었다. 그 호감을 지키지 못한 게 씁쓸하다.

우리가 따르는 한 어른이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을 때였다. 그 집들이 연락책을 맡아 그녀에게도 연락했는데 오기로 하고 오지 않았다. 그 며칠 후 웬일인지 궁금해서 다시 전화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시무룩이 "근데 무슨 일이라구요?" 물었다. 순간 벌컥 화를 내며 전화를 거칠게 끊어 버렸다. 다른 일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큰일이 그녀에게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그녀의 마음이 굳게 닫힌 뒤다.

-> 짧은 이 전문의 제목은 퇴출이다. 인간관계에서는 퇴출당하는 쪽보다 퇴출하는 쪽이 더 가슴아픈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회피나 불편함 정도로 설명 되지 않는다. 나 또한 실제로 누군가를 내 인생에서 퇴출시켰던 경험이 있기는 있었다. 그 때의 가슴앓이를 생각하면 근거없이 마음이 아파져서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다. 또 그 경험을 겪고 나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소극적이라면, 억지로 적극적이 되려고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나또한 부족한 인간이기에, 상대가 나를 로그아웃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다.

 

 

체제도 관습도,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아무것도 거스르지 않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착실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이 별일 없이 굴러간다. 그들이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고 집을 고치고 물건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며 '별 볼일 없는' 인새을 거부하지 않은 덕분에 혁명가도 반하아도 예술가도 히피도 태어나고 살아갈 수 있다. 삶의 엄연한 쳇바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 그들이라고 나는 말한다. '우리'가 아니고. 그건 내 인생이 별 볼일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세상의 장남 장녀들에게 얹혀사는 족속이라는 걸 알 따름이다. 그 같은 족속인 우리가 등 대고 다리를 뻗던 듬직한 존재가, 어느 날 문득 자기의 인생을 별 볼일 없다 비하하며 뼈저려 하는 걸 보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하다.

->일본 영화 '유레루'를 보고 작가가 느낀 점. 아, 정말 내 가슴을 친다.

 

 

지금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 제법 체화돼 만사 덤덤한 편이지만 예전에는 나도 기가 죽거나 비탄에 빠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대개 '생애주기'가 걸림돌이었던 것 같다. 학업 적령기에 놀고 있던 것, 내 나이 평균보다 항상 가난했던 것, 꽃다운 청춘시절을 고치 속에서 보내고 훌쩍 장년에 접어든 것 등등.

동갑내기 남자인 한 친구가 장가간다는 말을 들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삽십 대 초반이었다. 그와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난 것도 아니고, 그저 보면 반가운 친구였을 뿐인데, 기분이 무지 이상했다. 마치 한밤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마지막 술래가 된 듯했다. 다들 집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혼자 남아 두리번거리는.

-> 이 느낌을 나도 느꼈었고, 내 주변 친구들도 느끼고 있다. 혼자만 뒤쳐지는 그 느낌을 숨바꼭질하다가 마지막 술래가 된 경우에 비교하다니! 한밤중에 혼자 남았구나, 하는 그 두려움, 절실히 다가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애주기는 내가 흔히 알고 있는 생애주기와는 사뭇 다른 개념인가보다. 어쩌면 개념은 하나인데 잘못 인용해서 쓰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날 저녁, 루비처럼 예쁜 핏방울 모양의 배지를 아버지께 수줍게 보여드리며 헌헐을 자랑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 칭찬은 못하실 망정 헌혈했다고 야단을 치다니. 실망했지만, 자식이 자해한 꼴을 본 것 같았을 아버지 심정을 알 듯도 했다.

-> 나이가 들면 자식을 낳지 않아도 부모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특별히 시인이라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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