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1988년 일본에서 개봉하였고 2001년에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들어온 토토로를 내가 처음 본 시점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01년보다 전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 학교 담임 선생님이 틀어주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식으로 들어온 버전이 아니라서 자막 없이 화면만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선생님은 어떤 경로로 토토로 파일을 가지고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토토로는 단연 지브리의 마스코트이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사람도 토토로 캐릭터를 못 알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좋아해서, 종종 챙겨보는 편이다. 얼마 전 지브리 전시회에도 다녀왔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서 중간중간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틈틈이 챙겨보기로 했다. 동심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힘들고 지칠 때 늘 위로가 되니까.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작품이며,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한 작품 중에서도 첫번째 아니면 두번째 정도의 작품인 것 같다. 그 유명한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맡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의 기본 패턴인 여성, 동심, 자연, 순수, 동물, 전설, 민담 등의 키워드가 총집합해 있다는 점에서 후대에 나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의의를 제외하고나서라도, 이 애니메이션은 예쁘고 발랄하다. 좀 짧기도 하고, 구성도 단순해서 어른들이 즐기기에는 좀 힘들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더라면 커서 보면서 향수를 느낄만한 구석이 많다. 중간중간 남자 주인공이 아무 말 없이 여자 주인공에게 우산을 들이미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잔상으로 남아있다.

 

다만 토토로를 치면 자동적으로 검색어에 괴담이 같이 뜨는데, 그 괴담은 안 보는 편이 나을 뻔했다. 의식하지 않으려해도 영화를 보면서 계속 그 괴담이 의식이 되었다. 오죽하면 지브리 측에서 해명 인터뷰까지 했을까. 그만큼 이 만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뜻이겠지. 나무 그루터기를 통해 바닥으로 떨어져 토토로를 만나며 신기한 모험을 하게 되는 모티브는 아마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떠올린 게 아닐까 싶고 비록 꿈이었지만 순식간에 자라는 커다란 나무는 '잭과 콩나무'에서 따온 게 아닐까 싶다. 이것 외에도 이런 저런 장치가 많을 것이라고 예상은 되지만, 굳이 의식하지 않고 보아도 충분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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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책 표지를 펼치자마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겉표지 뒷쪽, 작가의 설명의 첫 문구가 '자전거레이서'.

 

김훈은 소설 뿐 아니라 수필 '자전거 여행'으로도 유명하다.

 

'풍륜'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줄 정도로 자전거에 대한 애착이 큰 데, 단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도 요즘 작가들 중에서는 사소한 부분을 괜히 부풀리거나 스스로를 이슈화 만들려는 모습이 간혹 보여서 약간 거부감이 든 적도 있었다. 물론 김훈의 글을 보면 그가 허례허식이나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설명에 그 어떤 이력보다 제일 먼저 자전거를 타는 사람, 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때는 그가 얼마나 소박하고 꾸밈없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떠올렸었다. 기자로, 작가로, 살고 있는 김훈이기에 그 직업에 대한 애환이 등장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독자를 끌어들일 만한 제목을 잘 붙인 책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자를 낚기 쉬운 제목을 붙인 책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닌 것 같다. 김훈의 책이고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절판 된 것을 보면 제목으로 인해 독자를 끌어들였다가 오히려 그 제목과 글의 내용의 불일치로 호감이 깎이게 된 것이 아주 조금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머리말에서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두 운명 사이에는 사소한 상호관련도 없다는 또 다른 운명도 보인다. 하루의 시간이 흘러서, 아침과 저녁의 냄새가 바뀌고 빛의 밀도가 성기어진다. 천지를 가득 메운 대낮의 빛들이 사위는 저녁에는 숲의 안쪽까지 잘 들여다보이고 숨쉬기가 편해진다. 빛이 성긴 저녁, 사물의 안쪽은 잘 드러나는데, 그때 대낮의 빛들은 모두 하늘로 불려 올라가 한강 어귀의 노을로 퍼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빛과 노을과 쥐와 새에게로 건너가지 못하고 마루에 주저앉아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이제 묶는 조각글들은 이 물가에 살면서 내 영세한 생계를 버티어내기 위해 쓴 것들이다. 본래 그러한 것들을 향해 입을 벌려 지껄일 필요는 전혀 없을 터인데, 나는 일 삼아 지껄였고 지껄일수록 가난해졌으니 불쌍하다. 나여, 어째서 늙은 강물 옆에서 침묵하지 못하는가.

 

이 문맥만 놓고 보면, 밥벌이를 하기 위해 글을 썼고, 여기에 있는 글조차 다르지 않으며, 이제 늙은 자신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다. 글쎄, 젊은 작가가 패기넘치게 비록 배는 곯을지언정 나의 길을 가겠다고 외치는 모습과는 사뭇 대비되어 마음이 아프고 쓸쓸하다. 어디 김훈 뿐이랴. 대한민국 작가 중에 손 꼽히는 이 사람이 이렇다면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누구나 다 지겹도록 밥벌이를 하면서 살 것이고, 다 먹고 살기 위해서, 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다. 하여, 김훈의 이 말은 오히려 수많은 우리 같은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조각글들 중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글을 보면 이 책을 쓸 때의 김훈의 생각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이라는 글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하나'라는 존재의 모습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산 속의 무덤들은 여럿이 모여 있지만 그 모임은 군집일 뿐 소통은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개별적 행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들 혼자 죽어서 저 혼자만의 무덤을 이룬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갈 때, 세상의 질감은 완전히 바뀐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 풍경은 '함께'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이라는 실체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둘'이란 그 '하나'의 중첩에 불과한 것인가. 새 두 마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풍경과 대치하고 있기보다는 새끼리 서로 대치하고 있다. 두 마리가 날아갈 때 '너'와 '나' 같은 인칭이 발생하고 비로소 언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발생한다. 세 마리는 '너'와 '나'와 '그'를 이룬다. 세 마리는 각자의 일인칭을 거느리면서 삼인칭의 공간을 날아간다. 세 마리가 날아갈 때, 언어는 더욱 교묘해지고 복잡해진다. 세 마리는 가장 편안한 세상의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 마리가 날아갈 떄도 새들은 역시 한 마리씩 날아가고 있다. 세 마리가 이뤄 내는 세상 속에서 한 마리가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세 마리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새 세 마리는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새들이다. 하나와 둘과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두에게 환영받을 만한 문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반가운 구절도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또 무서워하는 물건은 자동차다. 나는 짐을 가득 싣고 달리는 10톤 트럭이나 탱크롤리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주로 기차를 타고 간다. 자동차 중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차는 서너 명씩 타게 되어 있는 승용차다. 시내에서 볼일 보러 다닐 때는 가까우면 걸어서 가고 세 정거장 이상 거리면 버스를 타고 간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지만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을 잘 들여다보면 일상 속에 죽음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며, 죽음과 일상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쾅 소리 한 번에 튕겨져 나가면 모든 것이 끝장이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 죽기를 각오한 자는 마침내 죽을 것이고, 그가 죽는 과정에서 또한 남을 죽일 것이다. 겁 많은 사람들이 이 하찮은 삶을 그나마 애지중지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자동차가 이처럼 늘어났으니 되도록이면 거리에 나가지 않아야겠다.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이라는 조각글의 일부이다.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교통사고에 대해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심해서 절대 나쁠 게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작가의 말대로 나는 겁이 많으니까 애지중지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도 되겠지. 어쩌면 소소한 자신의 특성을 설명한 글일 수도 있고, 어쩌면 폭력과 광기를 의미하는 모든 것을 전부 거부하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에는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에게는 전쟁가지도 문명의 질서와 규칙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허영심이 있다.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은 이 허영심을 법제화하고 있다.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를 엄격한 질서와 규율의 통제하에서 운영한다. [삼국지]의 세계에서는 기만, 술수, 뒤통수치기, 뒤에서 쏘기, 함정파기 같은 무질서와 야비함이 선명한 전술로써 작동된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라 [삼국지]에 가깝다. 국가의 기원이 폭력이라는 학설은 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렵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성이 있다. 제네바협정처럼, 문명개화된 허영의 규칙으로 전쟁의 과정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질서와 규칙을 지켜가면서, 문명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포로를 신사적으로 대접하면서 살육을 자행하자는 예절 바른 전쟁 규칙은 살육의 야만성을 정당화한다. 제네바협정은 추악한 위선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글은 <치욕>이었다.

 

나는 1948년생으로 올해 55살이다. 전쟁 때 유아기를 보냈고 이승만 치하에서 자라나 박정희 유신 통치 밑에서 신문기자를 했고 전두환 시절에 엎드려 있었다.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래도 일본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태어난 운명에 나는 감사한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고통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일이 두렵다. 이 두려움은 내가 체험한 시대의 두려움에 바탕하고 있다. 내가 지금의 신분과 역할로 일제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일은 식은땀 난다. 나는 인간의 역사 속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치욕을 긍정한다. 치욕을 도려내버린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언어화된 이념일 것이고, 역사는 치욕과 더불어 비로소 온전할 터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상해와 중경에서 김구 선생을 모셨던 임정의 청년이었다. 그분은 김구 일행과 함께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동포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그 비굴한 대다수의 동포들이 바로 민족과 국토와 언어를 보존한 힘이었다"라고. 그때, 나는 내 아버지의 늙음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당대의 사람들이 친일과 반민족의 고통을 말할 때, '늙음'의 바탕 위에서 말해주기 바란다. 내 말은 그 '늙음'의 마음으로 친일과 반민족의 치욕을 뭉개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그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치욕으로써 긍정하자는 말이다. 치욕을 긍정하는 또 다른 치욕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또한 감당되어야 할 치욕인 것이다.

 

그 어떤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보다도,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 특히 가장 힘 없고 비참하며 보호받기 힘든 약자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철도 파업의 현장에서 쓴 <늙은 기자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다.

 

24시간 맞교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노동제도이다. 24시간 맞교대는 하루나 이틀이라면 몰라도 그 직업을 생애로 삼아야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제도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자명함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진보이기 때문에 24시간 맞교대가 부당하고, 보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타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토록 분명하게도 부당한 것들의 부당함이 보이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이 이른바 이념이라는 것이었을까. 명백히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는데, 이처럼 막대한 손실과 갈등을 대가로 치루어야 하는 것이 이른바 발전의 원리인 것인가.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가. 기어이 '본때'를 보여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노동 조건의 개선을 절규하는 무수한 담론과 소설과 시와 음악이 있엇다. 결국 개선은 '본때'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의 성취 내용을 송고하면서 늙은 글쟁이는 비통했다. 말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처럼 어려워야 하는가.

 

나는 학창시절 김지하나 신동엽 등 저항 시인의 시를 공부하며 자랐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미국의 한 유명 작가의 말을 사춘기 이전부터 깊이 새겼던 사람이라 늘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선망과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세상의 물질적인 욕구에 초연하고, 늘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으며, 조용히 나의 할 일을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진실에 눈을 뜨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그래서 이 구절은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아마도 글쓰기가 밥벌이가 된다면, 이렇게 자신의 일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무력감에 빠지게 될까. 아무리 귀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직접 직업이 되면 그 당사자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허탈감을 안겨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작가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유일하게 작가가 이 글에서 긍정하는 것은 민중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백성들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수몰되지 않는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때는 석탄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간 에너지였다. 지금 석탄산업은 완전히 저물어간다. 석탄산업이 저물어가자 많은 광부들은 탄광을 떠났고, 늙고 병들어서 떠날 수조차 없는 광부들은 산재병원에 입원했다. 김윤식 씨는 "자식들이 취직해서 좀 살만해지니까 죽을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은 진폐의 먼지로 그의 호흡에 실려 그의 허파속에 앙금으로 엉겨 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섰다. 대박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카지노는 연일 불야성이다. 김윤식 씨의 큰 딸 김선명 씨는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한다. 김선명 씨 뿐 아니라 이 카지노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지방 광부의 자녀들이다. 젊은이들은 카지노, 호텔로 변해버린 고향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김선명 씨는 "옛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양쪽 다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늙은 광부가 진폐로 쓰러져가고 인간의 삶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져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다치거나 망가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망가진 사람들의 내면에 끝끝내 망가질 수 없는 부분들은 여전히 온전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뿌리뽑히고 거덜난 삶 속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발견하는 일은 늘 눈물겹다. 고난에 찬 삶을 통해서 말없는 실천에 도달한 그들의 삶은 성자의 삶처럼 보였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허무함을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김훈의 책 [칼의 노래]에서 주인공 이순신도 그랬고, 수많은 백성들도 그랬다. 고통과 허무함을 인식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말없이 견뎌내는 것, 그게 김훈이 찾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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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 레일라 하타미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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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브루카: 전신을 가리고 눈 부분에는 망사 형태.

니캅: 전신을 가리고 눈 부분만 가리지 않은 형태.

차도르: 전신을 가리고 얼굴만 가리지 않은 형태.

히잡: 두건 모양으로 얼굴만 내놓은 쓸 것으로 상체만 가리는 형태.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헷갈려서 정리를 해봤다. 여기에 나오는 여성들은 히잡의 형태.

 

영화랑 크게 상관없는 것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히잡을 쓴 여인들은 다 예뻐보였다. 히잡 자체가 악세서리 역할을 하는 느낌? 이란이 페르시아계통이라는데(영화에서는 페르시아 어를 쓰는 것으로 나온다. 중간에 딸이 어떤 단어를 말하자 아버지가 그것은 아랍어라고 페르시아 어를 이야기하라고 하는 부분도 있다.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역사도 언어도 다른 건가, 싶었다.) 원래 그 민족이 다 그런 것인지 고대 여신 느낌이 날 정도로 예뻤다. 화려하게 예쁜데 히잡을 쓰면서 은은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만약 쓴다면 어떨까, 머리가 가렵지 않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했다.

 

이슬람 문화라는 것은 참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 같다. 10년 전쯤이었나? <이슬람> 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고 꽤 여러 번 언론을 탔던 것 같은데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것이 결국 못 읽고 지금까지 왔다. 우리가 많이 오해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유럽이나 미국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왜곡된 부분도 많이 있을 텐데 실제로는 어떤 문화일지 궁금해졌다.

 

이 영화에서는 현대 이란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다른 나라를 아는 방법은 그 나라에서 만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활발한 것 같은데(별거 중인 아내는 교사이며 가정부가 소개받는 의사도 여자이다. 부부의 딸도 꽤 공부를 잘 하는 것 같고 그 딸의 미래를 위해 부모는 이민까지 생각한다. 딸의 가정교사도 여자다.) 문화적으로는 남녀의 구분이 철저한 것 같아서 조금 신기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지만, 그저 막연히) 현대적인 나라인 것 같은데 아직도 코란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거나 하는 그런 종교적인 믿음과 전통도 신기했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이 현대와 전통이 혼재하는 이란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신기했고,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영화가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보는 내내 나데르 때문에 화가 많이 났다. 등장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일말의 타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 답답했다. 마지막에 결국 이 별거는 파국을 피하지 못하는데 끝까지 별거를 막고자 아버지 곁에 머물렀던 딸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짐작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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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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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 내가 이 책을 접한 것은 아마도 학교 선배의 싸이월드를 통해서였다. 싸이월드라고 하니 꽤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당시 이 책을 읽을 생각도 없었으면서 왜 그 사실이 이렇게 기억에 강하게 남는지 모르겠다. 아마 평소 그 선배에 대한 내 개인적인 편견이, 책을 잘 안 읽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살짝 보기에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인생의 무게에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소설책을 읽고 느낌을 싸이월드에 적어놓았다는 사실이 좀 놀라워서였다.

 

그 이후에 내가 이 책을 접했던 경로는, 아마도 모 소설가의 수필집에서였다.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 책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세번째로 내가 이 책을 접했던 경로는, 카톡 친구 중 한 명이 카카오스토리에 이 책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24년 동안 형제처럼 붙어 제냈던 친구와 자신의 아내로부터 한꺼번에 배신당한 주인공이, 헤어진 지 41년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내용이다. 구성도 단순하며, 등장인물과 장소도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분량은 채 300쪽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 우정, 배반, 분노, 명예, 신의, 운명에 대하여 끝까지 추적함으로써 깊은 감동을 던지고, 그 과정에서 장황한 설명이나 수식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게 만들고 더 새기게 만든다.

 

아마도 이 책은 한번 읽음으로써 끝나는 책이 아니라, 내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생각날 것 같고, 그때마다 읽어가면서 새롭게 의미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인생을 그리 많이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어떤 의미에서건 하나에 집중하여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의 삶이 마치 손으로 더듬어 형체를 느낄수는 있을지언정 하나하나 상세한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아마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지금의 나로서는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아마도 크리스티나와 헨릭의 짧은 결혼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돈 많고 신분 높은 젊은 남편, 소도시의 초라한 집에서 병든 노인과 단둘이 지내던 일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처녀 시절, 크리스티나는 결혼 초기에만 하더라도 헨릭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서야 사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전체에서 말하고 있듯이 헨릭의 어머니, 콘라드, 크리스티나는 같은 부류이며 헨릭과 헨릭의 아버지는 이들과는 다른 부류이다. 그러나 헨릭의 어머니는 헨릭의 아버지와 평생 헤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이 부부는 각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순응하고, 어떻게든 서로에게 적응하며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 부분이 계속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헨릭이 크리스티나에 대해 묘사한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의 일지를 읽지 않고 던져버린 부분, 크리스티나가 임종 전에 헨릭을 찾았다는 부분을 보면 이 둘은 서로 다른 부류일지언정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헨릭은 아마도 그 다른 면 때문에 크리스티나에게 끌렸을 것이고, 크리스티나는 그 다른 면 때문에 남편이 아닌 콘라드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너무 늦어버렸을지언정, 크리스티나가 남편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맞는 것 같다. 분노로 8년 동안 그녀를 보지 않았다는 헨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인생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취향과 공감, 동질성의 차이로 남편의 친구에게 사랑을 느낀 크리스티나, 그러나 그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외로워야 했으며 헨릭은 지독히도 사랑하는 크리스티나를 전 생애에 걸쳐 떨치지 못했으면서도 그녀를 그냥 죽게 내버려둔다. 이들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엇을까. 그리고 진실을 가린 거짓은 무엇이었고? 이들은 자존심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대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대체 어디에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는 있으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지금 나에게 중요한 문제들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다만 최근 며칠동안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할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특히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헨릭이 그 촛불이 사그라들기 직전까지 열정을 잃지 않는 그 힘으로 전 생애를 버티고 살아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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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약국 -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언어학자의 51가지 처방전
박현주 지음, 노석미 그림 / 마음산책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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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애는 특별하지만, 그 특별한 사건들이 모여서 일상을 이룬다. 그래서 사람들의 연애는 모두들 닮아 있다. 나의 예로써 타인을 설명할 수 있고, 타인의 예로써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앓고 있는, 연애로 생긴 질병. 이 질병은 떄로는 감기처럼 가볍게 지나가고 떄로는 독감처럼 오래 앓게 한다. 백신도 없는, 감염율 100퍼센트의 질병.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을 만큼 심하지 않고, 완치되지 않아도 그냥 살아갈 수 있지만 가끔 마음에 반창고 한 개가 필요하다. 많은 연애지침서들이 명로하게 처방을 내려주는 것과는 달리, <로맨스 약국>은 어떤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연애로 생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자기 자신뿐, 이 책은 이미 자신 갖고 있는 처방에 따라 약을 건네주기만 할 따름이다. 처방전은 이미 마음 속에 있다. 연애의 질병에 걸렸을 때는 스스로 처방을 내려 약을 타러 오기를.

 

책머리에 中 

 

굉장히 인상적인 구절이었다. 왜 로맨스 병원이 아닌 로맨스 약국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 또한 연애에서 발생하는 로맨스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질병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동일한 질병, 누구에게나 올 수 있지만, 사람마다 질병의 경과는 다르듯이 연애 또한 그렇다. 언어학자라서 그럴까, 비유가 적확해서 아름답다.

 

계속 읽으면서 알랭 드 보통의 사랑 3부작과도 비견할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 이게 섣부른 생각이었구나 하는 게 중반부터 느껴진다. 사랑의 시작과 진행, 결말까지 보여주는 보통의 에세이에 비해서, 여기 나와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대부분이 사랑의 시작에만 집중되어 있다. 다만 아직 '썸'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전연애단계' 혹은 '유사연애단계'라는 단어로 그 상황을 설명한 부분은 나름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정 남자(혹은 여자)에게만 끌리거나 끌어당기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은 best. 그러나 그 외의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약간 김빠진 콜라같은 느낌이 든다. 수많은 연애서, 남녀의 심리에 다룬 책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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