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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내가 이 책을 접한 것은 아마도 학교 선배의 싸이월드를 통해서였다. 싸이월드라고 하니 꽤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당시 이 책을 읽을 생각도 없었으면서 왜 그 사실이 이렇게 기억에 강하게 남는지 모르겠다. 아마 평소 그 선배에 대한 내 개인적인 편견이, 책을 잘 안 읽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살짝 보기에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인생의 무게에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소설책을 읽고 느낌을 싸이월드에 적어놓았다는 사실이 좀 놀라워서였다.
그 이후에 내가 이 책을 접했던 경로는, 아마도 모 소설가의 수필집에서였다.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 책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세번째로 내가 이 책을 접했던 경로는, 카톡 친구 중 한 명이 카카오스토리에 이 책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24년 동안 형제처럼 붙어 제냈던 친구와 자신의 아내로부터 한꺼번에 배신당한 주인공이, 헤어진 지 41년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내용이다. 구성도 단순하며, 등장인물과 장소도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분량은 채 300쪽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 우정, 배반, 분노, 명예, 신의, 운명에 대하여 끝까지 추적함으로써 깊은 감동을 던지고, 그 과정에서 장황한 설명이나 수식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게 만들고 더 새기게 만든다.
아마도 이 책은 한번 읽음으로써 끝나는 책이 아니라, 내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생각날 것 같고, 그때마다 읽어가면서 새롭게 의미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인생을 그리 많이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어떤 의미에서건 하나에 집중하여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의 삶이 마치 손으로 더듬어 형체를 느낄수는 있을지언정 하나하나 상세한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아마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지금의 나로서는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아마도 크리스티나와 헨릭의 짧은 결혼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돈 많고 신분 높은 젊은 남편, 소도시의 초라한 집에서 병든 노인과 단둘이 지내던 일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처녀 시절, 크리스티나는 결혼 초기에만 하더라도 헨릭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서야 사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전체에서 말하고 있듯이 헨릭의 어머니, 콘라드, 크리스티나는 같은 부류이며 헨릭과 헨릭의 아버지는 이들과는 다른 부류이다. 그러나 헨릭의 어머니는 헨릭의 아버지와 평생 헤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이 부부는 각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순응하고, 어떻게든 서로에게 적응하며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 부분이 계속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헨릭이 크리스티나에 대해 묘사한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의 일지를 읽지 않고 던져버린 부분, 크리스티나가 임종 전에 헨릭을 찾았다는 부분을 보면 이 둘은 서로 다른 부류일지언정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헨릭은 아마도 그 다른 면 때문에 크리스티나에게 끌렸을 것이고, 크리스티나는 그 다른 면 때문에 남편이 아닌 콘라드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너무 늦어버렸을지언정, 크리스티나가 남편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맞는 것 같다. 분노로 8년 동안 그녀를 보지 않았다는 헨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인생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취향과 공감, 동질성의 차이로 남편의 친구에게 사랑을 느낀 크리스티나, 그러나 그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외로워야 했으며 헨릭은 지독히도 사랑하는 크리스티나를 전 생애에 걸쳐 떨치지 못했으면서도 그녀를 그냥 죽게 내버려둔다. 이들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엇을까. 그리고 진실을 가린 거짓은 무엇이었고? 이들은 자존심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대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대체 어디에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는 있으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지금 나에게 중요한 문제들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다만 최근 며칠동안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할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특히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헨릭이 그 촛불이 사그라들기 직전까지 열정을 잃지 않는 그 힘으로 전 생애를 버티고 살아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