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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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 번은 한 여성 작가의 수필집에서 이 책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보았고, 그 길지 않은 설명 속에 이 소설을 시작하는 첫번째, 두번째 문장이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기억.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언급한 기억.

 

무엇보다 어.두.운.상.점.들.의.거.리. 라는 이 책 제목이 자꾸 마음을 흔들었고,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본 수필집과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사이에 그 일이 있었고, 아마도 그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관심히 급격히 높아져서 이 곳 저 곳에 언급되다 보니 내가 많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했나 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평생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변주하며 글을 썼다고 스스로 밝혔다고 한다. 내가 읽은 모디아노의 책은 이게 유일하지만, 이 책은 모디아노가 평생을 파고든 단 하나의 테마를 설명한 책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다고 하니, 아마도 이 책만 제대로 보아도 모디아노에 대해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제는 이 책만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것.

 

이 책의 주인공은 기 롤랑이라는 탐정. 어떤 특정한 사건 이후로 기억을 상실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파리의 흥신소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일을 하게 된다. 흥신소 주인이 일을 정리하고 니스로 낙향하면서 기 롤랑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한 추적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일 것이라고 확신하다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정은 틀렸음을 알게 되고, 추적 과정에서 만난 이 사람은 내 인생에서 이런 의미를 가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그 추정은 틀렸음을 확인한다. 결국 가장 가까웠던 세 명,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만나지 못한다. 그저 주변 사람들만 만나서 계속 탐문하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조각조각을 모아 기우는 과정을 해야 하고, 결국 그 기억의 총합은 마치 듬성듬성 빠진 퍼즐처럼 미완성 상태에 계속 머무른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기억조차도 불확실한 것이 아닌가.

 

이 책을 읽다 보면 영화 '메멘토'가 떠오른다. 물론 주인공의 기억 상실의 방향이 전향성과 후향성으로 다르며, 한 쪽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저런 쪼개진 기억들의 파편을 붙들어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려 애쓰는 과정은 많이 닮아 보이며, 결국에 진짜 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과연 나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적도 없는 나의 기억은 얼마나 완전한 것이며, 과연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를 처음 본 사람이 나에 대해 소개해 달라고 한다면 여태까지 이러저러하게 살아온 과정을 설명할 텐데, 그 과정은 나의 기억에 의한 지극히 주관적인 단서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진짜 나라는 것은 나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진실한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을 프레디라고 생각하고, 프레디 입장에서 마치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과거를 서술하지만, 결국 자신은 프레디가 아니고 페드로라는 것이 밝혀지고, 다시 페드로 입장에서 과거의 중요한 사건을 길게 서술한다. 그런데, 만약 이 소설이 좀 더 길어진다면, 주인공은 프레디도 아니고 페드로도 아니고 또다른 제 3자로 결정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주인공은 또 다시 그 사람 입장에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고... 즉, 주인공이 페드로라는 것도 사실 불확실한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을 페드로라고 생각했기 떄문에 구체적으로 페드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고, 만들어진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의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전에 프레디라고 믿고 마치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프레디 입장에서 기억을 서술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나를 만난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중에서는 내가 상대를 기억하지만 상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나는 상대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대는 나를 잘 기억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설령, 둘 다 서로를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내 생애 전체로 보았을 때 아주 일부에 불과한 시간만을 공유한 타인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사소한 부분들이며, 그 부분 조차도 시간이 흐르면서 색이 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나와 상대가 서로에게 가지는 의미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 즉, 나의 인생에서 상대의 가치와 상대의 인생에서 나의 가치가 늘 같을 수는 없다는 것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주인공이 여행하며 만난 이런 저런 사람들이 주인공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어쩌면 주인공을 한때 만났던 사실조차도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기억에서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 주인공의 자아 찾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세밀해서 혹시 나중에 이 사람이 중요한 인물로 다시 등장하려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배신당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이것 또한 작가의 계산이라면,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일까, 생각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 또한 독자들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면서, 누군가의 인생에는 비중있는 조연일 것이고, 누군가의 인생에는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들 나름대로의 스토리는 얼마든지 쓰여질 수 있으며, 그 이야기에서 그들은 주인공이고, 이 책의 주인공은 또 거기에서 스쳐지나가는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총 마흔 일곱 장으로 되어 있다. 노력해서 일부러 장을 마흔 일곱 장으로 맞추었다는 느낌이 있다. 어떤 장은 단 한줄의 주소로만 이루어진 장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책이 시작되기 전, '루디를 위하여 아버지를 위하여'의 그 루디가 태어난 해가 1947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 뒤쪽에 나오는 연보에서 태어난지 10년만에 세상을 떠난 남동생 루디를 무척 아꼈던 작가는 1967년에서 1982년 사이에 발표한 초기 작품들을 루디에게 헌정했다고 나와 있다. 태어나 단 10년을 살다간 남동생이 적어도 서른 일곱살까지는 작가를 강하게 지배했다는 뜻이다. 동생의 죽음은 작가의 어린 시절의 종말을 의미했고 작가는 이 시절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지닌다고 연보에도 설명되어 있는데, 과연 그 둘의 관계는 어떤 사이였을까,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의미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 10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혹은 그 10년 뒤에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작가는 계속 그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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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완전판)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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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꼬마 병정이 밥을 먹으러 나갔네.

하나가 사레들었네. 그리고 아홉이 남았네.

아홉 꼬마 병정이 밤이 늦도록 안 잤네.

하나가 늦잠을 잤네. 그리고 여덟이 남았네.

여덟 꼬마 병정이 데번에 여행 갔네.

하나가 거기 남았네. 그리고 일곱이 남았네.

일곱 꼬마 병정이 도기로 장작 팼네.

하나가 두 동강 났네. 그리고 여섯이 남았네.

여섯 꼬마 병정이 벌통 갖고 놀았네.

하나가 벌에 쏘였네. 그리고 다섯이 남았네.

다섯 꼬마 병정이 법률 공부 했다네.

하나가 법원에 갔네. 그리고 네 명이 남았네.

네 꼬마 병정이 바다 향해 나갔네.

훈제 청어가 잡아먹었네. 그리고 세 명이 남았네.

세 꼬마 병정이 동물원 산책 했네.

큰 곰이 잡아갔네. 그리고 두 명이 남았네.

두 꼬마 병정이 볕을 쬐고 있엇네.

하나가 홀랑 탔네. 그리고 하나가 남았네.

한 꼬마 병정이 외롭게 남았다네.

그가 가서 목을 맸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기속된 죄인들입니다.

에드워드 조지 암스트롱, 당신은 1925년 3월 14일, 루이자 메어리 클리스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에밀리 캐롤라인 브렌트, 당신은 1931년 11월 5일에 일어난 베아트리스 테일러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 당신은 1928년 10월 10일, 제임스 스티븐 란더를 죽에 했습니다.

베라 엘리자베스 클레이슨, 1935년 8월 11일, 당신은 시릴 오길비 해밀턴을 죽게 했습니다.

필립 롬바드, 당신은 1932년 2월 어느 날 동아프리카의 원주민 스물한 병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존 고든 맥아더, 당신은 1917년 1월 1일, 아내의 정부인 아서 리치먼드를 죽게 했습니다.

앤터니 제임스 매스턴, 당신은 작년 11월 14일, 존 콤스와 루시 콤스를 죽게 했습니다.

토머스 로저스와 에딜 로저스, 1929년 5뤟 6일 당신들은 제니퍼 브래디를 죽게 했습니다.

로렌스 존 워그레이브, 당신은 1930년 6월 10일에 에드워드 시튼을 죽게 했습니다.

법정에 선 피고 여러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할 말이 있습니까?」

 

아마도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이기는 한데, 애거서 크리스티도 생전에 스스로 선정한 'best 10'에 이 작품을 포함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작품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구성은 아주 독특하면서도 창의적이었을 것 같다. 후대에 많은 작가들이 이 작품에 대한 오마주 혹은 패러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보았던 만화 '소년 탐정 김전일'에도 참석자 수만큼 준비된 인형, 그리고 그 참석자 중에 살인자가 있다는 설정을 차용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기억이 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에서도 당당히 하나의 규칙으로 등장한다. '김전일'에서는 당연히 오마주였을 것이고, 게이고의 소설에서는 극복해야 할 식상한 법칙 중 하나로 등장한다. 193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후대 작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 후 수많은 탐정 소설에서 이 규칙이 등장하면서 이 기막히게 고안된 장치는 그저 그런 클리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니 이른바 장르 문학의 대표주자인 게이고가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하면서 쓴 '명탐정의 규칙'에 당연히 상투적인 대상으로 올라와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식상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이전에 읽었던 다른 장르 문학에서 본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며, 그 이유는 단연코 이 작품이 그만큼 유명하고 뛰어나기 때문인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이 얼마나 짜임새가 있는지 알 수 있다. 형식미라고 할까. 정확히 열 명의 등장 인물. 그리고 각각의 운명이 일치하는 노래 내용. 외부와의 소통이 완전히 끊긴 소설 속 무대. 그야말로 완전 범죄. 형식에 얽매인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정확히 준수하여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한 쾌감과 만족감이 있으며,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각각의 스토리를 부여하면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인물마다 극과 극으로 설정함으로써 만약 나라면 이 열 명 중 누구에게 제일 가까울까?라는 하고 싶지 않은 가정을 자꾸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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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리처드 J. 라이더 & 데이비드 A. 샤피로 지음, 김정홍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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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위대한 심리학자 칼 융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인생의 아침 프로그램에 따라 인생의 오후를 살 수는 없다. 아침에는 위대했던 것들이 오후에는 보잘 것 없어지고, 아침에 진리였던 것이 오후에는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유명한 교육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독창성이야말로 행복하고 충만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시키는 필수요소라고 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만든 신조어 '라이프스타일'은 이제 거의 '독창성'의 반대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이란 쇼핑센터에서 사들이는 물건, 즉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공자에서 틀에 넣고 찍어낸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행복에 만족할 수 있을까?

 

직장 동료를 만나도, 친구를 만나도 어제와 똑같은 이야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말만 주고받는다. LA 다저스의 4번 타자가 병살타를 친 이야기, 어느 유명 스타가 이혼한 이야기, 인기 드라마 주인공들의 패션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 정작 '너'와 '나'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대화의 탈을 쓴 이 무수한 잡담은 각자가 짊어진 가방을 더 무겁게 할 뿐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마이클 아가일은 행복의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질적으로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조건은 인간관계, 일, 여가,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 세 분야에서 만족의 경지에 이르는 데 있어 절대적 혹은 상대적 부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융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생의 절반, 즉 30대 중반을 넘긴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삶을 종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그들이 병들게 된 것은 현존하는 종교들이 선사하는 깨우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되찾지 못한 환자들 가운데 온전히 치유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지닌 것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그 자체로도 즐거울 뿐 아니라 그것이 쌓여 점차 우리 존재를 완성하는 기쁨의 근원이 된다."

 

삶에 대한 메시지 하나라도 붙잡으려면 오히려 삶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은 오직 살아봐야만 풀 수 있는 수수꼐끼로 가득 차 있다. "삶이 무엇인지는 삶의 뒤편에서 봐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반드시 앞을 향해 살아나가야 한다."라고 했던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사실 도구의 수명과 직업의 수명이 같아지는 현상은 늘 있어 왔다. 물레의 달인은 방직기의 등장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맷돌을 만들던 사람은 믹서가 발명되면서 실직자가 되었다. 만일 당신이 어느 특정한 도구로 경력을 쌓아왔다면 당신은 그 도구의 만수무강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결국 도구가 아닌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다면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당신의 재능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현재 당신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하건-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아니면 자기 집 지하 작업실이든-당신의 주인은 오직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유일한 고용주는 바로 당신 자신이며,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사업체다. 그리고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종합적인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병이나 깡통, 신문 따위를 재활용할 수 있는데, '나'라고 재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직업세계라는 이 변덕스런 바닥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자신을 재활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 즉, 가지고 있는 가방들을 다시 꾸려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당신의 직업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만큼 안정적이라 할지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삶과 일을 다시 꾸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이든 숙달되는 순간부터 싫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중년을 어떻게 묘사하든 인생의 절반 무렵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며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시기에 접어든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자문한다.

"지금쯤은 그래도 뭔가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인생에는 미리 설치된 무대도 전환점도, 그리고 예측 가능한 중년의 위기 같은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개 예기치 않는 사고나 개인적인 경험, 경제 상황, 그리고 살고 있는 시대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사람들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목적과 성공의 매 단계를 드나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삶의 한계와 가능성을 좀 더 요령껏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칼 융은 우리가 40대나 50대 혹은 그 이상이 되면 자신의 삶이 균형을 잃었다는 생각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느 특정 분야에만 시간을 쏟아 붓고 나머지 분야는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제 '미지의 자아'를 발견해야 할 떄가 된 것이다.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행복을 찾아 움켜쥐는 것부터가 애초에 글러먹은 시도일 뿐이다. 행복은 붙잡자마자 시들기 때문이다. 사실 가방을 다시 꾸리는 작업도 그렇다. 그것은 당신이 계속해서 탐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베이스캠프 같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당신 안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17세기 철학자 베네딕트 스피노자는 중년에 가방을 다시 꾸리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우선 흔히 사람들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즉, 부와 명예 그리고 오감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쏟았던 자신의 노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것들이 매력은 있지만 결코 진정한 행복은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커다란 발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행복이나 불행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순간의 매력이나 일시적인 가치를 사랑한다면 행복 또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좀 더 지속적인 가치를 사랑한다면 행복 또한 좀 더 오래갈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다시 꾸린 내 가방 속에는 철학 공부에 대한 열망에 다시 불을 비피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 공부에 몰두하다 보니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다행스럽게도(또 놀랍게도)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래서 책을 마지막으로 손보고 있는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 일을그만두고 철학박사 학위를 따겠다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대학원과 그 안에 기다리고 있는 온갖 도전이 눈앞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동급생들보다 거의 스무 살은 더 나이 먹었을 누군가의 모습이. 길을 잃을까 두렵지 않으냐고? 물론 두렵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기회를 그냥 보내버리고 난 뒤 남은 생애 동안 내내 그 기회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워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만약 학위를 딴다면 그 학위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솔직히 첫 학기를 잘 통과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다가올 변화에 가슴 떨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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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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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아마도 에브리맨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 한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작은 돌멩이가 연못에 던지는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돌멩이가 그리는 동심원이 커지는 느낌이다. 나는 정말 아마추어일 뿐인가, 적어도 내가 성공하고 싶은 분야에서 나는 영영 아마추어일 것인가, 평생 아마추어로 살 것인가.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는 여러 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둘다 너무 젊고 분노가 강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고 분노가 강해 이해 못했다. 사실 이해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외려 그가 이해할 수 없었다-그들이 지금까지도 집요하고 또 진지하게 격분하면서 그를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그의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엇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자세는 그럼 용서받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그 결과가 덜 해로운가? 그는 이혼을 하여 가족을 깬 미국 남자 수백만 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들의 어머니를 떄렸는가? 그들을 때렸는가? 그들의 어머니를 부양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그들을 부양하지 못했는가?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나한테 한 번이라도 돈을 구걸해야 했던 적이 있는가? 내가 한 번이라도 모질었던 적이 있는가?  할 수 있는 제안이라면 다 하지 않았던가? 무엇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할 수 없었던 일, 즉 그들의 어머니와 결혼한 채로 계속 사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일을 했으면 그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었을까? 그들이 그것을 이해해주느냐 아니면 이해해주지 않느냐, 둘 중의 하나였다-그러나 그에게는(그리고 그들에게도) 슬픈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또 그들이 잃은 그 가족을 그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 자신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틀림없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똑같이 슬픈 일이었다. 그에게도 슬픔이 있었고, 가책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방어하려고 푸가처럼 이어지는 질문들을 던지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그런 슬픔과 가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소리나는 책에서 읽힌 부분이다.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회한이 담긴 부분이라는 DJ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또한 이 구절을 읽었으나, 내가 느낀 감정은 좀 달랐기 때문이다. 아이를 둘까지 낳고도 자신의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다시 재혼하였으나 두 번째 결혼마저 깨고 스물 여섯 살이나 어린, 20대의 젊은 외국 모델과 바람을 피워 세 번째 결혼을 감행한 아버지에게 경멸 이외의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평생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고, 단 한번도 이성이 감성을 누른 적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구절이야말로 자기 합리화, 내지는 죽은 날을 앞둔, 외롭고 쓸쓸한 지점이 바닥까지 내려가서야 그제서야 아들들에게 위로받고 싶어하는 이기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내가 어린 탓일까. 가정 폭력도 하지 않았고, 이혼한 전처와 두 아들에 대한 부양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 사람은 충분히 위로받아야 마땅한가. 살면서 나 자신을 영위하기도 힘든 세상, 아직 어려서 능력이 없는 누군가가 세상을 살기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없이 지원해주었다는 사실로도 그 사람은 동정받아야 할까.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잘 이해하게 될까.

 

그래, 그는 세 번 이혼했다. 한때 헌신보다는 비행과 실수로 더 유명했던 연쇄 남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계속 혼자 감당해 나가야 할 터였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다. 자신이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던 이십대에도, 그리고 오십대에 들어설 떄까지도 그는 그가 괜찮게 생각하는 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술학교에 들어갈 떄부터 그런 관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운명인 듯했다. 그러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예측하지 못했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한 세기의 사분의 삼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는데, 이제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생활방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생산적인 남성의 매력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성적인 기쁨이 싹트게 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너무 강렬하게 갈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전에는 혼자 있을 때면 잠시, 사라진 구성요소들이 기적처럼 돌아와 그를 다시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그의 지배를 재확인해줄 것이라고, 실수로 그에게서 잘려나간 권리가 회복되어 불과 몇 년 전에 중단되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야야 할 것 같았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햇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낸시의 어머니와 함께 만을 헤엄치던 남자는 자신이 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꾼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이제 망각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지금이 그 먼 미래였다.

 

소리나는 책에서 읽어 준 두번째 부분이다. 책 결말에 가까운 부분이며, 이 사람의 인생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다. 주인공은 끝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에브리맨은 주인공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 가게 이름이지만, 여기에서는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모든 사람을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마음이 싸하게 아파오기는 하지만, 아직 이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내 나이가 젊은 것 같다. 아마도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일 텐데, 이런 느낌 또한 지금 여든을 넘긴 작가가 꽤 오래 전부터 느껴왔을 것이고, 지금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장을 쓰면서 작가는 어떤 심정으로 썼을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썼을까? 아니면 담담하게?

 

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노년이란 참 쓸쓸한 것 같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쳐 올 일들이지만, 어차피 후회를 할 것이라면, 최대한 그 후회는 줄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도록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가 꼽은 이 책의 문장은 바로 이 것이다.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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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 걸린 사랑
케빈 리마 감독, 패트릭 뎀시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매 주 일요일 아침마다 봤던 디즈니 만화동산의 추억과

수많은 디즈니 비디오의 공주들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화.

 

환상 속에서 그렇게나 우아하던 장면들이 왜 현실 세계에 오니까 우스워지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다.

 

에이미 아담스는 정말 동화 속 공주가 살아온 것 같고, 패트릭 뎀시는 약간 식상하긴 해도 냉소적인 뉴욕 훈남 역이 딱 맞는다. 제임스 마스던도 수잔 서랜든도 적역의 캐스팅이다.

 

아마 찍으면서 배우들도 많이 웃었을 것 같고, 즐거운 기분이 영화 안팎으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두 시간 동안 행복하려면 한번쯤 볼 만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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