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라블레의 아이들.

이게 무슨 뜻일까? 제목만 들어서는 거리의 아이들과 같은 느낌인데?

 

부제: 천재들의 식탁.

동서고금의 천재들이 먹었던 음식이란 말인가?

 

책 표지의 설명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속에는 먹을 것들이 풍성하다.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대식가로, 그들은 종종 향연을 벌이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요리들을 앞에 놓고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음식을 탐하는 먹보들이었다. 그건 단순히 식욕의 차원을 넘어 그들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던 세상에 대한 탐욕스러운 호기심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누구는 훌륭한 레시피집을 남겼고 또 누구는 후세의 전기를 통하여 그 왕성한 식욕 상이 전해졌다. 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라블레의 아이들인 것이다. 이 책은 과거에 쓰여진 책을 읽는 것과 미지의 요리가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인생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한 평론가에 의해 쓰여진 실험보고서이다.

 

 

여기까지 보면 이 책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수아 라블레라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먹는 것에 대한 다양한 묘사로 요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며, 이 책에 등장하는 천재들은 직접적으로 라블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 혹은 숭배나 찬탄으로 한 가지 이상의 일화가 있는 사람들로 그런 면에서 과연 라블레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평론가로, 음식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하는 사람이며, 실험보고서라는 것은 이 책의 예술가들이 그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방식으로 저자 스스로 맛을 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한 책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대가인 사람들이라면 특정 부분에 대한 자기만의 뚜렷한 철학이나 방법론이 있기 마련이며, 요리에도 예외는 없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호사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본인만의 취향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다케미쓰 도루의 버섯 파스타 정도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정도일 것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 사진 속으로 들어가서 저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기 힘들다. 아마도 전문 요리사의 솜씨와 전문 사진 작가의 기술과 전문 편집자의 능력, 삼박자가 모두 맞았다고 생각되는데, 반면에 글은 또 쉽게 읽혀지지가 않는다.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장은 몇 번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데 어떤 장은 한 번을 읽기에도 쉽지가 않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책이<예술신초>라는 곳에 1년 정도 연재된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각 글마다 농밀함의 편차가 들쑥날쑥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저자가 책 뒤편에서 밝혔듯이 전적으로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개인의 취향이 크게 작용하여 연재된 음식 중 상당수가 돼지고기 요리였으며, 이 책만 하더라도 절반 정도의 예술가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라서, 일본 국민이라면 익숙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 많다는 것. 즉, 상당히 편향되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다행이게도, 이 책을 읽은 바로 직후에 일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고급 음식점이라는 것과, 제한된 예산이라는 두 가지 제한 조건 속에서 효과적으로 메뉴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 덕분이었다는 사실. 물론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겠지만, 쉽게 오기 힘든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메뉴를 고르는데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미리 읽었던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음식들 덕에 먹고 싶은 요리를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결론적으로는 만족했다는 것.

 

 

사이토 모키치의 우유 장어덮밥,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아오야마 뇌병원의 원장인 모키치는 환자를 봐야 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니 자연히 식사는 배달시켜 먹는 일이 많았고 음식은 당연히 '장어요리'였다. 심한 경우엔 내리 나흘을 장어를 시켜 먹은 적도 있다. 업무에서 해방되어 외식을 할 대도 역시 장어를 먹는다. 하지만 고급 요정은 아들의 상견례 자리 말고는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모키치는 병원 근방에 있는 미야마스자카를 내려가 도겐자카를 오르는 그 중간에 있는 하나비시라는 아주 소박한 장어 집을 즐겨 찾았는데 이 점포는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중략) 이윽고, 일본이 영미 열강과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면 느긋하게 장어집에서 가바야키(장어 꼬치구이)를 먹기는 힘들 테고 장어가 없으면 시를 지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가인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은 끝장이다. 그 자리에서 모키치가 즉흥적으로 대량의 통조림을 구입한 이유가 그런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학자다운 예방 차원에서 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일기는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는다. 아무튼 신중한 모키치는 시내에서 아직 장어를 사다 먹을 수 있는 동안에는 통조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중략) 모키치는 2년 후에 도쿄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때에도 대량의 통조림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장어 통조림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중략) 전자레인지가 없던 시절이니 찬밥과 통조림 속의 장어를 덥히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오차즈케처럼 뭔가 따뜻한 국물을 끼얹는 것이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아마도 차갑게 식은 밥에 장어 통조림만으로 밥을 먹는 건 너무도 비참해 역시 우유를 부어서 먹었나보다. 당연히 이 때의 우유는 따뜻하게 데운 것이어야만 한다. (중략)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늦게까지 진찰실에 틀어박혀 있던 모키치에게는 이 방법은 너무도 간편하면서도 장어를 먹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저런 삽화를 통해 판단해 본 결과 모키치는 결코 미식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장어는 어느 강에서 나는 천연 장어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양식 장어가 나돌 무렵에는 그걸로라도 만족하며 소박하게 기뻐하고 통조림이라고 해서 업신여긴 적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장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그것들을 먹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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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 아웃케이스 없음
톰 포드 감독, 니콜라스 홀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1. 동명의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2. 콜린 퍼스가 최고의 연기를 한 작품.

3.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의 영화 감독 데뷔작.

4. 동성의 연인 사망 후 괴로워하던 한 남자의 하루를 다룬 이야기.

5. 원작 소설의 작가도, 디자이너 출신 감독도, 영화 속 주인공도 모두 동성애자.

 

이 정도가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었다.

원작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볼까, 아니면 그 반대가 좋을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소설 쪽이 서사가 더 풍성할 수 있고,

영화 평들이 나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장점도 많지만 원작보다는 못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으며, 영화를 먼저 볼 경우 소설의 세세한 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영화를 보면서 원작에 못 미치는 점에만 시선을 뺏길 것 같아서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콜린 퍼스는 최근에 '킹스맨'으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전에도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에서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모습으로 영화팬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있던 배우였다. '킹스맨'은 그의 '영국 신사'와 같은 이미지에서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기존의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에게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선사한 '킹스 스피치' 역시 그가 영국 국왕으로 나온 작품이었다.

 

그러나 콜린 퍼스의 가장 훌륭한 연기는 이 작품이었다는 한 평론가의 평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전적으로 동감하게 된다. 영화 자체는 꽤 매력적인 작품이며 장점도 많다. 그러나 단점도 눈에 띄는데, 그 단점을 촘촘하게 메꾸는 것이 콜린 퍼스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연기이다. 이 작품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교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영국 출신 지적인 신사라는 점에서는 다른 영화 배우에게는 없는 그만의 장점을 발휘하고 있으며,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오직 자신의 그 이미지에만 묻히지 않는다. 자칫하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흐르거나 혹은 냉소적으로 흐를 수 있는데 그 사이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으며, 자살 결심 후 전혀 뒤집힐 가능성이 없을 것처럼 굳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다가도 한순간에 자신의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의 연기는 압권이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 잡는 장면이 많으며, 대부분 그 클로즈업은 눈이다. 소설 속에서 어떻게든 묘사가 되어 있을 텐데 그 묘사가 궁금해진다. 또 보통 클로즈업과 함께 화면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선명해질 때가 있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감독만의 아이디어 같으며, 활자와 비교해 영상만이 줄 수 있는 기교일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소설을 읽어보아야 알겠지만.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추천해 줄 것 같다. 워낙에 원작이 탄탄하기 때문에 이만한 영화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소설보다 영화로 감상하는 것이 분명히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이 몇 개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이기 때문에 아마도 시대적 배경인 1960년대의 의상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고증이 철저할 것이며, 콜린 퍼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몇몇 사람들은 지나치게 화면이 아름다우며, 집이며, 차며, 배우들의 의상까지 과하게 섹시하고 사치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그 호사스러움이 오히려 나에게는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했다. 1960년대의 이야기이지만 50여년이 흐른 지금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영화에 펼쳐지는 남자들만의 애정어린 관계를 묘사한 화면은 누군가에게는 보기 힘들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시각적으로 우아한 영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며,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묘사한 몇 몇 장면조차 전혀 거북하지 않기 때문이다. 

 

DVD에서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패션은 일시적이지만 영화는 영원하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그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하나의 동기가 아닐까 싶다. 20대에 이 소설을 보고 감동을 받았으며, 영화 속에 자신의 동성 애인과 작가의 동성 애인을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젊은 시절부터 감명 깊게 읽었던 이 원작에 대해 예의를 표시한다. 톰 포드가 이 이후에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이 정도로 인정을 받을지, 아니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조차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절대로 기존 감독에게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다른 감독들이 이 원작을 영화화했다고 가정하더라고 이만큼의 영화는 나오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짐과 조지가 함께 있는 장면이나 또 다른 몇 가지의 장면과 대사 등은 감독이 직접 만들어낸,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라고 하는데 동성애자인 감독의 개인적인 인생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원작에 동화될 장면들이 아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성애자인 감독이 연출했더라면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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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은 식탁 -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우에하라 요시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어크로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차별받은 식탁.

이 제목만 보아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번 더 부제.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음식이란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하루 하루 생존하기 위해 입으로 구겨넣어야 하는 것일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된 맛을 느끼기 위해 단 몇 번만 집어 먹고는 더 이상 그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비싸려면 한없이 비싸질 수 있고, 저렴하려면 한없이 저렴해질 수 있는 음식.

 

 

저자는 오사카의 한 부락 출신이라고 한다. 부락? 이게 뭘까?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에서 최하층 천민들이 살던 곳을 부락, 그곳에 살던 이들을 부락민이라고 부른다며 신분제 철폐 이후의 근현대 일본에서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천민의 후예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태어났던 곳은 오사카 나부의 '사라이케'라는 부락이었고, 현재 이 지명은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주민이나 관계자들에게는 불리는 지명이며 부락민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곳 주민의 80퍼센트가 식육업에 종사했으며 저자의 아버지도 지금까지 식육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의 백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일반 지역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은 소와 말의 고기를 먹기 쉽고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한 음식들이 생겨났으며, 그 중 하나가 소 창자를 바싹 튀긴 아부라카스라는 요리라고 한다. 저자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신이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이 음식이 일반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른이 된 지금은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에 긍지를 갖게 되었다는 저자는, 어느 날 '각국의 차별받은 사람들이 서로 엇비슷한 소울푸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세계 곳곳의 차별받은 이들의 독자적인 식문화를 취재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기가 범람하는 요즘이다. 음식에 대한 서적도 마찬가지. 그 수많은 시류에 영합하는 책들 속에 이 책이 유독 가슴을 울렸던 것은, 우리가 열광하던 부분 이면, 잘 모르고 있던 부분에 대해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도달하기까지 저자 개인의 삶을 생각하면 뭉클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실 음식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 아니다. 음식은 삶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매개체인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음식들의 공통점은, 지배층이 먹지 않는 식재료를 가지고 가공하여 피지배층의 배고픔을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세계 뒷골목의 음식을 맛보면서, 저자는 음식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탄생시켰던 차별하는 문화가 공식적으로만 사라졌을 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다.

 

"당시 우리와 대립했던 KKK멤버나 백인들을 지금도 거리에서 마주치고 있어요. 모두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요. KKK의 창설자 중 한 병이었던 포레스트 장군의 동상이 그 증거입니다. 셀마에 흑인 시장이 나오자, 백인들은 이에 대항해서 마을 공동묘지에 그의 동상을 세웠지요."(중략) 이 흑인 청년의 말에 따르면, 이 동상이 세워진 것은 불과 4~5년 전이라고 한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이런 시대착오적인 일이 어딨어요"하며 중얼거린다.

 

저자가 2004년 가을에 미국을 방문했을 테니 "이런 시대착오적인 일"은 2000년 쯤일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2008년 말이고 임기를 시작한 것이 2009년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발전이 빠른 나라라고 긍정적인 해석을 해야 할까, 아니면 공식적인 평등 이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크다는 쪽으로 해석해야 할까? 출신에 상관없이 개인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환상에 균열이 갈 때 쯤, 브라질의 상황이 등장한다.

 

"지금은 백인들에게서 받는 직접적인 차별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신문에는 흑인 범죄만 보도되고 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교육이나 환경 등 근본적인 해결책을 세우는 데는 태만하고요. TV에 출연하는 아이들도 전부 백인입니다. 나도 어렸을 떄 TV에 나간 적이 있는데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매우 분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도 피부가 하얗지 않으면 TV에 나가는 건 꿈도 꾸기 어렵죠. 백인을 동경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 중역을 비롯해 정부 요직 인사, 모델 등의 직업은 대부분 백인이 차지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을 운운하는 것도 브라질의 상황에 대면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 중역, 정부 요직 인사, 모델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상당수의 검은 피부의 미국인들을 생각하면 TV에 출연조차 힘들다는 브라질의 현실은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런 현실들에 주목했던 여행기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사람의 특성이라면, 유독 이 작가의 시선을 붙든 이유는 아마도 그 자신이 미국과 브라질의 흑인 노예, 불가리아와 이라크의 로마, 네팔의 불가촉민에게 강한 공감을 보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부자 나라, 선진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뒷골목 출신이더라도 자국에서 인정 받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 또한 타고난 환경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전쟁 등의 인재를 포함한 대재해가 일어나면 피차별민에 대한 박해가 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 2차 대전 말기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을 때, 그날 밤 히로시마의 부락을 군대가 포위했던 사건도 있었다. 이는 천재지변을 이용해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일반 주민이나 정부가 벌이는 히스테리적인 행동이며, 근본적으로는 주민들이 그들을 일상적으로 차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부분을 보면 '그들의 식탁에 앉다'라는 프롤로그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음식이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강하게 기억으로 남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여행은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분명히 작가는 밝히고 있고, 실제로도 유럽의 로마를 취재하면서 스스로를 '일본의 로마'라고 소개했다는 점에서 취재 대상인 사람들과 심리적 거리를 가깝게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저자가 소개한, 이라크의 알피다 지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텐트촌과 똥오줌 방을 보고 나서 돌아가려는데 생긴 일이다. 몇 사람이 사례를 요구해왔고, 나는 리더에게 이라크 돈 몇 장을 건네주고 이 정도면 됐는지 물었다. 그들이 고개를 그덕이기에 우리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차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차까지 따라와서 돈을 요구했다. 매일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끈질기게 돈을 달라고 매달렸다. 며칠이나 씻지 않은 그들의 새까만 얼굴과 이곳저곳 찢어진 옷을 걸친 모습에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중략)

"잘 들어, 나는 일본의 가잘이야. 넌 지금 이라크인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가잘에게도 돈을 구걸하는 거란 말이야. 그 먼 일본에서 너희를 만나러 온 가난한 가잘에게도 그렇게 돈을 뜯어내고 싶니!" 그러자 험악한 나의 기세에 놀란 소년은 그때까지 내밀고 있던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너덜너덜한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50디나르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나는 아차 싶고 가슴이 뭉클해져서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초콜릿을 꺼내 나에게 먹으라고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지금 난 배가 부르단다. 건강하게 지내."

이렇게 말하자 소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순간이다. 비슷한 일화는 네팔의 불가촉민 가족과의 만남에서도 있다.

 

"저희 집에 와주어서 기뻤어요. 지금까지 일부러 저희 집을 찾아와준 사람도 없었고, 함께 소고기를 먹어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중략)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고빈다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 지테는 없었다. 가족의 얘기에 따르면, 포카라의 마을로 나간 뒤 벌써 반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 다시 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인도에 돈을 벌러 갔다고 한다.

 

미국의 프라이드 치킨이 흑인들만 먹던 음식에서 전세계에 확산된 미국의 대표적인 국민 음식이 되었고, 브라질의 하층민의 음식이던 페이조아다가 지금은 고급 음식이 되어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못 먹는 음식이 된 반면, 네팔에서 불가촉민만 먹던 소고기는 이제 불가촉민으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차별받는 가장 큰 이유가 소고기를 먹기 때문이라고.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네팔 불가촉민 최초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차별받으니 소고기를 먹지 말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외친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먹던 그 맛을 잊을 수 있을까. 외국에 나갈 때마다 소고기를 먹는다는 그는 특히 한국의 소고기 맛이 기가 막히다고 이야기한다. 국외로 나갈 기회가 많은 네팔의 지식인들 중에는 최고 계층인 브라만이라도 소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음식이 주는 힘은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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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 글.그림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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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이 이끼에게, 너같이 더러운 이끼가 왜 내 안에서 피어났느랴고 물었대. 이끼가 시냇물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끼가 시냇물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시냇물 네가 더러우니까 내가 피어날 수 있었던 거야. 이끼는 더러운 물에서만 살 수 있거든.......’ 시냇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지. 그와 마찬가지야. 더러운 물에서 이끼가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의 모습을 닮아갈 수밖에 없거든. 세상이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우리에게도 어쩔 수 없이 가면이 필요한 거야. 가면이 없으면 마음을 감출 곳이 없으니까. 가면이 없으면 우리 안의 짐승을 감출 곳이 없으니까....... 이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욕망이나 이중성을 함부로 깔보지 말라는 표범나비의 말이 피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독은 나의 상징이야. 내게도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에 꼬리 끝에 독을 만들어놓은 거라고. 세상으로부터 멸시당하지 않으려면 누구에게나 상징이 필요하거든. 나비 너도 쓸데없이 꽃하고 나무 좋은 일만 하지 말고 너를 지킬 수 있는 상징을 빨리 만들라고. 너에게 상징이 없으면 세상이 너를 향해 제멋대로 발길질을 할 테니까....... 세상의 방식은 원래 그래. 하지만 상징이 너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해. 너의 약점은 너를 우습게 만들지만, 너의 상징은 너를 쓰러뜨릴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는 일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침묵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고, 언젠가 키 작은 나무들이 내게 말해주었어.”

“하지만 도무지 기다릴 수 없을 때도 있잖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처럼.......”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때가 많대.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그렇게 변덕스러울 리 없잖아.......”

 

“바람은 왜 이렇게 나무를 흔들까? 아름다운 꽃들이 떨어지는 게 나는 싫은데. 꽃들이 떨어지면 따뜻한 시절도 가버리잖아.”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나무가 방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모든 것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할 뿐이니까.......”

“바람이 사납게 불어도 나무가 불평하지 않는 건 소통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소통을 하겠다는 것은 내 것의 절반쯤은 상대에게 내어주겠다는 결심 같은 거야. 내 것의 절반을 포기했을 때 소통은 비로소 시작되는 거니까....... 내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거든.......”

“바람은 나무를 흔들기도 하고 때때로 나무를 쓰러뜨리기도 하지만, 나무는 바람이 있어서 자신의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잖아. 그러니까 나무는 바람을 싫어할 수 없는 거지. 바람은 나무에게 슬픔을 주기도 하지만 기쁨을 주기도 하니까 바람과 나무는 소통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나무는 바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 수 있는데?”

“나무가 있기 때문에 바람은 자신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나무가 없다면 바람은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테니까....... 나무가 있기 때문에 바람은 자신이 춤추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거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나뭇잎이 춤을 춘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춤을 추는 건 나뭇잎이 아니라 바람이야. 바람이 없다면 나뭇잎은 흔들리지도 않을 테니까.......”

 

시간이 흘러 분홍나비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피터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오래 전, 엄마나비가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자신이 만든 환상에 빠졌다는 말이기도 해서, 환상이 환멸이 되는 순간 사랑은 지옥이 되기도 한다고 엄마나비는 말했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더 이상 그가 많이 그립지 않을 때 사랑은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엄마나비는 말했었다. 피터는 분홍나비가 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거야. 모두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가 많잖아. 파란토끼 너도 그렇지 않니?”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 순 없어. 겨울이 오면 눈 내린 산길에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는 나는 눈이 내리면 모든 걸 조심해야 하거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면 늑대나 여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

“우리를 쫒고 있는 여우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만 살아갈 순 없어. 여우를 쫓는 것들 때문에 여우도 굴 속에 숨어 지내야 할 때가 있거든....... 나비 네 생각처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만 사는 게 언제나 기쁜 일만은 아닐거야. 우리를 기쁘게 한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거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 건 나를 속이는 일이잖아.”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아가는 것 또한 너를 속이는 일이야. 누구나 그렇듯, 너의 마음속에도 나비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나비보다 사나운 것이 함께 살고 있을 테니까.”

“내 친구 중엔 눈이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판다가 있어. 내 친구 판다는 눈이 그치고 눈이 녹아 땅이 보일 때까진 절대로 나무를 내려오지 않아. 눈 위에 찍어놓은 자신의 발자국이 두려워서....... 내 친구 판다를 잡으려고 판다의 발자국을 따라오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 눈이 녹아서 땅이 보일 때까진 아무리 배고파도 안 내려와.”

“판다를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할 뿐이야.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것들은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판다의 마음속 상처를 알지 못하면서 판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잖아. 세상의 폭력이 판다를 그렇게 만든 거야. 몇 해 전 겨울, 내 친구 판다는 자신의 어린 새끼들을 모두 잃었어. 판다가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 눈 위에 찍어놓은 판다의 발자국을 쫒아 동굴까지 따라온 자들이 판다의 어린 새끼들을 모조리 잡아갔거든. 그해 겨울부터 판다는 눈이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거야. 자신의 발자국을 눈 위에 남기지 않으려고....... 판다의 이상한 행동은 판다가 만든 게 아니라 판다의 상처가 만든 거잖아.......”

 

“세상을 쉽게 믿지 마. 누군가에게 너의 비밀을 말하지도 말고. 네가 한 말이나 행동이 너를 쓰러뜨릴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달은 달의 뒷면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잖아. 달의 비밀을 아는 순간 모두들 달을 떠나버린다는 걸 달은 알고 있는 거야. 세상은 너무 변덕스럽거든.......”

 

우리의 삶은, 강물 같은 거라고, 강물이 바다로 가는 동안 벼랑을 만나기도 하고, 커다란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치욕을 만나기도 하고, 더러운 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바다로 가는 동안 강물은 일억 개의 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고 엄마나비는 말했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어두운 방에 죽은 자처럼 누워 있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아픔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취로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시절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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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ㅣ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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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옮긴이의 말이 참 아름답다.

 

 

옮긴이의 말/절제의 미학으로 그려낸 열두 살 소녀의 그리움

 

 서머가 메이 아줌마를 처음 만난 것은 여섯 살 때였다. 당시 서머는 엄마를 잃고 의지할 데 하나 없이 낯선 친척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서머의 표현에 따르면 “항상 누군가 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신세였던” 시절, 오하이오의 친척집에 다니러 온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가 이 어린 꼬마를 발견한다. 꼬마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주눅이 들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 가엾은 꼬마를 ‘작은 천사’라고 여기고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간다. 집이라고 해 봤자 다 쓰러져 가는 녹슨 트레일러로, 아줌마와 아저씨는 서머를 맡기에는 힘겨워 보일만큼 가난하다. 나이도 많고, 몸도 건강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대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아홉 살 때 산골짜기에 밀어닥친 홍수로 부모님을 잃은 아줌마의 아픔, 아저씨의 성치 않은 몸에서 잉태된 이 깊고 넉넉한 사랑으로 어린 서머는 “마침내 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 행복은 그로부터 6년 뒤 하루아침에 깨지고 만다. 밭을 매던 아줌마가 “눈부시게 새하얀 영혼이 되어” 천국으로 떠난 것이다. 이제 집은 “지옥 같은 어둠”이며,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아저씨는 집 안 곳곳에서, 밭에서 아줌마의 빈 자리를 느낄 때마다 슬픔에 젖는다. 가족은 해체 위기에 놓이고, 이 위기 앞에서 이제 겨우 열두 살인 서머는 아줌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다. 오브 아저씨의 찢어딘 가슴을 치유할 길을 찾지 못하면,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말 것 같다.

 

 아저씨마저 메이 아줌마 뒤를 좇아 떠나 버린다면, 나는 저 바람개비들에 둘러싸인 채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밤 깊은 정적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날개를 달라고.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진짜 날개를 달라고.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 부재(不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인 동시에 한 공간 속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나’의 부재를 뜻한다. 곧 그 존재의 상실과 더불어 ‘나’의 상실이 초래되는 셈이다. 그 상실과 부재의 공간을 메우고, 살아남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부재와 상실의 아픔과 화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화해의 열쇠를 ‘사랑’에서 찾는다.

 

 지금 메이 아줌마가 여기 있다면, 나와 클리터스에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은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열두 살 소녀의 관점에서 다룬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나 이야기 줄거리, 배경 등 구조적인 면에서 매우 극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초래한 결핍과 상실의 아픔을 쉽게 터뜨리지 않고 그 슬픔을 서서히 몰고 나간다.

 슬픔은 서머와 오브 아저씨가 클리터스와 함께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러 밭으로 나갔을 때 터질 수도 있고, 늘 아침 일찍 일어나던 오브 아저씨가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찾지 못해 평생 처음으로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시종일관 열두 살 소녀의 눈을 따라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이 때문에 슬픔의 깊이가 점점 커져 간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함으로써 긴장이 더욱 높아지는 상태로, 마치 작은 파도들이 밀려와 더 큰 물결 속에 합류하여 언젠가 크고 거센 파도로 몰아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서머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집 저집 전전했던, “모든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존재이다. 아줌마나 아저씨의 존재 역시 가난하고 슬픈 과거를 갖고 있지만, 작가는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눈에 띄게 강조하지 않는다.

 아줌마가 사라진 생활 속에서 느끼는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서머의 눈과 입을 빌려 아줌마의 부재가 몰고 온 그리움을 큰 사건이 아닌 ‘작은’ 사건들을 통해 서술한다.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러 밭에 나갔을 때 오브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머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저씨가 그렇게나 갖고 싶어하던 대패톱을 사준 일이라든가, 서머가 수두에 걸려 심하게 앓았을 때 32시간 뜬 눈으로 간호한 일과 같은 ‘크고 극적인’ 것들이 아니다. 모두 일상의 소소한 것들로, 아저씨의 아픈 무릎을 저녁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고로 문질러 주던 일, 집안일을 하던 아줌마가 창 너머로 그네를 타고 노는 꼬마 서머를 내다보며 “서머, 우리 귀여운 아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기”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던 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작가의 ‘한 단어도 버릴 것이 없는 절제된 언어’속에서 빛을 발한다. 격렬한 슬픔을 다룰 때조차 작가는 ‘담담한 서술’로 일관하는데, 문장 길이로 보나 서술 호흡으로 보나 문체는 만연체적이지만 이 담담한 서술 태도 속에는 만연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하고 현란한 묘사’가 없다. 영어를 전공했고 문학적 기초가 탄탄했던 작가가 온갖 화려한 서술을 놔 두고 일상의 작은 사건과 담담한 표현을 택한 것은, 작품의 성격을 살리기 위한 절제의 미덕으로 보인다. 덕분에 작품은 ‘깊이와 넓이’에서 상당한 흡인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 세련된 작품을 통해 부재의 아픔 속에서 사랑이라든가 그리움 같은 인생의 절대적 진실을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절제의 미학 덕분이다.

 마침내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러 떠났던 길고 고단한 여행이 끝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머가 울음을 터뜨릴 때, 그리고 꿈속에서 아줌마의 독백이 흘러나올 때, 작품을 읽는 내내 우리 안에 고여 있던 눈물도 함께 쏟아져 나온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작가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춥고 가난한 산마을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그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 작가는 가난 속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건물이 우리 주의 의사당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폐광 지역에 사는 생활 보호 대상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햇빛 속에 굳건히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엄하고도 우아한 존재였다”라는 묘사처럼, 작가는 물질적으로 궁핍한 가운데서도 존재의 숭고함과 고귀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것들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통찰하고, 그 가운데 하나였던 ‘사랑’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그리운 메이 아줌마>에서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이 진솔한 작품에 대해 세상은 1993년 뉴베리 상과 보스턴 글로브 혼북 상, 미국 도서관 협회가 선정한 ‘최우수 청소년 작품’과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이 선정한 ‘올해의 최고 우수작’등 수많은 상으로 보답했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는 작가 라일런트의 어린 시절의 그림자와 그 견고한 세계관이 짙게 배어 있는, 소중한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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