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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 글.그림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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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이 이끼에게, 너같이 더러운 이끼가 왜 내 안에서 피어났느랴고 물었대. 이끼가 시냇물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끼가 시냇물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시냇물 네가 더러우니까 내가 피어날 수 있었던 거야. 이끼는 더러운 물에서만 살 수 있거든.......’ 시냇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지. 그와 마찬가지야. 더러운 물에서 이끼가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의 모습을 닮아갈 수밖에 없거든. 세상이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우리에게도 어쩔 수 없이 가면이 필요한 거야. 가면이 없으면 마음을 감출 곳이 없으니까. 가면이 없으면 우리 안의 짐승을 감출 곳이 없으니까....... 이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욕망이나 이중성을 함부로 깔보지 말라는 표범나비의 말이 피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독은 나의 상징이야. 내게도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에 꼬리 끝에 독을 만들어놓은 거라고. 세상으로부터 멸시당하지 않으려면 누구에게나 상징이 필요하거든. 나비 너도 쓸데없이 꽃하고 나무 좋은 일만 하지 말고 너를 지킬 수 있는 상징을 빨리 만들라고. 너에게 상징이 없으면 세상이 너를 향해 제멋대로 발길질을 할 테니까....... 세상의 방식은 원래 그래. 하지만 상징이 너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해. 너의 약점은 너를 우습게 만들지만, 너의 상징은 너를 쓰러뜨릴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는 일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침묵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고, 언젠가 키 작은 나무들이 내게 말해주었어.”

“하지만 도무지 기다릴 수 없을 때도 있잖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처럼.......”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때가 많대.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그렇게 변덕스러울 리 없잖아.......”

 

“바람은 왜 이렇게 나무를 흔들까? 아름다운 꽃들이 떨어지는 게 나는 싫은데. 꽃들이 떨어지면 따뜻한 시절도 가버리잖아.”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나무가 방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모든 것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할 뿐이니까.......”

“바람이 사납게 불어도 나무가 불평하지 않는 건 소통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소통을 하겠다는 것은 내 것의 절반쯤은 상대에게 내어주겠다는 결심 같은 거야. 내 것의 절반을 포기했을 때 소통은 비로소 시작되는 거니까....... 내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거든.......”

“바람은 나무를 흔들기도 하고 때때로 나무를 쓰러뜨리기도 하지만, 나무는 바람이 있어서 자신의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잖아. 그러니까 나무는 바람을 싫어할 수 없는 거지. 바람은 나무에게 슬픔을 주기도 하지만 기쁨을 주기도 하니까 바람과 나무는 소통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나무는 바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 수 있는데?”

“나무가 있기 때문에 바람은 자신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나무가 없다면 바람은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테니까....... 나무가 있기 때문에 바람은 자신이 춤추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거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나뭇잎이 춤을 춘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춤을 추는 건 나뭇잎이 아니라 바람이야. 바람이 없다면 나뭇잎은 흔들리지도 않을 테니까.......”

 

시간이 흘러 분홍나비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피터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오래 전, 엄마나비가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자신이 만든 환상에 빠졌다는 말이기도 해서, 환상이 환멸이 되는 순간 사랑은 지옥이 되기도 한다고 엄마나비는 말했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더 이상 그가 많이 그립지 않을 때 사랑은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엄마나비는 말했었다. 피터는 분홍나비가 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거야. 모두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가 많잖아. 파란토끼 너도 그렇지 않니?”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 순 없어. 겨울이 오면 눈 내린 산길에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는 나는 눈이 내리면 모든 걸 조심해야 하거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면 늑대나 여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

“우리를 쫒고 있는 여우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만 살아갈 순 없어. 여우를 쫓는 것들 때문에 여우도 굴 속에 숨어 지내야 할 때가 있거든....... 나비 네 생각처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만 사는 게 언제나 기쁜 일만은 아닐거야. 우리를 기쁘게 한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거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 건 나를 속이는 일이잖아.”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아가는 것 또한 너를 속이는 일이야. 누구나 그렇듯, 너의 마음속에도 나비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나비보다 사나운 것이 함께 살고 있을 테니까.”

“내 친구 중엔 눈이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판다가 있어. 내 친구 판다는 눈이 그치고 눈이 녹아 땅이 보일 때까진 절대로 나무를 내려오지 않아. 눈 위에 찍어놓은 자신의 발자국이 두려워서....... 내 친구 판다를 잡으려고 판다의 발자국을 따라오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 눈이 녹아서 땅이 보일 때까진 아무리 배고파도 안 내려와.”

“판다를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할 뿐이야.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것들은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판다의 마음속 상처를 알지 못하면서 판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잖아. 세상의 폭력이 판다를 그렇게 만든 거야. 몇 해 전 겨울, 내 친구 판다는 자신의 어린 새끼들을 모두 잃었어. 판다가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 눈 위에 찍어놓은 판다의 발자국을 쫒아 동굴까지 따라온 자들이 판다의 어린 새끼들을 모조리 잡아갔거든. 그해 겨울부터 판다는 눈이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거야. 자신의 발자국을 눈 위에 남기지 않으려고....... 판다의 이상한 행동은 판다가 만든 게 아니라 판다의 상처가 만든 거잖아.......”

 

“세상을 쉽게 믿지 마. 누군가에게 너의 비밀을 말하지도 말고. 네가 한 말이나 행동이 너를 쓰러뜨릴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달은 달의 뒷면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잖아. 달의 비밀을 아는 순간 모두들 달을 떠나버린다는 걸 달은 알고 있는 거야. 세상은 너무 변덕스럽거든.......”

 

우리의 삶은, 강물 같은 거라고, 강물이 바다로 가는 동안 벼랑을 만나기도 하고, 커다란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치욕을 만나기도 하고, 더러운 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바다로 가는 동안 강물은 일억 개의 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고 엄마나비는 말했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어두운 방에 죽은 자처럼 누워 있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아픔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취로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시절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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