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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ㅣ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평점 :
이 책은 옮긴이의 말이 참 아름답다.
옮긴이의 말/절제의 미학으로 그려낸 열두 살 소녀의 그리움
서머가 메이 아줌마를 처음 만난 것은 여섯 살 때였다. 당시 서머는 엄마를 잃고 의지할 데 하나 없이 낯선 친척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서머의 표현에 따르면 “항상 누군가 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신세였던” 시절, 오하이오의 친척집에 다니러 온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가 이 어린 꼬마를 발견한다. 꼬마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주눅이 들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 가엾은 꼬마를 ‘작은 천사’라고 여기고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간다. 집이라고 해 봤자 다 쓰러져 가는 녹슨 트레일러로, 아줌마와 아저씨는 서머를 맡기에는 힘겨워 보일만큼 가난하다. 나이도 많고, 몸도 건강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대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아홉 살 때 산골짜기에 밀어닥친 홍수로 부모님을 잃은 아줌마의 아픔, 아저씨의 성치 않은 몸에서 잉태된 이 깊고 넉넉한 사랑으로 어린 서머는 “마침내 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 행복은 그로부터 6년 뒤 하루아침에 깨지고 만다. 밭을 매던 아줌마가 “눈부시게 새하얀 영혼이 되어” 천국으로 떠난 것이다. 이제 집은 “지옥 같은 어둠”이며,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아저씨는 집 안 곳곳에서, 밭에서 아줌마의 빈 자리를 느낄 때마다 슬픔에 젖는다. 가족은 해체 위기에 놓이고, 이 위기 앞에서 이제 겨우 열두 살인 서머는 아줌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다. 오브 아저씨의 찢어딘 가슴을 치유할 길을 찾지 못하면,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말 것 같다.
아저씨마저 메이 아줌마 뒤를 좇아 떠나 버린다면, 나는 저 바람개비들에 둘러싸인 채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밤 깊은 정적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날개를 달라고.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진짜 날개를 달라고.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 부재(不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인 동시에 한 공간 속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나’의 부재를 뜻한다. 곧 그 존재의 상실과 더불어 ‘나’의 상실이 초래되는 셈이다. 그 상실과 부재의 공간을 메우고, 살아남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부재와 상실의 아픔과 화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화해의 열쇠를 ‘사랑’에서 찾는다.
지금 메이 아줌마가 여기 있다면, 나와 클리터스에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은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열두 살 소녀의 관점에서 다룬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나 이야기 줄거리, 배경 등 구조적인 면에서 매우 극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초래한 결핍과 상실의 아픔을 쉽게 터뜨리지 않고 그 슬픔을 서서히 몰고 나간다.
슬픔은 서머와 오브 아저씨가 클리터스와 함께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러 밭으로 나갔을 때 터질 수도 있고, 늘 아침 일찍 일어나던 오브 아저씨가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찾지 못해 평생 처음으로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시종일관 열두 살 소녀의 눈을 따라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이 때문에 슬픔의 깊이가 점점 커져 간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함으로써 긴장이 더욱 높아지는 상태로, 마치 작은 파도들이 밀려와 더 큰 물결 속에 합류하여 언젠가 크고 거센 파도로 몰아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서머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집 저집 전전했던, “모든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존재이다. 아줌마나 아저씨의 존재 역시 가난하고 슬픈 과거를 갖고 있지만, 작가는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눈에 띄게 강조하지 않는다.
아줌마가 사라진 생활 속에서 느끼는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서머의 눈과 입을 빌려 아줌마의 부재가 몰고 온 그리움을 큰 사건이 아닌 ‘작은’ 사건들을 통해 서술한다.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러 밭에 나갔을 때 오브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머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저씨가 그렇게나 갖고 싶어하던 대패톱을 사준 일이라든가, 서머가 수두에 걸려 심하게 앓았을 때 32시간 뜬 눈으로 간호한 일과 같은 ‘크고 극적인’ 것들이 아니다. 모두 일상의 소소한 것들로, 아저씨의 아픈 무릎을 저녁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고로 문질러 주던 일, 집안일을 하던 아줌마가 창 너머로 그네를 타고 노는 꼬마 서머를 내다보며 “서머, 우리 귀여운 아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기”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던 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작가의 ‘한 단어도 버릴 것이 없는 절제된 언어’속에서 빛을 발한다. 격렬한 슬픔을 다룰 때조차 작가는 ‘담담한 서술’로 일관하는데, 문장 길이로 보나 서술 호흡으로 보나 문체는 만연체적이지만 이 담담한 서술 태도 속에는 만연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하고 현란한 묘사’가 없다. 영어를 전공했고 문학적 기초가 탄탄했던 작가가 온갖 화려한 서술을 놔 두고 일상의 작은 사건과 담담한 표현을 택한 것은, 작품의 성격을 살리기 위한 절제의 미덕으로 보인다. 덕분에 작품은 ‘깊이와 넓이’에서 상당한 흡인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 세련된 작품을 통해 부재의 아픔 속에서 사랑이라든가 그리움 같은 인생의 절대적 진실을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절제의 미학 덕분이다.
마침내 아줌마의 영혼을 만나러 떠났던 길고 고단한 여행이 끝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머가 울음을 터뜨릴 때, 그리고 꿈속에서 아줌마의 독백이 흘러나올 때, 작품을 읽는 내내 우리 안에 고여 있던 눈물도 함께 쏟아져 나온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작가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춥고 가난한 산마을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그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 작가는 가난 속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건물이 우리 주의 의사당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폐광 지역에 사는 생활 보호 대상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햇빛 속에 굳건히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엄하고도 우아한 존재였다”라는 묘사처럼, 작가는 물질적으로 궁핍한 가운데서도 존재의 숭고함과 고귀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것들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통찰하고, 그 가운데 하나였던 ‘사랑’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그리운 메이 아줌마>에서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이 진솔한 작품에 대해 세상은 1993년 뉴베리 상과 보스턴 글로브 혼북 상, 미국 도서관 협회가 선정한 ‘최우수 청소년 작품’과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이 선정한 ‘올해의 최고 우수작’등 수많은 상으로 보답했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는 작가 라일런트의 어린 시절의 그림자와 그 견고한 세계관이 짙게 배어 있는, 소중한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