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4 (완전판) - 백주의 악마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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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이 섬은 낭만적인 곳입니다. 태양은 평화롭게 빛나죠. 바다는 푸르고....... 하지만 브루스터 양, 명심하셔야 할 것은 태양 아래 모든 곳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푸아로가 말했다.

 

<백주의 악마>라는 제목이 시선을 확 끄는데, 원제는 Evil Under the Sun, 즉, '태양 아래 악마'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대체 백주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찾아봤더니 '환하게 밝은 낮'이라는 뜻이라고. 우리 나라에서는 분명히 잘 안 쓰는 단어라서 생경한데, 보통 이런 단어는 70년대 쯤, 외국 소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종종 등장하는 단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번역되는 책들의 경우는 실생활에서 잘 쓰는 단어를 사용하지, 이런 낯선 단어를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백주대낮이라고 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크리스티의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상당 부분이 기시감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여인 때문에 일어난 치정 사건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건의 핵심에서 비껴져 있다는 점에서는 <뮤스가의 살인>에 수록되었던 <로도스 섬의 삼각형>이 떠올랐고, 푸아로가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도중에 사건이 생겼다는 데에서는 <엔드하우스의 비극>이 연상되었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의 <동행>은 이 소설과 똑같은 트릭이 쓰였으며, 트릭의 핵심이 수영복이라는 점,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았던 남녀가 알고 보면 남자의 속임수였으며, 그 남자는 공범이자 애인인 다른 여자가 주변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는 점이 완전히 동일하다. 아마도 핵심 아이디어를 이 단편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보니 그러고보니 <나일 강의 죽음>과도 꽤 비슷한 부분이 있다. 피해자에게 남자를 뺐겼다는 이유로 가장 의심을 받지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여자.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익숙한 요소를 한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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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거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한은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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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이 넓게 떠다닌다.

거울이 양쪽으로 깨졌다.

"내게 저주가 내렸다."고

레이디 샬럿이 외쳤다.

-앨프레드 테니슨

 

추리 소설의 핵심은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이렇게 세 가지이다. 보통 '어떻게'에 대해서는 소설 초반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밝혀질 수 밖에 없는데, 일단 시신을 부검하게 되면 변사체가 아닌 이상 사인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보다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특히 누가, 왜 죽였는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심리적인 부분이 더 강하게 서술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첫번째 소설이 1887년에 나왔다. 마지막으로 셜록 홈즈가 나온 것은 1927년이다. 크리스티의 첫번째 소설이 1920년에 나왔고 마지막에 나온 소설이 1976년이다. 당연히 그 동안 과학 기술의 발달로 수사 기법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을 것이고, 사인을 알아내는 것은 점점 더 쉬워졌을 것이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후기로 갈수록 어떻게 살인이 이루어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왜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도,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1887년이면 아직 세계 최초의 영화가 나오기도 전이다. 물론 당시에도 사진은 있었지만, 그만큼 사진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며,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들처럼 용의자의 사진을 가지고 목격자들이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일은 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지문이 수사에 처음으로 사용된 때가 1892년이었다. 인간의 혈액형이 최초로 발견된 때는 1901년이다. 혈액형을 분석하는 방법이 좀 더 발달하고, 수사 기법에 응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보다 더 뒤일 것이다. 인류의 과학사를 되돌아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이 가장 밀도 있고, 널리 쓰일 수 있으며, 일반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연구 결과가 쏟아진 시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고를 가장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힘들어졌을 것이며, 범죄자에게 뛰어난 머리와 민첩한 행동이 갈수록 요구되었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CCTV나 통화 내역, SNS 내용만 살펴보아도 홈즈 시대의 소설들 속의 웬만한 사건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만큼 최근의 추리 소설가들은 사건 하나를 짜내는 것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크리스티가 전무후무한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는 사실은 자명할 것이다. 그녀는 추리 소설의 전성기를 완벽하게 누린 사람이니까.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앞세대의 추리 소설가들로부터 생겨난 추리 소설의 열광적인 독자들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세계적으로 인터폴의 활약이 두드러지던 세계를 살았던 것도 아니니까. 타고난 재능이 그녀가 살고 있던 시대와 맞아떨어진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1962년에 나온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첫 소설이 나온 것은 1920년이고, 그녀가 사망한 것은 1976년이므로, 작가의 말년에 나온 소설이다. 마플 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이므로, 당시에도 젊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이 소설에서는 사람을 상주하게 하고 늘 도움을 받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의사의 권유이며, 마플 양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패딩턴발 4시 50분>을 읽으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었는데, 이 소설은 그보다도 5년 뒤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읽은 마플 양의 이야기 중 가장 뒤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녀의 친구인 밴트리 대령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것도 마음 아프고.

 

이 소설은 살인 동기를 알고 나면 매우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이야기가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는 것도 알고 나면 더 놀랍다.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더 믿기 어려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종종 확인할 때면,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무서운 존재이며,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깨달을 때면 무서워지기도 한다.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를 보고, 거기에 나온 이름을 검색해 보았는데, 그 이야기 자체는 물론 놀라웠지만, 소설을 읽기 전에 절대로 보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 만약 이 이야기를 온전히 크리스티가 생각해냈다면, 크리스티는 천재적이라고 불릴 기회를 한 번 더 가질 정도의,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완벽하게 크리스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크리스티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되었겠지만, 너무나 유명한 사람의 너무나 유명한 일화를 그대로 차용했기에,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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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승리자들 - 콜럼버스에서 마릴린 먼로까지 거꾸로 보는 인간 승리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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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두께는 어마어마하다. 참고한 문헌의 종류의 목록만 나열했는데 총 18쪽이며, 등장한 인물을 작은 글씨로 나열만 했는데 총 13쪽이다. 전체 701쪽, 이 두꺼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사 속에 기록된 승리자들은 어떻게 인류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는가, 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떤 것이든 재능은 있어야 하고, 그 재능이 발휘될 만한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충분히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람이 누락될 수도 있고, 길이 기억될 만한 사람은 아닌데 지금까지 이야기되는 사람이 있으며,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적은 뛰어날 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에디슨'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한국의 교육은 수많은 '에디슨'을 놓쳐버리고 있다는 말들도 많았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벤처 산업의 현황을 예로 들면서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크'가 등장하기 힘들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도 많다.

 

읽다 보면 수많은 예들에 압도당한다. 책 자체가 절대 어려운 내용은 아닌데, 모든 장에 최소 수십 명에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예를 다루고 있으며, 비슷한 내용이 조금씩 되풀이 되기 때문에 읽으면서 지치기도 한다. 솔직히 여기 실린 인물들의 절반만 가지고도 이보다 더 몰입도 있고 강한 인상의 책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하면 저자도 책 중반에서 스스로 중간 정리를 해 주었을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명성은 재능과 우연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산물이다. 대개 고약한 성격과 함께 나타나는 고도의 재능이 우연히 시공간의 은총을 입는 순간 가치 평가의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타나 자의적 기준에 따라 명성을 부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자격 있는 사람이 명성을 얻은 경우도 많지만,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명성을 얻은 경우는 훨씬 더 많으며, 또 재능은 있지만 나머지 요소들이 없어서 역사에 묻힌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1장). 쿠르트 투홀스키는 말한다. "중국에만 우리가 모르는 나폴레옹이 스무 명이나 있다. 에디슨도 여덟 명이나 있지만 특허권은 아무도 없다.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다른 것 말고도 행운까지 따랐다. 과거의 큰 휴지통에서 그의 시들이 우연히 맨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2. 앞의 테제에 가장 적합한 보기 가운데 하나가 아메리카의 발견자로 알려진 콜럼버스이다. 그의 최대 재능은 확고한 생각 하나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능력이었는데, 그는 고등 사기꾼의 솜씨와 인정사정없는 성정으로 역사 시계에 딱 맞는 시각에 딱 맞는 군주의 발 앞에 그 생각을 갖다 놓을 줄 알았다(2장과 3장).

 

3. 우리에게는 위대한 행위를 위대한 남자들에게 귀속시키려는 욕망이 있다. 우리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거나(셰익스피어) 거의 없더라도(호메로스), 혹은 그들이 집단적 성취의 얼굴마담이거나 막후 실력자의 복화술 인형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흉상에다 화환을 걸어 주길 좋아한다. 1914년 8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은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 참모장, 호프만 중령, 그나이제나우, 몰트케, 독일 병사 15만명, 독일 교사 1만 명, 독일 통신 기술자, 독일 철도원들인데, 이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힌덴부르크'라는 이름 하나만 거론하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면서 간편하고, 또 역사 서술도 쉬워진다. 게다가 바로 그런 이름이 힌덴부르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히틀러의 부상에도 도움이 되었다(4장).

 

4. 사람을 두고 위대하나도 말하는 것은 신화에 뿌리가 있다. 텔 같은 신화적 주인공들은 얼마 전까지도 실존 인물로 여겨졌다. 쇼페하우어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위대성의 척도로 대체 불가능성을 들었다. 물론 그리되면 세상의 모든 발견자와 발명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들을 위대성의 범주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분야별로 엇비슷하거나, 아니면 그가 아니라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대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는 하프너가 핵심적으로 잘 표현했다. "인간을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운동선수에 비유한다면 그 선수가 온 힘을 다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가 위대성이다.

 

5. 백과사전에 오르거나 노벨상을 받은 사람 중에 여성은 극히 적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능력과 명성 같은 개념들은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가치이고, 이 방면에서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에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남성들의 생각이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기록으로 표현될 수가 없어서 백과사전에 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적 의미의 능력을 보였을 때도 남성들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희박하다. 설사 여성이 그런 성공을 거머쥐었을 때도 역사가와 백과사전 편찬자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 즉 병성을 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6장).

 

6. 세상의 모든 중요한 발명들은 많은 사람이 서로의 이론이나 성과를 토대로 하거나 아니면 동시에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A가 B를 발명했다'는 식의 모든 진술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131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최소한 여덟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발견의 경우도 결코 더 일목요연하지 않다. 아메리카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유럽인이 누구인지, 북극에 처음 도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7장).

 

7. 헤겔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세계정신의 경영자라고 불렀고, 역사가 그들에게 미리 보여 준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태제를 감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계정신은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즉 세계정신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의 경영을 망쳐 버리는 눈먼 우연과 강력한 개인들의 힘이 그것이다.

 

8. 위대성은 도덕과 어떤 관계일까? 한편으로는 분명해 보인다. 스탈린과 히틀러, 마오쩌둥 같은 대량 학살자들에게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오는 지하에 누워 있을 때 "세계정신의 등대"라는 칭호를 받았고, 히틀러는 1974년 미국의 『타임』지가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정치 영역에서는 도덕과 부도덕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9장).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의심스러운 행태를 보였고, 처칠은 드레스덴의 무의미한 군사적 차괴에 책임이 있었다. 그 밖에 예술가들 중에도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악인들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은 명성의 사다리에서 맨 꼭대기에 올라가기가 무척 어렵다(10장).

 

9. 유다는 인간 사회의 척도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린 인물이다.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한 사람이 어떻게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조처한 사람이 아니던가? 클롭슈토크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이후 유다의 행위는(그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전제한다면) 더욱더 대담하게 해석되었다. 즉 후대에 사탄으로 평가받을 정말 어려운 역할을 떠맡은 예수의 동맹자이거나, 아니면 망설이는 예수에게 어서 메시아로 현현하라고 독려하는 인물로 해석된 것이다. 이런 모순적 해석들 속에서 이 책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이다. 더 이상 도덕적 평가는 없고, 살해당한 것은 분명 명성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카이사르에서부터 룩셈부르크를 거쳐 존 F.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11장).

 

10. 지금까지는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2부에서는 '천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위대성과 마찬가지로 천재의 개념도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에 이 개념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괴테는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1775년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이렇게 기술했다. "천재라는 말은 일반적인 표어가 되어 버렸다. 어디를 가든 이 말을 자주 듣기 때문이데, 그만큼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것도 일상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천재의 증표로 주로 독창성이 거론되지만 이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천재는 불명확한 의미에다 화려하고 야단스럽게 포장한 말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이런 정의도 가능할지 모른다. 천재란 공중 줄타기를 하는 인류의 곡예사들이다(12장).

 

11. 천재들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기형적이거나 못생긴 사람이 많고, 대부분 육신의 병을 안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질병은 간질과 결핵이다. 천재와 질병 사이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관에 대해선 작품 창작을 위한 무자비한 육체적 찾취가 원인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조심스럽게 키운 순종 말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면역 결핍증이 원인이거나, 아니면 질병의 고통으로 인한 창작의 자극제 역할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어쨌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은 천재가 아니라 몸매 만드는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13장).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는 모차르트의 전기에서 이렇게 쓴다. "육체를 만드는 것이 정말 정신이라면, 위대한 정신이 육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을 필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2. 거의 모든 천재들이 건강 염려증과 우울증, 상처 난 영혼, 혹은 루소처럼 추적 망상증에 시달리거나, 고흐처럼 지독한 광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천재적 성취와 우울증, 정신병, 환각증의 관련은 플라톤 이래로 유명하다. 심리 분석가 아이슬러는 천재성이 현실 관련성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광기라고 했고, 벤은 "천재는 생산성 유발과 연결된 순수한 변종의 특정 형태"라고 밝혔다. 정신 의학자 크레치머는 발명가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공하지 못한 발명가를 사람들은 편집증 환자라고 부른다."(14장) 증거가 가장 충분하면서도 가장 충격적인 광기를 보인 사람은 니체였다(15장). 광기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행복한 상황일 경우 당사자의 내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불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재에게 경탄하는 사람들에게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13. 대부분의 위인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지극히 오만하고 비판에 과민하다. 이들은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 외에는 스스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새로운 이론을 관철하려는 철학자와 학자들에게는 오직 혼자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필요하다. 어떤 위인들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믿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을 앙연시했다. 하이네가 그랬고, 바그너와 마르크스가 그랬다(16장). 예술가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경향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준 이는 폴란드 소설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이다. 그는 1924년에 노벨상을 받았는데, 파리 주재 폴란드 대사가 그를 국립 도서관으로 안내했을 때 딱 한 문장만 말했다고 한다. "당장 이 책들을 전부 불태워 버리고 내 책들을 놔둘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14.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이루려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위인들의 삶은 대부분 근면함과 강철 같은 작업 규율이 특징을 이룬다. 거기다 작업 과정에서 고도의 효율성까지 보인 사람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수천 쪽의 메모를 모아 두고 활용하는 방법이 그렇다(17장). "문학으로 먹고사는 이는 균형을 잃은 사람이고, 엄청나게 큰 거위간은 아무리 먹음직스럽더라도 병든 거위를 전제로 한다."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자신의 단편 소설에서 한 말이다.

 

15. 연구자와 사상가, 철학자는 무엇보다 세 가지 능력에서 특출하다. 첫째,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놀라워하고 의아해한다. 둘째, 인식한 것들을 토대로 사고 체계를 세워 나갈 힘이 있다. 셋째, 적대적인 외부 환경으로부터 이 체계를 지키는 일에 강고한 의지를 보인다. 전형적인 보기가 코페르니쿠스와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였다(18장).

 

16. 창조적 예술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들의 착상이 어디서 솟구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신적인 영감이라고 빋은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가들이 무의식의 샘에서 창조의 착상을 길어 올리고 있다는 것에 다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프로이트는 예술가 자신의 무의식을, 융은 그보다 더 깊은 층, 그러니까 인류의 근원 상상과 근원 경험이 저장되어 있는 집단적 무의식 층을 창조의 샘으로 보았다. 무의식에서 양분을 공급받은 판타지가 예술 작품으로 태어나려면 통일적인 질서 원칙이 작용해야 한다. 그런 질서는 어느 정도까지 습득할 수 있고, 연습을 통해 발접할 수도 있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판타지와 강철처럼 차가운 논리를 생산적으로 잘 결합시킨 예술가가 포였다(19장).

 

17. 여런 방면에서 천재적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불가사의한 것을 느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E.T.A. 호프만, 괴테가 그랬다. 하지만 괴테 자신은 번다한 일들로 정력과 시간을 소모했음을 한탄했다. 시작은 해놓고 아무것도 제대로 끝내지 못할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을 많았던 사람은 다빈치였다(20장).

 

 

처음에는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고, 중반부터는 나는 위인이 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김이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제 와서 내가 위인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워낙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던 시절이 생각나면서 조금 씁쓸해졌다고 할까. 만약 내가 죽고 나서 나의 이름이 역사의 한 쪽 구석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달콤한 슬픔, 혹은 희망 고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수없이 넘쳐나는 역사 속 승리자들의 예를 보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결국 우리가 죽고 나서 얼마나 우리의 이름이 뒤에 남겨질지는 내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지위도 아니며,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할 지라도 얼마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다.

 

이 책은 1993년에 출판되었다. 책에 실린 모든 예들을 위해 작가는 직접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간단히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할 내용을 위해 작가는 아마도 위인에 관한 모든 책을 다 꼼꼼히 살폈을 것이다. 그 결과물로 나온 이 책. 자주 들여다 볼 책은 절대 아니지만, 꼭 백과사전처럼 방대한 양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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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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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고급 스타킹을 신은 단정한 발목에 거칠지 않은 발, 하지만 구두는 별로였다. 번쩍이는 버클이 달린 최신식 에나멜가죽 구두에서 푸아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세련되지 않아, 너무 촌스러워!

그 숙녀가 택시에서 내리는 와중에 다른 쪽 발이 택시 문에 걸리면서 구두 버클이 떨어져나갔다. 버클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보도에 떨어졌다. 푸아로는 당당하게 앞으로 뛰어나가 버클을 집어 들고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셋, 넷, 문을 닫아라.

"엠버라이어티스 씨요? 죄송합니다만, 그분은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아하, 난 만날 수 있소."

재프가 험악하게 대꾸했다. 그는 푸아로를 옆으로 밀치고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엠버라이어티스 씨는 30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에르퀼 푸아로에게 그것은 마치 어떤 문이 천천히, 그러나 굳게 닫히는 것과도 같았다.

다섯, 여섯, 막대기를 집어 들어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환자의 잇몸에 과도한 양을 주사하는 일 말이에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간혹 환자들이 부작용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환자들이 생리적으로 정상이지 않아서 그래요....... 심장 활동이 정상이 아닐 경우 말이죠. 하지만 과잉 투여는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의사들은 기계적으로 적당한 양을 투여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이에요. 거의 자동적으로 정확한 양을 투여하지요."

푸아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맞아요."

"너무나도 표준화되어 있으니까요. 매번 양을 다르게 조제해와서, 자기도 모르게 실수로 많은 양을 조제하는 약사들과는 다르지요. 처방전을 너무나도 많이 쓰는 의사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치과의사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라요."

일곱, 여덟, 그것들을 똑바로 세워라.

그 다음 날 석간 신문이 나오면서 세상이 온통 떠들썩해졌다. 배터시 아파트에서 발견되어 세인즈버리 실 양의 것으로 여겨졌던 시신이 앨버트 채프먼 부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퀸 샬럿 가 58번지의 레더런 씨는 시신의 치아와 턱, 몰리 씨의 진료 차트에 기록된 모든 상세한 내용을 증거로 그 시신이 채프먼 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발표했다.

세인즈버리 실 양의 옷이 시신에게 입혀져 있었으며 세인즈버리 실 양의 핸드백도 시신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막상 세인즈버리 실 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홉, 열, 튼실하게 살찐 암탉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두 문장이 지난밤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소리가 어쨰서 희미하게 낯이 익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햇살로 걸어 나오면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리베라 부인?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수화기 너머로 말을 한 사람이 올리베라 부인일 리가 없었다!

이기적이고 머리도 나쁘고, 욕심 많고 자기중심적인 그 지각없는 귀부인이? 그 자신이 방금 그녀를 어떻게 불렀던가?

"저 튼실하게 살이 찐 암탉? 쎄리디퀼르(말도 안 돼)."

에르퀼 푸아로가 말했다.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열하나, 열둘, 밝혀 내야 한다.

주마등처럼 모든 것이 지나갔다....... 구두의 버클, 25센티미터 스타킹, 훼손된 얼굴, 급사인 앨프리드의 저속한 문학 취향, 엠버라이어티스 씨의 활동, 그리고 죽은 몰리 씨의 역할.

열셋, 열넷, 하녀들이 사랑을 호소하다.

"그래, 이제 시작하지. 토요일에 프랭크 카터가 블런트를 쏘려고 했던 권총은 몰리를 죽인 권총과 똑같은 총이야!"

푸아로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건 정말 훌륭한 성과로군!"

"그래, 프랭크 도사로서는 도리어 오점이지."

"확증이 아니로군."

"그래, 그렇지만 자살 판결을 재고하게 만들 만큼 충분해. 그 총은 외제이고 또 흔치 않거든."

에르퀼 푸아로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썹이 초승달 같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프랭크 카터라고? 아냐....... 확실히 아냐!"

열다섯, 열여섯, 부엌의 하녀들

"이건 사실이에요. 맹세컨대 사실이에요....... 그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내 말을 믿어줘요!"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는 지치고 서글프게 들렸다.

"난 당신을 믿소."

그는 문을 향해 움직엿다.

프랭크 카터가 소리쳤다.

"저들이 날 교수형에 처할 거예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면 분명 교수형에 처할 거라고요!"

푸아로가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교수형에서 스스로를 구한 것이오."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저들 말로는......."

푸아로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얘기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어요. 이제 나한테 맡겨요."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열일곱, 열여덟, 시중드는 하녀들

"아니, 난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소. 당신은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며, 한 번 탈선을 했을 뿐 외견상 그것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요. 당신은 공적으로 여전히 한결같았고 고결했으며, 진실했고 정직했소. 하지만 마음속에선 사랑의 힘이 저항할 수 없는 절정을 향해 커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네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고 돌아보지 않았던 거지요."

"온 나라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모르시오, 푸아로?"

"내게 중요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뺴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는 개인의 목숨입니다."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것이 당신의 대답이군요."

앨리스테어 블런트가 말했다.

에르퀼 푸아로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고, 그것이 내 대답이오......."

그는 일어서서는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두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열아홉, 스물, 내 접시가 비었다네.

"내가 앨버트 채프먼이오. 그래서 꽤나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마누라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킬킬 웃으며 황급히 사라졌다.

충격을 받은 푸아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커지고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푸아로가 혼자 중얼거렸다.

"열아홉, 스물, 내 접시가 비었다네......."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더 구스의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영어권 국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동요나 자장가 같은 것으로 어린 아이들이 쉽게 단어를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종종 마더 구스의 노래를 소설에 인용하는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 <다섯 마리 아기 돼지>등이다. 아마도 이 소설 또한 비슷한 것 같은데, 아예 노래 전체를 그대로 목차로 삼았다. 이 소설들에서는 노래와 소설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소설의 모든 단서와 결말까지 제시한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이 소설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억지로 노래에 내용을 짜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어떻게든 각 장에서 작은 요소라도 노래와 연결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설정,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부분에 대한 과한 묘사 때문에 오히려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1940년에 나온 소설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이었고, 영국 사회는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충돌이 왕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분과 당위성을 앞세울 경우 개인은 얼마나 쉽게 희생될 수 있는가. 크리스티는 푸아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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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1 (완전판) - 헤라클레스의 모험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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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흥미롭다.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 무슨 뜻일까? 현대판 영웅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신화 속 이야기? 알고 보니 헤라클레스란 푸아로의 이름 에르퀼을 말하는 것으로, 동일한 철자이지만 프랑스어에서 H가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에르퀼로 읽히는 것이었다. 현재 유럽의 역사는 그리스로마신화와 성경 양 쪽이 바탕이 된 문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의 상당수는 성경의 성인이거나, 신화의 영웅 이름이다. 영국의 고 다이애나비의 이름은 로마 신화 속 사냥의 여신이며,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이름은 바오로 성인,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이름도 성인 이름 그대로다.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소설 속 앤은 성경 속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이며, 노르웨이 소설가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여주인공 소피는 성녀 소피아에서 가져온 이름일 것이다. 영국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무지개의 여신이었고, 프랑스 여배우 레아 세이두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대지의 여신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인간 여인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의 아내였던 헤라의 저주를 받고, 총 12개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1. 네메아의 사자를 퇴치할 것

화살로도 칼로도 죽지 않는 사자를 몽둥이로 때려 지치게 한 다음 맨 몸으로 덤벼 목 졸라 죽였다. 이때 얻은 전리품인 사자 가죽을 헬멧처럼 머리에 쓰고 다녔다.

 

2. 레르나의 독사 히드라를 퇴치할 것

목 하나가 잘려나가면 두 개가 솟아나 100개까지 목이 늘어난 히드라의 결코 죽지 않는 진짜 머리를 베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했다.

 

3. 케리네이아의 암사슴을 생포할 것

1년 동안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녀 사슴을 지치게 만든 후 피가 나지 않도록 사슴의 뒷다리 뼈와 근육 사이에 독이 묻지 않은 화살을 쏘아 잡은 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하며 원래 있던 곳에 데려다 놓겠다 약속하였다. 과업 완수 후 헤라클레스는 사슴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 놓았고 여신은 그를 용서하였다.

 

4.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생포할 것

1년간 추격한 끝에 눈 속으로 몰아세워서 지치게 한 다음 생포했다.

 

5.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청소할 것

30년 동안 치우지 않았던 아우게이아스 왕의 3천 마리 황소 우리를 알페이오스와 페네이오스 강물을 끌어들여 단 하루 만에 청소한다.

 

6. 스팀팔로스의 새를 퇴치할 것

처음에 화살로 새를 쏘았으나, 수가 너무 많자 청동방패를 두들겨 더 큰 소음을 내서 새들끼리 서로 부딪치게 해 혼란스럽게 만들어 추락사시켰다.

 

7. 크레타의 황소를 생포할 것

크레타의 들판에서 황소와의 씨름 끝에 사로잡았다.

 

8. 디오메데스의 야생마를 생포할 것

트라키아의 디오메데스 왕은 자신이 기르는 말에게 인육을 먹였다. 여행객을 가장하고 트라키아로 간 헤라클레스는 디오메데스와의 씨름에서 승리를 거둔 디, 왕 자신을 말에게 먹여 버렸다. 그리스로 가져온 이 말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에까지 종마로서 혈통을 이어갔다 한다.

 

9.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훔칠 것

아마존 족의 여왕 히폴리테와 동침한 뒤 선물로 허리띠를 받는다.

 

10. 게리온의 황소떼를 데려올 것

게리온은 메두사의 아들인 크뤼사오르의 아들로 몸과 머리가 세 개이며 소리는 사람 1만 명이 내는 소리와 맞먹는다. 그가 소유한 많은 소떼를 비밀리에 몰고 가던 중 게리온이 추격해오자 독이 묻은 화살로 처치한다.

 

11.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따올 것

헤라클레스는 네레우스를 통해 프로메테우스에게 가고, 그로부터 아틀라스를 통해 사과를 따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틀라스가 황금 사과를 따는 동안 그를 대신해서 하늘을 받치기로 하지만, 막상 사과를 가져온 아틀라스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계속 헤라클레스에게 하늘을 떠받치라고 한다. 헤라클레스는 동의하는 척하다가, 다만 지금 자세가 불편하니 하늘을 짊어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하고 아틀라스가 넘겨받는 순간, 헤라클레스는 사과를 챙겨 도피한다.

 

12. 하데스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생포할 것

지옥의 신 하데스의 수문장인 케르베로스는 머리가 셋 달린 개로, 헤라클레스는 완력을 사용하여 한쪽 목을 졸라 놓고 지상으로 잠시 끌고 온다.

 

네모난방에 네모난 현대 가구들....... 진열되어 있는 조각 작품조차 하나의 정육면체 위에 또 하나의 정육면체가 올라 있고, 그 위에는 구리줄로 기하학적인 배치가 되어 있는 현대적인 작품이었다. 이렇게 훌륭하고 질서정연한 방의 한 가운데 에르퀼 푸아로는 서 있엇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앗다. 그가 바로 현대판 헤라클레스였다....... 물론 울퉁불퉁한 근육질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불쾌한 벌거숭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와 반대로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콧수염(헤라클레스라면 그렇게 기를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을)에 단정하고 세련된 차림을 한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였다.

하지만 에르퀼 푸아로와 고전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에게는 한 가지 닮은 점이 있었다. 둘 다 이 세상의 악을 없애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둘 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공헌을 했다고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버튼 박사가 어젯밤 떠나면서 뭐라고 말했던가.

"자네가 하는 일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아닐세......."

아, 그 친구가 틀렸다. 다시 한 번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부활할 것이다....... 현대판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니 정말 기발하고 즐거운 착상이 아닌가! 은퇴를 하기 전에 열두 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열두 개의 사건만을 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두 개의 사건은 고대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모험과 유사점이 있는 것으로만 선별하는 것이다. 그래, 이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이고, 영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네메아의 사자

"물론이에요, 푸아로 씨. 전설에 따르면 페키니즈는 한때 사자였대요. 그리고 아직도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답니다!"

"오거스터스는 레이디 하팅필드께서 마드무아젤께 남겨주신 개이고, 마드무아젤께서는 이 개가 죽었다고 신고하셨죠? 오거스터스가 혼자서 도로를 지나 집으로 오는 게 걱정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오, 아니에요, 푸아로 씨. 오거스터스는 아주 영리해요. 그리고 제가 아주 신경 써서 훈련시켰어요. 일방통행로가 어떤 건지도 알고 있는 걸요."

"그렇다면 대부분의 인간들보다 더 뛰어나군요!"


레르네의 히드라

"처음에는 그랬죠. 마치 옛날 신화에 나오는 레르네의 히드라 같지 않습니까. 매번 머리 하나를 잘라낼 떄마다 그 자리에서 머리 두 개가 솟아나오니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문도 점차 자라나서 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와 이름이 같은 헤라클레스를 본받아 첫 번째 머리, 즉 본래의 머리를 자르고자 했습니다. 누가 이 소문을 가장 먼저 퍼뜨리기 시작했느냐 이거죠."


아르카디아의 사슴

"총에 맞은 사슴......."

그녀의 목소리는 희망이라곤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테드 윌리엄슨의 설명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무언가가 마음이 걸렸어요....... 경쾌한 갈색 발을 하고 숲을 뛰어다니던 당신의 모습말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마드무아젤? 마드무아젤께서 그래스론에 내려갔을 떄는 하녀가 없으셨을 겁니다. 비앙카 발레타가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아직 새 하녀를 구하지 못해서 마입니다. 그떄도 이미 병세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느끼셨을 테고요."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야생 멧돼지....... 르망퇴이유는 살인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우연의 일치였다. 푸아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헤라클레스의 네 번쨰 모험.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저는 먼저 헤라클레스처럼 강줄기를 옮기기 위해 진흙에 손을 집어넣어 댐을 쌓았습니다. 기자로 일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았죠. 그 친구가 덴마크에서 대역을 할 만한 적당한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접근해서 의도적으로 《엑스레이 뉴스》라는 이름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걸 기억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진흙....... 엄청난 진흙이 쏟아졌죠! '시저의 아내'는 진흙으로 범벅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정치 스캔들보다 훨씬 더 많으 관심을 가졌고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아, 효과가 대단했죠! 고결함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습니다! 여인의 도덕성이 다시 한 번 증명된 거지요! 뜬소문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스팀팔로스의 새

"청동 목걸이를 이용했죠. 현대적인 언어로 얘기하자면 쇠줄이 움직이게 만든 겁니다....... 즉, 저는 전보를 쳤습니다! 무슈, 당신의 스팀팔로스 새들은 당분간 사기 행각을 벌일 수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경찰들이 수배하고 있는 용의자였다는 건가요? 경찰에 체포된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크레타의 황소

"정말 이해가 안 되십니까? 육체적으로 저는 건강합니다. 황소만큼이나 튼튼하죠. 저는 오래 살 겁니다. 오랫동안....... 감옥 같은 방에 갇혀 살게 되겠죠! 저는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모두 끝내버리는 게 나을 겁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총기 사고'나 뭐 그런 것들이요. 다이애나는 이해할겁니다....... 차라리 스스로 끝내는 게 나아요!"


디오메데스의 말

소녀의 눈꺼풀이 움찔하는 가 싶더니, 곧 눈을 뜨고 놀라고 겁먹은 눈길로 푸아로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엉클어진 풍성한 암청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려고 고개를 흔들면서도 푸아로를 향한 눈길은 그대로였다. 마치 겁먹은 망아지 같았다....... 낯선 사람이 주는 먹이를 의심하는 야생동물처럼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히폴리테의 띠

크랜체스터 다리는 마치 마법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풍부하고 부드러운 색채의 고전적인 풍경 그림이 있었다.

푸아로는 상냥하게 말했다.

"히폴리테의 띠입니다. 히폴리테가 자신의 띠를 헤라클레스에게 주는 장면이죠....... 루벤스가 그린 작품, 위대한 예술 작품이고요....... 투 드 멤(그래도), 마드무아젤의 방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중략)

푸아로가 학교를 나서는 순간 공습이 시작됐다. 푸아로는 뚱뚱한 소녀, 마른 소녀, 까무잡잡한 소녀, 하얀 소녀 등 한 무리의 소녀들에게 둘러싸였다.

"몽 디유(하느님 맙소사)!"

푸아로는 중얼거렸다.

"이거야 말로 아마존 전사들의 공격이군!"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소녀가 외쳤다.

"소문은 들었어요!"

소녀들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왔다. 에르퀼 푸아로는 소녀들에게 온통 둘러싸였다. 푸아로는 극성스러운 어린 소녀들의 물결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스물 다섯 명의 소녀들은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외쳤다.

"무슈 푸아로, 제 책에 사인 좀 해 주시겠어요......?"

 
게리온의 무리들

"에버릿 양은 궤양으로 죽었고, 의사도 미심쩍은 구석은 전혀없었다고 확신했네. 로이드 부인은 기관지 폐렴으로 죽었고, 레이디 웨스턴은 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작자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앓아 왔어. 리 부인은 영국 북부 어딘가에서 먹은 샐러드 때문에 장티푸스로 죽엇다네. 이 중 세 명은 병에 걸려 자신의 집에서 죽엇고, 로이드 부인은 프랑스 남부의 호텔에서 죽었다지. 이 사람들의 죽음만 놓고 본다면 위대한 목자, 아니 앤더슨 박사와의 연관서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 그저 우연인 게지. 한마디로 말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거야."

에르퀼 푸아로는 한숨을 쉬었다.

"몽 셰르(이봐), 하지만 난 이번 사건이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모험이고, 앤더슨 박사가 내가 없애야 할 게리온의 괴물이라는 느낌이 들어."

재프는 걱정스럽게 푸아로를 바라보았다.

"이봐, 푸아로, 자네 최근에 무슨 이상한 책이라도 읽었나?"

 
헤스페리데스의 사과

"잔을 만든 장인의 솜씨가 빼어나죠. 이 잔을 만든 장인이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잔에는 뱀이 또아리를 트고 있는 모습이 보석으로, 나무 위의 능금들은 아주 아름다운 에메랄드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푸알는 갑자기 구미가 당긴 듯 중얼거렸다.

"능금이요?"

(중략)

이제 둘은 수녀원의 담장에 도달했다.아틀라스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할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아틀라스는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찌그러지겠다며 신음을 내뱉었다!

에르퀼 푸아로는 엄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랬다.

"조용히 하게. 자네가 떠받치고 있는 건 지구가 아니야....... 이 에르퀼 푸아로뿐이라고."


케르베로스를 잡아라

작달막하고 깐깐한 남자가 커다랗고 화려한 여자를 동경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푸아로는 자신을 사로잡은 백작 부인의 치명적인 매력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백작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예전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푸아로가 동경하는 여성 베라 코샤코프 부인은 『빅 포(1927)』, 『푸아로의 초기 사건집(1974)』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옮긴이)

(중략)

'지옥이요.'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푸아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백작 부인이 정말 그렇게 말했던 걸까?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중략)

에르퀼 푸아로는 문구들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세 비엥 이마지네 싸(그것 참 기발하네)!"

푸아로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는 자줏빛 백합이 꽂힌 인공 연못이 있었다. 연못 위에는 보트 모양의 다리가 놓여 있어 푸아로는 그 다리를 건넜다.

왼쪽에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동굴이 보였다. 그 안에는 그가 여태껏 본 중 가장 추하고 사악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개는 아주 꼿꼿하게 앉아 으스스한 모습으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푸아로는 그 개가진짜 살아 있는 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 개가 새카만 몸에서 흉악한 고개를 들어오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그떄 작고 둥근 강아지용 비스킷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푸아로의 눈에 띄었다. 바구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케르베로스에게 뇌물을!'

 

 

은퇴하고 호박을 키우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푸아로. 마치 프리마돈나의 고별무대처럼 딱 12개의 사건만 맡기로 결심한다. 기준은 그와 같은 이름의 고대 신화 속 인물인 헤라클레스의 12 모험과의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마치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국 드라마 '셜록'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셜록 홈즈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 드라마는 탁월한 연기력을 갖추었지만 영국 밖에서는 유명하지 않았던 배우를 세계적인 톱스타로 만들었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가지고 현시점에 맞추어 이야기하는 것. 1947년에 나온 이 작품을 계기로 푸아로가 은퇴했느냐고? 물론 아니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 예상치도 못했던 로맨스의 힘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일주일 뒤, 레몬 양은 자신의 고용주에게 계산서 한 장을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무슈 푸아로. 제계 이 계산서를 처리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플로리스트 레오노라에게서 붉은 장미꽃 구입, 11파운드 8실링 6펜스, 받는 사람은 엔드 가 13번지 WC1, '지옥'의 베라 로샤코프 백작 부인 앞으로 되어 있네요."

푸아로의 얼굴이 빨간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곧 귀까지 벌게졌다.

"계산서는 정확하네요, 레몬 양. 그건 특별한 일에 대한 조그만...... 선물이오. 백작 부인의 아드님이 철강 업계의 거물급 회사 사장 딸과....... 곧 미국에서 약혼식을 올린다고 하네요. 붉은 장미꽃은, 내가 기억하기로....... 백작 부인께서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

"그렇군요."

레몬 양이 말했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쯤이면 꽃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에르퀼 푸아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떄로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할 떄가 있소."

푸아로는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아주 활기차 보였다.

레몬 양은 푸아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류 정리법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오로지 여자의 직감만이 떠올랐다.

"오, 맙소사!"

레몬 양은 중얼거렸다.

"세상에....... 설마 저 나이에? 아닐 거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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