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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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고급 스타킹을 신은 단정한 발목에 거칠지 않은 발, 하지만 구두는 별로였다. 번쩍이는 버클이 달린 최신식 에나멜가죽 구두에서 푸아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세련되지 않아, 너무 촌스러워!

그 숙녀가 택시에서 내리는 와중에 다른 쪽 발이 택시 문에 걸리면서 구두 버클이 떨어져나갔다. 버클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보도에 떨어졌다. 푸아로는 당당하게 앞으로 뛰어나가 버클을 집어 들고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셋, 넷, 문을 닫아라.

"엠버라이어티스 씨요? 죄송합니다만, 그분은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아하, 난 만날 수 있소."

재프가 험악하게 대꾸했다. 그는 푸아로를 옆으로 밀치고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엠버라이어티스 씨는 30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에르퀼 푸아로에게 그것은 마치 어떤 문이 천천히, 그러나 굳게 닫히는 것과도 같았다.

다섯, 여섯, 막대기를 집어 들어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환자의 잇몸에 과도한 양을 주사하는 일 말이에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간혹 환자들이 부작용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환자들이 생리적으로 정상이지 않아서 그래요....... 심장 활동이 정상이 아닐 경우 말이죠. 하지만 과잉 투여는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의사들은 기계적으로 적당한 양을 투여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이에요. 거의 자동적으로 정확한 양을 투여하지요."

푸아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맞아요."

"너무나도 표준화되어 있으니까요. 매번 양을 다르게 조제해와서, 자기도 모르게 실수로 많은 양을 조제하는 약사들과는 다르지요. 처방전을 너무나도 많이 쓰는 의사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치과의사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라요."

일곱, 여덟, 그것들을 똑바로 세워라.

그 다음 날 석간 신문이 나오면서 세상이 온통 떠들썩해졌다. 배터시 아파트에서 발견되어 세인즈버리 실 양의 것으로 여겨졌던 시신이 앨버트 채프먼 부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퀸 샬럿 가 58번지의 레더런 씨는 시신의 치아와 턱, 몰리 씨의 진료 차트에 기록된 모든 상세한 내용을 증거로 그 시신이 채프먼 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발표했다.

세인즈버리 실 양의 옷이 시신에게 입혀져 있었으며 세인즈버리 실 양의 핸드백도 시신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막상 세인즈버리 실 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홉, 열, 튼실하게 살찐 암탉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두 문장이 지난밤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소리가 어쨰서 희미하게 낯이 익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햇살로 걸어 나오면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리베라 부인?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수화기 너머로 말을 한 사람이 올리베라 부인일 리가 없었다!

이기적이고 머리도 나쁘고, 욕심 많고 자기중심적인 그 지각없는 귀부인이? 그 자신이 방금 그녀를 어떻게 불렀던가?

"저 튼실하게 살이 찐 암탉? 쎄리디퀼르(말도 안 돼)."

에르퀼 푸아로가 말했다.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열하나, 열둘, 밝혀 내야 한다.

주마등처럼 모든 것이 지나갔다....... 구두의 버클, 25센티미터 스타킹, 훼손된 얼굴, 급사인 앨프리드의 저속한 문학 취향, 엠버라이어티스 씨의 활동, 그리고 죽은 몰리 씨의 역할.

열셋, 열넷, 하녀들이 사랑을 호소하다.

"그래, 이제 시작하지. 토요일에 프랭크 카터가 블런트를 쏘려고 했던 권총은 몰리를 죽인 권총과 똑같은 총이야!"

푸아로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건 정말 훌륭한 성과로군!"

"그래, 프랭크 도사로서는 도리어 오점이지."

"확증이 아니로군."

"그래, 그렇지만 자살 판결을 재고하게 만들 만큼 충분해. 그 총은 외제이고 또 흔치 않거든."

에르퀼 푸아로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썹이 초승달 같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프랭크 카터라고? 아냐....... 확실히 아냐!"

열다섯, 열여섯, 부엌의 하녀들

"이건 사실이에요. 맹세컨대 사실이에요....... 그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내 말을 믿어줘요!"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는 지치고 서글프게 들렸다.

"난 당신을 믿소."

그는 문을 향해 움직엿다.

프랭크 카터가 소리쳤다.

"저들이 날 교수형에 처할 거예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면 분명 교수형에 처할 거라고요!"

푸아로가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교수형에서 스스로를 구한 것이오."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저들 말로는......."

푸아로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얘기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어요. 이제 나한테 맡겨요."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열일곱, 열여덟, 시중드는 하녀들

"아니, 난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소. 당신은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며, 한 번 탈선을 했을 뿐 외견상 그것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요. 당신은 공적으로 여전히 한결같았고 고결했으며, 진실했고 정직했소. 하지만 마음속에선 사랑의 힘이 저항할 수 없는 절정을 향해 커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네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고 돌아보지 않았던 거지요."

"온 나라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모르시오, 푸아로?"

"내게 중요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뺴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는 개인의 목숨입니다."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것이 당신의 대답이군요."

앨리스테어 블런트가 말했다.

에르퀼 푸아로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고, 그것이 내 대답이오......."

그는 일어서서는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두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열아홉, 스물, 내 접시가 비었다네.

"내가 앨버트 채프먼이오. 그래서 꽤나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마누라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킬킬 웃으며 황급히 사라졌다.

충격을 받은 푸아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커지고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푸아로가 혼자 중얼거렸다.

"열아홉, 스물, 내 접시가 비었다네......."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더 구스의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영어권 국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동요나 자장가 같은 것으로 어린 아이들이 쉽게 단어를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종종 마더 구스의 노래를 소설에 인용하는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 <다섯 마리 아기 돼지>등이다. 아마도 이 소설 또한 비슷한 것 같은데, 아예 노래 전체를 그대로 목차로 삼았다. 이 소설들에서는 노래와 소설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소설의 모든 단서와 결말까지 제시한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이 소설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억지로 노래에 내용을 짜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어떻게든 각 장에서 작은 요소라도 노래와 연결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설정,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부분에 대한 과한 묘사 때문에 오히려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1940년에 나온 소설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이었고, 영국 사회는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충돌이 왕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분과 당위성을 앞세울 경우 개인은 얼마나 쉽게 희생될 수 있는가. 크리스티는 푸아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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