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4 (완전판) -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라크와 시리아에 있는

여러 고고학자 친구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의학박사 자일스 라일리의 서언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약 4년 전이다. 내 생각에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뀐 만큼 일반인들에게도 이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중략) 그래서 나는 이 과업을 맡아 달라고 에이미 레더런 양을 강력히 설득했다. 그녀는 이 일의 적임자임이 분명하다. 최고의 전문가인 데다가, 이라크에 파견된 피츠타운 대학교 발굴단에 속하긴 했어요 그것에 좌우될 사람이 아니고, 날카롭고 이지적인 눈썰미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더런 양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사실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의사로서 내가 한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였다). 설득이 끝난 다음에도 그녀는 내게 자신의 원고르르 보여 주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꺼렸다. 원고를 읽은 후에야 나는 그게 부분적으로 내 딸 실러에 대해 몇 가지 비판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즉각 그녀를 안심시켰다. 요즘은 자식들이 활자상으로 거리낌 없이 자기 부모들을 비판하는 만큼 그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면 부모들도 싫을 게 없다고 말이다. 레더런 양이 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글솜씨에 대한 지나친 겸손에서였다. 그녀는 내가 '문법 등등을 교정'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는커녕 단어 하나 바꾸지 않았다. (중략)

이 책에 대해 내가 한 일이 있다면 첫 장을 쓰는 재량을 발휘한 것뿐이다. 레더런 양의 친구 하나가 친절하게 제공해 준 편지의 도움을 받았다. 일종의 권두화를 그려내 해설자의 모습을 거칠게나마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에르퀼 푸아로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같다. 물론 나중에는 그에게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누구든 마찬가지 감정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를 만나기 전 내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날카롭고 예리한 얼굴에 키가 크고 여윈 셜록 홈즈 같은 인물을 떠올렸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내가 기대한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외국인이었다. 

누구든지 그를 보면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는 무대나 그림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 우서 키는 165센티미터쯤 되고, 인상이 기묘하고 몸집이 통통했으며 몹시 눈에 띄는 콧수염에 달걀 같은 두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희극에 나오는 이발사 같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라이드너 부인을 살해한 자를 찾아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달갑지 않은 느낌이 내 얼굴에 드러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눈을 기묘하게 반짝거리면서 거의 직선적으로 내게 이렇게 말햇던 것이다.

"내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마 쇠르(자매님)? 잊지 마십시오. 푸딩의 가치는 맛을 보고 난 다음에야 결정된다는 것을요."

 

 

"선생 말은 아내의 전 남편이 발굴단원 중의 하나인데, 아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몇 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은 약 15년 전 이 남자와 겨우 몇 달을 함께 살았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흐른 후 그와 마주쳤을 때 부인이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얼굴은 변했고, 체격도 달라졌을 겁니다. 목소리는 그렇게 바뀌지 않았겠지만 그건 쉽사리 변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부인은 그자를 주변 사람 중에서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부인은 그를 외부 어딘가에 있는 사람, 낯선 사람으로 상정합니다. 그래요. 부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또 형에게 그렇게 헌신적이었던 그 아이도 이제 어른이 되었습니다. 서른 살에 가까운 성인 남자를 보고 부인이 열 살이나 열두 살이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윌리엄 보스너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가 보기에 자기 형은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 그의 조국 독일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에게 라이드너 부인은 배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자기 형을 죽게 만든 괴물이라고요! 쉽게 영향을 받는 어린아이는 영웅 숭배에 빠져들 수 있고, 어린 마음은 한 가지 생각에 쉽게 사로잡힐 수 있답니다. 그 생각이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되는 거지요."

 

 

푸아로는 작은 수첩에 무엇인가 적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질서와 체계를 갖고 해 나갑시다. 첫 번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라비니 수사와 머케이도 씨입니다. 두 번째로는 콜먼, 에모트, 라이터가 있습니다.

이제 문제의 반대 국면으로 넘어갑시다. 수단과 기회 말입니다. 그 발굴단원들 가운데 범죄를 저지를 수단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누구일까요? 캐리는 작업장에 있었고, 콜먼은 하사니에에 있었고, 박사님 자신은 옥상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라비니 수사, 머케이도 씨, 머케이도 부인, 데이비드 에모트, 칼 라이터, 존슨 양, 그리고 레더런 간호사가 남습니다."

"오!"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 앉은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지요. 하지만 그런 관례는 부질없는 것 같아요. 어리석은 일이죠. 진실은 항상 진실이니까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입조심을 하는 게 오히려 낫죠.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요. 반면 죽은 사람들에게는 그럴 염려가 없어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때때로 죽은 다음까지 지속된답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그렇다고요! 텔야리미아를 짓누르던 그 기묘한 분위기에 대해 간호사에게 들으셨나요? 모두들 얼마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지 들으셨냐고요? 또 그들 모두는 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어요. 그것이 루이스 라이드너가 한 짓이에요. 3년 전 제가 어린 나이로 여기 왔을 때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유쾌한 팀이었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들은 꽤 잘 지냈어요. 하지만 올해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을 덮쳤지요....... 그 여자가 한 짓이에요. 루이스 라이드너는 다른 누군가가 행복한 것을 못 견디는 그런 여자였어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그런 여자였던 거죠! 그 여잔 만사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어 했어요. 그저 재미로, 아니면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요....... 아니 어쩌면 그저 그렇게 생겨먹었기 떄문인지도 모르죠. 한마디로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여자였답니다!"

 

 

"그 여자는 육감적인 미인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원한 건 불륜이 아니었어요. 그건 그 여자의 냉혹한 실험일 뿐으로, 루이스 라이드너는 사람들을 자극해 서로 대적하게 하면서 재미를 느낀 것뿐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고요. 그 여자는 평생 누구와도 싸움을 벌인 적이 없는 그런 여자예요.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싸움이 벌어지죠! 그녀가 싸움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 여자는 여자 이아고(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계락과 음모에 능한 인물-옮긴이) 같아요. 드라마를 필요로 하죠. 하지만 자신이 연루되고 싶어 하진 않아요. 언제나 외부에서 줄을 조종하죠. 사태를 바라보면서, 즐기면서 말이에요."

 

 

"실제로 어떤 남자에게든 그의 아내의 실상을 밝히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반면 기묘하게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 남편의 실체에 대해 의연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 대한 애정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채 그가 건달, 사기꾼, 마약 중독자, 상습적 거짓말쟁이, 색골이라는 사실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답니다! 여자들은 놀라운 현실주의자들이지요."

"라일리 박사님, 라이드너 부인에 대한 당신의 정확하고도 솔직한 견해는 어떤 겁니까?"

라일리 박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천천히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솔직한 견해란....... 이거 참 말하기 어렵군요! 난 그녀를 그렇게 잘 알지 못합니다. 그녀에겐 매력이 있었죠. 머리가 좋고, 친절했습니다....... 또 뭐가 있죠? 그녀에게는 흔한 결점 같은 것이 없었어요. 그녀는 천박하거나 게으르지 않았고, 심지어는 허영에 차 있지도 않았어요. 나는 그녀가 완벽한 거짓말쟁이라고 늘 생각해 왔답니다(증거는 없지만요). 내가 알 수 없는 것은(그래서 알고 싶은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만 거짓말을 했는가 하는 겁니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좀 호의적입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여자는 상상력도, 동정심도 없는 여자니까요. 그녀가 정말 남자를 홀리는 여자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거 '자신의 활과 화살'로 남자를 쏘아 떨어뜨리는 게임을 즐겼을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내 딸의 생각을 알고 싶으시다면......."

"기쁘게도 이미 들었답니다."

푸아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라일리 박사가 말했다.

"흠, 내 딸은 시간 낭비 같은 건 하지 않았겠군요! 그애는 상당히 난폭하게 말의 칼을 휘둘러댔을 겁니다! 젊은 세대는 죽은 이를 배려하는 마음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지요. 유감스럽게도 젊은이들 쪾이 예절에 대해 오히려 더 까다로운 것 같아요! 그들은 '구식 도덕'을 비난하면서 스스로는 훨씬 더 융통성 없는 빡빡한 도덕률을 세우지요. 만약 라이드너 부인이 몇 차례 연애 사건을 벌였다면 실러는 아마도 그녀가 '인생을 한껏 누렸다'거나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다'고 평가했을 겁니다. 라이드너 부인이 어떤 전형, 그러니까 자신의 전형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을 실러는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쥐를 가지고 놀 때 고양이는 본능에 따라 행동합니다! 고양이는 그렇게 생겨먹은 겁니다. 남자들이란 보호받고 지켜져야 하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들은 고양이 같은 여자, 충직한 스패니얼 같은 여자, 죽을 때까지 숭배할 만한 여자, 새처럼 쨱짹거리는 여자 등등 온갖 여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소풍을 나온 게 아니라고요! 난 실러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라이드너 부인을 증오했다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인정했으며 합니다. 실러는 이곳에서 유일한 젊은 처녀로, 당연히 자신이 젊은 청년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보기에는 이미 중년에 접어든, 그리고 이미 두 차례나 결혼한 여자가 나타나 여자의 영역에서 자신보다 앞서고 있으니 짜증나는 게 당연하지요.

실러는 잘 자란 처녀로 건강함과 상당한 미모를 갖춘 만큼 당연히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라이드너 부인은 그 점에서는 평범한 미인 이상이었습니다. 그녀에겐 화를 불러오는 파멸적인 마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키츠가 말한 '잔인한 미녀'같은 존재였지요."

나는 의자에서 튕겨지듯 일어섰다. 박사까지 이런 말을 하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좀 지나치지 않은가!

"박사님 따님이 혹시...... 좀 경솔한 추측인지 모르지만...... 그곳 청년들 중 하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오,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실제로 실러는 에모트와 콜먼을 춤 상대로 삼아왔습니다. 그 애가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또 젊은 공군들도 두엇 있답니다. 지금으로선 그들 모두가 그 애의 그물로 몰려드는 고기에 불과한 것 같군요. 그래요, 어이없게도 젊은 자신이 나이든 여자에게 졌다는 생각 때문에 그 애는 그렇게 약이 오른 걸 테죠! 그 애는 나만큼 세상을 모르니까요. 내 나이가 되면 여학생의 얼굴과 맑은 눈빛, 단단하게 균형 잡힌 젊은 몸매의 진가를 알지요. 하지만 서른이 넘은 여자는 남자의 말을 열중해서 들어줄 줄 안답니다. 그리고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가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를 환기시키죠.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청년은 거의 없답니다! 실러는 예븐 처녀에요. 하지만 루이스 라이드너는 정말 미인이었습니다. 빛나는 눈과 그 눈부신 금발이라니. 그래요,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박사 말이 옳아. 미인이란 놀라운 존재야. 그녀는 아름다웠어. 시샘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 앉아 감탄하게 되는 아름다움이었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나는 라이드너 부인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가!

 

 

무슈 푸아로는 다분히 프랑스인다운 태도로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 말씀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군요, 마드무아젤. 그저 소문을 전해 듣고 싶었답니다. 전 젊은이들의 연애 사건에 늘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그랬군요. 진실한 사랑이 평탄하게 진행되는 것은 좋은 일이죠."

존슨 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푸아로도 응답이라도 하듯 한숨을 내쉬엇다. 존슨 양은 처녀 시절 자신의 연애 사건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푸아로에게 아내가 있는지,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해 들은 대로 그에게도 정부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의 외모가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 보였으므로, 그런 일은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즈음 나는 무슈 푸아로와 내가 어떤 환자를 맡고 있는 담당 의사와 간호사 같다는 느낌을 같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그 일은 하나의 수술처럼 보였고, 그는 집도 의사 같았다. 이렇게 말해서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간호사 훈련을 마친 직후 있었던 일이 머릿소게 떠올랐다. 당시 나는 어떤 가정집으로 환자를 돌보러 갔다. 즉각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 생겼는데, 환자의 남편이 요양소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요양소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집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버텼다.

음, 나에게는 물론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나 이외에 다른 간호사가 없었다. 내가 모든 걸 맡아서 해야 했다. 물론 내 신경은 극도로 곤두섰다. 의사가 무엇을 필요로 할지 생각해 빠짐없이 준비해 두었지만, 그럼에도 뭔가 잊은 것이 없는지 걱정스러웟다. 의사들이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정말 이상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일은 아주 잘 진행되었다! 의사가 뭔가를 요구할 때, 나는 이미 그것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수술이 끝난 후 그 의사는 내게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대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 개업의 역시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일을 혼자 해냈던 것이다!

환자 역시 회복되었으므로, 모두들 행복한 셈이었다.

음, 나는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어던 점에서 무슈 푸아로는 그 의사를 생각나게 했다. 과거 그 의사 역시 키가 작았다. 원숭이 같은 얼굴을 한 못생기고 키 작은 사내였지만 외과의로서는 탁월했다. 그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엇다. 많은 외과 의사를 만나본 나는 의사들 간에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중략)

난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나로서는 무슈 푸아로가 내게 바라는 일과 바라지 않는 일이 어떤 것들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가 일부러 내게 그 손수건을 찾아오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하는 뜻에서.

이 일은 또다시 수술 과정과 흡사해졌다. 주의를 기울여 의사가 원하는 것만을 건제주고 원하지 않는 것은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필요로 하지도 않을 때 동맥용 핀셋을 건네준다면, 정작 그것이 필요한 때에는 지체하게 되지 않겠는가? 다행히 나는 내 일을 잘 알고 있다. 간호 일에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는 정말이지 경험 없는 초보가 아닌가. 그러므로 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중략)

생각해 보니 나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날 때 간호사는 많은 것을 듣게 된다. 환자는 간호사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간호사가 그런 이야기를 들엇다는 것을 대개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 간호사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마련이다. 나는 캐리 씨를 환자로 간주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을 모르는 체 있는 편이 좋다. 내 행동이 단순히 호기심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면, 실제로 호기심이 통했노라고 인정하련다. 나는 이 사건에서 가능한 한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끝에 나는 슬쩍 몸을 피해 커다란 흙더미 뒤를 빙 돌아가 그들이 있는 곳에서 30센티미터를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서 있으면 흙더미 모서리에 가려져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리라. 환자를 맡고 있는 간호사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눈의 여왕과 소년 카이에 관한 북구 동화였지요. 제 생각에 라이드너 부인은 그 여왕과 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소년 카이를 줄곧 속여 넘기던 여왕 말입니다."

"아, 그래요.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아닌가요? 그리고 그 이야기엔 소녀 하나가 나오지요. 게르다라는 이름이었던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줄거리는 대부분 잊어버렸습니다."

"좀 더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에모트 씨?"

데이비드 에모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녀를 제대로 파악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지요. 어느 날엔 악마 같은 짓을 하는가 하면 그 다음 날에는 정말이지 천사처럼 변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선생님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늘 원하던 것이 바로 그거였으니까요. 사태의 중심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했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토스트와 땅콩버터를 건네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을 위해 내심을 토로해 주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런 그녀를 만족시켜 주지 않았다면요?"

 

 

"라이드너 부인의 취향은 단순하다 못해 금욕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분명 사치스러운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한편 그녀가 한땀한땀 놓고 있던 자수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아름다웟지요. 그 사실은 그녀가 까다롭고 예술적인 취향을 지닌 여자였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녀의 방에 있던 책들을 살펴보고 나는 그런 심증을 더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려는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자였다고 짐작됩니다.

라이드너 부인이 남성을 사로잡는 것을 주된 관심사로 삼는 여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 실제로 그녀가 감각적인 여자였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점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방 선방 위에는 『그리스인들이란?』『상대성 이론 입문』『레이디 헤스터 스탠호프의 일생』『므두셀라로 돌아가라』『린다 론든』『크루 트레인』같은 책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선 문화와 현대 과학, 그러니까 극히 이지적인 분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소설들 가운데에서『린다 론든』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크루 트레인』같은 작품을 보면 라이트너 부인이 독립적인 여성, 다시 말해서 남자에게 구속되거나 영향받지 않는 여성들에게 공감과 관심을 갖고 있엇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레이디 헤스터 스탠호프의 성격에도 흥미가 끌린 것 같습니다.『린단 론든』은 한 여자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 내용을 담은 보기 드문 책입니다.『크루 트레인』은 한 열정적인 개인주의자에 대한 스케치이고『므두셀라로 돌아가라』는 정서적이기보다는 지적인 삶의 태도에 공감하고 있는 책입니다. 나는 죽은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젊었고 뛰어난 미인이었습니다. 단순히 획일적인 미인이 아니라 지금처럼 남자의 정신과 감각을 사로잡는 예의 그 마력적인 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미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자였지요.

그런 여자들은 당연히 결혼이라는 개념에 반감을 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남자들에게 매혹당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 독립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편을 더 좋아하죠. 그들은 정말이지 전설 속의 '무자비한 미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라이드너 부인은 결혼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남편이 강한 성격의 남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스파이 행위가 밝혀지자, 라이드너 부인은 레더런 간호사에게 털어놓은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미국 정부에 그 사실을 알린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행동에는 심리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레더런 간호사에게 말하기를, 당시 자신은 순진한 애국심에 불타는 풋내기여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했스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가장 그럴싸하게 들리는 동기를 선택한답니다! 라이드너 부인은 자신이 애국심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남편을 제거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구의 표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느낌이 싫었던 겁니다. 실제로 그녀는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국심이라는 방식을 빌어 자신의 자유를 되찾은 겁니다."

 

 

무슈 푸아로는 시리아로 돌아갔다가, 딱 일주일 후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 또 다른 살인 사건을 맡았다. 그가 명석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날 놀린 일은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그 범죄에 가담했거나 진짜 간호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의사들은 때떄로 그런 식이다. 몇몇 의사들은 상대의 감정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농담을 한다!

나는 라이드너 부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어떤 여자였을까......? 때로는 그녀가 무시무시한 여자였던 것 같고, 때로는 그녀가 내게 얼마나 친절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러웟는지.......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같은 것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결국 그녀는 비난보다는 동정을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라이드너 박사에게도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두 차례나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감정이 달라지진 않는 것 같다. 그는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했다.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건 좀 무시무시한 일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수록,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슬픔과 병 같은 것을 겪으면 겪을수록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이 측은해진다. 때로는 숙모님이 나를 키울 때 정해 두신 그 훌륭하고 엄격한 규칙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신앙심이 깊고 몹시 까다로우셨던 숙모님. 그녀는 이웃의 모든 결점들을 안팎으로 꿰고 계시지 않앗던가.......

오, 이런, 라일리 박사의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어떻게 책을 끝맺는 게 좋을까? 멋지게 어울리는 한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라일리 박사에게 알바어 구절이라도 하나 여쭤 봐야겠다.

무슈 푸아로가 사용했던 것 같은 구절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그 비슷한 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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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3 (완전판) - 그들은 바그다드로 갔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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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에서 이라크로 자동차 여행 중이던 영국인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졌는데, 강도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 지대에서 이동 중이던 쿠르드 인 한 명이 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 담배 밀수꾼 혐의를 받고 있던 또 다른 쿠르드 인인 압둘 핫산도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로완두즈 거리에서도 남성의 사체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아르메니아인 마차꾼으로 밝혀졌다. 피해자의 인상착의가 카마이클과 들어맞는다. 키, 체중, 두발, 체격이 모두 일치한다. 그자들은 위험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카마이클을 잡으려고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카마이클이 이라크에 들어오면 위험은 더욱 클 것이다. 대사관의 정원사, 영사관의 하인, 공항 관계자, 세관, 철도역....... 뿐만 아니라 모든 호텔을 감시하고 있다....... 경계망이 빈틈없이 뻗어 있다."

크로스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그렇게 도처에 깔려 있다고 보십니까?"

"그 점만은 확신하네. 심지어 우리 쪽에서도 정보가 새어 나갔네. 바로 이 점이 최악이지. 카마이클을 안전하게 바그다드로 데려오기 위한 우리의 대책이 상대편에 이미 노출되지 않았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겠나?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자네도 알잖나? 상대 진영에 사람 하나 심어 놓는 것쯤은 기본이지."

 

이 책은 1951년에 나온, 53번째 추리소설이며 41번째 장편이다. <갈색 양복의 사나이>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모험심 강한 여주인공, 로맨스, 의문의 사나이, 이국에서 일어나는 모험 등이 비슷했다. <갈색 양복의 사나이>에서는 레이스 대령이 등장하고 이 소설에서는 어떤 탐정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거대한 음모가 있고,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씩씩한 여주인공이 뚜벅뚜벅 사건 속으로 걸어나간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빅토리아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있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장점은 편견이 없고, 인정이 넘치며, 용감하다는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모험을 좋아하는 기질은 칭찬받을 만할 것일 수도 있고, 안전을 중요시하는 현대에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반면 가장 큰 단점은 때를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빅토리아는 사실에 비하여 월등히 매혹적인 허구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능수능란하고 쉽게 예술적 열의를 가지고 거짓말을 했다. 만약 약속에 늦었다면 (자주 있는 일이었다.) 빅토리아는 시계가 멈추었다거나 (실제로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버스가 연착되었다는 변명은 성에 차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코끼리가 버스 노선상에 드러 누워 있었다거나 스릴 넘치는 강도 현장에서 경찰을 돕느라 늦었다는 거짓말이 훨씬 그럴싸하다가 여겼다. 빅토리아가 생각하는 살맛 나는 세상이란 호랑이가 스트랜드 가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고 위험한 도둑이 투팅(런던 근교의 지명-옮긴이)에 창궐하는 세상이었다.

 

여주인공에 대한 설명이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과는 다르게, 여주인공이 굉장히 특이하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주인공이라니.

 

오늘도 빅토리아는 생각에 잠겨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고 사무실은 당연히 상사의 아내를 흉내 내기에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고 혼잣말을 했다. 물론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그녀는 지루한 업무를 즐겁게 만들어 주곤 했던 천성을 자제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그녀는 그린홀츠, 시몬스 앤드 레더 베터에서 벗어나 다른 직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으로 충만해 있었다. 빅토리아는 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하고 생각하곤 했다.

 

거짓말도 좋아하고, 흉내도 잘 내면서, 회사에서 잘리고 나서도 이렇게나 긍정적인 여주인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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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15 -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5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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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가 이끄는 소비자트렌드분석센터의 연구물로, 2005년부터 매년 트렌드 예측을 해오고 있다. 2007년부터 일간지에 '올해의 트렌드 예측'을 연재하기 시작하였고, 책은 2009년부터 나왔다. 키워드는 10개를 선정하며, 12간지 중 그 해에 해당하는 동물을 넣어 전체적인 틀을 잡기도 하고, 10글자의 단어로 맞추고 앞글자를 따서 10개의 핵심을 뽑아낸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2015 COUNT SHEEP

2014 DARK HORSES

2013 COBRA TWIST

2012 DRAGON BALL

2011 TWO RABBITS

2010 TIGEROMICS

2009 BIG CASH COW

 

김난도라고 하면 사실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대중에 알려진, 스타 작가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책 이전부터 이미 '소비자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의 선구자이자 대중에게 자신의 지식을 훌륭하게 전달할 줄 아는 저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은 한 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기도 했으며, 이른바 '힐링' 혹은 '멘토'라는 단어가 그 책의 출간 전후로 폭발적인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 많다. 누군가는 분명히 그 책으로 인해서 희망을 얻었을 것이고, 당시 엄청나게 팔려나갔던 책들을 생각하면 분명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므로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원래 자신의 분야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저자이기에, 자신의 전문 분야까지 함께 싸잡아서 폄하될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전문 분야에만 집중했더라면 불필요하게 구설수에 오를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저자에게 가져다 주었을 인세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트렌드 분야에서 이 시리즈는 매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며, 실제로 읽어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예측해봤자 이게 얼마나 맞겠냐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맞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뭐가 더 달라지냐고 할 수도 있겠다. 직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사실 트렌드를 몰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트렌드에 민감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타고난 성격이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그런 나같은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이 책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 책 한 권만 읽고도, 작년에 수많은 소비 트렌드를 섭렵했다는 기분이 들었고, 2015년, 비록 절반 가까이 지나갔지만 예측하는 재미와 함께 현재까지 몇 개나 맞았을까 확인해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서문: '양의 해' 소비자의 작고 소소한 일상에 주목해야
2015년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

'트렌드 코리아' 선정 2014년 대한민국 10대 트렌드 상품

'꽃보다'시리즈: 시니어와 중년 여성을 예능 안으로

명량: 40~50대 남성

빙수 전문점: 밥보다 비싼 디저트 

스냅백: 복고와 스웨그 

에어쿠션 화장품: BB 크림의 장점은 담고 단점은 개선

의리: 소비자 스스로 놀게 하라

컬래버레이션 가요: 위험 부담 줄이고 신선함을 높이는 전략

타요버스: 예술이 산업에 미치는 영향

탄산수: 작은 사치와 웰빙 

해외직구: 좀 더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라면 복잡한 과정도 게임처럼 느껴질 수 있다

2014년 소비트렌드 회고
Dear, got swag? 참을 수 있는 ‘스웨그’의 가벼움->스냅백

카카오의 공식 사과 '외양간 프로젝트'

아이스버킷 챌린지


Answer is in your body 몸이 답이다

스텝 밟는 직장인, 도시의 양봉인


Read between the ultra-niches 초니치, 틈새의 틈새를 찾아라->탄산수

'개가 보는, 개를 위한 방송' 도그TV

반려견 보험 상품

셰어하우스


Kiddie 40s ‘어른아이’ 40대->'꽃보다' 시리즈

유니클로의 디즈니 컬렉션


Hybrid patchworks 하이브리드 패치워크->컬래버레이션 가요

YG와 제일모직이 손잡은 캐주얼 브랜드 '노나곤'


Organize your platform ‘판’을 펼쳐라

'아이디어 LG'

우버 택시와 에어비앤비


Reboot everything 해석의 재해석->타요버스

뽁뽁이와 갤럭시 기어

아르마니보다 비싼 유니클로, 백화점보다 비싼 마트


Surprise me, guys! 예정된 우연

'럭키백'


Eyes on you, eyes on me 관음의 시대, ‘스몰브라더스’의 역습

관찰 예능

'클록', 상대방의 노출된 정보로 자신이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앱

 
Say it straight 직구로 말해요

뉴메릭 마케팅, '미닛메이드 5얼라이브'와 '치즈5페라', '63와우크림'

위로보다 독설, '혜믿스님'

2015년 소비트렌드 전망
2015년의 전반적 전망: 장기적인 저성장 기조 속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과 취향의 다양화
Can't make up my mind 햄릿증후군

'베스트셀러 추종형' '많이 본 뉴스' '댓글 많은 뉴스'


Orchestra of all the senses 감각의 향연

작은 사치와 오감의 만족 추구, 지속적인 불경기 속 '지금을 즐기자'


Ultimate 'omni-channel' wars 옴니채널 전쟁

쇼루밍과 역쇼루밍, 그리고 모루밍


Now, show me the evidence 증거중독

호모 도큐멘티쿠스, 설명서 읽는 사람

주문 즉시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주스


Tail wagging the dog 꼬리, 몸통을 흔들다

부록 때문에 잡지를 사는 사람들

'해피밀 세트'의 '슈퍼마리오' 피규어 전쟁

식전빵이 더 유명한 레스토랑


Showing off everyday, in a classy way 일상을 자랑질하다

셀카봉의 전성시대

노골적인 표현 대신 은근한 부분샷으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채우는 일상의 자랑질


Hit and run 치고 빠지기

'썸', 연애는 물론 인간 관계에서 상품까지, 소셜다이닝과 팝업스토어

스낵컬처, 60단어 뉴스의 '써카'


End of luxury: just normal 럭셔리의 끝, 평범

놈코어 스타일, 위버럭셔리 브랜드

킨포크 라이프, '소길댁'이 된 이효리


Elegant ‘urban-granny’ 우리 할머니가 달라졌어요

헬리콥터맘, 타이거맘, 스칸디맘 등 새로운 '맘'들, 그 '엄마들'의 '엄마들'

'의류 산업의 최대 미스터리'라고 회자된다는 국내 아웃도어 의류 시장의 성장


Playing in hidden alleys 숨은 골목 찾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예술촌, 서울 청파동 만화의 거리,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서촌, 서울 중계동 백사 마을, 인천의 배다리 마을, 부산의 이바구길

서울 방배동 사이길, 강풀 만화 거리, 점성가촌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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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불명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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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분은 처음 이틀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날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동료 한 명에게 회의에 참석하는 대신 바토 무슈를 타고 여행을 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토 무슈요? 그게 뭐죠?"

제솝은 미소를 지었다.

"센 강을 따라 운행하는 작은 배입니다."

(중략)

"베터튼 씨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떤 국경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의 여권을 갖고 통과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남편 분이 또 다른 여권을,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중략)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톰은 기밀을 팔아넘기거나 누설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요. 그 사람은 평생 깨끗하게 살아왔어요."

(중략)

"그렇습니다. 베터튼 씨는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는 어떤 제안을, 말하자면 이 나라를 떠나 다른 어딘가로 가라는 중요한 제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1장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셜록 홈즈의 한 에피소드였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가 기밀을 다루고 있는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사건으로, 정황상 외국에 매수되었다고 보여지나, 약혼녀는 그가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라며 그럴리가 없다고 하는 내용.

 

1954년에 나온 이 책에는 어떤 탐정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분위기가 다른 크리스티의 소설들과 사뭇 다르며, 계속해서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저는 그가 어떤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보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소 기이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비밀리에 추진하는 그런 일 있잖습니까, 왜."

"이것 보세요, 선생님......."

제솝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베터튼은 과학자 압니다. 외교관이나 첩보원이 아니에요."

"제 말이 못마땅하신 거군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신분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니까요. 제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토머스 베터튼과 저는 인척 관계입니다."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과학자, 6개월의 결혼 생활만큼이나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두번째 결혼의 아내, 사별한 첫번째 아내의 사촌의 등장, 실종 전 만난 의문의 여성.

 

"그렇지 않아요. 흥미로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저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예요. 사랑했던 남편은 저를 버리고 떠났고, 하나뿐인 아이는 수막염으로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가까운 친구나 친척도 없어요. 직업도 없고, 좋아하는 취미나 예술 따위도 없어요."

 

베터튼 부인과 외국에서 온 의문의 남성을 연이어 조사한 제솝은 베터튼 부인이 영국을 떠나 카사블랑카로 향한 것에 의심을 품는다. 마침 부인이 탔던 비행기는 추락했고, 원래 그 비행기에 타기로 했던 힐러리는 비행기 연착으로 그 비행기를 타지 못해 목숨을 건진다. 그 비행기를 타서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수면제를 삼키려하던 힐러리를 제솝이 제지하며,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자신들의 일을 도와달라며 병원에서 위독한 상태에 있는 베터튼 부인의 역할을 대신 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를 가나 똑같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든 현재든 언제나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잔혹함과 자비죠! 둘 중 하나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둘이 공존하기도 합니다."

그는 태도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카사블랑카에서 끔찍한 비행기 사고를 당하셨다면서요?"

"예, 그랬어요."

"부럽습니다."

아리스티데스 씨는 뜻밖의 말을 했다.

힐러리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죽음에 가가이 다가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살아남으셨다니....... 그 이후로 뭔가 자신이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부인?"

"더 불행해진걸요. 뇌진탕을 입어서 심한 두통이 생긴데다 기억도 흐릿해졌어요."

"그런 것들은 그저 단순한 불편함일 뿐이지요."

 

계속되는 여행 속에서 연이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던 힐러리는, 자신을 베터튼 부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비행기를 타게 된다.

 

"신문 헤드라인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겠군요."

베이커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말이에요. 불운이 줄줄 따라다녔다고 하겠어요. 처음엔 카사블랑카에서 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다가 이제 더 비참하게 죽었으니 말이에요."

힐러리는 그들이 세운 계획의 교묘함과 용의주도함에 몸을 떨었다.

"이 사람들은요......?"

힐러리가 낮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가 맞나요?"

"아, 배런 박사는 세균학자인 걸로 알고 있어요. 에릭슨은 유명한 물리학자고 피터스는 화학 연구원이죠. 물론 니드하임 양도 수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내분비학자죠. 그리고 나는 연락 장교일 뿐 과학자들 그룹에 속하진 않아요."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헤더링턴 양은 운이 없었어요."

"헤더링턴 양은...... 그 여자는......"

베이커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다면 말해 줄게요. 그 여자는 당신을 미행하고 있었어요. 카사블랑카에서 당신 뒤를 쫓는 사람쯤은 벌써 파악했어요."

 

제솝은 힐러리에게 힐러리도 모르게 사람을 붙였으나, 이 주도면밀한 조직들은 그마저 따돌리고 힐러리를 비행기에 태운다. 비행기는 불시착하고, 마치 추락한 것으로 꾸며지며, 그들은 차로 갈아타며 사막 한가운데의 요새로 향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지만 속마음은 제각기 다른 것 같아요."

피터스는 생각에 잠겨 신중하게 말했다.

"글쎄요. 부인께서 뭔가 제대로 짚으신 것 같군요.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부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배런 박사는 결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자기의 실험과 연구를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죠. 헬가 니드하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파시스트처럼 보여요. 그리고 에릭슨은......."

"에릭슨은요?"

"나는 그가 두려워요. 그는 위험한 외골수예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과학자 같아요!"

"그리고 나는 인류 동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이지요. 그리고 캘빈 베이커 부인은.......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요?"

"모르겠어요. 가장 알 수 없는 사람 같아요."

"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야말로 가장 뻔한 사람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죠?"

"캘빈 베이커 부인이 줄곧 따라다닌 것은 돈입니다. 그녀는 짭짤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큰 톱니바퀴의 한 부품일 뿐입니다."

 

동상이몽. 각자 다른 생각을 한 이들은 요새에 도착한다. 엄청난 자산가에 의해 설립된 사막 한 가운데의 그곳은 이른바 유토피아.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며 의식주에 모자람이 없으며,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에 몰두한다. 과연 이곳을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의 조직에서, 힐러리가 빠져나오는 과정은 다소 용두사미 같다는 느낌도 든다.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하다는 느낌. 물론 1927년의 <빅 포> 처럼, 푸아로의 원맨쇼와 함께 끝은 조직의 일망타진으로 이어지는, 그 소설과는 시작만 비슷하고 결말은 다르다. 이 책에서 이 미치광이 거부는 결국 사소한 소동만 있을 뿐,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며, 힐러리와 함께 정체를 감추고 있던 한 남자만이 그곳을 빠져나온다. 아마도 다른 과학자들을 자발적으로 남았으리라. 이걸 추리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결말에 가서 생각지도 못했던 살인 사건에 대한 해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 결말은 붙이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는 내용이다. 갑자기 크리스티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왜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크리스티가 소설을 쓴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 같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새 동지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는 새로 온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몇 마디씩 짧은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이 단지의 목적과 신념에 대한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을 듣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힐러리는 그 내용이나 표현을 정확하게 다시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내용이 너무 진부하고 평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잇는 동안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힐러리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에 살았던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그 미치광이 히틀러'의 연설을 한 번 들어 보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집회에 참석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혀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고 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도 지당하고 감동적으로 들렸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평범하기 짝에 없는 말들에 불과하더라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지금 힐러리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힐러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마음이 일렁였다. 국장은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 주로 젊은이들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청년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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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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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백석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 때 재북 작가라는 이유로 언급조차 되지 않던 시인이 9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널리 읽히면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2000년대에는 수능에 출제되면서 이제 김소월이나 윤동주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아마도 내 세대는 고등학교 때 이 시를 접했기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이 시를 접할 수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능을 위해 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던 그 시기에도, 이상하게 백석의 시는 설명할 수 없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에 '응앙응앙' 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뗼 수 없었던 기억이 있고, '고향'은 마치 한 편의 전설이나 동화를 읽은 것처럼 아릿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느낌에 설렜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백석이라는 시인의 삶을 신화처럼 만든 것은 그의 삶일 것이다. 자야와의 사랑, 대원각이었던 절 길상사,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전재산을 내놓으며 이 모든 것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쓰겠다는 말, 이 모든 것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한 때 왜 백석의 삶이 아직 영화화가 되지 않았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미국이나 영국, 유럽에서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 뿐만 아니라 삶도 영화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비커밍 제인>이나 <셰익스피어 인 러브>, <실비아>, <토탈 이클립스>, <일 포스티노>는 유명 작가의 사생활을 다룬 이야기이다. 예술가들은 그 삶 또한 평범하지 않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은데, 백석의 삶이야말로 그의 시 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의 선망과, 연민을 동시에 자극하니까.

 

한 때는 평생에 저런 사랑을 하고 백년이 지나도록 내 이름이 남을 작품을 쓸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 삶이 내게 주어졌으면 하고 바랬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격정적이지 않아도, 평범한 지금의 내 삶이 얼마나 감사한 지 새삼 깨달을 때가 많다. 후배인 안도현 시인의 노작이며, 한정된 자료에서 최대치를 뽑아낸 역작이다. 아마 나보다 좀 더 어린 친구가 읽거나, 혹은 나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분이 읽는다면 더 감동이 배가 될 것이다. 지금 내 나이는 과거를 되돌아보기에는 너무 젊고, 예술가적 삶을 막연히 동경하기에는 나이가 들었다. 머리로 책을 판단하는 시기가 있고, 가슴으로 느끼는 때가 있는데, 지금은 나라는 사람의 인생에서 감정에 푹 빠지는 시기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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