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 파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7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대체 왜 뤼팽 전집에 속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출판사 쪽에서도, 모리스 르블랑도 길게 설명을 해 놓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딱 하나다. 뤼팽 전집에 속하게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려는 것, 혹은 이 책의 위치를 높여보겠다는 것. 결론부터 말하면 이때까지 읽은 뤼팽 전집 중에서는 재미도 집중도도 참신함도 가장 낮았다고 본다. 야심차게 준비했을 반전도 김이 빠지고 시시했다.

 

포탄 파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감을 받아 쓴 모리스 르블랑의 대작(大作)이다. 1915르 주르날지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 소설은, 처음에는 뤼팽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었으나, 훗날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합류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례적으로 붙은 작가의 서문(번역서에서는 번역자의 "해설"에 삽입되어 있다)에서 모리스 르블랑은 유독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전쟁 중의 검열을 피해 현실의 지명과 인명을 부득이 변형시켰음을 명시하고 있다. 훗날 시리즈에 편입되었다고는 하나, 그 전체적인 분위기나 탄탄한 추리적 구성, 서스펜스의 묘미는 시리즈의 여타 작품들에 비교해 전혀 손색없는 박진감과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드라마 속에서 전쟁의 의미와 정의의 가치, 사랑과 신념의 위대함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어, 그 감상의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은 수작(秀作)이다. 그리고 제7권 해설에는, 아르센 뤼팽의 인물탐구 두번째 주제로, 뤼팽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도둑(cambrioleur)’이라는 타이틀을 분석해본다.

 

1

 

 

1. 살인이 일어났었다

 

2. 폐쇄된 방

 

3. 동원령

 

4. 엘리자벳의 편지

 

5. 코르비니의 아낙네

 

6. 오르느캥의 성에 남아 있는 것

 

상처 입은 채 몸부림을 치고 있는 아내의 이미지가 영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엘리자벳이 오르느캥 성을 떠나길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 날 이후로, 그는 더 이상 발작적인 거부감이나 원한으로 마음 한구석 켕기는 일 없이, 절절한 심정으로 그녀를 생각해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끔찍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이 서로 뒤섞이지를 않았다. 가증스런 어미를 생각하는 동안은 그 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 둘은 완전히 서로 다른 종족(種族)에 속해 있었고, 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의무를 위해 사지(死地)를 마다 않고 용감하게 버티고 있는 엘리자벳의 모습은 폴에게 더없이 숭고한 여인으로 비쳐졌다. 역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아꼈으며, 지금도 여전히 흠모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7. H.E.R.M

 

8. 엘리자벳의 일기

 

9. 황제의 아들

 

10. 75밀리냐 155밀리냐?

 

2

 

1. 이제르...미제르

 

2. 헤르만 소령

 

3. 사공 휴게소

 

, 감히 어찌 그런 망발을! 그럼 내 아내가 자네 부친을 죽였단 말인가? 자네 돌았구만! 신과 이 세상 앞에서 성녀(聖女)나 다름없는 내 아내가? 감히 어떻게! ! 내가 왜 당장 자네 얼굴에 한방 날리지를 않는지 모르겠구만!”

폴은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가뜩이나 소란스런 전투가 벌어지는 데다 안으로부터 복받치는 분노 역시 주체하기 어려운 판에, 점점 더 흥분할 수밖에 없어진 두 사람은, 총탄과 포탄이 요란스레 퍼붓는 가운데 서로 막 드잡이라도 할 태세였다.

또다시 벽의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졌다. 폴은 정신 없이 명령을 외쳐대면서도 머리 한 쪽으로는 그 무너진 벽 근처에 있는 헤르만 소령에 대한 생각와 더불어 당드빌 씨를, 마치 범죄자를 대질시키듯 그 앞에 데려가 세우고 싶은 욕심이 불쑥불쑥 치밀어올랐다.

 

4. '독일식 문명'의 걸작

 

이것 봐요, . 벌써부터 난 정신이 하나도 없는걸요! 그야말로 예언력과 투시력을 죄다 겸비하신 것 같아요! 두말 않고 곧장 파들어가야 할 곳을 지목하지를 않나,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술 털어놓지를 않나......당최 모르는 것 하나 없이, 죄다 훤하게 내다보잖아요! 정말 그 정도이신 줄은 몰랐어요! 혹시 아르센 뤼팽을 사사(師事)라도 한 거 아니에요?”

 

“‘거기까지만 해두죠. 그 이상 세세한 행동지침까지 조언을 해주다간 오히려 당신 머리만 혼란스러워질 테니까요. 게다가 당신만한 인물에겐 구차하게 이것저것 챙겨줄 필요까진 없을 겁니다. 그럼 이만, 잘 있으시오, 중위! 아참, 그리고 내 이름은 아마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저 군의관이라고만 해두지요......, 하긴 내 이름을 굳이 지금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나중에는 알게 될 테니......아르센 뤼팽이라고 하오!’......아무튼 그렇게 대차게 얘기를 늘어놓더니 그는 다정하게 인사를 꾸벅한 다음, 더는 아무 말 없이 나가버리는 거야. 그렇게 된 거라구......, 어떻게 생각하나, 베르나르?”

 

5. 콘라트 왕자의 잔치

 

6. 불가능한 싸움

 

7. 승자의 법칙

 

8. 132고지(高地)

 

9. 호엔촐레른

 

10. 두 번의 처형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2

-도둑, 그 매력적인 범죄자

 

포탄 파편에 대한 모리스 르블랑의 서문

전쟁 초기에 조프르 장군(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북동부 전선 최고사령관으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명장이다/역주)으로 하여금 위대한 승리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가능케 한 기막힌 후퇴작전에 대해서는, 아직 그 전모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중에서도 더없이 심각하고 절박한 원인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국경 근처의 어느 한 요새가 어처구니없이 함락되어 프랑스 군의 거점이 일거에 박탈당함과 동시에, 적에게는 아주 훌륭한 침투로를 열어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아직까지 전혀 밝혀진 바 없거나, 적어도 군 당국으로서는 그 일단의 진실을 알면서도 공개하기를 무척 꺼렸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저자 자신도 우연히 그 비밀을 엿보게 된 이 사건의 정확한 해명만큼은, 여태껏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어둠 속에 남겨두는 것이 현재로서는 옳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당시 사건과 연루된 주요 실존인물의 이름과 관련 지명들을 부득이 변경했음을 밝혀둔다. 하지만 언젠가, 저 야만인들이 안전하게 묻어두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들을 어둠 속에서 과감히 끌어낼 날이 오면, 그때 역사는 저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독자 여러분이 읽을 이 이상하고도 엄청난 모험담의 전모를 제대로 자리매김해주어야만 할 것이다.

 

일단 도둑으로서 아르센 뤼팽의 가장 독특한 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공개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도둑질이 발생했을 때, 아르센 뤼팽에게까지 혐의를 두는 경우, 그것은 결코 범죄행위 자체가 서툴렀다거나 증거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처리된 범죄행위는 엉뚱하게도 뤼팽 자신이 그 장본인으로 자처하고 나섬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렇게 뤼팽 자신이 스스로 공개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는 그의 범행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절도행각에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원칙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부당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졸부라든가 사회 기득권 세력인 귀족이나 왕족 등을 범행 대상으로 한다.

둘째, 단순히 재물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피해자를 조롱하고 그 위선을 폭로한다.

셋째, 절도행각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느껴질 정도로 신출귀몰한 방식을 활용한다.

넷째, 여하한 일이 있어도 살인은 피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해치지 않고도 마음대로 법과 질서를 유린하는 괴도(怪盜)의 이미지가 자칫 완벽한 의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것을,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무슨 의도에서인지 여기저기 인간적인 허점을 노정(露呈)함으로써 스스로 허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러한 면면에 유념한다면, 우리는 작가가 진정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아르센 뤼팽의 이미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완벽하면서 난공불락의 절대적 영웅보다는, 당대의 일반 대중에게 감성적으로 어필할 수 있고, 그로써 더더욱 질긴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을 친근한(sympathique) 영웅의 초상(肖像)을 그리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뤼팽 이전의 19세기식 낡은 영웅 이미지와는 달리 이러한 아르센 뤼팽의 참신한 이미지는 영웅의 현대적 의미와 좌표를 새로이 설정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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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의 고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6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단편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은 단편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장편도 훌륭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뤼팽의 활약에 자꾸 군더더기가 붙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긴 분량을 오롯이 채우지 못해 곁다리로 홈스의 이야기가 들어가거나, 어설프게 로맨스가 추가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신파로 끝을 맺거나 평범한 복수극으로 끝나버려 활기 넘치는 중반까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유쾌한 도둑 이야기에는 역시 단편이 제격이다.

 

 

기암성813의 비밀」「수정마개에서 복잡다단하고 심각한 면모를 실컷 보여준 우리의 주인공이 이번에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에서와 같은 경쾌하고 유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1911년부터 주 세 투에 연재되어온 단편들을 한데 엮은아르센 뤼팽의 고백은 특히 당대의 본격문학 평단으로부터도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독창성과 섬세한 매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중에서도 "그림자 표시""붉은 실크 스카프" 같은 단편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작품에 필적하는 걸작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이번부터 당분간 역자 해설을 통해서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를 연재하기로 한다. 아르센 뤼팽을 사랑하는 뤼피니앵들에게 유익한 선물이 되리라고 기대해본다.

 

 

1. 거울놀이

 

하긴 정말 묘한 수수께끼였지......그 일은 왠지 그림자 표시라고 이름붙이고 싶네만......”

나는 내친 김에 계속 몰아붙였다.

사교계에서의 인기는 또 어떻고! 바람둥이 아르센이 저지르고 다닌 온갖 스캔들 말일세!...... 그리고 자네가 남몰래 행한 선행들도 마찬가지이네! ‘결혼반지’, ‘배회하는 죽음등등, 내 앞에서 자네가 슬쩍 흘리고 지나가버린 이야기들이 어디 한둘인가? 뤼팽 이 친구야, 대체 언제지 그렇게 시침만 떼고 있을 셈인가?......자 자, 큰맘 먹고 어디 한 번속 시원히 털어놓아보시게......”

때는, 이미 유명해진 뤼팽이 아직은 그의 가장 끔찍한 격전을 치르기 전, 그러니까 기암성이랄지 ‘813의 비밀같은 엄청난 모험들에 뛰어들기 전이었다. 아직은 프랑스 제왕(諸王)의 수세기에 걸친 보물을 제것으로 삼는다거나, 독일 카이저(皇帝)의 바로 코앞에서 유럽을 도둑질할 생각일랑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보다 소박하고 납득할 만한 잔재주를 부리는 데에 만족하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천성적으로도 그렇지만, 그저 취미 삼아 그때 그때 선행과 악행을 경쾌하게 뿌리고 다니면서 일상에 울고 웃는 돈키호테의 나날들......

 

생각해보게, 라베르누는 금고 속의 끔찍한 내용물에 관해서 알고 있을 테고, 그런 입장에서 바로 남작을 고발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창문을 통해서 그처럼 기발한 햇빛 교신방법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신문의 암호 퀴즈 따위를 함께 풀어대던 같은 동네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충분히 추정할 만했지.”

그제서야 나는 이마를 치며 소리쳤다.

, 그것 참! 간단하긴 간단하구만!”

아주 간단한 일이지! 아울러 이번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진리를 명심해야 될 것이야. 자고로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는, 제반 사실들을 꼬치꼬치 따지든가, 답답한 추리에 골몰하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거리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유효한 방법이 있다는 것 말일세. , 누차 얘기하지만, 직관(直觀)! 그리고 예외적인 지성(知性)!......자랑은 아니네만 아르센 뤼팽이 두루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장점이야말로 범죄해결의 비결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2. 결혼반지

 

증거라면?”

내가 직접 끊어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반지 얘기네. 여기 안쪽에 새겨진 글씨를 보게. 그녀가 누구의 이름을 새겨 가지고 다녔는지 좀 보라구.”

그러면서 반지를 내밀었고, 나는 그 안을 살펴보았다.

오라스 벨몽

잠시 뤼팽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나는 그의 얼굴 한켠에서 다분히 멜랑콜리한, 어떤 감정상태가 어른거리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얘기는 자네가 전부터 내게 여러 차례 암시를 해오던 걸로 아는데......이제 와서 불쑥 털어놓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특별한 이유?”

그러면서 뤼팽은, 때마침 어느 젊은이의 팔을 붙든 채 우리 앞을 지나가는 아리따운 부인 한 명을 눈짓으로 슬쩍 가리켰다.

한데 그녀 쪽에서도 뤼팽을 알아보고는 살짝 인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저 여자야. 아들과 함께 가는구만......”

뤼팽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 자네를 알아보지 않나?”

내 변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항상 날 알아보지.”

그나저나 티베르메닐 성관 도난사건 이후로 경찰이 뤼팽과 오라스 벨몽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을 텐데......”

그랬지.”

그렇다면 저 여자도 자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네.”

그런데도 아무 서슴없이 인사를 해?”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뤼팽은 대뜸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대꾸했다.

자넨 내가 그녀 앞에서도 뤼팽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녀가 보기에도 내가 도둑에다 협잡꾼에다 한낱 불량배일 거라고 생각하느냔 말일세?......하긴, 심지어 내가 살인도 불사할 만큼 막돼먹은 인간 말종(末種)이라고 해도, 아마 그녀는 내게 여전히 인사를 건넬 것이네.”

그건 또 왠가? 한때 자네를 사랑했기 때문에?”

저런! 오히려 그 이유라면 나를 경멸할 구실이나 될 수 있겠지......”

그럼 뭔가?”

내가 자네에게 아들을 돌려준 사람이기 때문일세!”

 

 

3. 그림자 표시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그와 마찬가지로 관목의 잔가지들을 살짝 헤쳐 그 너머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이지 예상을 훌쩍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이 터져나왔고, 뤼팽 역시 잇새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창문 하나 없는 양쪽 건물들을 경계로 한껏 펼쳐진 공간 안에는, 내가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바로 그 낡은 그림에 담긴 풍경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게 아닌가!

세부적인 부분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저만치 뒤쪽에는 제2의 담벼락을 배경으로 그림에서와 똑같은 그리스풍의 경쾌한 열주식 원형건물이 버티고 있는가 하면, 중앙에는 마찬가지로 그림에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돌의자들이 원형계단을 사이에 두고 이끼가 덕지덕지 낀 포석의 연못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편 왼쪽으로는, 역시 같은 우물이 정교하게 제작된 금속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그 바로 가까이에는 대리석 자판에 화살표 모양의 지침을 뽐내며 눈에 익은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똑같을까! 펼쳐진 광경의 유사점 외에도 신기한 점이라면, 뤼팽이나 내 머리 속에 낙인처럼 찍혀져 있는 그림 속의 수수께끼 같은 날짜, 415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고많은 날들 중 하필 오늘 415, 서로 다른 연배와 사회계층에 속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굳이 그 의문의 날짜를 택해서 파리의 이처럼 외진 구석을 찾아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오후 다섯 시가 되어오자 지저분한 모닝코트 차림의 뚱뚱보 신사가 문득 시계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너도나도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각자의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저들에게 엄청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뚱뚱보 신사는 낭패라는 듯 제스처를 취한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모자를 눌러쓰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졸지에 애도와 슬픔의 분위기가 전체에 확산되었다. 비쩍 마른 두 노자매와 노동자의 아내는 아예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성호까지 긋는가 하면, 강아지를 데려온 아가씩와 거지 아내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울었다. 루이즈 데르느몽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딸을 와락 끌어안는 동작이 여간 애처로운 게 아니었다.

우리도 이만 가세나.”

뤼팽이 속삭였다.

소풍이 끝난 걸까?”

그렇다네. 이젠 우리가 달아나야 할 때야.”

 

 

4. 지옥의 함정

 

푸하하하하-딱한 가니마르! 정말이지 억세게도 운 없는 친구가 아닌가! , 내가 체포되는 현장을 나도 구경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는데......”

여자의 믿어지지 않을 기력에 의지해서 계단을 다 내려온 뤼팽은 곧장 거리로 나갔고, 자동차에 태워졌다.

갑시다.”

여자가 운전기사에게 던지듯 말했다.

오랜만에 탁 트인 공기와 심한 움직임으로 정신이 얼얼해진 뤼팽은 어디를 어떻게 통해서 가는 건지 거의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가 가끔씩 돌아가며 머물되 평소엔 하인만 배치시켜 놓는 여러 숙소들 중 한 곳에 도착하자 그나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여자는 하인에게 대뜸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자넨 나가 있게.”

아울러 자신도 막 나가려는 것을 뤼팽은 옷자락을 와락 붙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이대로 가면 안 되지요......먼저 자초지종을 좀 들어야겠소이다......대체 나를 왜 구해준 거요? 당신 숙모 모르게 돌아온 겁니까? 나를 구해준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저 불쌍해서 그런 거요?”

하지만 여자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가슴을 꼿꼿이 펴고 고개를 바짝 치켜든 자세로, 강인하면서도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여전히 고수할 뿐이었다. 다만 이전과 약간 다른 점이라면 그 잔혹해 보이기만 하던 입술선()이 왠지 다소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보 보니 그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속에서도 일말의 우수(憂愁)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뤼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이해 이전에, 어렴풋한 직관의 힘으로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짜고짜 여자의 손을 덥석 붙잡았으나, 여자는 증오심과 거부감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펄쩍 뛰다시피 손을 빼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뤼팽이 다시 손을 붙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버려두세요!......놓으란 말이에요!......당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뤼팽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으나, 여자는 그 창백하던 얼굴이 난데없이 벌겋게 물들 정도로, 온통 당혹스런 감정에 휘말린 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뤼팽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증오한다면 죽게 내버려두었어야 합니다......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어요. 왜 그렇게 하지를 않은 거죠?”

왜냐구요? 왜냐고 물으셨어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여자의 두 손이 얼굴을 가렸고, 뤼팽은 손가락 사이로 두 줄기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갑작스럽게 감정이 복받쳐오른 뤼팽은 하마터면 애정 어린 말이라도 몇 마디 내뱉을 뻔했다. 마치 잘못된 삶의 길을 헤매는 어린 소녀를 격려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 듯, 보통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자상한 충고를 은근히 베풀어줄 법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의 입으로 그처럼 덤덤하고 점잖은 충고를 늘어 놓기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뤼팽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지금, 자기 손에 의해서 상처 입은 한 사내를 밤새도록 침대 머리맡에서 간호하는 한 여인의 못브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독한 원수이면서도 그 용기와 호쾌함, 인간 됨됨이에 완전히 매료된 나머지, 불쑥불쑥 치미는 원한과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충동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비장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워낙에 예상치 못한 묘한 일이라, 뤼팽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문가로 뒷걸음질쳐가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손을 뻗어 붙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 앞에 도달한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살짝 미소를 지은 뒤,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뤼팽은 즉시 호출 벨을 울렸고, 하인이 들어서자 허겁지겁 내뱉었다.

아까 그 여자를 따라가보게......, 아니야......그냥 놔두게......아무래도 그게 낫겠어......”

뤼팽은 한참 동안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젊은 여인의 형상은 좀처럼 그의 머리 속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었을지 모르는 그 처절하고 흥분되면서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을 처음부터 찬찬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거울을 들고, 그야말로 환난과 고초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상하지 않은 자신의 말끔한 얼굴을 약간은 우쭐한 기분으로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내 참, 잘생긴 게 뭔지!......”

 

 

5. 붉은 실크 스카프

 

다음부턴 사람 말을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뜻에서 한마디 하겠네. 누가 자네의 권총 탄약통이 젖어 있다고 하거든, 자네가 아무리 신뢰하는 사람이고, 설사 자기가 아르센 뤼팽만큼 똑똑한 사람이라고 내세우더라도, 결코 거기에 먹혀들지 말게나. 일단 무조건 한번 당겨보는 거야! 그래서 만약 그 누군가가 핑그르르 돌아 거꾸러진다면 자넨 그제야 깨닫게 되겠지.

첫째, 탄약통은 멀쩡하다!

둘째, 카트린 할멈은 대단히 성실한 가정부이시다!

그럼 언젠가는 그 분도 한번 뵐 기회가 있길 바라며, 이만 건투를 비네.

아르센 뤼팽

 

 

6. 배회하는 죽음

 

그렇다면 사전에 놈을 덮칠 수도 있었단 얘기 아닙니까? 한데, 왜 잔의 방에까지 들이닥치도록 놔둔 겁니까? 잔에게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안 그래도 됐을 것을......”

천만에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르시외 양은 결코 진실을 수긍하려고 들지 않았을 겁니다. 범인의 얼굴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어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상황 설명을 잘 해주십시오. 그럼 회복도 한층 빨라질 겁니다.”

하지만......다르시외 씨는......”

그가 사라진 건 좋을 대로 설명해주시면 됩니다......어디 멀리 떠나버렸다든가, 아님 확 미쳐버렸다든가......물론 당분간 찾아보기도 하겠죠......하지만 아마 그에 관해서는 앞으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박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요......그렇군요......당신 말이 맞소이다......하여튼 이 모든 일을 당신은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로 해결해냈소. 잔에게 당신은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당신께 뭐든 보답을 해야 할 처지인 듯 합니다만?......아참, 치안국과 관련 있는 일을 하신다고 했죠?......당신의 용기와 활약을 칭찬하는 편지라도 써드릴까요?”

뤼팽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그야 고마울 따름이지요! 그런 편지라면 내게 아주 유익할 거외다. 그럼 내 직속상관인 가니마르 형사반장 앞으로 한 장 써주시구려. 아마 쉬렌가()에 사는 자신의 귀염둥이, 폴 도브뢰이가 아직도 신나는 활약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면 매우 기뻐할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에 그의 지시를 받아 대단한 한 건을 건졌거든요. 아마 당신도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붉은 스카프 사건이라고......, 훌륭하신 가니마르 씨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즐거워할지!”

 

 

7.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

 

이보게, 아르센 뤼팽......자네는 가니마르 형사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생각인가?”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다네, 친구.”

아주 좋게라고? 한데 왜 기회만 있으면 그를 우스꽝스럽게 농락하려고 드는 건가?”

일종의 악습이지, 나도 늘 후회하고 있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인걸. 여기 착실한 경찰 나리가 있다고 치세. 질서를 수호하고, 온갖 불한당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며, 심지어는 선량한 대중이자 전혀 날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용감한 친구들이 무수히 있다고 쳐. 한데 우리 대중이란 늘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랄한 조소와 경멸만을 그들에게 들려주곤 하지. 어리석은 작태가 아닐 수 없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만, 뤼팽. 자네 마치 선량한 부르주아처럼 얘기하는군그래.”

그럼 내가 누구라고 생각했나? 비록 남의 재산에 대해선 약간 특별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내 재산이 되고 나면 생각이 완전 뒤바뀌기 마련이지. 아무렴, 누구도 감히 내 것에 손대면 안 된다 이거지. 만약 그럴 경우엔 나도 길길이 날뛸 것이야. , 내 지갑, 내 가방, 내 시계......안 되지......안 되고말고! 이보게 친구, 나는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과 소박한 금리생활자의 본능을 가진 사람이라네. 모든 전통에 대한 경외심과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바로 그래서 나는 늘 가니마르에게 감사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네.”

 

그래도 경의(敬意)까지는 아니겠지?”

웬걸, 대단한 경의를 표하다마다! 치안국 사람들 모두의 특징이기도 한 불굴의 용기를 갖춘 건 물론이고, 무척 진지하고, 결단력 있으며, 명석한 혜안(慧眼)과 판단력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가니마르일세. 나는 그가 사건을 맡아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걸 무수히 보아왔네. 그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야. 그런 뜻에서, 자네 혹시 사람들이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의 사연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가니마르는 문득 탁자 위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내용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편지는 마치 흡족한 서비스를 받고 난 주인이 시종을 위해서 발부한 신원보증서 같은 어투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아래 서명한 나, 괴도신사이지 전직(前職) 대령이고, 전직 하인이자, 전직 시체이기도 한 아르센 뤼팽은, 이 호텔에 머무는 기간 동안 가니마르라는 인물이 자신의 탁월한 역량을 충분히 선보였음을 보증하는 바입니다. 어떠한 단서도 주어지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 그는 정말 모범적이고도 헌신적인, 그리고 열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내 계획의 일부를 저지했고, 보험회사로 하여금 45만 프랑이라는 돈을 절약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그의 활약을 높이 치하하되, 아래층 전화가 소냐 크리슈노프의 방에 설치된 전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점은 너그러이 보아 넘기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는 치안국장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내게도 전화해 즉시 도망치라고 귀띔해준 꼴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 물론 지금까지의 활약상과 그가 거둔 승리를 퇴색시키기에는 어림없는, 하찮은 잘못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그를 향한 나의 아낌없는 찬사와 생생한 애정을 이렇게 글로나마 전하는 바입니다.

아르센 뤼팽

 

 

8. 지푸라기

그랬지만 다시 돌려받았어......, 이것 보라구!”

그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갖다댄 순간, 구소 영감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악! 하느님 맙소사! 열쇠가 없잖아!......열쇠를 날치기 당했어!......”

그는 즉각 내달렸고, 그 뒤를 아들들과 사람들이 뒤따랐다.

헐레벌떡 중간쯤 달려갔을까, 언뜻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그 낯선 이방인의 차였다. 이럴 줄 미리 내다보고 운전기사에게 이처럼 멀찌감치 대로상으로 나와 기다리라고 한 것이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면서 가까스로 문 앞에 당도한 구소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헐어빠진 나무 문짝 위에 붉은 벽돌 조각으로 휘갈겨 쓴 다음과 같은 글자였다.

아르센 뤼팽

이로써, 구소가 사람들이 제아무리 길길이 날뛰고 울분을 토해도, 트레나르 영감이 돈을 훔쳤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기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스무 명의 증인들이 부랑 노인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노라고 입을 모았을 따름이다. 영감은 단지 몇 달간의 징역으로 모든 것을 모면하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사사분기(四四分期)마다 몇 날, 몇 시, 어느 길가, 어디에 가면, 매번 금화 3루이(1928년까지 1루이는 20프랑에 해당했다/역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비밀스럽게 전달받았다.

하긴 아사(餓死) 직전까지 갔던 트레나르 영감으로서는 그나마 횡재가 아니겠는가!

 

 

9. 아르센 뤼팽의 결혼

 

앙젤리크 역시 아버지를 닮아 앙상하게 마르고 훤칠한 몸매에, 마찬가지로 골격이 울퉁불퉁하고 건조한 체질이었다. 나이는 서른셋, 언제나 검은 모직 옷을 입고, 늘 소심하며, 어디 가서도 눈에 잘 안 띄는 타입인 그녀는, 머리가 너무 작은 데다, 양쪽으로 잔뜩 눌린 것처럼 납죽해서, 돌출한 콧날이 마치 그러한 비좁은 얼굴 형태에 대한 반발처럼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결코 못생겼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두 눈동자가 달고 있는 부드럽고도 진지한 눈빛, 한번 제대로 보면 잘 잊혀질 것 같지 않은, 다소 우수 어린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한편 바로 그 당일 저녁, 문전박대를 당한 두 기자 중 한 명이 자사 신문 1면에다, 바렌가()의 고풍 찬연한 사르조-방돔가() 저택을 쳐들어갔던 일에 관해서 다소 과장된 필치를 휘두르면서, 늙은 귀족 나리의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신나게 묘사해버렸다.

다음날 또다른 신문에는, 자기 말로 오페라 극장 복도에서 기자에게 붙잡혔다는 아르센 뤼팽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나 역시 장래의 장인 어른이 분개하시는 데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통지서를 그렇게 섣불리 발송한 것은 분명 오류였으며, 비록 내 책임은 아니지만, 기꺼이 공개적인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한번 생각 좀 해보십시오! 우선 결혼 날짜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장인 어른께선 5월 초로 하자고 하십니다만, 내 약혼녀와 나는 그때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앞으로도 6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니요!......

사실 공작의 딸은 다소 몽상적인 데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혼자 노는 일이 잦았던 그녀는,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서가에 언제나 가득 굴러다니던 고리타분한 옛 소설들과 기사도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결국 인생을 한 편의 동화처럼만 보게 되었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현실 속에서는 그럴수록 오지 않는 왕자님을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게 다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구나 사촌이라는 사내들은, 어머니가 남겨준 수백만 프랑의 지참금만을 노리는 것이 뻔한데, 뭐하려 결혼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이 이대로 꿈이나 꾸면서 노처녀로 사는 게 낫지......

 

그제서야 사내는 앙젤리크의 모든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 어여쁜 편은 못 되지만 우수 어린 매력이 듬뿍 담긴 그 얼굴 앞에서 사내는 일순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찌 해야 할지 거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더 이상 웃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존경심이랄까, 약간의 회한(悔恨)과 호의(好意)가 뒤섞인 가슴 찡한 기분이 사내의 전신(全身)을 가르고 지나갔다.

왜 나를 구해주는 겁니까?”

사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남편이니까요......”

 

사내는 문득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자신한테는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울 따름이지만, 여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모든 사안들이 머리 속을 일시에 휘저어놓고 있었다. 그는 별수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해 흘릴 뿐이었다.

이거 큰일이구만......큰일이야......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손뼉까지 치며 냅다 소리쳤다.

옳지! 바로 그거야!......내가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 중 한 명과 아주 절친한 사이라오. 아마 교황도 내 부탁이라면 거절을 못할 겁니다......어떻게든 알현을 해보겠소. 모르긴 몰라도 내가 간절히 탄원을 하면 교황 성하(聖下)께서도 마음이 흔들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로 보나, 그 발상으로 보나 어찌나 순박하고 익살스러운지, 여자는 사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아내입니다.”

여자의 눈빛 속에는 그 어떤 적의(敵意)도 경멸도, 일말의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내는 정말이지 그녀가 자신의 모습 속에서 도적이나 범법자의 정체를 보길 그만 두고, 그야말로 사제(司祭)가 죽을 때까지 맺어준 한 남자의 모습만을 바라보기로 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자신도 잘 모를, 보다 혼란스런 감정이 지금 그녀의 전 존재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직감했다. 황당무계한 상상력과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몽상적 기질, 그리고 케케묵은 독서로 다져진 이 노처녀의 복잡한 영혼 속에서, 그동안 천신만고의 사연을 거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오늘 같은 특별한 순간을 함께 맞이한 바로 이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바이런 풍의 영웅이랄까, 지극히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아주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밤, 그것도 숱한 장애를 뚫고서, 이미 그 대담무쌍함이나 너무도 유명한 활약상으로 전설이 되다시피 한 사내 대장부가 난데없이 방으로 쳐들어와, 결혼반지를 여자의 손가락에 지그시 끼워주지 않았던가!......

 

사내는 일순 마음이 흔들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혀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함께 떠납시다!......같이 달아나자구요!......! 당신은 나의 배필이오......나의 동반자입니다......나의 고난과 환희를 함께 나눕시다......강렬하면서 신비스럽고, 위대하면서 장렬한 인생을 함께하는 겁니다!......”

그 순간 앙젤리크가 눈을 들었고, 그 깨끗하면서도 자부심에 넘치는 눈빛에 이번에는 사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런 식의 허풍을 퍼부어대도 될 여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내는 머뭇머뭇 중얼거렸다.

, 미안하오......여지껏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지만, 지금보다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소......나는 나쁜 사람이오......당신 인생을 망쳐놨어......”

하지만 여자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아니에요......당신이야말로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을 가르쳐준 셈이에요......”

그가 내처 질문하려는데, 여자는 이미 비밀문을 활짝 열어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이 오고갈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사내는 그녀 앞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부르봉-콩데가()의 공주인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은 마리-오귀스트라는 이름의 수녀로서, 곧장 도미니크 수녀원에 자신을 가두어버렸다.

그녀가 종신서원식()을 하던 날, 수녀원의 원장수녀 앞으로 봉인된 묵직한 봉투와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는데......

마리-오귀스트 수녀가 돌보는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진 편지와 함께 배달된 봉투 안에는 1000프랑짜리 지폐 500장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1

-생김새와 변신능력을 중심으로

 

기암성813의 비밀, 수정마개에서 복잡다단하고 심각한 면모를 실컷 보여준 우리의 주인공이 아르센 뤼팽의 고백에서는 처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에서와 같은 경쾌하고 유연한 괴도신사의 본성으로 돌아온다.

19114월부터 주 세 투에 연재되기 시작한 단편들이 피에르 라피르 출판사에서 하나의 옴니버스식 단편집으로 묶여 출간된 것은 19136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대부분 개개의 작품 태동은 수정마개보다 빠르지만, 단행본 출간 시기는 그보다 뒤늦은 셈이다.

각 단편들의 질적 수준도 제각각이라, “지푸라기배회하는 죽음같은 작품은 1918년과 1933년에 재출간 시 누락할 만큼 평가를 받지 못한 반면, “그림자 표시와 특히 붉은 실크 스카프의 경우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에 필적하는 걸작으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소위 진지한문학평론가로 대접받는 평론가들은 대체적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인색한 평을 하기 마련이었는데, 아르센 뤼팽의 고백이 단행본으로 나온 1913년에 무슈 아 투라는 잡지에는 피에르 발다뉴라는 일급 문학평론가의 뤼팽 평이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를 신봉하는 독자 여러분에게는 그 전문(全文)을 접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모리스 르블랑 씨의 아르센 뤼팽의 고백을 읽고......

모리스 르블랑 씨의 아르센 뤼팽 신간(新刊)을 읽고 나서 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천재성이 작렬하는 사건들의 얼개가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독창성과 정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아르센 뤼팽의 영웅담을 읽으면서 우리는 마치 난해한 문제를 앞에 놓고 엄격한 추론과 새로운 착상을 거듭한 끝에 찬란한 해법에 이르고야 마는 수학자의 심정을 경험하게 된다. 전작(前作)에서와 같은 거대한 모험과는 달리 서로 독립된 소규모 사건들로 이루어진 이번 작품에서 우리는 자신의 천재성과 대담함, 간교함과 고뇌를 최고의 경지까지 밀고 나가는 아르센 뤼팽과 만나게 된다.

사실 그 하나하나가 두터운 책으로 엮일 수 있을 만한 주제들을 가지고 이토록 간결한 구성의 단편들로 소화해내는 것을 보면, 모리스 르블랑 씨는 분명 고갈되지 않을 엄청난 재능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아르센 뤼팽의 고백의 각 에피소드들은 무척 강력한 매력을 풍기고 있으며, 그 중 몇몇은 에드거 앨런 포를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붉은 실크 스카프배회하는 죽음같은 단편들은 신비스럽고 으스스한 매력을 가득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을 모리스 르블랑 씨는 참으로 유연하고도 생생한 언어로 실감나게 풀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요즘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책을 낼 때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에르 발다뉴, 투슈 아 투19138

 

이처럼 아르센 뤼팽의 고백이 본격문학을 위주로 한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은 데에는 뤼팽 시리즈의 대중적 인기를 넘어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문학적 역량이 무엇보다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같은 노르망디 출신인 대()문호 플로베르와 모파상을 흠모해 작가의 길로 들어선 만큼, 그들 작품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탁월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보다도 등장인물에 불과한 아르센 뤼팽이 훨씬 더 유명해진 것 역시 이 같은 섬세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에 의한 작가의 인물창조 기술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역자로서도 누차 강조했듯이, ‘아르센 뤼팽 시리즈 100배로 감상하기의 비결은 무엇보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캐릭터의 올바른 이해와 그에 대한 애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 권부터 역자 해설을 당분간 뤼팽의 인물 연구에 집중할까 한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은 전적으로 20세기 초, 부르주아의 장밋빛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좋은 시절)라는 독특한 시대의 아들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인생을 즐기려 들고, 마치 도박을 하듯 위험천만한 행동에 나서며, 심각하기보다는 가볍고 경쾌하고, 어디까지나 예술과 어여쁜 여성들을 선호하는 가운데, 늘 도전을 꿈꾸는 뤼팽의 면모는 하나같이 벨 에포크의 세련된 신사가 가지는 덕목이다. 그보다 이전 세대인 셜록 홈스와는 달리, 아르센 뤼팽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들며, 질서와 상식을 조롱하는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늘 엄숙하기 그지없는 홈스와는 판이하게, 일견 일관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사건마다 모습을 달리하면서, 심지어는 자신의 정체에 스스로 의혹을 제기할 정도로 극히 인간적인 감정과 면모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이는 난공불락의 명탐정에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범죄자로서 아르센 뤼팽이 일반 독자들에게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상당수 프랑스와 외국의 영화감독들이 괴도신사의 이야기를 크고 작게 영화화해 왔다. 로베르 라무뢰와 조르주 데크리에르 같은 걸출한 배우들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르센 뤼팽은 그 누구로도 한정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영화도 제대로 된 인물표현에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뤼팽의 연대기 작가조차 종종 오리무중이라고 실토하는 얼굴 없는 인물을 하긴 어느 배우인들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요컨대 아르센 뤼팽은 물리적인 윤곽을 일절 허용치 않는 존재이기에, 오로지 기술(旣述) 행위, 즉 문자를 통해서밖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 그를 대하는 독자들의 상상력 속에서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어쨌든 연대기 작가는 뤼팽을 알아볼 수 있는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무척이나 인색한 단서만을 독자에게 제공할 뿐이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한결같은 단서가 하나 있기는 하다. 다름 아니라, 어딘가 골똘히 주의력을 집중할 때면 으레 이마 한복판을 파고드는 자그마한 십자형 주름이 그것이다. 당시 뤼팽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도 바로 그 깊은 십자형 주름이었다.

 

요컨대, 하나의 확실한 신체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가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를 추적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오로지 연대기 작가로 등장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이야기 방식을 통해서만 실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재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아르센 뤼팽의 정착된 초상(肖像)이 부재하는 반면, 탁월한 변장능력으로 그가 둔갑하는 숱한 인물군상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역추적(逆追跡)하는 방법은 시도해볼 만하다. 이는 그가 어떤 기법들을 활용해서 자신의 특기인 기만술을 매번 성공시키느냐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 될 것이며,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의 정수(精髓)를 파악하는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변신술의 관점에서 볼 때, 아르센 뤼팽과 그의 어둠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팡토마스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아르센 뤼팽보다 뒤늦게 탄생한 팡토마스의 경우, 항상 가면과 소매 없는 망토를 착용하기 떄문에 가면과 망토를 벗어던지는 순간,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어디까지나 팡토마스의 진짜 얼굴을 모르겨, 그가 가면과 망토를 걸쳤을 대에만 비로소 팡토마스임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속의 모든 등장인물이 팡토마스일 가능성은 늘 열겨 있는 셈이다. 반면 인위적인 가면을 착용하지 않되, 아르센 뤼팽에게서는 그가 변신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곧 그의 가면인 셈이다. 사전에 자신의 인상착의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뤼팽을 독자들은 끝끝내 알아볼 수가 없기 떄문이다. 팡토마스나 뤼팽 모두 그 누구로도 변신이 가능하지만, 독자들은 팡토마스가 본래의 모습(가면과 망토)을 취했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반면, 뤼팽은 본래의 모습을 취한다고 해도 결코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identite)이란 곧 그 정체의 식별불가능성(non-identification)으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부재(absence)가 아니라, 오히려 그 편재성(遍在性,omnipresence)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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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마개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5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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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비리 사건에 연루된 명단이 숨겨진 수정마개, 그것이 공개될 경우에 예상되는 파장, 그리고 거기에 얽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축을 형성하고,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빗나간 복수를 하려는 악당과 뤼팽이 사모하는 여자와의 드라마가 또 한 축을 형성한다.

사실 수정마개의 반전은 이미 그 이후의 수많은 탐정물에서 써먹어 버린 것이라 짐작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대 최고(라고 생각되는 악당), 부하마저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에 실패하고만 뤼팽, 그리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기에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들... 추리 소설로서는 약간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오로지 소설의 재미만 놓고 보면 이만한 소설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마개」의 말미에서 아르센 뤼팽은 작가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까지 그 어떤 사건들도 이번의 이 지독한 모험에서처럼 날 고생시키고, 힘들게 한 경우가 없었다네. 글쎄 뭐랄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번 사건을 나는 ‘수정마개 사건’이라고 부르고 싶네.” 이처럼 「수정마개」에 등장하는 뤼팽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고난을 연거푸 겪으면서도 끝끝내 특유의 배짱과 용기를 잃지 않는 불굴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를 엄청난 혼돈으로 몰아간 파나마 운하 스캔들이 모델이 된 이 소설 역시 현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으며, 추리소설적 얼개 또한 보다 집중적이며 집약적인 묘미를 느끼게 한다. 역자로서는, 특히 어떤 난관에 봉착해서도 절대로 운명에 굴하지 않는 뤼팽의 그로테스크한 카리스마를 감상 포인트로 추천하고 싶다.

 

1. 체포

그렇게 속삭이는 뤼팽의 침착한 얼굴과 신중한 태도는, 마치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든 각도에서 충분한 여유를 두고 심사숙고하겠다는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보아하니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흔히들 인생에서의 절체절명의 순간, 즉 삶의 진가(眞價)가 극대화되어 발휘될 수 있을 그런 순간인 듯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아무리 위험한 가운데에서도 속으로 천천히 수를 세면서 일단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안정되기를 기다리곤 했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

그리고 나서야 그는 차분히 사고를 진행시켜갔는데, 어찌나 날카롭고도 깊은 직관력을 발휘하는지, 가능한 모든 경우를 빈틈없이 가늠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주어진 상황과 관련한 일체의 판단자료들이 그의 눈앞에 환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다봤고, 전부를 이해했다. 그리고는 완벽한 확신과 논리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2. 9-8=1

비록 뤼팽과 나 사이의 관계가 아주 원만하고, 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상당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나로서는 속속들이 파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다름 아닌 그가 어떻게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왔느냐 하는 점이다.

분명 한패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선보인 어떤 모험들의 경우, 든든한 공모관계와 막강한 다수의 힘이 어느 한 강력한 의지 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과연 그 의지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행사해온 것일까? 어떤 중개를 통해서, 어떤 지시체계를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을 당최 모르겠다. 그에 대해서만큼은 뤼팽 역시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뤼팽이 비밀로 하려는 일은, 이를테면 그 자체로 불가해(不可解)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딱 하나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가설은 이런 것이다. 아마도 극히 제한되면서 막강한 위력을 갖춘 정예 그룹의 활동은, 베일에 가려진 상부의 지시를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수많은 일시적 동맹자들이나 개별적인 단체들의 전 국가적, 전 세계적인 활동을 통해서 보완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주인 사이에는 소위 입문식을 거친 측근들, 심복들이 포진하고 있어, 뤼팽의 직접 지시를 제때제때 하달하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하고 말이다.

 

퉁퉁한 체격에다 목이 짧고, 얼굴을 빙 둘러가며 회색빛 턱수염을 길렀는가 하면, 머리숱은 거의 없고 안경 위에다 항상 검은색 코안경을 덧걸친 모습이었다. 눈이 쉬 피로해지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뤼팽은 특히 그의 강인해 보이는 얼굴과 각진 턱 선, 돌출한 골격을 유심히 관찰했다. 털투성이의 큼직한 주먹과 완강하게 굽은 안짱다리, 약간 굽은 듯한 등 때문에, 그는 양쪽 엉덩이에 번갈아 무게 중심을 두면서 한발한발 걸을 때마다, 영락없는 유인원(類人猿)의 몰골을 연상시켰다. 그런가 하면 울퉁불퉁하고 주름이 깊게 팬 널찍한 이마는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얼굴 전체가 다소 역겨운, 야생동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뤼팽은 문득 내각(內閣) 안에서도 도브레크를 사람들이 오랑우탄(숲의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동료 의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로 혼자 다니는 타입이라서뿐만 아니라, 그 야만적인 골격과 용모, 걸음걸이 떄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책상 앞에 앉더니 호주머니에서 해포석(海泡石)으로 만든 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단지 안에서 건조된 몇 가지 담뱃갑 중 메릴랜드(미국에서 수입된 담배 상표/역주)를 골라 파이프를 채운 다음, 불을 붙인 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편지 쓰기를 멈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책상의 어느 한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3. 알렉시스 도브레크의 사생활

 

4. 적의 우두머리

 

5. 27인의 명단

 

6. 사형선고

 

7. 나폴레옹의 반면상(半面像)

 

8. 두 연인의 탑

 

9.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10. 엑스트라-드라이?

 

11. 로렌의 십자가

 

12. 단두대

 

13. 마지막 싸움

순간, 나는 그가 내심 안고 있는 상처가, 저렇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쓰라릴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여자를 사랑했었구만?......”

내가 넌지시 묻자 그는 농담조로 대꾸했다.

심지어 나로선 결혼해달라고 청한 거나 다름없었지.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아들도 구해주었겠다......한데......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말일세......갑자기 확 깨더구만! 문득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는 거야......그 이후로는......”

그 이후론 잊었나?”

, 그야 당연하지.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 그래서 생각다 못해 둘 사이에 아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운다는 기분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버렸지.”

아니 뭐라구? 그럼 뤼팽 자네가 결혼을 했다는 말인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합법적이고 명실상부한 결혼을 했지. 그것도 프랑스 제일가는 명문가이자 엄청난 지참금의 소유자와 말이네......아니, 자넨 그럼 그 일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아마 들어볼 만한 얘기일걸!”

뤼팽은 신이 나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부르봉-콩데가()(부르봉 왕가에서 파생된 명문가문/역주)의 여식이자 현재는 마리-오퀴스트라는 이름으로 도미니크 수녀원의 종신 수녀로 있는,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과 결혼하게 된 경위를 말이다(“아르센 뤼팽의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1912년에 「주 세 루」 에 연재된 단편. 훗날 「아르센 뤼팽의 고백」에 수록되었다/역주)......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이력(履歷)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나타난 뤼팽의 인생역정은 태어나면서 시작해 대략 그의 나이 55살까지 이어진다.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는 가운데, 우리는 뤼팽의 모험 충만한 인생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주요 단계들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뤼팽의 연령은 정확히 명시된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내용상 대략적으로 추정된 것이다.

 

*유년기에서 25세까지

대부분의 청소년기가 그렇듯이 이때 뤼팽은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꾸준히 개발하고 인생의 수련과정을 열심히 쌓아간다. 어린 시절 수모를 당하는 어머니의 그늘 안에서 사회와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성장함에 따라서 라틴 및 그리스 고전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닦는다. 최소한 열여섯 살 나이에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를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의학과 법학, 무술, 마술(魔術) 등에 걸쳐서 다양한 경험과 연구를 섭렵했으며, 이 모든 것은 훗날 신출귀몰한 변장술과 10여 명의 경찰관을 일거에 해치우는 격투능력, 시의 적절한 라틴어 명구를 자유자재로 암송할 만큼의 고상한 취향과 베르티용 인체측정 시스템을 농락할 정도의 해박한 법 지식으로 화려하게 발휘된다. 스무 살 때까지 암흑가에서는 극히 미미한 존재였고, ‘마담 엥베르의 금고 사건, 처음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수중의 돈도 명성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그는, “머지않아 스스로 거장으로 불릴 바로 그 방면에서조차 한낱 초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있다.

 

*25세에서 37세까지

몇 차례의 큼직큼직한 절도행각을 통쾌하게 성공시킴으로써 일거에 사교계의 화두로 등극하는가 하면, 수차례 눈에 보이지 않는 선행도 쌓아가면서 격렬하면서 다양한 활동력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 시절은 가장 힘들고 충격적인 시련과 실제로 호되게 단련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는 가운데 아르센 뤼팽 특유의 강단(剛斷)과 지혜가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며, 이때부터 세상 어디에서도 동시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세상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신출귀몰한 괴도로서의 명성이 확고하게 자리잡아간다. 그의 그와 같은 능력은 여전히 범죄행각을 일삼으면서 그와 동시에 파리 경찰청 치안국장으로 활약함으로써 최고조에 이르는 셈이다. 또한 독일의 황제와 담판을 벌일 정도의 배짱과 역사적 혜안도 보여준다. 유명 미술품과 골동품, 역사적 유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모험의 스케일도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확대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기암성813의 비밀, 수정마개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고백초록 눈동자의 아가씨가 있다.

 

*38세에서 43세까지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해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국적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외인부대에 지원해, 모로코에서 2년 동안 레종 도뇌르를 비롯한 각종 무공훈장을 횝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방위적 활약은 유럽 대륙을 벗어나 터키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이어진다. 단번에 부하 60여 명을 소집하는 대범한 작전을 펴기도 하며, 북아프리카의 1만여 명에 이르는 베르베르족을 이끄는가 하면, 서아프리카의 모리타니 왕국을 점령해 술탄으로 등극하기도 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813의 비밀호랑이 이빨, 황금삼각형그리고 서른 개의 관이 있다.

 

*44세에서 48세까지

이전에도 몇 차례 그랬지만, 이번에야말로 결정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다가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여러 사건을 동시에 요리하는 수완을 보인다. 치안국 부국장 베베르에게 체포되었다가, 총리인 발랑글레에게 24시간의 가석방을 조건으로 프랑스에 모리타니 왕국을 이양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처려비행을 하며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네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한다. 와즈 강가의 한 마을에 정착하여 은퇴하기로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파리로 돌아와 짐 바르네트라는 가명으로 탐정사무소를 차리고 활약하기도 하며, 혈혈단신 모터보트를 타고 무려 1년간의 세계일주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호랑이 이빨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그리고 불가사의한 저택이 있다.

 

*49세에서 55세까지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여전히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대도로서도 화려한 편력을 계속하는 가운데, 심지어는 강() 하나를 훔치는 비기(祕技)를 선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납치당한 아들 장을 찾는 부정(父情)의 드라마가 펼쳐지며, 마지막으로 코트 다쥐르 지방의 아스페르몽으로 은퇴하여 엄청난 규모의 화원을 조성한다. 이 기간을 다루는 작품들로는 바리바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강력한 형사 빅토르, 백작부인의 복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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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의 비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아르센 뤼팽의 전집 중에서 (물론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가장 사람들이 첫 손 에 꼽는 책이 이 책과 기암성이라고 알고 있다.

이 책보다 앞서 읽은 기암성은 그야말로, 이 것이 뤼팽이다, 라는 느낌을 주는데 충분했다. 한번 손에 책을 들고나서 숨쉴 틈없이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책의 재미는 뛰어난 소년 탐정의 재치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책은 시기상으로도 기암성의 바로 뒤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다시 또 여인과의 사랑에 빠져서 중요한 순간에 판단력을 상실하는 뤼팽의 모습이 반복되는 장면에서는 약간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철저하게 성적인 부분이나 로맨스를 배제했던 홈스에 비하면, 완벽해보이던 뤼팽이 여자 때문에 스스로 약한 모습을 노출시키고야 마는 장면에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숨이 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예전에 고전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박씨부인전이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봤던 적이 있다. 철저하게 지고야 만 병자호란이지만, 해당 부분의 역사적 사실의 큰 훼손 없이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줌으로서 당시 민중을 위로하고 자존심을 회복한 일종의 정신승리라는 해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당시 복잡한 유럽 정세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설령 알거나 모르거나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813의 비밀」은 이미 인기작가가 된 모리스 르블랑의 경력에서도 아주 새로운 획을 긋는 작품이다. 191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호응이 쏟아졌는데, 이에 힘입어 작가는 1917년과 1932년에 각각 가필, 수정하여 다시 출간했을 정도로 이 작품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미스터리적 기법이 전작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도달했고, 주인공 아르센 뤼팽의 전방위적 활약 또한 눈부실 정도이다. 더구나 20세기 초, 영­불­독 3국간의 식민지 정책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 독일 왕가와 그에 관련한 3대에 걸친 귀족가문 및 여타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는 작가의 방대하고 세밀한 고증학적 지식에 의해서 소설의 스케일과 깊이를 상상을 초월하는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독일 황제에 맞서는 뤼팽의 엄청난 야망과 처음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로서의 뤼팽의 애틋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쉴새없는 음모와 반전의 연속은 오늘날의 독자들의 손에도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제 1부

 

연쇄살인

느닷없이 튀어나온 거물 협객(俠客)의 이름 앞에서 케셀바흐 씨는 다소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뤼팽은 곧장 그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아하, 숨 좀 돌리시겠다 이건가? 아르센 뤼팽은 점잖은 도둑이며, 피는 질색이고, 그저 남의 재산을 좀 실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범죄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범죄라고 할 것도 없다 이건가? 그러니 불필요한 살인 행각이나 일삼는 위인은 결코 아닐 것이라 생각하겠지? 글쎄, 당신의 목숨을 빼앗는 게 불필요한 건지 아닌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지금 난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알아두시구려, 친구.”

 

르노르망 씨, 작전을 개시하다

! 아르센 뤼팽......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기상천외한 에기유 크뤼즈의 엄청난 모험 이후 누구든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더는 들어본 적이 없다. 셜록 홈스와 이지도르 보트를레의 눈앞에서, 사랑했던 여인의 시체를 들쳐없고 늙은 유모 빅투아르를 대동한 채, 저 어두컴컴한 적막 속으로 사라져간 바로 그 날 이후로 말이다......

그 날 이후, 일반적인 사람들 생각은 그가 아마도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간 세상 어디에서도 뤼팽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경찰이 편의상 내린 결론에 힘입은 바 컸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가 목숨만은 부지한 상태이며, 이제는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채, 아담한 정원이나 가꾸며 평화로운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따. 그런가 하면, 세상의 덧없음과 시련으로 점철된 인생에 질려버린 나머지 아예 트라지스트 교단(17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수도회/역주)의 수도원에라도 칩거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긴 있었다.

한데 이렇게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렇게 또다시 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결전을 벌이다니! 아르센 뤼팽이 본래의 아르센 뤼팽으로 돌아왔다고나 할까? 기상천외하고 신출귀몰하며 대담무쌍, 호쾌무비한, 저 아르센 뤼팽의 모습으로 말이다!

 

세르닌 공작의 활약

 

르노르망 씨의 활약

531일 아침, 모든 신문은 르노르망 씨 앞으로 된 편지에서 뤼팽이 바로 당일 날짜로 경비원 제롬의 탈옥을 예고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그중에서도 한 신문은 작금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썩 잘 요약하고 있었다.

 

팔라스 호텔의 그 끔찍한 살육은 어언 4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경찰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무엇을 밝혀냈나? 아무것도 없다.

단서는 다음 세 가지. 담뱃갑하고 LM이라는 글자, 호텔 관리실에 누군가 흘리고 간 옷 꾸러미. 하지만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냈는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경찰에서는 당시 2층에 투숙하고 있다가 미심쩍게 자취를 감춘 일부 여행객들을 의심하는 모양인데, 그들의 종적은 그 후로 어떻게 된 것인가? 신상 파악이라도 제대로 해놓았는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결국, 처음보다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 상황이고, 수수께끼만 더더욱 완강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리 시 경찰청장과 그 하급자인 르노르망 씨 사이에 불화가 싹트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총리로부터도 그리 시원찮은 대접을 받은 후자께선 현재 잠정적으로 사직서까지 제출해놓은 마당이란다. 따라서 케셀바흐 사건은 현재, 르노르망 씨와는 앙숙관계에 있는 치안국 부국장 베베르 씨에 의해서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후문이다.

요컨대, 엉망진창, 오리무중 그 자체라고나 할까?

하물며 상대는 일관된 정신력과 괴려, 눈부신 수완의 대명사인 뤼팽이다.

그럼 우리의 결론은 무엇일까? 그야 간단하다. 뤼팽은 기필코 531일 바로 오늘, 스스로 예고한 대로, 자신의 공범을 유유히 빼내갈 것이 틀림없다.

 

르노르망 씨, 침몰하다

 

파버리-리베이라-알텐하임

일단 보기에도 황홀할 지경이오. 보기에도 좋은 게 맛도 좋다더니...... 이봐, 시리우스, 너도 좋아할 것 같구나! 로쿠스타(로마시대 유명한 여자 독살[毒殺] 전문가. 네로 황제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도 모두 그녀의 힘을 빌려서 독살을 자행했다/역주)도 이보다는 더 잘 못 만들걸!”

그리고는 얼른 과자 하나를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덥석 집어먹은 시리우스가 잠시 꼼짝 않고 있더니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면서 즉사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세르닌은 하인들 중 하나가 급습할 것에 대비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면서 대차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우하하하하-이보게 남작, 앞으로 누구든 독살하고 싶을 때는, 먼저 자네 그 목소리부터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떠는 손부터 바로잡게나......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의심부터 사지 않는가 말이야......그나저나, 아까 살인은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알렌하임은,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꾸했다.

칼로 하는 거야 싫어하지. 하지만 독살은 늘 내 구미를 당기거든...... 심지어 죽어가는 희생자가 무슨 맛을 느낄까 궁금하기도 하지......”

빌어먹을! 러시아 귀족 나리를 실험대상으로 삼았으니 식성 한전 까다롭다고 해야겠구만!”

 

올리브색 프록코트

생각해보라, 아르센 뤼팽이 지난 4년간 치안국장으로 버젓이 행세를 해왔다니!!!

무려 4년이라는 세월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법적으로 그 직책에 부여되는 온갖 권리와 의무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여러 상관들로부터의 신망과 정부차원의 신임, 모든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아오면서 말이다!

지난 4년간 서민들의 안녕과 재산의 안전은 전적으로 아르센 뤼팽의 손에 맡겨진 셈. 그는 항상 법질서 구현을 대변해왔고, 선량한 다수를 보호해왔으며, 숱한 범죄자를 척결해왔다.

그가 그동안 일궈낸 업적이 어디 한둘인가! 공공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고, 범죄사건은 그보다 더 신속하고 확실하게 해결되어본 적이 없었다!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드니주 사건이라든가, 크레디리요네 도난사건, 오를레앙 특급열차 습격사건, 도르프 남작 살해사건 등......예상을 초월하는 사건해결과 대범한 활약상들은 세상 그 어느 유명한 형사들의 업적과 비교해도 하나 손상이 없는 공권력의 개가가 아니었던가!

언젠가 루브르 박물관 방화사건과 그에 연루된 범인 체포에 즈음하여 행한 연설에서, 총리인 발랑글레마저 르노르망 씨의 다소 임의적인 행동거지를 옹호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 명석함으로 보나, 넘치는 활력으로 보나, 단호한 결단력과 일 처리 능력, 상상을 초월하는 수사방식과 무궁무진한 수완 등을 미루어볼 때, 무슈 르노르망은 우리에게 단 한 사람, 그가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딱 한 사람 비견될 만한 인물로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무슈 르노르망은 우리 사회에 헌신하기로 개과천선한 아르센 뤼팽 같은 인물이라고......”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그 르노르망 씨가 진짜 아르센 뤼팽이었던 것이다!

 

 

제2부

 

상떼-팔라스

 

현대사에 얽힌 수수께끼

 

뤼팽의 거창한 계략

 

담판

 

황제의 편지

 

7인의 도적

방금 들어온 한 남자가 옷걸이에다 펠트 천으로 된 검은 중절모를 건 다음, 작은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가르송이 메뉴를 가져오자 주문을 한 뒤, 그는 냅킨 위로 팔짱을 끼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꼼짝 않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뤼팽은 그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염 한 줌 없는 매끈하고 야윈 얼굴에 깊숙이 틀어박힌 안구에서 강철같은 느낌을 발하는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피부 자체가 마치 뼈와 뼈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양피지라도 되는 듯, 하도 뻣뻣하고 질겨서 어떤 털도 뚫고 자라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은 맥없이 음울하기만 했고, 어떤 표정도 꽃피울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상아와도 같은 느낌의 이마는 그 안에 어떤 생각도 깃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속눈썹조차 거의 없는 눈꺼풀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마치 조각상의 눈처럼 고착된 시선을 내쏘고 있을 뿐이었다.

뤼팽은 가르송 중 한 명을 불러 물었다.

저 신사 분은 누구시오?”

저기 점심 드시는 분 말입니까?”

그렇소.”

손님인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들르는 분입니다.”

이름을 혹시 아오?”

그럼요......레옹 마시에입니다.”

 

그는 문제의 사내를 열심히 관찰했다. 실제로 사내의 인상은 저 끔찍한 존재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도 일치했다. 다만 이글거리는 불꽃과 활력을 기대했던 눈빛만큼은 전혀 다르게, 완전히 맥이 빠져버린 죽은 눈빛이었다...... 저주받은 자의 고통과 혼란, 강인한 인상을 기대했던 곳에서 돌덩이 같은 무감각함밖에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뤼팽은 다시 가르송에게 말했다.

저 분이 하는 일을 혹시 알고 있소?”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요......한마디로 좀 괴짜라고 할 수 있어요......늘 혼자 다니고요......말도 전혀 없지요. 심지어 여기서 그의 목소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주문도 메뉴에서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하니까요...... 식사도 20분 만에 후딱 해치우죠......그리고는 돈을 지불하고, 나가버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또 온단 말이죠?”

“4-5일에 꼭 한 번씩은 들르는 편이에요. 반드시 규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바로 그 자가 틀림없어! 그 자일 수밖에 없다구......말레이히 그 자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거야......저기 저 손으로 바로 사람을 죽인 거라구......저 머리 속에는 아직도 피 냄새에 취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괴물 같은 자식! 흡혈귀 같은 놈!......’

뤼팽은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하지만 과연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워낙에 상대를 해괴망측한 존재로만 상상하던 뤼팽에게는, 이렇게 왔다갔다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하며 살아 숨쉬는 모습이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살을 뜯어먹고 펄펄 끓는 생피를 빨아마시는 흉악한 짐승쯤으로 생각했던 존재가 저렇게 정상적으로 빵과 고기를 잘라먹고,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망타진

순간, 아르센 뤼팽은 뭐가 뭔지 그 전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분명 놀랄 만큼 기발한 착상으로 마련된 함정에 자신이 여지없이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되고, 조작된 것이다. 부하들과 격리된 것하며, 하인들이 배신하거나 또는 이유 없이 사라진 것, 그리고 하필 이때 자신이 마담 케셀바흐의 집에 뛰어든 것 모두가 말이다......

분명 모든 상황들이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짜 전화통신문이 이곳의 부하들을 집에서 빠져나가게 만들기 전이라도 뤼팽이 집에 도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전쟁은 뤼팽의 부하들과 알텐하임의 패거리들과의 한판 승부가 되었을 일이다. 한데, 지금까지 말레이히의 행동양식이나, 알텐하임을 살해한 일, 펠덴츠의 소녀를 독살한 일을 돌이켜보건대, 애초부터 함정은 뤼팽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었으며, 말레이히는 대규모 패싸움이랄지, 성가신 패거리들을 몽땅 쓸어버리는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뤼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단 마담 케셀바흐가 당장 위해를 당한 것은 아니라며,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또 울화통이 치미는지, 후닥닥 문을 박차고 옆방으로 건너가 상처를 입고 버둥대는 도적들에게 하나하나 발길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돈 다발들을 일일이 빼앗아 챙긴 다음, 각각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커튼 줄이든 이불이든, 옷감이든 닥치는 대로 주워서 손발을 묶은 뒤, 일곱 명 모두를 양탄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아 마치 소포 꾸러미들처럼 한데 엮어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는 있는 대로 야유와 저주를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꼬치구이가 따로 없구만! 기름이 좔좔 흐르는 요리가 따로 없어! 집단으로 천치들만 모아놓은 꼴이로군! 시체공시장(屍體公示場)에 널려 있는 익사체들 같지 않은가!......그런데도 네 놈들이 감히 뤼팽을 넘봐? 과부와 고아의 수호자이신 이 뤼팽을?......, 이제 와서 떨리나?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들......뤼팽은 공연히 사람을 해치진 않아......다만 뤼팽은 악당을 싫어하고, 자신의 의무를 잘 아는 정직 고결한 사람일 뿐이야. 생각해봐, 도대체 네 놈들 같은 깡패들하고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겠나? 뭐가 어째? 남의 목숨을 파리만도 안 여긴다구? 남의 재물은 죄다 네 놈들 걸로 보여? 법도 없고, 사회도 없고, 양심도 없다구?......맙소사, 주여......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가는 겁니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구요?......”

 

유럽 지도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구? 지난 수개월간에 걸쳐서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면서, 나는 내 원대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한 숱한 인물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각자의 줄을 움직여 조정해 왔었지. 하지만 그동안 그들을 제대로 고개 숙여 들여다보고, 그 머리와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피려고는 전혀 하지 않앗어...... 그러다보니 나는 지금 피에르 르윅이나, 주느비에프나, 돌로레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거야......그저 모두 내 꼭두각시인 줄만 알았는데, 펄펄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단 말이야......세상에, 이제 와서 이런 난관에 부닥칠 줄이야!......”

 

살인마의 정체

순간, 그에게는 한 가지 이해의 단초가 떠올랐다. 바로 광기! 그렇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텐하임의 동생이자, 이질다의 언니, 말레이히 가문의 여식으로서 정신병자 어머니와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둔 가엾은 운명......그녀 역시 정상적인 정신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면서 미쳤으니 참으로 괴이하기도 하지만, 분명 불균형한 정신적 질환으로 시달리는 정신병자인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든 게 확실해지는 듯했다. 모든 게 정신착란에 의한 범죄였던 것이다! 마치 자동인형처럼 어느 한 고착된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다보니,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 피비린내 나는 행위를 까마득히 의식하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녀가 무언가를 원해서 사람을 죽였고, 자신을 방어하느라고 또 사람을 죽였으며, 죽였다는 것을 감추르나로 또다시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광증을 설명해주는 것은, 그저 죽이기 위해서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녀 안에 잠재하는 살인마가 갑작스럽게 치밀어오르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욕구를 그 순간 충족시켜준 것이다. 그녀 삶의 어느 순간들, 어떤 상황들 속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대상이 느닷없는 적으로 돌변해, 그만 영문 모를 희생제물이 되었다고나 할까?

사람을 공격할 때 그녀는 격렬한 광증과 분노에 잔뜩 취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행각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기이한 광기! 순전한 맹목성 속에서도 늘 명철하고, 엄청난 혼돈 속에서도 항상 논리적이며, 부조리한 가운데 더없이 지적인 정신병자! 지극히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찬탄을 자아낼 만한 그 모든 계략과 집요함과 수완의 장본인!

예리한 통찰력이 다시금 자리잡은 뤼팽의 머리 속에는, 그간의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사건들과 더불어, 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걸어왔을 수수께끼 같은 인생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제일 먼저 남편의 계획에 포섭되고 완전히 사로잡힌 아내, 아마도 그 일부밖엔 이해하지 못했을 계획에 정신이 고착되어버린 돌로레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추적하고 있는 피에르 르뒥이라는 사람을 함께 찾아 헤매는 아내, 더 나아가 그와 결혼해서, 부모가 수치스럽게 쫓겨난 펠덴츠라는 자그마한 왕국으로 여왕처럼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는 돌로레스의 모습 또한 떠올랐다.

다음으로, 모두가 몬테카를로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팔라스 호텔, 자기 오빠인 알텐하임의 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돌로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을 감시하면서, 미로처럼 얽힌 벽을 따라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늘에서 그늘로 서성이는 검은 복장의 돌로레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밤, 꽁꽁 묶인 케셀바흐를 발견하고는, 찔렀다.

다음날 아침, 호텔 사환에 의해서 발각될 처지에 놓이자, 또 찔렀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이번엔 채프먼에 의해서 들통날 것 같자, 그를 오빠의 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역시 찔렀다.

이 모든 것이 전혀 감정의 동요 없이 지극히 잔인하고 맵시 있게 이루어졌다.

 

기고만장해진 나는 멍청하게도, 그녀가 만들어놓은 두 창고 사이의 통로를 고발했고,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증거들을 좋다고 제시했으며, 그녀가 위조해놓은 서류들을 토대로, 레옹 마시에가 남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원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이 드 말레이히라고 버젓이 주장을 하고만 거야......결국 루이 드 말레이히는 죽음을 선고받았지! 반면 돌로레스 드 말레이히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말이야. 범인이 붙잡혔으니, 모든 의혹이 단번에 가신 거 아니겠어? 게다가 남편과, 오빠, 동생, 두 하녀와 슈타인벡이 모조리 죽었고, 성가시게 된 부하들은 내가 대신 나서서 베베르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니, 이제 그녀의 범죄와 야욕으로 얼룩진 과거는 깨끗이 청소가 된 셈 아니겠느냐구! 이제 자기를 대신해 내세운 결백한 사람이 나 때문에 교수대에 오르기만 하면, 바야흐로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결정적으로 자유롭게 벗어나서, 앞으로는 피에르 르뒥의 사랑을 받는 백만장자, 당당한 돌로레스 여왕만이 존재하는 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뤼팽은 저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

! 그 자가 절대로 죽어선 안 돼! 내 목숨을 걸고 맹세컨대,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구!”

 

에필로그: 자살

 

해설: 「813의 비밀」의 역사적 배경  

500여 쪽을 뛰어넘는 이 파노라마를 거쳐오면서 머리가 뻐근해지셨을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그 사실적 요소와 허구적 요소를 다시 한 번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는 것도 독후(讀後) 감상을 구체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실적, 즉 다큐멘터리적 요소.

-(츠바이브뤼켄)은 대대로 영주가 군주로서 군림하다시피 하는 대공령(혹은 대공국)이다. 나폴레옹 시절에 잠깐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19세기 초부터는 다시 헤르만 1세 대공의 영지로 귀속되는데, 불행히도 그 방탕한 아들 헤르만 2세에 와서 독립된 공국(公國)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 즉 독일제국의 일개 변방지역으로 편입된 것. 당시 독일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는 이 헤르만 2세를 자기 휘하에 두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치를 정도로 애지중지한다. 헤르만 2세 역시 전장에서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인 헤르만 3세를 수상에게 맡겼고,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스마르크의 외교밀사로 눈부신 활약을 벌인다. 수상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도 정계를 떠나 드레스덴에 정착했고, 수상이 죽은 뒤 2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뜬다. 모리스 르블랑은, 슈타인벡 영감의 입을 빌려서, 여기까지가 모든 독일인에게 두루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얘기함으로써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임을 암시한다.

이제 저자는 이 대공 가문의 비운의 역사와 잊혀진 땅 되--펠덴츠 대공령을 거점으로 해서 기상천외한 허구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 허구의 실마리는 소설 속에서 일종의 보물지도처럼 대접받는 황제의 편지이다. 비스마르크 수상이 재직할 당시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서 작성되었다는 이 편지는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로 벌인 일종의 외교적 밀약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자고로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이란, 때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으로, 때로는 끼리끼리 나눠먹기식의 밀약으로 세계 여러 지역을 난도질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국가간의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줄다리기가 빈번했을 테고, 그 와중에, 하긴 이와 같은 비밀편지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특히 당시까지도 예민한 사안이었던 알자스-로렌 문제와 관련한 극비(極祕)검은 거래가 내용이라고 상정함으로써, 그 편지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카이저 황제와 아르센 뤼팽, 그리고 또 하나 허구의 축()인 말레이히 가문이 서로 노리는 그야말로 보물지도가 된다. 카이저 황제는 알자스-로렌 지방의 안정적 확보와 선왕의 명예를 위해서, 아르센 뤼팽은 딸의 행복과 세계 경영의 야망을 위해서, 그리고 말레이히 가문은 3대에 걸친 한을 풀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역시 되--펠덴츠 대공령! 광인 집안으로 낙인찍혀 그곳에서 쫓겨났던 말레이히 가문에게는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할 복수의 터전이며, 뤼팽에게는 딸의 보금자리이자 세계경영의 거점이 바로 그 잊혀진 땅인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원주인이었던 되-퐁가()의 마지막 후손 헤르만 4(피에르 르뒥)를 꼭두각시로 전면에 내세워 현재 독일의 한 지방이 되어 있는 그 땅을 엄연한 공국(公國)으로서 되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의 카이저 황제가 꼼짝 못할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알자스-로렌 관련 밀약이 담긴 황제의 편지인 셈이다. 결국 모든 야망와 복수극은 좌절되고 편지는 카이저 황제의 수중으로 돌아가게끔 결론지음으로써, 모리스 르블랑은 허구를 허구의 테두리 안으로 되돌리고 역사적 실재는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창작의 묘를 발휘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당대의 현실을 떠나지 않았던 아르센 뤼팽 시리즈......이처럼 분명한 역사적 실재와 황당무계한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하되, 그 각각의 한계를 존중했다는 것도, 수많은 당시 대중의 호응과 사랑을 받았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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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아르센 뤼팽의 수많은 활약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내용이다. 다만 그 이유가 뤼팽보다는 소년탐정의 매력에 상당히 빚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작가는 희노애락의 끝을 경험하는 뤼팽이 어떤 감정적 동요를 겪는지 보여주면서 대도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키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명의 독자인 나로서는 그 감정의 과잉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기암성은 여러 면에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이나 뤼팽 대 홈스의 대결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단 스토리의 다층적인 전개와 복선들이 보다 정교화되고, 주제와 소재 및 시공간적 스케일이 놀랄 만큼 확대되었다. 역시 홈스가 뤼팽의 호적수로 등장하며, 새로운 영웅인 소년탐정도 선을 보인다. 원래 심리소설 작가였던 저자의 섬세한 시각이 더욱 돋보이며, 주변 풍광에 대한 인물의 감정이입도 대단한 수준이다. 뤼팽의 전인적(全人的) 면모가 약여하는 작품이며 그의 페이소스를 한껏 느껴볼 수 있는 수작이다.

 

1. 한 밤의 침입자

 

2. 수사학급 학생 이지도르 보트를레

 

3. 시체

 

4. 정면대결

맹세하지. 내 친구들이 자네 부친과 함께 자동차로 지금 시골 어느 마을에 가 있네. 내일 아침 일곱 시에 그랑 주르날에 내가 주문한 대로 기사가 실린 걸 확인하는 즉시, 전화를 해서 아버지를 풀어드리라고 하겠네.”

좋습니다! 조건에 따르겠습니다.”

보트를레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 마당에 더는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벌떡 일어나 모자를 쓰고 내게, 그리고 뤼팽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뤼팽은 그가 나간 뒤, 밖의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딱한 녀석......”

 

다음날 아침 여덟 시, 나는 하인을 시켜 그랑 주르날지를 사오게 했다. 20분 만에야 돌아온 하인 이야기로는 가판대마다 신문이 동이 나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신문을 들춰댔다. 아니나 다를까 보트를레가 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었다. 다음에 그대로 옮겨놓은 기사 내용은 곧 전 세계 소식통들에 퍼져나갔다.

 

앙브뤼메지의 참극

 

이 글의 목적은, 앙브뤼메지의 참극, 아니 이중의 참극이라고 해야 할 일대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 그간의 수사 및 추론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보기에 분석, 연역, 귀납 등에 의한 모든 추론작업은 극히 상대적이면서도 진부한 흥밋거리밖에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수사과정을 이끈 두 가지 기본적인 생각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며, 그것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해 보이는 가운데, 이 희대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그 추이를 짚어가며 이야기하려고 할 따름이다

아마도 혹자는 사건의 여러 부분들이 미처 증명되지 않았고, 대부분 나의 가설에 의존하고 있음을 간파할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가설이 엄청난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따라서 그것을 토대로 상정한 사건들 역시, 비록 하나하나 증명된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신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물은 계속해서 흐르되 그 속에 담기는 푸른 하늘의 이미지는 늘 같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선 내 관심을 자극한 첫 번째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어떻게 치명상을 입은 뤼팽이, 어두컴컴한 구멍 속에서 음식도, 약도, 이렇다 할 보살핌도 없이, 최소한 40일을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일단 사건의 발단부터 돌아보자. 때는 423일 목요일, 오전 4, 아르센 뤼팽은 엄청난 절도행각을 한창 벌이다가 들키는 바람에 폐허를 따라 난 길로 도망쳤으나, 그만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또 쓰러지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악착같이 예배당 쪽으로 가기 위해서 거의 기다시피 한다. 거기에는 그가 우연히 발견한 지하 납골당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숨어들기만 하면 일단 위기는 모면한 셈. 죽을 힘을 다해 다가간 끝에 불과 몇 미터를 남겨둔 상황에서, 문득 발소리가 들린다. 기진맥진,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끝내는 놓치고 그는 기절하고 만다. 이때 도착한 발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드모아젤 레이몽드 드 생-베랑. 바로 여기까지가 참극의 제1, 즉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추후에 발생한 사건들이 남긴 단서들을 보건대, 그것을 추론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 아가씨의 발치에, 상처입고 신음 중인, 그래서 조만간 비참하게 붙들리고 말 한 남자가 누워 있다. 바로 자신이 쏜 총에 맞은 남자 말이다. 이제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니 경찰에 넘겨야 할까?

만약 그가 장 다발의 살해범이었다면 그녀는 의당 그가 치러야 할 운명을 부여했으리라.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삼촌인 제스브르 백작이 정당방위로 저지른 살인행위의 전모를 다급하게 이야기해준다. 그녀는 웬일인지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빅토르는 쪽문 쪽을 감시하고 있으며, 알베르는 살롱의 창가에 있다. 결국 둘 다 여기까지 시선이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 과연 그녀는 자기 때문에 상처입은 남자를 경찰에 넘겼어야 할까?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짐작한 거부할 수 없는 동정심이 여기서 한몫을 한다. 뤼팽의 주문대로, 그녀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동여맴으로써 우선 핏자국이 남는 것을 방지한다. 그리고는 역시 남자가 건넨 열쇠로 예배당 문을 연 다음, 남자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여보낸다. 즉시 문을 닫고 여자가 되도록 멀리 떨어진 다음에야 알베르가 헐레벌떡 나타난다.

만약에 그 순간, 혹은 그로부터 수분 이내에 누군가 예배당에 들어섰다면, 기력을 미처 회복하지 못해 바닥 포석을 들어올려 지하 납골당 안으로 피신하지 못했을 뤼팽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을 것이다......하지만 정작 예배당에 대한 조사는 그로부터 여섯 시간이나 지난 뒤에, 그나마 건성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뤼팽은 안전하게 피신했고,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을 죽일 뻔한 여자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이다.

이후로 마드보아젤 드 생-베랑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뤼팽의 공범이 된 셈이다. 이제는 그를 경찰에 넘길 입장도 아닐뿐더러,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는 아예 그를 보살피기로 한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은신처 안에서 남자는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그려가 계속 공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로서의 모성적 본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종의 사명감마저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기꺼이 그러게 된 것이다. 그녀는 워낙에 총명하고 섬세한 여자이다. 그래서 예심판사에게 아르센 뤼팽의 인상착의를 거짓으로 지어낸다(두 사촌자매가 서로 다른 진술을 한 사실을 상기해보라). 아울러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모르는 단서들을 통해, 변장한 마차꾼이 아르센 뤼팽과 한패라는 것을 이미 알아보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가짜 마차꾼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준다. 두목의 상태는 물론 한시 바삐 수술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그녀가 알려준 것이다. 마차꾼의 챙모자를 슬쩍 바꿔치기 한 것도 물론 그녀이다. 또한 그녀 자신을 목표로 지목한 협박 쪽지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그녀를 의심하겠는가?

그녀는, 내가 예심판사에게 소견을 밝히려고 하자, 느닷없이 끼어들어 전날 나를 숲속에서 보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엉뚱한 낭설을 퍼뜨린다. 물론 예심판사 피욜 씨로 하여금 나를 의심케 해서 입을 막으려는 처사였다. 그녀의 그런 행위는 나로 하여금 그녀에 대한 의심의 불씨를 지피게 했으므로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일단 내 입을 막고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녀는 무려 40일 동안이나 뤼팽을 먹이고 보살피게 되며(우빌의 약사를 조사해본 결과,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 이름으로 된 여러 약품 주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환자를 낫게 한다.

이상이 겉으로 드러난 앙브뤼메지의 참극이자, 우리가 해결한 두 가지 문제 중 첫 번째이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이 은신하고 희생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수호자는 다름 아닌 성채 안,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아르센 뤼팽은 살아 있다. 따라서 바로 두 번째 문제이자 앙브뤼메지 참극의 제2막이 전개된다. 즉 다시 무리의 두목으로 돌아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막강한 세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그가, 끊임없이 나와 부딪치면서까지 끝끝내 자신이 죽은 것으로 세상이 알고 있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한 가지 상기해야 할 점은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종된 다음 여러 신문에 게재된 바 있는 사진들은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의 극히 일부만을 불완전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자연히 두 남녀 사이에는 의당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40일 동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매일같이 보아오면서 뤼팽은 어느덧 없으면 그리워하게 되고, 간호를 하러 몸을 숙여올 때도 그녀의 향긋한 숨결에 먼저 매혹되어버리는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전형적으로 환자가 간호사에게 반하는 케이스라고 할까? 감사의 마음이 사랑으로 변해가고, 찬탄의 시선이 정염의 불꽃으로 화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추이이다. 그에게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은 구원이자 즐거움이고, 꿈이자 희망이며, 빛이자 삶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제 뤼팽은 그녀의 헌신을 마냥 이용하기가 꺼려질 만큼 그녀를 존중하게 되었고, 그녀를 공범으로 개입시키는 것을 더 이상은 스스로에게 용인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서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미 사랑의 포로가 된 뤼팽은 자신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처럼 도발적인 사랑에 쉽게 혹할 리가 없는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은 환자가 치유된에 따라 방문 횟수를 줄여갔고, 급기야는 완쾌된 날을 기회로 지하 납골당 출입을 끊는다.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애끓는 연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뤼팽은 마침내 엄청난 결심을 하고만다. 66일 토요일, 그는 드디어 은신처를 나와 수하들이 돕는 가누데, 아가씨를 강제로 납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납치가 일어난 경위가 알려지면 안 된다. 모든 수사의 길목을 차단해야 하고, 모든 추리와 추리의 희망까지도 그 싹부터 잘라내야만 한다. 그 일환으로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은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낫다. 살인이 연출되고, 증거들이 조작된다. 이렇게 해서 누가 보아도 확실한 범행이 기정사실화된다. 어느 정도는 미리 예견되고, 뤼팽의 패거리들에 의해서 예고까지 되었으며, 결국 두목의 죽음을 되갚기 위해서 무자비한 범죄행위가 발생하는데-,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조작되었는가!-그로 인해서 바로 그 두목의 죽음 역시 보다 확고한 사실로 정착한다.

아니, 단순한 믿음을 부추기는 것만을도 모자라다. 아주 확실한 사실로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쯤 뤼팽은 내가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본다. 내가 언젠가는 예배당의 비밀을 눈치채고 그 지하의 납골당을 파헤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거기서도 만약 납골당이 텅 빈 채로 발견되었다면 그간의 모든 조작과 속임수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따라서 납골당은 비어 있으면 안 된다!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의 죽음 역시 파도가 시신을 해변으로 몰아오지 않았다면 애매모호한 추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시신 역시 조수에 떠밀려와야만 한다!

이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하나도 아닌 두 개의 커다란 난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뤼팽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는 어려운 숙제였겠지만, 뤼팽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결국 뤼팽이 내다본 것처럼, 나는 예배당의 비밀을 파악하고 지하 납골당을 발굴해서, 뤼팽이 그동안 숨어 있던 은신처로 내려가본다. 그리고 거기에 나뒹굴어 있는 그의 시신을 확인한다!

뤼팽의 죽음을 점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와 같은 광경에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그가 죽었을 개연성엔 무게를 두지 않았다(우선은 직관적으로, 그리고 추론에 의거해서). 때문에 모든 기만술과 조작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게 된다. 나는 즉시 이런 생각을 한다. 곡괭이질로 떨어진 돌멩이가 하필 그 자리에, 그것도 톡 건드리기만 하면 떨어질 정도로 가볍게 얹혀 있는 데다,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아래의 시체 얼굴 부위를 정확히 가격하도록 되어 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중에 시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가짜 아르센 뤼팽의 머리를 실수 없이 으깨놓도록 말이다.

그밖에도 또 하나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반시간 후, 나는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의 시신이 조수에 떠밀려와 디에프의 해변 바위틈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팔에 평소 차고 다니던 것과 같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그녀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어느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시체가 워낙에 알아볼 수 없게 상해 있어서 신원을 암시하는 단서는 오직 그것뿐이었고 말이다.

사실 위의 사체들에 관해서는 나 또한 기억 속에 뭔가 짚이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라 비치 드 디에프지에서 나는 앙베르뫼에 체류하던 어느 젊은 미국인 부부가 음독자살을 했는데, 당일 밤 그 시체 두 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즉시 알베르뫼로 달려갔다. 알고 보니 사체가 사라진 경위만 빼고 모두 진실이었다. 즉 그냥 무턱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두 부부의 인척이 일정한 확인절차를 거친 다음, 사체를 인수해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인척이라는 사람들은 아르센 뤼팽과 그 패거리들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그런 식으로 명실상부한 죽음의 증거가 확보된 셈이다. 우리는 아르센 뤼팽이 왜 여자를 살해한 것처럼 꾸미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위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사랑에 빠졌고,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말았으면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의향이 있었고, 심지어 남의 시체를 도둑질해다가 자기 자신과 마드모아젤 드 생-베랑의 역할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그래야 우선 그 자신이 조용히 지낼 수 있으니까. 누구도 더는 그를 추적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진실에 의혹을 던지지 않을 테니까.

글쎄......과연 아무도 그럴 뜻이 없을까? 적어도 세 사람만큼은 뭔가 의심을 포기하지 않을 일이다. 우선 오기로 되어 있던 가니마르가 있고, 셜록 홈스 역시 영불해협을 건널 예정이었으며, 현장에는 또 내가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삼중의 위협이 아직도 엄존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이 삼총사의 처단에 즉각 나서는데, 가니마르와 셜록 홈스는 납치를 하고, 나는 브래두를 시켜 습격을 하고 만다.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한 가지 남는 의문점이 있다. 도대체 뤼팽은 왜 그 에기유 크뢰즈의 문서에 그토록 집착을 했던 걸까? 내게서 그것을 탈취해가면서도 굳이 내 기억 속에서까지 그 쪽지에 적힌 다섯 줄의 암호문을 지워 없애려고는 하지 않은 이유는 또 뭘까? 혹시 종이 자체의 질이라든가 그밖의 다른 단서가 내게 뭔가 특별한 정보를 제공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이상이 앙브뤼메지 사건의 진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수사에서는 물론, 지금까지 해명한 과정에서도 어디까지나 가설(假說)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지 않고 만약 뤼팽에 대항해서 어떤 확실한 증거나 공고한 사실을 기대한다면, 필경 한도 끝도 없는 기대 속에 시간낭비만 하든지, 뤼팽이 조작한 대로 이끌려가다가 애당초 겨냥한 바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귀착하고야 말 것이다.

물론 나는 여하한 사실도 있는 그대로만 온전히 밝혀진다면 나의 가설이 모든 면에서 적중했다는 것이 증명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아버지가 납치되었기 때문에 아르센 뤼팽에게 한순간 무릎을 꿇었던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급기야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 보였다. 그가 확신하는 사건의 진실이 워낙에 근사하고 흥미로웠기에, 그것을 증명하는 자신의 논리가 너무도 완벽했기에, 그는 그 모든 것을 사장(死藏)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온 세상이 그만 믿고, 진실이 밝혀지기를 학수고대하는지라, 결국 입을 열고 만 것이다.

한편, 기사가 나간 바로 그 날 저녁, 석간신문들은 일제히 무슈 보트를레 영감의 납치소식을 보도했다. 오후 세 시쯤 되어서 셰르부르로부터 날아온 전보를 통해서 보트를레가 이미 그 사실을 접한 뒤였다.

 

5. 발자취를 따라서

 

6. 역사 속에 숨겨진 비밀

 

7. 에기유 논고

좋습니다. 어차피 이제 책은 불완전한 상태요! 두 장이 찢겨나갔으니......하지만 당신은 그 누락된 부분까지 읽었다고 했소. 그렇죠, 마담?”

.”

그럼 내용도 알고 있겠죠?”

, 알아요.”

그걸 우리 앞에 공개해줄 수 있겠죠?”

물론이죠! 워낙에 호기심을 품고 정독을 한 책이라......게다가 그 두 장의 내용이 저로선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 그럼 어서 말해보십시오. 어서요, 마담! 지금부터 공개하는 내용은 정말로 중요한 겁니다. 자 자, 어서 시간 낭비 그만 하고, 속 시원히 털어놓아보세요! 에기유 크뢰즈가......”

, 그거 간단해요! 에기유 크뢰즈는 말이죠......”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하인이 들어서더니 이러는 거였다.

마담에게 편지입니다.”

 

입 닥치시오......

여차하면 당신 아들은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이오......

 

제발 부탁입니다, 마담, 진정하십시오......우리가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전혀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입을 열까? 적어도 보르를레는 그렇게 믿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의 잇새로 뭔가가 나올 듯했다. 그러나 또다시 문이 활짝 열리며, 이번엔 하녀가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하녀는 완전히 혼비백산한 표정이엇다.

마담! 무슈 조르주가......무슈 조르주가, 그만......”

 

그때였다. 보트를레는 슬그머니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더니 권총 손잡이를 움켜쥐고 손가락은 방아를 손에 단단히 건채, 잔뜩 긴장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어느 한순간 후닥닥 권총을 꺼내서 마시방을 향해서 다짜고짜 발사하는 것이었다!

 

좋아, 이제 꼼짝 마......기껏 방금 전에야 눈치챈 모양이로군......그렇게도 날 못 알아보겠던가? 그러고 보니, 내가 마시방의 얼굴을 너무 잘 흉내낸 모양이지?”

아닌게 아니라, 마시방, 아니 아르센 뤼팽은 좀 전의 꾸부정한 학자와는 전혀 달리 두 다리를 떡 버티고 꼿꼿이 선 채, 세 명의 겁에 질린 하인들과 혼비백산한 표정의 남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지도르, 자네 또 실수한 거야! 그렇게 내가 뤼팽이라고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저들이 내게 부담 없이 달려들었을 게 아닌가! 저들을 좀 보게......저런 덩치들 앞에서 내가 어찌 되었겠는가? 맙소사, 14라니......”

 

날 용서하시겠습니까, 마담? 워낙에 험한 삶을 살다보니, 때로는 누구보다 나 자신부터 얼굴을 붉힐 흉악한 짓을 종종 저지르게 되는구려......하지만 아드님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자그마한 주사를 한 대 놓았을 뿐이거든요. 아주 작은 거 한 대......아까 어른들이 애 하나 놓고 호들갑을 떨 때 팔에다가 살짝 놔주었죠. 앞으로 길어야 한 시간 후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어쨌든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입조심만큼은 해주셔야 하겠는걸요......”

그는 다시 한번 깊숙이 인사를 하며 무슈 드 벨린의 호의와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지팡이를 집어들고 궐련에 불을 붙인 뒤, 남작에게도 한 대 권한 다음, 뤼팽은 모자챙을 멋지게 한번 쓰다듬으면서 보트를레를 향해 잔뜩 어른스런 어조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잘 있게, 애송이!”

그리고는 담배 연기를 하인들 얼굴 위로 훅 뿜으면서 느긋하게 자리를 떴다......

보트를레는 그 상태대로 잠시 기다렸다. 아까보다 많이 안정된 마담 드 빌몽은 아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호소해볼 요량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 동안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보트를레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성으로 가득 찬 그녀의 머리 속에서 에기유 크뢰즈의 비밀일랑은, 저 아득한 과거의 암흑 속에 빠져버린 가느다란 바늘보다 더욱 찾아내기 힘든 무엇으로 영원히 묻혀버린 셈이었다.

 

어때, 잘 맞아떨어졌지? 자네의 늙은 친구가 그만하면 줄타기 묘기를 제대로 한 것 아닌가? 이제는 정말 단념하겠지? 아 참, 지금쯤은 그 비명 문학 아카데미 회원인가 뭔가 하는 마시방이라는 작자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겠구만......그야 당연히 실존 인물이지! 말만 잘 들으면 직접 대면케 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네의 권총을 돌려줘야겠지......, 장전이 되어 있냐구?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모두 다섯 발이 남았어......물론 나를 골로 가게 만들기엔 단 한 발로도 충분하겠지......어라, 그대로 호주머니 속에 넣는구만......그래 잘 생각했어......그때처럼 허튼 짓 하느니, 지금이 훨씬 낫군그래......정말 한심한 짓이었다구! 하기야 아직 나이도 한참 어린 데다, 덮어놓고 후딱 이런 생각부터 들었을 테지......저 영험하신 뤼팽한테 또 당했구나! 한데 그가 코앞에 보란 듯이 서 있어......에라 모르겠다, 당기고 보자......안 그런가? 그래 좋아......그 정도쯤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지! 그래서 말이네만 내 100마력짜리 막강한 자동차에 탑승해보지 않겠나?”

그리고는 갑자기 입술에 손을 대고 휘파람을 냅다 부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 늙은 마시방의 근엄한 외모와 뤼팽의 짐짓 과장하는 장난기 섞인 허세가 한데 뒤섞여 그렇게 코믹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보트를레는 자기도 모르게 허탈한 실소를 내뱉었다.

 

8. 케사르에서 뤼팽까지

 

9. 열려라, 비밀의 문이여!

 

10. 제왕(諸王)의 보물

그래, 그녀는 잊어줄 거야!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한 마당에 그녀는 기꺼이 잊어주고야 말 거라구! 저 난공불락의 기암성도, 그 눈부신 보물도, 모든 권력도, 자존심도 모두모두 희생한 나를......그래, 정녕 나는 모든 걸 버렸다네......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되고 싶지가 않아......오로지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밖에는......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정직한 남자 말이네......, 대체 정직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얼까? 최소한 그 무엇보다도 수치스럽지 않게 사는 걸 거야......”

 

, 보트를레......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맛보았던 온갖 강렬한 즐거움들도 그녀가 나를 바라볼 때 느끼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세......! 마음이 자꾸만 약해지는 것 같아......울고 싶은 기분마저 드는걸......”

정말로 우는 걸까? 아닌게 아니라, 그의 눈망울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보트를레는 느꼈다. 천하의 아르센 뤼팽의 눈에 눈물이라니! 사랑의 눈물이라니......

 

레이몽드!......레이몽드!”

뤼팽은 쓰러진 여인 앞으로 와락 달려들어, 품 안에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

죽지 마......”

잠시 끔찍한 적막이 흘렀다.

 

......정말이지 처절한 광경이었다! 레이몽드를 향한 뤼팽의 극진한 사랑을, 그 여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피워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보트를레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밤은 어느새 다가와 이 처참한 전쟁터를 어둠의 수의로 덮어주고 있었다. 꽁꽁 묶이고 재갈까지 물려진 세 명의 영국인은 키 큰 잡초더미 속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아련한 노래 소리가 초원의 광막한 침묵 한 켠을 어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곳 뇌빌레트의 주민들이었다.

뤼팽은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잠시 가만히 서서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단조로운 가락은, 레이몽드와 함께 평화롭게 살려고 했던 이 마을 농가의 분위기를 더없이 가슴 아프게 와닿게 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죽어간 가엾은 연인, 이제는 저 영원한 잠 속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나고 만 레이몽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 주민들이 방책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뤼팽은 그 강한 팔로 이 세상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시신을 번쩍 들어 안아 어깨에 들쳐업었다.

가요, 빅투아르......”

그래......그만 가자꾸나, 얘야......”

잘 있게, 보트를레......”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너무도 소중하면서, 또한 끔찍한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말없이 황망하게 뒤를 따르는 노파를 동반한 채, 그렇게 그는 해안 쪽으로 걸어가, 곧장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해설 : 저자의 '추리소설론'

*기암성을 발표한 해인 190971일자 피가로지에 모리스 르블랑 자신이 추리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의 입장을 짤막하게 소개한 내용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의 코난 도일과 자신의 작품세계의 차이점-추리와 논리성에 치중한 영국 소설과 다양한 감성과 상상력의 변덕을 한껏 받아들인 자신의 작품들의 다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이 자리를 빌려서 독자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만약 내가 붉은 쪽지를 네 개가 아닌 여덟 개로 상상을 해서 네 차례의 범행을 더 꾸며댔다면 아마 여러분은 지금까지 위의 이야기를 따라올 때와 같은 호기심과 흥미를, 그 터무니없는 결말에까지 고스란히 가져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뭔가 애매모호해서 여운을 남기는 악당들의 활극이 그토록 우리의 열정을 끌어당기는 것이고,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투성이의 사건들이 우리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는 것이리라.

이를 두고 과연 건전하지 못한 호기심이라고 타박을 줘야 할까? 물론 일상의 나날에 진짜로 일어나는 범죄행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구의 세계에서라면 얼마든지 안전하고 바람직한 관심과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거칠고 끔찍한 사건을 다룬 이야기를 기꺼이 현실처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정교한 추리의 유희에 흠뻑 빠져듦으로써 현실의 지난한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하고자 하는 내면 깊숙한 욕구 때문이다 예컨대 추리소설의 첫 장을 열면서부터 독자는 저자의 공범이 되어야만 하고, 또 사실이 그렇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독자를 아주, 아주 꼬불꼬불한 길을 통해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의 결말로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 천재적인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충(黃金蟲)이라든지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을 한번 떠올려보시라. 아니면 위대한 발자크의 보트랭(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인물/역주)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범죄의 달인이자, 나폴레옹처럼 무지막지한 인물을 말이다. 분명 거장의 솜씨가 틀림없는 그 책들에 사용된 작가의 기법은 그러나 가보리오나 코난 도일과 같은 대중작가가 사용한 기법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다른 것은 재능의 정도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에 대해서 대중은 대단히 너그러운 편이다.

작가에게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쓰는 일은 대단히 고차원적인 오락이자, 자신의 어떤 능력들을 직접 실험해볼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들 사람들이 좋아하는 추리와 분석 능력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유행하는 일부 탐정의 거의 수학적인 추론이라든가 아주 정교하게 도출된 추리의 엄격한 방법들은 소위 논점선취의 오류(논증해야 할 것을 도리어 전제로 삼는 오류/역주)’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진정 현실적인 요인들은 애써 외면한 채 조작되고 취사선택된 몇 가지 사실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추리작가로서의 진정한 오락과 재능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알렉상드르 뒤마와 조르주 상드의 놀랄 만한 작품들 이후, 너무도 푸대접을 받아온 상상력의 아무 거리낌없고 자유분방한 활용에 있는 것이다(19세기 말까지 프랑스 소설의 주류는 철저한 실증주의에 입각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였다. 르블랑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그와 같은 흐름과 다시금 낭만주의적 상상력에 눈을 돌리는 풍토를 말하고 있다/역주). 이제 그 고삐 풀린 상상력은 화려한 재기의 용트림을 하고 있으며, 오늘날 수많은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 매력에 적극 호소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각해보라, 상상을 한다는 것의 기막힌 즐거움을! 상상력의 변덕스런 흥취에 마음껏 젖어들고, 애매한 꿈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가는 유령들과 맘껏 노니는 즐거움을 말이다!......

다만, 그냥 상상력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의 작품, 즉 문학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려면 단순히 꿈구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독특한 에피소드들을 골라 적절한 형태를 부여하고, 전체적인 구조에 신경을 쓰는 등 넘어야 할 관문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가능한 한 약간의 경쾌함을 가미해야 한다는 점이다. 될수록 기발한 이야깃거리를 풍부히 하고, 줄거리의 복잡한 미로 가운데에도 가끔씩 긴장을 완화하고 기분을 풀어줄 아이러니의 숨결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줌으로써 작가이든 독자이든 어디까지나 즐기면서 은근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기암성은 물론 지금까지 아르센 뤼팽의 모험담을 써오면서 내가 염두에 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혹자는 이와 같은 소설들이 부도덕한 문학이라고 몰아 붙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말씀이다. 세상에 재미나는 도둑 이야기를 읽었다고 해서 실제로 도둑질을 시도할 바보는 없으며, 끔찍한 사건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고 해서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정신병자는 없다. 오히려 추리 소설의 영웅들은 악행을 부추기기보다는, 활달한 모험심과 박력을 향한 취향, 대범한 기상과 냉철한 지성을 우리에게 심어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 위대한 괴도의 영혼을 좀더 심도 있게 파고들어서, 그가 가진 감정들, 행동의 동기들, 온갖 열망과 고뇌들, 그리고 격렬한 취향과 위대한 꿈들을 낱낱이 독자 여러분에게 풀어 보여줄 예정이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그에 대한 작가로서의 소견을 아르센 뤼팽, 박력교수(迫力敎授)라는 제목쯤으로 엮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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