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아르센 뤼팽의 스무 살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도의 젊은 시절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이제 전집의 절반을 읽어온 나에게 늘 궁금한 부분이었다. 아마 모리스 르블랑 조차도 생각지도 않았을 부분이었겠지만, 시리즈가 오래 오래 사랑받는 덕분에 뤼팽의 과거 이야기가 한 편의 책으로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히어로물의 프리퀄시리즈의 원조라고 할까? 배트맨 비긴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를 애정하는 나로서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프리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분하며 보았다.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는 방법에는 영웅의 시작부터 그려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현재 활약하고 있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후, 이 영웅의 과거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현재 영웅의 모습을 보여 준 후 과거에 대해 한껏 기대감을 고조시킨 후, 프리퀄을 짜짠하고 보여주는 쪽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시선을 끄는 방식일 것이다. 재미도 2배인 만큼,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도 2배일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시리즈 말미에 다다르면 「백작부인의 복수」를 통해 한번더 백작부인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되니 벌써 기대가 되었다.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 중 최고 수준의 걸작에 속한다. 당시 유명한 샹송 가수이자 인기절정의 배우였던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 1888-1972)를 모델로 한 삽화 속 젊은 아르센 뤼팽의 모습은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 속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들어가는 구도가 「기암성」에 필적하는 심각한 분위기이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른 아르센 뤼팽이 최초로 겪는 진지한 모험담인 만큼 여러 모로 괴도로서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즉 이 모험을 계기로 우리의 주인공은 부하를 거느릴 필요성이라든지 싸움에 임해서 적을 판단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 행동에 뛰어드는 과단성과 냉철한 정신력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풋내기 청년 라울에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으로의 입문의례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해설은 전편의 가니마르 분석에 이어서 아르센 뤼팽의 최대 맞수로 일컬어지는 셜록 홈스에 관한 고찰로서 그가 뤼팽 시리즈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집중 조명한다.

 

이것은 아르센 뤼팽이 최초로 경험한 모험담으로서,

그 자신이 수차례에 걸쳐서 단호하게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무엇보다 먼저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되었을 이야기이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직은 아닐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나 사이에는 미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어. 그러니 좀더 두고 보자구.”

사실 이 모험담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결판이 나기까지 무려 4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스무 살 난 풋내기 청년과 저 칼리오스트로

가문(家門)의 여식을 휘어잡았던 끔찍한 사랑의 결투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게 되었다.

 

1. 스무 살의 아르센 뤼팽

클라리스 데티그는 그보다 약간 손아래의 처녀였다. 방년(芳年) 18!......육감적인 입술에다 꿈을 꾸는 듯한 눈망울......장밋빛과 황금빛으로 아스라이 빛나는 화사하고도 상큼한 안색......그리고 이곳 코 지방의 시골길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소녀들처럼 파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머리빛깔과 우아한 분위기, 매력 넘치는 저 자태!......

 

사실 라울은 여자를 밝히는 사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본능과 욕망의 과도한 에너지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나, 거기에 탐닉하기에는 절제와 우아함을 지향하는 심성이 워낙 단단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유혹에 저항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 법. 배짱과 정욕, 애정과 정복하려는 욕망이 펄펄 피가 끓는 젊은이를 이내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라울은 더 이상 공연한 망설임으로 지체하지 않고, 후닥닥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두 남녀는 석 달 전 클라리스가 남프랑스 지방의 기숙사 친구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처음 만났고, 그때부터 줄곧 서로를 사랑해왔다.

두 사람은 즉각적으로 서로 맺어져 있음을 느꼈는데, 남자에게는 그것이 세상 더없는 감미로운 기분이었고, 여자에게는 상대에게 구속을 당하면서도 갈수록 그것이 점점 더 소중해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라울은 그녀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투성이의 신비스런 남자였다. 더군다나 다소 경박스러운 태도와 짓궂은 장난기, 그리고 이따금 어두워 보이는 성질을 불쑥불쑥 드러내서 여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지! 얼마나 호쾌한지! 약동하는 젊음의 열정과 활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모든 단점들은 그만 어떤 성향이 도가 지나쳐 불거져나온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악덕(惡德)마저도 그가 가지고 있는 미덕(美德)이 아직은 설익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뒤, 성격이 음울하고 맹신적이며 돈과 명성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소작인들한테도 경원(敬遠)의 대상인 편부(偏父) 슬하에서 자라느라 클라리스는 그리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처 소개도 되지 않은 라울이 덥석 딸을 달라고 나서자, 남작은 이 배경도 없고 이렇다 할 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풋내기 청년에게 어찌나 화를 버럭 내던지, 젊은이가 야수를 길들이는 사람처럼 의연한 눈빛으로 똑바로 쏘아보지만 않았던들,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말끔한 얼굴에다 그냥 채찍질을 가할 뻔했었다.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상큼한 바람이 평야지대를 스치고 다가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면, 담으로 에워싸인 광대한 과수원 너머, 햇살을 받아 눈부신 유채(油菜)의 평야를 휘 둘러보던 눈길은 우측 방향으로 페캉까지 이어진 백색(白色)의 깎아지른 절벽지대에 가 닿았고, 좌측으로는 거대한 기암괴석과 포르트 다발을 아우르는 (기암성p.267 참조/역주) 에트르타 만()과 마주쳤다.


2. 1788년생, 조제핀 발사모

이처럼 황당무계하게 보이는 인생 역전과 그와 관련한 충격적인 폭로전은 기껏해야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누구도 따로 나서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근사한 웅변이라도 시도해 기발한 주장 하나 제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더도 덜도 아닌 사실들만이 차근차근 공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제각각 가공할 파괴력을 갖춘 증거들이었으며, 저토록 젊디젊은 여자에게서 100년도 넘는 과거의 기억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기절초풍할 만한 진술들이었다!


3. 마녀 재판

그제서야 보마냥의 음험한 계략을 눈치챈 라울은 생각했다.

결국 죽이겠다는 거야......영국 선박이라는 건 있지도 않아. 그냥 두 개의 보트만 있을 뿐이지. 그중 하나에는 구멍이 나 있을 테고, 결국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가라앉게 되어 있는 거야.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감쪽같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라구......’

 

역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사형을 언도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고,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처리한 것에 분명 흐뭇해하는 분위기였다. 뭐 하나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었다. 사소한 일들이나 서로 의논하던 소규모 친목 모임을 피하고 나서는 태도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인근 역에서 부랴부랴 저녁 열차를 잡아타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빠져나간 뒤, 남은 사람은 보마냥과 두 사촌뿐이었다.

결국 상황은, 라울이 보기에, 무척 황당한 양상으로 귀결된 셈이었다. 한 여인의 목숨이 그토록 임의적으로 저울질 당한 데다, 기어이 끔찍한 계략에 의해서 접수되고 만 이 극적(劇的)인 회동은, 마치 제 시간도 안 되어 끝이 난 연극 한 편이나 한창 심리가 진행 중에 덥석 판결이 떨어진 엉터리 소송처럼, 갑작스럽고 싱겁게 끝이 나버린 것이다.

이처럼 얼버무리기 식의 속임수 한마당을 통해서 라울 당드레지는 배배 꼬이고 엉큼하기 그지없는 보마냥이라는 자의 성격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광적인 데다 요지부동의 고집, 빗나간 애증과 병든 자만심에 삭을 대로 삭은 사내는 처음부터 죽음을 마음에 둔 상태였다. 하지만 내면에는 또한 비굴함과 위선, 소심함과 불안이 꿈틀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양심과 정의 앞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바로 가증스런 속임수를 동원해 백지 위임장이나 다름없는 음험한 해결을 모색한다는 안()이다.


4. 보트가 가라앉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활달함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세 번째로 쉬었을 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 위에 여자를 눕혔는데, 언뜻 내려다보니, 지금까지 대차게 내질러온 농담과 지칠 줄 모르는 활기에 여자의 얼굴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는 아예 그 매력적인 몸뚱어리를 가슴에 꼭 품은 채 유연한 몸매를 손길에 느껴가면서 남은 등반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보마냥이 언급했고, 세밀화에도 있다는 검은 반점에 대한 생각이 문득 머리 속에 떠올랐다. 방금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구해준 이 여인의 가슴 위에 정녕 그와 같은 표식이 있는 것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과연 떨쳐낼 수 있을 것인가? 남자는 천천히 여자의 옷섶을 벌려보았다. 바로 오른쪽, 옛날 바람둥이 여인네들이 일부러 붙이고 다녔다는 애교점과 흡사한 까만 점 하나가 백옥 같은 피부 위에 앙증맞게 자리를 잡고 앉아 아련한 숨결 따라서 춤을 추고 있었다.


5. 일곱 개의 가지 중 하나

자고로 라울만한 나이의 젊은이에게 이 같은 마음의 변덕과 불성실함이란 저저로 손쉽게 자체 소화가 되는 법이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별개의 두 존재로 분리되어, 하나가 미래를 함께하기로 한 사랑을 덤덤하게 유지해나가면서도, 다른 하나는 전혀 낯선 열정에 온통 달아올라 광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조차 가능하기 마련이다. 클라리스의 이미지가 이따금 작은 성당의 흔들리는 촛불 사이에서 기도를 올릴 때 어렴풋하고 고통스럽게 떠오르는 신상(神像)과도 같다면,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모습은 모든 이의 칭송을 요구하면서 그 누구도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먹는 것을 결코 용서치 않는 혹독하고 질투심 많은 유일신 그 자체였다.

라울 당드레지-장래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영광스럽게 빛내줄 이 친구를 당분간은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는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또래의 젊은이에 비해 시간부터가 좀 모자라는 편이었다. 비록 야망에 불타는 젊은이였지만, 아직은 어느 분야, 어떤 수단을 통해서 부와 권력과 명예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캄캄한 상황이었고, 언제 닥칠지 모를 운명의 부름에 즉각 화답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만 할 뿐이었다. 지성, 기지(機智), 의지력, 육체적 유연성과 근력, 민첩성, 지구력 등 모든 분야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극단까지 추구했고, 노력을 더함에 따라서 그 한계가 차츰차츰 커진다는 사실에 자못 놀라워했다.

그와 더불어, 또한 문제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에게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고아로 자란 데다, 친구도, 친척도, 직업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연명해왔다. 어떻게? 그 점에 관해서는 자기 스스로도 시원찮은 해명을 할 뿐이며, 굳이 구체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누구나 제 능력대로 알아서 사는 법이다.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필요화 취향을 충족시켜가면 그뿐......

행운은 나의 편이다! , 전진하는 거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 왠지 그게 대단할 거라는 느낌인걸!’

이를테면 그러한 생각으로 인생 행로를 걸어나아가던 중, 덜컥 조제핀 발사모라는 여인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 즉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축적해온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야 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6. 경찰과 군경

여자는 거울을 빼들고 오랫동안 자신의 지치고 늙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가느다란 호리병에서 액체 몇 방울을 거울 표면에 떨군 다음, 비단 천으로 쓱싹 닦아내고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답답한 적막 속에 모든 사고와 의지가 총동원된 듯 한 여자의 눈빛만이 10분에서 15분가량 강렬하고도 힘겨운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난데없는 미소가 마치 겨울 햇살처럼 수줍은 듯 주저주저 피어났다. 잠시 후, 그 미소는 좀 더 대범해졌고, 라울이 놀란 눈으로 줄곧 지켜보는 가운데, 세세한 변화들을 얼굴 가득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우선 웃고 있는 입술 끄트머리가 훨씬 더 치켜 올라갔다. 피부에 홍조도 아스라이 감돌았고 살결 자체에 탱탱한 탄력이 붙는 듯했다. 양 볼과 턱은 예전만한 순수한 선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고......한마디로 조제핀 발사모의 아름답고 다정다감한 얼굴 전체가 화사한 매력으로 한결 밝아지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기적이 완성된 것!

 

내가 도둑이죠? 그게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거죠? 나더러 도둑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소.”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뭐죠?”

갑자기 거칠게 외면하려는 남자를 백작부인은 어깻죽지를 덥석 붙들었고, 위압적인 반말투로 냅다 내질렀다.

젊은이, 자넨 뭐냐고 물었어! 도대체 자넨 뭐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도 패를 몽땅 펴 보아야 하는 거야. 자네 누구야?”

내 이름은 라울 당드레지요......”

헛소리! 자넨 아르센 뤼팽이야. 자네 아버지는 테오프라스트 뤼팽이지. 복싱 및 사바트(19세기 중반 창시된 프랑스 고유의 상류계층 무술. 현란한 발차기가 주무기이다/역주) 교사직(敎師職)과 더불어 그보다는 좀더 벌이가 되는 사기꾼이라는 직업도 겸임하다가, 끝내는 붙잡혀 유죄 판결을 받고 미국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저 세상으로 떠났었지. 그런가 하면 자네 어머니는 도로 처녀 때 이름을 달고, 머나먼 사촌뻘인 드뢰-수비즈 공작 댁에서 가난한 친척으로 얹혀 살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공작부인께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보물 하나가 분실된 걸 발견했지. 다름 아닌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의 저 유명한 목걸이 말이야. 온갖 수사를 시도했지만, 결국 그 엄청난 대담성과 악마 같은 재주를 발휘해 일궈낸 도둑질의 주인공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누구 짓인지 잘 알고 있어. 바로 자네였단 말이거든. 그때 나이 여섯 살이었지.”

라울은 노기(怒氣)로 창백해진 얼굴에 턱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듣고만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어머니는 모욕받고 불행했었소. 난 그걸 뛰어넘고 싶었고......”

도둑질을 통해서 말인가?”

그때 나이 고작 여섯 살이었소.”

오늘날에는 스무 살이지. 자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이야. 자넨 이제 건장하고 지적이며,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이야.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나는 일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남의 호주머니 속에서 하는 일?”


7. 카푸아의 환락

한편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봉했다. 딱 한번, 그런 주제로 약간의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있긴 있었다. 여자의 젊고 아리따운 외모를 두고, 라울이 불멸의 기적이라며 듣기 좋은 말을 했을 때, 여자는 냉정하게 이런 대꾸를 했다.

기적이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보죠. 우린 하루에 200리를 주파한 바 있어요......당신은 그게 무슨 기적이라도 되듯 호들갑을 떨었고요.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았다면, 그 엄청난 거리를 달린 건 말 두 필이 아니라 네 필이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을 겁니다. 레오나르가 두드빌의 농가 안마당에서 미리 대기 중인 다른 말 두 필로 원래의 말들을 갈아치웠거든요.” 

 

8. 반전

내 말 잘 들어요, 조진. 나는 지금 엄청난 사건의 한복판에 제일 꼴찌로 뛰어든 입장입니다. 게다가 이미 당신과 보마냥이 거느리는 두 조직이 떡 버티고 있는데 말이죠. 둘 다 당연히 제3의 도둑으로 참여하게 된 나를 달가워할 리 없겠죠......따라서 나로서도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그대로 얼뜨기 취급이나 당하고 있게 될 게 뻔해요. 그러니 내 나름대로 우리 공동의 적인 보마냥을 요리할 수 있게 내버려두시구려. 방금 전에 내 연인 조제핀 발사모를 보기 좋게 요리했듯이 말이오. 내 처신이 그리 서툰 편은 아니었다는 걸 당신도 부인하진 못할 것이오......내게도 어느 정도 수완과 대책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오......안 그렇소?”

 

은근히 여자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또다시 슬쩍 건드리는 투였다. 여자는 얼른 팔을 놓았고,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 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라울의 저 깊은 내면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정열적으로 되돌려주고 있는 이 우아한 얼굴의 여인을 적어도 가장 냉혹한 적()으로는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곰곰이 드는 것이었다.

 

9. 추락

버들가지로 엮은 안락의자에 조진이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에 대해서 가졌던 극렬한 원망과 거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온몸을 뒤흔드는 욕정과 사랑하는 마음만이 샘처럼 솟구쳤다. 아니, 과연 일말의 원망이나 거부감이 들기는 들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그녀를 품안 가득 안고 싶다는 가없는 욕망 속으로 순식간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적이라고? 도둑년? 혹시나 흉악한 살인자? 천만의 말씀! 단지 한 여자, 그 무엇이기 이전에 단순한 하나의 여성일 뿐이다. 게다가 보통 아름다운 여인인가!

 

라울이 손을 내밀려는 찰나, 여자도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일순 얼굴에 홍조를 띠었고, 눈꺼풀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그러면서 긴 갈색 속눈썹 사이로 차마 상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눈빛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엇다. 아마 멋모르는 어린 소녀라 한들, 지금 이 여인만큼이나 푹푹하고도 순박하게 소심해하는 태도, 교태나 허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10. 뭉개진 손

라울은 짤막하게 잘라 말했다.

아듀, 조진.”

여자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아듀라뇨? ‘또 봅시다그래야죠!”

아니, ‘아듀가 맞아......”

 

거짓말. 당신은 분명 여자의 비명 소시를 듣고 있었어. 몰레브리에 숲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행동에 옮긴 것은 레오나르이지만, 애초에 폭력을 행사하려는 악의(惡意)는 조진 당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지. 몽마르트르의 작은 집으로 부하를 쳐들어가게 한 것도, 또 저항할 시 브리지트 루슬랭을 살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린 것도 바로 당신이었어. 그러고 보니 옛날에 보마냥이 먹을 약에다 독을 탄 것도 당신이었고 말이야. 그 이전에 보마냥의 친구인 드니 생테비르와 조르주 디노발을 살해한 것도 물론 당신이겠지.”

 

여자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밀짚 모자로 만들어진 그늘은 여인의 그윽한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사납게 할퀴어대는 애인의 독설에도 전혀 긁힌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사람의 눈길을 호렸다.

라울은 전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육감적으로 보이는 이 여자......과연 이 여자를 오늘 훌훌 떠나고도 바로 내일부터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을지가 의문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름다운 건 거짓이 아니에요, 라울. 당신은 아마 다시 내게로 돌아올 거예요. 내가 아름다운 건 다 당신을 위해서이니까요.”

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아뇨. 당신은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농샬랑트호()는 늘 가까운 곳에 머물 거예요. 내일 거기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다시는 거기 안 돌아갈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은 또다시 무릎이라도 꿇을 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죠? 왜 안색이 그토록 창백해요?”

라울은 무사히 이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상태로 줄행랑을 쳐버리는 것 말이다.

마침내 붙잡는 조진의 손을 밀쳐내고 라울을 황급히 자리를 떴다......

 


11. 낡은 등대

사랑하는 클라리스, 나를 용서해주오. 나는 당신한테 정말 몹쓸 인간처럼 행동했소. 우리 함께 좀더 나은 미래를 희망해봅시다. 그리고 당신의 넓은 아량으로 나를 바라봐주오. 클라리스, 다시 용서를 비오, 용서를......

라울

또 다른 여자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자존심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 같은 이 편지를 여자는 마지막까지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안타깝게 휘청거리면서 눈으로는 라울의 시선을 더듬어 찾았다. 순간 라울은 클라리스가 이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부터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조제핀 발사모에 대한 증오심밖에는 가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실감했다.

 


12. 광녀와 천재

훗날 아르센 뤼팽이 조제핀 발사모와 더불어 체험한 엄청난 모험 중 이 일화를 소개해 주었을 때, 그는 연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푸하하하하......당시에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웃을 수밖에 없다네! 내 기억으로는 즉석에서 고 앙증맞은 앙트르샤를 선보인 게 그 대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 이후로는 아주 힘겨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마다 종종 써먹은 동작이지만 말이야(수정 마개p.233, 서른 개의 관p. 272, p.317, p.349 등에서 볼 수 있다/역주)...... 사실 그때 그 싸움도 꽤나 어렵게 승리한 거거든......진짜로 난 기분이 날아갈 듯했었지. 클라리스는 무사히 빠져나갔고, 모든 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지. 그리고 우리 사이의 계약을 상기시키려는 듯,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나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조제핀 발사모의 면상에다가 그만 조신하니 못하게 담배 연기를 후~욱하고 내뿜어버렸다네! 여자가 이렇게 중얼거리더구만, ‘불한당 같으니라구!’......거기다 대고 내가 마치 총알처럼 응수한 말발은 글자 그대로 상스런 욕지거리였다네. , 미안하지만 더는 묻지 말게......보통 거친 욕이 아니라 아주 장난기를 듬뿍 처발라서 해대줬다니까! 에 또, 그리고......그리고 나선 말일세......근데 그 여자가 나한테 불어넣는 극단적이고 모순된 감정들을 일일이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 난 그런 문제로 심리학 공부까지 해서 그녀한테 깔끔한 신사처럼 처신했다고 자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일세. 아무튼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주 혹독하게 증오한 것만은 사실이야. 한데, 그녀가 클라리스를 해치려고 한 다음부터는 내 혐오감이 한도 끝도없이 증폭되질 않겠나! 심지어 그 고혹적인 미모의 가면도 더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그 너머에 도사리고있을 진짜 얼굴만 자꾸 부대끼더라니까! 내가 그 자리에서 발뒤꿈치로 핑그르르 돌며 냅다 욕지거리를 쏴댄 건 바로 그렇게 갑자기 눈에 들어온 육식 짐승 같은 몰골을 향해서였단 말일세!......”

 


13. 수도사의 금고

남작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라울의 대답은 이랬다.

조제핀 발사모의 복수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죽었는데......”

설사 죽었다 해도 그녀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것이구요.”

 

 


14. 악마 같은 존재

한데 말이야......그저 약간의 감정이 일었다고나 할까?......겨우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그게 당신이 보인 반응의 전부였어......자신의 지시에 의해서 한 처녀가 목숨을 잃었다는 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이야! 남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 따위는 당신에게 별일도 아니지. 그 여자는 이제 겨우 스무 살, 앞길이 창창한 상태였지......미모와 싱싱한 젊음......그 모든 것을 당신은 마치 개암열매를 으스러뜨리듯 몽땅 압살해버렸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더구만. , 물론 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인 건 아니니까......사실상 당신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어. 보마냥이 당신을 두고 악마 같은 존재라고 부르던 게 생각나더군. 그때는 다분히 귀에 거슬리는 호칭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 듯해. 당신 안에는 어딘지 지옥 같은 부분이 있거든. ”

 

그는 가위의 뾰족한 끝을 앞으로 향한 채 그대로 어중간히 쥐고 있었는데, 문득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일랑 아예 못 쓰게 만드는 것, 그 살점을 가차 없이 베어서, 사악한 요정이 더 이상 만행을 일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 한복판을 가로질러 깊숙한 십자형 상처를 만들어 놓는다면,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퉁퉁하게 부은 피부를 통해서 언제나 드러나 있다면, 본인한테는 그야말로 더없이 공정한 형벌인 데다, 타인에게는 유용한 접근 금지 표시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며, 숱한 범죄행각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렇게 할 권리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한때 너무도 사랑했던 여인이 아니던가......

라울은 한동안 꼼짝 않고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없는 슬픔이 물밀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싸움이라면 지쳤다. 씁쓸한 기분과 역겨운 느낌만이 온몸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경험해보았던 엄청난 사랑이었는데......그토록 푸근한 추억과 신선한 감흥에 젖어들게 해주던 사랑의 감정이 앞으로는 원한과 증오만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이제 입가에는 환별의 냉소적인 주름을, 영혼 속에는 쇠락(衰落)의 암울한 낙인만으로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야 하리라!



에필로그

라울은 클라리스에게 한 약속들 가운데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켜주었는데, 여자가 몹시도 행복해했던 것이다.

다만 또다른 약속 하나는 그만 지키지를 못했다. 정직한 사람은 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것만큼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훔치거나, 조작하고, 남을 등쳐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아예 피 속 깊이 녹아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밀수꾼이자 소매치기였고, 도둑임과 동시에 강도이면서 모사꾼인 데다, 무엇보다 패거리의 왕초였다. 게다가 소위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조직에 몸담는 동안, 보란 듯이 터득했던 비범한 자질들이야말로 그를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기린아(麒麟兒)로 만들어준 터였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 기상천외하고도 황당무계한 숙명의 기득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고, 대가(大家)가 될 팔자였다.

클라리스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그는 나름대로 일들을 만들어 갔고, 일련의 활극들을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가운데, 자신의 권위는 물론, 실제로 초인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온갖 재능들을 확대시켜나갔다(칼리오스트로의 4대 수수께끼 중 하나인, ‘기암성의 아지트와 프랑스 제왕의 보물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며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다룬 것이 바로 기암성의 스토리이다/역주).

 

그렇게 부부의 행복은 5년간 아무 문제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6년째 되던 해, 클라리스가 그만 분만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남겨진 아들의 이름은 장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다음날 그 아들이 또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라울이 보기에, 누가 감히 오퇴유가()의 아담한 가옥을 침입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랬는지 가늠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이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일에서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엇다. 이미 두 사촌지간의 익사사건부터 칼리오스트로라는 성()을 떠올렸으며, 그 이후로도 도미니크가 독살을 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바 있는 라울로서는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납치작전을 주도했음을 기정사실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을 도둑맞은 비탄의 심경이 사람을 확 바꿔놓기에 이르렀다. 의지할 아내도 아들도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자신을 빨아들이는 위험천만한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즉 순식간에 아르센 뤼팽이 되어버린 것! 이제 더는 점잔을 떨 이유도, 조심스러울 필요도 없었다. 천만에! 스치고 가는 곳곳마다 떠들썩한 소동이요, 도발이요, 대범무쌍(大汎無雙), 화려무비(華麗無比), 호탕하기 그지없는 활약상이 판을 치는 가운데, 벽이면 벽마다 휘갈긴 이름과 텅 빈 금고 안에 어김없이 남겨진 명함 한 장 등등......과연 아르센 뤼팽이었다!

하지만 직접 그 이름으로 움직이든, 여타 즐겨 차용하는 다른 많은 이름들, 예컨대 베르나르 당드레지 백작이라든가(외국에서 사망한 친척 중 한 명의 신분 증명 서류를 잽싸게 빼돌렸다), 오라스 벨몽, 스파르미엔토 대령 혹은 샤르므라스 공작이나 세르닌 공작, 아니면 돈 루이스 페레나에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명들로 활동을 하든, 모든 변신과 가면 속에서 그의 열에 들뜬 두 눈동자는 언제 어디서나 칼리오스트로가()의 여인츨 추적했고, 아들 장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들도 못 찾았고 조제핀 발사모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황당무계한 활극과 초인적인 시련들, 미증유(未曾有)의 승리와 가공할 열정, 그리고 엄청난 야심으로 점철된 아르센 뤼팽의 일생은, 이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위와 같은 곤혹스러운 의문점들이 저절로 답을 얻기 이전까지, 처절하고도 화려하게 전개된다.

요컨대, 지금까지 살펴본 최초의 모험은 무려 4반세기라는 시간을 건너뛰어서 오늘날 자신의 마지막 활약상이라고 기꺼이 내세우는 최후의 모험(1935년작 백작부인의 복수를 암시한다/역주)으로까지 이어질 운명이었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7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 셜록 홈스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원래 모리스 르블랑이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 배경에는 저 영국의 셜록 홈스를 겨냥한 피에르 라피트라는 출판인의 절묘한 기획의도가 밑받침하고 있었다.1)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추리 소설이라는 대중 장르보다는 정통 심리주의 작가로서 성공하기를 원했던 르블랑은 첫 작품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의 폭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작에는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피에르 라피트는 프랑스의 코난 도일(le Conan Doyle francais)’이라는 지극히 상업적인 닉네임을 아예 공식해가면서, 거의 매일 모르시 르블랑을 찾아와 뤼팽을 탈출시키라!’며 들볶았다는 것이다. 소위 정통 심리주의 문학의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는 코난 도일이나 H. G. 웰스 같은 스타일의 황당하고 살벌한 이야기가 유행을 탈 거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결국 그렇게 해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계속되었고, 심지어 셜록 홈스, 한 발 늦다라는 단편을 통해서 아직 한창 활동 중인 남의 영웅을 직접 모셔와 대결을 벌이기에까지 이른다. 바꿔 말해, 당대의 두 영웅이 격돌하게 된 배경에는 모리스 르블랑 자신의 개인적 의도보다는, 흥행을 염두에 ens 한 출판인의 집요한 설득과 그를 가능케 한 당대 프랑스의 대중적 욕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 무섭도록 날카롭고 싸늘한 눈빛, 대상을 그대로 꿰뚫어버릴 듯한 그 눈초리만큼은 전혀 범상치가 않았다!

그렇다. 셜록 홈스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경이로운 직관력과 관찰력, 명징함과 기발한 발상이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기적 같은 현상이 지금 바로 코앞에 구체화되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에드거 포의 뒤팽이랄지, 가보리오(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의 소설가. 서류 113, 무슈 르콕등의 작품이 있다/역주)의 르콕과 같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장 독특한 탐정 유형들을 자연의 장난기 어린 섭리가 한데 모아 버무려서 보다 더 기발하고 비현실적인 또다른 유형의 탐정을 만들어내놓은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전 세계를 통해서 그를 유명인사 반열에 올려놓은 숱한 무용담들을 검토해보노라면, 이 셜록 홈스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기보다는, 혹시 어느 대단한 소설가, 이를테면 코난 도일처럼 탁월한 작가의 손에서 빚어진 허구의 인물, 즉 전설로만 떠도는 영웅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름 바꾸기를 하기 전에 쓰여진 이 대목에서3), 르블랑은 시침 뚝 뗀 채, ‘코난 도일처럼 탁월한 작가의 손에서 빚어진 허구의 인물에다 셜록 홈스를 빗댐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현실성을 지닌 인물로 살려놓는다.

 

뤼팽에게는 늘 그러하듯, 여기에서 자존심이란 단순한 에고이즘 같은 것이 아니다. ‘뤼팽의 생김새와 변신능력을 주제로 했던 아르센 뤼팽의 고백해설부터 시작해서 도둑으로의 정체성복합적인 퍼스낼리티그리고 아이러니 분석야심의 매커니즘에 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강조해온 바, 존재의 한계성에 대한 부단한 도전과 극복의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뤼팽의 자존심인 것이다. ‘흥분되고 즐거운’, 그래서 자존심이 사는 기분이란 곧 덧없는 그림자 같은 개체적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힘차게 약동하는 존재의식을 의미한다. 이때 셜록 홈스라는 상대는 뤼팽 자신의 닮은꼴’, 즉 완벽한 맞수로서 적극적으로 기능한다. 위의 대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대를 누르고 이기는 데에서 기분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와 대결을 벌인다는 그 자체만으로 짜릿한 기분’, 즉 존재의식이 한껏 고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깊이와 규모에 필적하는 상태, 서로의 능력이 너무도 막상막하(莫上莫下)여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동질감(同質感)까지 느끼고야 마는 맞수끼리의 대결이란, 승패를 떠나 그 자체로 엄청난 의의를 가지는 법이다.

 

이보시오, 무슈 뤼팽, 이 세상에는 뭘 어찌 한다 한들 내가 절대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딱 둘 있소. 우선 나 자신과 바로 당신이오.”

치열한 대결을 무승부로 끝낸 후 도버 해협을 건너는 선상(船上)에서 서로 악수하며 홈스가 뤼팽에게 건넨 이 말4)은 두 영웅들이 서로에게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동질감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런 상대끼리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무의미하며, 대결 그 자체가 서로의 존재를 극대화시켜줄 뿐이다.

 

1)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해설 참고.

2) 모리스 르블랑 전기(Maurice Leblanc, Arsene Lupin malgre ha)Jacques Derouard, Sequier. 1989. p. 139.

3) “금발의 귀부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pp. 92~93

4) 같은 책, p.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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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단편을 좋아한다. 셜록 홈즈도 아가사 크리스티도 단편을 읽다 보면 마치 가장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골라먹는 느낌이 들었다. 모리스 르블랑도 마찬가지.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고명이 두툼한 카나페를 맛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덟 개의 단편 모음집, 제목에도 들어가는 숫자 8, 눈이 시원해지는 푸른빛의 표지. 그야말로 쾌남 뤼팽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장편 소설에서 뤼팽은 감정에 허우적거려서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하고,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며, 특유의 능글맞음과 여유만만한 모습이 무너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상화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유머까지. 원래 연작 소설을 좋아하는 내 취향 저격 작품집이었다.

 

모리스 르블랑은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라는 매우 독특하고도 감각적인 작품을 통해서 또다시 예전의 경쾌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여덟 편의 단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되기 여드레 전부터 수수께끼 같은 괘종시계의 그림을 게재함으로써 사전에 독자들의 지대한 호기심을 유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813의 비밀」 이후 지독스러운 악몽처럼 전개되던 전시상황 속의 아르센 뤼팽 모험담은 이제 그 처절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일신해서,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추리소설의 본령으로 돌아온 듯하다. '8'이라는 숫자가 하나의 절묘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가운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결합된 이 작품은 특히 아르센 뤼팽과 여성의 미묘한 줄다리기식 감정 게임이 참신한 감상거리이며, 추리소설 작가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심리주의 작가로서의 모리스 르블랑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秀作)이 아닐 수 없다. 이 번을 포함하여 두 차례 걸친 해설은 아르센 뤼팽의 적수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뤼팽 모험담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결구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보기로 한다.

 

이제부터 제시될 여덟 가지 사건들은 옛날에 아르센 뤼팽이 자기 친구인 레닌 공작이 겪은 일이라며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거기 나오는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거지, 단골 수법 등, 그 무엇을 따져봐도 친구 사이라는 두 인물을 서로 혼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긴 아르센 뤼팽이라는 사람은 워낙 엉뚱한 데가 있어서 실제로 자기가 나서지 않은 일을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떠벌릴 뿐만 아니라, 정작 자기가 저지른 일도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가 있는 위인이다. 아무튼 그 점은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1. 망루 꼭대기에서(석 달 후 12월 5일->9월 5일)

 

"저런, 가끔은 그래도 생각이 변하는 것 같은데요......다른 곳에 있어야 하면서도 지금 바로 이곳에 와 있지 않습니까?"

여자는 문득 당혹한 기색이었다. 기세 등등하던 역심(逆心)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마치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른 사람, 기상천외한 행동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보다 관대하며 사심이 없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놀란 눈길로 레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남자가 별 계산도, 흑심도 없이 행동하고 있으며, 자기 말마따나 길을 잘못 든 여인을 향한 그저 친절한 신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스물여섯 살이고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당신은 대글로슈 백작의 의붓조카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데 그 조카라는 사람이 약간 제정신이 아닌 자라 감금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당신은 이혼도 못하게 된 데에다, 지참금을 남편이 죄다 써버려서 삼촌인 백작에게 얹혀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백작 부부가 워낙 사이가 안 좋아, 환경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태입니다. 사실 백작에겐 전처가 있었는데, 그만 지금 부인의 첫 남편과 눈이 맞아 달아나버리고 말았지요. 결국 둘 다 버림 받은 남녀가 홧김에 서로 합치게 되었지만, 그런 억지 결합 속에서는 원한과 환멸밖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 여파에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지요. 열두 달에서 열한 달가랴은 외롭고 갑갑하며 따분하기만 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한테 홀딱 빠진 무슈 로시니가 나타납니다. 그는 당신에게 도피할 것을 제안했지요. 물론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워낙 권태의 연속인 삶, 젊은 날은 하루 하루 속절없이 흘러만 가고, 뭔가 새롭고 신나는 일에 대한 열망이 당신을 슬슬 부추깁니다......결국 당신은 구애자를 따돌리는 건 나중 일로 미루더라도 일단 그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합니다. 또한 이 정도까지 소동을 부리고 나면 삼촌도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마땅한 계산을 치르고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도 한몫을 했지요.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자,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슈 로시니의 품에 안길 것이냐, 아니면 나를 믿을 것이냐......"

 

마침내 남자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보니 의심이 드는 모양이로군요? '도대체 이 모험 애호가가 날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걸까? 보아하니 내가 마음에 들긴 드는 모양인데, 조만간 수상쩍은 사례(謝禮)라도 하라고 안 할지 몰라' 뭐 이런 생각을 굴리는 것 아닙니까? 하긴 무리도 아니지요......좋습니다! 우리 사이에 정확한 계약을 선행하는 게 좋겠어요."

 

"첫 모험을 한 오늘 알랭그르의 괘종시계가 여덟 번 종소리를 울렸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나의 판결이라고 보고, 예컨대 앞으로 한 석 달 동안 일곱 차례를 더 멋진 모험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여덟번째 모험에 이르게 되면 그때 가서 당신이 내게 허락하기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뭘 말인가요?"

하지만 남자는 은근슬쩍 요점을 피해갔다.

"중요한 건 말입니다, 만약 도중에 내가 당신을 재미있게 해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 경우 언제든 당신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나를 따라올 경우 그러니까 모두 여덟 차례의 모험을 내가 당신과 더불어 완수하게 되는 석 달 후 12월 5일 그 괘종시계가 여덟 번의 종소리를 울리는 바로 그 순간-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 낡은 구리 진자는 이제 멈추지 않을 겁니다-당신은 내게 허락하는 겁니다......"

"대체 뭘 말이에요?"

여자는 궁금해 안달이 난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대가로 요구하려는 그 앙증맞은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지금쯤 여자도 그 정도 속내쯤이야 눈치챘으리라는 것을 남자는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노골적인 말로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바라보는 즐거움 하나만 허락하는 걸로 충분합니다......그러니 제안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자, 어서 말해보시죠. 당신이 요구하는 건 무엇입니까?"

남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음을 간파한 오르탕스는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블라우스 깃을 여미는 버클 하나를 찾아주는 일이에요. 금세공 틀 속에 박힌 홍옥수(紅玉髓)로 된 골동품인데, 어머니가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걸 다시 저한테 물려주신 거지요. 그것으로 인해 두 분 다 행복하셨고, 나 역시 행복했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랍니다 한데 그게 그만 보관함에서 없어지고 나서는 불행하게 되었어요. 그걸 좀 찾아주세요, 수호천사님......"

"그 버클이 언제 없어진 겁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 그러니까 그게......한 7년인가......아니, 8년......9년인가......잘 모르겠네요......어디서 잊어버렸는지도......어떻게 없어졌는지도......아무래도 도통 모르겠어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행복할 것입니다."


2. 물병(파리에 둥지를 튼 나흘째 되는 날->9월 9일)

 

파리에 둥지를 튼 나흘째 되는 날, 오르탕스 다니엘은 불로뉴 숲에서 레닌 공작과 만날 약속을 했다. 눈부신 아침, 두 사람은 앵페리알 레스토랑 테라스의 약간 동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는 매력이 넘쳐났고 쾌활하기 그지없었으며, 그저 사는 즐거움에 온통 들떠 있었다.

 

"자넨 배가 볼록한 물병을 창가에 슬쩍 얹어놓았지. 결국 그 크리스털제(製) 물병이 렌즈 역할을 했고, 창문으로 비쳐드는 태양광선을 모아다가 적절하게 준비해둔 상자와 박엽지 더미로 쏘아보내준 거지. 한 10분 있으니까 불이 화르륵 붙은 거고. 정말 기발한 발상 아니겠어? 세상 내로라 하는 발명품들이 거의 그렇듯, 사소한 우연 속에서 탄생한 걸작 아니냐구! 그야말로 뉴턴의 사과라고나 할까?......언젠가 물이 가득한 물병을 통과한 햇살이 이끼 언저리라든가 성냥의 유황 덩어리에 맞아떨어져 불꽃이 이는 걸 목격했겠지. 바로 좀 전에도 문득 햇살이 무척 따사로운 걸 느끼자마자 자네는 속으로 '옳다구나!' 한 거야. 그 즉시 물병을 적당한 장소에 갖다놓은 거고. 정말이지 놀라운 재치였네, 가스통!"

 

"당신은 안 가세요?"

오르탕스가 물었다.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아주 급한 약속들이지요......"

"그래도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일도 크나큰 즐거움일 텐데......"

"그래봤자 곧장 지겨워질 즐거움일 뿐이오.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건 늘 끝없이 도전하는 가운데 쟁취되는 것이죠. 반면 한 번 쟁취하고 나면 어떤 즐거움도 시시해지기 마련이지......"

여자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고서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기막힌 선행(善行)을 그저 스포츠처럼, 그것도 기발한 재주로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이 묘한 사내를 향해 그녀는 찬탄의 말을 아끼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모든 사건들이 한없이 놀라울 뿐. 치밀어 올라오는 강렬한 감정이 목을 메이게 하고, 눈에는 눈물만 그렁그렁 고이게 할 따름이었다.

그런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조용히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이미 그걸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소......"


3. 테레즈와 제르맨(10월 2일)

 

10월 2일 아침, 워낙 그윽한 늦가을 날시로 인해서 에트르타의 별장에 늦게까지 처진 몇몇 가족들은 어슬렁거리며 해변으로 내려왔다. 이 지역 풍광(風光)에 아주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는 창공의 부드럽고 창백한 빛깔과 대기 중에 떠도는 아스라한 기운만 아니라면, 수평선에 드리워진 구름들과 에트르타의 절벽들에 에워싸인 저 고요한 바다를 바위들의 병풍을 둘러친 하나의 잔잔한 산정호수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창공의 푸른빛은 좀더 짙어졌고, 바다는 보다 평온해졋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한참만에 레닌이 조용히 물었다.

"만약 내가 어떤 음모에 휘말려 곤욕을 치를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당신을 믿고 의지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를 끝내 구해줄 거라는 데엔 눈곱만큼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 어떤 어려운 장애가 있어도 말이죠. 당신의 의지력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여자의 말에 레닌은 나지막이 이렇게 화답했다.

"당신을 즐겁게 해주려는 나의 욕망에 끝이 없는 것이라오......"


4. 영화 속의 단서(9월 18일->3주->10월 9일 경)

 

로즈-앙드레는 유연한 연기력에 호감 어린 마스크를 갖춘 미녀 배우였는데, 어쩐 일인지 연극무대에서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최근에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로 스크린에 대뷔한 처지였다(이 여배우는 여러 모로, 모리스 르블랑의 누이동생이자 배우였던 조르제트를 모델로 했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모리스 르블랑 연보' 참조/역주). 바로 데뷔하던 날 저녁, 자체만으로는 별로인 영화 "행복한 공주"를, 그녀는 활기 넘치는 연기와 강렬한 미모로 무척이나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자의 이름은 달브레크(역시 당시 르블랑의 여동생 조르제트의 연인이었던 로제 카를이 모델이다/역주). 항상 동료 배우들로부터 동떨어져 지내는 과묵하고 내성적인 괴짜라고 하더군요. 그 자가 당신 동생에게 특별히 열을 올리고 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더군요. 한데 아까 본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그의 연기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 다음 새 영화에도 기용했다고 합니다. 최근까지 파리 근교에서 영화 촬영에 전념했다고 하네요. 한데, 비교적 그의 연기에 다들 만족하고 있던 차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돌발했다고 합니다. 9월 18일 금요일 아침, 소시에테 사(社)의 창고문을 억지로 뜯어 연 그는 으리으리한 리무진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는데, 그 전에 이미 2만 5000프랑의 공금을 깨끗이 털었다지 뭡니까! 회사측은 즉시 고발을 단행했고, 도난 당한 리무진은 드뢰 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월요일 아침, 뱃사공은 자기 배 한 척이 사라진 것을 꺠달았다는 것이다. 그 배는 한 5리 정도 더 내려가서 기슭의 개흙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간신히 찾아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여름 영화 촬영이 있었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로군요?"

"그런 셈이죠."

 

순간 오르탕스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온몸은 쩌릿한 전율로 부르르 떨렸다. 방금 넌지시 흘린 말이야말로, 초기에는 비교적 허술했지만, 함께 불안과 열정 속에 여러 일을 겪는 가운데 차츰 둘 사이에서 돈독하게 맺어지고 있는 애정의 끈에 관해서 처음으로 노골적인 언급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모든 사건들을 제 마음대로 통제하고, 적이든 동지이든 상대의 운명을 항상 가지고 노는 듯한 이 비범한 사내 곁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연약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요컨대, 이 남자는 사람을 매혹을 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품게 만들엇다. 그녀의 정신 속에서 세르주 레닌은 일종의 주인(主人)처럼 여겨졌고, 그 앞에서 스스로 방어해야만 할 적(敵)임과 동시에, 보다 자주 골칫덩이면서도 지극히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친구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5. 장-루이 사건

 

워낙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라 오르탕스는 어리둥절했다. 두 사람은 그저 한가로이 거닐면서 센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 여인의 실루엣이 다리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허공 중에 몸을 날렸던 것이다. 사방에서 비명과 소란이 이는 가운데 오르탕스는 레닌의 팔뚝을 와락 부여잡고 말했다.

"설마 뛰어들려는 건 아니죠?......절대로 안 돼요!......"

하지만 눈 깜짝할 새였다. 남자의 윗도리가 여자 손에 붙들린 채 훌러덩 벗겨지는가 싶더니, 레닌의 몸뚱어리가 단번에 도약을 했고 그 다음...... 그 다음에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그로부터 3분 뒤, 오르탕스는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 휩쓸린 채 강기슭까지 내려가 있었다. 곧이어 창백한 얼굴에 흠뻑 젖은 검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웬 여인을 안고 제방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레닌의 모습이 보였다.

 

"어휴! 난데없이 멱을 감다니! 이런 경우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튼 누가 물에 뛰어드는 걸 보면 덮어놓고 나 역시 뛰어들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아마 우리 조상 중에 사람 구하려다 물귀신 된 구조요원이라도 있었나봐요......"

 

그러지 않아도 난데없는 불청객에 어안이 벙벙하던 장-루이는 주느비에브의 이름을 듣자 완전히 평정을 잃는 눈치였다. 자신이 뭐라고 내뱉는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레닌의 깍듯한 말투에 장단을 맞추려는 듯, 그 역시 주섬주섬 소개를 한다는 것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흘리는 것이었다.

"여기는 제 어머니 되시는 마담 도르미발이고......이쪽은 마담 보부아, 제 어머니이시고......"

순간 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레닌은 산뜻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오르탕스는 마담 도르미발과 마담 보부아 둘 중 누구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야 할 지 몰라 망설였다.

 

"자로고 운명이 그처럼 교묘하게 뒤틀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연과 우연이 그런 식으로까지 노골적으로 겹치는 경우란 드문 법이에요! 하필 의사와 하인, 하녀 모두가 집을 비운 날 밤, 두 여성이 거의 동시에 진통을 느끼고, 또한 사내아이를 같은 시간대에 분만한다는 것부터가 가능성이 희박한 우연입니다. 굳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고를 덧붙일 필요도 없어요! 공교롭게도 그 순간 램프 기름이 떨어지고 심지가 잦아들었다는 얘기는 아예 관두는 게 낫단 말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산파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무를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 처리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아무리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당황한다 해도, 직업상의 본능적 감각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최소한 두 아기를 놓아둘 때 서로 구분이 될 만한 위치와 자리를 염두에 두기 마련인 겁니다. 설사 별도의 표식 없이 나란히 눕혀두었다 해도, 최소한 좌우측의 구별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서로 엇비슷한 배내옷으로 둘둘 말았다 해도, 미세한 차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굳이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만한 기억속의 뭔가가 있었을 거예요. 신생아를 혼동한다구요? 난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판별이 불가능했다구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소설 속이라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온갖 황당무계한 일들을 상상할 수 있고, 별의별 모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하지만 현실의 한복판에서는 항상 일정한 고정점이 있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이런저런 사건들이 스스로 일정한 논리적 법칙에 의거해 자연스레 일어나고 또 저무는 법이랍니다. 따라서 나는 부시뇰 간호사가 결코 두 신생아를 혼동할 리가 없었노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에도 장-루이가 정녕 누구의 자식인지는......"

레닌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막았다.

"맙소사, 아직도 그 케케묵은 이야기로군요! 이젠 다 끝난 얘기올시다! 그만, 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려, 어미가 둘인 사내의 이야기는 이제 소인(小人)도 별 흥미가 없나이다!"

상대가 어찌나 장난스레 시침을 떼며 익살맞은 말투로 말하는지, 오르탕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훨씬 좋군요! 그래요, 그렇게 실컷 웃는 겁니다!......"

레닌도 지그시 웃으며 덧붙였다.

"......인간이란 눈물을 통해서보다는 웃음 속에서 세상을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매번 기회가 닿을 때마다 활짝 웃어야만 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뭔데요?"

"어여쁜 치아를 가졌거든......"

 

6. 도끼를 든 귀부인(10월 18일)

 

이처럼 난감한 문제를 둘러싼 떠들썩한 논란은 논리적으로 따져 새로운 참극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10월 18일 직전까지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레닌 공작과 오르탕스가 저녁에 만날 약속을 정하느라 전화통화를 하던 당일 아침에도, 자연스레 최근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내용을 거론하게 되었다.

"조심하십시오! 혹시라도 길을 걷다가 도끼를 든 귀부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작정 맞은편 보도로 피하세요."

반(半)농담조로 호들갑을 떠는 레닌에게 오르탕스도 장난스레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그 아리따운 귀부인께서 끝내 나를 납치해버리면 어떻게 할까요?"

"그럼 길가에다 흰색 조약돌이라도 뿌려놓으세요. 그리고 최후의 도끼날이 번뜩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이렇게 중얼거리세요.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가 나를 구해줄 테니까......'오, 물론 여기서 '그'는 바로 나이죠. 아무튼 행운을 빕니다. 이따 저녁 때 봐요, 아가씨."

 

레닌은 몹시 괴로웠다.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력한 감정이 그와 오르탕스 사이를 맺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호기심과 욕망, 단순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호하고 즐겁게 해주면서 삶의 여유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은, 이제 글자 그대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두 사람은 정작 자기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제3자의 문제를 둘러싼 모험의 시간들만을 함께 해왔기에, 둘 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자, 레닌은 오르탕스가 삶에서 차지한 자리를 새삼 실감했으며, 그녀가 어딘가에 갖혀서 고통받고 있는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H 자(字)로 시작하면서 모두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의 소유자를 희생 제물로 고른 겁니다! 어때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름의 글자수가 모두 여덟인 데다, 첫 글자 역시 알파벳의 여덟번째 글자인 H자이고, 나아가 그 '8'이라는 문제의 숫자 또한 H로 시작하는 단어라 이겁니다!(프랑스어에서 8은 huit[위트]로 읽는다/역주) 결국 항상 H자가 문제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더군다나 흉기로 사용된 것 역시 도끼(프랑스어로 hache[아쉬]이다/역주)가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오르탕스는 무사했다.

부랴부랴 결박한 끈부터 풀었고 답답한 재갈을 빼주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늙은 유모로부터 레닌은 얼른 등불을 받아들고 오르탕스를 비춰보았다.

순간 레닌은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해쓱해진 얼굴에 신열로 이글거리는 퀭한 눈망울을 하고서도 오르탕스 다니엘은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단 한 시도 좌절하지 않고서 말이에요......당신을 믿었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여자는 금세 정신을 잃었다.

 

"끔찍한 사건이라니, 그게 뭔데요?"

여자는 해맑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레닌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일견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오르탕스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했었고, 아직까지고 자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경에 빠졌었는지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소위 도끼를 든 귀부인과 스스로 방금 겪은 모험을 서로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레닌은 언젠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줄 날이 오겠지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르탕스 다니엘은 당분간 조용히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프랑스 한복판에 위치한 바시쿠르라는 마을 근방 친척 집으로 떠나게 되었다.


7. 눈 위의 발자국(11월 14일)

 

바시쿠르 경유, 라 롱시에르발(發)

11월 14일

파리 시, 오스망 대로, 레닌 공작 귀하

 

소중한 친구에게

 

아마 지금쯤 당신은 나를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곳에 당도한 지 벌써 3주가 다 되어가는데 편지 한 장 없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적어보내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얼마나 끔찍한 죽음의 위협에서 끄집어내주었는지, 그 무시무시한 사건의 비밀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깨닫고 있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절대로 조용하게 홀로 지낼 필요가 있다는 걸요......만약 파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그래서 당신과 더불어 계속 치열한 모험에 뛰어들었다면 어떘을까요? 오, 큰일날 소리지요! 이젠 지긋지긋하답니다! 타인이 치르는 모험은 무척 흥미진진할지 몰라도, 자신이 직접 겪어서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이라면......아, 정말이지 끔찍해요! 난 아마 최근에 겪은 그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좋았어, 썩 잘된 거야. 우리의 요지경 모험을 더 이상 진행하기가 싫어졌다는 거잖아. 이번만 해도 일곱번째인 데다, 바로 그 다음이 계약상 특별한 의미를 띠는 여덟번째 모험이니 더 나아가기가 싫은 게 당연하지. 사실 내심은 무지하게 바라면서도......꺼려지는 거야......"

그는 손바닥을 비벼대면서 생각했다. 이 편지는 여자가 서서히 레닌의 영향력에 사로잡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소중한 증거인 셈이다. 그녀가 이 남자에 대해 찬탄과 믿음, 불안과 두려움,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런 애정이 가미된,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상태에 빠져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일종의 동지애(同志愛)로써 모험의 동반자 노릇을 해왔기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어느새 자신의 감정에 대해 불안한 기분이 들었고, 약간의 새침기가 섞인 수줍음을 내세우며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것일 터.

 

시각은 10시 30분이었다. 레닌은 들판으로 걸어나와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새하얗게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에는 눈길 하나 던지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다시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주변을 에워싸고 사건 얘기로 떠들썩한 주막의 손님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2층 자기 숙소로 올라가 꽤 오랜 시간 잠을 청했고, 문득 노크 소리에 깨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다......당신이......"

어리둥절 중얼거리는 레닌 앞에는 오르탕스가 조용히 서 있었다.

둘은 서로의 손을 지그시 맞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어떤 생각도 말도 이 재회의 기쁨에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닌이었다.

"내가 잘 온 거죠?"

여자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그래요......실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마티아스 드 고른은 잘못한 게 없는 걸요. 그저 우물 주위로 발을 구르며 다녔고, 자기 것이 아닌 권총을 허공에다 세 발 쏜 다음 멀치감치 내던지고 나서 자기 아버지 집으로 뒷걸음질쳐서 얌전히 걸어간 것뿐이에요. 딱히 법적으로 나무랄 일을 저지른 건 아니랍니다. 그를 잡아서 무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6만 프랑이요? 글쎄요, 내 생각에는 무슈 비냘도 그럴 마음이 없을 것 같은데요......별달리 고발할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무슈 비냘?"

 

잠시 후 오르탕스를 데리러 저택 안으로 돌아왔을 떄, 레닌은 여자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장 그녀의 사촌인 에르믈랭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오르탕스는, 미안하지만 먼저 실례를 했으며,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만 싶다는 말을 대신 전하도록 아예 사촌 언니에게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레닌은 돌아 나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았어!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군......그녀는 분명 나를 피하기 시작한 거야......그럼 결국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서서히 결말이 가까워오는구만......'


8. 메르쿠리우스 신상(11월 30일)

마담 다니엘 귀하

라 롱시에르, 바시쿠르 경유

11월 30일

 

너무도 소중한 벗에게

 

또다시 2주가 지나도록 편지가 없군요. 이제는 우리의 협조관계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는 저 12월 5일 이전에 편지를 받으리라는 기대를 더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바래요. 그래야 이미 당신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이 계약에거 당신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나로서는 지난 일곱 차례의 전투 모두, 우리가 함께 일궈낸 찬란한 승전행진일 뿐만 아니라, 무한한 기쁨과 열광의 뜻깊은 경험이었노라고 자평(自評)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나는 인생을 좀더 활기차고 살맛 당기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즐겁게 바라보며 살 수 있었소.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너무도 강렬해서 차마 당신에게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그저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싶다는 것말고는 진정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이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하는 걸 원하지 않게 되었어요. 나로 말하자면 '언제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입니다!

 

"아! 당신 참 그동안 짖궂게도 굴더군요! 아예 문을 닫아거는가 하면......편지 한 장 주지도 않고......정말이지 매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괴로워한 줄 아십니까? 결국 나로서는 뭔가 대단한 수단을 모색해야만 했고, 엄청난 미끼로 당신을 유인해내야만 했답니다. 솔직히 내가 보낸 멋진 편지, 썩 괜찮았죠? 청색 드레스에, 세 갈래 골폴 가지라......그런 걸 어찌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다 더해 내가 직접 꾸며낸 몇 가지 수수께끼들도 살짝 첨가했죠. 일흔다섯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라든가, 은제 묵주를 돌리는 노파 등등 말입니다......어쨌든 당신을 보고 싶었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라 이겁니다!"

 

모든 모험은 이제 끝이 났다. 다만 한 가지 남은 거라면, 그저 기대감만으로도 다른 모든 험난한 모험의 기억을 꺠끗이 지울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모험, 이 세상 모험 중에서도 가장 가슴 떨리고 감미로운, 가장 상찬(賞讚)할 만한 모험 말이다. 여자는 운명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온 마음을 열고 기꺼워하는 자세로......이유는 그녀 마음 속에도 어느덧 사랑의 기운이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홍옥수 버클을 손에 쥐어주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잃었던 환희가 자신의 삶 속에 다시금 찾아 돌아온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6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上): 가니마르

 

추리문학의 기본 공식이 법(혹은 질서)의 수호자와 그것을 유린하는 범법자 사이의 대결 속에 존재한다면,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특징은 대개의 경우 그 대결의 주도권이 범법자 쪽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1905년 당시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가 처음 이 세상에 나오면서 대중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엇던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1)

 

쥐스탱 가니마르(Justin Ganimard)는 1853년 생으로, 1874년 생인 아르센 뤼팽보다 무려 스물한 살이나 연배가 위인 인물이다. 그러나 '올리브 색깔의 프록코트 차림에 우산을 든' '키 작고 늙은 남자'라는 식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묘사를 동반하는 가니마르2)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형사'로서 아르센 뤼팽과 '파란만장한 사생결단'을 무수히 치러온 법질서의 대표자인 것만은 틀림없다.3) 뤼팽 시리즈 중 첫 작품인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와 비록 미완이지만 가장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모두, 뉴욕에 입항하는 선상(船上)에서 가니마르가 아르센 뤼팽을 붙잡는다는 테마로 장식되는 것을 볼 때, 가니마르라는 인물의 중요성은 아마 시리즈 전체에서 뤼팽 본인을 제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르센 뤼팽에게 가니마르 형사반장은, 물론 불멸의 적수(敵手)이면서도, 실은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조연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이다.

 

문제는 가니마르가 단순한 개체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기존 질서, 즉 그 '틀'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자칫 주인공의 무차별적 활약상만을 내세우는 낭만적인 3류 활극에 머물 수도 있었을 '뤼팽 대 가니마르'의 대결구도는 이로써 '개인 대 사회'의 갈등양상,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읽힐 수 있게 된다. 요컨대 19세기 말의 실증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에서 개인이 전체에 적극 귀속되던 양상을 과감히 탈피해, 개인의 자유와 의지, 그 변덕이 사회의 '틀'을 박차고 스스로를 주장하던 20세기 초의 상황이 그대로 구현되는 셈이다. '기상천외한 천재성'은 없지만 '관찰력이라든가 총명함, 꾸준한 면모' 등의 실증주의적 장점으로 무장된 가니마르의 완강한 손아귀를,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현대적 자유분방함의 화신인 뤼팽이 매번 따돌린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한 설정이라 평가할 수 있다.

 

1)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해설 참조.

2) 같은 책, p.20 참조.

3) 같은 책, p.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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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이빨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0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 민족 고대신화가 떠올랐다. 이사금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 치아가 많은 사람이 덕이 많다고 했던 것은, 다분히 치위생이 존재하지도 않아 아마도 대부분 치아 건강이 좋지 못했을 고대 사회에서 치아가 썩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은 남과는 다른 능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요즘 세상의 딱 벌어진 어깨, 늘씬한 다리, 작은 얼굴, 잡티 없는 피부와 같은 지위가 아니었을까? 참, 호랑이 이빨의 형태가 위와 아래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호랑이 이빨」은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813의 비밀」과 더불어 가장 분량이 많은 대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거듭되는 반전은 물론,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논리와 영화화되어도 손색없을 극적(劇的)인 장면 전개가 압권이다. 전쟁 중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후(戰後)의 상황을 무대로 한 점이 이채롭고, 「813의 비밀」에서부터 「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에 이르는 아르센 뤼팽의 행보가 수시로 환기되어, 일관된 삶의 궤적을 되짚어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엄청난 유산 상속권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음모의 회오리에 휩쓸리면서도 끝끝내 대의와 진실을 향한 큰 시야를 포기하지 않는 뤼팽의 모습 속에서, 어느덧 40대로 훌쩍 들어선 대협객의 완숙한 경지를 한껏 음미할 수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야심을 분석 해보기로 한다.

 

제1부 돈 루이스 페레나
1. 다르타냥, 포르토스, 몬테크리스토

"그렇습니다, 청장님. 동료들은 아르센 뤼팽이라고 부를지 모르나, 우리 상관들은 그를 그냥 '영웅'이라고 부르지요. 마치 다르타냥만큼 용맹하고, 포르토스처럼 강인하며......"

"몬테크리스토처럼 신비스럽겠지요......"

백작의 발끈하는 대꾸를 경찰청장은 히죽 웃으면서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모든 사실들이 외인부대 제4연대로부터 입수한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뭐 이자리에서 그 내용을 깡그리 소개할 필요까진 없으나, 불과 2년 사이에 전공 훈장과 레종도뇌르까지 수여받고, 전군(全軍)을 앞에 둔 일일명령 시 도합 일곱 번이나 모범용사로 지목될 마큼 미증유(未曾有)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연히 주목하게 된 사실은......"


2. 죽어야 할 자

붉은 껍질을 반구 형태로 뚫고 들어간 두 줄의 이빨 자국은 과육 속에까지 산뜻하고 가지런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위쪽에는 여섯 개의 이빨 자국 각각이 선명한 데 반해, 아래쪽에는 그냥 둥그스름한 곡선으로 딱 한 줄 뭉뚱그려져 있었다.

페레나는 그 두 줄의 자국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호랑이 이빨이로구만!...... 호랑이 이빨이라구! 베로 형사가 가지고 온 초콜릿에 찍혔던 것과 똑같은 자국이야! 우연의 일치치고는 정말 희한한 일이군그래! 정말로 우연일까? 베로 형사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며 경찰청으로 가져온 그 초콜릿의 이빨 자국과 이 능금에 찍힌 이빨 자국이 과연 동일인의 것이라고 믿어도 될까?"

그쯤에서 페레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강행하기 위해 이 증거물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사법당국에 얌전히 인도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중, 갑자기 손에 닿는 과육의 감촉 자체가 너무도 끔찍하고 거부감이 치밀어올라, 거의 반사적으로 원래 있던 덤불 속에다 훌쩍 내던지고 말았다.


3. 무광 터키석
4. 강철 셔터
5. 흑단 지팡이를 가진 사나이
6. 셰익스피어, 제8권
7. 헛간 속의 유골
8. 뤼팽의 분노
9. 소브랑의 해명
10. 파국

제2부 플로랑스의 비밀
1. 사람 살려!

나중에 아르센 뤼팽이 이 참혹한 모험의 에피소드를 나에게 들려줄 때는, 다소 뻐기는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놀랍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은, 그때 소브랑과 마리-안 포빌의 결백을 즉각적으로 수용해서 문제를 여지없이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일세. 내 장담하건대, 그거야말로 심리학적인 가치로나 범죄 해결의 관점으로 보거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명탐정의 가장 유명한 추리를 훌쩍 능가하는, 일류 솜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마리-안 포빌에 관해서는 이빨 자국 하나만 생각해도 움직일 수 없는 확신에 도달할 정도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빅토르 소브랑의 아들이자, 코스모 모닝톤 유산의 상속자가 되는 가가스통 소브랑은 결국 흑단 지팡이의 사나이면서 앙스니 경감의 살해자이니, 남편 살해범으로 밝혀진 마리-안 포빌의 죄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었지...... 한데, 과연 무엇이 내 안에서 그런 돌발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겠냐구? 왜 그토록 명백한 증거들과 상반되는 발걸음을 내디뎠겠냐 이 말일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실을 믿게 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한 이유가 무어냔 말일세!......글쎄......아마도 그건, 정녕 소중한 진실이란 지극히 특수한 방식으로 마음을 두드려대기 떄문이 아닐까?"


2. 쉬셰 대로의 폭발사고
3. 증오의 화신
4. 베베르, 복수하다
5. 열려라, 참깨!
7. 황제, 아르센 1세
8. 함정을 조심하라, 뤼팽!
9. 플로랑스의 비밀
10. 루피너스의 장원

그와 플로랑스 르바셰르의 결혼으로 인해 얼마나 세간이 떠들썩했는지는 굳이 이 자리에서 되짚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다시 별의별 논쟁이 들쑤시듯 일어났고, 당장 아르센 뤼팽을 체포해야 한다는 요구도 몇몇 신문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설사 이제는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 의혹의 여지가 없고,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과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이 같은 글자들의 바꿔치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해도, 합법적으로 아르센 뤼팽은 사망했으며, 합법적으로 돈 루이스 페레나는 생존해 있는 상태.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은 아르센 뤼팽을 살려낼 수 없고, 살아 있는 돈 루이스 페레나를 죽일 수는 없었다.

오늘날 그는 우아즈 강변으로 내리 뻗은 근사한 협곡들을 끼고 위치한 생-마클루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화려한 꽃들이 만개한 정원 한 구석, 초록빛 덧창들로 예쁘장하게 장식된 그 장밋빛 아담한 집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일요일만 되면 사람들은 재미 삼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혹시라도 딱총나무 생울타리 너머, 아니면 마을 광장에서라도 그 유명한 아르센 뤼팽이라는 자의 모습을 흘낏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핍박받고, 희생당하고, 삶의 열정을 상실한 사회적 약자들......그들 모두에 대해 돈 루이스는 한결같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명철한 지성과 자상한 조언, 경험과 힘을 그들과 함께 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시간을 할애해 자기 스스로 나서주기도 한다.

아울러 파리 시 경찰청의 밀사(密使)라든가 현지 경찰서 말단형사들이 종종 찾아와 도저히 골치만 아픈 사건을 맡기기도 한다. 물론 그 방면에서도 돈 루이스는 전혀 고갈되지 않은 정신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오래 된 철학서적들에 둘러싸여 기분 좋은 독서삼매에 빠질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와 정원을 가꾸는 것도 빠트릴 수 없는 일과이다.

 

크뤽생스 루피너스('크뤽생스'라는 이름은 모리스 르블랑이 임의로 지어낸 이름이다/역주), 알록달록한 루피너스, 향기가 기막힌 루피너스 등등, 그야말로 모든 루피너스의 변이종이 총 집합했다고 볼 수 있는데, 뭐니뭐니 해도 최근에 개발해낸 뤼팽의 루피너스가 최고로 손꼽을 만하다(학명이 루피너스인 이 꽃은 일명 층층이부채꽃[lupin]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철자가 뤼팽[Lupin]의 철자와 동일한 데에서 착안한 장면이다/역주).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를 그리스의 칠현(七賢)에 비유한다든가, 미래의 세대한테 일종의 귀감으로까지 추어올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에 관한 평가를 우리는 좀 더 관대하게 내려줘야 할 거라는 점만은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의 선행은 끝 간 데가 없는 데 반해, 악행이라고 해봐야 적당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도둑으로서 그가 자잘한 재주를 부릴 때 사람들은 기분 좋게 웃어제치지만, 용기 백배한 모습을 보이고, 과감하면서 위험을 모르는 모험정신을 과시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열광하는 것이지요. 냉정 침착하면서 명석한 사고력과 더불어 유머러스한 기질과 역발산(力拔山)의 호탕한 기개를 두루 갖추고,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활력 넘치는 미덕이 힘차게 들끓던 시대, 자동차와 비행기가 탄생한 영웅적인 시대, 전쟁 이전의 펄펄 살아 숨쉬는 시대(벨 에포크[Belle Epoque]/역주)를 종횡으로 주름잡은 화려한 모습에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쳤던 것이지요!"

그러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과거의 그에 관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오늘날 그의 모험은 이로써 일단락되었다는 애기인지요?"

"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언젠가 그도 이렇게 말했었지요. '내 무덤 위에 이렇게 새겨 주길 바라네. 협객, 아르센 뤼팽, 이곳에 잠들다'(「813의 비밀」p.505 참조/역주). 그저 통 큰 소리 같지만 엄연한 진실입니다. 그는 정녕 모험의 대가라고 할 만하지요. 물론 옛날에는 모험이 그로 하여금 남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방향으로 너무 자주 몰아가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열심히 싸워 이긴 승자에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예를 안겨주는 치열한 전쟁터로 이끌어가기도 했지요. 바로 거기서 그는 자기 몫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에서 행동하고 분발하며 죽음과 운명마저 분연히 딛고 일어서는 그의 진짜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경찰서장을 두들겨패고, 가끔은 예심판사의 시계를 슬쩍했던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는 거죠......자, 이제 우리의 박력교수(迫力敎授)에게 너그러워져야 할 때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나서 돈 루이스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그만의 미덕이 있지요. 지금처럼 침울한 시대에는 더더욱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인데, 바로 멋진 웃음 말입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5

 

-아르센 뤼팽의 야심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도둑, 즉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시작한 아르센 뤼팽의 경력이 813의 비밀, 포탄 파편, 황금삼각형, 서른 개의 관등을 거치면서, 점차 공익(公益)과 질서의 수호자적인 이미지로 옮겨가는 경향의 정점(頂點)을 보여준다는 사실일 것이다. 1920831일부터 이 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르 주르날지는 하누 전인 830, 작가의 변() 삼아, ‘아르센 뤼팽의 도덕성(La Moralite d`Arsene Lupin)’이라는 제목으로 모리스 르블랑 자신의 글을 게재했는데, 그중 이와 같은 경향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낸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르센 뤼팽)는 여전히 사회의 변방에서 법질서에 저항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법질서를 위반하는 경우란 오로지 사회를 이롭게 하고자 할 때뿐이다. 그는 또한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조국에 봉사하고 그 영광을 위해 헌신하므로, 원칙대로라면 범법자인 그를 잡아들여야 할 조국이 어쩔 수 없이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그는 무공훈장이랄지 군모(軍帽)의 화려한 깃털장식 따위에 열광하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측면이 많고, 지독한 반동세력에 속하면서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보수주의자다운 데가 있다.

 

요컨대, 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그 사회의 수호자라는 모순된 정체성이야말로 현대적인 시각에서 우리 모두 진지하게 조명해볼 가치가 있는 아르센 뤼팽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와 같은 정체성은 멀리 로빈후드에서 가깝게는 배트맨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유구한 영웅의 계보에 속한다. 때로는 법이라든가 사회체제를 유린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넓고 높은 차원의 도덕성을 추구하며, 테두리 내에 속박되지는 않되, 궁극적으로는 그 테두리 안에 속한 가치를 보호하는 영웅의 모습.

 

이 소설은 일단 연재발표가 끝난 다음, 1921액션과 모험소설총서에 두 권으로 분권되어 출간되었고, 1932년에는 물음표(le point d`interrogation)” 총서의 일환으로 재출간된 바 있는데, 이때는 마지막에 가서 뤼팽이 은둔생활을 때려치우는 것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번 번역은 오리지날을 저본(底本)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아르센 뤼팽은 사실 기암성이나 813의 비밀에서와 같은 엄청난 야심을 품기 이전, 그저 날렵한 도둑의 활약상을 보여줄 당시부터, 일반적인 도둑과는 구분되는 여러 가지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중 포탄 파편의 해설에서 다룬 바 있는 의적(義賊) 스타일의 행태를 제하고도 한 가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점은, 바로 도둑치고는 금전적인 이득에 대단히 관대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독특한 절도(竊盜) 행태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골동품과 고()미술품에 대한 집착이다.

 

이에 대해, 단순히 골동품의 물질적 가치 때문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프랑시스 라카생 같은 뤼팽 전문가는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그 해석을 모색하는 입장이다.1) 유독 골동품과 고미술품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 속에는 프랑스의 역사 자체, 그 세습권(世襲權)을 찬탈하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물질적 가치를 노리는 고가품 절도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무상(無常)한 현재를 사는 인간으로서 이른바 대문자(大文字)로 표현되는 역사(History) 속으로 걸어들어가 유구한 시간(Time) 안에 거한다는 것은, 지금 이곳이라는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웅은 항상 자신의 개체적 능력과 존재의 한계성을 뛰어넘고, 끊임없이 현실을 초극하려는 야심의 주인공이다. 역사와 전통의 산물인 보물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와 같은 존재론적 변신을 꾀하는 아르센 뤼팽의 모습이 가장 시적(詩的)으로 형상화된 모험담이 바로 기암성이다. 여기에서는 아예 프랑스 역사가 지켜보아온 모든 보물이 에기유 크뢰즈라는 속이 빈 기암(奇巖) 속에 통째로 보관되어 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자, 전통(Tradition)이나 다름없는 아지트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두고 뤼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기암성p.259).

 

“(......)내가 제일 처음 이 버려진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날, 기분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아는가? 잊혀졌던 비밀을 되찾고, 그 주인, 그것도 유일한 주인으로서 이곳에 들어서는 그 기분이 과연 어땠겠는가 말이네! 보다시피 저 쟁쟁한 존재들의 뒤를 잇는 당당한 계승자로서 말이야! 제왕(諸王)의 뒤를 이어 기암성에 살게 되다니......!”

 

기암성의 왕() 뤼팽이 암벽에 새긴 찬란한 이름에 도취할 뿐, 보물을 뿌리며 통치하는 데에는 무관심했던 반면, 813의 비밀에서는 분명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긴박한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유럽의 재편(再編)이라는 현실적 전략이 엄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략 자체가 다소 황당하다고 할 정도로 원대한 인 만큼, 정작 중요한 건 아르센 뤼팽 본인의 고양된 자의식이라는 느낌을 역시 지울 수가 없다(p.499).

 

뭔가 다른 삶을 향한 열망이 가슴 한복판을 불 지피고 있었을 뿐, 하등의 구체적인 기도(企圖)가 전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개 도둑에서부터 하나의 왕국을 가진 절대자에 이르기까지 아르센 뤼팽을 지탱시켜오는 추진력과 야심은 이처럼 계산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운명적이다. 비록 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에서는 스케일은 여전히 원대하되, 야심의 지향점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막대한 황금을 이탈리아의 대전 참전비용으로 충당한다든지, 신의 돌이라는 보물을 프랑스 국립연구소에 기증하는 등), 이는 세계대전 중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에게 야심이란, 여하한 구체적 대상을 지향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개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본능적 에네르기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호랑이 이빨에서 그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듯, 끊임없이 모험과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만의 운명이 가진 다른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1) Francis Lacassin, “프랑스 역사에 대한 절도(竊盜)의 예술(L`art de cambrioler I`histoire de France)”, Europe () 19798-9, 뤼팽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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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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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물간 유행어지만, '민폐 캐릭'이라는 말이 있었다. 주로 드라마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감정적으로 행동하여 일을 그르치거나,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남자들을 위기로 빠뜨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여자 캐릭터를 의미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정작 대중문화 속 캐릭터는 예전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불과 몇 년 전의 이야기이며, 이 경우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작가의 게으름에 대한 질타와, 작품 보는 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며 해당 배우에 대한 비웃음이 함께 동반되었다. 물론 지난 일이다. 요즘 이런 캐릭터를 내놓을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드라마 제작진도, 최종 허락을 해 줄 방송국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내내 느꼈던 불편함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때문일까. 이 소설 속 베로니크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하고 끝내는 짜증이 나게 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어쩌다 보니 결혼, 헤어지고 수녀원에 들어가고 나서도 적응 못하고 나와버리는 모습, 평생 아들과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면서도 막상 대면의 순간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의 연속... 가장 나를 기함하게 만든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혼자 살아남은 가운데 이후에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배도 떠나보내고 섬에서의 고요함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민폐의 총집합인데, 이런 캐릭터가 서브도 아니고 당당히 메인을 차지한 데다가 심지어 제 1부의 제목은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당돌하면서도 발랄한 여자 캐릭터들이 그리워졌다. 이런 식으로 남자 주인공의 인간적인면모를 돋보이기 위해 대상화된 여자 캐릭터들을 등장 시킬 바에는 차라리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처럼 여성을 혐오하여 아예 소설 속에 등장시키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개의 인디언 인형' 혹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킨다. 굳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이야기하는 것은 입 아프다. 최근 크리스티의 소설이 또 영화화가 될 예정이며 여주인공으로는 안젤리나 졸리가 거론되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이유는 단 한 번 등장하고 마는 인물이라도 작가가 그 인물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이 그 시대에 박제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지. 

 

어느 외딴 오두막. 한쪽 손목이 잘린 늙은이의 시신 옆에서 발견된 쪽지에는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양갈래 매듭이 늘어뜨려진 검은 벨벳 쓰개를 착용한 세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고, 나머지 한 여자는 바로 베로니크 자신의 얼굴. 14년 전, 남편 보르스키와 엄격한 아버지 데르즈몽의 납치극으로 가족 모두를 잃고 수도원으로 잠적한 베로니크는, 자신의 처녀적 성이 새겨진 표지를 따라 운명처럼 '서른 개의 관'이란 섬으로 이끌어진다.

 

<서른 개의 관>은 전작(前作) 두편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악몽과도 같은 모험담이 펼쳐진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편들이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런 종류의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섬뜩하고 피비린내 나는 한 편의 드라마를 구상한다. 역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특히 프랑스 고대문명에 뿌리를 둔 유구한 전설과 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항상 경쾌한 기지를 잃지 않는 아르센 뤼팽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특히 막강한 '구원자'로서의 뤼팽 이미지가 완벽하게 부각되고 있다. 해설로는 아르센 뤼팽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이러니를 분석해 본다.

 

1부 베로니크

프롤로그

1. 버려진 오두막

여자는 얼른 그것을 주워 펼쳐보았다. 그리고 미처 완전히 펼치기도 전에 손부터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더듬대기 시작했다.

"아!......하, 하느님......맙소사!......아! 하느님! 맙소사!......"

여자는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고, 눈을 부릅뜨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버틸 수 있던 것도 기껏해야 한 몇 초나 될까? 그나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점점 더 두텁게 눈앞을 뒤덮으려 하는 안개 너머로 망막에 붉은 빛깔로 각인되어오는 것은 끔찍하게도 네 그루의 나무 줄기에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네 명의 여자 그림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면(前面) 중앙에 위치한 첫번째 여자는 베일에 가린 몸뚱어리가 이미 뻣뻣이 경직된 상태였고,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맙소사! 그 얼굴이라는 것이 충분히 알아볼 만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그랬다. 그것은 틀림없는 베로니크 데르즈몽 자신의 얼굴이었다.

게다가 머리 위, 나무줄기 꼭대기에는 고대 관습에 따라 카르투슈(꽃무늬 등으로 장식된 일종의 틀로서 그 안에 잠언, 가문[家紋] 따위를 새긴다/역주)가 걸려 있고, 그 안에 꼭꼭 눌러 쓴 필치로 처녀시절 베로니크의 서명 이니셜 세 글자와 장식 선이 선명하게 담겨 있는 것이었다. V. d`H. ......즉 베로니크 데르즈몽이라고 말이다!

 

2. 바닷가

3. 보르스키의 아들

4. 사레크 섬의 가엾은 사람들

5. 네 명의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리니...

"가만있자......셈이 맞아떨어지는군......혹시 배에 몇 사람이나 타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우리 세 자매 빼고 말이에요? 알고 있어요? 바로 스무 명이에요......그렇다면, 한번 세어보세요......스무 명에다가 첫번째로 죽은 마게녹이 있고......그 다음으로 무슈 앙투안이 죽었고......다음으로는 프랑수아 녀석과 무슈 스테판이 일단 행방불명이니, 죽은 걸로 치고......그 다음 오노린과 마리 르 고프가 죽었고......가만있자......한번 세어보자구"

 

어스름한 서광이 서서히 하늘 한곳에 번지고 있었다. 주변의 사물들도 그에 따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현실적인 정체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울러 다리 전체가 허물어져 깡그리 사라지고 난 뒤의 텅 빈 심연이 베로니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양쪽 섬 지애 사이에는 50여 미터에 이르는 간격이 생겼고, 저 까마득한 아래에 들쭉날쭉 접근 불가능한 계속의 능선만 두 섬을 한 덩어리로 이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는 순간, 베로니크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大)참나무 숲의 제일 전방에 위치한 세 그루의 나무가 낮은 가지들이 말끔히 제거된 채로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활짝 벌린 두 팔이 뒤로 젖혀지고 누더기 치마 아래로 두 다리가 꽁꽁 동여매인 채, 검은 머리쓰개의 띠로 반쯤 가려진 창백한 얼굴의 아르시냐 자매 세 명이 목에 밧줄이 친친 감긴 처참한 몰골로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6. --비앵

7. 프랑수아와 스테판

8. 일촉즉발

"당신도 아다시피, 이곳 사레크에는 잠수함 기지가 위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타진하러, 군 장교들이랄지 공무원들 몇몇이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파트리스 벨발(「황금삼각형」참조/역주)대위라는 상이용사가 특별 대리인 자격으로 파리에서 급파되어 무슈 데르즈몽과 인간관계를 맺은 바 있지요. 그때 무슈 데르즈몽은 그에게 섬에 나도는 예의 그 전설들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느끼고 있는 걱정거리에 대해 귀띔해주었답니다(바로 마게녹이 떠난 다음날이었지요). 한데 벨발 대위는 유달리 그 얘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다는 말이, 파리에 사는 자기 친구 중에 에스파냐이던가 포르투갈이던가, 아무튼 그쪽 출신인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신사가 있는데, 그에게 모든 얘기를 전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보아하니 대단한 인물인가 싶던데, 이 세상 제아무리 복잡한 수수께끼도 척척 해결해내고, 엄청 위험하고 대범한 일들을 수행해나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요......아무튼 벨발 대위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편지 한 장이 왔는데, 그게 바로 내가 얘기한 두번째 편지인 셈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무슈 데르즈몽은 우리에게 그 첫 대목만 읽어주었지요."

 

9. 죽음의 방

10. 탈출

2부 기적의 돌

11. 신의 재앙

"자, 마담......이제부터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는 아마 길고도 곤혹스러운 내용이 될 거요. 그러니 일단 어디 좀 앉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이 얼른 튀어나오지 않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이 외발 원형탁자 위에 기운을 북돋을 만한 것도 준비되어 있으니......자, 비스킷하고 오래 된 포도주도 조금 있고, 샴페인도 한 잔쯤 나쁠 건 없겠지......"

그는 다소 과장된 예의를 차렸는데, 그것은 마치 반쯤 야만족이나 다름 없는 게르만인들이 우리도 문명의 섬세함을 갖출 만큼 갖췄다고 지레 내세우는 듯했고, 이미 정복자의 당연한 권리로 조금은 거칠게 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한테 어울리는 세련된 에티켓쯤 얼마든지 익숙한 처지라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베로니크는 예전부터 바로 그와 같은 면면을 대할 때마다, 남편의 진짜 태생이 어디인지 더없이 생생하게 실감하곤 했었다.

 

12. 골고다 언덕

13.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14. 늙은 드루이드 사제

15. 격돌

16. 보헤미아 왕가의 판석

17. 운명이 점지한 잔인한 왕자

18. 신의 돌

"맞는 말입니다. 심지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일정한 영향을 줄 정도로 집요한 전설이니까요. 솔직히 우리 중 누구도 그 기적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웬걸요? 적어도 나는 기적을 믿은 적은 없는 걸요!"

이번에는 대위가 발끈했고, 아이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아닐걸요! 아마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믿고 있을 겁니다. 최소한 일말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들 있지요. 만약 그렇지만 았았다면 필경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진실을 파헤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로 맞췄다, 꼬마야! 라듐이지. 사실 방사능현상은 거의 모든 자연현상 속에서 감지된단다. 온천수의 효과에서도 느낄 수 있듯, 자연 전체에서 그런 현상이 확인된다고도 볼 수 있어. 하지만 라듐처럼 보다 극명한 방사능 물질은 좀더 노골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예컨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라듐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성분은 마치 전류가 흐를 때 발생하는 것과 유사한 영향력을 식물체의 생장에 행사하게 된단다. 두 경우 다 영양 중추의 흥분을 가져와 식물체에 필숮거인 요소들의 화합을 보다 용이하게 해서, 결국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거란다......또 한 가지 확인된 사실은, 라듐의 방사가 일부 세포들을 파괴하거나 혹은 그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때로는 진화의 양상까지 조절할 정도로, 생체조직에 확실한 생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야. 소위 라듐 치료요법이라는 것도 다 그런 원리를 통해, 관절 류마티스라든가, 신경통, 궤양, 습진, 종양 등을 개선, 치유하는 것이지. 요컨대, 라듐이야말로 현실적으로 효험이 있는 치료 인자(因子)인 셈이란다."

 

"위대한 과학자 앙리 베크렐(1852-1908. 1903년에 퀴리 부부와 더불어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여기 소개된 일화는 1901년 4월에 있었던 실화이다/역주)은 조끼 주머니에 극히 미세한 라듐 알갱이가 담긴 용기를 넣고 다녔다가, 단 며칠 만에 화농이 피부에 도지는 바람에 심한 고생을 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퀴리는 실험 삼아 같은 행동을 했고, 결과는 마찬가지였지요. 마게녹의 경우는 직접 손에다 라듐 알갱이를 댔으니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아마 암종(癌腫) 모양의 상처가 났겠죠. 과학적인 지식이 있을 턱이 없는 그로서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삶 아니면 죽음을 준다'는 그 기적의 돌이 자기에게 지옥의 불길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린 끝에, 그만 제 손목을 자르기에 이른 것이죠."

 

"하긴, 이처럼 아득한 가설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의 오묘하고도 무궁무진한 수단들에 기대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라듐 알갱이를 하나 온전히 만들어내기 위해서 과연 이 버찌 한 알, 이 장미꽃 한 송이......아니 여기 이 영리한 투-바-비앵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뭔가 특별하고 기적 같은 자연의 비법이 반드시 필요했을까요?"

 

"우리의 켈트족 조상처럼 그 돌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족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많아요. 실은 그 방면으로 내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하나 있거든요. 그 돌이 있다면 매우 소중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호랑이 이빨」참조/역주). 한 몇 달 걸리는 사업인데, 다 끝나고 나면 신의 돌을 프랑스로 가지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설립 계획 중인 국립 연구소에 기증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돌 때문에 저질러진 악행이 과학의 힘으로 순화되며, 사레크의 추악한 사건도 일거에 상쇄되는 셈이지요. 어떻습니까, 찬성하시는지요, 마담?"

 

"아, 정말이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한 사건이었지요! 세상 끔찍한 경험이란 경험은 기가 질릴 정도로 겪어온 몸이지만, 이번 것은 그 모두를 훨씬 능가합니다. 현실의 가능한 영역을 훌쩍 뛰어넘었고,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저만치 따돌리는, 그런 사건이었어요. 단 한 명의 미치광이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지금처럼 광기와 방황이 지배하는 시기에 발생한 만큼,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건이었습니다......조용하기만 하던 섬에 한 괴물이 나타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구상하고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평화시였다면 제아무리 괴물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끝까지 물고늘어질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고립된 섬에서 오늘과 같은 혼란한 시대가 맞아떨어졌기에, 괴물에게 그토록 비정상적인 특수한 조건들이 거저 마련된 셈이지요......"

 

"어때, 멋쟁이 투-바-비앵, 우리 이제 그런 끔찍한 사건일랑 그만 얘기하자꾸나! 하지만 몇 가지 재미나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기억해볼 만도 하지. 안 그러니, 투-바-비앵? 마게녹의 그 으리으리한 화원, 기억나니? 신의 돌에 얽힌 장대한 전설도 그렇지! 기적 같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라듐이 그득하게 도사리고 있는 제왕(帝王)의 묘석과 더불어 세계를 방랑하던 켈트족의 대서사시! 정말이지 근사한 구석도 없진 않았지......안 그래? 이건 말이다, 투-바-비앵, 내가 만약 소설가가 되어서 서른 개의 관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할 입장이라면 얘긴데, 난 결코 험악한 진실에 연연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투-바-비앵, 네 역할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그려넣을 거라구. 물론 돈 루이스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수다는 좀 줄이고 말이야. 대신 너를 과묵하고 용감한 구원자로 내세우겠어. 가증스런 괴물과 싸울 용사도 너이고, 괴물의 악랄한 흉계를 여지없이 분쇄하는 것도 바로 너 투-바-비앵이라구! 그러다 마침내 너의 기발한 본능으로 세상의 악을 벌하고 선에게 승리를 부여하는 거지......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근사할 거야. 왜냐하면 말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풀려나가기 마련이며, 결국에는 '모두 다 잘 될 것'이라는 진리를 어느 모로 보나 우리 똑똑하고 멋진 투-바-비앵보다 더 잘 가르쳐줄 만한 선생님이 내가 보기에는 없을 것 같거든......"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4

-아이러니의 천재, 아르센 뤼팽

 

서른 개의 관은 전작(前作) 두 편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한 악몽과도 같은 모험담이 펼쳐진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편들이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런 종류의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섬뜩하고 피비린내 나는 한 편의 신비주의적 드라마를 구상한다. 1918년부터 이 작품에 착수하면서, 르블랑은 19세기 말 고대 프랑스 전문가인 퓌스텔 쿨랑주(1830-1889) 박사의 저작을 꼼꼼히 참조하여 드루이드교()와 켈트 문명에 관한 자료들을 치밀하게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정성을 들인 이 작품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길을 걷게 된다. 그 해 5, 어느덧 150여 장에 달하게 된 원고를 소지한 채 탕카르빌의 별장으로 가던 도중, 그만 그 모두를 분실하고 만 것. 결국 전쟁이 끝난 19196월에 가서야 르 주르날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겨우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011일 일단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가, 19224월에는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 그 당시 매우 이름을 날리던 액션과 모험 소설(Les romans d`aventure et d`action)총서로 재간되기에 이른다. 역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 환상적인 추리, 모험소설은 당대의 저명한 비평가 장-밥티스트 바로니앙에 의해서,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열정적이고 매력적인 추리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특히 프랑스 고대문명에 뿌리를 둔 유구한 전설과 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항상 경쾌한 기지(奇智)를 잃지 않는 아르센 뤼팽의 개성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특히 막강한 구원자로서의 뤼팽 이미지가 완벽하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가 아르센 뤼팽을 사랑하고 그의 활약에 열광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여유 만만한 유머 기질과 두둑한 배짱을 잃는 법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심할 경우 다소 수다스럽고 경박해 보일 정도인 그 모습은 당시까지만 해도 여타 추리소설의 히어로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파격적인 이미지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소 경직된 시선으로 보면 자칫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아르센 뤼팽의 그런 모습 속에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전략(戰略)이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러니란 화자(話者)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발생한다.1) 이것을 좀더 전문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이러니의 의미론적 특성이란 잠재적 기의(起義, signifie latent)와 표출된 기의(signifie manifeste) 사이의 반의적(反意的) 관계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화자가 일련의 의도나 뜻을 품고 말을 하지만, 정작 말하는 내용은 그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쉬운 예로 어리석은 사람을 탓하면서 그래, 너 참 똑똑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때, ‘똑똑하다라는 말은 일종의 아이러니로서,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서는 거짓말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거짓말과는 성격이 다르다. ‘거짓말이란 화자가 생각하는 것(A)과 반대의 내용(not A)을 말함으로써, 이야기의 상대, 즉 청자(聽者)로 하여금 결국 그 말을 있는 그대로(not A)받아들이게끔 하는 데에 반해서, ‘아이러니는 화자의 생각(A)과 반대의 이야기(not A)를 하지만, 그럼으로써 화자가 생각하는 바(A)를 더욱 실감나게 받아들이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위의 편지 내용에 담긴 뤼팽의 생각, 잠재적 기의상대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그래서 아늑한 벽난로 곁을 박차고 나와주기를 바라는마음이다. 하지만 정작 표출된 기의는 그 반대, 수모를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기에’ ‘아늑한 벽난로 곁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라는것으로 제법 예의를 갖춰 치장되어 있다. 물론 셜록 홈스는 이 편지를 받자마자 곧장 뤼팽과의 일전(一戰)을 치르러 프랑스로 건너오게 된다. 아르센 뤼팽의 아이러니가 제대로 적중한 셈이다.

 

분명 은근한 미소를 동반했을 것이 틀림없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빈정대는 듯한 가면 뒤의 합리적인 지성을 짐작케 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아르센 뤼팽이 그저 툭 내뱉는 듯한 유머러스한 빈정거림 속에는 다분히 전략적(戰略的)인 기도(企圖)가 예리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 괴상한 연극에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왔나보군......배신자라도 처형하는 장면인가? 이젠 여배우의 연기를 감상할 차례인가보군......()의 여신께서 납셨어......거참 영광인걸!......마담 뒤그리발, 이왕이면 얼굴은 상하지 않게 처단해주시구려.

 

사실, 이와 같은 과감한 아이러니는 그 두둑한 배짱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하려는 전략과 더불어, 자기 내면으로 볼 때에도 무척 심오한 차원의 기도(企圖)를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현실을 스스로 교묘히 비껴감으로써, 의지(意志)와 용기가 흔들리는 것을 미리부터 차단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작금의 위협적인 상황을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치부하려는 듯한 태도야말로, 현실을 비현실로 치환(置換)해보려는 자세를 대변한다.

 

나쁘진 않군그래, 당신 아파트, 그런 대로 괜찮아...... 전기 불도 들어오고, 중앙난방장치에다 수세식 변기까지......한마디로 현대식 편의시설을 죄다 갖췄구만......이만하면 완벽해요......교도소장 나리! 이곳에 머물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답답한 감방이 통쾌한 아이러니의 힘을 통해서 안락한 아파트로 둔갑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현실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에 대한 자아(自我)의 반응이 달라지며 이는 곧 그 현실에 도전하고 끝내는 초극(超克)해버리는 뤼팽 특유의 활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자아의 나르시시즘이 극대화된 나머지 현실의 충격(traumastisme)을 덮어버리고2), 결국에는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열악한 상화에 부딪칠 때마다 자기 자신을 마치 삶이라는 연극의 연출자처럼 위치시킴으로써, 위협받고 상처받은 자아를 효과적으로 치유할 심리적 기제(機制)가 갖춰지는 셈이다. 아르센 뤼팽에게서 흔히 보는 호들갑스러운 수다와 익살은 현실적인 불안과 위협을 물리치고 나르시시즘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마법적 주문(呪文)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초자아(超自我)란 자아를 위로하고자 하며, 고통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를 바란다”3)는 프로이드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온갖 수다 속에서 호들갑을 떠는 뤼팽은 곧 그 자신의 초자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때 뤼팽의 아이러니는 그 초자아의 언어적 체현(體現)이자 현실을 치고 나가는 효과적인 무기(武器)인 셈이다.

 

1) V. jankelevitch, 아이러니(Ironie), Flammarion, “Champs”, 64, p.76.

2) S. Freud,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Le Mot D`espirit et sa relation a l`inconscient), Gallimard, p.323

3) 같은 책,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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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삼각형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포탄 파편과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다. 전시상황이 무대라는 점, 여자의 정체가 소설에서 미스터리로 작용한다는 점, 열렬히 사랑하지만 오해할 수 밖에 없는 두 남녀, 그리고 조력자로 등장하는 뤼팽. 결국 이 모든 일화는 단순히 뤼팽의 비범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지. 뤼팽의 뛰어남과 두 남녀를 둘러싼 미스터리에서 방향을 다소 잃은 것 같은 이야기들이 아쉬웠다. 누가 봐도 파트리스는 뤼팽의 분신이었는데. 중반부를 지나서 더 이상 뤼팽이 아닌가? 하고 느낄 무렵부터 급속도로 판단력이 떨어지고 삽질(?)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다. 역시 기암성의 소년 탐정만큼의 카리스마와 재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황금삼각형은 전시상황을 똑같이 무대로 한 포탄 파편과는 달리 실제 전쟁이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애국심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기는 하나, 어마어마한 황금의 향방을 둘러싼 복잡한 미스터리가 팽팽한 추리적 기법으로 전면에 걸쳐서 펼쳐진다. 연속적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기상천외한 범죄수법과 왜곡된 정염(情炎)의 파노라마가 작품 전반에 걸쳐서 음산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뤼팽의 대역전극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복합적인 퍼스낼리티를 파헤쳐본다.

 

 

1부 불똥비

코랄리 어멈

오른손과 왼쪽 다리

녹슨 열쇠

화염 앞에서

남편과 아내

오전 719

오후 1223

에사레스 베의 행적

파트리스와 코랄리

붉은 끈

심연 속으로

 

2부 아르센 뤼팽의 승리

공포의 도가니

음산한 못질

낯선 사나이

-엘렌호()

4()

시메옹, 좌충우돌하다

제라덱 박사

시메옹의 최후의 희생자

빛이여 비추시라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3

 

-아르센 뤼팽, 그 복합적인 퍼스낼리티(個性)

 

 

소설 속 아르센 뤼팽을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독특하게 분석한 바 있는 제라르 귀아슈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의 미묘한 뉘앙스를 분석하면서

 

 

그 인물에 내재하는 복합성(complexite)을 재치 있게 논한 바 있다.* 즉 그리스어인 아르센(arsen)’남성(男性)’이나 남성적인 것’, 혹은 강인한 것을 의미한다는 전제하에, 그 단어를 연상시키는 이름 아르센(Arsene)과 더불어, 뤼팽(Lupin)이라는 성()에서 느껴지는 프랑스어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울림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부터가 우리의 영웅이 가지는 복합적인 개성을 반영한다는 이야기이다. 강한 것과 우아한 것의 조합이 이름에서부터 느껴진다는 이와 같은 지적은, 그만큼 아르센 뤼팽의 완벽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인물 내부의 복잡한 이중성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신출귀몰한 솜씨를 자랑하는 괴도, 천하무적의 영웅으로서 불가능이 없어 보이는 아르센 뤼팽은 거의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두르는 것이 다반사이나, 여인을 향한 애정에 곧잘 함몰하고, 스스로의 재치에 발목이 잡히는 모습에서는 다분히 인간적인 한계가 느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구로도 둔갑할 수 있고 언제,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곧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무소불위의 능력을 휘두르는 신성(神性)의 특징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뤼팽은 그 어느 인간보다도 존재의 불안정성에 혹독하게 시달린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 걸. 거울을 보면서도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니까......”

 

무한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기 떄문에 정작 자신의 본모습이 증발해버리고 마는 존재의 패러독스(paradox)......

 

누구로든 둔갑함으로써 존재의 영역을 무한하게 넓힐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궁극적으로는 존재에서 극단적인 무()의 상태와 겹쳐지는 셈이다. 이처럼 역설적인 이중성은 아르센 뤼팽의 가장 근간(根幹)이 되는 도둑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그 자신이 표명하는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통해서도 뚜렷이 짚어볼 수가 있다. 그는 작품 여기저기에서 도둑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충만한 존재의식과 자긍심의 이면에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어두운 자각(自覺)의 얼굴이 늘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뇌리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한아름 안고, 호주머니마다 불룩한 데다, 터질 듯 팽팽한 자루를 둘러맨 자신의 모습이 이 여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을지 서서히 감이 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이 그의 내부로 물밀 듯 밀려왔다. 영락없는 현행범으로 발각된 험상궂은 도둑놈의 모습......아르센 뤼팽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세계를 호령하던 대도(大盜)의 모습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의 신과 같은 확신과 자긍심이 이처럼 인간적인 수치심과 자괴감을 동반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특이하고 복잡한 개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자의식에는 거의 항상 흠모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일종의 중개자로 작용하지만, 뤼팽 본인의 내부에 잠재하는 이중적인 개성을 논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괴도신사(gentleman-cambrioleur)라는 그의 닉네임 자체가 이미 복합적인 개성을 표방하고 있다. 세련되고 우아한 사교계의 신사와 거칠고 험난한 암흑가의 범죄자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르센 뤼팽의 이러한 복합적 개성이 그의 탄생배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서로 무척이나 대조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출신성분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센 뤼팽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는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에는 뤼팽의 아버지에 관한 단서가 비교적 상세하게 암시되어 있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라울 당드레지, 즉 아르센 륖애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다분히 부끄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하층민 출신이며 욥처럼지독하게 가난했고, 복싱과 펜싱, 체조 등을 가르치는 일개 체육교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귀족가문의 여식이기에 그러한 면면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달가워하지 않은 데에는 귀족 출신이었던 어머니와의 태생적인 불균형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뤼팽의 어머니 쪽은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랬으나 원래 내로라하는 지방 귀족 가문이며(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p.19),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에서 당드레지(d`Andresy)라는 귀족의 성()도 바로 어머니의 성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그런 것을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하층민과 결혼한 데다, 그나마 일찍이 사별하여 온갖 고생을 해오며 자식을 길러낸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왕비의 목걸이참조), 어린 라울의 가슴 속에는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충분히 싹터 자랐을 수 있다. 결국 뤼팽은 귀족 출신의 연인 앞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아르센 뤼팽)을 밝히기를 주저하는데, 그 이유는 뤼팽(Lupin)이라는 아버지의 성()에 대한 오랜 거부감 떄문이었다.

  

이처럼 아버지를 부정하는 뤼팽의 태도는 실제로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예로 여러 설명이 제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위의 대사에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 속에는,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근원적 이마고(imago)가 서로 갈등을 치르면서 운명적으로 인생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을 뤼팽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라울 당드레지는 아마 장군이다, 장관, 혹은 대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아르센 뤼팽만 아니라면요(......) 라울 당드레지......아르센 뤼팽......하나의 조각상에 두 개의 얼굴이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과연 이 세상의 태양이, 그 영광의 광채가 어느 쪽을 비춰줄까요?”

 

어려서부터 복싱을 비롯한 온갖 거칠고 남성적인 체육훈련을 전수해준 아버지와 귀족 가문으로서의 우아함과 예의 바른 기풍을 심어준 어머니......이 두 상반되는 운명적 인자(因子)는 어느 하나 완전히 말소되지 않은 채, 결국 괴도-신사라는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 안에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 어느 하나에 전적으로 치중하지 않고, 그 모두를 아우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혁신해가는 뤼팽의 모습이다. 아르센 뤼팽의 어느 모험담에서나 일관되게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그가 항상 거친 협객이자 괴도이면서 그와 동시에 우아하고 세련된 신사이기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서, 괴도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정의의 가치에 대한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그와 동시에 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는 범법자의 모습이 한꺼번에 체현(體現)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못하기에 항상 불안정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그 상반되는 정체성으 요인들을 줄기찬 변신(變身)에의 탐닉 속에서 절묘하게 조절하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어가는 그의 모습은 가히 연금술사의 비기(秘技)를 연상시킨다. 괴도임과 동시에 신사이며, 신임과 동시에 인간이고, 천사임과 동시에 또한 악마이기도 한 아르센 뤼팽......그의 복합적인 개성은 결코 한 개인의 음울한 분열증이 아니라, 어쩜 우리 모두의 꿈과 욕망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구현된 살아 있는 원형(原型, archetype)일 터이며, 바로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해 그토록 무수한 이들의 공감(sympathie)과 동화(identification)를 이끌어내는 것이라 하겠다.

 

 

  

 

 

 

 

 

 

 

*Gerard Guasch, 아르센 뤼팽, 디방에 누운 인물(Arsene Lupin, Un caractere sur le divan)L`Harmattan, 1997,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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