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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ㅣ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단편을 좋아한다. 셜록 홈즈도 아가사 크리스티도 단편을 읽다 보면 마치 가장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골라먹는 느낌이 들었다. 모리스 르블랑도 마찬가지.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고명이 두툼한 카나페를 맛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덟 개의 단편 모음집, 제목에도 들어가는 숫자 8, 눈이 시원해지는 푸른빛의 표지. 그야말로 쾌남 뤼팽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장편 소설에서 뤼팽은 감정에 허우적거려서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하고,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며, 특유의 능글맞음과 여유만만한 모습이 무너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상화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유머까지. 원래 연작 소설을 좋아하는 내 취향 저격 작품집이었다.
모리스 르블랑은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라는 매우 독특하고도 감각적인 작품을 통해서 또다시 예전의 경쾌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여덟 편의 단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되기 여드레 전부터 수수께끼 같은 괘종시계의 그림을 게재함으로써 사전에 독자들의
지대한 호기심을 유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813의 비밀」 이후 지독스러운 악몽처럼 전개되던 전시상황 속의 아르센 뤼팽 모험담은
이제 그 처절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일신해서,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추리소설의 본령으로 돌아온 듯하다. '8'이라는 숫자가 하나의 절묘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가운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결합된 이 작품은 특히 아르센 뤼팽과 여성의 미묘한 줄다리기식 감정 게임이
참신한 감상거리이며, 추리소설 작가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심리주의 작가로서의 모리스 르블랑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秀作)이 아닐 수 없다. 이
번을 포함하여 두 차례 걸친 해설은 아르센 뤼팽의 적수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뤼팽 모험담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결구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보기로 한다.
이제부터 제시될 여덟 가지 사건들은 옛날에 아르센 뤼팽이 자기 친구인 레닌 공작이 겪은 일이라며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거기 나오는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거지, 단골 수법 등, 그 무엇을 따져봐도 친구 사이라는 두 인물을 서로 혼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긴 아르센 뤼팽이라는 사람은 워낙 엉뚱한 데가 있어서 실제로 자기가 나서지 않은 일을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떠벌릴 뿐만 아니라, 정작 자기가 저지른 일도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가 있는 위인이다. 아무튼 그 점은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1. 망루 꼭대기에서(석 달 후 12월 5일->9월 5일)
"저런, 가끔은 그래도 생각이 변하는 것 같은데요......다른 곳에 있어야 하면서도 지금 바로 이곳에 와 있지 않습니까?"
여자는 문득 당혹한 기색이었다. 기세 등등하던 역심(逆心)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마치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른 사람, 기상천외한 행동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보다 관대하며 사심이 없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놀란 눈길로 레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남자가 별 계산도, 흑심도 없이 행동하고 있으며, 자기 말마따나 길을 잘못 든 여인을 향한 그저 친절한 신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스물여섯 살이고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당신은 대글로슈 백작의 의붓조카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데 그 조카라는 사람이 약간 제정신이 아닌 자라 감금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당신은 이혼도 못하게 된 데에다, 지참금을 남편이 죄다 써버려서 삼촌인 백작에게 얹혀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백작 부부가 워낙 사이가 안 좋아, 환경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태입니다. 사실 백작에겐 전처가 있었는데, 그만 지금 부인의 첫 남편과 눈이 맞아 달아나버리고 말았지요. 결국 둘 다 버림 받은 남녀가 홧김에 서로 합치게 되었지만, 그런 억지 결합 속에서는 원한과 환멸밖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 여파에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지요. 열두 달에서 열한 달가랴은 외롭고 갑갑하며 따분하기만 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한테 홀딱 빠진 무슈 로시니가 나타납니다. 그는 당신에게 도피할 것을 제안했지요. 물론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워낙 권태의 연속인 삶, 젊은 날은 하루 하루 속절없이 흘러만 가고, 뭔가 새롭고 신나는 일에 대한 열망이 당신을 슬슬 부추깁니다......결국 당신은 구애자를 따돌리는 건 나중 일로 미루더라도 일단 그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합니다. 또한 이 정도까지 소동을 부리고 나면 삼촌도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마땅한 계산을 치르고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도 한몫을 했지요.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자,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슈 로시니의 품에 안길 것이냐, 아니면 나를 믿을 것이냐......"
마침내 남자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보니 의심이 드는 모양이로군요? '도대체 이 모험 애호가가 날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걸까? 보아하니 내가 마음에 들긴 드는 모양인데, 조만간 수상쩍은 사례(謝禮)라도 하라고 안 할지 몰라' 뭐 이런 생각을 굴리는 것 아닙니까? 하긴 무리도 아니지요......좋습니다! 우리 사이에 정확한 계약을 선행하는 게 좋겠어요."
"첫 모험을 한 오늘 알랭그르의 괘종시계가 여덟 번 종소리를 울렸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나의 판결이라고 보고, 예컨대 앞으로 한 석 달 동안 일곱 차례를 더 멋진 모험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여덟번째 모험에 이르게 되면 그때 가서 당신이 내게 허락하기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뭘 말인가요?"
하지만 남자는 은근슬쩍 요점을 피해갔다.
"중요한 건 말입니다, 만약 도중에 내가 당신을 재미있게 해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 경우 언제든 당신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나를 따라올 경우 그러니까 모두 여덟 차례의 모험을 내가 당신과 더불어 완수하게 되는 석 달 후 12월 5일 그 괘종시계가 여덟 번의 종소리를 울리는 바로 그 순간-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 낡은 구리 진자는 이제 멈추지 않을 겁니다-당신은 내게 허락하는 겁니다......"
"대체 뭘 말이에요?"
여자는 궁금해 안달이 난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대가로 요구하려는 그 앙증맞은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지금쯤 여자도 그 정도 속내쯤이야 눈치챘으리라는 것을 남자는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노골적인 말로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바라보는 즐거움 하나만 허락하는 걸로 충분합니다......그러니 제안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자, 어서 말해보시죠. 당신이 요구하는 건 무엇입니까?"
남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음을 간파한 오르탕스는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블라우스 깃을 여미는 버클 하나를 찾아주는 일이에요. 금세공 틀 속에 박힌 홍옥수(紅玉髓)로 된 골동품인데, 어머니가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걸 다시 저한테 물려주신 거지요. 그것으로 인해 두 분 다 행복하셨고, 나 역시 행복했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랍니다 한데 그게 그만 보관함에서 없어지고 나서는 불행하게 되었어요. 그걸 좀 찾아주세요, 수호천사님......"
"그 버클이 언제 없어진 겁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 그러니까 그게......한 7년인가......아니, 8년......9년인가......잘 모르겠네요......어디서 잊어버렸는지도......어떻게 없어졌는지도......아무래도 도통 모르겠어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행복할 것입니다."
2.
물병(파리에 둥지를 튼 나흘째 되는 날->9월 9일)
파리에 둥지를 튼 나흘째 되는 날, 오르탕스 다니엘은 불로뉴 숲에서 레닌 공작과 만날 약속을 했다. 눈부신 아침, 두 사람은 앵페리알 레스토랑 테라스의 약간 동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는 매력이 넘쳐났고 쾌활하기 그지없었으며, 그저 사는 즐거움에 온통 들떠 있었다.
"자넨 배가 볼록한 물병을 창가에 슬쩍 얹어놓았지. 결국 그 크리스털제(製) 물병이 렌즈 역할을 했고, 창문으로 비쳐드는 태양광선을 모아다가 적절하게 준비해둔 상자와 박엽지 더미로 쏘아보내준 거지. 한 10분 있으니까 불이 화르륵 붙은 거고. 정말 기발한 발상 아니겠어? 세상 내로라 하는 발명품들이 거의 그렇듯, 사소한 우연 속에서 탄생한 걸작 아니냐구! 그야말로 뉴턴의 사과라고나 할까?......언젠가 물이 가득한 물병을 통과한 햇살이 이끼 언저리라든가 성냥의 유황 덩어리에 맞아떨어져 불꽃이 이는 걸 목격했겠지. 바로 좀 전에도 문득 햇살이 무척 따사로운 걸 느끼자마자 자네는 속으로 '옳다구나!' 한 거야. 그 즉시 물병을 적당한 장소에 갖다놓은 거고. 정말이지 놀라운 재치였네, 가스통!"
"당신은 안 가세요?"
오르탕스가 물었다.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아주 급한 약속들이지요......"
"그래도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일도 크나큰 즐거움일 텐데......"
"그래봤자 곧장 지겨워질 즐거움일 뿐이오.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건 늘 끝없이 도전하는 가운데 쟁취되는 것이죠. 반면 한 번 쟁취하고 나면 어떤 즐거움도 시시해지기 마련이지......"
여자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고서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기막힌 선행(善行)을 그저 스포츠처럼, 그것도 기발한 재주로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이 묘한 사내를 향해 그녀는 찬탄의 말을 아끼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모든 사건들이 한없이 놀라울 뿐. 치밀어 올라오는 강렬한 감정이 목을 메이게 하고, 눈에는 눈물만 그렁그렁 고이게 할 따름이었다.
그런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조용히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이미 그걸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소......"
3. 테레즈와 제르맨(10월 2일)
10월 2일 아침, 워낙 그윽한 늦가을 날시로 인해서 에트르타의 별장에 늦게까지 처진 몇몇 가족들은 어슬렁거리며 해변으로 내려왔다. 이 지역 풍광(風光)에 아주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는 창공의 부드럽고 창백한 빛깔과 대기 중에 떠도는 아스라한 기운만 아니라면, 수평선에 드리워진 구름들과 에트르타의 절벽들에 에워싸인 저 고요한 바다를 바위들의 병풍을 둘러친 하나의 잔잔한 산정호수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창공의 푸른빛은 좀더 짙어졌고, 바다는 보다 평온해졋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한참만에 레닌이 조용히 물었다.
"만약 내가 어떤 음모에 휘말려 곤욕을 치를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당신을 믿고 의지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나를 끝내 구해줄 거라는 데엔 눈곱만큼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 어떤 어려운 장애가 있어도 말이죠. 당신의 의지력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여자의 말에 레닌은 나지막이 이렇게 화답했다.
"당신을 즐겁게 해주려는 나의 욕망에 끝이 없는 것이라오......"
4. 영화 속의 단서(9월 18일->3주->10월 9일 경)
로즈-앙드레는 유연한 연기력에 호감 어린 마스크를 갖춘 미녀 배우였는데, 어쩐 일인지 연극무대에서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최근에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로 스크린에 대뷔한 처지였다(이 여배우는 여러 모로, 모리스 르블랑의 누이동생이자 배우였던 조르제트를 모델로 했다. 「뤼팽 대 홈스의 대결」'모리스 르블랑 연보' 참조/역주). 바로 데뷔하던 날 저녁, 자체만으로는 별로인 영화 "행복한 공주"를, 그녀는 활기 넘치는 연기와 강렬한 미모로 무척이나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자의 이름은 달브레크(역시 당시 르블랑의 여동생 조르제트의 연인이었던 로제 카를이 모델이다/역주). 항상 동료 배우들로부터 동떨어져 지내는 과묵하고 내성적인 괴짜라고 하더군요. 그 자가 당신 동생에게 특별히 열을 올리고 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더군요. 한데 아까 본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그의 연기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 다음 새 영화에도 기용했다고 합니다. 최근까지 파리 근교에서 영화 촬영에 전념했다고 하네요. 한데, 비교적 그의 연기에 다들 만족하고 있던 차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돌발했다고 합니다. 9월 18일 금요일 아침, 소시에테 사(社)의 창고문을 억지로 뜯어 연 그는 으리으리한 리무진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는데, 그 전에 이미 2만 5000프랑의 공금을 깨끗이 털었다지 뭡니까! 회사측은 즉시 고발을 단행했고, 도난 당한 리무진은 드뢰 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월요일 아침, 뱃사공은 자기 배 한 척이 사라진 것을 꺠달았다는 것이다. 그 배는 한 5리 정도 더 내려가서 기슭의 개흙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간신히 찾아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여름 영화 촬영이 있었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로군요?"
"그런 셈이죠."
순간 오르탕스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온몸은 쩌릿한 전율로 부르르 떨렸다. 방금 넌지시 흘린 말이야말로, 초기에는 비교적 허술했지만, 함께 불안과 열정 속에 여러 일을 겪는 가운데 차츰 둘 사이에서 돈독하게 맺어지고 있는 애정의 끈에 관해서 처음으로 노골적인 언급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모든 사건들을 제 마음대로 통제하고, 적이든 동지이든 상대의 운명을 항상 가지고 노는 듯한 이 비범한 사내 곁에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연약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요컨대, 이 남자는 사람을 매혹을 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품게 만들엇다. 그녀의 정신 속에서 세르주 레닌은 일종의 주인(主人)처럼 여겨졌고, 그 앞에서 스스로 방어해야만 할 적(敵)임과 동시에, 보다 자주 골칫덩이면서도 지극히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친구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5. 장-루이 사건
워낙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라 오르탕스는 어리둥절했다. 두 사람은 그저 한가로이 거닐면서 센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한 여인의 실루엣이 다리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허공 중에 몸을 날렸던 것이다. 사방에서 비명과 소란이 이는 가운데 오르탕스는 레닌의 팔뚝을 와락 부여잡고 말했다.
"설마 뛰어들려는 건 아니죠?......절대로 안 돼요!......"
하지만 눈 깜짝할 새였다. 남자의 윗도리가 여자 손에 붙들린 채 훌러덩 벗겨지는가 싶더니, 레닌의 몸뚱어리가 단번에 도약을 했고 그 다음...... 그 다음에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그로부터 3분 뒤, 오르탕스는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 휩쓸린 채 강기슭까지 내려가 있었다. 곧이어 창백한 얼굴에 흠뻑 젖은 검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웬 여인을 안고 제방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레닌의 모습이 보였다.
"어휴! 난데없이 멱을 감다니! 이런 경우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튼 누가 물에 뛰어드는 걸 보면 덮어놓고 나 역시 뛰어들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아마 우리 조상 중에 사람 구하려다 물귀신 된 구조요원이라도 있었나봐요......"
그러지 않아도 난데없는 불청객에 어안이 벙벙하던 장-루이는 주느비에브의 이름을 듣자 완전히 평정을 잃는 눈치였다. 자신이 뭐라고 내뱉는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레닌의 깍듯한 말투에 장단을 맞추려는 듯, 그 역시 주섬주섬 소개를 한다는 것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흘리는 것이었다.
"여기는 제 어머니 되시는 마담 도르미발이고......이쪽은 마담 보부아, 제 어머니이시고......"
순간 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레닌은 산뜻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오르탕스는 마담 도르미발과 마담 보부아 둘 중 누구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야 할 지 몰라 망설였다.
"자로고 운명이 그처럼 교묘하게 뒤틀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연과 우연이 그런 식으로까지 노골적으로 겹치는 경우란 드문 법이에요! 하필 의사와 하인, 하녀 모두가 집을 비운 날 밤, 두 여성이 거의 동시에 진통을 느끼고, 또한 사내아이를 같은 시간대에 분만한다는 것부터가 가능성이 희박한 우연입니다. 굳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고를 덧붙일 필요도 없어요! 공교롭게도 그 순간 램프 기름이 떨어지고 심지가 잦아들었다는 얘기는 아예 관두는 게 낫단 말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산파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무를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 처리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아무리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당황한다 해도, 직업상의 본능적 감각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최소한 두 아기를 놓아둘 때 서로 구분이 될 만한 위치와 자리를 염두에 두기 마련인 겁니다. 설사 별도의 표식 없이 나란히 눕혀두었다 해도, 최소한 좌우측의 구별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서로 엇비슷한 배내옷으로 둘둘 말았다 해도, 미세한 차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굳이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만한 기억속의 뭔가가 있었을 거예요. 신생아를 혼동한다구요? 난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판별이 불가능했다구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소설 속이라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온갖 황당무계한 일들을 상상할 수 있고, 별의별 모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하지만 현실의 한복판에서는 항상 일정한 고정점이 있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이런저런 사건들이 스스로 일정한 논리적 법칙에 의거해 자연스레 일어나고 또 저무는 법이랍니다. 따라서 나는 부시뇰 간호사가 결코 두 신생아를 혼동할 리가 없었노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에도 장-루이가 정녕 누구의 자식인지는......"
레닌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막았다.
"맙소사, 아직도 그 케케묵은 이야기로군요! 이젠 다 끝난 얘기올시다! 그만, 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려, 어미가 둘인 사내의 이야기는 이제 소인(小人)도 별 흥미가 없나이다!"
상대가 어찌나 장난스레 시침을 떼며 익살맞은 말투로 말하는지, 오르탕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훨씬 좋군요! 그래요, 그렇게 실컷 웃는 겁니다!......"
레닌도 지그시 웃으며 덧붙였다.
"......인간이란 눈물을 통해서보다는 웃음 속에서 세상을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매번 기회가 닿을 때마다 활짝 웃어야만 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뭔데요?"
"어여쁜 치아를 가졌거든......"
6. 도끼를 든 귀부인(10월 18일)
이처럼 난감한 문제를 둘러싼 떠들썩한 논란은 논리적으로 따져 새로운 참극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10월 18일 직전까지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레닌 공작과 오르탕스가 저녁에 만날 약속을 정하느라 전화통화를 하던 당일 아침에도, 자연스레 최근 신문에서 읽은 기사 내용을 거론하게 되었다.
"조심하십시오! 혹시라도 길을 걷다가 도끼를 든 귀부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작정 맞은편 보도로 피하세요."
반(半)농담조로 호들갑을 떠는 레닌에게 오르탕스도 장난스레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그 아리따운 귀부인께서 끝내 나를 납치해버리면 어떻게 할까요?"
"그럼 길가에다 흰색 조약돌이라도 뿌려놓으세요. 그리고 최후의 도끼날이 번뜩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이렇게 중얼거리세요.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가 나를 구해줄 테니까......'오, 물론 여기서 '그'는 바로 나이죠. 아무튼 행운을 빕니다. 이따 저녁 때 봐요, 아가씨."
레닌은 몹시 괴로웠다.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력한 감정이 그와 오르탕스 사이를 맺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호기심과 욕망, 단순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호하고 즐겁게 해주면서 삶의 여유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은, 이제 글자 그대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두 사람은 정작 자기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제3자의 문제를 둘러싼 모험의 시간들만을 함께 해왔기에, 둘 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자, 레닌은 오르탕스가 삶에서 차지한 자리를 새삼 실감했으며, 그녀가 어딘가에 갖혀서 고통받고 있는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H 자(字)로 시작하면서 모두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의 소유자를 희생 제물로 고른 겁니다! 어때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름의 글자수가 모두 여덟인 데다, 첫 글자 역시 알파벳의 여덟번째 글자인 H자이고, 나아가 그 '8'이라는 문제의 숫자 또한 H로 시작하는 단어라 이겁니다!(프랑스어에서 8은 huit[위트]로 읽는다/역주) 결국 항상 H자가 문제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더군다나 흉기로 사용된 것 역시 도끼(프랑스어로 hache[아쉬]이다/역주)가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오르탕스는 무사했다.
부랴부랴 결박한 끈부터 풀었고 답답한 재갈을 빼주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늙은 유모로부터 레닌은 얼른 등불을 받아들고 오르탕스를 비춰보았다.
순간 레닌은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해쓱해진 얼굴에 신열로 이글거리는 퀭한 눈망울을 하고서도 오르탕스 다니엘은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단 한 시도 좌절하지 않고서 말이에요......당신을 믿었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여자는 금세 정신을 잃었다.
"끔찍한 사건이라니, 그게 뭔데요?"
여자는 해맑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레닌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일견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오르탕스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했었고, 아직까지고 자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경에 빠졌었는지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소위 도끼를 든 귀부인과 스스로 방금 겪은 모험을 서로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레닌은 언젠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줄 날이 오겠지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르탕스 다니엘은 당분간 조용히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프랑스 한복판에 위치한 바시쿠르라는 마을 근방 친척 집으로 떠나게 되었다.
7. 눈 위의
발자국(11월 14일)
바시쿠르 경유, 라 롱시에르발(發)
11월 14일
파리 시, 오스망 대로, 레닌 공작 귀하
소중한 친구에게
아마 지금쯤 당신은 나를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곳에 당도한 지 벌써 3주가 다 되어가는데 편지 한 장 없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적어보내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얼마나 끔찍한 죽음의 위협에서 끄집어내주었는지, 그 무시무시한 사건의 비밀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깨닫고 있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절대로 조용하게 홀로 지낼 필요가 있다는 걸요......만약 파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그래서 당신과 더불어 계속 치열한 모험에 뛰어들었다면 어떘을까요? 오, 큰일날 소리지요! 이젠 지긋지긋하답니다! 타인이 치르는 모험은 무척 흥미진진할지 몰라도, 자신이 직접 겪어서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이라면......아, 정말이지 끔찍해요! 난 아마 최근에 겪은 그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좋았어, 썩 잘된 거야. 우리의 요지경 모험을 더 이상 진행하기가 싫어졌다는 거잖아. 이번만 해도 일곱번째인 데다, 바로 그 다음이 계약상 특별한 의미를 띠는 여덟번째 모험이니 더 나아가기가 싫은 게 당연하지. 사실 내심은 무지하게 바라면서도......꺼려지는 거야......"
그는 손바닥을 비벼대면서 생각했다. 이 편지는 여자가 서서히 레닌의 영향력에 사로잡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소중한 증거인 셈이다. 그녀가 이 남자에 대해 찬탄과 믿음, 불안과 두려움,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런 애정이 가미된,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상태에 빠져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일종의 동지애(同志愛)로써 모험의 동반자 노릇을 해왔기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어느새 자신의 감정에 대해 불안한 기분이 들었고, 약간의 새침기가 섞인 수줍음을 내세우며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것일 터.
시각은 10시 30분이었다. 레닌은 들판으로 걸어나와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새하얗게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에는 눈길 하나 던지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다시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주변을 에워싸고 사건 얘기로 떠들썩한 주막의 손님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2층 자기 숙소로 올라가 꽤 오랜 시간 잠을 청했고, 문득 노크 소리에 깨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다......당신이......"
어리둥절 중얼거리는 레닌 앞에는 오르탕스가 조용히 서 있었다.
둘은 서로의 손을 지그시 맞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어떤 생각도 말도 이 재회의 기쁨에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닌이었다.
"내가 잘 온 거죠?"
여자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그래요......실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마티아스 드 고른은 잘못한 게 없는 걸요. 그저 우물 주위로 발을 구르며 다녔고, 자기 것이 아닌 권총을 허공에다 세 발 쏜 다음 멀치감치 내던지고 나서 자기 아버지 집으로 뒷걸음질쳐서 얌전히 걸어간 것뿐이에요. 딱히 법적으로 나무랄 일을 저지른 건 아니랍니다. 그를 잡아서 무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6만 프랑이요? 글쎄요, 내 생각에는 무슈 비냘도 그럴 마음이 없을 것 같은데요......별달리 고발할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무슈 비냘?"
잠시 후 오르탕스를 데리러 저택 안으로 돌아왔을 떄, 레닌은 여자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장 그녀의 사촌인 에르믈랭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오르탕스는, 미안하지만 먼저 실례를 했으며, 너무 피곤해서 좀 쉬고만 싶다는 말을 대신 전하도록 아예 사촌 언니에게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레닌은 돌아 나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았어!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군......그녀는 분명 나를 피하기 시작한 거야......그럼 결국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서서히 결말이 가까워오는구만......'
8. 메르쿠리우스 신상(11월 30일)
마담 다니엘 귀하
라 롱시에르, 바시쿠르 경유
11월 30일
너무도 소중한 벗에게
또다시 2주가 지나도록 편지가 없군요. 이제는 우리의 협조관계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는 저 12월 5일 이전에 편지를 받으리라는 기대를 더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바래요. 그래야 이미 당신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이 계약에거 당신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나로서는 지난 일곱 차례의 전투 모두, 우리가 함께 일궈낸 찬란한 승전행진일 뿐만 아니라, 무한한 기쁨과 열광의 뜻깊은 경험이었노라고 자평(自評)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나는 인생을 좀더 활기차고 살맛 당기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즐겁게 바라보며 살 수 있었소.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너무도 강렬해서 차마 당신에게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그저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싶다는 것말고는 진정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이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하는 걸 원하지 않게 되었어요. 나로 말하자면 '언제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입니다!
"아! 당신 참 그동안 짖궂게도 굴더군요! 아예 문을 닫아거는가 하면......편지 한 장 주지도 않고......정말이지 매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괴로워한 줄 아십니까? 결국 나로서는 뭔가 대단한 수단을 모색해야만 했고, 엄청난 미끼로 당신을 유인해내야만 했답니다. 솔직히 내가 보낸 멋진 편지, 썩 괜찮았죠? 청색 드레스에, 세 갈래 골폴 가지라......그런 걸 어찌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다 더해 내가 직접 꾸며낸 몇 가지 수수께끼들도 살짝 첨가했죠. 일흔다섯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라든가, 은제 묵주를 돌리는 노파 등등 말입니다......어쨌든 당신을 보고 싶었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라 이겁니다!"
모든 모험은 이제 끝이 났다. 다만 한 가지 남은 거라면, 그저 기대감만으로도 다른 모든 험난한 모험의 기억을 꺠끗이 지울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모험, 이 세상 모험 중에서도 가장 가슴 떨리고 감미로운, 가장 상찬(賞讚)할 만한 모험 말이다. 여자는 운명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온 마음을 열고 기꺼워하는 자세로......이유는 그녀 마음 속에도 어느덧 사랑의 기운이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홍옥수 버클을 손에 쥐어주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잃었던 환희가 자신의 삶 속에 다시금 찾아 돌아온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6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上): 가니마르
추리문학의 기본 공식이 법(혹은 질서)의 수호자와 그것을 유린하는 범법자 사이의 대결 속에 존재한다면,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특징은 대개의 경우 그 대결의 주도권이 범법자 쪽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1905년 당시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가 처음 이 세상에 나오면서 대중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엇던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1)
쥐스탱 가니마르(Justin Ganimard)는 1853년 생으로, 1874년 생인 아르센 뤼팽보다 무려 스물한 살이나 연배가 위인 인물이다. 그러나 '올리브 색깔의 프록코트 차림에 우산을 든' '키 작고 늙은 남자'라는 식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묘사를 동반하는 가니마르2)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형사'로서 아르센 뤼팽과 '파란만장한 사생결단'을 무수히 치러온 법질서의 대표자인 것만은 틀림없다.3) 뤼팽 시리즈 중 첫 작품인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와 비록 미완이지만 가장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모두, 뉴욕에 입항하는 선상(船上)에서 가니마르가 아르센 뤼팽을 붙잡는다는 테마로 장식되는 것을 볼 때, 가니마르라는 인물의 중요성은 아마 시리즈 전체에서 뤼팽 본인을 제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르센 뤼팽에게 가니마르 형사반장은, 물론 불멸의 적수(敵手)이면서도, 실은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조연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이다.
문제는 가니마르가 단순한 개체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기존 질서, 즉 그 '틀'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자칫 주인공의 무차별적 활약상만을 내세우는 낭만적인 3류 활극에 머물 수도 있었을 '뤼팽 대 가니마르'의 대결구도는 이로써 '개인 대 사회'의 갈등양상,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읽힐 수 있게 된다. 요컨대 19세기 말의 실증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에서 개인이 전체에 적극 귀속되던 양상을 과감히 탈피해, 개인의 자유와 의지, 그 변덕이 사회의 '틀'을 박차고 스스로를 주장하던 20세기 초의 상황이 그대로 구현되는 셈이다. '기상천외한 천재성'은 없지만 '관찰력이라든가 총명함, 꾸준한 면모' 등의 실증주의적 장점으로 무장된 가니마르의 완강한 손아귀를,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현대적 자유분방함의 화신인 뤼팽이 매번 따돌린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한 설정이라 평가할 수 있다.
1)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해설 참조.
2) 같은 책, p.20 참조.
3) 같은 책, p. 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