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아르센 뤼팽의 스무 살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도의 젊은 시절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이제 전집의 절반을 읽어온 나에게 늘 궁금한 부분이었다. 아마 모리스 르블랑 조차도 생각지도 않았을 부분이었겠지만, 시리즈가 오래 오래 사랑받는 덕분에 뤼팽의 과거 이야기가 한 편의 책으로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히어로물의 프리퀄시리즈의 원조라고 할까? 배트맨 비긴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를 애정하는 나로서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프리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분하며 보았다.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는 방법에는 영웅의 시작부터 그려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현재 활약하고 있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후, 이 영웅의 과거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현재 영웅의 모습을 보여 준 후 과거에 대해 한껏 기대감을 고조시킨 후, 프리퀄을 짜짠하고 보여주는 쪽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시선을 끄는 방식일 것이다. 재미도 2배인 만큼,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도 2배일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시리즈 말미에 다다르면 「백작부인의 복수」를 통해 한번더 백작부인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되니 벌써 기대가 되었다.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 중 최고 수준의 걸작에 속한다. 당시 유명한 샹송 가수이자 인기절정의 배우였던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 1888-1972)를 모델로 한 삽화 속 젊은 아르센 뤼팽의 모습은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 속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들어가는 구도가 「기암성」에 필적하는 심각한 분위기이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른 아르센 뤼팽이 최초로 겪는 진지한 모험담인 만큼 여러 모로 괴도로서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즉 이 모험을 계기로 우리의 주인공은 부하를 거느릴 필요성이라든지 싸움에 임해서 적을 판단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 행동에 뛰어드는 과단성과 냉철한 정신력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풋내기 청년 라울에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으로의 입문의례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해설은 전편의 가니마르 분석에 이어서 아르센 뤼팽의 최대 맞수로 일컬어지는 셜록 홈스에 관한 고찰로서 그가 뤼팽 시리즈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집중 조명한다.

 

이것은 아르센 뤼팽이 최초로 경험한 모험담으로서,

그 자신이 수차례에 걸쳐서 단호하게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무엇보다 먼저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되었을 이야기이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직은 아닐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나 사이에는 미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어. 그러니 좀더 두고 보자구.”

사실 이 모험담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결판이 나기까지 무려 4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스무 살 난 풋내기 청년과 저 칼리오스트로

가문(家門)의 여식을 휘어잡았던 끔찍한 사랑의 결투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게 되었다.

 

1. 스무 살의 아르센 뤼팽

클라리스 데티그는 그보다 약간 손아래의 처녀였다. 방년(芳年) 18!......육감적인 입술에다 꿈을 꾸는 듯한 눈망울......장밋빛과 황금빛으로 아스라이 빛나는 화사하고도 상큼한 안색......그리고 이곳 코 지방의 시골길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소녀들처럼 파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머리빛깔과 우아한 분위기, 매력 넘치는 저 자태!......

 

사실 라울은 여자를 밝히는 사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본능과 욕망의 과도한 에너지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나, 거기에 탐닉하기에는 절제와 우아함을 지향하는 심성이 워낙 단단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유혹에 저항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 법. 배짱과 정욕, 애정과 정복하려는 욕망이 펄펄 피가 끓는 젊은이를 이내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라울은 더 이상 공연한 망설임으로 지체하지 않고, 후닥닥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두 남녀는 석 달 전 클라리스가 남프랑스 지방의 기숙사 친구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처음 만났고, 그때부터 줄곧 서로를 사랑해왔다.

두 사람은 즉각적으로 서로 맺어져 있음을 느꼈는데, 남자에게는 그것이 세상 더없는 감미로운 기분이었고, 여자에게는 상대에게 구속을 당하면서도 갈수록 그것이 점점 더 소중해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라울은 그녀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투성이의 신비스런 남자였다. 더군다나 다소 경박스러운 태도와 짓궂은 장난기, 그리고 이따금 어두워 보이는 성질을 불쑥불쑥 드러내서 여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지! 얼마나 호쾌한지! 약동하는 젊음의 열정과 활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모든 단점들은 그만 어떤 성향이 도가 지나쳐 불거져나온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악덕(惡德)마저도 그가 가지고 있는 미덕(美德)이 아직은 설익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뒤, 성격이 음울하고 맹신적이며 돈과 명성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소작인들한테도 경원(敬遠)의 대상인 편부(偏父) 슬하에서 자라느라 클라리스는 그리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처 소개도 되지 않은 라울이 덥석 딸을 달라고 나서자, 남작은 이 배경도 없고 이렇다 할 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풋내기 청년에게 어찌나 화를 버럭 내던지, 젊은이가 야수를 길들이는 사람처럼 의연한 눈빛으로 똑바로 쏘아보지만 않았던들,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말끔한 얼굴에다 그냥 채찍질을 가할 뻔했었다.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상큼한 바람이 평야지대를 스치고 다가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면, 담으로 에워싸인 광대한 과수원 너머, 햇살을 받아 눈부신 유채(油菜)의 평야를 휘 둘러보던 눈길은 우측 방향으로 페캉까지 이어진 백색(白色)의 깎아지른 절벽지대에 가 닿았고, 좌측으로는 거대한 기암괴석과 포르트 다발을 아우르는 (기암성p.267 참조/역주) 에트르타 만()과 마주쳤다.


2. 1788년생, 조제핀 발사모

이처럼 황당무계하게 보이는 인생 역전과 그와 관련한 충격적인 폭로전은 기껏해야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누구도 따로 나서서 논쟁을 벌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근사한 웅변이라도 시도해 기발한 주장 하나 제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더도 덜도 아닌 사실들만이 차근차근 공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제각각 가공할 파괴력을 갖춘 증거들이었으며, 저토록 젊디젊은 여자에게서 100년도 넘는 과거의 기억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기절초풍할 만한 진술들이었다!


3. 마녀 재판

그제서야 보마냥의 음험한 계략을 눈치챈 라울은 생각했다.

결국 죽이겠다는 거야......영국 선박이라는 건 있지도 않아. 그냥 두 개의 보트만 있을 뿐이지. 그중 하나에는 구멍이 나 있을 테고, 결국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가라앉게 되어 있는 거야.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은 감쪽같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라구......’

 

역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사형을 언도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고,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처리한 것에 분명 흐뭇해하는 분위기였다. 뭐 하나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었다. 사소한 일들이나 서로 의논하던 소규모 친목 모임을 피하고 나서는 태도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인근 역에서 부랴부랴 저녁 열차를 잡아타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빠져나간 뒤, 남은 사람은 보마냥과 두 사촌뿐이었다.

결국 상황은, 라울이 보기에, 무척 황당한 양상으로 귀결된 셈이었다. 한 여인의 목숨이 그토록 임의적으로 저울질 당한 데다, 기어이 끔찍한 계략에 의해서 접수되고 만 이 극적(劇的)인 회동은, 마치 제 시간도 안 되어 끝이 난 연극 한 편이나 한창 심리가 진행 중에 덥석 판결이 떨어진 엉터리 소송처럼, 갑작스럽고 싱겁게 끝이 나버린 것이다.

이처럼 얼버무리기 식의 속임수 한마당을 통해서 라울 당드레지는 배배 꼬이고 엉큼하기 그지없는 보마냥이라는 자의 성격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광적인 데다 요지부동의 고집, 빗나간 애증과 병든 자만심에 삭을 대로 삭은 사내는 처음부터 죽음을 마음에 둔 상태였다. 하지만 내면에는 또한 비굴함과 위선, 소심함과 불안이 꿈틀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양심과 정의 앞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바로 가증스런 속임수를 동원해 백지 위임장이나 다름없는 음험한 해결을 모색한다는 안()이다.


4. 보트가 가라앉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활달함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세 번째로 쉬었을 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 위에 여자를 눕혔는데, 언뜻 내려다보니, 지금까지 대차게 내질러온 농담과 지칠 줄 모르는 활기에 여자의 얼굴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는 아예 그 매력적인 몸뚱어리를 가슴에 꼭 품은 채 유연한 몸매를 손길에 느껴가면서 남은 등반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보마냥이 언급했고, 세밀화에도 있다는 검은 반점에 대한 생각이 문득 머리 속에 떠올랐다. 방금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구해준 이 여인의 가슴 위에 정녕 그와 같은 표식이 있는 것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과연 떨쳐낼 수 있을 것인가? 남자는 천천히 여자의 옷섶을 벌려보았다. 바로 오른쪽, 옛날 바람둥이 여인네들이 일부러 붙이고 다녔다는 애교점과 흡사한 까만 점 하나가 백옥 같은 피부 위에 앙증맞게 자리를 잡고 앉아 아련한 숨결 따라서 춤을 추고 있었다.


5. 일곱 개의 가지 중 하나

자고로 라울만한 나이의 젊은이에게 이 같은 마음의 변덕과 불성실함이란 저저로 손쉽게 자체 소화가 되는 법이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별개의 두 존재로 분리되어, 하나가 미래를 함께하기로 한 사랑을 덤덤하게 유지해나가면서도, 다른 하나는 전혀 낯선 열정에 온통 달아올라 광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조차 가능하기 마련이다. 클라리스의 이미지가 이따금 작은 성당의 흔들리는 촛불 사이에서 기도를 올릴 때 어렴풋하고 고통스럽게 떠오르는 신상(神像)과도 같다면,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모습은 모든 이의 칭송을 요구하면서 그 누구도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먹는 것을 결코 용서치 않는 혹독하고 질투심 많은 유일신 그 자체였다.

라울 당드레지-장래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영광스럽게 빛내줄 이 친구를 당분간은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는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또래의 젊은이에 비해 시간부터가 좀 모자라는 편이었다. 비록 야망에 불타는 젊은이였지만, 아직은 어느 분야, 어떤 수단을 통해서 부와 권력과 명예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캄캄한 상황이었고, 언제 닥칠지 모를 운명의 부름에 즉각 화답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만 할 뿐이었다. 지성, 기지(機智), 의지력, 육체적 유연성과 근력, 민첩성, 지구력 등 모든 분야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극단까지 추구했고, 노력을 더함에 따라서 그 한계가 차츰차츰 커진다는 사실에 자못 놀라워했다.

그와 더불어, 또한 문제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에게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고아로 자란 데다, 친구도, 친척도, 직업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연명해왔다. 어떻게? 그 점에 관해서는 자기 스스로도 시원찮은 해명을 할 뿐이며, 굳이 구체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누구나 제 능력대로 알아서 사는 법이다.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필요화 취향을 충족시켜가면 그뿐......

행운은 나의 편이다! , 전진하는 거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 왠지 그게 대단할 거라는 느낌인걸!’

이를테면 그러한 생각으로 인생 행로를 걸어나아가던 중, 덜컥 조제핀 발사모라는 여인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 즉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축적해온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야 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6. 경찰과 군경

여자는 거울을 빼들고 오랫동안 자신의 지치고 늙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가느다란 호리병에서 액체 몇 방울을 거울 표면에 떨군 다음, 비단 천으로 쓱싹 닦아내고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답답한 적막 속에 모든 사고와 의지가 총동원된 듯 한 여자의 눈빛만이 10분에서 15분가량 강렬하고도 힘겨운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난데없는 미소가 마치 겨울 햇살처럼 수줍은 듯 주저주저 피어났다. 잠시 후, 그 미소는 좀 더 대범해졌고, 라울이 놀란 눈으로 줄곧 지켜보는 가운데, 세세한 변화들을 얼굴 가득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우선 웃고 있는 입술 끄트머리가 훨씬 더 치켜 올라갔다. 피부에 홍조도 아스라이 감돌았고 살결 자체에 탱탱한 탄력이 붙는 듯했다. 양 볼과 턱은 예전만한 순수한 선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고......한마디로 조제핀 발사모의 아름답고 다정다감한 얼굴 전체가 화사한 매력으로 한결 밝아지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기적이 완성된 것!

 

내가 도둑이죠? 그게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거죠? 나더러 도둑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소.”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뭐죠?”

갑자기 거칠게 외면하려는 남자를 백작부인은 어깻죽지를 덥석 붙들었고, 위압적인 반말투로 냅다 내질렀다.

젊은이, 자넨 뭐냐고 물었어! 도대체 자넨 뭐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도 패를 몽땅 펴 보아야 하는 거야. 자네 누구야?”

내 이름은 라울 당드레지요......”

헛소리! 자넨 아르센 뤼팽이야. 자네 아버지는 테오프라스트 뤼팽이지. 복싱 및 사바트(19세기 중반 창시된 프랑스 고유의 상류계층 무술. 현란한 발차기가 주무기이다/역주) 교사직(敎師職)과 더불어 그보다는 좀더 벌이가 되는 사기꾼이라는 직업도 겸임하다가, 끝내는 붙잡혀 유죄 판결을 받고 미국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저 세상으로 떠났었지. 그런가 하면 자네 어머니는 도로 처녀 때 이름을 달고, 머나먼 사촌뻘인 드뢰-수비즈 공작 댁에서 가난한 친척으로 얹혀 살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공작부인께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보물 하나가 분실된 걸 발견했지. 다름 아닌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의 저 유명한 목걸이 말이야. 온갖 수사를 시도했지만, 결국 그 엄청난 대담성과 악마 같은 재주를 발휘해 일궈낸 도둑질의 주인공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누구 짓인지 잘 알고 있어. 바로 자네였단 말이거든. 그때 나이 여섯 살이었지.”

라울은 노기(怒氣)로 창백해진 얼굴에 턱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듣고만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어머니는 모욕받고 불행했었소. 난 그걸 뛰어넘고 싶었고......”

도둑질을 통해서 말인가?”

그때 나이 고작 여섯 살이었소.”

오늘날에는 스무 살이지. 자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이야. 자넨 이제 건장하고 지적이며,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이야.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나는 일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남의 호주머니 속에서 하는 일?”


7. 카푸아의 환락

한편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봉했다. 딱 한번, 그런 주제로 약간의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있긴 있었다. 여자의 젊고 아리따운 외모를 두고, 라울이 불멸의 기적이라며 듣기 좋은 말을 했을 때, 여자는 냉정하게 이런 대꾸를 했다.

기적이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보죠. 우린 하루에 200리를 주파한 바 있어요......당신은 그게 무슨 기적이라도 되듯 호들갑을 떨었고요.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았다면, 그 엄청난 거리를 달린 건 말 두 필이 아니라 네 필이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을 겁니다. 레오나르가 두드빌의 농가 안마당에서 미리 대기 중인 다른 말 두 필로 원래의 말들을 갈아치웠거든요.” 

 

8. 반전

내 말 잘 들어요, 조진. 나는 지금 엄청난 사건의 한복판에 제일 꼴찌로 뛰어든 입장입니다. 게다가 이미 당신과 보마냥이 거느리는 두 조직이 떡 버티고 있는데 말이죠. 둘 다 당연히 제3의 도둑으로 참여하게 된 나를 달가워할 리 없겠죠......따라서 나로서도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그대로 얼뜨기 취급이나 당하고 있게 될 게 뻔해요. 그러니 내 나름대로 우리 공동의 적인 보마냥을 요리할 수 있게 내버려두시구려. 방금 전에 내 연인 조제핀 발사모를 보기 좋게 요리했듯이 말이오. 내 처신이 그리 서툰 편은 아니었다는 걸 당신도 부인하진 못할 것이오......내게도 어느 정도 수완과 대책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오......안 그렇소?”

 

은근히 여자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또다시 슬쩍 건드리는 투였다. 여자는 얼른 팔을 놓았고,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 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라울의 저 깊은 내면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정열적으로 되돌려주고 있는 이 우아한 얼굴의 여인을 적어도 가장 냉혹한 적()으로는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곰곰이 드는 것이었다.

 

9. 추락

버들가지로 엮은 안락의자에 조진이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에 대해서 가졌던 극렬한 원망과 거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온몸을 뒤흔드는 욕정과 사랑하는 마음만이 샘처럼 솟구쳤다. 아니, 과연 일말의 원망이나 거부감이 들기는 들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그녀를 품안 가득 안고 싶다는 가없는 욕망 속으로 순식간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적이라고? 도둑년? 혹시나 흉악한 살인자? 천만의 말씀! 단지 한 여자, 그 무엇이기 이전에 단순한 하나의 여성일 뿐이다. 게다가 보통 아름다운 여인인가!

 

라울이 손을 내밀려는 찰나, 여자도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일순 얼굴에 홍조를 띠었고, 눈꺼풀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그러면서 긴 갈색 속눈썹 사이로 차마 상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눈빛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엇다. 아마 멋모르는 어린 소녀라 한들, 지금 이 여인만큼이나 푹푹하고도 순박하게 소심해하는 태도, 교태나 허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10. 뭉개진 손

라울은 짤막하게 잘라 말했다.

아듀, 조진.”

여자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아듀라뇨? ‘또 봅시다그래야죠!”

아니, ‘아듀가 맞아......”

 

거짓말. 당신은 분명 여자의 비명 소시를 듣고 있었어. 몰레브리에 숲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행동에 옮긴 것은 레오나르이지만, 애초에 폭력을 행사하려는 악의(惡意)는 조진 당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지. 몽마르트르의 작은 집으로 부하를 쳐들어가게 한 것도, 또 저항할 시 브리지트 루슬랭을 살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린 것도 바로 당신이었어. 그러고 보니 옛날에 보마냥이 먹을 약에다 독을 탄 것도 당신이었고 말이야. 그 이전에 보마냥의 친구인 드니 생테비르와 조르주 디노발을 살해한 것도 물론 당신이겠지.”

 

여자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밀짚 모자로 만들어진 그늘은 여인의 그윽한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사납게 할퀴어대는 애인의 독설에도 전혀 긁힌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사람의 눈길을 호렸다.

라울은 전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육감적으로 보이는 이 여자......과연 이 여자를 오늘 훌훌 떠나고도 바로 내일부터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을지가 의문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름다운 건 거짓이 아니에요, 라울. 당신은 아마 다시 내게로 돌아올 거예요. 내가 아름다운 건 다 당신을 위해서이니까요.”

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아뇨. 당신은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농샬랑트호()는 늘 가까운 곳에 머물 거예요. 내일 거기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다시는 거기 안 돌아갈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은 또다시 무릎이라도 꿇을 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죠? 왜 안색이 그토록 창백해요?”

라울은 무사히 이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상태로 줄행랑을 쳐버리는 것 말이다.

마침내 붙잡는 조진의 손을 밀쳐내고 라울을 황급히 자리를 떴다......

 


11. 낡은 등대

사랑하는 클라리스, 나를 용서해주오. 나는 당신한테 정말 몹쓸 인간처럼 행동했소. 우리 함께 좀더 나은 미래를 희망해봅시다. 그리고 당신의 넓은 아량으로 나를 바라봐주오. 클라리스, 다시 용서를 비오, 용서를......

라울

또 다른 여자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자존심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 같은 이 편지를 여자는 마지막까지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안타깝게 휘청거리면서 눈으로는 라울의 시선을 더듬어 찾았다. 순간 라울은 클라리스가 이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부터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조제핀 발사모에 대한 증오심밖에는 가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실감했다.

 


12. 광녀와 천재

훗날 아르센 뤼팽이 조제핀 발사모와 더불어 체험한 엄청난 모험 중 이 일화를 소개해 주었을 때, 그는 연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푸하하하하......당시에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웃을 수밖에 없다네! 내 기억으로는 즉석에서 고 앙증맞은 앙트르샤를 선보인 게 그 대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 이후로는 아주 힘겨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마다 종종 써먹은 동작이지만 말이야(수정 마개p.233, 서른 개의 관p. 272, p.317, p.349 등에서 볼 수 있다/역주)...... 사실 그때 그 싸움도 꽤나 어렵게 승리한 거거든......진짜로 난 기분이 날아갈 듯했었지. 클라리스는 무사히 빠져나갔고, 모든 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지. 그리고 우리 사이의 계약을 상기시키려는 듯,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나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조제핀 발사모의 면상에다가 그만 조신하니 못하게 담배 연기를 후~욱하고 내뿜어버렸다네! 여자가 이렇게 중얼거리더구만, ‘불한당 같으니라구!’......거기다 대고 내가 마치 총알처럼 응수한 말발은 글자 그대로 상스런 욕지거리였다네. , 미안하지만 더는 묻지 말게......보통 거친 욕이 아니라 아주 장난기를 듬뿍 처발라서 해대줬다니까! 에 또, 그리고......그리고 나선 말일세......근데 그 여자가 나한테 불어넣는 극단적이고 모순된 감정들을 일일이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 난 그런 문제로 심리학 공부까지 해서 그녀한테 깔끔한 신사처럼 처신했다고 자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일세. 아무튼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주 혹독하게 증오한 것만은 사실이야. 한데, 그녀가 클라리스를 해치려고 한 다음부터는 내 혐오감이 한도 끝도없이 증폭되질 않겠나! 심지어 그 고혹적인 미모의 가면도 더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그 너머에 도사리고있을 진짜 얼굴만 자꾸 부대끼더라니까! 내가 그 자리에서 발뒤꿈치로 핑그르르 돌며 냅다 욕지거리를 쏴댄 건 바로 그렇게 갑자기 눈에 들어온 육식 짐승 같은 몰골을 향해서였단 말일세!......”

 


13. 수도사의 금고

남작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라울의 대답은 이랬다.

조제핀 발사모의 복수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죽었는데......”

설사 죽었다 해도 그녀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것이구요.”

 

 


14. 악마 같은 존재

한데 말이야......그저 약간의 감정이 일었다고나 할까?......겨우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그게 당신이 보인 반응의 전부였어......자신의 지시에 의해서 한 처녀가 목숨을 잃었다는 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이야! 남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 따위는 당신에게 별일도 아니지. 그 여자는 이제 겨우 스무 살, 앞길이 창창한 상태였지......미모와 싱싱한 젊음......그 모든 것을 당신은 마치 개암열매를 으스러뜨리듯 몽땅 압살해버렸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더구만. , 물론 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인 건 아니니까......사실상 당신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어. 보마냥이 당신을 두고 악마 같은 존재라고 부르던 게 생각나더군. 그때는 다분히 귀에 거슬리는 호칭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 듯해. 당신 안에는 어딘지 지옥 같은 부분이 있거든. ”

 

그는 가위의 뾰족한 끝을 앞으로 향한 채 그대로 어중간히 쥐고 있었는데, 문득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일랑 아예 못 쓰게 만드는 것, 그 살점을 가차 없이 베어서, 사악한 요정이 더 이상 만행을 일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 한복판을 가로질러 깊숙한 십자형 상처를 만들어 놓는다면,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퉁퉁하게 부은 피부를 통해서 언제나 드러나 있다면, 본인한테는 그야말로 더없이 공정한 형벌인 데다, 타인에게는 유용한 접근 금지 표시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며, 숱한 범죄행각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렇게 할 권리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한때 너무도 사랑했던 여인이 아니던가......

라울은 한동안 꼼짝 않고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없는 슬픔이 물밀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싸움이라면 지쳤다. 씁쓸한 기분과 역겨운 느낌만이 온몸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경험해보았던 엄청난 사랑이었는데......그토록 푸근한 추억과 신선한 감흥에 젖어들게 해주던 사랑의 감정이 앞으로는 원한과 증오만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이제 입가에는 환별의 냉소적인 주름을, 영혼 속에는 쇠락(衰落)의 암울한 낙인만으로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야 하리라!



에필로그

라울은 클라리스에게 한 약속들 가운데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켜주었는데, 여자가 몹시도 행복해했던 것이다.

다만 또다른 약속 하나는 그만 지키지를 못했다. 정직한 사람은 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것만큼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훔치거나, 조작하고, 남을 등쳐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아예 피 속 깊이 녹아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밀수꾼이자 소매치기였고, 도둑임과 동시에 강도이면서 모사꾼인 데다, 무엇보다 패거리의 왕초였다. 게다가 소위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조직에 몸담는 동안, 보란 듯이 터득했던 비범한 자질들이야말로 그를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기린아(麒麟兒)로 만들어준 터였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 기상천외하고도 황당무계한 숙명의 기득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고, 대가(大家)가 될 팔자였다.

클라리스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그는 나름대로 일들을 만들어 갔고, 일련의 활극들을 멋들어지게 해치우는 가운데, 자신의 권위는 물론, 실제로 초인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온갖 재능들을 확대시켜나갔다(칼리오스트로의 4대 수수께끼 중 하나인, ‘기암성의 아지트와 프랑스 제왕의 보물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며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다룬 것이 바로 기암성의 스토리이다/역주).

 

그렇게 부부의 행복은 5년간 아무 문제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6년째 되던 해, 클라리스가 그만 분만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남겨진 아들의 이름은 장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다음날 그 아들이 또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라울이 보기에, 누가 감히 오퇴유가()의 아담한 가옥을 침입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랬는지 가늠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이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일에서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엇다. 이미 두 사촌지간의 익사사건부터 칼리오스트로라는 성()을 떠올렸으며, 그 이후로도 도미니크가 독살을 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바 있는 라울로서는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납치작전을 주도했음을 기정사실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을 도둑맞은 비탄의 심경이 사람을 확 바꿔놓기에 이르렀다. 의지할 아내도 아들도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자신을 빨아들이는 위험천만한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즉 순식간에 아르센 뤼팽이 되어버린 것! 이제 더는 점잔을 떨 이유도, 조심스러울 필요도 없었다. 천만에! 스치고 가는 곳곳마다 떠들썩한 소동이요, 도발이요, 대범무쌍(大汎無雙), 화려무비(華麗無比), 호탕하기 그지없는 활약상이 판을 치는 가운데, 벽이면 벽마다 휘갈긴 이름과 텅 빈 금고 안에 어김없이 남겨진 명함 한 장 등등......과연 아르센 뤼팽이었다!

하지만 직접 그 이름으로 움직이든, 여타 즐겨 차용하는 다른 많은 이름들, 예컨대 베르나르 당드레지 백작이라든가(외국에서 사망한 친척 중 한 명의 신분 증명 서류를 잽싸게 빼돌렸다), 오라스 벨몽, 스파르미엔토 대령 혹은 샤르므라스 공작이나 세르닌 공작, 아니면 돈 루이스 페레나에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명들로 활동을 하든, 모든 변신과 가면 속에서 그의 열에 들뜬 두 눈동자는 언제 어디서나 칼리오스트로가()의 여인츨 추적했고, 아들 장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들도 못 찾았고 조제핀 발사모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황당무계한 활극과 초인적인 시련들, 미증유(未曾有)의 승리와 가공할 열정, 그리고 엄청난 야심으로 점철된 아르센 뤼팽의 일생은, 이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위와 같은 곤혹스러운 의문점들이 저절로 답을 얻기 이전까지, 처절하고도 화려하게 전개된다.

요컨대, 지금까지 살펴본 최초의 모험은 무려 4반세기라는 시간을 건너뛰어서 오늘날 자신의 마지막 활약상이라고 기꺼이 내세우는 최후의 모험(1935년작 백작부인의 복수를 암시한다/역주)으로까지 이어질 운명이었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7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 셜록 홈스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원래 모리스 르블랑이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 배경에는 저 영국의 셜록 홈스를 겨냥한 피에르 라피트라는 출판인의 절묘한 기획의도가 밑받침하고 있었다.1)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추리 소설이라는 대중 장르보다는 정통 심리주의 작가로서 성공하기를 원했던 르블랑은 첫 작품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의 폭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작에는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피에르 라피트는 프랑스의 코난 도일(le Conan Doyle francais)’이라는 지극히 상업적인 닉네임을 아예 공식해가면서, 거의 매일 모르시 르블랑을 찾아와 뤼팽을 탈출시키라!’며 들볶았다는 것이다. 소위 정통 심리주의 문학의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는 코난 도일이나 H. G. 웰스 같은 스타일의 황당하고 살벌한 이야기가 유행을 탈 거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결국 그렇게 해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계속되었고, 심지어 셜록 홈스, 한 발 늦다라는 단편을 통해서 아직 한창 활동 중인 남의 영웅을 직접 모셔와 대결을 벌이기에까지 이른다. 바꿔 말해, 당대의 두 영웅이 격돌하게 된 배경에는 모리스 르블랑 자신의 개인적 의도보다는, 흥행을 염두에 ens 한 출판인의 집요한 설득과 그를 가능케 한 당대 프랑스의 대중적 욕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 무섭도록 날카롭고 싸늘한 눈빛, 대상을 그대로 꿰뚫어버릴 듯한 그 눈초리만큼은 전혀 범상치가 않았다!

그렇다. 셜록 홈스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경이로운 직관력과 관찰력, 명징함과 기발한 발상이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기적 같은 현상이 지금 바로 코앞에 구체화되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에드거 포의 뒤팽이랄지, 가보리오(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의 소설가. 서류 113, 무슈 르콕등의 작품이 있다/역주)의 르콕과 같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장 독특한 탐정 유형들을 자연의 장난기 어린 섭리가 한데 모아 버무려서 보다 더 기발하고 비현실적인 또다른 유형의 탐정을 만들어내놓은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전 세계를 통해서 그를 유명인사 반열에 올려놓은 숱한 무용담들을 검토해보노라면, 이 셜록 홈스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기보다는, 혹시 어느 대단한 소설가, 이를테면 코난 도일처럼 탁월한 작가의 손에서 빚어진 허구의 인물, 즉 전설로만 떠도는 영웅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름 바꾸기를 하기 전에 쓰여진 이 대목에서3), 르블랑은 시침 뚝 뗀 채, ‘코난 도일처럼 탁월한 작가의 손에서 빚어진 허구의 인물에다 셜록 홈스를 빗댐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현실성을 지닌 인물로 살려놓는다.

 

뤼팽에게는 늘 그러하듯, 여기에서 자존심이란 단순한 에고이즘 같은 것이 아니다. ‘뤼팽의 생김새와 변신능력을 주제로 했던 아르센 뤼팽의 고백해설부터 시작해서 도둑으로의 정체성복합적인 퍼스낼리티그리고 아이러니 분석야심의 매커니즘에 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강조해온 바, 존재의 한계성에 대한 부단한 도전과 극복의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뤼팽의 자존심인 것이다. ‘흥분되고 즐거운’, 그래서 자존심이 사는 기분이란 곧 덧없는 그림자 같은 개체적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힘차게 약동하는 존재의식을 의미한다. 이때 셜록 홈스라는 상대는 뤼팽 자신의 닮은꼴’, 즉 완벽한 맞수로서 적극적으로 기능한다. 위의 대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대를 누르고 이기는 데에서 기분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와 대결을 벌인다는 그 자체만으로 짜릿한 기분’, 즉 존재의식이 한껏 고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깊이와 규모에 필적하는 상태, 서로의 능력이 너무도 막상막하(莫上莫下)여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동질감(同質感)까지 느끼고야 마는 맞수끼리의 대결이란, 승패를 떠나 그 자체로 엄청난 의의를 가지는 법이다.

 

이보시오, 무슈 뤼팽, 이 세상에는 뭘 어찌 한다 한들 내가 절대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딱 둘 있소. 우선 나 자신과 바로 당신이오.”

치열한 대결을 무승부로 끝낸 후 도버 해협을 건너는 선상(船上)에서 서로 악수하며 홈스가 뤼팽에게 건넨 이 말4)은 두 영웅들이 서로에게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동질감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런 상대끼리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무의미하며, 대결 그 자체가 서로의 존재를 극대화시켜줄 뿐이다.

 

1)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해설 참고.

2) 모리스 르블랑 전기(Maurice Leblanc, Arsene Lupin malgre ha)Jacques Derouard, Sequier. 1989. p. 139.

3) “금발의 귀부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pp. 92~93

4) 같은 책, p. 2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