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7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살구빛의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시작부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한 비극이 일어나고, 거기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결론을 낼 것인지 예측하기도 어렵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사건의 해결에 다다르게 되면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 결말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은 프롤로그에 암시된 바처럼 (알고 보면) 극히 단순한 사건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 전개 방식과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에서 매우 참신하고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제목 자체가 수수께끼인 이 당돌한 작품은 한마디로 '착각과 오해가 한바탕 소동을 부리는 요지경 극(劇)'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아르센 뤼팽의 익살과 여유, 밉살맞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재치가 다른 어느 에피소드보다 더 톡톡 튀는 작품이다. 사건의 해결을, 전혀 상상치 못할 매듭에서 풀어내는 모리스 르블랑의 짓궂은 버릇(?)은 이제 이 능청맞은 작가가 아예 작정하고 독자의 뒤통수 때리기에 재미 붙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대담하고 한편으로는 허탈하기조차 하다. 모험의 치열함과 격렬함에서는 다소 미진하다는 평이 있기도 하지만, 늘 우리 무릎을 치게 만드는 뤼팽만의 매력에 민감한 뤼피니앵들에게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번 해설에서는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가지는 특징과 의미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1. 프롤로그: 기이한 상처

단 이쯤에서 한 가지 기억해둘 것은 당시 그 상황은 완벽히 안전한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장면이 계속 진행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질 어떠한 이유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화잉었다. 정말이지 느닷없이, 덜컥 발생한 사건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느낀 바는 제각각일지 몰라도, 분명 목격한 것을 확신하는 내용만큼은 하나같이 똑같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한마디로 전혀 예측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사건이 마치 폭탄이 터지듯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는 사실!(실제로 나중 목격자들의 진술에는 그와 같은 과격한 표현이 공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일단 살인이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물론 그것에 사용된 흉기라든가 총알 혹은 살인 용의자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일어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모두 합해 마흔두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 중 다섯 명이 어디선가 번쩍 하는 섬광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다섯 명 모두 섬광이 비친 장소나 방향에 대해서는 엇갈린 증언을 하고 있었다. 반면 나머지 서른일곱 명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세 명은 뭔가 둔탁한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데 반해, 나머지 서른아홉 명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2. 금발의 클라라

꺽다리 폴의 정부(情婦)이자, '금발의 클라라'로 알려진 여인이 15시 47분 리지외발(發) 368호 열차에서 목격되었음. 고르주레 형사반장을 즉시 급파할 것. 열차가 도착하기 전, 구인영장은 따로 인편을 통해 생-라자르 역에서 그에게 전달될 것임.

여자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음.

웨이브 진 금발을 양 갈래로 늘어뜨렸고, 눈동자는 푸른색. 20에서 25세 정도. 예쁜 얼굴에 옷차림은 수수한 편. 전체적으로 우아한 자태임.

 
3. 중이층에 사는 신사

그가 거하는 장소는 관리인 숙소 바로 위이자, 후작의 개인비서가 사용하는 방들 바로 밑이었다. 처음 어두컴컴한 현관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거실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고, 오른쪽으로 돌면 방 하나, 왼쪽으로는 목욕탕이 구비되어 있었다.


4. 2층에 사는 남자
후작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프랑스 한복판의 온천도시에서 그토록 흥겹게 시작되었던 감미로운 연애사건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당시 테레즈는 가정교사의 자격으로 어떤 영국인 가족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 데를르몽에게 그때 일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 일종의 변덕스런 장난질에 불과했다. 워낙 무사태평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던 젊은 귀족은 자신한테 몸과 마음을 다해 순정을 바쳐오는 여자를 진지한 관심으로 대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시간의 희미한 추억거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테레즈에게는 그 일이 보다 심각하고, 평생을 떠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단 말인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레 단행된 이별이 정녕 고통의 씨앗을 남긴 거란 말인가? 하나의 떨어져나온 생명, 바로 이 아이를 말이다......


5. 불법침입

"다시 말해 후작 주변을 염탐하고 있었단 얘기로군요?...... 당신과 같은 이유로 말입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한번은 내 앞에서 후작에 대한 치명적인 원한에 사무쳐 있다는 얘길 한 적이 있긴 해요."

"이유가 뭐랍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 자의 부하들에 대해서도 아는 게 있나요?"

"아라비안이라는 사람만 조금......"

"그 자는 어딜 가면 볼 수 있습니까?"

"몰라요. 혹시 몽마르트르의 술집에 가면...... 언젠가 들릴 듯 말 듯 그 술집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요?"

"네...... 에크레비스라고......"

남자는 그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여자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6. 최초의 격돌

"만약 당신이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면, 내 곁에 있는 한 위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요. 손에 온기(溫氣)가 감돌고 나면, 당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용기를 가져도 되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부여잡은 채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몇 분이 지난 뒤, 다소 안정을 되찾은 여자가 말했다.

"이제 가요."

남자는 관리인 숙소 문을 두드려 대문을 열게 했고,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7. 성채 경매

"네 이놈, 당장 나오지 못할까!"

순간 권총을 쥐고 있던 손이 쓱 사라졌다. 고르주레가 기둥 모퉁이를 돌아들었을 때는 그뒤로 이쪽 아치에서 저쪽 아치까지 쭈글쭈글 드리워진 송악의 장막밖에는 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형사반장은 분명 있던 적이 연기처럼 사라졌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추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장막처럼 드리워진 송악으로부터 권총 대신 무쇠 같은 주먹을 내세운 팔 한 짝이 덜컥 튀어나와 달려드는 고르주레의 턱주가리를 정통으로 명중시키는 게 아닌가!


8. 이상한 협력자

"......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건, 그 문제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고, 내 관심을 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죽임을 당하고 보석을 도난당했습니다. 즉각 그에 대한 조사가 단행되었죠. 다른 모든 목격자와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취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당신은 죽은 여자와 당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또 무슨 이유로 이 성채를 매입한 걸까요? 별도로 무슨 조사라도 해본 겁니까? 그 당시 신문에서 내가 읽은 사실들말고 더 아는 건 없나요? 볼니크의 비극과 당신이 도둑맞은 유산 사이에 모종의 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두 개의 사건이 같은 근원과 같은 전개양상 그리고 같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벌어지기라도 한 겁니까? 이상이 내가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정확한 답을 필요로 하는 의문점들입니다."


9. 꺽다리 폴을 쫓아서

아무튼 라울은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가 머리 속에 떠올리는 여자의 모습은 볼니크 성에서 라울 자신이 자꾸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불안해보이고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앙토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떤 숙명의 법칙에 이끌리듯, 후작의 서재에 잠입해 떳떳치 못한 어둠의 작업에 여념이 없던 음험하고 번민에 찬 앙토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뇌리에 각인된 여자의 모습은 처음 보았을 때, 즉 중이층 비밀장치의 화면에 떠오른 귀엽고도 매혹적인 앙토닌이었다. 얼떨결에 잘못 찾아든 방문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앙토닌은 삶의 행복과 희망에 들떠 있는, 천진하면서 아리따운 아가씨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매섭고 혹독한 운명 속에서 덧없이 스쳐지나간 순간이었지만, 정말이지 감미롭고도 상큼한 흥분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다만-사실 이건 요즘 들어 라울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출몰해온 난감한 문제였는데-다만 그 몇몇 수수께끼 같은 행동들의 이유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어떤 비밀스런 계획이 있기에 후작의 신임을 얻으려고 그 앞에서 알짱댄 것일까? 혹시 그가 자기 아버지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닐까?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는 걸까? 아니면 재산을 노리는 것일까?"


10. 에크레비스 술집

에크레비스 술집은 다분히 수상쩍은 인간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낙오한 그림쟁이나 기자들, 실직했으되 딱히 일자리를 원치도 않는 근로자들, 얄궂은 복장을 한 창백한 젊은이들, 깃털 장식 모자와 화려한 빛깔의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들로 언제나 북적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얌전히 술만 마시는 분위기였다. 그것말고 만약 좀더 다채롭고 특별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바깥의 막다를 골목을 택해 들어가, 뒷방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맨 먼저, 푹 꺼진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어느 뚱뚱보 남자, 즉 이 술집의 주인이 손님 하나하나 들어서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곳으로 말이다.


11. 카지노 블루

여자는 한동안 지극히 멋진 자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올이 매우 섬세한 황금빛 천이 머리와 얼굴 일부를 살짝 덮고 있었다. 물론 그 틈으로는 경탄할 만한 가냘픈 금발 타래가 살며시 비어져 나와 있었고......

"맙소사!"

갑자기 라울이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내뱉었다.

"뭔데 그러나?"

어느새 그의 곁에 와 있던 고르주레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12. 두 개의 미소

"그렇지...... 두 여자가 서로 싸우고 있어...... 그러다 이따금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철저히 따돌리고 말이야...... 결코 같은 미소를 공유할 수 없는 두 여자의 존재라...... 왜냐하면 당신이 가진 두 가지 이미지를 구별해주는 게 바로 그 서로 다른 미소이거든...... 하나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면서 순박하고 어린 티가 나는 미소라면...... 다른 하나는 보다 음울하면서 어딘지 환멸을 담은 미소라고나 할까......"


13. 함정

마드모아젤, 주인님께서 부상당한 채 층계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중이층 서재에 누워 계십니다. 상태는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주인님께서 마드모아젤을 보고 싶어하시는군요. 그럼 이만.

쿠르빌

 

쿠르빌의 필채를 잘 아는 하인마저도 혹할 만큼 잘 위조된 글씨들이었다. 그만하면 더 이상 클라라를 만류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긴, 설사 만류한다 해도 어찌 그게 가능하겠는가?


14. 대결

"참 바보 같은 질문이로군. 데를르몽 후작이야 거기 초대된 손님들 중 하나였을 뿐 아닌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게 전부이지."

"그건 경찰에서 내세운 얘기이고, 현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지."

"그래, 그 현실이 어떤 건데?"

"엘리자벳은 다른 아닌 데를르몽 후작에 의해 살해되고 도난당했어."


15. 살인

그제서야 쿠르빌은 호주머니 속에서 신문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을 낚아 채 읽자마자 라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신문 제 1면 1단 기사가 굵은 활자로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었다.

 

꺽다리 폴 살해되다! 그의 옛 정부였던 금발의 클라라는 범행현장에서 형사반장 고르주레의 손에 체포되었다. 경찰은 그녀를 살인 용의자로 확신하고 있으며, 아울러 카지노 블루에서 그녀를 납치했던 해로운 애인 라울 씨도 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 공범은 종적을 감춘 상태이다.


16. 조조트

워낙 감당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인 고르주레로서는, 만약 마담 고르주레가 붉은 머리채 풍성한 육감적이고 매혹적인 여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남편에 대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만큼 오래 가지 못했을 연애결혼이었다. 탁월한 살림꾼이면서도 다소 가벼운 데가 있고, 남자들 앞에서 애교도 심한 편인 아내는 고르주레 씨의 체면에는 별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동네 댄스홀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다. 그러면서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남편의 잔소리 시도는 일절 용납치 않는 것이었다. 대신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남편이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적절히 받아줄 줄 아는 여자였다.


17. 불안

나중 얘기지만, 그러던 어느 한순간, 지극히 단순하고 자연스런 현실에 맞닥뜨리고, 그때까지의 수수께끼가 깔끔한 해결책을 동반한 채 뒤통수를 때리자, 라울은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을 오히려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라울 스스로 생각해봐도,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적어도 삶이 매일같이 제공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상처럼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 만져보고 감지할 수 있는 인간적인 진실 파악 능력만 제대로 활용해도, 어떤 사태이든 상황에 휩쓸리다가 마지못해 납득하기 훨씬 전부터 대번에 그 정곡을 꿰뚫을 수 있어야 옳았다. 자고로, 사방 백일하에 그 전모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문제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18. 두 개의 미소에 얽힌 사연

라울의 삶-즉 아르센 뤼팽의 인생-은 분명 모든 논리적인 현실과는 상반되는 놀랍고도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사태들, 도무지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충격적인 상황들로 북적대는, 그런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훗날 아르센 뤼팽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그 날 금발의 클라라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눈앞에 나타났던 일이야말로 그의 가장 깊은 내면부터 뒤흔들어버린 최고의 충격적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19. 고르주레, 광분하다

고르주레 부부간의 대화는 마치 폭풍우를 연상시켰다. 다분히 허구적인 인물에 대해서 남편이 공연한 질투심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조조트는 세련되고 예의 바르며 행동거지가 무척이나 섬세한, 그야말로 재치만점의 매혹적인 신사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장점들을 끌어다가 심술궂게도 그 인물을 잔뜩 치장했다.


20. 승리냐? 패배냐?

"아하! 그렇게 말해주다니 정말 황공하구만그래! 정말로 당신 그 여자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여야 말이지! 앙토닌도 날 좋아하고, 올가도 날 좋아하고, 조조트도 날 좋아하고, 쿠르빌도 날 좋아하고, 고르주레도 날 좋아하고......"


21. 라울의 맹활약

"......너 혹시 「몽테-크리스토 백작」읽어보았니? 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등장했는지 기억나? 세상 곳곳에서 그를 알았던 몇몇 사람들이 함께 점심을 들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 수개월 전 정확히 그 날 정오에 나타날 거라 약속을 한 건데, 여행 길이 불확실한 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반드시 정확한 시각에 그가 나타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더랬지. 마침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주인이 이렇게 말했단다. '여러분, 몽테-크리스토 백작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지금 그와 같은 믿음과 불안감을 함께 간직하면서 기다리는 듯하구나......"


22. 페르세우스 성좌(星座)의 범행
"......이 돌멩이는 분명 사건 수사 시 경찰의 눈에도 띄었을 것입니다만, 아무도 특별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총알이라든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뭔가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 눈에는 이 돌이 여기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강력한 현길의 증거로 보였답니다. 물론 이것말고 다른 증거들도 있지요. 우선 사건이 일어난 시기 말입니다. 8월 13일. 지구가 문제의 유성군 아래를 지나가는 시기죠. 솔직히 말해서 이 8월 13일이라는 날짜가 내 정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었습니다...... 그 다음 또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 이건 그저 논리적인 추론을 돕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적인 증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 나는 이 돌멩이를 비시에 소재한 한 화학 및 생물학 실험실로 가져갔습니다. 거기서, 새카맣게 탄 인간의 신체조직 일부가 옻칠로 표면 처리된 상태에 있는 걸 보게 되었죠...... 네, 불붙은 화구(火球)에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생체로부터 피부와 모발이 포함된 상태 그대로 떨어져나간 조직 덩어리였습니다. 한데 그 돌조각에 아예 찰싹 달라붙어서 세월이 지나도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 적출물(摘出物)은 화학자의 손에 의해 잘 보관되어서 공식적인 연구논문의 소재가 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무슈 데를르몽이나 고르주레 선생이 원하기만 하면 아마 언제든 제출 받아 검토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3

-시대상의 반영, 아르센 뤼팽 시리즈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단순한 추리 모험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당대의 사회상과 시대적 조류를 충실히 담아낸 풍속소설로서도 뜻깊게 읽혀질 수 있다. 실제 작품이 쓰여진 연대로 보자면 1900년대에서 1910년, 1920년, 1930년대로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웬일인지 모리스 르블랑은 아르센 뤼팽의 모험담 대부분을 1900년대에서 제1차세계대전 전까지의 소위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리는 '좋은 시절'에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뤼팽의 모험담이 애써 위치하고자 한 시대는 20세기로 들어선 파리라는 대도시가 그 이전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향수 어린 마음으로 추억하는 후대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붙인 별칭이 바로 벨 에포크인 것이다. 코르셋을 과감히 떨쳐버린 여성들의 맵시 있는 패션과 러시아 발레단의 전위적인 무용, 큐비즘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예술 운동, 온갖 대중 잡지의 폭발적인 발간, 사진과 영화의 대중화, 그리고 엑스선과 무선 전신, 자동차, 비행기 등, 나날이 현대의 기적을 일신하는 과학문명...... 가히 벨 에포크는 모든 것이 놀랄 만한 속도로 변화하는 긍정과 모험의 자유분방한 시절이었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1905년 당시 체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정부주의자이자 도둑인 알렉상드르 자콥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잇고, 실제로 그 당시 사교계의 살롱마다 우아한 취향의 사기꾼이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지고 하지만, 무엇보다 인생에 얽매인 그 무엇도 없이 자유와 방황, 미녀와 예술품, 삶의 희열을 찾아 끝없는 모험을 계속하는 아르센 뤼팽 자신의 운명이야말로 벨 에포크라는 시대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대예찬이든, 시대유감이든, 아르센 뤼팽은 시대를 무대로 해서 한바탕 운명의 도박을 펼쳐가는 당대의 주인공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뇌리에 아직까지도 아르센 뤼팽의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깊이 각인되어 잇는 레오 퐁탕의 삽화 속 모습 역시 단연 벨 에포크의 하이클래스 신사복장이다. 실제로 소설 속 뤼팽이 그와 같은 복장을 갖춘 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복장 자체에 대한 묘사도 중구난방이지만 어느새 뤼팽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시르햇에 외알 안경, 흰 장갑에 말쑥한 지팡이,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새는 사실 그 당시 부르주아 신사들의 보편적인 전유물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동시대의 파리지앵들을 주요 독자로 발행된 잡지에 연재를 통해서 탄생된 뤼팽 시리즈가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정서를 가장 민감하게 대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종종 실제 사건들이나 인물들, 심지어 그 당시 유행어 등이 불쑥불쑥 언급되면서 뤼팽이라는 허구의 인물은 더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곤 한다.

 

이처럼 단편적이고 재치 만점의 테크닉들은 어쩌면 대중 문학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경쾌한 자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뤼팽 시리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루어지는 사건 자체를 동시대의 가장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에서 직접 가져와 시대적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런가 하면 「수정마개」의 사건이 세계사적으로도 너무 유명한 '파나마 운하 스캔들'을 모델로 한 것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813의 비밀」에서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일명 카이저)의 모습이 그나마 위엄을 갖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에 반해서,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후인「포탄 파편」에서 그려지는 황제는 그저 허세로 가득 찬 적군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변화야말로 경쟁국가의 원수에서 침략군의 수뇌로 그 대상이 변함에 따라 함께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쪽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아르센 뤼팽에 등장하는 영국인에 대한 혐오감 내지 경멸 어린 태도 또한 그 당시로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정서를 밑바탕으로 한 것이다.

 

뤼팽 시리즈를 읽는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더구나 이방인으로서!) 이처럼 지나치게 애국주의적이다 못해, 국수주의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다소 불만일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당대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라는 데에 먼저 공감을 하는 것이 참다운 뤼팽 시리즈 감상을 위한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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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바 / 에메랄드 반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6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바리바'란 'Barre-y-va'라고 쓰며, Barre는 '만조 때 강어귀로 밀려드는 높은 파도', 'y va' 는 '그곳에 가 닿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붙여서 읽으면 바리바로 읽히는 것이다. 사실 이 제목만 안다고 해서 소설의 트릭을 전부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핵심 키워드가 어디쯤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실린 단편 '에메랄드 반지'가 더 재미있었다.
 
 
이번에 감상하게 되는 「바리바」와 단편 「에메랄드 반지」는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작품들이다. 「바리바」에서는 센 강 하류 계곡지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자연현상을 둘러싼 서스펜스가 뤼팽 특유의 화통하면서도 세련된 재치와 결합되어 독자의 상상력을 쉴새없이 소용돌이치게 만든다. 수수께끼적인 요소가 대거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암호문을 실마리로 삼은 추리의 과정도 만끽할 수 있으며, 작품 후반에 이르기까지 범인을 베일 속에 가려두는 수법도 「호랑이 이빨」 이후 오래간만에 즐길 수 있는 테크닉이다. 저자의 ‘추리소설론(「기암성」해설 참조)’에서도 독특한 작가의 입장을 확인했지만, 「에메랄드 반지」라는 제목의 단편작품은 아마 추리문학에서 모리스 르블랑의 독창적인 입장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애당초 본격 심리주의 작가가 꿈이었던 르블랑은 이 세련된 단편을 통해서 추리의 범주를 무의식이라는 영역으로까지 확대, 심화하는 비기(秘技)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활용된 참신한 기법과 테마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 선구적인 가치를 가늠해본다.
 
 
바리바
1. 밤의 방문객
 
극장의 저녁 공연이 끝난 뒤, 라울 다브낙은 집으로 돌아와 현관의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거기에서 그는 우아한 실루엣과 떡 벌어진 어깨, 셔츠 가슴받이를 힘차게 부풀리고 있는 당당한 가슴팍 등, 고급 재봉사의 솜씨가 고스란히 밴 의복 차림의 멋진 몸매를 한동안 뿌듯한 기분으로 들여다보았다.
 
 
"세상 참! 하긴 당신이 너무도 매력적이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용건으로 찾아와주셨다는 게 못내 아쉬울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이 셜록 홈스를 찾아 베이커 스트리트의 그의 집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이곳을 찾아온 거라 이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이제 필요한 모든 얘기를 차분히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마드모아젤. 성심껏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자, 어서 말씀해보십시오."
 
남자는 먼저 의자부터 정중히 권했다. 그런데 라울의 예의 바르고 상냥한 태도 덕분에 많이 안정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안색이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처럼 싱싱하면서 우아한 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까지 이따금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눈빛만큼은 차분한 신뢰감을 담고 있었다.
 
 
2. 테오도르 베슈의 자초지종
 
"좋아, 그럼 이제 내가 자네의 이야기를 대신 풀어내줄까? 만약 내가 틀리거든 그때그때 잡아내도록 하게. 물론 전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야. 아주 기초적인 얘기야. 지금부터 잘 들어보게나. 바리바의 장원은 옛날에 바슴가(家)의 영지에 속했었는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르 아브르의 어떤 선주(船主)한테 매각된 곳이지. 그의 아들인 미셸 몽테시외는 바로 거기에서 성장해 결혼도 했지만, 아내와 딸을 차례차례 여의고 나서, 결국 베르트랑드와 카트린이라는 손녀 두 명과 더불어 독신으로 살았다네. 지금 자네가 얘기한 두 명의 자매가 바로 그들인 셈이지. 할아버지는 마음 둘 곳을 못 찾아서 그런지 파리로 이사해 정착해보았지만, 1년에 두 번씩은 항상 이곳을 찾는다고 하네. 부활절을 즈음해서 한 달 정도, 그리고 사냥철이 되어 또 한달을 머물다 간다는 거야. 손녀들 중에서 맏이인 베르트랑드는 비교적 일찍 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무슈 게르생이라고, 파리에 터를 잡은 실업가이면서, 미국에서도 대규모 사업을 운영한다더구만. 어때, 여기까지 동의하나?"
 
 
"한편 어린 카트린은 미셸 몽테시외와, 또 하나,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주인한테 매우 충직한 하인 아르놀드-자기들끼리는 무슈 아르놀드라고 부른다는구만-이렇게 셋이서 살았다네. 한데 그녀는 자라나면서 공부는 그럭저럭만 하는 대신, 워낙 성품 자체가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데다, 약간은 몽상적이고 황당무계하며, 운동과 독서에 열광하는 타입이라더군. 그래서 그런지 오직 바리바 같은 곳에서만 마음을 활짝 펴는가 하면, 오렐천(川)의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나서 풀숲, 사과나무 고목 아래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말리는 게 유일한 낙이어싿고 하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무척 사랑하셨다는데, 그 양반 역시 성격이 보통 과묵하고 괴팍한 게 아니라서, 평소에는 화학이나 심지어 연금술 같은 신비주의 학문에만 몰두했다는 거야. 어때, 내 얘기 따라오기는 하는 건가?"
 
 
"그러던 중, 벌써 스무 달이나 된 애기인데, 그때가 9월 말 정도였다고 하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이면 한번씩 머물다 오는 노르망디에서 떠나던 날 저녁, 몽테시외 할아버지가 그만 파리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거야. 그 당시 언니인 베르트랑드는 남편과 함께 보르도에 있었지. 하지만 즉시 돌아와서, 그때부터 두 자매가 함께 살고 있다는군.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적은 유산을 물려주었고, 별다른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았지. 결국 바리바 영지는 그때부터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거야. 장원의 철책들과 정문은 열쇠로 단단히 걸어 잠가둔 상태로 말이야. 아무도 더는 그곳을 드나들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런데 올해 들어와 갑자기 두 자매는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베르트랑드의 남편인 무슈 게르생마저 프랑스로 돌아온 다음 다시 떠났다가, 또 이번에 돌아와서 두 자매와 상봉을 하게 되어 있었다네. 두 자매는 그곳으로 가면서 무슈 아르놀드는 물론, 베르트랑드를 지난 수년간 시중 들어온 요리사 겸 하녀 한 명도 함께 데려가기로 했지. 뿐만 아니라, 마을에 들러 임시로 두 명의 현지 소녀를 더 고용해, 이 참에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저택 청소와 정원 다듬기에 나섰던 거야. 그 결과 장원 일대가 그야말로 진짜 파라두도 저리 가라가 된 거라네!(파라두[Paradou]는 에밀 졸라[1840-1902]의 소설 「무레 신부의 과오(La faute de l'abbe Mouret)」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정원 이름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이 자연주의 소설의 대가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저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발표했을 때 열광적인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졸라를 흠모했다/역주) 어떤가, 내 얘기에 동의하나?"
 
 
"그런데 카트린은 얼마 전에 속을 발칵 뒤집어놓은 일련의 심각한 사태 때문에 여전히 우울한 기분이었을 텐데도 의외로 밝게 웃곤 하더군. 그 날 나는 밤 10시 30분 정도에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네. 물론 밤새 별다른 일은 없었고 말이야. 무엇인가 수상쩍은 소리 하나 없었지 그런데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어서야, 베르트랑드 카트린의 시중을 드는 샤를로트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렇게 외치는 게 아니겠나! '마드모아젤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개천에 빠지신 것 같아요......'"
 
 
"자살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들이 그처럼 돈도 없고 신분도 별볼일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걸 백작의 어머니가 싫어하셨지. 그러던 중 어제 아침 피에르 드 바슴의 편지가 카트린에게 배달된 거였네. 우리가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자기는 곧 떠날 예정이라는 내용이더군. 자기 어머니가 억지로 6개월간의 장기 여행을 명하셧다는 거야......잔뜩 의기소침해서 떠나긴 떠나지만, 제발 자기를 잊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고 카트린에게 간청을 하는 편지였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즉 아침 열 시, 카트린은 집을 나섰고 그 후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거야."
 
 
3. 살인사건
 
"방금의 대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눈 것입니다, 예심판사님. 나는 저가 있는 저 강철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무슈 게르생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만하면 장소나 거리에 대해 충분히 납득을 하시겠지요? 아마도 여기 테라스에서 저 다리 초입까지 직선 거리가 기껏해야 80미터 정도 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실제로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이 테라스에 서 있는 어떤 사람도 저기 다리의 첫째 아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물론이요, 그 너머로 걸쳐 있는 두번째 아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든가, 작은 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는 얘기이지요."
 
 
"섬의 땅바닥 일대는 온통 가시덤불과 쐐기풀 따위의 덩굴 식물들로 북새통을 이루어서 계단까지 거의 뒤덮인 상황인데, 무슨 이유로 무슈 게르생이 굳이 비둘기 집으로 향하는 건지, 나는 계속 의아해하며 바라보고 있었지요. 마드모아젤 카트린이 그곳에 피신해 있을 가능성은 전무한데 말입니다. 과연 왜였을까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아무튼 무슈 게르생은 문에서 한 서너 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저기 문 또렷이 보이시죠? 우리와 바로 정면에서 마주보고 있지요. 큼직한 석재 토대 위에 둥그스름한 벽이 올라가고, 그 안에 나지막한 아치형으로 말입니다. 맹꽁이 자물쇠 하나하고 두 개의 넉넉한 빗장으로 문이 채워져 있을 겁니다. 무슈 게르생은 허리를 수그려 맹꽁이 자물쇠를 쉽게 풀어냈답니다. 그 이유야 나중에 직접 확인해보면 아시겠지만 무척 간단하지요. 꼬챙이 중 하나가 쉽사리 빠져나오거든요. 남은 건 두개의 빗장인 셈이죠. 무슈 게르생은 위의 것과 아래 것을 차례차례 손보았습니다. 이내, 그는 걸쇠를 부여잡더니 문짝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군요. 바로 그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팔을 들어 막거나 뒷걸음질로 피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니 심지어 그런 도발이 일어나는 걸 분간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총탄이 발사된 것입니다! 총성과 함께 맥없이 뒹구는 무슈 게르생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4. 습격
 
'모든 게 명확해지는군. 백작부인은 아들에게서 여행을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 두 연인간의 약속은 그대로 공중에 뜬 격이었겠지. 그러다 난데없이 어제 아침 젊은이의 작별 편지가 카트린에게 배달되었고, 기겁을 한 카트린은 바리바를 벗어나, 평상시 밀회를 나누던 장소로 무턱대고 달려온 거야. 물론 피에르 드 바슴 백작은 그곳에 있을 리가 없었지......'
 
 
5. '버으나우 셋'
 
"하지만 워낙 외롭게 지낸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일부러 무얼 숨긴다기보다는 무슨 일이든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거나 좀 과묵하게 넘어가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답니다. 꽤 기분이 괜찮을 때조차도 오로지 내 안에서, 나 자신만을 위한 기분에 그쳤지요.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전보다 훨씬 더 내성적으로 되어버렸답니다. 언니를 무척이나 따랐었지만, 그마저 결혼을 해서 떠나버렸지요. 나중에 언니가 돌아와서 그나마 많이 나아졌는데, 더군다나 이곳으로 함께 와 살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서로 애정을 품으면서도, 우리 사이에는 그때도 지금도 뭔가 서로 함께 해서 행복하다거나, 느긋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완벽한 친밀감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물론 그 날못은 나한테 있지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약혼을 한 몸입니다. 피에르 드 바슴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 역시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요. 하지만 그런 우리 둘 사이에도 역시 일종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속 시원히 드러내길 꺼려하고, 모든 충동적이고 활달한 태도를 공연히 경계하는 나의 이 천성에서 비롯된 결과죠."
 
 
"......이처럼 소극적인 태도는 보통 여성적인 은밀한 감정에 한해서는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특히 그 중에서도 다소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문제에 부닥쳤을 경우에는, 아주 괴상하게 보이기 마련이랍니다. 내가 바리바에 도착한 이후 벌어진 상황이 바로 그런 식이었어요. 정상대로라면 나를 후려쳤던 괴이한 사건들에 관해 일찌감치 얘기를 털어놓아야 했겠죠.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답니다. 실제 벌어진 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걸 혼자만 간직하고 있느라, 정작 남들한테는 어딘지 정신이 이상하고 불균형한 여자처럼 비치게 되고 만 것이죠. 결국 그러다보니 나 자신 불안에 찌들다 못해 신경질적이 되어버리고, 심지어 거친 여자로 변해버렸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과 나누기는 싫은 이 고통과 공포의 짐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하면서 말이죠."
 
 
6. 보셸 할멈
 
"......그렇다면 정녕 내가 미쳐버린 걸까요? 언덕 위애 있는 걸로 늘 알고 있던 나무들인데...... 불과 2년 전에도 거기 있는 걸 보았었고...... 한데도 이미 그땐 그곳에 있지 않았었다는 얘기잖아요?...... 이 지도는 할아버지와 내가 5년 전에 만들어놓은 것이니 말이에요...... 내 머리가 어떻게 이런 착각에 휘말릴 수가 있는 거죠? 그동안 정말 엄연한 사실적 증거에 대항해서 싸워왔어요. 차라리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나무들이 옮겨 심어진 거라 믿고도 싶었죠. 그러던 중, 여기 이렇게 지도가 내 눈이나 기억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선 거예요. 매 순간 내가 엄청난 착각을 했다는 걸 인정해야 할 판이니, 어떻게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내 전 인생이 그만 허깨비처럼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모든 과거가 한낱 허상과 거짓으로 점철된 악몽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에요......"
 
 
7.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
 
매일 저녁 그렇듯, 덧문은 둘 다 닫힌 상태. 라울이 얼른 걸쇠를 벗겨냈지만, 알고 보니 그것들 모두 밖으로부터 잠겨져 있었다. 제 아무리 격렬하게 뒤흔들어보아도 전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이내 포기하고 옆 방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지체했는지 정원 쪽으로 의심 갈 만한 징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힐끗 살펴보아도 당구실 밖 덧문에 큼직한 빗장이 가로질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경 적이 퇴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전날 밤 미리 장치해둔 것이 분명했다.
 
 
8. 유언장
 
아래 서명한 나 미셸 몽테시외는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신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한 사람으로, 충분한 숙고를 거친 소견과 더불어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권한에 따라 나의 두 손녀들에게 예전엔 그래도 꽃이 만발했던 바리바 영지 주변의 조촐한 땅을 (분할하지는 말되, 그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익의 각각 절반씩을 차지하는 형식으로) 물려주는 바이다.
 
영지에 한해서는 개천의 줄기에 거의 준해서 서로 다른 크기의 두 부분으로 나눌 작정이다. 그중 개천 우측 부분, 즉 장원을 비롯해서, 내가 죽는 시점에 그 안에 포함될 모든 것을 다 합한 구역은 카트린의 소유가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 애는 이 할아비와 둘이서 그랬듯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잘 가꾸어나갈 것이다. 나머지 다른 한쪽 땅은 베르트랑드의 소유가 될 것인데, 결혼해서 종종 그곳을 비울게 분명한 그 애도, 아마 거기 낡은 사냥용 별장 정도라면 가끔 들러 쉴 곳으로 흡족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에 더해서, 거길 수리하고 가구도 제법 갖추게 하기 위해, 또 두 유산의 불균형을 상쇄하는 뜻에서, 내가 죽거든 베르트랑드에게 3만5,000프랑어치의 금가루를 별도로 유증하기로 한다. 그것은 내가 직접 만들어낸 것으로, 유언 추가서에 그 정확한 소재지를 밝혀놓을 것이다. 아울러 떄가 도래하면 그 비할 바 없는 보물을 만들어낸 비법 또한 공개할 것이다. 보물의 진실성에 관해서는 언젠가 내가 그중 몇 그램 정도를 보여준 적이 있는 베르나르 선생만이 유일하게 보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나는 두 손녀들이 내 의지를 준수하는 데 서로간 하등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걸 지금까지 그 애들을 비추어봐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둘 중 하나는 결혼을 했고, 나머지 하나 역시 조만간 하게 될 것인 바, 둘 사이 여하한 오해를 초래할 만한 해석상의 오류도 철저히 차단키 위해, 나는 영지의 지형을 묘사한 도면을 작성해서 내 책상 오른쪽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것을 보면 결코 어떤 혼동도 없을 만큼 확실한 방법으로 표시를 해두었음을 알 것이다. 즉 영지 내부의 두 소유지 경계선은 카트린이 즐겨 숨어들었던 세 그루의 버드나무 중 가운데 놈에서 출발하여, 곧장 정원의 정문 철책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들 중 맨 서쪽 기둥에까지 도달할 것이다. 아울러 쥐똥나무 생울타리라든가, 아니면 말뚝 울타리로 경계선을 표시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각자 아무런 불만 없이 편안할 일이며, 오로지 그 원칙에 입각하여 이 유언의 규정들을 정하는 바이다.
 
 
9. 용의자 두 명
 
"알아요...... 그러지 않아도 엄청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린 돈이 너무도 궁했고, 카트린에 비해 터무니없는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그 금가루 얘기가 남편의 정신을 돌게 만든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황금 제조의 비법을 발견했으며, 장원과 더불어 개천 우측 땅덩어리를 몽땅 카트린한테 넘기면서, 무한정한 보물 역시 물려주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렇다 해도 카트린은 분명 당신과 그것을 나누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워낙 남편 고집이 강한지라, 난 어찌 할 도리가 없었어요. 나약하기도 했고, 비겁하기도 한 거죠...... 때로는 울컥하는 심정도 없진 않았고요.; 정말이지 그때 생각으로는 너무도 부당하고......심한 처사라 여겨졋습니다!......"
 
 
"사실 그쯤 되자 나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카트린에게 죄다 일러바치겟다고 위협했거든요. 게다가 우린 점점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기도 했고요. 사실 올해 동생 결혼을 앞두고 카트린과 함께 이곳에 머물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걸로 영영 갈라서게 되는구나 싶었답니다. 그런데 두 달 후 남편이 불쑥 찾아와서 난 굉장히 놀랐지요. 남편은 파므롱과의 일에 관해선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도무지 누가 그이를 죽였고, 또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고 있답니다."
 
 
10. 큰 모자를 쓴 사나이
 
"아, 이제야말로 독안에 든 쥐다, 이 놈!"
 
그런데 이에 맞서 귓가에 들려온 것은 처량하게 애걸하는 나약한 목소리였다.
 
"아, 이런...... 대체 왜 이러나? 이거 놓지 못해?"
 
베슈의 목소리였다.
 
라울로서는 길길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 시간에 하필 이런 데서 잠을 청하긴가? 젠장, 멍청하기는! 그래, 누구와 함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베슈 역시 보통 화가 나 있는 게 아니었고,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는 듯 바짝 뻗대면서 엄청난 괴력으로 라울의 몸을 흔들어댔다.
 
"멍청한 게 누군데 이래? 지금 자네가 어떤 와중에 끼어든 건지 알기나 하나? 도대체 왜 우리를 방해하는 거야?"
 
"우리라니, 그게 누군데?"
 
"당연히 그 여자지! 제기랄! 이제 막 입을 맞추려던 참이었단 말이야! 처음으로 여자가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당장 입을 맞추려는데, 자네가 모조리 틀어놨다구! 이 답답한 친구 같으니라구!"
 
화도 났고 한편 허탈하기도 했지만, 라울은 그가 망쳐놓은 유혹의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는, 허리가 끊어져라 폭소에 또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하하하하...... 요리사였어!...... 요리사!...... 베슈가 드디어 요리사를 품어보려고 했다 이거야!...... 세상에, 내가 그 알량한 예식을 중단시켜버리다니...... 오, 하느님 맙소사! 이런 포복절도할 일이 있나! 베슈가 요리사에게 입을 맞추려 하다니! 돈 후안이 따로 없구만그래!"
 
 
11. 함정에 빠지다
 
아침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오가 되었을 텐데, 그 어떤 탈 것 이동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필경 두 자매는 전보를 받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라디카텔을 떠났을 것이다. 릴르본에서 기차를 잡아타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런 라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성당 종소리가 오후 한 시를 규칙적으로 알리는 가운데, 그리 멀지 않는 느낌의 외침소리가 이렇게 들려온 것이다.
 
“라울! 라울!”
 
영락없는 카트린의 목소리였다.
 
아울러 베르트랑드의 목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라울! 라울!”
 
라울은 여자들의 이름을 번갈아 고래고래 외쳐댔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두 젊은 여자는 그밖에도 여러 차례 라울의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어쩐지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적막......
 
 
12. 복수
 
“혹시 파리로부터 당신들한테 전보 온 것 있습니까?”
 
대답은 베슈가 대신했다.
 
“그렇다네. 첫 기차로 자네한테 와달라는 내용이었어. 자네 집에서 만나자고 말이야.”
 
“그런데 왜 가지 않은 거지?”
 
“난 그러자고 했지. 한데 여자들이 원치 않더구만.”
 
“이유는?”
 
“의심이 간다는 거야. 자네가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떠날 리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 모두 나서서 자넬 찾아보기로 했다네...... 우선 바깥 숲부터 뒤졌지. 그런데 얼마 안 가 우리도 갈피를 못 잡겠더군. 도대체 자네가 떠난 건지 아닌지부터가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만 흘러갔지. 그뒤론 잠도 한숨 못 잤다네.”
 
 
13. 논고(論告)
 
“천만에, 베슈! 그래서 자넨 늘 안 되는 거야. 아르놀드는 살인을 하지 않았네.”
 
 
“모두가 장원을 떠나게 하자는 거였지.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장원에 사람이 죄다 빠져나가서 아무도 보는 눈이 없어야만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한 작업을 벌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것도 9월 12일이라는 정해진 날짜가 도래하기 전까지 몽땅 빠져나가야만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두 자매가 기겁을 해서 떠날 결심을 할 만큼,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할 수밖에 없었지. 원체 사람 죽일 천성은 못 되기에,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반드시 여기서 내쫓기는 해야만 할 일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카트린의 침실 창문으로 잠입해 들어와, 여자의 목을 다짜고짜 조르기 시작했지. 자네가 보기엔 진짜로 공격을 한 거라 볼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저 그런 시늉만 했을 뿐이라네. 목을 조르되, 죽을 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살해할 시간여유는 있었어. 하지만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어차피 죽일 목적은 전혀 아닌 것을 말이야. 그래서 적당히 해두고 냅다 도망쳐버린 거라네.”
 
 
“그녀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아르놀드의 공범이라네.”
 
“아니지, 그녀가 자네를 구해낸걸?”
 
“회한이 들었던 게지! 지금까지는 아르놀드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의 행태에 적극 협조해온 게 사실이라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이따위 범죄행각이 더는 싫어졌고, 적어도 아르놀드가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거지.”
 
“아니, 그건 또 왜? 그가 무슨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나?”
 
“정녕 알고 싶은가?”
 
“그렇네.”
 
“아르놀드가 범죄자가 되는 걸 그녀가 왜 못마땅해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렇다니까!”
 
“그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뭐, 뭐라구? 지금 뭐라고 했나? 감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나는 샤를로트가 아르놀드의 정부(情婦)라고 말하는 것이네.”
 
순간, 베슈는 주먹을 한껏 치켜들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14. 황금
 
진짜로 라울이 지목한 곳을 보니 동그란 쇠틀에 체의 그것과 똑같은 촘촘한 쇠망이 자리한 사내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떤가, 베슈, 설마 개천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싫어? 그럼, 가만히 낚기나 하다가, 체를 따라 바닥을 죽 긁어오게.”
 
“상류 쪽으로 말이지?”
 
“그래, 개천이 원래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금가루들을 운반해와, 결국 체에서 걸러지니까 말이야.”
 
베슈는 즉시 시킨 대로 했다. 사내끼의 손잡이가 긴 편이어서, 기슭의 큼직한 돌멩이에 올라선 채로도 개천의 4분의 3까지 미칠 수가 있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숙한 시간이었다. 라울이 예견한 바가 과연 옳을 것인가? 정말 저 수초들과 섬세한 조약돌들이 즐비한 개천 바닥에서 몽테시외 씨는 자신의 더없이 소중한 황금가루를 거두어들였던 것일까?
 
드디어 베슈가 일을 끝내고서 사내끼를 들어올렸다.
 
금속 망 속에는 조약돌과 얼기설기 수초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뭔가 반짝거리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분명 황금가루와 그 조각들이었다.
 
 
15. 집정관의 재산
 
아직 젖은 상태인 나무뿌리와 가시덤불이 맨 먼저 제거되었고, 파묻혀 있던 오솔길이 복구되었다. 이어서 원형의 공간이 드러났고, 그 기저를 이루는 자갈층에 곡괭이질이 가해졌다.
 
하나의 장애물이 무너지자 또다른 장애물이 나타났고, 거기에는 보다 섬세한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모자이크의 흔적과 더불어 역시 조각상 같은 게 세워 올려졌을 다른 토대가 드러났는데, 이제 두남자의 발굴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사방으로부터 물이 스며들어 적당히 고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개천 쪽을 향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내리친 곡괭이가 석벽을 그대로 뚫고 텅 빈 공간으로 쑥 빠져들었다. 부지런히 구멍 넓히는 작업에 들어갔고, 잠시 후 라울이 램프 불을 켜 확장된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과연 예견했던 대로, 사람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동굴이 휑하니 열려 있는데, 아마도 장례실로 쓰이던 공간 같았다. 중앙에 뻗은 기둥 하나가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유약 바른 흙으로 구운 투박스럽고 뚱뚱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흔히 보는 기름 보관용 단지들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그중 네 번째 항아리에서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끈적끈적한 훍바닥에 흐트러져 있었고, 황금빛의 반짝거리는 가루가 그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16. 에필로그: 둘 중 누구를?
 
“나는 당신 둘 다 사랑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둘 다라는 말...... 둘 다 고만고만할지언정, 둘 중 누굴 더 사랑하는 건 아니죠!”
 
여자의 말에 라울이 발끈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다시 또 여자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아니에요!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어차피 베르트랑드나 나나, 우리 둘의 감정은 당신이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한데도 당신은 우리 둘 다를 향한 감정으로만 그에 응하고 있어요...... 장원에서도 당신은 우리 둘 다를 위해, 그야말로 공동의 선(善)을 위해 싸우셨지, 그 두 사람을 따로따로 분리해 대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여겼어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당신한테 우리 두 사람 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자고로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는 그렇게 되어선 곤란하죠...... 이곳 파리에 돌아온 이래, 당신은 하루 건너 번갈아 우리 두 사람을 제각기 따로 보러 왔어요. 그러는 동안 우린 헛된 자존심 반, 질투 반의 심정으로 당신의 결단이 내려지기만을 고대해왔죠. 그런데 이제는 당신이 결코 결단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당신은 언제까지나 우리 두 자매를 똑같이 사랑하려고만 들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뭡니까?”
 
라울은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대신 우리가 내린 결정을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온 거예요. 당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래, 어떤 결정을 내렸나요?”
 
“떠나기로 했어요.”
 
라울은 펄쩍 뛰었다.
 
 
 
에메랄드 반지
 
“마담, 당신은 필경 어떤 의혹 섞인 동작, 경계하는 행동을 실행에 옮겼을 겁니다. 비록 그 상황에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당신의 성향에도 배치되는 짓이지만, 원하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저지르고 만 것이죠. 왜냐하면 무슈 데르비놀의 이름이 어떻든 간에, 덮어높고 그를 에메랄드 반지를 능히 훔칠 수 있는 자로 본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울화가 치밀더군요. 나는 길길이 소리를 질러댔죠.
 
‘내가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한 단 말입니까? 그런 파렴치한 의심을 했다구요?’
 
데느리스 남작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 물론 그런 건 아니죠. 대만, 당신의 무의식이란 놈이 수작을 부려, 마치 당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몰아간 겁니다. 그 놈은 당신의 시선과 사고가 닿지 않는 곳에서 몰래 장난을 쳤답니다. 흔히 끼고 다니는 모조보석 반지들과 무려 8만 프랑에 달하는 진짜 에메랄드 보석 반지 사이에서 재빠른 선택을 하게 만든 거지요.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고, 반지들이 우르르 외발 원탁 위에 놓여졌을 때, 당신은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에메랄드 반지를 역시 무의식 중에 모든 의심스런 시도로부터 차단한 겁니다.’
 
그때만 해도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만한 모함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요.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그랬다면 내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리가 없죠!’
 
‘한데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바로 증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에메랄드 반지가 내 수중에 있어야 하잖아요!’
 
‘아니죠. 그건 당신이 놓아둔 곳에 얌전히 있습니다.’
 
‘내가 놓아둔 곳이라뇨?’
 
‘바로 외발 원탁 위 말입니다.’
 
‘거긴 없어요. 없다는 건 당신도 보고 있잖아요?’
 
‘있습니다.’
 
‘뭐요? 보시다시피 저긴 내 손가방밖에는 없어요!’
 
‘그러게요! 그러니 반지는 당신 손가방 안에 있는 겁니다, 마담.’
 
 
“어쨌든 올가 당신은 반지를 지켜냈고, 데르비놀은 자기 돈을 간수한 셈이로군요. 결국 아무것도 빼앗긴 물건이 없으니, 당신 얘기대로 일을 해주고 알아서 챙기는 게 능사인 바르네트의 원칙에는 정면으로 위배된 경우라 하겠어요. 스스로 손가방 안을 뒤져서 에메랄드 반지를 충분히 후무릴 수가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예요. 그건 틀림없이 반지보다 더 좋은 걸 바란다는 뜻이겠죠. 그러고 보니 누군가 해준 얘기 하나가 생각나네요. 한번은 그가 일을 해준 뒤 아무 보상도 청구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채무자의 여자를 슬쩍 빼돌려 함께 유람여행을 떠났다고 하죠! 어때요, 올가, 정말 보상 청구치고는 아주 멋들어진 방법 아닌가요? 당신이 지금까지 들려준 그 남자의 모습이나 성향에 정말 잘 어울리는 수법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올가?”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2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독창적인 테마들
 
① 이중적인 캐릭터
 
두말할 것도 없이 ‘괴도+신사’라는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이야말로 문학에서 최고 수준의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이중적 캐릭터’라고 할 것이다. 특히 시리즈가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도둑에서 탐정으로 점차 변모되어가는 이중적 혹은 분열적 주인공의 양상은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자체를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제시함으로써 스토리를 더욱 긴장감 있게 이끌어나가는 동인(動因)이 된다. 처음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완전한 도둑으로 출발한 뤼팽의 정체성은 대작 「813의 비밀」에 이르면서부터 출발점과 완벽한 대극을 이루는 경찰(혹은 탐정)의 이미지로 둔갑을 하며 독자의 정신을 어지럽게 한다. 「813의 비밀」에서부터 현란하게 선보이는 이름 철자 바꾸기(anagramme) 기술과 이전부터도 워낙 유명한 변장능력은 뤼팽의 이중적 정체성을 지탱하는 정교한 테크닉이다. ‘범죄자는 곧 경찰이 될 수 있다’는 고전적인 명제는 누구보다도 버도크(1775-1857)라는 실존인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레미제라블」[1862])과 발자크의 보트랭(「고리오영감」[1834-1835])이 바로 그를 모델로 해서 태어나는가 하면, 급기야 20세기 초 아르센 뤼팽에 이르러 그 가장 완벽한 전형이 탄생한 셈이다. 요컨대, 「813의 비밀」에 등장하는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폴 세르닌의 1인 2역 드라마는 선과 악의 이중적 캐릭터가 추리문학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된 최초의 케이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이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는 그 당시부터 수많은 추종세력을 불려나갔고, 양상은 좀 다르지만 팡토마스2)라든지 사이먼 템플러3)처럼 한층 발전된 또 하나의 범죄자 유형으로 그 화려한 명맥을 이어간다. 뤼팽 연구가들의 연구 결과, 엘러리 퀸의 「그리스 관(棺)의 비밀」(1932) 같은 수작 역시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영향권 안에서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② 암호화된 전언에 의해서 진행되는 범죄의 테마
 
예컨대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서 희생자가 정해진다든다, 기존의 문서에 나타난 단서대로 범죄의 장소나 시기가 결정된다는 식의 설정 역시 뤼팽 시리즈에서 큰 효과를 본 추리적 장치이다. 「서른 개의 관」을 보면 노스트라다무스 스타일의 아리송한 시구 철자 하나하나에까지 집착하면서 광기 어린 살인극을 저지르는 광인 보르스키가 등장한다. 중세의 한 수사가 그저 운을 맞추기 위해 끄적여놓은 시구 하나하나가 범행의 시기와 희생자의 수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예언이 되고 만다.
 
이처럼 암호화된 코드나 언어적 단서가 범죄 자체를 성립시킨다는 테마는 반 다인의 「비솝 살인사건」(1929)이라든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1940)5) 그리고 엘러리 퀸의 「더블, 더블」(1950)6)보다 한 발 앞서서 활용되었다. 「서른 개의 관」과 더불어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중 “도끼를 든 귀부인” 역시 수수께끼 같은 언어유희에 의거해서 범죄가 엮어지는 테마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③ 복제된 장소의 테마
 
어떤 하나의 장소가 제시되고, 마치 복제된 듯 그것과 똑같은 장소가 새롭게 범죄에 활용됨으로써,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알리바이가 가능해딘다는 테마는 뤼팽 시리즈 중 「불가사의한 저택」의 주요 테마이다. 이는 분명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1939)이라든가 프레데릭 다르의 「기중기」(1961)보다 10년 이상 앞선 선례라고 할 수 있다.
 
④ 그밖의 테마와 기법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추리적 관점에서 참신한 기법과 테마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즉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와 「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고백」 같은 단편 모음집 안의 주옥같은 작품들에서 독자들은 보다 많은 추리적 장치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느낀다. 미국 출신의 유명한 추리문학 전문가인 하워드 헤이크 래프트7)는 특히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를 두고, 추리소설의 줄거리 얼개 면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성을 지닌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테레즈와 제르맨”에서의 밀실 변사체, “눈 위의 발자국”에서의 조작된 발자국 등의 테마는 그 방면의 고전적 전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속의 단서”에서 현실이 허구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테마는 체스터턴류의 발상이 앞서 나간 예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바르네트 탐정사무소」의 단편들 중 “흰 장갑...... 하얀 각반......”에서 선보인 눈에 보이면서도 목격되지 않는 용의자의 테마나 “바카라 게임”에서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수법 등도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추리적 기법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아르센 뤼팽의 고백」 중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에서, 별개의 두 사람으로 등장했던 사람이 결국 동일인물이었다는 식의 발상은 「브라운 신부의 지혜」를 통해서 체스터턴이 그보다 1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천착한 테마이기도 하다.
 
 
2) 피에르 수베스트르(Pierre Souvestre)와 마르셀 알랭(Marcel Allain)의 공저로 이루어진 범죄 소설 시리즈의 백미로서, 「팡토마스(Rantomass)」(1911)를 시작으로 「팡토마스의 최후(La Fin de Fantomass)」(1913)에 이르기까지, 단기간에 총 32편이라는 경이로운 시리즈가 선을 보였다.
 
3) 소위 ‘세인트(Saint)’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레슬리 차터리스(Leslie Charteris, 1907-1993)가 창조한 20세기형 로빈후드라고 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점에서 아르센 뤼팽으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어 창조된 캐릭터이다. 1928년 「호랑이와 맞서라(Meet the Tiger)!」로부터 시작해 작가 본인이 직접 집필한 시리즈만 총 19편에 달한다. 프랑스에서의 인기도 대단해, 번역본말고도 수십 여 편에 이르는 모작 시리즈가 프랑스어로 집필, 출판도기도 했다.
 
5) 국내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6) 국내에는 「일곱 번의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7) 「즐거움을 위한 살인, 탐벙 스토리의 생명과 시간(Murder for Pleasure: The Life and Times of the Detective Story)」(1941)이라는 저서에서, 일반 추리소설 팬들이 추리문학 감상의 주춧돌로 삼을 만한 명작 리스트(1841-1938 출간)를 70여편 이상 추려 제시한 바가 있는데, 그 중 뤼팽 시리즈의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가 당당히 올라 있다.
 
 
(http://home.comcast.net/~dwtaylor1/haycraft.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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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저택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5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 소설이 시작할 때는 아, 또 그렇고 그런 뤼팽의 모험담 중 하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흘러가는 이야기도 다소 김이 빠지는 부분도 있었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지막 트릭이 공개되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한다.

 

불가사의한 저택이라는 을씨년스런 제목이 붙은 이 작품에서는 1년간의 모터보트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센 뤼팽이 장 데느리스 자작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첫 장부터 글자 그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꼬리를 무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 전개는 후반부에 들어서 해결의 실마리가 한꺼번에 풀리기 직전까지 독자의 의식을 완벽한 미궁으로 몰아간다. 까마득한 과거사 속에서 스토리의 발단을 구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장기가 여전하며, 전작(前作)에 이어 베슈 형사와 뤼팽 간의 유머 섞인 재치 만점 대결도 그대로이다. 뤼팽 시리즈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 대담무쌍한 발상을 이야기 저변에 깔되, 특히 이 작품은 과도한 비약보다는 치밀하게 점진적인 구성을 견지함으로써, 모처럼 퍼즐 맞추기식()의 지적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이번 해설부터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작품론을 다루기로 하며, 그 첫걸음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대한 같은 추리작가들의 촌평을 발췌 소개해본다.

 

아르센 뤼팽의 미출간 회고록에서 발췌함

나의 지난 모험들 중 몇몇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술한 책들을

지금 다시 훑어보노라면, 한마디로 그 각각은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을 던지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생각이든다.

황금 양털(Toison d'or)이 모양만 변했을 뿐 내가 이제껏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헤매온 것이 바로 그 황금 양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상황에 따라 내 이름과 성격을 달리 해야만 했기에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고 이전까지는 결코 사랑해본 적도 없으며

이후에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매번 새롭게 다져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로 눈을 돌려볼 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나 소냐 크리슈노프,

돌로레스 케셀바흐 혹은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등과 대면했던 남자는

아르센 뤼팽이 아니었으며 각각 라울 당드레지, 샤르므라스 공작, 폴 세르닌

그리고 리메지 남작이었다. 그들 모두는 각기 다른 인물임과 동시에 그 어느

하나도 나와 똑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그들이 겪은 다채로운 사랑을

나 자신은 겪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때로는 재미나거나

짜증스럽고, 때로는 지그시 미소를 짓거나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마치 이름 모를 형제들처럼 나와 비슷하게 닮았던 그 모든 풍운아들 가운데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친구를 꼽으라면 아마도 마도로스 신사이자

탐정신사인 데느리스 자작일 것이다. 그는 파리의 어여쁜 모델이자 지고지순한

아를레트의 마음을 얻고자 저 불가사의한 저택을 둘러싼

험난한 싸움에 기꺼이 뛰어들었던 것이니......

 

1. 여배우 레진

그 매혹적인 발상은 그러지 않아도 자선행사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즐기는 너그러운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발레의 막간을 이용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재단한 옷을 연예계 혹은 사교계의 아리따운 여인 스무 명에게 입혀서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투표를 통해서 그 날 선보인 가장 아름다우 의상 세 벌을 선정하도록 되어 있고 그를 제작한 작업실에 입장 수익 전액을 골고루 지원한다는 취지였다. 그 결과 파리 양장점의 들뜬 아가씨들 상당수가 저 유명한 리비에라 휴양지로 보름간의 휴가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된다.

 

2. 모델 아를레트

"하긴 꽤나 엉뚱한 얘기지...... 애들 생각처럼 유치해...... 난 딱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대규모 양장점의 중역이나 사장이 되고 싶어. 직원 복지에 큰 비중을 두도록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갖춘 회사 말이야...... 그리고 또 여자 노동자들한테 지참금을 듬뿍듬뿍 나눠주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자기 맘에 맞는 곳으로 얼마든지 시집을 갈 수 있도록 말이지......"

제 입으로 엉뚱한 꿈이라면서 해맑게 웃는 아를레트...... 하지만 듣는 동료 아가씨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3. 탐정신사 데느리스

데느리스는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두르고서 여자 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잘 생각해봐요, 아를레트. 그냥 겉으로 부닥쳐서 뻔히 드러난 외적인 사건들을 기억해내라는 얘기가 아니야. 당신 마음 먹기에 따라 기억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일 따위는 말고...... 의식을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어서 그만 잊어버리고 만 일들을 생각해내보라는 거야.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특별한 점 말이지......"

 

4. 형사 베슈

멜라마르 백작은 이 모든 광경을 일견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왠지 묘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떨어져나간 가슴받이를 예심판사가 불쑥 내밀며 추궁하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입술을 씰룩거려 볼썽 사나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댔다.

"내 누이동생, 어디 갔나요?"

늙은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마담은 침실로 건너가신 것 같은데요."

"그 애한테 나 대신 작별인사나 전해주구려. 아울러 내 뒤를 따르라고 해주오."

백작이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관자놀이를 겨눈 뒤 방아쇠를 당기는 것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만 유독 그의 행동을 주의해 관찰하고 있던 데느리스가 부리나케 몸을 날려 팔꿈치를 쳐냈기 때문에, 총알은 살짝 비쪄나가 유리창을 박살내고 말았다. 동시에 형사들이 우르르 멜라마르 씨를 덮쳤다.

 

5. 그는 적()인가?

때는 1840, 현 백작의 증조부 되는 쥘 드 멜라마르는 멜라마르 가문의 가장 출중한 인물로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다가 왕정복고 시절에는 대사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어인 일인지 그만 살인절도죄로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급기야 그는 감방 안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에 문제를 좀더 치밀하게 파고들기로 했다. 그렇게 오래 된 자료들을 있는 대로 파헤친 결과, 일부 묻혀 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문서 하나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1868년 바로 그 멜라마르의 아들이자 아드리앵 드 멜라마르 백작의 조부가 되는 알퐁스 드 멜라마르가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전속부관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살인과 절도죄를 범했다는 내용이다. 결국 그는 뒤르페가()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 자결을 했고 황제는 모든 사건을 불문에 부쳐버렸다.

이상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세간에 대단한 소란을 몰고 왔다. 졸지에 어떤 단어 하나가 현재의 사태를 환하게 규명해주는 듯했고, 일거에 상황을 요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는 말...... 비록 백작가문의 두 남매가 대단한 재산가는 아니라고 해도, 파리에 대저택을 소유한 데다 투렌에는 성채도 하나 지니고 있는 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으며 오히려 여러 자선사업에 투자를 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페라 극장의 사건과 다이아몬드 절도 건에 대해 무슨 물욕(物慾)이 있어서라고 설명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결국 격세유전에 의한 범행인 것, 멜라마르 가문은 일종의 도벽(盜癖)을 본능적으로 지닌 집안이다. 멜라마르 남매도 분명 조상으로부터 그러한 형질을 물려받았을 게 뻔하다. 그들이 이번에 도둑질을 한 것은, 물론 자기들 재력을 상회하는 생활수준을 넘보기 위한 면도 없지는 않겠으나, 그보다는 좀더 강력한 유혹, 즉 격세유전적 필연성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조부인 알퐁스 드 멜라마르처럼 아드리앵 백작도 자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보라! 그 역시 격세유전의 증거인 셈이다.

 

6. 멜라마르 가문(家門)의 비밀

"그럼요! 물론이고말고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또 당했을 겁니다. 이 저택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바로 이곳에 멜라마르가(家)의 악령이 있어서 우리를 포위하고, 급기야는 망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남매가 지금 숙명의 섭리에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그 악령의 저주를 거슬렀기 때문이랍니다. 어느새 과거를 깡그리 잊고 그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저택에 입성하는 것만 즐거워하면서 시골을 떠나와 이곳 뒤르페가(街)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우리 남매는 음산한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답니다. 특히 오빠가 더 그랬어요. 나야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몸이니 행복도 불행도 골고루 겪은 셈이지만, 아드리앵의 경우는 다짜고짜 침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지요. 워낙 저주에 대한 확신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강하게 자리잡은지라, 그는 아예 결혼도 포기하기로 작정했으니까요. 멜라마르 가문의 혈통에 그런 식으로라도 종지부를 찍는다면 운명도 피할 수 있고 계속되는 불운도 중단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멜라마르가(街)의 최후의 생존자가 되고자 한 것이죠. 정말 무서워했어요!"

 

7. 구원자 파즈로

별다른 겉치레 없게 단순히 내뱉은 말 같았지만, 분명 아를레트를 향한 의미 있는 시선이 동반된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방 안에 자리잡은 사람들 위치상, 그 순간 어느 누구의 얼굴도 데느리스의 시야에 포착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이 말이 질베르트 드 멜라마르에게 건네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약간의 의혹이 있었다면 지극히 짧은 순간뿐이었고 그것은 베슈의 두 견갑골 중안 부위에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어김없이 찍어 꽂는 것이었다. 반장 입장에서는, 과연 인간의 손가락이 마치 고문용 집게와도 같은, 이런 괴력을 발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데느리스는 그곳을 벗어나면서도 앙투안 파즈로에 대해, 그리고 아를레트에 대해 당최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규방을 빠져나와 현관 바닥을 밟으면서도 오히려 발소리가 들켰으면, 그래서 지금의 이 더러운 기분을 왈칵 쏟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오기까지 들었다.

 

8. 방화범 마르탱 가문(家門)

데느리스는  급기야 파즈로를 향해 노골적으로 물었따.

"당신 저 여자를 사랑합니까?"

"한없이 사랑하오."

열정 어린 대답이었다.

"아를레트도 당신을 사랑하오?"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요?"

파즈로는 자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가 최고의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요?"

"우린 약혼한 사이죠."

"뭐? 당신들이 서로 약혼을 했어?"

 

9. 아를레트의 약혼

아무래도 앙투안 파즈로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장의 허를 찌르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도 되는 듯했다. 아를레트와의 관계하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약혼설, 그들 커플한테 향하는 멜라마르 백작 남매의 적극적인 호의, 상상도 못할 저택 구입 소식 등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마치 일상적인 삶의 극히 평범한 일들처럼 이 자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10. 주먹질

"멜라마르가(家)의 비밀이라! 그동안 얼마나 고심해왔던가! 처음, 레진과 아를레트가 납치 당했을 때부터,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어. 지금 우리는 머나먼 과거를 통해서만 현재가 제대로 해명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거라고...... 따지고 보면 그런 종류의 문제들일수록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빼앗겨왔는지! 해결한 것도 숱하게 많지! 아무튼 이번 경우에도 딱 한 가지 요점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걸로 떠오르더구만. 즉 멜라마르 남매는 결코 범인일 수가 없다는 사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남매의 저택을, 모종의 음모를 실행에 옮기는 무대로 활용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그것이 실은 앙투안 파즈로의 논조였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믿고 사법당국도 그쪽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함으로써 파즈로에게 엉뚱한 실익이 돌아가더라 이거야. 또 하나 의문인 건 과연 아를레트와 레진이 멜라마르 남매와 프랑수아 부부의 주의를 끌지 않고도 응접실까지 이끌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느냐는 문제였지......"

 

11.애첩(愛妾) 발네리

불가사의한 기적이었다!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을 벗어난 지 10여 분 만에 또다시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에 와 있는 것이다! 분명 센 강을 건넜고, 그것도 딱 한 차례 건넜다! 그렇다고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무슨 원을 그린 것도 아니다. 뒤르페가(街)를 벗어나서 무려 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훌쩍 지나왔는데도 불구하고(3킬로미터라면 옛날 파리 시가지로 볼 때 앵발리드에서 레 보즈 광장에 이르는 거리이다), 지금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사물들끼리 일치한다는 것, 즉 두 안뜰 저만치 세워진 건물의 두 전면(前面) 생김새와 색깔, 윤곽 등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월의 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분위기, 근처 강물로부터 실려온 습한 공기를 머금은 채 제한된 장방형 벽체들 사이를 감도는 뭔가 모를 기운마저 서로 똑같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이었다.

분명 똑같은 채석장에서 똑같은 크기로 깎아 대령한 건축용 석재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아스라이 묻어난 세월의 때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발소리까지 똑같네."

현관을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리는 백작의 목소리마저도, 자기 집을 걸어 들어갈 때 실내 가득 울려퍼졌던 그 목소리와 똑같은 울림을 내고 있었다.

 

12. 아르센 뤼팽

"자네의 그 호각은 아마 말을 듣지 않을걸."

순간, 데느리스가 내뱉듯 말했다.

베슈는 있는 힘껏 호각을 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구멍 틈새로 빠져 달아나는 바람 소리가 고작이었다.

 

에필로그 : 아를레트와 장

"아무 걱정 마세요. 그냥 인생에 자신을 내맡겨봐요. 당신의 은둔처를 가르쳐준 것도 레진 자신이랍니다. 이 배하고 밀짚 모자와 푸른 작업복 모두 내가 돈 주고 정정당당하게 산 것이고요. 모든 게 잘될 겁니다. 휴가를 원한다면서 무엇 하러 지체한단 말입니까?"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1

-추리소설가들이 본 아르센 뤼팽 시리즈

 

★ 아르센 뤼팽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그가 칼리오스트로의 비밀을 밝혀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매혹시키는 재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발렌티노로부터 제임스 딘에 이르기까지,1) 몇몇 인간-우상들이 자칫 그대로 신이 될 뻔한 적은 있었지만, 진정한 신격화란, 우리의 내밀한 꿈에다 살아 숨쉬는 얼굴과 육체를 부여하려고 나타난, 이른바 상상 속의 존재들을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자고로 상상력이란 여성과도 같다. 그것은 오로지 강한 영웅한테만 감동하고 열광한다. 우리 각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떠받들고 있는 저 영원한 올림포스 산정에는 베토벤이라든지 나폴레옹, 니체 등 위대한 신들께서 더없이 준엄한 표정으로 잠들어 계신다. 그러나 그 신들과 인간 사이에는 약간은 가볍고도 경쾌하며 다정다감한, 날개 달린 중개자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하여 신화는 웅변과 상업 그리고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를 따로 창조해내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폭력과 향수에 반반씩 젖어 있던 금세기(20세기)의 벽두에 한 작가가 똑같은 의도로 헤르메스 같은 존재를 창조했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아르센 뤼팽이다.

부알로-나르스작2)

 

★ 「노란 방의 수수께끼」의 저자 이름은 가스통 르루이다. 그런데 나는 혹시 이 이름이 괴도신사 아르센 륖애의 모험담을 풀어내고 있는 모리스 르블랑이라는 작가의 또다른 '필명'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가끔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두 이름을 통해서 완벽하게 대칭적으로 역전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즉 '붉은 신사'는 언제나 탐정 이야기를 집필하는가 하면, '하얀 신사'는 항상 범죄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식으로 말이다.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적(赤)-백(白)의 조합이 우연의 일치 이상일 거라고 추정할 만한 무슨 진지한 이유가 내게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이야기는 사실 무척이나 상이한 종류에 각각 속하고 있다. 가스통 르루의 작품들로 말하자면, 줄거리의 중ㅅ미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수수께끼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좀더 엄격한 추리소설인 반면,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들은 쉴새없이 제기되는 난제(難題)들의 연속을 즉각즉각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차라리 숨가쁜 모험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 작중 주인공이 처한 상황 자체에서 비롯된다. 탐정은 늘 사건의 '밖'에 위치하는 반면, 범죄자는 언제나 사건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경찰은 항상 집 밖에 있는데 도둑은 늘 집 안에 들어가 있다라고도 할 수 있다.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4)

 

★ 내가 그를 발견한 지 너무 오래인 데다, 그때는 아주 어린 나이였기에, 그 시절로 뒷걸음질을 치다보면 문득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는 이른바 대중문학, 다시 말해서 '진짜 사실' 속의 위대한 주인공이다. 그를 좋아하는 데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설사 작품의 스타일은 유행에 뒤떨어질지라도 위대한 주인공 자체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나의 아버지가 아르센 뤼팽을 읽었고, 내가 그를 읽었으며, 나의 아들도 그를 읽었고, 내 손자들도 그를 읽을 것이다.

프레데릭 다르5)

 

★ 바캉스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는 객실 승객들한테 나를 잠시 맡길 때면 으레 이런 말을 하시곤 했다. '두고 보면 아시겠지만, 이 아이는 책만 손에 쥐면, 입도 뻥끗하지 않는답니다!' 보통은 그 책이라는 게 「서커스 개, 미셸」이라든가 「황금의 덫」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미끈한 얼굴에 외알 안경을 낀, 근사한 차림의 사내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에 온통 넋이 빼앗겨 있었다.

제목이 「수정마개」였는데, 그때 나는 도대체 수정 병마개가 어떻게 유리 의안(義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혼자 의아해하며 책을 구입했다. 솔직히 나의 그런 호기심이 시원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종착역에 도착할 즈음 이미 나는 여지껏 읽어온 책들과는 너무도 색다른, 게다가 상상한 내용과는 너무도 판이하고 고리타분한 삽화들 때문에 오히려 더욱 기이하게 느껴지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정복당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여름날이었는데, 숙모 한 분이 나더르 「르 주르날」지를 사오라고 시킨 뒤, 자기는 요즘 「바리바」라는 연재소설에 푹 빠져있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원에 모여 앉은 나머지 가족을 상대로 '아르센 뤼팽이 말입니다......'하며, 그 아리송한 제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인물이 오로지 나처럼 철부지 중학생의 세계에만 속하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1929년과 1930년에 걸친 그 여름, 그렇게 나는 '위대한 인물들'이 출몰하는 문학 책에 홀딱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떄만 해도 내 인생 자체가 추리문학과 더불어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아직도 "리브르 드 포슈" 판 책들에 자극을 받아 다시금 「기암성」이라든가 「불가사의한 저택」등을 정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멋진 뤼팽!'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기 일쑤다. 넓게 보면 그는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둘 중 여전히 보다 젊은 사람은 내가 아닌 바로 그인 것이다!

모리스-베르나르 앙드레브6)

 

★ 프랑스의 모든 추리소설 작가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뤼팽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의 문화를 지탱하던 기둥 세 개를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기암성」, 「무슈 리키키의 기상천외한 여행」그리고 「초록 암말」7)이 된다.

사실 이 세 작품들은 보기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다. 셋 모두 일종의 시적 리얼리즘이 독특한 미학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르블랑과 카미, 에메 모두 더없이 엄격한 논리적 요소들과 불가능한 가정들로부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것 또한 서로 비슷한 점이다.

그중에서도 뤼팽이라는 르블랑의 주인공은 일반적인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완벽 이상의 존재로서, 매혹시키는 주인공과 매혹 당하는 독자 사이의 동일시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캐릭터이며, 일단 책을 덮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모험담으로 태어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 중 누구도 자신만의 '뤼팽'을 만들어볼 욕심 한번 가져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뤼팽은 우리 추리소설 작가에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듬뿍 불어넣어준다.

미셸 르브룅8)

 

★ 미셸 르브룅(M. L.) : ......그럼,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누구인가?

레오 말레(L. M.) : 그야 당연히 아르센 뤼팽이지...... 그는 내가 읽은 첫 추리 소설들의 주인공이었다네...... 르블랑을 추리소설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

M. L. : 그러고 보면 돈키호테에서 우리가 그리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야.

L. M. : 맞아. 그것도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이지. 항상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으니까...... 게다가 나도 그렇지만 항상 패턴이 비슷해. 르블랑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보물을 찾아 헤매지...... 프랑스 제왕의 보물이든 다른 개인의 보물이든 말이야...... 나로 말하자면, 진주나 보석 혹은 숨겨둔 막대한 현금이 관건이 되지. 그다지 독창적이랄 것도 없어...... 내가 보기에 모리스 르블랑의 최고 작품들만 꼽는다면, 제일 먼저 「기암성」을 들겠어...... 아주 감동적이고 정말 아름답거든...... 특히 마지막에 죽은 여인을 향한 사랑 말이야......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나는 눈물 없이 그 대목을 읽은 적이 없다네...... 자네도 알지, 레이몽드가 죽고 나서 뤼팽이 여자를 들쳐업고 하는 말......

 

그 다음에는 단연 「수정마개」를 꼽을 거야. 일종의 추적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 정말 대단하단 말일세! 나는 아직 「수정마개」가 단 한번도 영화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할 정도라니까. 멍텅구리 같은 TV용 드라마말고, 진짜 영화 말이네! 「수정마개」는 시나리오를 써서 각색하기 위해 굳이 몸통을 절단하거나 할 필요도 없어. 그냥 그대로 카메라만 움직이면 된다구......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로즈 루즈' 사(社)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자 배우인 장 루죄에게 이런 모든 이야기를 했었지. 한데 그 친구 얘기가, 르블랑 영감이 글쎄 미국인들한테 완전히 당해서 이젠 불가능하다는 거야. 즉 미국에서 아르센 뤼팽의 영화 판권을 사들이고도 형편없는 졸작을 만들거나 아예 묵혀두는 바람에 거기에 묶인 나머지 프랑스에서는 그만 아르센 뤼팽으로 아무 영화도 못 만든다는 것이지...... 아무튼 참 대단한 영화가 될 터인데 말이야. 미국인들조차 그걸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 게다가 부패한 의원이라든가 파나마 스캔들에 대한 암시 같은 내용이, 시의적(時宜的)으로 적절한 부분도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들에선 약간 시들해진 면도 없진 않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나는 「황금삼각형」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 하지만 그 재미라는 것도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어. 뭐랄까, 나이를 잊고 싶어하는 일종의 향수(鄕愁)라고나 할까?...... 그걸 읽고 있으면 처음 그걸 읽었던 1920년대가 떠오르거든. 그때가 열한 살이었는데, 지나치게 애국주의적 대목에선 열광보다는 왠지 반감이 일기도 했지...... 당시에 나는 국가가 뭔지 별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방면엔 완전 숙맥이나 다름없었지......

그런가 하면 「서른 개의 관」은 그 분위기와 풍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네...... 심지어 1936년, 그 섬의 실제 모델로 여겨진던 브레아 섬에 가보았는데 완전 실망이더구만. 원래 문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모든 걸 부풀리지. 어쨌든 1914년의 전쟁 이전의 아르센 뤼팽과 그 이후의 아르센 뤼팽은 많이 다르다는 건 사실이라네. 완전히 애국투사가 되었지.....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면이 없진 않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해!...... 더 이상 괴도신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잖아...... 도둑질을 해도 과부와 고아를 돕기 위해서 하는 거야......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문제는 과부의 얼굴이 얼마나 반반하냐지...... 혈기와 활력은 아무래도 예전 같지가 않단 말씀이야......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해. 그렇게 된 건 다 나이 때문이거든. 작가의 나이 말일세......

미셀 르브룅과 레오 말레의 대담9)

 

1) 둘 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 요절함으로써 더더욱 우상화된 할리우드 스타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2) 부알로-나르스작은 원래 피에르 부알로(Pierre Boileau, 1906-1988)와 토마 나르스작(Thomas Narcejac, 1908-1998)이라는 두 사람의 공동 필명이다. 원래 아르센 뤼팽의 열렬한 팬이자 추리소설가였던 부알로와, 낭트 대학교의 철학교수이자 여흥 삼아 추리소설을 써오던 나르스작은 서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냥 한번 써본 공동 작품이 소위대박을 터뜨림으로써 이후 본격적인 추리문학 작품들을 써낸다. 대개는 부알로가 전체 줄거리를 구상하고 나르스작이 집필을 하는 식이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모작들로도 유명한 이들의 작품세계는, 특히 클루조 감독의 "디아볼릭(Les Diaboliques)"이라든가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 같은 영화들이 그들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을 만큼 대중적인 호소력과 아이디어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3) 여기에서 '붉은 신사(monsieur roux)'는 가스통 르루를, '하얀 신사(monsieur blanc)'는 모리스 르블랑을 지칭한다. 이유는 공교롭게도 전자의 성(姓)인 르루(Leroux)에 '붉은색'을 뜻하는 'roux'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후자의 성인 르블랑(Leblanc)에는 '하얀색'을 의미하는 'blanc'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 이야기를 '붉은색'이, 범죄 이야기를 '하얀색'이 담당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범죄가 '붉은' 피를 연상시키고, 그것을 깨끗이('하얀') 해결하는 일을 탐정이 담당한다는 점에서, 역전된 무엇인가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은 영국 태생의 신문기자이자 시인이며 작가로, 브라운 신부라는 추리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탐정 캐릭터 중 하나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5) 프레데릭 다르(Frederic Dard, 1921-2000)는 프랑스의 추리소설가로 산 안토니오(San Antonio)라는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100여 편의 작품들을 집필했다. 특히 장난스런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많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6)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

7) 마르셀 에메(Marcel Ayme, 1902-1967) 작품

8) 미셸 르브룅(Michel Lebrun, 1930-1996)의 본명은 미셸 카드, 80여 편의 추리소설 작품이 있으며, 특히 추리문학에 관한 백과사전식 박학다식으로 '추리문학계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9) 레오 말레(Leo Malet, 1909-1996)는 프랑스의 정통 누아르 소설의 원조 작가로서 네스토르 뷔르마라는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10여 편의 추리소설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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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모리스 르블랑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도 그렇고, 「813의 비밀」도 그렇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는 여러 면에서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와 닮아 있다. 하나의 주인공, 그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중심 인물, 여덟 개의 단편들, 각각 분리된 에피소드이지만 크게 보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나아가는 구성...... 처음 연재시 뤼팽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뤼팽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뤼팽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는 말도 되겠지만, 뤼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모리스 르블랑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는 가니마르의 제자 격인 테오도르 베슈 형사와 아르센 뤼팽의 또다른 얼굴인 짐 바르네트라는 수상쩍은 사설탐정이 재치 만점으로 엮어가는 총 여덟 개의 단편들의 옴니버스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될 당시만 해도 짐 바르네트는 아르센 뤼팽과는 별도의 주인공으로 창조된 캐릭터였으며, 추후에 아르센 뤼팽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가미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이은 로제 브로데의 삽화는 현대적 감각이 더욱 두드러져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 특히 「기암성」,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더불어 모리스 르블랑 스스로 아르센 뤼팽 3대 걸작으로 손꼽았을 정도로 작가 자신의 정성과 애정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보다 유머와 기발한 착상들이 다수 포진한 이 작품의 참신성은 발표 때부터 평론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로서는 처음 대하는 추리적 장치와 혹할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듬뿍 담긴 걸작으로 후대까지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아오고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이 여인들과 맺는 관계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그 깊은 의미를 해석해보기로 한다.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다음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워낙 지리멸렬하게 중구난방 떠도는 소문만 횡행했던지라

일반 대중이 무척 흥분된 반응을 보인 바 있었다.

더없이 황당무계한 모험들 속을 신나게 휘젓고 다녔던

짐 바르네트라는 이름의 기이한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오로지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고객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만

주문을 받아들였던 듯한 바르네트 사(社)라는 저 비밀스런 사설 탐정사무소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제 문제를 속속들이 까발리고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작금의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는 서둘러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돌리고

짐 바르네트의 비행(非行) 역시 그것을 범한 자의 몫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즉 도저히 교화 불가능한 아르센 뤼팽의 몫으로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더 나빠질 일도 없을 테니까......

 

1. 진주알들의 행방

"만약 당신이 목걸이를 선택한다면,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봐 다시 말하건대, 지금 이 목걸이가 이 방을 벗어난다면, 당연히 내일이면 공증인이 이 두번째 유언장을 접수할 것이고, 그럼 당신은 유산 상속에서 영영 멀어지는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야 아무도 모르고 있는 두번째 유언장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이 유산 전액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죠. 무려 1000만 프랑이 고스란히 당신 품안으로 돌아온다 이겁니다, 바로 이 짐 바르네트의 덕택으로 말이죠......"

분명 빈정대는 목소리였다. 그에 따라 발레리는 목이 바짝바짝 조여오는 것이 마치 자신이 이 악마적인 인간의 손아귀에 붙들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어떤 저항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가 만약 목걸이를 사내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문제의 유언장은 세상에 공개될 것이었다. 이 정도 교활하고 지독한 상대 앞에서는 그 어떤 기도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2. 조지 왕의 연애편지

"당신 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요. 그야말로 아르센 뤼팽에게나 어울릴 역량이오......"

"뭐라구요?"

바르네트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편지를 꿀꺽한 것 말이오......"

"아, 그럼 눈치챈 거요?"

"세상에!"

"그럼 어쩌겠소. 나는 워낙 영국 왕실의 친필 문서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놔서......"

그로부터 석 달 뒤, 런던에 거주하는 엘리자베스 러븐데일에게 한 근사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조지 왕의 연애편지를 확보해줄 수 있노라며 접근해왔다. 그러면서 대신에 '푼돈' 10만 프랑을 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타협은 매우 더디고 힘겹게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런던 제일의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오빠들과  의논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발끈하며 거부하던 그들은 얼마 후 제안을 수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품위가 넘치는 신사는 그렇게 해서 10만 프랑을 손에 넣었고 거기에 더해 화물차 한 대 분량의 그 가게 고가(高價) 식료품을 교묘하게 빼돌리기까지 했다. 물론 물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말이다......


3. 바카라 게임

"우하하하...... 도둑놈들 같으니라구......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놈들이 막심의 얼굴에다 내팽기친 지폐들이 가짜 돈이라 이거지? 거, 맹랑한 놈들일세! 기껏 돈 다발을 지참하고 출두하라고 하니까 위조지폐를 들고 나타나다니!"

이제 베슈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그 돈은 희생자의 상속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이래? 폴 에른슈타인이 엄연히 번 돈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돌려줄 의무가 있는 거란 말이다!"

하지만 바르네트의 쾌활한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크하하하하...... 거 참 큰일났구만그래! 그럼 이번엔 그들이 도둑맞은 거야? 두번째일세! 도둑놈들이 된통 벌을 받았어!"

"시침떼지 마!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하지 말라구! 바꿔치기한 건 자네잖아!...... 자네가 돈을 몽땅 챙겼잖아!...... 이 사기꾼...... 불한당 같으니......"


4. 금이빨을 한 사나이

무슨 큰일이 얼마나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감이 왔다. 차고에 바짝 붙은 창고 문이 강제로 열려진 채였고 그 안에 쟁여놓았던 고가구와 멋진 추시계, 태피스트리 등 남작의 마지막 재산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언제 이걸 다 털어 간 거야?"

남작이 비틀거리며 더듬대자 하인 한 명이 말했다.

"간밤에...... 한 열한 시쯤 되었을 때 개들이 유난히 짖어대더라고요......"

"무슨 수로 이래 놓은 거냐구?"

"남작님 자동차로 빼낸 모양입니다."

"내 자동차라! 그럼 차도 도둑맞았단 말인가?"

남작은 그만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신부의 품에 안겼다. 신부는 제법 아버지 같은 자세로 부드럽게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벌이 빨리도 찾아온 게로군요.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받아들이십시오......"


5. 베슈의 아프리카 탄광 주식(株式)

"천만에!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일세.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는 고객들에게 변상을 하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잘 생각해보라고, 그가 이 사건 초두에 정식 신고를 꺼렸던 이유는 사법당국이 자기 사업에 대해 뭔가 냄새를 맡지 않길 바라서였네. 그러니 이제라도 감옥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에게 으름장이라도 놔보게. 당장 문제를 해결하려 들 테니까. 돈? 자네 친구 니콜라 가시르는 백만장자일세. 그러니 그 자가 잘못한 일은 나한테가 아니라, 바로 그 자 본인한테 수습을 요구해야 맞는 말이지!"

"그럼 결국 자네가 대신 가로채겠다는 얘기......?"

"뭘? 증권 다발? 천만의 말씀! 그것들은 이미 매각해버린 상태일세."

"그랬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조성한 돈은?......"

바르네트는 갑작스레 화를 버럭 내며 외쳤다.

"무슨 소리! 단 한순간, 단 한 푼도 나는 손대지 않아!"

"그럼 그 돈을 다 무엇에 쓸 생각인가?"

"나눠줄 생각이네."

"누구한테?"

"돈에 궁핍을 겪는 친구들이라든지, 내가 후원 중인 몇몇 흥미로운 작업들에 건넬 생각이야. 허어, 걱정 접어두게나, 베슈...... 니콜라 가시르의 돈은 지극히 적절하게 쓰여질 테니까!"

베슈는 '역시나!'하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또 사건은 바르네트가 한 몫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가 지어진 것이다. 바르네트는 죄인들을 벌하고 결백한 사람들을 구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배를 채우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자선이라든지 바람직한 투자 등. 그가 말하는 '적절한' 돈의 용도는 우선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베슈 형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에서 그냥 넘어가는 것은 곧 공범이 되기를 받아들이는 거와 같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주머니 속에 너무도 소중한 아프리카 탄광 주식 열두 주가 두둑이 느껴지는 지금 이 마당에 만약 저 바르네트가 아니었던들 모든 것을 깡그리 날렸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었다. 과연 지금 이 순간 화를 버럭 내고 몸싸움이라도 벌여야만 하는 것일까?


6. 우연이 기적을 만들다

바르네트가 성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형사의 눈썹이 일순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을까? 베슈 자신이 주장하고 나서려던 얘기를 저 빌어먹을 바르네트가 미리 걸고넘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우려가 들자, 베슈 형사의 태도는 더욱 적극적으로 화했고, 조르주 카제봉의 손을 덥석 붙들기까지 하며 말했다.

(중략)

그리고는 바르네트가 사용했던 표현을 공교롭게도 똑같이 되풀이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 의해 유포된 장신을 향한 음해성 소문에는 일말의 신빙성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자 바르네트가 환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좋았어, 아까 이 몸이 무슈 카제봉에게 얘기한 것과 일치하는구만. 친구이자 상관(上官)이나 다름없는 베슈의 예리한 통찰력이 다시금 발휘되고 있어! 하지만 여보게, 무슈 카제봉은 자신을 겨냥한 중상모략에 대해 지극히 관대한 입장으로 응할 마음 자세가 갖춰진 형편이라네.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게 그녀의 조상들 영지를 되돌려주시기로 했단 말일세."

베슈는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뭐?......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바르네트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가 있고말고.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무슈 카제봉은 이 지방에 대해 다소 기분이 언짢아진 상태라네. 그래서 지금은 게레의 공장들과 좀 더 가까운 거리의 또다른 성채를 점찍어둔 입장이야. 뿐만 아니라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무슈 카제봉은 마침 부동산 증여서 초암을 작성하려던 참이었어. 거기다 10만 프랑짜리 지참인불 수표를 첨부하겠다는 의사까지 표하셨지. 물론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게 배상금조로 지불될 금액이지. 어떄요, 우리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합의가 된 셈이죠, 무슈 카제봉?"

(중략)

달레스카르 양은 증여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자신의 공증인더러 조르주 카제봉의 공증인을 만나 일을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수표만큼은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한 불쾌감을 표하며 수표를 짝짝 찢어버리더라는 것.

(중략)

"자, 먼저 주문해놓게. 난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휑하니 나간 바르네트는 얼마 안 있어 식당으로 돌아왔다. 둘은 그야말로 배가 터지게 먹어댔다. 이윽고 커피 잔을 들며 베슈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슈 카제봉에게 찢어진 수표조각이라도 돌려보내야겠어."

"그런 수고는 할 필요 없네, 베슈."

"왜?"

"그 수표는 원래 아무 값어치가 없었던 것이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일세.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가 거절할 걸 미리 내다보고 내가 봉투에 증여서를 집어넣으면서 시한이 지난 낡은 수표를 대신 밀어넣었거든."

베슈는 신음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아......그러면 원래 수표는? 무슈 카제봉이 서명한 것 말이네!"

"방금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꿔왔지."

바르네트는 저고리를 살짝 젖히고 두둑한 현금 다발을 보여주었다.

순간, 베슈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뿐,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중략)

베슈는 증오심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여지껏 그토록 한 사람을 미워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 값을 테이블에 던지고는 이렇게 웅얼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이따금 저 인간이 진짜 악마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그것을 또 얼추 새어 듣고는 바르네트도 활짝 웃으며 이랬다.

"하긴 나 역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7. 흰 장갑... 하얀 각반...

솔직히 말해봐, 나 참 근사했지? 사건 해결을 빌미로 단 한 푼 챙기지 않았다구! 자네가 그토록 치를 떨던 그 '돈 떼먹는 짓'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하지만 어떤 점에선 자네의 칭찬을 듣는다는 게 또 얼마나 뜻깊은 보상이겠는가!......

 

그 날 오후, 베슈는 이참에 바르네트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릴 결심으로 라보르드가(街)의 탐정사무소로 향했다.

그런데 문은 닫힌 채 이런 팻말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연애사업 때문에 잠시 휴업 중

밀월여행이 끝나면 다시 개업함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베슈는 은근한 불안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는 곧장 올가의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역시 문이 잠겨 있었다. 폴리-베르제르도 가보았다. 거기 얘기가,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께서 위약금조로 막대한 금액을 지불한 뒤 훌러덩 여행을 떠나버리셨다는 거였다.

베슈는 거리로 나오자마자 그르렁댔다.

"이런 우라질!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돈을 떼먹는 대신, 이번엔 의기양양한 승리를 내세워 감히 누굴 유혹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의혹이 들었다. 이보다 더 참담한 지경이 있으랴! 어떻게 알아내야 하나? 아니, 차라리 어떻게 해야, 이 세상 가장 비참한 확신에 이르는 걸 피하기 위해 모르는 척 지나갈 수가 있을까?

아뿔싸! 바르네트는 결코 먹잇감을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베슈에게는 다음과 같이 열락(悅樂)에 겨운 코멘트가 첨부된 화려한 그림 엽서들이 당도했다.

 

아, 베슈! 로마의 달 밝은 밤일세! 이보게 베슈, 자네만 좋다면 당장 시칠리아로 달려오게나......

 

베슈는 악다문 잇새로 이렇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죽일 놈! 다른 건 다 봐줬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 돼. 두고 봐라, 이 놈......"


8. 베슈, 짐 바르네트를 체포하다
"이보게, 베슈, 아까 네번째 편지를 힐끔거리던 중, 나는 크리스티안 베랄디가 실은 처음부터 자기 남편에게 과거 모든 사연을 있는 그대로 고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네. 즉 그녀의 남편은 자기 아내의 옛날 관계와 아이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건이 나자 입을 다물어서 사법당국을 속였다는 얘기야. 물론 장 데스로크에게 앙심을 품고, 가능하면 교수대로 몰아붙이려는 목적에서 그런 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셈이네. 자, 사정이 그러할진대 이제 와 그처럼 불명예스런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갑부 베랄디께서 과연 그걸 사들이고 싶어하지 않을까? 새로운 추문이 이는 걸 싫어하는 어느 점잖은 작자가 은근히 나서서 제안한다면 베랄디가 굳이 돈을 아낄 것 같으냔 말이야...... 그래서, 기회를 틈타 아까 그 편지를 호주머니 속에 슬쩍 해놨지 뭐."

(중략)

그로부터 며칠 후 베슈는 바르네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기뻐하게나, 친구! 자네가 이 바르네트라는 망나니를 감옥에 처넣지 않고 사진도 가로채지 않아서, 결국 상관한테 약속도 못 지키고, 지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꼴이 되었지만, 내가 그동안 자네 일을 열심히 탄원하고, 이번 사건에서 자네의 주도적인 역할을 적절히 홍보한 끝에, 마침내 반장직급으로의 승진을 따놓았다네.

 

베슈는 홱 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바르네트의 빚을 진다는 게 과연 가당(可當)한 얘기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 사회가 그 가장 유능한 봉사자의 진가(眞價)를 알아보고 보상을 해준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어쨌든 베슈의 눈높이로는 베슈 자신의 진가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는 편지는 박박 찢어발기되, 진급만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9

-아르센 뤼팽의 여인들

우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약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을 뤼팽이 용감하게 나서서 구원해주는 관계 유형이다. 처음 예닐곱 살 소년의 몸으로 도둑질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 자체가 어머니에 대한 이 같은 관계에서 비롯된 만큼, 대부분의 여성이 이 관계 유형의 한 항()으로서 등장한다. 이 경우 특징은, 굳이 이렇다 할 애정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유대식 램프”, “결혼반지”, 황금삼각형, 서른 개의 관), 설사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고 해도 서로의 인생을 공유할 정도로 발전하기보다는 아스라한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수정마개). 이런 경우 여성 이미지는 전혀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 같지 않고 그저 뤼팽의 모험에서 하나의 소재처럼 기능한다. 이때 여성은 뤼팽이라는 위력적인 인간상에 완전히 매몰되어 그의 정의감에 불을 지피는 역할에 만족할 뿐 자기 나름의 개성이나 줄거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 뤼팽 모험담에서 정말 중요한 여인상들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약간은 비밀스럽고 이중적이며 때로는 위험천만한 캐릭터를 취한다든지 무척 강인하고 활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등장한다. 그저 뤼팽이 와서 구원해주기만을 고대하는 사회적 약자와는 너무도 다른 이와 같은 여성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뤼팽과 관계를 맺는다. 첫째, 뤼팽의 명실상부한 배우자가 되어 결혼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있고, 둘째, 지독한 갈등 속에서 불 같은 열정을 나누는 관계가 있다.

이제는 다 알려진 대로, 뤼팽은 결혼을 네 차례 했다. 제일 처음 1894년 스무 살의 나이에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으로 클라리스 데티그와 하고, 두 번째로 1904년에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으로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과 한다. 이어서 세 번째 결혼은 그로부터 5년 뒤 루이 드 발메라스라는 이름으로 레이몽드 드 생-베랑과 하며 마지막 결혼은 한참 후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40대 나이의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플로랑스 르바셰르와 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선 먼저 눈에 띄는 여인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귀족 출신(앞의 세 명의 성[]에 귀족 출신을 뜻하는 전치사 ‘de’가 붙는다) 내지는 엄청난 재력을 지닌 존재(플로랑스는 막대한 유산 상속자로 판명난다)라는 점이다. 또 하나 두드러진 점은 모두가 뤼팽이 나서서 도와주어야 할 존재이기 이전에 오히려 뤼팽을 위기에서 구하거나 정신적으로 돕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클라리스 데티그는 어려운 상황에 단신으로 파고들어와 뤼팽의 생명을 구해준다(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pp.284-287).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결혼 상대자였던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두 차례나 뤼팽에게 도움을 준다(“아르센 뤼팽의 결혼”, pp. 254-258). 세번째 배우자인 레이몽드 드 생-베랑은 애당초 뤼팽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자 앙브뤼메지 수도원의 폐허 더미 속에서 부상당한 그를 숨겨주고 상처를 치유해 준 구원자이다. 아울러 하나같이 뤼팽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 그 시선 앞에서 이와 같은 가책을 느끼는 심리는 애초에 넬리 언더다운 양에게서 확인한 바 있는 거울로서의 여인의 이미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한다. 뤼팽의 자의식에 강한 자극을 주어서 정체성의 일대변혁을 유도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양심의 시선 말이다.

 

단 한 가지 예외는 플로랑스 르바셰르의 경우인데 이는 뤼팽의 나이가 이미 불혹(不惑)을 훌쩍 넘긴 때라 여인의 시선 앞에서 정체성의 변화를 겪을 시기가 자연스레 지났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뤼팽이 배우자로 맞이한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현상은 일부 연구가에 의해,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뤼팽의 모성(母性)을 향한 원초적 갈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들 여성 거의 다가 귀족 출신이라는 점도 뤼팽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당드레지와 닮았다. 서민 출신인 아버지 테오프라스트 뤼팽으로부터 물려받은 뤼팽이라는 성()의 정체성과 비교해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태도는 여인들의 시선 앞에서 범죄자로 살아온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정직하게산다는 것이야말로 이처럼 어머니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가치이며, 괴도신사 뤼팽이 배우자가 될 만한 여성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이상이다. 클라리스 데티그나 레이몽드 드 생-베랑 모두 뤼팽에게 정직한 삶으로서의 개과천선(改過遷善), 즉 정체성의 변혁을 요구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이렇게 정체성의 대전환을 이루면서 시작한 결혼생활이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클라리스 데티그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결혼 6년 만에 사망했고 레이몽드 드 생-베랑은 신혼의 단꿈을 미처 꿔보기도 전에 잘못 겨누어진 총탄에 비명횡사한다.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 역시 수녀가 됨으로써 속세에서의 상징적 죽음으로 결혼을 무효화한다. 플로랑스 르바셰르는 이 점에서도 예외인데 결혼한 이후 그 어디에도(다른 여타 작품)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로 결혼 이전까지만 의미가 있었던 존재에 불과하다. 이처럼 뤼팽이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설정은 언뜻 물리적인 상황 탓으로 설명될 것도 같으나 그보다는 뤼팽 자신의 이중적인 운명에서 원인을 찾아야 보다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는 뭔가를 훔치거나, 조작하고, 남을 등쳐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아예 피 속 깊이 녹아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밀수꾼이자 소매치기였고, 도둑임과 동시에 강도이면서 모사꾼인 데다, 무엇보다 패거리의 왕초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 기상천외하고도 황당무계한 숙명의 기득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고, 대가(大家)가 될 팔자였다.(......)

 

이처럼 상호 모순되는 성향은 배우자가 죽음을 맞기 이전부터 그의 결혼생활을 사실상 예정된 파국으로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다. ‘()과 악() 모두가 나를 잡아끈다는분열된 자의식, ‘하나의 조각상에 두 개의 얼굴’17)인 라울 당드레지와 아르센 뤼팽이 존재한다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엄존하는 한 우리의 주인공은 결코 그 어떤 여인과도 안정된 행복을 꿈꿀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맺어지는 관계말고 지독한 갈등 속에서 불 같은 열정을 사르다가 그대로 끝나버리는 관계를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여인의 운명 또한 이와 같은 뤼팽의 운명을 빼다 박았다는 사실이다.

 

신비스러운 변신술과 더불어 조제핀 발사모라는 여인의 정체는 극과 극을 종잡을 수 없이 넘나든다. 물론 또다른 사랑의 형태인 질투가 화근이지만 이런 불안정한 성향의 여인이 남자를 향해 손 내미는 열정은 오히려 파괴적일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어머니 이미지가 오버랩된 다른 여인들이 뤼팽을 정직한 삶으로 이끈 데에 반해서 조제핀 발사모가 라울을 진짜 괴도의 길로 이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 애정은 아무리 뜨겁게 불붙었다 해도 결국에는 증오와 환멸만을 남긴다.

   

돌로레스 케셀바흐 역시 극단적으로 분열된 이미지를 타고난 것은 마찬가지이다.

 

너무도 연약하고 곱기만 한 미망인의 정체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뤼팽의 가장 강력했던 적수와 동일인물임을 밝혀질 정도로 돌로레스 케셀바흐의 이중성은 처절하다. 더구나 그것이 순수한 광기, 즉 정신착란의 결과라는 점에서 조제핀 발사모보다 비극적 색채가 짙다. 이 여인 역시 뤼팽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애정에 괴로워한다.

 

요컨대 남녀 둘 다 똑같이 분열된 운명을 타고난 처지이기에 서로 미친 듯이 불붙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시적이나마 받아들이고 유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관계이다. 마치 부싯돌끼리 부딪치며 불꽃을 발하듯 강렬한 열정을 경험할 수는 있으되 상대방의 불안정한 모습을 언제까지나 흔들리지 않고 비쳐줄 조용한 거울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이 그런 조용한 거울 같은 여자와 더불어 백년해로(百年偕老)하지 못한 점은 어찌 보면 무척 다행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르센 뤼팽의 모습은 정체성의 혼란을 끝없는 모험 속의 자기 변신을 통해서 극복해나아가는 데에 있으며 어머니 같은 한 여인을 만나 정직한 사람으로 안주하는 것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17)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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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 암염소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녹색의 표지에 끌렸다.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이 소설은 뤼팽의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의 여동생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푸른 눈동자의 영국 여자와 초록 눈동자의 프랑스 여자의 모습이 머리에 환히 그려지며 1920년대 낭만이 느껴지는 듯했다.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는 다분히 시적(詩的)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처음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우연과 숙명의 연결 고리가 중첩되면서, 아득한 과거와 전설 속의 비밀로 수렴되어가는 스토리 전개방식이 모리스 르블랑 특유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비밀의 소재가 밝혀지는 종반의 하이라이트도 감탄할 만하지만, 여성에 대한 완벽한 신사적(紳士的) 이미지와 소위 “불 좀 빌립시다!”라는 명언(名言)으로 대표되는 신출귀몰 뤼팽의 카리스마가 압권이다.「암염소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는 이번에 국내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보석 같은 단편작품으로, 거장(巨匠)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찬미와 존경의 표시로 집필된 것이다. 추리문학에 관한 한 세계 최초의 학술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레지 메삭의 「탐정소설과 과학정신의 영향」(1929)은 바로 이 작품을 두고 “에드거 앨런 포의 집중(concentration)과 점층(gradation)의 법칙을 대단히 훌륭하게 적용”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에 대한 마지막 분석으로 천재 소년탐정 이지도르 보트를레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푸른 눈동자의 영국 여자

가만히 보면 인생이 그처럼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다. 일단 그는 젊다. 그리고 손쉽게 휘어잡은 은행권 지폐 다발이 지금 지갑 속을 두둑이 채우고 있다. 머리 속은 확실하게 처리할 일들과 풍부한 수입에 대한 계획들로 늘 가득하다. 더군다나 내일 아침이면, 잠에서 부스스 깨어 일어날 아리따운 아가씨의 가슴 벅차고 열에 들뜰 멋진 모습을 눈앞에 대하게 될 것이다.


2. 초동 수사

'내가 실수한 거야. 계속해서 영국 여자 곁에 머물면서 마지막 부탁을 진지하게 이행했어야 하는 건데, 공연히 그 복면 쓴 여자 때문에 허둥대느라 아까운 시간만 버렸으니...... 하지만 내 머잖아 슬그머니 우회해서 뺀질이 네놈의 뒷덜미를 낚아채고야 말 테니 두고 봐! 그리고 네놈이 무슨 수로 제때에 이 열차를 탈 수 있었는지, 이전에 마주친 미녀들 둘이 활개를 친 이 사건을 어떻게 도맡게 된 건지 내 속속들이 밝혀내고야 말 것이다. 그때를 기약하며 까짓 지금은 얌전히 물러나주지......'

3. 어둠 속의 입맞춤

라울은 여자에게 좀더 몸을 기울여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꺼풀을 다소곳이 내리깐 상태로 여자는 완전히 남자의 보호에 자신을 맡기고 있엇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위험은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라울은 갑자기 고개를 한껏 숙여 여자의 입술을 훔쳤다.

일순 미약하게나마 거부의 몸짓을 해 보이던 여자는, 그저 한숨을 길게 내쉬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느끼기에 분명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고개를 약간 빼긴 했지만 그윽한 키스의 맛에 입술을 여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몇 초...... 별안간 펄쩍 뛰듯이 몸을 사리면서 여자는 있는 힘껏 팔을 뻗쳐 몸을 떼더니, 이렇게 신음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아! 끔찍해라!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나를 놔줘요! 놔달란 말이에요!...... 어쩜 이렇게 비열한 짓을......"

난데없이 기분이 상한 남자는 순간 매몰차게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러는 사이 여자는 후닥닥 떨치고 일어나 캄캄한 어둠 속으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라울은 어쩔 줄 모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4. 별장을 털다

"내가 항상 철저하게 준수하는 원칙은 말일세......"

그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르센 뤼팽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적절한 때가 되기 전에는 서둘러 어떤 문제 해결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일련의 수수께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연에 의해서든 자신의 솜씨에 의해서든, 먼저 제반 사실들이 충분히 집적(集積)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우선이야. 아무리 진실을 향한 길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사태의 진전에 발맞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가야만 하는 거라네."

하물며 서로 어떤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이 지리멸렬한 요소들이 제멋대로 얽혀 있는 사안에 관해서는 두말할 것 없이 타당한 원칙이라 하겠다. 어떤 통일성도 찾아보기 어렵고, 일관된 추론조차 불가능한 경우...... 그저 모든 사항들이 제각각 따로 노는 듯한 분위기......정말이지 라울은 이런 류의 모험일수록 조급함을 삼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토록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추리와 직관, 분석과 시험 등, 섣불리 발길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함정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는 느낌이었다.


5. 충견

지방 출신이건, 파리 출신이건, 보아하니 더없이 능란한 배우 기질과 담백하면서도 감동적이고, 다정다감하면서 또 쾌활한 매력과 순수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가창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배우로서의 모든 재능과 미모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 매우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실제 무대경험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점 또한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문득 오스망 대로에서의 첫인상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어딘가 앳되어 보이면서도 비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 얼굴로 두 개의 판이한 운명을 살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6. 재회

'......예쁘장한 그대는 이제부터 이 손 안에 있는 거나 같아. 살인자이자 절도 사기군의 절친한 공범이자, 그대 자신도 매정한 살인마인 데다, 화류계의 아가씨이자 오페레타 가수이며, 수녀원 식구이기도 하다 이거지...... 좋아, 그대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는 절대로 못 빠져나갈걸. 소위 신뢰라는 것은 한번 마음 속에 둥지를 틀면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법! 지금 그대가 입술을 한번 빼앗긴 걸로 제아무리 내게 앙심을 품었다 해도, 마음 깊숙한 속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구해주고, 항상 위험 직전에 짠하고 나타나주는 이 듬직한 사나이에게 신뢰감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어쩌다 물렸기로서니 충견(忠犬)을 내치는 경우란 없으니까 말이야...... 오, 세상 모든 귀찮은 것들을 피해 수녀원에 피신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여!...... 새로운 상황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대는 내게 살인범도 무지막지한 여걸(女傑)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려한 오페레타 가수도 아니라오. 나는 그대를 결코 레오니드 발리로는 부르지 않을 테야. 대신 오렐리라고 부르도록 하지. 왠지 난 그 이름이 맘에 들거든. 고풍스럽고도 단정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자매이니까 말이야(오렐리[Aurelie], 즉 아우렐리아는 성녀의 이름이기도 하다/역주)...... 아,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여, 그대가 옛 패거리들과의 별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소. 그들은 아마 당신에게서 그 소중한 비밀을 앗아가려고 했겠지. 물론 당신은 고집스레 그것을 지켜왔을 테고. 하지만 이제 그 비밀은 조만간 내 손 안에 들어올 거요. 왜냐하면 비밀하면 곧 나거든! 현재 당신이 숨어 있는 어둠의 베일을 걷어내는 날, 그 비밀 역시 낱낱이 밝혀낼 것이오, 신비스럽고도 열정적인 오렐리여!......'

이런 생각 속에 기분이 좋아진 라울은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로 비롯된 골치 아픈 수수께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눈을 붙였다.


7. 지옥의 아가리

"이런 망할 놈이 있나! 그럼 내가 멍청하게 떠들어대는 동안 그 말을 안 하고 뭐하고 있었던 거야? 그 자가 그런 흑심을 품고 있다구? 아, 지저분한 놈...... 이거야 원, 그 아가씨는 어째 안 좋아하는 인간이 없구만그래! 같잖은 놈들이 너무도 많아! 어떻게 그 놈들은 거울도 안 보며 사나? 그중에서도 특히 너 말이야, 너! 포마드 바른 뺀질한 상판대기하며......"


8. 전투 준비

저만치 한 300여 미터 전방에 조도가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등짐 속에는 처음에는 브레작의 호텔 지하를, 그 다음에는 루보 형제의 별장 지하실을 제멋대로 넘나든 공범이 얌전히 숨죽이고 있을 터!

그런가 하면 그 뒤 한 100미터쯤 뒤에 쳐져서 브레작이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따라붙고 있었다.

언뜻 눈을 돌려 센 강 쪽을 살펴보니 거기에는 또 줄 낚시를 즐기는 남자 하나가 같은 방향으로 제방을 따라 노를 젓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마레스칼이었다.

결국 조도는 브레작이 쫓고 있고, 브레작과 조도 모두는 마레스칼한테 미행당하고 있는 셈. 물론 그 셋 모두는 라울일 추적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이 쫓고 쫓기는 게임에서 내걸린 판돈은 유리병 하나!


9. 간절한 기다림

"바로 이것이네, 친구. 어때, 이만하면 알아보겠지? 바로 자네가 그 조도 선생한테서 뺴앗은 것을 내가 다시 가로챘고, 그걸 또다른 녀석이 낚아챘었지. '또다른 녀석'이 누구냐고?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리메지 남작님이시지! 놈의 숙소에서 좀 전에 되찾아 온 거라네. 이걸 다시 손에 넣었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신났는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이 병이야말로 진짜 보물 중에 보물이 아니겠나! 잘 보라구, 브레작, 상표하고 성분 표시까지 그대로야...... 자, 보라니까! 여기 이 병마개하고 붉은 밀랍 봉인은 리메지의 작품이라네. 이 안을 잘 들여다봐...... 가느다란종이 두루말이가 보일 거야. 아마도 조도에게서 자네가 빼앗으려 했던 게 바로 이거일 거야. 필경 뭔가 중요한 고백을 적어 넣은 거겠지...... 자네 손으로 직접 쓴 결정적인 증거물 말이야...... 허허, 브레작 자네 참 딱하게 생겼어!......"

압도적인 승리엿다. 밀랍 봉인을 뜯어내고 병마개도 벗겨내면서 그는 저혼자 기분이 들떠 별의별 탄성을 제멋대로 내지르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마레스칼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야!...... 특급열차 살인범들도 일망타진했지!......브레작의 어두운 과거도 가차없이 파헤쳤어!......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에서 얼마나 다들 놀랄까!...... 이봐, 소비누, 여기 이 어여쁜 아가씨를 위해 수갑은 가져왔겠지? 라봉스하고 토니도 불러들이게......아, 이겼어......완벽한 승리라구......"

병을 뒤집자, 안에서 종이 두루말이가 흘러나왔다. 지체 없이 종이를 펼친 마레스칼을 마치 결승선을 초과해 달려드는 달리기 선수라도 되듯 한껏 도취된 기분으로, 무슨 말인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에 밟히는 대로 소리쳐 읽어버렸다. 이렇게......

 

마레스칼은 얼간이래요.


10. 화려한 등장

"어이, 안녕하신가, 친구? 그나저나 자넨 감쪽같이 날 못 알아보더구만 그래! 아마 지금도 내가 어떻게 소비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엇는지 의아한 모양이야? 엄청 믿었던 부하였을 텐데 말이지! 오, 하느님 맙소사! 소위 이 바닥 거물급에 속한다는 인사가 한낱 소비누라는 인물을 철석같이 믿고 지내오다니! 이보게, 로돌프 군(君), 소지누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일세. 한낱 허깨비였을 뿐이야! "


11. 결정타

"고집부리지 말라니까, 마레스칼. 보다시피, 난 지금 놀리는 것도, 장난치는 것도 아니야. 자네의 실수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뿐이라구."

"나의 실수?"

"그래, 여자가 살인한 게 아닐뿐더러, 오히려 이번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이거지."


12. 불어나는 물

하지만 라울은 분명 버티고 있었다. 저렇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입술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요, 방금 말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했다. 라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기질적으로 그는 그러한 나약함과는 상극(相剋)이었다. 그러나 오렐리는 맥을 풀리게 하고 허약한 생각을 품게 만드는 말들을 여전히 애원조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13. 암흑 속에서

조도는 그만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다. 라울의 대범한 태도, 아직도 오렐리가 위험 중에 신음하고 있다는 스스럼 없는 고백은 그의 정신을 일순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한 적이었던 이 인간의 마력적인 위력이 점점 더 크게만 바라보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단 한순간도 이 상황을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반전시킬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가 쏜 두 발의 총성은 그대로 암벽과 바위들을 타고 널리 울려 퍼졌다. 조도는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대장이오. 더는 주저할 이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한테 복종하는 수밖에...... 여기 공책들하고 후작의 유언장이 있습니다."


14. 청춘의 샘

그제서야 라울은 여자의 말을 이해했다. 자고로 예술가의 독립적인 삶이란 이런저런 일반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마련이다. 지금 오렐리는 그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사실 마레스칼은 그외에도 여러 다른 얼굴들 너머 그의 존재를 알아보았는데, 언제나 빈정대는 말투와 윙크하는 눈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주었다. 아울러 매번 빠짐 없이 자기 면전에다 대고 그 지긋지긋하고 신랄하면서도 얄밉고 갑작스런 말 한마디를 뱉어내는 것을 꼼짝 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바로 이 말......

"실례지만, 불 좀 빌립시다!"

라울은 결국 쥐뱅의 영지를 사들였다. 하지만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그는 결코 그 곳에 깃든 엄청난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쥐뱅의 호수와 청춘의 샘은 프랑스가 아르센 뤼팽으로부터 상속받게 되는 여러 보물들과 신비의 목록에 당당히 오르게 된 것이다.

 

암염소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이보게, 뤼팽...... 이번 사건에 자네가 개입해서 논증해준 내용 말일세...... 솔직히 나는 그 편지에 그리 놀라진 않았었네."

"아하, 그런가? 이유는?"

그는 차분하게 반문했다.

"이유아 그와 유사한 사건이 70~80년 전에 이미 일어났었기 때문이지. 그걸 가지고 에드거 앨런 포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한 편의 주제를 삼았지 않았던가(1841년 발표된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을 암시한다. '모르그'라는 거리명과 앞서 나온 모르그 숲의 이름이 일치하는 것에서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역주)! 사정이 그러하니 이번 수수계끼의 해답이 쉬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8

-아르센 뤼팽의 적수(敵手) (): 이지도르 보트를레

 

(이지도르 보트를레)의 말투는 한없이 점잖으면서도 깍듯한 예의가 담겨 있었다. 보아하니 상당히 젊은 친구였는데, 매우 큰 키에다 무척 야윈 체격이었으며, 키에 비해 다소 짧은 바지와 몸에 꼭 끼는 모닝코트로, 전혀 겉멋을 부리지 않은 차림새였다. 얼굴은 마치 여자애처럼 살짝 홍조를 띠었고, 시원스런 이마 위로는 짧게 깎은 머리, 그리고 턱 주위로 제대로 다듬지 않은 황금빛 수염이 듬성듬성했다. 소년은 그렇게 총명한 눈빛을 연신 반짝이면서, 전혀 어색한 기색 없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곳에는 뤼팽 같은 건 없습니다. 도둑이나 탐정에 얽힌 이야기들도 없어요. 반면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역주)라고 하는 엄연한 현실이 버티고 있답니다. 지금이 벌써 5월이고 앞으로 두 달여밖에 안 남았다구요! 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듯 시험 때문에 고민하고 아버지의 꾸중을 걱정할 정도로, 여느 청소년과 다를 바 없이 앳되고 순진한 고등학생 보트를레...... 그러나 그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면서도 인상 깊은 뤼팽의 맞수로 뤼피니앵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등장하는 무대는 기암성단 한 편이면서도 이 풋내기 소년이 그처럼 뚜렷한 인상을 각인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보트를레와 뤼팽의 대결구도가 단순히 법의 수호자와 범법자(犯法者)간의 쫓고 쫓기는 차원이 아니라, 두 적수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치열하면서 정정당당한 경쟁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이 또래에 어느 한 대상에 대해서 이 정도의 열렬한 관심과 탐구열을 보인다는 것은 그 대상을 향한 일종의 존경심 내지는 존경심을 바탕에 깐 경쟁의식이 은연중에 개입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뤼팽에게는 위와 같은 보트를레의 순수한 입장이 적당히 내칠 필요가 있으면서도, 왠지 가다듬고, 심지어 키워주고픈 선의의 경쟁자로 비쳐졌을 법도 한 것이다.

 

뤼팽 시리즈를 통틀어 기암성만큼 뤼팽의 적수(가니마르, 홈스, 보트를레)가 동시에 많이 등장하는 작품도 없을뿐더러, 쟁쟁한 싸움꾼들을 죄다 제치고 가장 나이 어린 보트를레가 마침내 에기유 크뢰즈의 비밀을 거머쥐고야 만다는 발상 자체가 만만치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속이 빈 바늘’...... 글자 그대로 에기유(aiguille)’의 속이 텅 비어 있다(creuse)’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쉽게 풀릴 것을, 똑똑하다는 천재 소년조차 에기유라는 성()크뢰즈라는 지명을 찾아다닐 정도로 수수께끼는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다. 문제는 순수한 눈을 가지는 것!

 

보트를레가 가니마르나 셜록 홈스를 제치고 기암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같이 순수한 마음의 눈, 좀더 자유로이 살아 숨쉬는 상상력을 가진 소년이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천신만고 끝에 기암성에 입성한 보트를레를 이미 초대된 손님을 맞이하듯 환영하는 뤼팽의 태도는 마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한 후임자, 입문의례의 고난을 극복한 자랑스런 후계자를 맞이하는 태도에 비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아름다운 모험담 내내 맞수이자 길 안내자로서 소년의 운명을 이끌어온 뤼팽이 마지막에 남긴 작별인사는, 더 이상 천재소년 보트를레가 아니라, 뤼팽의 고뇌와 슬픔, 즉 자신과 동류인 한 인간의 운명을 가슴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어떤 성숙한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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