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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네트 탐정사무소 ㅣ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모리스 르블랑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도 그렇고, 「813의 비밀」도 그렇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는 여러 면에서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와 닮아 있다. 하나의 주인공, 그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중심 인물, 여덟 개의 단편들, 각각 분리된 에피소드이지만 크게 보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나아가는 구성...... 처음 연재시 뤼팽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뤼팽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뤼팽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는 말도 되겠지만, 뤼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모리스 르블랑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는 가니마르의 제자 격인 테오도르 베슈 형사와 아르센 뤼팽의 또다른 얼굴인 짐 바르네트라는 수상쩍은 사설탐정이 재치
만점으로 엮어가는 총 여덟 개의 단편들의 옴니버스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될 당시만 해도 짐 바르네트는 아르센 뤼팽과는 별도의
주인공으로 창조된 캐릭터였으며, 추후에 아르센 뤼팽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가미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
이은 로제 브로데의 삽화는 현대적 감각이 더욱 두드러져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 특히 「기암성」,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더불어
모리스 르블랑 스스로 아르센 뤼팽 3대 걸작으로 손꼽았을 정도로 작가 자신의 정성과 애정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보다 유머와 기발한
착상들이 다수 포진한 이 작품의 참신성은 발표 때부터 평론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로서는 처음 대하는 추리적 장치와 혹할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듬뿍 담긴 걸작으로 후대까지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아오고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이 여인들과 맺는 관계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그 깊은 의미를 해석해보기로 한다.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다음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워낙 지리멸렬하게 중구난방 떠도는 소문만 횡행했던지라
일반 대중이 무척 흥분된 반응을 보인 바 있었다.
더없이 황당무계한 모험들 속을 신나게 휘젓고 다녔던
짐 바르네트라는 이름의 기이한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오로지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고객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만
주문을 받아들였던 듯한 바르네트 사(社)라는 저 비밀스런 사설 탐정사무소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제 문제를 속속들이 까발리고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작금의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는 서둘러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돌리고
짐 바르네트의 비행(非行) 역시 그것을 범한 자의 몫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즉 도저히 교화 불가능한 아르센 뤼팽의 몫으로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더 나빠질 일도 없을 테니까......
1. 진주알들의 행방
"만약 당신이 목걸이를 선택한다면,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봐 다시 말하건대, 지금 이 목걸이가 이 방을 벗어난다면, 당연히 내일이면 공증인이 이 두번째 유언장을 접수할 것이고, 그럼 당신은 유산 상속에서 영영 멀어지는 겁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야 아무도 모르고 있는 두번째 유언장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이 유산 전액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죠. 무려 1000만 프랑이 고스란히 당신 품안으로 돌아온다 이겁니다, 바로 이 짐 바르네트의 덕택으로 말이죠......"
분명 빈정대는 목소리였다. 그에 따라 발레리는 목이 바짝바짝 조여오는 것이 마치 자신이 이 악마적인 인간의 손아귀에 붙들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어떤 저항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가 만약 목걸이를 사내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문제의 유언장은 세상에 공개될 것이었다. 이 정도 교활하고 지독한 상대 앞에서는 그 어떤 기도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2. 조지 왕의 연애편지
"당신 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요. 그야말로 아르센 뤼팽에게나 어울릴 역량이오......"
"뭐라구요?"
바르네트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편지를 꿀꺽한 것 말이오......"
"아, 그럼 눈치챈 거요?"
"세상에!"
"그럼 어쩌겠소. 나는 워낙 영국 왕실의 친필 문서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놔서......"
그로부터 석 달 뒤, 런던에 거주하는 엘리자베스 러븐데일에게 한 근사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조지 왕의 연애편지를 확보해줄 수 있노라며 접근해왔다. 그러면서 대신에 '푼돈' 10만 프랑을 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타협은 매우 더디고 힘겹게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런던 제일의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오빠들과 의논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발끈하며 거부하던 그들은 얼마 후 제안을 수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품위가 넘치는 신사는 그렇게 해서 10만 프랑을 손에 넣었고 거기에 더해 화물차 한 대 분량의 그 가게 고가(高價) 식료품을 교묘하게 빼돌리기까지 했다. 물론 물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말이다......
3. 바카라 게임
"우하하하...... 도둑놈들 같으니라구......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놈들이 막심의 얼굴에다 내팽기친 지폐들이 가짜 돈이라 이거지? 거, 맹랑한 놈들일세! 기껏 돈 다발을 지참하고 출두하라고 하니까 위조지폐를 들고 나타나다니!"
이제 베슈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그 돈은 희생자의 상속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이래? 폴 에른슈타인이 엄연히 번 돈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돌려줄 의무가 있는 거란 말이다!"
하지만 바르네트의 쾌활한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크하하하하...... 거 참 큰일났구만그래! 그럼 이번엔 그들이 도둑맞은 거야? 두번째일세! 도둑놈들이 된통 벌을 받았어!"
"시침떼지 마!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하지 말라구! 바꿔치기한 건 자네잖아!...... 자네가 돈을 몽땅 챙겼잖아!...... 이 사기꾼...... 불한당 같으니......"
4. 금이빨을 한 사나이
무슨 큰일이 얼마나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감이 왔다. 차고에 바짝 붙은 창고 문이 강제로 열려진 채였고 그 안에 쟁여놓았던 고가구와 멋진 추시계, 태피스트리 등 남작의 마지막 재산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언제 이걸 다 털어 간 거야?"
남작이 비틀거리며 더듬대자 하인 한 명이 말했다.
"간밤에...... 한 열한 시쯤 되었을 때 개들이 유난히 짖어대더라고요......"
"무슨 수로 이래 놓은 거냐구?"
"남작님 자동차로 빼낸 모양입니다."
"내 자동차라! 그럼 차도 도둑맞았단 말인가?"
남작은 그만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신부의 품에 안겼다. 신부는 제법 아버지 같은 자세로 부드럽게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벌이 빨리도 찾아온 게로군요.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받아들이십시오......"
5. 베슈의 아프리카 탄광 주식(株式)
"천만에!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일세.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는 고객들에게 변상을 하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잘 생각해보라고, 그가 이 사건 초두에 정식 신고를 꺼렸던 이유는 사법당국이 자기 사업에 대해 뭔가 냄새를 맡지 않길 바라서였네. 그러니 이제라도 감옥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에게 으름장이라도 놔보게. 당장 문제를 해결하려 들 테니까. 돈? 자네 친구 니콜라 가시르는 백만장자일세. 그러니 그 자가 잘못한 일은 나한테가 아니라, 바로 그 자 본인한테 수습을 요구해야 맞는 말이지!"
"그럼 결국 자네가 대신 가로채겠다는 얘기......?"
"뭘? 증권 다발? 천만의 말씀! 그것들은 이미 매각해버린 상태일세."
"그랬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조성한 돈은?......"
바르네트는 갑작스레 화를 버럭 내며 외쳤다.
"무슨 소리! 단 한순간, 단 한 푼도 나는 손대지 않아!"
"그럼 그 돈을 다 무엇에 쓸 생각인가?"
"나눠줄 생각이네."
"누구한테?"
"돈에 궁핍을 겪는 친구들이라든지, 내가 후원 중인 몇몇 흥미로운 작업들에 건넬 생각이야. 허어, 걱정 접어두게나, 베슈...... 니콜라 가시르의 돈은 지극히 적절하게 쓰여질 테니까!"
베슈는 '역시나!'하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또 사건은 바르네트가 한 몫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가 지어진 것이다. 바르네트는 죄인들을 벌하고 결백한 사람들을 구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배를 채우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자선이라든지 바람직한 투자 등. 그가 말하는 '적절한' 돈의 용도는 우선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베슈 형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기에서 그냥 넘어가는 것은 곧 공범이 되기를 받아들이는 거와 같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주머니 속에 너무도 소중한 아프리카 탄광 주식 열두 주가 두둑이 느껴지는 지금 이 마당에 만약 저 바르네트가 아니었던들 모든 것을 깡그리 날렸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었다. 과연 지금 이 순간 화를 버럭 내고 몸싸움이라도 벌여야만 하는 것일까?
6. 우연이 기적을 만들다
바르네트가 성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형사의 눈썹이 일순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을까? 베슈 자신이 주장하고 나서려던 얘기를 저 빌어먹을 바르네트가 미리 걸고넘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우려가 들자, 베슈 형사의 태도는 더욱 적극적으로 화했고, 조르주 카제봉의 손을 덥석 붙들기까지 하며 말했다.
(중략)
그리고는 바르네트가 사용했던 표현을 공교롭게도 똑같이 되풀이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 의해 유포된 장신을 향한 음해성 소문에는 일말의 신빙성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자 바르네트가 환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좋았어, 아까 이 몸이 무슈 카제봉에게 얘기한 것과 일치하는구만. 친구이자 상관(上官)이나 다름없는 베슈의 예리한 통찰력이 다시금 발휘되고 있어! 하지만 여보게, 무슈 카제봉은 자신을 겨냥한 중상모략에 대해 지극히 관대한 입장으로 응할 마음 자세가 갖춰진 형편이라네.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게 그녀의 조상들 영지를 되돌려주시기로 했단 말일세."
베슈는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뭐?......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바르네트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가 있고말고.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무슈 카제봉은 이 지방에 대해 다소 기분이 언짢아진 상태라네. 그래서 지금은 게레의 공장들과 좀 더 가까운 거리의 또다른 성채를 점찍어둔 입장이야. 뿐만 아니라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무슈 카제봉은 마침 부동산 증여서 초암을 작성하려던 참이었어. 거기다 10만 프랑짜리 지참인불 수표를 첨부하겠다는 의사까지 표하셨지. 물론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에게 배상금조로 지불될 금액이지. 어떄요, 우리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합의가 된 셈이죠, 무슈 카제봉?"
(중략)
달레스카르 양은 증여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자신의 공증인더러 조르주 카제봉의 공증인을 만나 일을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수표만큼은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한 불쾌감을 표하며 수표를 짝짝 찢어버리더라는 것.
(중략)
"자, 먼저 주문해놓게. 난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휑하니 나간 바르네트는 얼마 안 있어 식당으로 돌아왔다. 둘은 그야말로 배가 터지게 먹어댔다. 이윽고 커피 잔을 들며 베슈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슈 카제봉에게 찢어진 수표조각이라도 돌려보내야겠어."
"그런 수고는 할 필요 없네, 베슈."
"왜?"
"그 수표는 원래 아무 값어치가 없었던 것이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일세. 마드모아젤 달레스카르가 거절할 걸 미리 내다보고 내가 봉투에 증여서를 집어넣으면서 시한이 지난 낡은 수표를 대신 밀어넣었거든."
베슈는 신음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아......그러면 원래 수표는? 무슈 카제봉이 서명한 것 말이네!"
"방금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꿔왔지."
바르네트는 저고리를 살짝 젖히고 두둑한 현금 다발을 보여주었다.
순간, 베슈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뿐,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중략)
베슈는 증오심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여지껏 그토록 한 사람을 미워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 값을 테이블에 던지고는 이렇게 웅얼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이따금 저 인간이 진짜 악마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그것을 또 얼추 새어 듣고는 바르네트도 활짝 웃으며 이랬다.
"하긴 나 역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7. 흰 장갑... 하얀 각반...
솔직히 말해봐, 나 참 근사했지? 사건 해결을 빌미로 단 한 푼 챙기지 않았다구! 자네가 그토록 치를 떨던 그 '돈 떼먹는 짓'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하지만 어떤 점에선 자네의 칭찬을 듣는다는 게 또 얼마나 뜻깊은 보상이겠는가!......
그 날 오후, 베슈는 이참에 바르네트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릴 결심으로 라보르드가(街)의 탐정사무소로 향했다.
그런데 문은 닫힌 채 이런 팻말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연애사업 때문에 잠시 휴업 중
밀월여행이 끝나면 다시 개업함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베슈는 은근한 불안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는 곧장 올가의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역시 문이 잠겨 있었다. 폴리-베르제르도 가보았다. 거기 얘기가,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께서 위약금조로 막대한 금액을 지불한 뒤 훌러덩 여행을 떠나버리셨다는 거였다.
베슈는 거리로 나오자마자 그르렁댔다.
"이런 우라질!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돈을 떼먹는 대신, 이번엔 의기양양한 승리를 내세워 감히 누굴 유혹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의혹이 들었다. 이보다 더 참담한 지경이 있으랴! 어떻게 알아내야 하나? 아니, 차라리 어떻게 해야, 이 세상 가장 비참한 확신에 이르는 걸 피하기 위해 모르는 척 지나갈 수가 있을까?
아뿔싸! 바르네트는 결코 먹잇감을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베슈에게는 다음과 같이 열락(悅樂)에 겨운 코멘트가 첨부된 화려한 그림 엽서들이 당도했다.
아, 베슈! 로마의 달 밝은 밤일세! 이보게 베슈, 자네만 좋다면 당장 시칠리아로 달려오게나......
베슈는 악다문 잇새로 이렇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죽일 놈! 다른 건 다 봐줬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 돼. 두고 봐라, 이 놈......"
8. 베슈, 짐 바르네트를 체포하다
"이보게, 베슈, 아까 네번째 편지를 힐끔거리던 중, 나는 크리스티안 베랄디가 실은 처음부터 자기 남편에게 과거 모든 사연을 있는 그대로 고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네. 즉 그녀의 남편은 자기 아내의 옛날 관계와 아이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건이 나자 입을 다물어서 사법당국을 속였다는 얘기야. 물론 장 데스로크에게 앙심을 품고, 가능하면 교수대로 몰아붙이려는 목적에서 그런 거지. 정말 무시무시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셈이네. 자, 사정이 그러할진대 이제 와 그처럼 불명예스런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갑부 베랄디께서 과연 그걸 사들이고 싶어하지 않을까? 새로운 추문이 이는 걸 싫어하는 어느 점잖은 작자가 은근히 나서서 제안한다면 베랄디가 굳이 돈을 아낄 것 같으냔 말이야...... 그래서, 기회를 틈타 아까 그 편지를 호주머니 속에 슬쩍 해놨지 뭐."
(중략)
그로부터 며칠 후 베슈는 바르네트로부터 다음과 같은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기뻐하게나, 친구! 자네가 이 바르네트라는 망나니를 감옥에 처넣지 않고 사진도 가로채지 않아서, 결국 상관한테 약속도 못 지키고, 지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꼴이 되었지만, 내가 그동안 자네 일을 열심히 탄원하고, 이번 사건에서 자네의 주도적인 역할을 적절히 홍보한 끝에, 마침내 반장직급으로의 승진을 따놓았다네.
베슈는 홱 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바르네트의 빚을 진다는 게 과연 가당(可當)한 얘기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 사회가 그 가장 유능한 봉사자의 진가(眞價)를 알아보고 보상을 해준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어쨌든 베슈의 눈높이로는 베슈 자신의 진가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는 편지는 박박 찢어발기되, 진급만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9
-아르센 뤼팽의 여인들
우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약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을 뤼팽이 용감하게 나서서 구원해주는 관계 유형이다. 처음 예닐곱 살 소년의 몸으로 도둑질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 자체가 어머니에 대한 이 같은 관계에서 비롯된 만큼, 대부분의 여성이 이 관계 유형의 한 항(項)으로서 등장한다. 이 경우 특징은, 굳이 이렇다 할 애정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유대식 램프”, “결혼반지”, 「황금삼각형」, 「서른 개의 관」), 설사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고 해도 서로의 인생을 공유할 정도로 발전하기보다는 아스라한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수정마개」 ). 이런 경우 여성 이미지는 전혀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 같지 않고 그저 뤼팽의 모험에서 하나의 소재처럼 기능한다. 이때 여성은 뤼팽이라는 위력적인 인간상에 완전히 매몰되어 그의 정의감에 불을 지피는 역할에 만족할 뿐 자기 나름의 개성이나 줄거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 뤼팽 모험담에서 정말 중요한 여인상들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약간은 비밀스럽고 이중적이며 때로는 위험천만한 캐릭터를 취한다든지 무척 강인하고 활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등장한다. 그저 뤼팽이 와서 구원해주기만을 고대하는 사회적 약자와는 너무도 다른 이와 같은 여성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뤼팽과 관계를 맺는다. 첫째, 뤼팽의 명실상부한 배우자가 되어 결혼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있고, 둘째, 지독한 갈등 속에서 불 같은 열정을 나누는 관계가 있다.
이제는 다 알려진 대로, 뤼팽은 결혼을 네 차례 했다. 제일 처음 1894년 스무 살의 나이에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으로 클라리스 데티그와 하고, 두 번째로 1904년에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으로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과 한다. 이어서 세 번째 결혼은 그로부터 5년 뒤 루이 드 발메라스라는 이름으로 레이몽드 드 생-베랑과 하며 마지막 결혼은 한참 후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40대 나이의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플로랑스 르바셰르와 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선 먼저 눈에 띄는 여인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귀족 출신(앞의 세 명의 성[姓]에 귀족 출신을 뜻하는 전치사 ‘de’가 붙는다) 내지는 엄청난 재력을 지닌 존재(플로랑스는 막대한 유산 상속자로 판명난다)라는 점이다. 또 하나 두드러진 점은 모두가 뤼팽이 나서서 도와주어야 할 존재이기 이전에 오히려 뤼팽을 위기에서 구하거나 정신적으로 돕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클라리스 데티그는 어려운 상황에 단신으로 파고들어와 뤼팽의 생명을 구해준다(「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pp.284-287).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결혼 상대자였던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두 차례나 뤼팽에게 도움을 준다(“아르센 뤼팽의 결혼”, pp. 254-258). 세번째 배우자인 레이몽드 드 생-베랑은 애당초 뤼팽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자 앙브뤼메지 수도원의 폐허 더미 속에서 부상당한 그를 숨겨주고 상처를 치유해 준 구원자이다. 아울러 하나같이 뤼팽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 그 시선 앞에서 이와 같은 가책을 느끼는 심리는 애초에 넬리 언더다운 양에게서 확인한 바 있는 ‘거울로서의 여인의 이미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한다. 뤼팽의 자의식에 강한 자극을 주어서 정체성의 일대변혁을 유도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양심의 시선 말이다.
단 한 가지 예외는 플로랑스 르바셰르의 경우인데 이는 뤼팽의 나이가 이미 불혹(不惑)을 훌쩍 넘긴 때라 여인의 시선 앞에서 정체성의 변화를 겪을 시기가 자연스레 지났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뤼팽이 배우자로 맞이한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현상은 일부 연구가에 의해,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뤼팽의 모성(母性)을 향한 원초적 갈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들 여성 거의 다가 귀족 출신이라는 점도 뤼팽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당드레지와 닮았다. 서민 출신인 아버지 테오프라스트 뤼팽으로부터 물려받은 뤼팽이라는 성(姓)의 정체성과 비교해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태도는 여인들의 시선 앞에서 범죄자로 살아온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야말로 이처럼 어머니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가치이며, 괴도신사 뤼팽이 배우자가 될 만한 여성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이상이다. 클라리스 데티그나 레이몽드 드 생-베랑 모두 뤼팽에게 ‘정직한 삶’으로서의 개과천선(改過遷善), 즉 정체성의 변혁을 요구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이렇게 정체성의 대전환을 이루면서 시작한 결혼생활이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클라리스 데티그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결혼 6년 만에 사망했고 레이몽드 드 생-베랑은 신혼의 단꿈을 미처 꿔보기도 전에 잘못 겨누어진 총탄에 비명횡사한다.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 역시 수녀가 됨으로써 속세에서의 상징적 죽음으로 결혼을 무효화한다. 플로랑스 르바셰르는 이 점에서도 예외인데 결혼한 이후 그 어디에도(다른 여타 작품)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로 결혼 이전까지만 의미가 있었던 존재에 불과하다. 이처럼 뤼팽이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설정은 언뜻 물리적인 상황 탓으로 설명될 것도 같으나 그보다는 뤼팽 자신의 이중적인 운명에서 원인을 찾아야 보다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는 뭔가를 훔치거나, 조작하고, 남을 등쳐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성향이 아예 피 속 깊이 녹아 있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밀수꾼이자 소매치기였고, 도둑임과 동시에 강도이면서 모사꾼인 데다, 무엇보다 패거리의 왕초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 기상천외하고도 황당무계한 숙명의 기득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할 운명이었고, 대가(大家)가 될 팔자였다.(......)
이처럼 상호 모순되는 성향은 배우자가 죽음을 맞기 이전부터 그의 결혼생활을 사실상 예정된 파국으로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다. ‘선(善)과 악(惡) 모두가 나를 잡아끈다는’ 분열된 자의식, ‘하나의 조각상에 두 개의 얼굴’17)인 라울 당드레지와 아르센 뤼팽이 존재한다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엄존하는 한 우리의 주인공은 결코 그 어떤 여인과도 안정된 행복을 꿈꿀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맺어지는 관계말고 지독한 갈등 속에서 불 같은 열정을 사르다가 그대로 끝나버리는 관계를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여인의 운명 또한 이와 같은 뤼팽의 운명을 빼다 박았다는 사실이다.
신비스러운 변신술과 더불어 조제핀 발사모라는 여인의 정체는 극과 극을 종잡을 수 없이 넘나든다. 물론 또다른 사랑의 형태인 질투가 화근이지만 이런 불안정한 성향의 여인이 남자를 향해 손 내미는 열정은 오히려 파괴적일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어머니 이미지가 오버랩된 다른 여인들이 뤼팽을 ‘정직한 삶’으로 이끈 데에 반해서 조제핀 발사모가 라울을 진짜 괴도의 길로 이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 애정은 아무리 뜨겁게 불붙었다 해도 결국에는 증오와 환멸만을 남긴다.
돌로레스 케셀바흐 역시 극단적으로 분열된 이미지를 타고난 것은 마찬가지이다.
너무도 연약하고 곱기만 한 미망인의 정체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뤼팽의 가장 강력했던 적수와 동일인물임을 밝혀질 정도로 돌로레스 케셀바흐의 이중성은 처절하다. 더구나 그것이 순수한 광기, 즉 정신착란의 결과라는 점에서 조제핀 발사모보다 비극적 색채가 짙다. 이 여인 역시 뤼팽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애정에 괴로워한다.
요컨대 남녀 둘 다 똑같이 분열된 운명을 타고난 처지이기에 서로 미친 듯이 불붙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시적이나마 받아들이고 유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관계이다. 마치 부싯돌끼리 부딪치며 불꽃을 발하듯 강렬한 열정을 경험할 수는 있으되 상대방의 불안정한 모습을 언제까지나 흔들리지 않고 비쳐줄 조용한 거울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이 그런 조용한 거울 같은 여자와 더불어 백년해로(百年偕老)하지 못한 점은 어찌 보면 무척 다행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르센 뤼팽의 모습은 정체성의 혼란을 끝없는 모험 속의 자기 변신을 통해서 극복해나아가는 데에 있으며 어머니 같은 한 여인을 만나 ‘정직한 사람’으로 안주하는 것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17)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