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저택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5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 소설이 시작할 때는 아, 또 그렇고 그런 뤼팽의 모험담 중 하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흘러가는 이야기도 다소 김이 빠지는 부분도 있었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지막 트릭이 공개되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한다.

 

불가사의한 저택이라는 을씨년스런 제목이 붙은 이 작품에서는 1년간의 모터보트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센 뤼팽이 장 데느리스 자작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첫 장부터 글자 그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꼬리를 무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 전개는 후반부에 들어서 해결의 실마리가 한꺼번에 풀리기 직전까지 독자의 의식을 완벽한 미궁으로 몰아간다. 까마득한 과거사 속에서 스토리의 발단을 구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장기가 여전하며, 전작(前作)에 이어 베슈 형사와 뤼팽 간의 유머 섞인 재치 만점 대결도 그대로이다. 뤼팽 시리즈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 대담무쌍한 발상을 이야기 저변에 깔되, 특히 이 작품은 과도한 비약보다는 치밀하게 점진적인 구성을 견지함으로써, 모처럼 퍼즐 맞추기식()의 지적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이번 해설부터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작품론을 다루기로 하며, 그 첫걸음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대한 같은 추리작가들의 촌평을 발췌 소개해본다.

 

아르센 뤼팽의 미출간 회고록에서 발췌함

나의 지난 모험들 중 몇몇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술한 책들을

지금 다시 훑어보노라면, 한마디로 그 각각은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을 던지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생각이든다.

황금 양털(Toison d'or)이 모양만 변했을 뿐 내가 이제껏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헤매온 것이 바로 그 황금 양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상황에 따라 내 이름과 성격을 달리 해야만 했기에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고 이전까지는 결코 사랑해본 적도 없으며

이후에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매번 새롭게 다져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로 눈을 돌려볼 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나 소냐 크리슈노프,

돌로레스 케셀바흐 혹은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등과 대면했던 남자는

아르센 뤼팽이 아니었으며 각각 라울 당드레지, 샤르므라스 공작, 폴 세르닌

그리고 리메지 남작이었다. 그들 모두는 각기 다른 인물임과 동시에 그 어느

하나도 나와 똑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그들이 겪은 다채로운 사랑을

나 자신은 겪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때로는 재미나거나

짜증스럽고, 때로는 지그시 미소를 짓거나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마치 이름 모를 형제들처럼 나와 비슷하게 닮았던 그 모든 풍운아들 가운데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친구를 꼽으라면 아마도 마도로스 신사이자

탐정신사인 데느리스 자작일 것이다. 그는 파리의 어여쁜 모델이자 지고지순한

아를레트의 마음을 얻고자 저 불가사의한 저택을 둘러싼

험난한 싸움에 기꺼이 뛰어들었던 것이니......

 

1. 여배우 레진

그 매혹적인 발상은 그러지 않아도 자선행사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즐기는 너그러운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발레의 막간을 이용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재단한 옷을 연예계 혹은 사교계의 아리따운 여인 스무 명에게 입혀서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투표를 통해서 그 날 선보인 가장 아름다우 의상 세 벌을 선정하도록 되어 있고 그를 제작한 작업실에 입장 수익 전액을 골고루 지원한다는 취지였다. 그 결과 파리 양장점의 들뜬 아가씨들 상당수가 저 유명한 리비에라 휴양지로 보름간의 휴가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된다.

 

2. 모델 아를레트

"하긴 꽤나 엉뚱한 얘기지...... 애들 생각처럼 유치해...... 난 딱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대규모 양장점의 중역이나 사장이 되고 싶어. 직원 복지에 큰 비중을 두도록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갖춘 회사 말이야...... 그리고 또 여자 노동자들한테 지참금을 듬뿍듬뿍 나눠주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자기 맘에 맞는 곳으로 얼마든지 시집을 갈 수 있도록 말이지......"

제 입으로 엉뚱한 꿈이라면서 해맑게 웃는 아를레트...... 하지만 듣는 동료 아가씨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3. 탐정신사 데느리스

데느리스는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두르고서 여자 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잘 생각해봐요, 아를레트. 그냥 겉으로 부닥쳐서 뻔히 드러난 외적인 사건들을 기억해내라는 얘기가 아니야. 당신 마음 먹기에 따라 기억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일 따위는 말고...... 의식을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어서 그만 잊어버리고 만 일들을 생각해내보라는 거야.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특별한 점 말이지......"

 

4. 형사 베슈

멜라마르 백작은 이 모든 광경을 일견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왠지 묘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떨어져나간 가슴받이를 예심판사가 불쑥 내밀며 추궁하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입술을 씰룩거려 볼썽 사나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댔다.

"내 누이동생, 어디 갔나요?"

늙은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마담은 침실로 건너가신 것 같은데요."

"그 애한테 나 대신 작별인사나 전해주구려. 아울러 내 뒤를 따르라고 해주오."

백작이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관자놀이를 겨눈 뒤 방아쇠를 당기는 것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만 유독 그의 행동을 주의해 관찰하고 있던 데느리스가 부리나케 몸을 날려 팔꿈치를 쳐냈기 때문에, 총알은 살짝 비쪄나가 유리창을 박살내고 말았다. 동시에 형사들이 우르르 멜라마르 씨를 덮쳤다.

 

5. 그는 적()인가?

때는 1840, 현 백작의 증조부 되는 쥘 드 멜라마르는 멜라마르 가문의 가장 출중한 인물로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다가 왕정복고 시절에는 대사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어인 일인지 그만 살인절도죄로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급기야 그는 감방 안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에 문제를 좀더 치밀하게 파고들기로 했다. 그렇게 오래 된 자료들을 있는 대로 파헤친 결과, 일부 묻혀 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문서 하나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1868년 바로 그 멜라마르의 아들이자 아드리앵 드 멜라마르 백작의 조부가 되는 알퐁스 드 멜라마르가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전속부관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살인과 절도죄를 범했다는 내용이다. 결국 그는 뒤르페가()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 자결을 했고 황제는 모든 사건을 불문에 부쳐버렸다.

이상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세간에 대단한 소란을 몰고 왔다. 졸지에 어떤 단어 하나가 현재의 사태를 환하게 규명해주는 듯했고, 일거에 상황을 요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는 말...... 비록 백작가문의 두 남매가 대단한 재산가는 아니라고 해도, 파리에 대저택을 소유한 데다 투렌에는 성채도 하나 지니고 있는 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으며 오히려 여러 자선사업에 투자를 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페라 극장의 사건과 다이아몬드 절도 건에 대해 무슨 물욕(物慾)이 있어서라고 설명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결국 격세유전에 의한 범행인 것, 멜라마르 가문은 일종의 도벽(盜癖)을 본능적으로 지닌 집안이다. 멜라마르 남매도 분명 조상으로부터 그러한 형질을 물려받았을 게 뻔하다. 그들이 이번에 도둑질을 한 것은, 물론 자기들 재력을 상회하는 생활수준을 넘보기 위한 면도 없지는 않겠으나, 그보다는 좀더 강력한 유혹, 즉 격세유전적 필연성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조부인 알퐁스 드 멜라마르처럼 아드리앵 백작도 자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보라! 그 역시 격세유전의 증거인 셈이다.

 

6. 멜라마르 가문(家門)의 비밀

"그럼요! 물론이고말고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또 당했을 겁니다. 이 저택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바로 이곳에 멜라마르가(家)의 악령이 있어서 우리를 포위하고, 급기야는 망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남매가 지금 숙명의 섭리에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그 악령의 저주를 거슬렀기 때문이랍니다. 어느새 과거를 깡그리 잊고 그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저택에 입성하는 것만 즐거워하면서 시골을 떠나와 이곳 뒤르페가(街)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우리 남매는 음산한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답니다. 특히 오빠가 더 그랬어요. 나야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몸이니 행복도 불행도 골고루 겪은 셈이지만, 아드리앵의 경우는 다짜고짜 침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지요. 워낙 저주에 대한 확신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강하게 자리잡은지라, 그는 아예 결혼도 포기하기로 작정했으니까요. 멜라마르 가문의 혈통에 그런 식으로라도 종지부를 찍는다면 운명도 피할 수 있고 계속되는 불운도 중단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멜라마르가(街)의 최후의 생존자가 되고자 한 것이죠. 정말 무서워했어요!"

 

7. 구원자 파즈로

별다른 겉치레 없게 단순히 내뱉은 말 같았지만, 분명 아를레트를 향한 의미 있는 시선이 동반된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방 안에 자리잡은 사람들 위치상, 그 순간 어느 누구의 얼굴도 데느리스의 시야에 포착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이 말이 질베르트 드 멜라마르에게 건네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약간의 의혹이 있었다면 지극히 짧은 순간뿐이었고 그것은 베슈의 두 견갑골 중안 부위에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어김없이 찍어 꽂는 것이었다. 반장 입장에서는, 과연 인간의 손가락이 마치 고문용 집게와도 같은, 이런 괴력을 발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데느리스는 그곳을 벗어나면서도 앙투안 파즈로에 대해, 그리고 아를레트에 대해 당최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규방을 빠져나와 현관 바닥을 밟으면서도 오히려 발소리가 들켰으면, 그래서 지금의 이 더러운 기분을 왈칵 쏟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오기까지 들었다.

 

8. 방화범 마르탱 가문(家門)

데느리스는  급기야 파즈로를 향해 노골적으로 물었따.

"당신 저 여자를 사랑합니까?"

"한없이 사랑하오."

열정 어린 대답이었다.

"아를레트도 당신을 사랑하오?"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요?"

파즈로는 자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가 최고의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요?"

"우린 약혼한 사이죠."

"뭐? 당신들이 서로 약혼을 했어?"

 

9. 아를레트의 약혼

아무래도 앙투안 파즈로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장의 허를 찌르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도 되는 듯했다. 아를레트와의 관계하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약혼설, 그들 커플한테 향하는 멜라마르 백작 남매의 적극적인 호의, 상상도 못할 저택 구입 소식 등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마치 일상적인 삶의 극히 평범한 일들처럼 이 자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10. 주먹질

"멜라마르가(家)의 비밀이라! 그동안 얼마나 고심해왔던가! 처음, 레진과 아를레트가 납치 당했을 때부터,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어. 지금 우리는 머나먼 과거를 통해서만 현재가 제대로 해명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거라고...... 따지고 보면 그런 종류의 문제들일수록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빼앗겨왔는지! 해결한 것도 숱하게 많지! 아무튼 이번 경우에도 딱 한 가지 요점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걸로 떠오르더구만. 즉 멜라마르 남매는 결코 범인일 수가 없다는 사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남매의 저택을, 모종의 음모를 실행에 옮기는 무대로 활용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그것이 실은 앙투안 파즈로의 논조였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믿고 사법당국도 그쪽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함으로써 파즈로에게 엉뚱한 실익이 돌아가더라 이거야. 또 하나 의문인 건 과연 아를레트와 레진이 멜라마르 남매와 프랑수아 부부의 주의를 끌지 않고도 응접실까지 이끌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느냐는 문제였지......"

 

11.애첩(愛妾) 발네리

불가사의한 기적이었다!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을 벗어난 지 10여 분 만에 또다시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에 와 있는 것이다! 분명 센 강을 건넜고, 그것도 딱 한 차례 건넜다! 그렇다고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무슨 원을 그린 것도 아니다. 뒤르페가(街)를 벗어나서 무려 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훌쩍 지나왔는데도 불구하고(3킬로미터라면 옛날 파리 시가지로 볼 때 앵발리드에서 레 보즈 광장에 이르는 거리이다), 지금 멜라마르 저택의 안뜰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사물들끼리 일치한다는 것, 즉 두 안뜰 저만치 세워진 건물의 두 전면(前面) 생김새와 색깔, 윤곽 등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월의 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분위기, 근처 강물로부터 실려온 습한 공기를 머금은 채 제한된 장방형 벽체들 사이를 감도는 뭔가 모를 기운마저 서로 똑같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이었다.

분명 똑같은 채석장에서 똑같은 크기로 깎아 대령한 건축용 석재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아스라이 묻어난 세월의 때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발소리까지 똑같네."

현관을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리는 백작의 목소리마저도, 자기 집을 걸어 들어갈 때 실내 가득 울려퍼졌던 그 목소리와 똑같은 울림을 내고 있었다.

 

12. 아르센 뤼팽

"자네의 그 호각은 아마 말을 듣지 않을걸."

순간, 데느리스가 내뱉듯 말했다.

베슈는 있는 힘껏 호각을 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구멍 틈새로 빠져 달아나는 바람 소리가 고작이었다.

 

에필로그 : 아를레트와 장

"아무 걱정 마세요. 그냥 인생에 자신을 내맡겨봐요. 당신의 은둔처를 가르쳐준 것도 레진 자신이랍니다. 이 배하고 밀짚 모자와 푸른 작업복 모두 내가 돈 주고 정정당당하게 산 것이고요. 모든 게 잘될 겁니다. 휴가를 원한다면서 무엇 하러 지체한단 말입니까?"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1

-추리소설가들이 본 아르센 뤼팽 시리즈

 

★ 아르센 뤼팽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그가 칼리오스트로의 비밀을 밝혀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매혹시키는 재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발렌티노로부터 제임스 딘에 이르기까지,1) 몇몇 인간-우상들이 자칫 그대로 신이 될 뻔한 적은 있었지만, 진정한 신격화란, 우리의 내밀한 꿈에다 살아 숨쉬는 얼굴과 육체를 부여하려고 나타난, 이른바 상상 속의 존재들을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자고로 상상력이란 여성과도 같다. 그것은 오로지 강한 영웅한테만 감동하고 열광한다. 우리 각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떠받들고 있는 저 영원한 올림포스 산정에는 베토벤이라든지 나폴레옹, 니체 등 위대한 신들께서 더없이 준엄한 표정으로 잠들어 계신다. 그러나 그 신들과 인간 사이에는 약간은 가볍고도 경쾌하며 다정다감한, 날개 달린 중개자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하여 신화는 웅변과 상업 그리고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를 따로 창조해내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폭력과 향수에 반반씩 젖어 있던 금세기(20세기)의 벽두에 한 작가가 똑같은 의도로 헤르메스 같은 존재를 창조했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아르센 뤼팽이다.

부알로-나르스작2)

 

★ 「노란 방의 수수께끼」의 저자 이름은 가스통 르루이다. 그런데 나는 혹시 이 이름이 괴도신사 아르센 륖애의 모험담을 풀어내고 있는 모리스 르블랑이라는 작가의 또다른 '필명'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가끔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두 이름을 통해서 완벽하게 대칭적으로 역전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즉 '붉은 신사'는 언제나 탐정 이야기를 집필하는가 하면, '하얀 신사'는 항상 범죄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식으로 말이다.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적(赤)-백(白)의 조합이 우연의 일치 이상일 거라고 추정할 만한 무슨 진지한 이유가 내게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이야기는 사실 무척이나 상이한 종류에 각각 속하고 있다. 가스통 르루의 작품들로 말하자면, 줄거리의 중ㅅ미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수수께끼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좀더 엄격한 추리소설인 반면,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들은 쉴새없이 제기되는 난제(難題)들의 연속을 즉각즉각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차라리 숨가쁜 모험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 작중 주인공이 처한 상황 자체에서 비롯된다. 탐정은 늘 사건의 '밖'에 위치하는 반면, 범죄자는 언제나 사건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경찰은 항상 집 밖에 있는데 도둑은 늘 집 안에 들어가 있다라고도 할 수 있다.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4)

 

★ 내가 그를 발견한 지 너무 오래인 데다, 그때는 아주 어린 나이였기에, 그 시절로 뒷걸음질을 치다보면 문득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는 이른바 대중문학, 다시 말해서 '진짜 사실' 속의 위대한 주인공이다. 그를 좋아하는 데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설사 작품의 스타일은 유행에 뒤떨어질지라도 위대한 주인공 자체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나의 아버지가 아르센 뤼팽을 읽었고, 내가 그를 읽었으며, 나의 아들도 그를 읽었고, 내 손자들도 그를 읽을 것이다.

프레데릭 다르5)

 

★ 바캉스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는 객실 승객들한테 나를 잠시 맡길 때면 으레 이런 말을 하시곤 했다. '두고 보면 아시겠지만, 이 아이는 책만 손에 쥐면, 입도 뻥끗하지 않는답니다!' 보통은 그 책이라는 게 「서커스 개, 미셸」이라든가 「황금의 덫」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미끈한 얼굴에 외알 안경을 낀, 근사한 차림의 사내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에 온통 넋이 빼앗겨 있었다.

제목이 「수정마개」였는데, 그때 나는 도대체 수정 병마개가 어떻게 유리 의안(義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혼자 의아해하며 책을 구입했다. 솔직히 나의 그런 호기심이 시원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종착역에 도착할 즈음 이미 나는 여지껏 읽어온 책들과는 너무도 색다른, 게다가 상상한 내용과는 너무도 판이하고 고리타분한 삽화들 때문에 오히려 더욱 기이하게 느껴지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정복당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여름날이었는데, 숙모 한 분이 나더르 「르 주르날」지를 사오라고 시킨 뒤, 자기는 요즘 「바리바」라는 연재소설에 푹 빠져있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원에 모여 앉은 나머지 가족을 상대로 '아르센 뤼팽이 말입니다......'하며, 그 아리송한 제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인물이 오로지 나처럼 철부지 중학생의 세계에만 속하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1929년과 1930년에 걸친 그 여름, 그렇게 나는 '위대한 인물들'이 출몰하는 문학 책에 홀딱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떄만 해도 내 인생 자체가 추리문학과 더불어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아직도 "리브르 드 포슈" 판 책들에 자극을 받아 다시금 「기암성」이라든가 「불가사의한 저택」등을 정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멋진 뤼팽!'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기 일쑤다. 넓게 보면 그는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둘 중 여전히 보다 젊은 사람은 내가 아닌 바로 그인 것이다!

모리스-베르나르 앙드레브6)

 

★ 프랑스의 모든 추리소설 작가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뤼팽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의 문화를 지탱하던 기둥 세 개를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기암성」, 「무슈 리키키의 기상천외한 여행」그리고 「초록 암말」7)이 된다.

사실 이 세 작품들은 보기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다. 셋 모두 일종의 시적 리얼리즘이 독특한 미학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르블랑과 카미, 에메 모두 더없이 엄격한 논리적 요소들과 불가능한 가정들로부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것 또한 서로 비슷한 점이다.

그중에서도 뤼팽이라는 르블랑의 주인공은 일반적인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완벽 이상의 존재로서, 매혹시키는 주인공과 매혹 당하는 독자 사이의 동일시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캐릭터이며, 일단 책을 덮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모험담으로 태어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 중 누구도 자신만의 '뤼팽'을 만들어볼 욕심 한번 가져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뤼팽은 우리 추리소설 작가에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듬뿍 불어넣어준다.

미셸 르브룅8)

 

★ 미셸 르브룅(M. L.) : ......그럼,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누구인가?

레오 말레(L. M.) : 그야 당연히 아르센 뤼팽이지...... 그는 내가 읽은 첫 추리 소설들의 주인공이었다네...... 르블랑을 추리소설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

M. L. : 그러고 보면 돈키호테에서 우리가 그리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야.

L. M. : 맞아. 그것도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이지. 항상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으니까...... 게다가 나도 그렇지만 항상 패턴이 비슷해. 르블랑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보물을 찾아 헤매지...... 프랑스 제왕의 보물이든 다른 개인의 보물이든 말이야...... 나로 말하자면, 진주나 보석 혹은 숨겨둔 막대한 현금이 관건이 되지. 그다지 독창적이랄 것도 없어...... 내가 보기에 모리스 르블랑의 최고 작품들만 꼽는다면, 제일 먼저 「기암성」을 들겠어...... 아주 감동적이고 정말 아름답거든...... 특히 마지막에 죽은 여인을 향한 사랑 말이야......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나는 눈물 없이 그 대목을 읽은 적이 없다네...... 자네도 알지, 레이몽드가 죽고 나서 뤼팽이 여자를 들쳐업고 하는 말......

 

그 다음에는 단연 「수정마개」를 꼽을 거야. 일종의 추적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 정말 대단하단 말일세! 나는 아직 「수정마개」가 단 한번도 영화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할 정도라니까. 멍텅구리 같은 TV용 드라마말고, 진짜 영화 말이네! 「수정마개」는 시나리오를 써서 각색하기 위해 굳이 몸통을 절단하거나 할 필요도 없어. 그냥 그대로 카메라만 움직이면 된다구......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로즈 루즈' 사(社)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자 배우인 장 루죄에게 이런 모든 이야기를 했었지. 한데 그 친구 얘기가, 르블랑 영감이 글쎄 미국인들한테 완전히 당해서 이젠 불가능하다는 거야. 즉 미국에서 아르센 뤼팽의 영화 판권을 사들이고도 형편없는 졸작을 만들거나 아예 묵혀두는 바람에 거기에 묶인 나머지 프랑스에서는 그만 아르센 뤼팽으로 아무 영화도 못 만든다는 것이지...... 아무튼 참 대단한 영화가 될 터인데 말이야. 미국인들조차 그걸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 게다가 부패한 의원이라든가 파나마 스캔들에 대한 암시 같은 내용이, 시의적(時宜的)으로 적절한 부분도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들에선 약간 시들해진 면도 없진 않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나는 「황금삼각형」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 하지만 그 재미라는 것도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어. 뭐랄까, 나이를 잊고 싶어하는 일종의 향수(鄕愁)라고나 할까?...... 그걸 읽고 있으면 처음 그걸 읽었던 1920년대가 떠오르거든. 그때가 열한 살이었는데, 지나치게 애국주의적 대목에선 열광보다는 왠지 반감이 일기도 했지...... 당시에 나는 국가가 뭔지 별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방면엔 완전 숙맥이나 다름없었지......

그런가 하면 「서른 개의 관」은 그 분위기와 풍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네...... 심지어 1936년, 그 섬의 실제 모델로 여겨진던 브레아 섬에 가보았는데 완전 실망이더구만. 원래 문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모든 걸 부풀리지. 어쨌든 1914년의 전쟁 이전의 아르센 뤼팽과 그 이후의 아르센 뤼팽은 많이 다르다는 건 사실이라네. 완전히 애국투사가 되었지.....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면이 없진 않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해!...... 더 이상 괴도신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잖아...... 도둑질을 해도 과부와 고아를 돕기 위해서 하는 거야......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문제는 과부의 얼굴이 얼마나 반반하냐지...... 혈기와 활력은 아무래도 예전 같지가 않단 말씀이야......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해. 그렇게 된 건 다 나이 때문이거든. 작가의 나이 말일세......

미셀 르브룅과 레오 말레의 대담9)

 

1) 둘 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 요절함으로써 더더욱 우상화된 할리우드 스타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2) 부알로-나르스작은 원래 피에르 부알로(Pierre Boileau, 1906-1988)와 토마 나르스작(Thomas Narcejac, 1908-1998)이라는 두 사람의 공동 필명이다. 원래 아르센 뤼팽의 열렬한 팬이자 추리소설가였던 부알로와, 낭트 대학교의 철학교수이자 여흥 삼아 추리소설을 써오던 나르스작은 서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냥 한번 써본 공동 작품이 소위대박을 터뜨림으로써 이후 본격적인 추리문학 작품들을 써낸다. 대개는 부알로가 전체 줄거리를 구상하고 나르스작이 집필을 하는 식이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모작들로도 유명한 이들의 작품세계는, 특히 클루조 감독의 "디아볼릭(Les Diaboliques)"이라든가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 같은 영화들이 그들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을 만큼 대중적인 호소력과 아이디어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3) 여기에서 '붉은 신사(monsieur roux)'는 가스통 르루를, '하얀 신사(monsieur blanc)'는 모리스 르블랑을 지칭한다. 이유는 공교롭게도 전자의 성(姓)인 르루(Leroux)에 '붉은색'을 뜻하는 'roux'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고, 후자의 성인 르블랑(Leblanc)에는 '하얀색'을 의미하는 'blanc'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 이야기를 '붉은색'이, 범죄 이야기를 '하얀색'이 담당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범죄가 '붉은' 피를 연상시키고, 그것을 깨끗이('하얀') 해결하는 일을 탐정이 담당한다는 점에서, 역전된 무엇인가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은 영국 태생의 신문기자이자 시인이며 작가로, 브라운 신부라는 추리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탐정 캐릭터 중 하나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5) 프레데릭 다르(Frederic Dard, 1921-2000)는 프랑스의 추리소설가로 산 안토니오(San Antonio)라는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100여 편의 작품들을 집필했다. 특히 장난스런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많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6)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

7) 마르셀 에메(Marcel Ayme, 1902-1967) 작품

8) 미셸 르브룅(Michel Lebrun, 1930-1996)의 본명은 미셸 카드, 80여 편의 추리소설 작품이 있으며, 특히 추리문학에 관한 백과사전식 박학다식으로 '추리문학계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9) 레오 말레(Leo Malet, 1909-1996)는 프랑스의 정통 누아르 소설의 원조 작가로서 네스토르 뷔르마라는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10여 편의 추리소설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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