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합창 - 문학 파랑새 클래식 이삭줍기주니어 8
아벨 산타 크루스 지음, 명수정 그림, 정선옥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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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별명이 붙으면 살에 피부가 붙듯 달라붙어 도저히 그 별명을 떼어 내는 일은 불가능해지기 마련이다. 말라깽이라는 별명은 교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맥 빠지는 이름도, 그렇다고 눈부신 이름도 아니었다. 영웅이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겁쟁이도 아닌 평범한 병사의 별명으로 알맞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20~30대라면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을 드라마가 있다.

1990년대에 방영되었던 외화시리즈 '천사들의 합창'.

먼저 KBS에서 방영되었고, 이후에 EBS에서 방영되었다는데 KBS에서 방영되었다는 건 잘 모르겠고 EBS에서 방영되었던 것을 띄엄띄엄 시청했었던 기억은 난다.

매번 시청하지 않아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마도 어린이 드라마 치고는 꽤 주제가 무거운 편이라서 그 나이에는 꾸준히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참 생소한 나라인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였는데, 사실 멕시코 드라마라는 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고 그 때는 히메나, 마리아 호아키나 등의 이름이 발음할 때 참 예쁘면서도 독특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책 뒤편의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원래 아르헨티나의 작품으로 나중에 멕시코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미국으로 수출된 후 다시 우리나라로 수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의 문제가 많았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사실 중남미 쪽은 여행 가본 적도 없고 주변에 다녀온 사람도 없고 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 미지의(?) 세계인데, 얼마 전 한국과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별 리그 2차전을 보고 갑자기 궁금해져서 읽게 되었다.

책도 참 좋지만, 그래도 드라마 쪽이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오프닝 곡, 회전목마를 타며 빙글빙글 돌던 아이들(그런데 드라마의 원제인 '회전목마'는 무슨 뜻이었을까?), 천사 같던 히메나 선생님, 늘 넉넉한 웃음을 보여주던 경비 아저씨, 재잘대며 아이들이 들어가던 학교 앞 입구, 하늘색 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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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엔젤(비트윈66종가을할인)(City Of Angels)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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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독일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여러모로 원작에 못 미치긴 하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천사 연기는 어색하지는 않지만 배우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이 느끼하다. 화면 구성(그걸 전문 용어로 미장센이라고 하나?)도 감탄할 정도였던 원작에 비하면 뭔가 엉성하다. 원작에서의 사랑은,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천사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이 이 영화를 원작보다 더 가볍게 만들어 버린 대신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쉽게 사게 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자들이 바라보는 끝이 있는 삶이라는 것, 죽음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던 1987년의 영화는 그 역설적인 면 때문에 큰 울림을 던졌다. 인생에 대한 철학적이고 심오했던 독일 영화가 1998년에 할리우드로 넘어오면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로 바뀐 셈이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천사들이 모여 있는 도서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우리에게 다가와서 터치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하는 천사들, 그리고 먼저 천사에서 사람이 된 사람 등 상당 부분을 원작 영화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문제는 원작에서는 인상적이었던 장치들이 주제가 바뀐 영화에 수정 없이 그대로 옮겨지다 보니 뒷부분에 가서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호러(horror)스럽기도 하다는 것이다. 의외의 부분에서 묵직한 감동을 주던 영화가 미국에서 다시 만들어지면서 다소 우스꽝스럽게 변한 부분이 있다.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종종 대중의 호응을 일정정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점일 수도 있다. 물론 100%는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이 영화 또한 그렇다. 너무 진지해서 다소 지루하기조차 느껴졌던 원작에 비해 이 영화는 약간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훨씬 더 말랑말랑해졌다.

 

마음에 남는 장면 하나.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맛이냐고 묻는 세스에게 메기는 배(pear)맛이라고, 배 맛을 모르냐고 묻자 세스는 말한다. 당신이 느끼는 것이 나와 같은 것인지 궁금하다며 묘사해 보라고. 그 당시를 모면하고자 순간적으로 한 말일 수 있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유효한 말 아닌가.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똑같이 느끼는지. 우리가 입으로는 똑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지만 가슴에 떠올리는 느낌도 같은 것인지.

 

마음에 남는 장면 둘. 현미경으로 피를 관찰하며 둘이 나누는 말. 현미경으로 보이는 혈액 속 세포 하나하나가 나이고, 그 사이사이도 나라는 말. 이 영화에서는 feeling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도 나오는데 feeling이란 결국 세포 하나하나의 떨림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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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검프 (2disc) - 할인행사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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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ama always said,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쓴 글에서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어느 것을 집을지 모른다고 한 구절이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명대사로 꼽을 이 말은 잘 알려져 있다. 정말 유명한 이 영화를 나는 이제야 보았다. 물론 너무나 유명해서 영화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더라도 그 내용과 의의와 무엇보다도 수염이 덥수룩한 포레스트가 뛰는 장면은 잘 알고 있었다. 영화 주인공이 톰 행크스라는 것도, 그가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화배우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 몇 분도 보지 않은 영화가 마치 본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미식축구 스타에서 전쟁 영웅으로, 새우 잡이 배 선장에서 큰 회사 사장으로, 정말 그보다 몇 배는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발버둥 쳐도 되지 않는 인생을 포레스트는 살게 된다. 그의 인생 여정과 함께 맞물리는, 미 현대사의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고 한편으로는 가슴 뜨거워지는 장면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의 목록에 올려놓게 했을 것이고, 톰 행크스를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배우로 만들었을 것이다. 지극히 미국적인 (또한 보수적인) 영화라고 폄하하고 싶은 부분도 솔직히 없지는 않지만, 성실함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가치를 가지고 이렇게 가슴 먹먹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하다. 60-70년대 미국인 전체의 삶을 대변하는 포레스트의 삶, 그리고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이라고밖에 믿어지지 않는 톰 행크스의 연기는 왜 그가 가장 미국적인 배우인지 알게 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여권 신장을, 환경을, 동물 보호를 위해(이 대사들을 통해서 이 당시의 미국이라는 나라의 화두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세심함이 또 이 영화의 매력이다.)서가 아니라 ‘그냥 뛰고 싶어서’ 뛴다는 포레스트. 역설적으로 이 계획 없는 달리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혹시나 똑똑하지 못한 자기를 닮았을까봐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훨씬 똑똑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나쁜 아버지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산다는 것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지능 지수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수많은 지식들이 과연 인간답게 사는 데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포레스트가 살아오면서 그에게는 많은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각종 지침들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면, 연애를 잘 하려면, 결혼을 잘 하려면, 좋은 부모가 되려면...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대한 지침이 과연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우리 모두에게는 운명이 있는지, 아니면 인생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둘 다 맞는 말인 것 같다는 포레스트의 말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미리부터 정해진 운명에 집착하지 말고, 그렇다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이, 포레스트처럼 열심히 사는 것이 유일한 정답일 것이다. 물론 정답을 아는 이들이 다 실천하지고 살지는 않지만.

* 영화에서는 포레스트의 지능 지수가 75로 나오는데 정말 75의 수준으로도 저 정도의 지능을 갖출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돌고래가 그쯤이라고 들었는데 최소한 언어로 소통하는 데에 문제가 없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는데 그보다는 높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제니가 걸린 바이러스성 질환은 아마도 STD 중 하나일 것 같다. 제니가 살아온 인생을 보면 짐작이 가는데, 그러고 보면 그녀 또한 포레스트와는 정반대편에서 미국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살아온 그녀의 삶과 아무 의식 없이 살아온 포레스트의 삶이 대비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 영화가 한쪽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 대한 정답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의 어떠한 주의나 주장의 위험성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목표를 역전하거나 하위 방법으로 인해 퇴색되는 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영화 속의 반전 주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 버스 정류장에서 아들을 배웅하면서 잠시 멈칫하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앞 대사가 “Never...”였던 것으로 보아 분명히 다른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꿀꺽 삼키고 그냥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겠지. 포레스트 주니어는 식스 센스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보였던 할리 조엘 오스먼트인데 정말 최근 사진을 보면 안타까운 모습을 금할 수 없는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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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포터 - 아웃케이스 없음
크리스 누난 감독, 이완 맥그리거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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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더라고 따스한 파스텔 톤의 갈색 토끼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보았을 것이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고 보온병에, 담요에, 액자에, 연습장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너무 많은 물건에 등장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냄비 받침도 피터 래빗이다.

나도 어릴 때 이 캐릭터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 곰돌이 푸에는 안 끌렸는데, 피터 래빗, 제미마 퍼들덕, 벤자민 바니 등은 자꾸 눈길이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이 용 삽화답지 않게 사실적인 캐릭터의 모습에 끌렸던 것 같다. 사람처럼 의인화 되었어도 털 한 올 한 올이 실재와 흡사했던 까닭에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비커밍 제인과 여러 모로 비교할 수 있다. (비교할 수 있다고 해서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여성 작가가 주인공이고, 배경은 영국이며, 결혼이 전부라고 생각되던 당시의 여성의 삶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영화적인 재미는 비커밍 제인 쪽이 훨씬 더 크지만, 둘 중 한 명의 삶을 택하라면 미스 포터의 쪽이 더 끌린다.

비커밍 제인이 제인 오스틴의 인생 중 여성으로서 가장 설레고 반짝반짝 빛났을 순간만을 포착해서 아름답고도 안타깝게 그렸다면, 미스 포터는 사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전기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 처녀 시절, 결혼하고 나서의 삶(자막으로 처리되었어도 그 정도면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다)을 전부 알 수 있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조금 따로 노는 느낌을 주고, 이완 맥그리거가 너무 조연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주지만(비커밍 제인의 제임스 맥어보이의 존재감과 비교해 볼 때), 그래도 영화는 절대로 지루하지 않다. 영화에서 재현된 당시의 영국 풍경이 따뜻하고,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와의 호흡도 좋다. 특히 르네 젤위거는 상상의 세계와 동거하는 면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자칫하면 정신병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캐릭터의 순수함을 부각시켜서 전혀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사랑스럽게 보이게 한다. 이미 얼굴의 자글한 주름을 감출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많고 장난스럽고 수줍어하고 설레는 소녀적 감성들이 오물거리는 입매에,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에, 부풀었다 꺼졌다하는 볼에 흘러난다.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순수하고 의지가 강한 노처녀 동화작가로 대안을 마련할 수 없는 적역이다. 노만 워른 역의 이완 맥그리거는 자상하면서도 순수한 소년같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포터와 워른의 사랑이 이미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하는 소년, 소녀처럼 맑고 투명하다.

포터의 상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물 친구들은 어른이 된 관객도 설레게 한다. 어릴 때 나도 내 주변의 모든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매일매일 새로웠고 신기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설레지 않는 것, 24시간 동안 순간순간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였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궁금한 점이 없어진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작가 포터가 주변의 땅을 사들여 개발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어릴 때 자신의 상상력의 바탕이 되었던 바로 그 곳을 보존해 후세에 남겨주고 싶은 마음, 포터의 고향은 아직도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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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아웃케이스 없음
가스 제닝스 감독, 주이 데샤넬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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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영화 

 

이 영화는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한다. 3년 전쯤이었나?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게 된 것은 길고도 독특한 제목과 두꺼운 두께에 끌렸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들고 2주 정도 들고 다니면서 읽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조금 놀라면서 약간은 날 놀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다 안 읽지 않았냐면서 웃던 동기에게 분명히 다 읽었다고 얘기했지만 사실 뒤쪽의 3분의 1은 결국 못 읽고 반납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보던 그 두꺼운 책은 5권으로 나누어서 나온 것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6번째 권이 나왔다고 하는데 영화화가 되기 전에 작가가 사망했는데 어떻게 뒷얘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후대인들의 헌정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읽지 못한 책의 뒷부분에 다시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새삼 감독의 능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남자 주인공인 아서는 어눌해 보일 정도로 순수하지만 우직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이다. 여자 주인공인 트리샤는 인형 같은 외모인데 독특하고 신비한 느낌이 난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강희와 비슷한 느낌이다. 요즘 즐겨보는 미국드라마 본즈의 여주인공과 자매 사이라고 해서 반가웠다. 두 자매 모두 투명한 녹색을 띈 푸른빛의 눈동자가 참 매력적인데 프랑스와 아일랜드 계통이라고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묘사한 대목에 초록색의 눈이 매력적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는 푸른색도 아니고 녹색의 눈이 어떻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하고 의아했는데 아마 이 여주인공의 눈빛과 같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본문에는 스칼렛 오하라의 조상이 아일랜드에서 이주했다는 대목이 있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은 초록색이라는 것도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난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아일랜드 계통 미녀들의 특징인가?  


몇 백 쪽이나 되는 책을 채웠던 영국식 농담과 넘쳐흐르던 상상력, 삶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 전부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그 점에서는 책보다 영화가 더 나은 점이 있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한 번 비틀지 않고 다시 한 번 또 비틀어서 이미 수많은 풍자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던 사람이 실제로는 가장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내용은 오히려 많은 책에서 본 설정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쥐에게 의뢰받아 거대한 지구를 만드는 장면(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 산맥 만드는 건 그렇다 쳐도 커다란 호스로 대양에 물 채워 넣는 장면은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는 총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총구가 겨누어진 여성이 “여성은 모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런 총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여성들 마음에 참 드는 반전이다. 인간의 성격을 주입받은 로봇이 오히려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장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로봇이 불완전한 것은 결코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므로 완전한 로봇은 인간의 감정을 가진 로봇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오던 인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분이다. 
 

사실 이 책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장난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장난 같지 않게 한다. 무슨 소리냐면, 지구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나오게 한다. 우주 공간에 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구가 철거된 것이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은하계 대통령이라는 자는 지구 철거에 대한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서명을 해 버렸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미국의 영웅들이 그렇게 구하려고 애쓰던, (그리고 결국 구하고야 마는) 이 지구가 하루아침에 어이없는 이유로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남은 지구인들은 빌붙을 데 하나 없는 그야말로 우주의 히치하이커가 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히치하이커와 다를 게 어디 있을까 싶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우리의 인생길을 여행길로, 우리를 여행자로 비유하고 있지 않나? 
 

이 영화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더글라스 애덤스의 매력이겠지만) 장난처럼 툭툭 내던지지만 사실 까집고 뒤집어보면 그 안에 화두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골똘히 생각에 빠지게 하고, 답을 찾는 노력을 하게하고, 마침내 감사하게 한다. 
 

결국 인생에 대한 답은 없다는 것, 그리고 장난처럼 던져진 빌 나이히의 대사, “정답을 찾는 노력을 하지 마라.”(“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였나? 아무튼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인생의 의미, 삶의 궁극적 정답, 이딴 게 다 무슨 소용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열심히 주어진 것에 행복해 하면서 최대한 만족하면서 살면 되지, 안 그런가? 
 

사실 마지막에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장면, 특히 캥거루가 뛰던 그 화면, 지구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담은 수많은 카메라 컷들이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비록 화면 안에서 다 벌어진 일이지만 두 시간 만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온전하게 돌려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 어차피 알지도 못할 인생의 의미 따위를 찾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인류는 몇 천 년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해왔지만 여태껏 답을 알지 못했다) 삶을 있는 힘껏 껴안고 즐겁게 살다 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P.S. 관공서에서 필요 이상의 서류를 남발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점심시간은 지켜야 하는 것 등은 아마도 영국인으로서 영국의 일상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 같다. 이것을 풍자로까지 보면 좀 그렇고 아마도 개그콘서트 수준처럼 우리 안에 있는 어쩔 수 없는 모순적인 모습을 그려낸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늘 차를 찾는 모습이나 소심한 중산층 남자 주인공의 모습도 영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다. 

 

P.P.S. 컴퓨터가 내놓았던 어이없는 답 ‘42’는 어디서 튀어나온 숫자일까 궁금했는데 이후 수많은 SF물에서 이유 없이 등장했다고 한다. 애초에 이런 숫자는 왜 생각해낸 걸까. 이렇게 의문투성이 영화여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단관 개봉했다고 한다. 원래 우리나라가 SF가 잘 안 먹히는 나라란다. 유일하게 스타워즈 시리즈가 별 재미를 못 본 나라라고. 

 

P.P.P.S. 오프닝에 등장하는 물고기와 함께 나오는 노래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활기차고 경쾌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와 화면 덕분인지 책을 읽을 때는 생뚱맞게 이 장면이 왜 있나 생각되었는데 영화를 보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젠 책을 읽으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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