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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포터 - 아웃케이스 없음
크리스 누난 감독, 이완 맥그리거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피터 래빗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더라고 따스한 파스텔 톤의 갈색 토끼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보았을 것이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고 보온병에, 담요에, 액자에, 연습장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너무 많은 물건에 등장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냄비 받침도 피터 래빗이다.
나도 어릴 때 이 캐릭터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 곰돌이 푸에는 안 끌렸는데, 피터 래빗, 제미마 퍼들덕, 벤자민 바니 등은 자꾸 눈길이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이 용 삽화답지 않게 사실적인 캐릭터의 모습에 끌렸던 것 같다. 사람처럼 의인화 되었어도 털 한 올 한 올이 실재와 흡사했던 까닭에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비커밍 제인과 여러 모로 비교할 수 있다. (비교할 수 있다고 해서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여성 작가가 주인공이고, 배경은 영국이며, 결혼이 전부라고 생각되던 당시의 여성의 삶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영화적인 재미는 비커밍 제인 쪽이 훨씬 더 크지만, 둘 중 한 명의 삶을 택하라면 미스 포터의 쪽이 더 끌린다.
비커밍 제인이 제인 오스틴의 인생 중 여성으로서 가장 설레고 반짝반짝 빛났을 순간만을 포착해서 아름답고도 안타깝게 그렸다면, 미스 포터는 사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전기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 처녀 시절, 결혼하고 나서의 삶(자막으로 처리되었어도 그 정도면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다)을 전부 알 수 있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조금 따로 노는 느낌을 주고, 이완 맥그리거가 너무 조연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주지만(비커밍 제인의 제임스 맥어보이의 존재감과 비교해 볼 때), 그래도 영화는 절대로 지루하지 않다. 영화에서 재현된 당시의 영국 풍경이 따뜻하고,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와의 호흡도 좋다. 특히 르네 젤위거는 상상의 세계와 동거하는 면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자칫하면 정신병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캐릭터의 순수함을 부각시켜서 전혀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사랑스럽게 보이게 한다. 이미 얼굴의 자글한 주름을 감출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많고 장난스럽고 수줍어하고 설레는 소녀적 감성들이 오물거리는 입매에,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에, 부풀었다 꺼졌다하는 볼에 흘러난다.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순수하고 의지가 강한 노처녀 동화작가로 대안을 마련할 수 없는 적역이다. 노만 워른 역의 이완 맥그리거는 자상하면서도 순수한 소년같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포터와 워른의 사랑이 이미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하는 소년, 소녀처럼 맑고 투명하다.
포터의 상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물 친구들은 어른이 된 관객도 설레게 한다. 어릴 때 나도 내 주변의 모든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매일매일 새로웠고 신기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설레지 않는 것, 24시간 동안 순간순간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였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궁금한 점이 없어진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작가 포터가 주변의 땅을 사들여 개발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어릴 때 자신의 상상력의 바탕이 되었던 바로 그 곳을 보존해 후세에 남겨주고 싶은 마음, 포터의 고향은 아직도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