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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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말 그대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과 '바람의 딸' 시리즈를 읽었기에 의외다, 라고 생각했다. 또 편견...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평범한 에세이 집이라고 생각하니 굳이 읽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자주 가는 북카페에서 (이상하게 북카페에서는 소설보다 수필 종류가 잘 읽히더라) 몇 번 흘깃흘깃 보다가 오늘에서야 집었다.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사랑', 말 그대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부분도 있었다. 저자의 대학시절 첫사랑 이야기,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이란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불평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던 요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토요일 오후, 아무리 책상에 앉아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뜨고 다잡히지 않던 이 시간, 나에게 이 책은 딱 맞는 책이었다. 

외국계 홍보회사의 잘나가던 시절, 오지 여행가, 국제 구호 단체 팀장을 거친 그녀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다. 책 말미에 적었듯이 자신의 분야에서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무릎팍 도사에 나오기 전부터 그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소위 젊은이들의 멘토이자, 특히 여대생들에게는 닮고 싶은 명사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그녀이기에. 그리고 나서 그녀를 지지하는 분위기 반대쪽에서 그녀와 그녀가 속해 있는 단체에 대한 비판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고 묘사했으나 육로로 다녔을 뿐 실제 걷지는 않았다, 교통편이 연결된 곳만을 다녔으므로 엄밀히 이야기해서 '오지'를 다닌 것도 아니다, 위험한 지역에서 금지된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마치 대단한 모험인 것처럼 묘사해 뒤의 여행자들에게 잘못된 상식을 심어주었다, 실제 월드비전이라는 단체는 선교가 중심이지 구호가 중심이 아니다, 등등.  

좀 더 책임감 있고 겸손했으면 좋겠다, 는 바람, 응당 당연하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여행기를 썼을 때만 하더라도 일단 우리나라에 그녀와 같은 사람은 무척 드물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긴 하다. 사실 나도 '걸어서' 시리즈를 고등학교 때 접했을 때는 '이게 진짜야?'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처음부터 겸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7막 7장을 쓴 홍정욱 씨도 이제 와서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너무 자신감이 넘쳤었다고 민망하다고 느껴진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넘치는 자신감, 어찌 보면 교만으로까지 보이는, 그러나 그런 때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고 아마 그 시절의 한비야도 그런 시절이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면 좀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더구나 그녀는 홍보회사에서 일했었고, 그 누구보다 '홍보', '자기PR'에 능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또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하고, 구호 활동을 하고, 책을 쓰면서 자신의 그 능력으로 추진체를 달았을 것이다. 과장되었다,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시각도 이해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여행이나 구호 활동에 정통한 것은 아니며, 아직도 못 사는 외국을 돕자고 하면 '그럴 돈 있으면 우리나라 사람부터 도와라'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현실에서는, 분명 그녀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본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좋은 일에 동참하게 하는 것에는 그녀와 같은 방식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두번째 비판, 그녀가 속한 단체 이야기.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판단하기가 힘들다. 솔직히 그녀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얼마든지 쉴드(?)를 쳐주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닌 것 같다. 월드비전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고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는 거의 한비야를 보고 기부했을 것이므로 그녀또한 이 책임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실제 성금의 대다수가 구호가 아닌 선교에 쓰이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녀를 믿고 싶다. 실제로 그렇다면, 또 그녀가 알면서 그것을 묵인했다면, 참 마음 아플 것 같다.

분명 그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도 들리고 과대포장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그녀는 큰 귀감을 주었고 지금도 영감을 주고 있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가 쿠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선 우리의 것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가장 영향을 미친 발명은 쿠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선정되었다. 왜냐고? 엄청난 속도로 성경을 찍어 당시 유럽의 농민들에게 보급함으로써 그들이 교회의 부패에 눈을 뜨게 하고, 유럽 전체에 그 분위기가 급속하게 퍼짐으로써 종교 개혁을 일으켰고, 나아가 유럽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비야 이전에, 동시대에, 이후에 그녀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여행가, 구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한비야처럼 대중적으로 어필하지 못했고 그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으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지도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비야를 높게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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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청춘! A+보다 꿈에 미쳐라
박원희 지음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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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아마 내가 그녀보다 나이가 더 어렸으면 이러지 않았을까? 나와 같은 나이의 사람이 참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금나나도 그렇고 박원희도 그렇고 하버드 합격 전 후로 책을 냈다. 둘 다 전의 책은 어느 정도 거부감이 들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후의 책은 놀랍게도 속이 꽉 찼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박원희의 이 책은 금나나의 책보다 더 충격적이다. 

만약 내가 그녀처럼 민사고에 갔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 세계 최고의 하버드 생들도 취업 걱정에 떨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자위해도 되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부끄러웠고, 반성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이런 삶을 한번쯤은 꿈꿔보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도 저도 아닌, 한마디 저마디에 흔들리는 지금의 내 모습, 나는 무엇때문에 흔들리고 있고 그 흔들림은 당위성을 가지고 있나? 고민만 할 뿐, 행동은 없고, 실천도 없고, 그냥 사는 존재인가 나는? 아니 이 모든 것이 전부 배부른 고민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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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발의 지혜문답 - 황제의 고민을 척척 해결한 인도의 명재상
이균형 지음, 정택영 그림 / 정신세계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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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치면 황희 정승과 같은 분이네요~ 가볍게 읽기 좋은 책입니다. 

시험기간에 잠시 머리 식힐 겸 읽었는데 삽화가 짤막짤막하면서도 그림도 예쁘고 

깊은 고뇌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순간 터지는 유머있는 부분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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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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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젊은 시절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그 거대(巨大)가 실은 언제나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우리에게 체험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고기압은 맑은 햇살과 쨍한 바람으로, 저기압은 눈이나 안개, 구름으로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저기압 속을 걸어가고 있어, 라거나 고기압을 맞고 있어, 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은 그 두 기압 중의 하나를 벗어날 수가 없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우산이나 외투, 따뜻한 찻잔이나 장갑 등이 사실은 다 그 고기압과 저기압의 파생물이기도 한데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것들, 이를테면 역사, 이를테면 지구, 환경, 정치 등의 파생물인 풀잎, 감나무, 라디오 프로그램, 반찬, 세금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였다.

 

-이 책이 아주 가벼운 깃털이지만 그 깃털 하나로 전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여자가 남자를 친구로 여기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인 거 같아. 하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응해줄 택도 없으니까. 또 하나는 정말 필이 안 와서……. 그리고 남자가 여자 친구를 가지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야. 혹시 언젠가 애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구절을 꼽은 이유는……. 읽는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참 깔끔한 분이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 도무지 자기가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소 안 하는 버릇과 깔끔한 장소에서 생활하던 버릇이 상충함으로써 오는 괴로움, 나도 늘 겪는 일이지만 전혀 이런 생각은 못하고 있던 차에 ‘맞아, 맞아’하며 공감하게 되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공지영은 이런 사소한 일상을 잡아내어 나와 같은 독자의 웃음을 유도한다. 내가 공지영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 같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웃게 해 줄 수 있어서.

 

“무엇이 그리 겁날게 있어? 까짓 거 상처밖에 더 받겠느냐고. 그리고 인생에 상처도 없으면 뭔 재미로 사냐 말이야.”

 

-내 인생을 소설에 비교한다면 작품성은 몰라도 재미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나 간판? 미쑈, 당기쇼가 보여”

 

-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증후군이라…….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냈나? 또 작가의 주변에는 어쩜 이렇게 흥미진진한 사람들이 많은지.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는 것의 차이 중 뚜렷한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은,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군가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물으면, 응, 나는 인생의 비밀을 하나하나 깨닫는 재미로 살고 싶어, 라고 대답하곤 하던 내게 패랭이꽃은 많은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 아이들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때 나는 이 교훈을 떠올려본다. 그 사람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살아 있기에 보기에도 싫고 쓸모없고 심지어 버리면 더 좋을 군더더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벽한 모양을 가지고 완벽한 초록으로 무장한 비닐 화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푸라기 같은 결점들을 그 사람이나 아이들이나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청사진은 그러므로 내게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이 부분. 내 삶의 군더더기,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 더 좋을 부분에 치여 허덕이는 바로 지금의 나에게는 눈물이 날 만한 구절이었다.

 

나는 어릴 때 내 성이 너무 특이해서 싫었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일로 눈에 뜨이는데 성까지 특이하니까 어린 마음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구절을 읽고 나니 묘하게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났다. 남편의 수입이 괜찮은 날은 문패에 새긴 이름이 힘차게 보이고, 수입이 줄어들면 똑같은 이름이 쪼그라든 것처럼 보인다는 구절. 어릴 때는 그런 구절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얼마 전에 읽을 때에서야 알게 되었다. 힘들고 창피한 일을 겪을 때는 눈에 띄기 싫어 죽겠는데 가뜩이나 이름까지 튀어 숨지 못하게 되는 것 같은 두려움, 수치……. 막연히 세상이 나의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꼈던 어릴 때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뿌듯해했지만 요즘은 자꾸 내 이름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름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흔치 않은 성을 가진 작가는 자신의 등장인물에 ‘김’, ‘이’, ‘박’과 같은 성을, 평범한 성을 가진 작가는 ‘독고’, ‘황보’, ‘석’과 같은 성을 주인공에게 부여한다고 한다. 음……. 그래도 공지영씨가 자신의 이름 덕을 조금은 보고 있는 것처럼(작가가 되고 난 이후에 틀림없이 어느 정도는 이름에서 오는 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하고 막연히 바래본다.

 

나는 아직도 모임 끝에 지금부터 공지…….하면 깜짝 놀라는 버릇이 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공지 사항이라는 말 때문이다.

 

-나 또한 이름으로 인해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감했다. 작가처럼 특정 단어에 매번 아닌 줄 알면서도 반응하는 것도 똑같고. 특이한 이름 때문에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간 법원에서조차 사인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가슴 아팠지만, 마지막에 웃고야 말았다는 부분에서조차도 묘하게 공감이 갔다. 그 순간에 터져 나왔을 웃음이 어떤 빛깔일지 왠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이들은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오래전 한 친구와 멀어지게 된 것도 아마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성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친구와 마지막 통화에서 내가 했던 모진 말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히 나, 네 이야기에 이제 지쳤어. 설사 나쁘게 악화되었다 해도 좋으니 새로운 레퍼토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

 

-한동안 연락이 끊기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찾은 친구는 또 그 레퍼토리를 반복했고 결국 공지영은 또 한 번 모진 말을 하고 친구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겼다고 한다. 이 구절은 왜 내 마음에 들었을까? 나 또한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서?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럴 경우엔 정말 싫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이런 면을 발견했기 때문에?

 

심리학에 따르면 언제나 남의 탓을 하는 성격장애와 언제나 자기 탓을 하는 신경증적인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거칠게 말하면 주로 남자에게 성격장애가 많고 여자에게 신경증적인 요소가 많은데, 병원을 찾는 이들은 주로 신경증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둘 다 병적인 상태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면담 치료에 꽤 효과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탓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한 지 하루가 지났거나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쯤 지나면 남을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다.

나 역시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그 쉽고도 유명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까지 정말 많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남의 눈의 티끌을 보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보라”는 성경 말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의 들보 사이사이로 남의 티끌이 그렇게 잘 보이더라는 한 친구의 말. 모든 유머는 정곡을 찌르기에 이 말은 아마 당시에 상당한 유머였을 것이라고. 알고 실천한다는 것이란……. 아는 것도 한 단계이지만, 알고 실천하는 것도 또 하나의 단계이다.

 

“너는 그 상처들을 어떻게 다 이겨냈니?”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상처들을 이겨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해질 수 있는 경로를 좀 개발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친구의 이 말을 떠올리곤 했다. 신기하게도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라는 걸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처음에는 이것이 갑자기 마라톤을 뛰려는 것처럼 어림도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런데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도 어찌됐든 그래 보려고 애쓰면 신기하게도 근육이 생기듯이 조금씩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힘든 친구에게 가끔 말하곤 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처음부터 잘하는 것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날마다 연습하면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어려운 역경들을 벌떡 들어 올리는 널 발견하게 될 거야. 장미란 선수의 어깨가 처음부터 그 무거운 걸 들어 올렸던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그리로 가보는 것……. 조금씩 어쨌든 그쪽으로 가보려고 애쓰는 것. 그건 꼭 보답을 받아. 물론 네 자신에게 말이야.”

살아 있는 것일수록 불완전하고 상처는 자주 파고들며 생명의 본질이 연한 것이기에 상처는 더 깊다.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 싫지만 하는 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그것을 껴안고 또 넘어서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기는 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상처는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상처를 버리기 위해 집착도 버리고 나면 상처가 줄어드는 만큼 그 자리에 들어서는 자유를 맛보기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신의 특별한 축복이 아닐까도 싶다.

 

-내 잘못으로 인한 상처가 아닌데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나를 궁극적으로 움츠리게 하더라.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무조건 당당하라고 옆에서 얘기해 주는 사람도 있는데 점점 안으로 웅크릴 수밖에 없어서 더 화가 난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똑같이 꼬집었을 때 노인보다는 어린아이에게, 동일하게 손톱자국을 낸다면 낙엽보다는 새싹에게 더 큰 자국을 남긴다는 말.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파릇파릇하고 어리고 가능성이 많고 주어진 날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 상처받은 만큼, 최소한 내 자아는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한때 삶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나는 평화를 간절히 갈구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 생이 안정을 찾고 나자 나는 자유를 원했다. 처음 자유를 원한다,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솔직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피에 젖은 맨발 같은 것이었다. 자유라는 게 말이 그렇게 그게 쉬운가 말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자유라는 걸 얻는다는 것은 결국 핏빛 깃발을 휘날리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유란 결국 평화의 다른 이름이며 정말로 예수의 말대로 그건 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진리란 결코 옛것의 이름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하다가 처참하고 사형당한 사람이고 보니, 내가 처음에 생각한 피에 젖은 맨발이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과 상처를 버리는 곳에 조금씩 고이는 이 평화스러운 연둣빛 자유가 너무나 좋다. 편견과 소문과 비방과 비난 속에서도 나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을 늘 쐬고 있으며 내게 덕지덕지 묻은 결점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고통 속에서도 내게 또 다가올 그 자유가 그립고 설렌다.

 

-난 솔직히 이렇게까지 자유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다. 발에 피를 적시면서 자유를 갈구할 바에는 구속을 원하지 않을까. 하지만 상처를 받고, 나름대로 그 상처를 극복까지는 아니어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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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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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자주 가는 북카페에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완득이' 덕분이었다. 

'완득이'는 이 출판사의 청소년문학대상 1회 수상작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2회 수상작이다. 

그 이후로 또 3회, 4회, 계속해서 나왔는지, 지금도 나오고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으나 내가 접했던 '완득이'는 '다문화 가정' '장애인' '편부모' 등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들을 성장하는 완득이를 통해 유머러스하면서도 뭉클하게 그려내어 대체 이 작가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등단했는지 책표지를 한 번 더 들쳐보게 했던 작품이다. 

'완득이'가 정말 좋았던 것은, 장애를 가진 아버지, 지능이 떨어지는 삼촌, 동남아에서 온 어머니 등 정말 '비뚤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환경의 완득이가, 전교 1등하는 같은 반 여자아이나 부모님 잘 계시는 일반 가정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 특유의 무심함이나 당돌함을 보인 완득이가 10대의 발랄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며 커가는 모습이 대견했고 또 역설적으로 보통 아이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더 눈물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다를' 뿐이지 '틀린'게 아니므로 완득이에게 유별난 관심을 보여줄 필요도 없으며 동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음을, 그저 일반적인 10대로 때로는 야단칠 때도 있고, 때로는 격려해주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점에서 '완득이'와는 좀 많이 다르다.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작가의 배경(?)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던 '완득이'와는 달리, 소설 제목에서부터 판타지 요소를 가지고 들어간다. (위저드라니...) 전체적인 톤도 많이 무거운 편이다. 악몽, 저주, 부두인형, 자살, 강간 등 읽다보면 숨이 막히는 구절도 종종 있다. 술술 읽혔던 '완득이'와는 달리 좀 힘겨웠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완득이의 가정이 어떻게든 마지막에서는 봉합되며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반면, 남들 보기에 꽤 괜찮아 보이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위저드 베이커리로 기어들 수 밖에 없는 소년은 끝내 위저드 점장 이상의 어른을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찾지 못한다는 점도 큰 차이였다. 

이 두 차이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완득이'가 쉽게 읽히고, 쉽게 공감이 가는 반면, '위저드'는 술술 읽기는 힘겹고, 소년의 고통은 너무나 막막해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대신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힘겨웠을 두 소년의 아픔 중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쪽은 '위저드'다. 비록 그 고통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질 것. 선택에 따른 두 결말을 보여주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몸으로 터득했기에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판타지 요소를 썼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작가가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판타지라는 손쉬운 길을 택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한참 아프게 성장하고 있는 10대에게, 운이 나쁘게도 가정이나 학교 그 어디서도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기댈 어른도 없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분명히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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