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20세기폭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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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출연진이 어떤 사람인지 한 번 찾아보았다.

 

우마 서먼이야 원래 알고 있던 여배우였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두 주연은 이 영화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가 나온지는 20년이 다 되어간다. 1996년작이니까.

 

사실 이 영화는 아주 예전에 영화 프로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개봉 직후는 아니었던 것 같고, 영화에 대해 심층적으로 소개해주는 코너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그때 굉장히 인상깊었나보다. 당시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사용했던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이 그대로 생각이 났다. 남녀 주인공이 욕조에서 통화를 하는 장면이나 우마 서먼이 DJ인 척 연기하고 책상 밑으로 실제 DJ가 숨어있다가 "너, 결국 말하지 못했구나"하고 말하는 장면 등.

 

감독을 검색해보니 최근 활동에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서 어랏! 했더니 직접 연출을 맡은 것은 아니고 제작을 했다고. 감독의 연출작은 거의가 로맨스, 그리고 코미디이다. TV와 영화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 같은데 계속해서 로맨스와 코미디 물을 내놓다 보니 이런 괜찮은 영화도 한번씩 나오는 모양이다. 우마 서먼을 제외한 남녀 두 주인공 제니언 가로팔로, 벤 채플린 둘 다 인상이 참 좋고 매력적이라서 검색해 보았는데 아직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세계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미국에서는 꾸준히 인기가 있고, 나름대로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가는 것 같았다.

 

 

플레이보이 걸, 그리고 타임지 우먼. 둘 중 어떤 사람을 나는 택할 것인가, 혹은 당신은, 다른 사람은? 외모와 내면 중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로 볼 수 있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비록 금발 미녀가 덜 지적이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우정을 중시할 줄 알고, 한순간 실수할지언정 바로잡을 용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솔직하면서도 순수해서 매력적이고, 성공한 커리어우먼은 매사에 이성적이며 철두철미하지만 정작 본인의 애정 문제만큼은 서툴고 어색한 모습이 사랑스럽다. 남자 주인공은 정말 여심을 저격하는 외모와 목소리를 가졌고.

 

 

솔직히 보는 내내 그래도 이건 영화에 국한된 이야기 아닐까, 눈이 돌아갈 정도의 금발 미녀와 사귀는 기회는 일생에서 자주 오는 순간이 아닐 텐데 특히나 젊은 남자라면 더더욱 그녀를 택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감독이 남자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다만, 우마 서먼과 비교해서 그렇지 제니언 가로팔로는 딱 얼굴만 보아도 충분히 예쁘고 귀엽다. 하긴 우마 서먼 정도 되는 여자와 대비 시켜야 예쁘지 않다는 표현을 그나마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기억하기로도 예전의 영화 프로에서 나레이션을 맡았던 남자 연예인이 "지적이고 대화도 잘 통하고 유머 있고... 얼굴도 예쁜" 이라는 수식어를 제니언 가로팔로 앞에 달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솔직히 앞에 그녀의 장점을 늘어놓았던 형용사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녀의 외모가 예쁘다는 표현을 했다는 것은 정확히 기억난다. 어쩌면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미국이라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라면, 나오기 힘든 이야기이지 않을까?

 

 

이 영화의 배경이 그러고보니 20년 전이다. 그래서인지 화면이 굉장히 정겹다. 어렸을 때 우리말로 더빙된 외화를 보는 그런 반가운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신기한게 등장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전혀 촌스러워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하다. 남녀 주인공 전부 다. 실제로 멋부리지 않으면서도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옷을 추구한 탓일까, 아니면 그저 뿜어져 나오는 매력으로 옷차림에 미처 신경이 다 가지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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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취미의 권유 - 무라카미 류의 비즈니스 잠언집
무라카미 류 지음, 유병선 옮김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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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뭐지? 이 불편한 기분은?

 

책을 읽는 내내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공감이 가지 않았던 적도 처음이다. 왜 이렇지? 뭐가 문제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답을 알 수가 없었는데, 읽고 나서 만 하루쯤 지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방법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 느낌을 이 책에서 받았다. 책을 낼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많고, 그렇다면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마스터 키가 무엇이라고 생각할 사람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유독 이 책에서 내가 불쾌함을 느꼈던 이유는 '본인의 분야도 아닌, 겪어보지도 못한 분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하는' 그 태도에 질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직장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즉, 월급쟁이 생활을 해 본 적이 없거나, 하더라도 길게 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비즈니스 잠언집을 낸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좀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읽어보니 경영자를 초대하여 대담을 나누는 TV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뭐? 그게 어쨌다고? 어떻게 그 단편적인 경험만 가지고 이런 책을 내는 대담함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는 비록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 시간이 무라카미 류보다 훨씬 적겠지만, 최소한 월급쟁이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는 그 보다는 더 잘 안다고 생각된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은 사랑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저런 연애 서적과 연애 고수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연애 안내서를 낸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진심으로 이 사람에게 우리나라 드라마 '미생'을 권해주고 싶다.

 

짤막짤막한 글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글이 너무 짧아서 차마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진다. 궤변이라도, 좀 길게 서술하였더라면 꼼꼼히 읽고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겠는데, 이 책은 성의마저 없어 보여 조금 화가 난다.

 

일단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취미의 권유'를 보면,

 

취미란 기본적으로 노인의 것이다. 너무나 좋아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몰두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그것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일로 삼는 프로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중략) 나는 취미가 없다. 소설을 쓰고, 영화와 쿠바 음반 제작도 하고, 전자메일 매거진을 편집하고 발행하지만 이는 모두 돈이 오가고, 계약서를 쓰고, 비평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중략) 취미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건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환희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감과 충실감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 안에 있으며, 거기에는 늘 실의와 절망도 함꼐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서만 이런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하도 궤변이라 어디서부터 따져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취미란 노인의 것이며, 젊은이들이 몰두하는 취미가 있다면 아마추어가 아니라 일로 삼는 프로가 되라는 말. 만약, 어떤 일에 푹 빠질 정도로 열광하지만 도저히 그것으로는 밥벌이를 할 만큼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실력을 늘리기는 힘들 것이고, 그럼 취미를 접어야 하나? 어쩌다 작가는 운이 좋게도 본인의 특기와 취미와 능력이 일치하여 취미를 일로 삼는 행운을 누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 중 정말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예전부터 꿈꿔왔기 떄문에 하고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작가가 하고 있는 그 '일'이라는 것이, 소설을 쓰고, 영화와 음반을 제작하고, 전자메일 잡지를 만드는 그 '일'이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일과 무관한 '취미'가 없다면 존재할 수도 없는 직업 아닌가? 소설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직업적인 이유로 소설을 읽는 사람과, 단순히 소설 읽는 게 즐거워서 읽는 사람과 그 비율을 비교해본다면 후자가 압도적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영화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쿠바 음반도, 전자메일 매거진도 마찬가지. 이 취미들을 할 때마다 성취감과 충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떄문에, 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환희와 흥분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들의 취미를 위하여 그들의 지갑을 열기 때문에 무라카미 류의 '일'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집중해서 소설을 쓰고 나면 충만감과 성취감, 그리고 정신의 안식을 얻는다. 소설을 마친 뒤에는 휴양지를 찾아서 푹 쉬고 싶다거나 긴장에서 벗어나 풀어짐을 맛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휴양지로 달려가는 것은 소설 집필 말고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대이다. 긴장을 풀고 집중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실제 일에서 온오프(on-off)의 구별이 없다. 온 힘을 다하여 맡은 일을 타협없이 끝내겠다는 욕구는 있을지언정 얼른 대충 마치고 즐기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 않는다. "충실하게 일을 하려면 일에서 벗어나 심신을 풀어 주는 오프의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건 무능한 비즈니스 맨을 겨냥하여 상업주의가 퍼뜨리는 거짓말이다.

 

 

이 대목을 읽다가 열받아서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책을 던지고 싶었다. 대체 충실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일에서 벗어나 심신을 풀어 주는 오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얼른 대충 마치는 것과 일대일로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소진한 후, 다시 재충전하기 위해서 오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직접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한 글을 종종 보다보면, 소설가의 장점이자 단점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은 일상에서도 늘 소설로 연결할 수 있는 글감을 무의식적으로 찾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노는 것이 아니라는 글을 본 기억이 있고, 그와 비슷한 글들을 꽤 여러 편 보았다. 즉, 어딘가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작업실이 곧 집이고 집이 작업실이므로, 먹고 자고 일하는 공간이 늘 같기 때문에 on-off가 쉬운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주장을 비롯해 작가의 상당수의 이야기들은 전부 워커홀릭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회사의 경영자 입장에서 사원들에게 훈시하는 내용의 느낌이 든다. 이쯤 읽다 보면 드는 생각. 대체 이 사람의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 이름만 들었을 뿐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이 사람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갈까?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작가의 인상이 달라진다면 기분 좋을 것 같지만, 달라지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그저 무례하고 소통할 줄 모르는 중년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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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medy06 2015-05-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무라카미류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인데 저만 공감이 안 되나 싶었습니다.. 소설도 읽어볼 예정인데 좀 나을런지..;

마고할미 2015-05-29 21:34   좋아요 1 | URL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저는 1~2권 정도 읽었던 것 같고요, 워낙 어릴 때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불쾌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설은 젊을 때 쓴 소설이었던 것 같고, 현재 나이가 예순이 넘었더군요.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성향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연배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청년같은 생각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심하게 대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세 살 더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종종 함께 언급이 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비교가 힘든 대상이라고 봅니다. 하루키는 매년 노벨상 후보에 오르고 언젠가는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작가이고, 류의 위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죠. 아무튼 저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일부러 시간을 들이거나 돈을 들이며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런 글을 공개적으로 책으로 펴내 쓴다는 것은 대중을 우롱하고 독자를 기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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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소설을 연재했을 시기에, 원래 연재하는 소설 말고 따로 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깝다. 그러니까 실제로 연재하는 소설을 주중에 비유한다면, 작가가 연재와는 별개로 그 시절에 쓴 글들은 주말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저 그 당시 작가의 글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책으로 나왔다면 더 이상 '일요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이 나왔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글들은 작가에게 주말이 아닌 주중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감안한다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나치게 가볍다. 만약 이 글들을 책이 아닌 인터넷 상으로 접했더라면, 처음 이 내용들을 담고 있는 도구 그대로 접했더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SNS는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활자화되어 작가의 이름을 달고 책으로 나왔을 때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여러모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들은 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좀 막막하다고 말했었죠?

그때는 랩탑에서 글자 크기를 11포인트로 설정해 놓아요.

그런데 어느 정도 소설이 풀리면 10포인트로 다시 바꾼답니다.

소설이 막막할 때는 글자조차 흐리게 보이다가

자리를 잡아가면 그제야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

간사하게도 그 단계가 되면 11포인트이기 때문에 화면이 벌어지는 느낌이고 내용까지 산만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어떤 기회에 영화배우를 실제로 보게 되면 먼저 드는 생각,

'초점이 잘 맞은 것 같다.'

뭐랄까, 선명하게 보이는 거죠.

예쁘고 멋진 사람을 볼 때에는 뭔가 환하게 잘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요.

머릿속에 설정돼 있는 아름다움의 틀에 딱 맞아떨어지기 떄문에

흐트러지지 않은 선명함으로 찍혀나오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모호하고 흐리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

혹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보였던 거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니 작년에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었던 모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 중인 여배우의 실물을 처음 봤을때, 참 시원했다고. 마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나 경치를 보는 것 같았다는 그런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표현은 달라도 결국 비슷한 것을 느끼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 간에 습관적으로 트위터에 접속.

거기 올라온 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폴 매카트니 사망설,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나도 곧바로 답글을 올렸거든요.

-아, 7년 전 타코마에서 본 공연의 감동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링고 스타만 남았군요.

그러자 사망설을 전한 분이 다시 답을 했어요.

-진심으로 슬퍼하시니 힌트를 드리겠는데요, 오늘이 며칠입니까.

 

며칠 지난 다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나는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봤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곧바로 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그럴 때가 있어요.

소설 안에다 아는 것을 모조리 다 써놓고

퇴고를 하며 혼자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소설 쓸 때 방해가 되는 것들.

-술과 장미의 나날, 개콘과 하이킥, 영화, 당연히 책, 소풍 욕구, 타락 본능, 새련된 태타 등등.

거기에 '자랑'을 포함시켜야겠어요.

 

 

태타라는 단어가 있었구나. 찾아보니 아주 게으르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태하다는 것과 타성에 젖었다는 말을 합쳐놓은 정도의 말이 아닐까. '세련된'이라는 수식어도 참 잘 어울린다.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이거 아마도 산도르 마라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바람직한 독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라는데, 최소한 꼬리를 물지는 못하더라도 저 앞에서 살랑거리는 꼬리의 끝자락은 보면서 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산도르 마라이의 책을 한 권이나마 읽은 게 스스로 대견했다.

 

오래전, 지원자와 청원자 과정에 있는 예비수녀님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지도 수녀님 말씀이,
-우린 생활조건이 단순해서 몸도 단순해요. 그래서 아프면 의사들이 진단내리기 쉽다고 해요.

 

 

생활도 단순하니 몸도 단순하고, 진단을 내리는 과정도 단순하구나. 말장난 같지만 당연한 일이다. 생활이 복잡하면 술, 담배, 과식, 카페인, 스트레스, 수면 부족... 온갖 병인들이 전부 뒤엉키는데 생활이 단순하면 이것 저것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요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단순하게 살 것을 부르짖는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올해부터는 더 단순해져야겠다. 


 

 이건 어떨까요. 「내가 살았던 집」의 구절인데.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꿈이 있다는 건 쉬어갈 의자를 하나 갖고 있는 일.

 

꿈=쉬어갈 의자. 보통 꿈을 이루기 위해 죽기살기로 뛰거나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꿈이 있어서 쉬어갈 수 있다라... 그런데 맞는 것 같다.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꿈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스스로 넌더리를 내게 되겠지. 이루어지면 더 좋겠지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이 있다면, 그 꿈은 그저 이 정도에 불과한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될 것이고, 숨통을 트이게 할 것이고, 하늘을 바라다 보는 여유를 가져다 주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물을 두 번 보게 된다. 한 번은 내 눈으로, 또 한 번은 그 사람의 눈으로. 내 관점과 감각이 두 겹이 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관점과 취향이 점점 가까워진다.

 

 

두 겹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진다는 표현이 참 좋다.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지만, 또 다른 프레임으로도 세상을 기꺼이 바라볼 마음이 있다는 것은.

 

 

작가는 직업상 문자에 민감하죠.

현수막이나 포스터, 텔레비전 자막, 간판......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문자에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틀린 말이나 맞춤법이 거슬려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구요.

물론, 재미있고 좋은 문자라면 가장 먼저 효험을 느끼겠죠.

 

뮤지션에게서 들은 얘기인데요.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면 평소보다 템포가 좀 빠르게 느껴진대요.

어? 뭐가 문제지? 생각해보니 자신의 몸이 아직 덜 깨어난 거였다구요.

음악이 빨라진 게 아니라 내 몸이 느리게 깨어나는 중......

그렇군요. 뮤지션은 소리에 민감하군요. 당연한 일.

유리창의 무늬에 민감한 건......유리창닦이일까요?

 

나는 또 무엇에 민감할까.

무엇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어 행복과 슬픔과 사랑을 가까이 끌어당겨 주는 걸까.

 

 

나도 맞춤법을 인지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줄임말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도 싫어한다. 그렇다면 나도 작가가 될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일까?

 

 

누가 말했냐에 따라 엄청나게 뜻이 달라져버리는 말이 있다. 나 소설 못 써요. 이 말이 농담으로 들렸으면 좋겠다. 가끔 내 인생이, 독선적이면서 내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과의 기나긴 문학 토론이 될 것 같은 우울한 생각이 든다.

 

 

아, 이 문단에서는 단 한 문장도 뺄 수가 없다. 단 한 문장도 보탤 필요가 없다.

 

 

시간을 좀 주세요.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배선이 엉켜 있어 생각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많다 보니 그중에는 분명 이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도 있을 거예요.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선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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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 [할인행사]
스티븐 달드리 감독, 줄리안 무어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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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안 것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였다.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만일 고등학교 시절 대학입시를 위해 수많은 시들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커서 자발적으로 시를 읽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짧지 않았던 시 목마와 숙녀는,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제대로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막연하게 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슬픈 느낌이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느껴졌고,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국적인 이름이 발음할 때마다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버지니아 울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어떤 책을 남겼는지 대강은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미국 LA의 로라 브라운, 2001년 미국 뉴욕의 클래리사 본, 이렇게 서로 다른 시공간의 세 여자의 이야기를 교차해가며 보여준다. 세 이야기에 공통으로 흐르는 자살, 불치병 또는 난치병, 동성애 등의 소재들 때문인지, 결국 세 여자는 마치 동일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삶 속에서 질식하는 듯한 여자들의 인생과, 그것을 헤쳐나가는 것에 대한 한 가지 주제가 풍성하게 와 닿는다고 할까. 진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20년대의 여류 작가나 50년대의 가정 주부 뿐 아니라 2000년대의 출판 기획자도 느낀다는 것이 참 새롭다. 단순히 시대가 바뀌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늘어났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 여성들 주변에 있는 남성들이 전부 여성을 위하며, 일정 정도 자신의 삶을 희생하거나 올인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참 흥미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들의 파트너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가진다니 말이다. 역시 결혼 생활을 해 봐야만 이 영화도, 원작 소설도, 버지니아 울프의 서적과 그녀의 인생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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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본 기사 중 '지대넓얕'이 있었다.

지대넓얕.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줄임말로 채사장이라는 분이 팟캐스트로 먼저 시작한 아이템이었고, 이어서 책으로도 출판된 것에 대한 기사였다. 팟캐스트라는 것을 이용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고, 화제가 되는 팟캐스트는 나중에 출간이 되는 경우 활자의 형태로만 접했기 때문에 이 기사는 여러 모로 나에게 유용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넓고 얕은'이라는 말.

 

이 세상이 얼마나 스페셜리스트를 요구하는가. 나 또한 특정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거기에 다다르기까지는 쉽지 않겠다는 절망감, 그러면서도 특정 분야에서는 무조건 전문가만 찾고 전문가의 권위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는 마음, 등등으로 가득차 있는 요즘이었는데 대놓고 '좁지는 않지만, 깊지도 않은'이라는 설명에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과정은 최대한 넓은 분야에 대해 얕게나마 알고 있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맡겨두면 될 일이고,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전문가를 알아볼 만한 얕은 지식, 그게 아닐까.

물론 '지대넓얕'을 읽어보지도 않고 내 맘대로 생각한 것이다.

 

이 책이 아마도 과학 분야에서는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싶다. 책이 꽤 두꺼운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것의'라는 당당하다 못해 거만해 보이는 제목에 다소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원제는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한글로 옮기면서 빠져버린 short의 의미를 되살린다면, 그야말로 '넓고 얕은 지식'을 다룬 이야기인 것이다. 과학적 분야에 한정된 '지대넓얕'인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글쓴이는 양성자며 단백질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쿼크, 준성도 생소한 단어였고 협곡의 바위 층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아내는 방법에도 무지했다. 정말 아는 것이 거의 없던 작가가 직접 전문가를 찾아내며 끈질기게 질문하고, 글을 쓰는 과정을 3년을 한 끝에 나온 책이다. 빌 브라이슨은 이미 유명한 작가이다. 그야말로 스페셜리스트인 그가, 초등학교 4~5학년 시절 과학 교과서를 끝으로 과학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다가, 전혀 생소한 이 분야에서 제너럴리스트로 도달한 것이다.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기본적으로 어느 한 분야에서 통달한 사람은 전혀 모르는 새로운 분야에서도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추는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는 생각, 그리고 어린 시절에 접한 책, 음악, 영화, 경험 등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그리고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등등이다.

 

당연하지만 이 책은 과학의 어느 한 분야에 대한 전문 서적이 아니다. 과학과는 젼혀 무관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어른들, 혹은 아직 뇌가 말랑말랑한, 그래서 아직 어느 쪽에 자신이 관심이 있고 흥미가 있는지 잘 모르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읽으면서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반가움이 있었고, 파편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을 연대기적으로 이해하면서 새롭게 생기는 즐거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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