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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맨 앞장에,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적혀 있는 글귀가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영국 런던의 저자가 노자의 도덕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라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의 원제가 Straw dogs, 바로 짚으로 만든 개라고 한다.
2008년까지 런던 정경대학의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했다는 이력을 보면, 동양 사상에도 꽤 정통한 학자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하고, 감사의 글에 아내 미에코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있는데, 아마도 아내는 일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간, 2장 기만, 3장 도덕의 악덕, 4장 구원받지 못한 자들, 5장 비非진보, 6장 있는 그대로 이다. 책의 맨 앞장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 또한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책은 절대로 두껍지 않기 때문에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이 책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나면 드는 생각이, 그럼 대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냐, 진보라는 것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면 모든 인간은 지금부터 성장을 멈추고 본능에 충실하며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혹은 그저 그냥 다같이 손잡고 뛰어내리라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다 보고 나서 떠올랐던 영화는 <인터스텔라>였다. 포스터의 그 글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라는 바로 그 문구. 어쩌면 그 영화는 이 책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겠지. 인간은 답을 구할 것이고, 그 답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하며, 가장 밑바닥에는 인류애가 깔려 있음을 전제하는 그 영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의문이 들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이 가능했던, 흑인 노예제를 인정했던, 그것 때문에 전쟁마저 일어났던 미국의 현 대통령은 유색 인종으로 재선에도 성공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가장 큰 미덕이 살림과 육아였던 우리나라 여자들의 경우, 활발한 사회 진출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미국에서 인종 차별의 문제는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범세계적인 연구에서 여권이 후진국에 속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상승하고 있지는 않지만, 때로는 후퇴한 적도 있어서 그 그래프는 삐뚤삐뚤할 지언정 방향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유색 인종, 그리고 유럽의 여성들에게 수십 년 전, 그들의 선조에 비해 당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지, 만약 수십 년 전에 당신이 태어났더라면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지 묻는다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보건대, 48년생, 영국 출신, 백인 남성이라는, 자신의 삶에서 어쩌면 단 한번도 마이너리티에 속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이력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 나온 수많은 논거들은, 사실 이 작가의 사상의 정반대의 논지를 가지고 누군가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에도, 그 논거로 충분히 이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 작가의 논거가 약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의 경우처럼,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수많은 자료와 연구를 통해 키워드를 도출해 낸 방식으로 이 책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작가는 처음 이 책에 착수할 때부터, 아니, 몇 년 전부터 이미 자신의 생각을 정해놓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온갖 근거를 끌어다가 연관성을 도출하여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세상을 살았던 철학자라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모를 수가 없으리라. 속된 말로, 이꼴 저꼴 안 본 게 없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상가들, 소설가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냈다. 마치 진흙 속에 있는 진주를 파내듯이. 솔직히 말하면, 이 작가도, 책도 얄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