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맨 앞장에,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적혀 있는 글귀가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영국 런던의 저자가 노자의 도덕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라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의 원제가 Straw dogs, 바로 짚으로 만든 개라고 한다.

 

2008년까지 런던 정경대학의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했다는 이력을 보면, 동양 사상에도 꽤 정통한 학자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하고, 감사의 글에 아내 미에코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있는데, 아마도 아내는 일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간, 2장 기만, 3장 도덕의 악덕, 4장 구원받지 못한 자들, 5장 비非진보, 6장 있는 그대로 이다. 책의 맨 앞장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 또한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책은 절대로 두껍지 않기 때문에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이 책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나면 드는 생각이, 그럼 대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냐, 진보라는 것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면 모든 인간은 지금부터 성장을 멈추고 본능에 충실하며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혹은 그저 그냥 다같이 손잡고 뛰어내리라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다 보고 나서 떠올랐던 영화는 <인터스텔라>였다. 포스터의 그 글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라는 바로 그 문구. 어쩌면 그 영화는 이 책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겠지. 인간은 답을 구할 것이고, 그 답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하며, 가장 밑바닥에는 인류애가 깔려 있음을 전제하는 그 영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의문이 들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이 가능했던, 흑인 노예제를 인정했던, 그것 때문에 전쟁마저 일어났던 미국의 현 대통령은 유색 인종으로 재선에도 성공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가장 큰 미덕이 살림과 육아였던 우리나라 여자들의 경우, 활발한 사회 진출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미국에서 인종 차별의 문제는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범세계적인 연구에서 여권이 후진국에 속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상승하고 있지는 않지만, 때로는 후퇴한 적도 있어서 그 그래프는 삐뚤삐뚤할 지언정 방향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유색 인종, 그리고 유럽의 여성들에게 수십 년 전, 그들의 선조에 비해 당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지, 만약 수십 년 전에 당신이 태어났더라면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지 묻는다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보건대, 48년생, 영국 출신, 백인 남성이라는, 자신의 삶에서 어쩌면 단 한번도 마이너리티에 속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이력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 나온 수많은 논거들은, 사실 이 작가의 사상의 정반대의 논지를 가지고 누군가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에도, 그 논거로 충분히 이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 작가의 논거가 약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의 경우처럼,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수많은 자료와 연구를 통해 키워드를 도출해 낸 방식으로 이 책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작가는 처음 이 책에 착수할 때부터, 아니, 몇 년 전부터 이미 자신의 생각을 정해놓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온갖 근거를 끌어다가 연관성을 도출하여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세상을 살았던 철학자라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모를 수가 없으리라. 속된 말로, 이꼴 저꼴 안 본 게 없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상가들, 소설가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냈다. 마치 진흙 속에 있는 진주를 파내듯이. 솔직히 말하면, 이 작가도, 책도 얄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메리칸 허슬
데이비드 O. 러셀 감독, 크리스찬 베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1. 배우들 연기는 최고다. 포스터에 나와 있는 저 다섯 명의 연기 중 단 한 명도 모자람이 없다. 우열을 가리기도 힘들다.

2.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실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을 이용해서 뇌물 사건을 해결하는, 미국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이 사건은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작가나 감독의 개입이 과도하게 들어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사건의 특성상, 분명히 미화나 왜곡 시비에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분명히 미진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다. 모든 악인은 벌을 받고 만다는 할리우드 특유의 시원하고 통쾌한 결말을, 이 영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고, 상응하는 벌을 받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제레미 레너가 연기한 시장이 아니라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FBI에게 반감이 더 커지는 것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4. 사기꾼 커플로 나오는 크리스찬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도. 분명히 돈이 필요한 간절한 사람들의 돈을 떼먹는, 마치 좀벌레에 비유해도 어색하지 않을 사람들인데, 이 영화 전체에서 드물게 인간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머릿속에 새겨져 있을,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이 영화가 딱 들어맞지 않기 때문일지도.

5.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한번쯤 볼 만은 하지만, 다시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부가 영상에서 삭제된 몇몇 신이 들어있었는데, 삭제 안 하고 포함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었다. 여러 모로 인상적이면서, 동시에 여러 모로 아쉽기도 한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인용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제목 때문에 끌렸다. Why didn't they ask Evans? 에반스는 누구이고, 여기서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고로 죽은 한 남자가 죽기 전 남긴 의문의 문장, 마지막으로 저 말을 들은 한 청년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어릴 적 친구이자 대부호의 딸과 함께 둘은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일단 크리스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늘 익숙한 탐정들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소설은 집중하기가 조금 힘들기도 하다. 거기에 에반스는 대체 소설 중반까지 가도 등장하지 않으며,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사건이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일어나 컴컴한 동굴을 손전등에 의존하여 계속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 동굴은 복잡하게 꼬여 있거나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가 끝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계속 나아가는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왠지 우리가 책의 앞뒤 표지 사이에 들어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이 쓴 이야기 한가운데에 끼어 있는 거지. 매우 기묘한 느낌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약간 섬뜩한 느낌도 있어. 오히려 나는 책이라기보다 연극이라고 말하겠어. 우리는 마치 제 2막의 중간에 무대로 나온 것 같고, 그 연극에서 맡은 역이 전혀 없으면서도 그런 체하지 않아야 하는 거야. 게다가 더욱 힘든 것은 제 1막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지."

극 중 두 인물의 대화이다. 추적하면 할수록 막막해질 시점, 두 젊은이의 대화는 딱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래, '그들은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말이지. 보비, 우리가 많은 것을 발견하고 점점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는데도 부구하고 그 수수께끼의 에번스에게는 전혀 가까워지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아?"

"나는 에번스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어. 에번스가 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 그 사람이 비록 출발점이 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으리라는 느낌 말이야. 이것은 어느 왕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 곁에 웅장한 궁전이나 사원을 짓는 웰스의 소설과 같은 거야. 그것이 완성되자 그 옆에는 작고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엇지. 그래서 그는 '저것을 치워라.'하고 명령해. 그렇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무덤 그 자체였지."

"가끔 나는 에번스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워져."

이 생각도 마찬가지. 마치 에번스는 맥거핀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라면 충분히 그런 트릭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고. 그러나. 역시, 에번스는 단순한 맥거핀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트릭이 가능한 것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나라이기 때문이겠지.

 

"맥베스 부인이 맥베스에게 온갖 살인을 저지르게 한 것은 인생이, 그리고 부수적으로 남편과의 사이가 매우 따분해졌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그는 자기 부인을 따분하게 하는 유순하고 얌전한 남자였음이 분명해. 그렇지만 난생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나자,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면서, 이전의 열등감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는 거지."

이 구절은 앞 뒤 배치된 내용이나 책 전체에서의 위치를 보았을 때 나중에 반전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맥거핀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 중 손꼽힐 정도는 아니지만, 한번쯤 읽어보기에는 충분히 재미있다. 범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가, 다시 범인인가? 하는 과정도, 그리고 거의 실수하지 않는 능숙한 탐정만을 보다가 편견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위험해질 뻔한 평범한 이들이 하나하나 진행시키는 과정을 보는 것도 여태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흥미로웠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심각한 말더듬이인 친구 배저의 도움을 받는 과정은 마치 <앵무새 죽이기>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도 있었고. 그러고보니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설이 <목사관 살인사건>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목사관이 이 목사관인가?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2009년에 나온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의 후속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책에는 한국의 영화감독 6명을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는데, 홍상수, 봉준호, 류승완, 유하, 임순례, 김태용 등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감독들이었다. ‘부메랑 인터뷰’는 그 형식이 상당히 독특한데, 인터뷰하는 그 감독의 영화 속 대사들에서 끌어낸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중 “이름이 뭐예요?”라는 대사를 빌려 홍상수 감독에게 영화 속 인물들의 작명 방식을 묻는 식이다.

 

내가 이동진의 첫번째 인터뷰집을 본 것이 올해이다.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2015년에 와서야 2009년 당시의 인터뷰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사이의 5년 동안, 6명의 감독들은 어떻게 변모하였나를 따지면서 읽게 되었다는 것.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나이지만, 그 사이에 각 감독들의 궤적을 살펴보면 여섯 명의 감독들이 모두 그 사이에 나름대로 진화를 하였다는 점. 다작으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경우, 그동안 내가 본 작품으로만 한정해도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우리 선희>, <자유의 언덕> 등 네 작품이나 되고, 봉준호 감독은 900만 관객을 돌파한 <설국열차>를 세상에 내놓았다. 류승완 감독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부당거래>를 선보였고, 다시 그의 필로그래피 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한 <베를린>으로 700만명 고지를 밟았다. 유하 감독은 <하울링>과 <강남 1970>을 선보였고, 임순례 감독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과 <제보자> 등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 사이를 오가며 꾸준한 작업으로 단연 여성 영화인 중 단연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김태용 감독은 바로 그 영화, <만추>로 평단의 호평과 함께 평생의 동반자까지 얻었다. 

 

그 사이에 모든 감독이 새롭게 영화를 찍었다. 누군가는 감독 경력 최고의 작품성을 평가받는 영화를 그 기간에 내놓기도 했고, 누군가는 감독 경력 최다관객작을 얻기도 했다. 향후 이 감독들이 또 어떻게 진화되어 있을지 생각하면 흐뭇할 일이다.

 

후속 시리즈인 이 책에서는 총 세 명의 한국 감독이 등장한다. 박찬욱, 최동훈, 이명세. 756쪽이었던 첫번째 책보다 100여쪽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다루는 감독의 수도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감독 한 명에게 해당된 페이지는 더 늘어난 셈이다. 두번째 인터뷰집인 이 책도 2년 반 전에 나온 책과 동일한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상대편에 앉아 있는 바로 그 감독이 만든 영화의 대사에서 질문을 가지고 온다. 감독들의 모든 작품을 순서대로 다시 보고 질문을 한다. 평균 10여 시간 동안 대답을 나눈다. 신작뿐만 아니라 데뷔작, 문제작 등 전작을 다루며 감독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인기리에 방송중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은 초대 손님으로 작가가 나올 경우, 그의 소설 속 문장을 그대로 따와서 작가에게 질문을 한다. '적문직답'이라는 코너인데, 예를 들면 소설가 은희경에게 <태연한 인생>에서 나온 문장을 약간 변형하여 최근 젊은 작가들 중 쓸 내용이 고갈되면 여행을 다녀와서 거기에 대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식이다. 아마도 순서상으로 이 책의 첫번째 시리즈가 나온 게 <빨간책방> 전일 테니까, 그 영향으로 만든 코너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최동훈 감독을 좋아하고, 또 그의 모든 작품을 다 보았기 때문에 이 책이 좀 더 좋았던 이유는 있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중간에 종종 길을 잃고 멍해지곤 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이 지치지 않기 위하여, 영화 대사에서 질문을 따왔다는 방식은, 독자 입장에서는 중간에 갑자기 뚝뚝 맥이 끊기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번째 인터뷰집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 책을 보면서 작가에게 느꼈던 그 경외심이, 이 책에서는 더 증폭된다고 할까. 일회적인 일로 그치지 않고, 그 지난한 과정을 다시 기획하고 실행하여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 사이에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첫번째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2009년 6월 25일.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날짜가 2013년 1월 10일. 초판 1쇄 인쇄가 2013년 12월 25일. 발행과 인쇄 사이에 1년 가까이 시간이 있었다는 것도 좀 의아한데 프롤로그에 작가가 밝힌 2년 6개월이라는 시간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 추세라면 세번째 인터뷰 책은 2017년 쯤에야 나올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기에는 다룰만한 감독의 수가 적어서 성사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온다면 나는 당연히, 반드시 그 압도적인 양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읽을 테지만. 

평범한 사람이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드라마틱한 상황에 휩쓸리게 된 것 자체가 비슷해요. 저는 제가 영화 일을 하게 된 것부터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모진 실패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도 저로서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느꼈죠. 전 무난하게 살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또 큰 성공도 했죠. 참으로 진폭이 큰 삶을 살게 됐는데, 이건 어렸을 때 예상했던 제 인생과 너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느끼는 혼란이 있는 거죠. 뭔가 자꾸 주저하거나 회피하려고 하고, 어떤 일이 닥치면 그냥 자연스럽게 상황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데,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으로 스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다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으로 나중에 판명이 나면 합리화를 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끌어들여서까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상현과 저의 공통점이죠. 실제 제 모습과 상현이 가장 비슷하다고 느꼈던 장면은 화장실에서 상반된 이야기로 하나의 결론을 끌어내려고 궤변을 늘어놓을 때예요.

저 역시 오랜 세월 고생했던 시절이 있었죠. 단지 흥행이 잘 안 되거나 작품에 대한 비평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영화 자체를 찍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왔으니까요. 앞으로도 언제 또 그런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르고요. 언젠가 그런 상황이 오긴 올 텐데 말이죠. 과거에 대한 그런 기억과 미래에 대한 그런 전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분야 종사자로서 뜻이 맞고 일해본 경험에 의해 우정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더 친하고 그들과만 교유하고 그러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싶어요. 안 하려고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듯하구요. 그게 영화나 쇼 비즈니스 세계의 특성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일단은 서로가 워낙 까다로운 사람들이라서 맘에 맞는 상대를 만나 친해질 기회 자체가 적어요. 그러다 보니 맘에 맞고 유능하기까지한 사람을 만나면 오래도록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작동하는 듯해요. 그렇게 하면 이 좋은 시절이 오래갈 것 같은 마음이라고 할까요. 어떤 불안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이 사람들 말고 다른 그룹에서 내가 통할까, 환영받을 수 있을까, 새로운 사람과 만나면 여태까지 이루어진 것들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은 불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위대한 영화의 경우에는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영감도 얻을 수 있는 반면, 보는 사람을 너무 위축시키고 좌절케 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으로 꼭 좋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요즘도 저는 서울아트시네마에 자주 다니는데, 예를 들어 회고전에서 파졸리니의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같은 놈은 뭐 하러 영화 만드나` 싶어집니다. `저런 영화들이 이미 있었는데 뭘 더 하겠다고 고생하고 있나` 싶은 거죠. 그런데도 자꾸 또 보게 됩니다. 그건 한 명의 창작자로서 충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한 명의 관객으로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이동진_재능 없는 예술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찬욱_아뇨, 그렇지 않아요.
이동진_그러면 재능이 없어도 충분히 직업적인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박찬욱_네, 그래요.
이동진_예술이 가장 평번한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라면, 영화라는 예술품을 만드실 때 감독님은 어떤 자세로 출발하십니까.
박찬욱_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자세입니다. 스스로가 예술가라는 생각보다는 영화감독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면서 촬영 현장이 직장인 만큼 업무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고 내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 거죠. 종종 실패하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 투자한 사람이 후회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남의 돈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고, 또 돈을 받고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자로서의 초소한의 직업윤리를 늘 생각합니다. 또한 제 사적인 생활이 이 직업과 너무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죠.

처음에는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어요. 감독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제 성격 자체가 카리스마가 없어서 감독에 어울리는 성품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요. 그 대신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체호프의 작품을 포함해서 단편 희곡들을 선택해 한국식으로 각색하려고 했죠. 그때부터 시나리오 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도전했는데 전부 다 떨어졌어요. 어쨌든 당시에는 되든 안 되든 두 달에 한 편씩 장편 시나리오를 썼어요. 이후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은 수업료가 공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도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범죄의 재구성>을 만들기 4년 전, <눈물>에서 임상수 감독님 연출부 생활을 하게 된 거죠.

이동진_삶에 대해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호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최동훈_그 대사가 표면적으로 의미하는 바와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사람이란 살면서 일희일비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어쩌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견해는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라요. 제가 제 인생에서 처음 배웠던 사자성어가 `새옹지마塞翁之馬`였는데, 그 말은 결국 인생이 무섭다는 걸 알라는 거잖아요? 그럴 때 저는 오히려 인생이 무서우니 좋아할 때라도 좋아하면서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고 살자는 거죠. 그래야 좀더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창호의 그 대사는 사실 일희일비하자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평탄하게 살고 싶다는 거니까요.

이동진_지금까지 만드신 네 편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동원한 관객 수를 합치면 모두 28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감을 느끼실 때가 있습니까.
최동훈_그럼요. 항상 느껴요. 위기감이 저의 근본적인 힘이거든요. 저는 위기감과 불안감 없이 어떻게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저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제 삶의 원동력이 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성격은 아주 활달하고 긍정주의자에 가깝지만 말입니다.
이동진_무엇이 가장 불안하신가요.
최동훈_역사가 화무십일홍이花無十日紅 라는 진리를 알려주잖아요.
이동진_달도 차면 기운다는 건가요?
최동훈_그런 거죠. 내가 이제까지 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걸 쓸 수 있는 작가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요. 저는 유럽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확실히 할리우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거든요. 감독으로서 저는 제 취향이 들어간 재미있는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계속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불안한 거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는 총 아홉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황정은의 특징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리듬감이 느껴지고, 다음 이야기가 자꾸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어서 읽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다만 끝나고 나서 사유하는 시간이 오히려 길었던 것 같다.

 

재미있다. 이것은 확실하다. 재미있고, 이 작가는 묘사를 잘 한다. 하지만 서사는 부족하다. 기대되는 작가다. 묘사가 관찰에서 비롯된다면, 그래서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대상이라도 묘사는 달라지는 것이라면, 확실한 것은 황정은은 관찰하기 위해 서 있는 자리의 위치가, 서 있는 모습이, 관찰하는 도구가, 많은 작가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읽으면서 다소 불편하다고 느꼈다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익숙하지 않지만, 상투적이지 않기에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다만, 소설 속에서 그리는 그 이미지라는 것들이, 여러 군데에서 중첩되는 느낌이 든다. 다른 책이기는 하지만, '낙하하다'의 몇 년째 낙하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구멍에서 한동안 낙하하여 지구 밖으로 뚫고 나간 앨리스가 떠오르고, 자연스레 그녀의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떠오른다. '양산 펴기'에서의 양산은, 바로 뒤의 소설인 '디디의 우산'의 우산과 시각적인 이미지가 연결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황정은은 단편보다 장편이 더 좋은 것 같다. 여기 단편집의 이야기들 중에서도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몇 몇 있었다.

 

야행(夜行)
대니 드비토
낙하하다
옹기전(甕器傳)
묘씨생(猫氏生)
양산 펴기
디디의 우산
뼈 도둑
파씨의 입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