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인용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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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 때문에 끌렸다. Why didn't they ask Evans? 에반스는 누구이고, 여기서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고로 죽은 한 남자가 죽기 전 남긴 의문의 문장, 마지막으로 저 말을 들은 한 청년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어릴 적 친구이자 대부호의 딸과 함께 둘은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일단 크리스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늘 익숙한 탐정들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소설은 집중하기가 조금 힘들기도 하다. 거기에 에반스는 대체 소설 중반까지 가도 등장하지 않으며,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사건이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일어나 컴컴한 동굴을 손전등에 의존하여 계속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 동굴은 복잡하게 꼬여 있거나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가 끝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계속 나아가는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왠지 우리가 책의 앞뒤 표지 사이에 들어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이 쓴 이야기 한가운데에 끼어 있는 거지. 매우 기묘한 느낌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약간 섬뜩한 느낌도 있어. 오히려 나는 책이라기보다 연극이라고 말하겠어. 우리는 마치 제 2막의 중간에 무대로 나온 것 같고, 그 연극에서 맡은 역이 전혀 없으면서도 그런 체하지 않아야 하는 거야. 게다가 더욱 힘든 것은 제 1막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지."

극 중 두 인물의 대화이다. 추적하면 할수록 막막해질 시점, 두 젊은이의 대화는 딱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래, '그들은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말이지. 보비, 우리가 많은 것을 발견하고 점점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는데도 부구하고 그 수수께끼의 에번스에게는 전혀 가까워지지 못한 것이 이상하지 않아?"

"나는 에번스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어. 에번스가 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 그 사람이 비록 출발점이 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으리라는 느낌 말이야. 이것은 어느 왕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 곁에 웅장한 궁전이나 사원을 짓는 웰스의 소설과 같은 거야. 그것이 완성되자 그 옆에는 작고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엇지. 그래서 그는 '저것을 치워라.'하고 명령해. 그렇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무덤 그 자체였지."

"가끔 나는 에번스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워져."

이 생각도 마찬가지. 마치 에번스는 맥거핀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라면 충분히 그런 트릭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고. 그러나. 역시, 에번스는 단순한 맥거핀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트릭이 가능한 것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나라이기 때문이겠지.

 

"맥베스 부인이 맥베스에게 온갖 살인을 저지르게 한 것은 인생이, 그리고 부수적으로 남편과의 사이가 매우 따분해졌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그는 자기 부인을 따분하게 하는 유순하고 얌전한 남자였음이 분명해. 그렇지만 난생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나자,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면서, 이전의 열등감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는 거지."

이 구절은 앞 뒤 배치된 내용이나 책 전체에서의 위치를 보았을 때 나중에 반전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맥거핀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 중 손꼽힐 정도는 아니지만, 한번쯤 읽어보기에는 충분히 재미있다. 범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가, 다시 범인인가? 하는 과정도, 그리고 거의 실수하지 않는 능숙한 탐정만을 보다가 편견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위험해질 뻔한 평범한 이들이 하나하나 진행시키는 과정을 보는 것도 여태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흥미로웠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심각한 말더듬이인 친구 배저의 도움을 받는 과정은 마치 <앵무새 죽이기>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도 있었고. 그러고보니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설이 <목사관 살인사건>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목사관이 이 목사관인가?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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