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완전판) - 구름 속의 죽음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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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을 떠올렸다. 1995년 개봉작인 그 영화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포도밭의 풍경이 아름다워 지금까지도 몇 몇 장면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영화다. 전혀 연관이 없는 데도 '구름 속의'로 시작하는 구절만 보아도 그 영화가 자동 재생될 정도이니 내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끝까지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내내 로맨틱한 기운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물론, 크리스티의 상당수 소설처럼 이 소설에도 로맨스는 나온다. 하지만 왠지 사족처럼 느껴지던 멜로 부분이 이 책에서만큼은 왜 그렇게 흐뭇한지 모를 일이다.

 

비슷한 제목의 영화와 소설. 영화 제목에서의 구름은 실제 구름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책 제목에서의 구름은 좀 더 사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살인은 비행기 안에서, 그러니까 지상에서 한참 위인 장소에서 비행 중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기차, <나일 강의 죽음>에서는 배, <구름 속의 살인>에서는 비행기. 그야말로 육해공 모든 교통 수단이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살인 사건의 장소로 등장하는데, 승객들의 수가 많고, 여행 기간이 길기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차나 배에 비해서 비행기라는 장소는 자칫하면 사건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가 누군가. 역시 추리 소설의 여왕답게 일견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고, 예상치 못하게 전개하며, 마지막에 의외의 반전까지 선사한다. 각각 1934년, 1937년, 1935년에 쓰인 이 작품들은 다들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지만,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대중에 다가온 것이 1910년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행기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신문물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는 요즘으로 치면 얼리어답터의 기질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아원 원장인 안젤리크 수녀와 통화를 했소.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건 정말 낭만적인 일이지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런 문장을 보면 신기술에 대한 크리스티의 관심이나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의 크리스티 작품에 급변하는 영국 사회에 대한 쓸쓸함과 크리스티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마플 양과 푸아로의 노년을 묘사하는 부분이 애잔한 것을 비교하면 흥미롭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는 크리스티의 유머가 돋보이는 부분이 많다. 스스로 여유가 있을 때 유머가 나오는 편인데 집필 당시 크리스티가 개인적으로 행복한 때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쪽은 파리 경시청에서 나온 무슈 푸르니에라고 하네. 우리와 함께 이번 사건을 수사할 거야."

"몇 년 전에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무슈 푸아로."

푸르니에가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무슈 지로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푸아로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로(그는 지로를 '인간 사냥개'라고 부르곤 했다.)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터라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무슈 푸르니에도, 무슈 지로도 왠지 낯익은 이름이다. 아니면 그냥 단순한 착시 현상일까? 특히 무슈 지로는 분명히 다른 소설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크리스티는 이런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소설 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는 한다. 아마도 이 전집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한번 더 정주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시가 대통을 구입했다고 했지? 빌어먹을 추리소설 작가들 같으니....... 항상 경찰을 무슨 바보 취급이나 하고, 우리 수사 방식도 엉터리로 적어 놓는단 말이야. 그 자식들 소설에서 경감이 총경에게 말하는 투로 내가 상관을 대한다면 내일 당장 모가지가 달아날걸. 아무것도 모르는 삼류 작가들. 이거야말로 쓰레기 같은 삼류 작가들이 생각해 낼 만한 머저리 같은 살인 사건이야!"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용의자 중 한 명이 바로 추리소설 작가인데, 그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상은 썩 좋지 않다는 점이다. 크리스티 자신이 추리소설 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학 개그 같기도 하다.

 

"그것도 간교한 술수인 게 틀림없어. 오늘 법정에 가져온 대통만 해도 그래. 그게 이 사람이 2년 전에 산 건지 어떻게 알겠나? 내가 보기엔 모든 게 수상쩍네. 범죄나 추리소설 따위에 묻혀 사는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어. 그런 걸 읽다 보니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들어차게 된 거야."

"작가라면 그런 생각만 하는 게 당연하지."

푸아로가 말했다.

 

추리소설 작가를 희화화하는 대목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크리스티는 왜 이런 장면을 의도적으로 넣었던 것일까?

 

"작가인 당신은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슈. 당신은 글로 감정을 분출할 수 있지요. 적들에게 펜의 위력이라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푸아로가 말했다.

클랜시는 의자를 앞뒤로 조용히 흔들었다.

"난 이번 살인 사건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떄 있었던 일을 그대로 소설로 쓰고 있거든요. 물론 가공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목은 '항공우편 미스터리'라고 붙일 생각입니다. 승객들도 그대로 묘사할 거고요. 제때 끝낼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릴 겁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의 힘을 빌어 크리스티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이런 부분도 있다.

 

"무슈 푸아로,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소설을 쓸 때는 누구를 범인으로 만들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지요. 난 진짜 탐정만큼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거든요."

 

이런 장면을 쓰면서 크리스티가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가기도 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또 있다.

 

"지금까지 결론은 이렇습니다. 제인 그레이, 가망성 희박, 가능성 거의 없음. 게일, 가망성 희박, 가능성 역시 거의 없음. 커 양, 가망성 거의 없음, 가능성 의심스러움. 레이디 호버리, 가망성 많음, 가능성 전혀 없음. 무슈 푸아로, 범인이 거의 분명함, 탑승객들 가운데 유일하게 심리적 순간을 조장할 수 있는 인물."

재프는 자기가 한 농담에 큰 소리로 웃었고, 푸아로도 관대한 미소를 지었으며, 푸르니에는 약간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후반부에서 전부 밝혀지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살인자는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으로 범위가 좁혀지는 데다가, 아무도 살해 당시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초반부터 어려워진다. 우스운 것이, 밝혀진 정황과 발견된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푸아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배심원들에게도 의심을 받게 되는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 때 범인이 입은 것으로 보이는 차장 유니폼이 푸아로의 짐에서 발견된 정황과는 다르게, 이 경우는 푸아로에 대한 도전도 피치 못할 절박함도 아닌 그냥 우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이 사건의 묘미는 중요해 보이는 사항들이 사실은 약간 바뀌어도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아니며, 사소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알고 보면 큰 힌트가 된다는 점이다.

 

"기적이든 기적이 아니든, 어쨌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겐 의학적 증거가 있고 살인에 쓰인 도구도 있어요. 만약 일주일 전에 누군가가 내게 뱀독이 묻은 독침으로 여자가 살해된 사건을 수사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난 그 인간 면전에 대고 큰 소리로 웃어 주었을 거요. 모욕을 당한 셈이니까!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그렇단 말입니다. 이건 모욕적인 사건입니다."

재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푸아로가 싱긋 웃었다.

"어쩌면 조금 비틀린 유머 감각을 가진 자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살인 사건을 수사할 때는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게 필수죠."

  

당시로서는 첨단 기계였던 비행기, 그러나 살인 도구는 원시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뱀독. 그 어떤 목격자도 없는 사건. 피살자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인데다가 다른 소설에서도 딱히 본 적은 없는 캐릭터여서 흥미로웠다. 적이 많을 것 같은 여인이라서 수많은 용의자가 떠오르겠구나,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도 반전이 한 번 더 등장한다.

 

"경감님, 이번 사건에 관해 듣자마자, 그러니까 런던 경시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자마자 전 곧장 그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서류는 금고에 들어 있었는데, 모두 태워 버린 후더군요."

프랑스 인이 말했다.

"태워 버렸다고요? 누가? 왜요?"

"마담 지젤에게는 아주 충직한 하녀가 있습니다. 엘리즈라고 하는데, 엘리즈는 만일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금고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모두 태워 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답니다. 그녀는 금고 번호를 알고 있었거든요."

"뭐라고요? 그거 정말 놀라운 소식이군요!"

재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시다시피 마담 지젤은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신의로 보답했어요. 마담 지젤은 고객들에게 양심적이고 공정하게 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자비하긴 했지만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아직 젊고 팔팔하기 때문일까. 이 소설 속의 푸아로는 활기차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며, 자신의 입으로 수사방식과 사건 해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미진했던 부분이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는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내가 한마디 할까요, 마드무아젤 그랑디에? 직업상 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 않지요. 나는 먼저 이 사람을 의심했다가 다음에는 저 사람을 의심하는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난 모든 사람을 의심합니다. 범죄와 연관된 사람이라면 결백하다는 게 밝혀질 때까지 모든 사람을 용의자로 간주하지요."

 

이것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푸아로가 기본적으로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최근 들어서야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지요. 이번 사건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아주 오랫동안 범죄를 다뤄왔고, 그래서 사건을 바라보는 나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죠. 살인 사건을 해결할 떄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인을 찾는 거죠."

제인이 말했다.

"정의입니다."

노먼 게일이 말했다.

푸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범인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정의는 물론 좋은 말이긴 합니다만, 때로는 무엇이 정의인지 확실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결백한 사람들의 무죄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사건 해결시 푸아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이상해 보이는 이 사건을 풀어가면서, 푸아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심리에 집중한다. 심리는 크게 두 가지. 첫번째는 살인 현장에 있던, 살인자와 피해자를 재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심리.

 

푸아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왜 아무도 그 살인자를 보지 못했는지, 거기에 심리적 이유가 있으리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당신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번 사건의 경우, 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오, 친구. 그리고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세요. 자그마한 뇌세포를 작동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될 겁니다."

 

두 번째는 당연히 살인자의 심리.

 

"사실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사람들이 직접 털어놓게 하는 거지요."

제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하려고 하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그건 그래요."

제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돌팔이 의사들이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답니다. 환자가 찾아오면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게 만들죠. 두 살 때 유모차에서 떨어졌다느니, 어머니가 배를 먹다가 자기가 입고 있던 주황색 드레스에 과즙을 흘렸다느니, 그리고 한 살 때 아버지의 턱수염을 잡아당겼다느니 등등. 그런 다음 환자들에게 더 이상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치료비로 2기니를 챙기는 겁니다. 그러면 환자들은 흡족해하며 자리를 뜨죠. 그리고 아마도 환자들은 실제로 잠을 잘 자게 될 겁니다."

"정말 엉터리예요."

제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엉터리는 아니랍니다. 사실 그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거든요. 말하고 싶은 욕구,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말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드무아젤. 당신은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나요? 어머니나 아버지에 관한 추억 같은 것 말입니다."

 

멋지게 해결이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통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그 어떤 소설보다 인간의 '심리'에 집중하고자 했던 소설. 평생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크리스티의 소설은 가장 심리적인 부분이 뛰어난 추리 소설로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사건의 트릭, 범인의 정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죽 따라가다 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울 떄가 많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뜨끔했던 부분을 덧붙인다. 비록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지라도, 이런 요소들 떄문에 이 소설이 빛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말과는 달리 자기가 은밀히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지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 있을 겁니다. '난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에 가서 탐험을 해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는 그런 내용의 소설을 좋아할 뿐, 실제로는 편안하고 안전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추리 소설의 틀에 걸맞는 탄탄한 구성,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낭만적인 분위기, 재치넘치고 매력적인 등장 인물, 곳곳에서 드러나는 유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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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권보드래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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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만 훑어보아도 흥미롭다.

 

머리말
서론|연애라는 말

기생과 여학생
구여성과 신여성
연애와 독서
연애 편지의 세계상
육체와 사랑
연애의 죽음과 생

결론|연애의 시대 또는 개조의 시대
보론 1 연애 이전의 연애 : 1900년대식 열정과 자유 결혼론
보론 2 연애 바깥의 연애 : 연애열의 시대와 한용운의 '님'


인용 소설 목록
그림 목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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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을 6개의 주제로 나누었고, 각각의 주제 또한 흥미로워서 꼭꼭 씹어먹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결론과 보론 1, 보론 2, 그리고 '주'에 해당하는 부분만 30쪽이 넘어서 전체적으로 훌륭한 논문을 읽은 느낌이다. 논문이라면 어려울텐데, 이 책의 내용의 핵심이 '연애'라서 머리를 쥐어뜯거나 중간중간 멈춰야 할 만한 주제는 아니다. 마치, 달콤한 케이크의 꼼꼼한 레시피, 혹은 초콜릿의 역사나 아이스크림 일대기 등을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케이크나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그것에 대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 책의 두께는 전부 300쪽이 되지 않는 데다가 사진 자료가 많아서 글자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냥 쉬운 책은 아니다. 다만, 고등학교 때 선택 과목으로 근현대사를 공부했었는데, 당시에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근현대사 교과서는 다른 과목의 교과서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진 자료가 많고,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인데다가, 급변하는 시기라서 흥미로웠다. 이 책을 보면서 오랜만에 그 당시 생각이 많이 나기도 했고, 고등학생들이 한번쯤 읽어보면 당장 성적에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충분한 지적 유희는 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 당시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연애를 다루지만, 책은 다소 건조하고 딱딱한 편인데, 교과서에 비하면 훨씬 말랑말랑하지만 이 시대를 다룬 수많은 책과 다양한 영상물들에 비하면 좀 뻑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왠지 나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에라도 눈을 돌리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고교 시절 이 책을 읽었더라면 훨씬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대학에 온 후 이 시대를 다양한 경로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책에 실린 내용들이 큰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은 <경성스캔들>이라는 드라마. 조선의 마지막 여자라는 별명을 가진 한지민, 기생이었던 한고은, 조선 총독부 관리인 류진, 모던 보이 강지환이 등장하는 드라마로, 극단적인 윤리관이 충돌하고 극단적인 역사인식의 차이가 공존했던 시기를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와, 경쾌하고 발랄한 청춘 로맨스의 두가지로 그려냈는데 서로 다른 요소들이 붕 뜨지 않고 서로서로 잘 융합되어 유쾌하면서도 애잔한, 참 좋은 드라마였다고 기억한다. 바로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그 시대, 그리고 똑같은 주제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연애란, 일종의 수입품이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연애라는 개념도 함께 유입되었고, 이른바 '글로 익힌' 연애가 한국적 상황에 이식되어 가는 과정의 첫단계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상적 아내, 이상적 남편, 그리고 둘이 꾸민 스위트홈은 전근대의 가족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경치도 좋고 깨끗한 집에 피아노 놓고 바이올린 걸고 선형과 같이 살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늘 즐겁게......"(『무정』)라는 풍경 속에 수직적 질서의 자리는 이미 없다. 1910년대 이후 새로 개발된 `행복`이라는 가치는 1920년대에 일반화된 `스위트홈`의 이상 속에서 현실태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연애는 한편으로 비극과 열정을 상기시켰지만, 다른 한편 안락한 이국풍 생활을 설계하게 했다. 이층 양옥에 부부가 단란하게 피아노 놓고 살면서 때로 노래 부르고 때로 함께 시를 읽는 생활이 바로, 1920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꿈꾼 생활이었다. 게급이 발견되고 민족적 현실이 역설되면서도 이 무국적의 동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애정이 충만한 젊은 부부만의 생활-신여성은 그 풍경의 중심이어야 했다. 중등 이상의 교육이라든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패션은 신세계에의 진입을 약속하는 기회에 불과했다.

"애인을 위하여 살고 애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 이 욕망은 1920년대 초부터 `연애`가 감추어 두고 있던 욕망이고 했다. 죽음에 직결되어 있는 열정만큼 개인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없었다. 1920년대 이후 각기 고유한 개성과 천재, 그 근거로서의 정과 내면이 강조되면서부터 생겨난 사랑에의 갈구가 죽음이라는 새로운 유로를 찾았을 때 등장한 결과가 연애 자살이요 정사였다. 열정이 개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죽음이 단독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낭만화되기 시작했을 때 등장한 독특한 결합이 자살과 정사였던 것이다. 외국 소설의 독서를 통해 이 독특한 고안에 친숙해져 있었다는 사정 또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다눈치오의 『프란체스카』나 『사의 승리』는 모두 정사라는 파국을 묘사하였고 아리시마 다케오의 단편 「선언」 역시 폐병으로 함께 죽어가는 연인을 제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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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박은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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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역사를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의 두 가지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을 때, 예전에 거시적인 관점이 지배했던 시절로부터 서서히 미시적인 관심으로 옮겨오다가 지금은 전세가 역전된 것 같다.

 

몇 년 전에 읽은 책 중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이 있다. 책 자체가 굉장히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전의 다른 역사서로는 접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화들이 많아서 조선 시대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 같아서 인상깊었다. 그 책의 저자인 이수광 작가는 역사 소설을 많이 썼는데, 소설을 쓰면서 수없이 했을 자료 조사로 인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수십 년 동안 다져진 필력으로 마치 조선시대 판 <경찰청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 외에도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과 같은 시리즈가 다산 초당에서 연이어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저자의 책들의 제목을 훓어보면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신라를 뒤흔든 16인의 화랑>,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중국을 뒤흔든 27인의 지략가>,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재판 사건>,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비극 애사>등이다. 대략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책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저자는 물론이고 출판사도 다르다. 아마도 이수광 작가의 히트작들에 어느 정도 묻어가려는 의도가 보이며, 실제로 이 책이 나온 것이 드라마 <선덕여왕> 방영 3개월 후라고 하니 출판사 쪽에서 상당히 기획해서 내놓은 책이다. 상당히 기획을 했다는 것은, 노력과 시간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 절대 아니고 딱맞는 타이밍에 출판하여, 책 자체보다 주변의 이런 저런 상황에 절묘하게 탑승하여 간다는 것이다. 즉, 이수광 작가의 책들의 기본적인 퀄리티를 이 책에서 기대하면 안 된다는 말도 된다.

 

물론 고대사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만의 특별한 미덕이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책이다. 이미 드라마를 통해, 또 이전에 출판되었던 다른 수많은 책들을 통해 한번쯤은 반복되었던 내용을 여기서는 효과적으로 편집하였을 뿐이다.

 

이 쪽 분야에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겠고, 책은 정말 읽고 싶은데 이런 저런 이유로 무거운 책에는 손이 안 가는 상황이라면 후딱 읽어볼 만한 책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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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태퍼드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양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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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시태퍼드만 보아서는 지명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암호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크리스티는 책 초반부에 주요 등장 인물과 지명에 대한 확인과 함께 세세한 묘사를 독자에게 선사하여 재빨리 내용에 몰입하게 한다.

 

 버너비 소령은 고무장화를 신고 오버코트의 단추를 목까지 다 채운 후 문 근처 선반에서 강풍 대비용 각등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조 단층집인 방갈로의 앞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카드나 구식 멜로드라마에 묘사된 전형적인 영국 시골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겨우 몇 센티미터 쌓인 정도가 아니라 주위가 파묻힐 정도로 두터운 눈 더미였다. 지난 나흘 동안 영국 전역에 눈이 내렸고 서남부의 다트무어 변두리에 있는 이쪽 고지대에는 1미터도 넘게 쌓였다. 집집마다 가장들은 파이프가 터져서 불평을 터뜨렸다. 그렇다 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배관공을 친구로 둔 사람, 또는 배관공 친구의 친구마저도 지극한 선망의 대상이 돼 버린 형편이었다. 

 

이 책의 첫 문단이다. 호들갑스러운 부사도, 과장된 형용사도 없는 사실적인 문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폭설이 왔을지 대번에 눈에 그려지는 묘사다. 영국인 특유의 침착함이랄까, 작가 혼자 들뜬 것 같은 묘사는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데 크리스티는 늘 담담하게 풍경을 그려내는데도 위압감이나 중압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것 같다.

 

 시태퍼드 하우스는 조지프 트리벨리언 대령이 영국 해군에서 퇴역할 즈음인 10년 전에 지은 저택이다. 재력이 있엇던 그는 늘 다트무어에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작은 마을인 시태퍼드를 여생을 보낼 곳으로 정했다. 대부분 계곡에 몰려 있는 다른 마을이나 농장과는 달리 이곳은 시태퍼드 산의 그늘이 드리워진 황무지 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넓은 택지를 사서 자가발전 설비를 갖춘 데다가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수고를 덜기 위해 전기 펌프까지 설치하는 등 안락한 집을 지었다. 그러고는 투자 방편으로 골목을 따라 한 채당 약 1,000제곱미터씩의 땅을 할애해서 작은 방갈로 여섯 채를 지었다.

 그 방갈로들 중에서 시태퍼트 하우스 정문 곁에 있는 집은 허물없이 지내는 오랜 친구 존 버너비 소령에게 내주었다. 다른 집들은 하나씩 하나씩 팔렸다. 자신이 좋아서든 필요에 의해서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이 집들 말고도 그림같이 아름답긴 하지만 낡은 시골집 세 채와 철공소 하나, 그리고 과자가게를 겸한 우체국이 있었다. 제일 가까운 도시는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익스햄프턴이었다. 그곳까지는 다트무어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운전사들은 기어를 최저속으로 유지하시오'라는 표지가 필요한 한결같은 내리막기로 이어져 있었다.

 

정말 훌륭한 묘사다. 이 정도면 아무리 피곤해도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뒤이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하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히 매끄러우며, 크리스티의 저명한 탐정들이 등장하지 않고 살인 용의자의 약혼녀가 탐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는 신선한 느낌이 있다.

 

 그녀는 죽은 대령을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추리한다는 건 너무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밀리는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자기 판단보다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받았든 자기에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판단이 자기의 것만큼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일을 다루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문단 같은 경우이다. 푸아로라면 이런 고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을 탐정이니까.

 

퇴역 군인이자 상당한 부자인 남자가 살해된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의 재산은 유언대로라면 여동생과 조카에게 나누어 분배될 것이다. 다소 괴팍하기는 해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 때문에, 살인은 원한 관계보다는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마침 유언장에 나와 있는 그의 조카들 중 한 명이 피살자와 당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체포된다. 유약한 용의자와 대비하여, 그의 약혼녀는 의지와 재치를 지닌 여자로, 직접 피살자의 주변을 탐문하며 살인 사건을 파헤치고자 한다. 자신의 약혼자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는, 피살자, 그러니까 약혼자의 외삼촌이 어떤 사람이며 그 주변 인물들은 어떤 사람인지 차근차근 추적해간다.

 

피살자는 트리벨리언 대령이라는 사람. 시태퍼드 하우스와 작은 방갈로 6개의 소유자로 겨울 동안 시태퍼드 하우스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귀국한 윌렛 모녀에게 세를 주었다. 방갈로 6개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다. 1번 방갈로에 사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버너비 소령,  2번 방갈로에 사는 병자인 와이엇 대령, 3번 방갈로에 사는 몸집이 작고 별난 라이크로프트, 4번 방갈로에 사는 거동이 어려운 퍼스하우스와 그녀의 조카 가필드, 5번 방갈로에 사는 시태퍼드 하우스 정원사였던 커티스 부부, 6번 방갈로에 사는 덩치가 크고 조용한 듀크이다. 방갈로는 대령이 살고 있는 익스햄프턴과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살인 사건 당일 버너비 소령, 윌렛 모녀, 라이크로프트, 듀크, 가필드 이렇게 6명은 테이블 터닝(심령의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강령술의 일종으로 참석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손을 위에 올려 놓고 테이블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을 하다가 대령이 그날 살해당했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당시 시간은 5시 25분. 밖에는 어마어마한 폭설. 불안해하던 대령의 친구인 버너비 소령이 폭설을 헤치고 대령의 집으로 가 살해당한 친구를 발견하며, 검시 결과 살해 시점은 5시에서 6시 사이. 그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하며 대령의 조카인 제임스 피어슨이 삼촌을 방문한 시점이다. 대령이 남긴 유언장은 총 4등분되어 여동생 제니퍼 가드너와 사망한 다른 여동생 메리 피어슨의 세 자녀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첫째가 용의자인 제임스, 둘째가 작가 더링과 결혼한 실비아, 셋째가 호주로 갔다는 브라이언이다. 그러나 호주에 있을 것 같던 브라이언이 윌렛 모녀와 같은 배를 타고 영국에 왔으며,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던 실비아의 남편 더링은 경찰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당일 문학인의 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브리지 게임을 하세요?"

"예, 하지요. 왜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자기가 들고 있는 패의 가치를 평가할 때 어떻게 하지요? 수비하는 쪽이면 이기는 패를 세고 공격하는 쪽이면 지는 패를 세라. 지금 우리는 공격을 하는 쪽이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해 왔는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오?"

"음, 지금까지 우리는 이기는 패만 생각했어요, 안 그래요? 내말은 우리가 트리벨리언 대령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 생각했단 말이에요.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까지 말이죠. 어쩌면 그 때문에 이처럼 끔찍하게 엉망진창이 되어있는지도 몰라요."

 

겉으로 드러난 동기를 지닌 유언장 속의 사람들, 그리고 살해 당시 알리바이는 확실히 입증되나 분명히 범죄와 연관이 있어보이는 6명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도저히 살인까지 저지를 성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범인 또는 희생자. 어지럽게 사건이 꼬여갈 무렵, 중반부를 지나 등대의 불빛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온다. 여주인공 에밀리의 기지가 반짝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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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양복의 사나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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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책 맨 앞에 있던 E.A.B.는 대체 누구일까 생각했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크리스티의 첫 남편의 상관이었던 E.A.벨처로, 이 소설의 유스터스 페들러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크리스티는 영국 박람회 사절단 자격으로 첫 남편과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던 경험을 살려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이 당시에만 하더라도 나중에 남편과 헤어질지 몰랐을 텐데 이혼 후 이 소설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잠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네 번째 소설이다. 네 번째 장편 소설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의 초기 열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20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1922 비밀결사

1923 골프장 살인사건

1924 갈색 양복의 사나이

1924 푸아로 사건집

1925 침니스의 비밀

1926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1927 빅포

1928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

1929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우리말 번역은 전부 황금가지 판을 참고하였다. 황금가지 전집이 연대기 순으로 되어 있지 않기에, 이 중 절반은 아직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초기 열 작품은 10년간 쓰여졌는데, 아직 마플 양이 등장하기 전의 세계이다.

 

첫번째 작품에서 푸아로가 등장하고, 두번째 작품에서는 나중에 부부가 되는 탐정 한 쌍이 등장하며, 다시 세번째 작품에서 푸아로가 등장한다. 네번째 작품이 이 작품으로 레이스 대령이 등장하지만 '탐정'이라고 호칭하기에는 역할이 미미하며 다음 작품인 다섯번째 작품에서 푸아로가 등장한다. 여섯 번째 소설에서는 배틀 총경이 등장하며, 그 이후의 세 소설에서 연달아 푸아로가 등장하고, 마지막 열번째 작품에서는 다시 배틀 총경이 등장하여 이른바 침니스의 두번째 이야기를 풀어간다. 1930년의 <목사관의 살인>에서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크리스티의 1920년대, 초기 10년의 세월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출발시켜야 할 지 가늠하고 있던 시기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계속되는 푸아로의 활약, 배틀 총경의 연이은 등장, 그리고 잠깐 레이스 대령이 얼굴을 비추기도 하였고 딱 10년 후 마플 양의 등장. 그 때부터 이른바 작가 스스로 '감 잡은' 시대가 온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 책의 레이스 대령은 크리스티의 이후 소설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는 <나일 강의 죽음>에 나온다고 한다. 메인 줄거리와 큰 연관이 없어서인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디쯤 나와서 어떻게 활약을 했는지 알아내기가 힘들었는데, 아마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나왔던, 국제 침대차 회사의 중역인 부크와 같은 역할이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확실히 용의자에서는 제외되면서, 푸아로의 조력자가 되는 남자.

 

앤이라는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다. 학문적으로는 뛰어나나 경제적으로는 빈곤했던 원시인 학자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얼마 안 되는 전재산을 가지고 남아프리카로 떠날 정도로 모험심과 자립심이 넘치는 여자. 우연히 역에서 한 남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의문의 쪽지를 추적하여 '킬모튼 캐슬'이라는 배를 탄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유스터스 페들러는 집을 세 놓기 위해 내놓았다가, 집을 보러 온 여성이 바로 자신의 집에서 살인을 당하면서 사건에 휘말린 경우이다. 그 집은 앤이 목격한 죽은 남자와도 관련이 있다.

 

앤이 어떤 여성인지, 그리고 앤을 둘러싼 환경이 어떠한지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배에 타고 난 이후부터는 다소 이야기가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시간이 꽤 길게 이어지는데, 전반부에 톡톡 튀는 부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격차가 더 커서 심심한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아마도 이 당시 크리스티가 자신의 소설을 가지고 이런 저런 실험을 할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어느 정도 크리스티가 숙련된 작가가 된 후에 이 책을 썼더라면 좀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소 떨어지는 긴장감은 <나일 강의 죽음>에서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훨씬 생생해졌다. 크리스티의 팬이 아니라면, 실망할 가능성도 분명히 많은 책이다.

어느 사교계에서 아버지는 침팬지 새끼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인류의 젊은 층은 유인원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어린 침팬지는 성숙한 침팬지보다 인간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조상들이 현재의 우리보다 유인원에 더 가까운 반면에 침팬지의 조상은 현재의 침팬지보다 더 고등한 동물이었음을, 다시 말해 침팬지가 퇴화된 동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진취적인 신문인 <데일리 버짓>은 뭔가 짜릿한 기사에 굶주려 있던 만큼 기다렸다는 듯 이것을 대서특필했다.

우리 인간은 원숭이의 자손이 아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과연 우리 인간의 자손인가? 저명한 한 교수는 침팬지가 퇴화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사가 나간 직후에 한 기자가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그 이론에 관한 대중적인 기사를 연속물로 써 보라고 열심히 권유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나만이 아는 은밀한 슬픔이었지만 특히나 돈이 아쉬웠는데, 아버지는 그 기자를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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