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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태퍼드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양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평점 :
제목인 시태퍼드만 보아서는 지명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암호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크리스티는 책 초반부에 주요 등장 인물과 지명에 대한 확인과 함께 세세한 묘사를 독자에게 선사하여 재빨리 내용에 몰입하게 한다.
버너비 소령은 고무장화를 신고 오버코트의 단추를 목까지 다 채운 후 문 근처 선반에서 강풍 대비용 각등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조 단층집인 방갈로의 앞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카드나 구식 멜로드라마에 묘사된 전형적인 영국 시골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겨우 몇 센티미터 쌓인 정도가 아니라 주위가 파묻힐 정도로 두터운 눈 더미였다. 지난 나흘 동안 영국 전역에 눈이 내렸고 서남부의 다트무어 변두리에 있는 이쪽 고지대에는 1미터도 넘게 쌓였다. 집집마다 가장들은 파이프가 터져서 불평을 터뜨렸다. 그렇다 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배관공을 친구로 둔 사람, 또는 배관공 친구의 친구마저도 지극한 선망의 대상이 돼 버린 형편이었다.
이 책의 첫 문단이다. 호들갑스러운 부사도, 과장된 형용사도 없는 사실적인 문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폭설이 왔을지 대번에 눈에 그려지는 묘사다. 영국인 특유의 침착함이랄까, 작가 혼자 들뜬 것 같은 묘사는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데 크리스티는 늘 담담하게 풍경을 그려내는데도 위압감이나 중압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것 같다.
시태퍼드 하우스는 조지프 트리벨리언 대령이 영국 해군에서 퇴역할 즈음인 10년 전에 지은 저택이다. 재력이 있엇던 그는 늘 다트무어에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작은 마을인 시태퍼드를 여생을 보낼 곳으로 정했다. 대부분 계곡에 몰려 있는 다른 마을이나 농장과는 달리 이곳은 시태퍼드 산의 그늘이 드리워진 황무지 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넓은 택지를 사서 자가발전 설비를 갖춘 데다가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수고를 덜기 위해 전기 펌프까지 설치하는 등 안락한 집을 지었다. 그러고는 투자 방편으로 골목을 따라 한 채당 약 1,000제곱미터씩의 땅을 할애해서 작은 방갈로 여섯 채를 지었다.
그 방갈로들 중에서 시태퍼트 하우스 정문 곁에 있는 집은 허물없이 지내는 오랜 친구 존 버너비 소령에게 내주었다. 다른 집들은 하나씩 하나씩 팔렸다. 자신이 좋아서든 필요에 의해서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이 집들 말고도 그림같이 아름답긴 하지만 낡은 시골집 세 채와 철공소 하나, 그리고 과자가게를 겸한 우체국이 있었다. 제일 가까운 도시는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익스햄프턴이었다. 그곳까지는 다트무어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운전사들은 기어를 최저속으로 유지하시오'라는 표지가 필요한 한결같은 내리막기로 이어져 있었다.
정말 훌륭한 묘사다. 이 정도면 아무리 피곤해도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뒤이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하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히 매끄러우며, 크리스티의 저명한 탐정들이 등장하지 않고 살인 용의자의 약혼녀가 탐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는 신선한 느낌이 있다.
그녀는 죽은 대령을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추리한다는 건 너무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밀리는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자기 판단보다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받았든 자기에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판단이 자기의 것만큼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일을 다루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문단 같은 경우이다. 푸아로라면 이런 고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을 탐정이니까.
퇴역 군인이자 상당한 부자인 남자가 살해된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의 재산은 유언대로라면 여동생과 조카에게 나누어 분배될 것이다. 다소 괴팍하기는 해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 때문에, 살인은 원한 관계보다는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마침 유언장에 나와 있는 그의 조카들 중 한 명이 피살자와 당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체포된다. 유약한 용의자와 대비하여, 그의 약혼녀는 의지와 재치를 지닌 여자로, 직접 피살자의 주변을 탐문하며 살인 사건을 파헤치고자 한다. 자신의 약혼자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는, 피살자, 그러니까 약혼자의 외삼촌이 어떤 사람이며 그 주변 인물들은 어떤 사람인지 차근차근 추적해간다.
피살자는 트리벨리언 대령이라는 사람. 시태퍼드 하우스와 작은 방갈로 6개의 소유자로 겨울 동안 시태퍼드 하우스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귀국한 윌렛 모녀에게 세를 주었다. 방갈로 6개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다. 1번 방갈로에 사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버너비 소령, 2번 방갈로에 사는 병자인 와이엇 대령, 3번 방갈로에 사는 몸집이 작고 별난 라이크로프트, 4번 방갈로에 사는 거동이 어려운 퍼스하우스와 그녀의 조카 가필드, 5번 방갈로에 사는 시태퍼드 하우스 정원사였던 커티스 부부, 6번 방갈로에 사는 덩치가 크고 조용한 듀크이다. 방갈로는 대령이 살고 있는 익스햄프턴과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살인 사건 당일 버너비 소령, 윌렛 모녀, 라이크로프트, 듀크, 가필드 이렇게 6명은 테이블 터닝(심령의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강령술의 일종으로 참석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손을 위에 올려 놓고 테이블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을 하다가 대령이 그날 살해당했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당시 시간은 5시 25분. 밖에는 어마어마한 폭설. 불안해하던 대령의 친구인 버너비 소령이 폭설을 헤치고 대령의 집으로 가 살해당한 친구를 발견하며, 검시 결과 살해 시점은 5시에서 6시 사이. 그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하며 대령의 조카인 제임스 피어슨이 삼촌을 방문한 시점이다. 대령이 남긴 유언장은 총 4등분되어 여동생 제니퍼 가드너와 사망한 다른 여동생 메리 피어슨의 세 자녀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첫째가 용의자인 제임스, 둘째가 작가 더링과 결혼한 실비아, 셋째가 호주로 갔다는 브라이언이다. 그러나 호주에 있을 것 같던 브라이언이 윌렛 모녀와 같은 배를 타고 영국에 왔으며,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던 실비아의 남편 더링은 경찰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당일 문학인의 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브리지 게임을 하세요?"
"예, 하지요. 왜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자기가 들고 있는 패의 가치를 평가할 때 어떻게 하지요? 수비하는 쪽이면 이기는 패를 세고 공격하는 쪽이면 지는 패를 세라. 지금 우리는 공격을 하는 쪽이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해 왔는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오?"
"음, 지금까지 우리는 이기는 패만 생각했어요, 안 그래요? 내말은 우리가 트리벨리언 대령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 생각했단 말이에요.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까지 말이죠. 어쩌면 그 때문에 이처럼 끔찍하게 엉망진창이 되어있는지도 몰라요."
겉으로 드러난 동기를 지닌 유언장 속의 사람들, 그리고 살해 당시 알리바이는 확실히 입증되나 분명히 범죄와 연관이 있어보이는 6명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도저히 살인까지 저지를 성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범인 또는 희생자. 어지럽게 사건이 꼬여갈 무렵, 중반부를 지나 등대의 불빛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온다. 여주인공 에밀리의 기지가 반짝이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