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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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보았으나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책의 소개를 보면 출판 이후 이른바 니나 신드롬까지 불었다는데, 그 시대라면 모를까 요즘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낡아 보이는 주인공이지 않을까 싶다. 너무 평가가 박한가? 그만큼 내가 더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태클을 걸어보자면, 중년 남성의 삶의 의미란 딸만큼이나 어린 여성과의 사랑이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삐딱한 의문이 들기도 하고. 과연 이것이 사랑이 맞는지, 그저 지나가버린 자신의 젊은 날을 붙잡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평탄하게 살아온 니나의 언니가 니나를 부러워하듯이. 정작 젊은 시절 열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니나는 언니의 그 안정을 부러워하고 있는데. 슈타인이 실제 니나를 사랑했는지 아리송하다. 열정적이고 불완전한 젊음 그 자체를 붙잡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는 남성이 오히려 털털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것도 사랑일 수 있다. 숨이 막히는 사랑이겠지만.

슈타인은 그렇다치고 니나는 어떠한지. 학교 수업을 거부할 정도로 안락사를 반대하면서 정작 남편의 조력 자살에 협조하는 모순. 그 모순 또한 인간의 한 부분인 것은 맞는데, 한 인간 안에서의 변화에 대한 통찰 수준까지 소설이 가지는 않는 것 같다.

전후 세대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성숙한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감정에만 몰두하는 니나는 그저 자기 파괴적인 본능에서 성숙해진 것 같지는 않고, 소설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인 소설은 맞는데, 인물이 매력적인 것은 모르겠다. 신드롬까지는....... 정말 모르겠다. 분명히 니나는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인물일텐데 작가에 대해 찾아보다가 한때 나치주의자였다는 경력이 드러났다고 한다. 스스로를 반나치 인물로 열심히 포장하며 살았다는 것인데, 한 때 이 소설과 니나를 열렬히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에게는 아픈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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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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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1967년에 출판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쿤데라는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에 당에 반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당했고 1956년 재입당이 승인되었으나 1970년에 또다시 당에서 추방당한다. 농담은 1967년에 쓰인 작품이다. 가벼운 농담마저 허용하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축출되어 버린 주인공을 감안하면 당연히 본인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찾아보니까 이 책의 원제는 Zert 인데, 아마 체코슬로바키아어로 농담이라는 뜻인가 보다.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는 사실상 사투리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고 하니까. 1975년에 프랑스로 망명한 쿤데라는 현재는 체코국적을 회복한 상태인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시기가 1993년이라고 하니 올해로 딱 30년인 셈이다. 1993년부터 쿤데라는 프랑스어로 글을 써왔다고 하며, 이전에 출간된 작품들도 작가 본인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체코라는 나라의 역사도, 쿤데라의 일생도 풍파가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체코라는 나라의 역사를 알아보면 도움이 되겠지만, 비전공자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그것은 다음 기회에....... 그리고 쿤데라의 소설은 역사적 배경을 몰라도 재미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준 여자는 총 3명인데, 3명의 여자와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든지 농담적인 요소가 있다. 첫 번째 여자에게 보낸 엽서의 농담 때문에 주인공은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쫓겨나고 지위를 잃으며 추락한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두 번째 여자와의 만남 과정은 당사자들은 절절하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제 3자가 들으면 웃어버릴 부분은 분명히 있다. 세 번째 여자와의 만남은 과연 이 만남이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조마조마하면서 보다가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은 그야말로 단어 그대로의 Toilet Humor . 사실 이 소설 전체가 거대하고 촘촘하게 잘 짜인 블랙코미디이며,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흔한 클리셰로 AI가 농담을 할 줄 알고 이해하게 되면 인간성을 획득한 것으로 묘사되는 예술작품이 참 많은데, 이것이 제거된 사회는 그야말로 로봇들만의 사회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robot도 체코어라고 한다. 영어가 아니라.

자꾸 단어에 집착하면서 리뷰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소설을 새롭게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반복해서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작가는, 화가나 무용가와는 달리 특정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쿤데라의 작품도, 작가 개인에 대한 호기심도 계속해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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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집의 수수께끼 동서 미스터리 북스 65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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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책의 작가는 그 유명한 곰돌이 푸를 탄생시킨 바로 그 작가다. 사랑스럽고 씩씩하고 미소를 짓게 하는 푸. 이 소설도 그렇다. 사랑스럽고 씩씩하고 미소를 짓게 하는데 딱 거기까지다. 범인도 트릭도 너무 뻔하게 그것도 초반에 노출되어서... 차라리 아기자기한 작가의 매력을 십분 살려서 살인 말고 절도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의 말미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도 하나 실려있다. 아더 모리슨이라는 작가의 랜턴관 도난사건이라는 단편인데 오히려 이 작품이 아기자기하고 기발한 맛이 있다. 동서미스터리북스가 작품들을 엮는 방식은 여러모로 불만이 있기는 한데 뭐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고... 아더 모리슨은 이 작품 말고도 탐정 머턴 휴이트 시리즈를 장편 1권과 단편집 4권을 썼다고 하는데 독립된 책으로 묶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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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 혐오 동서 미스터리 북스 64
에드 맥베인 지음, 석인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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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60

로저 하빌랜드는 형사이다.

동료들은 그를 황소 형사라고 불렀다. 그는 진짜 황소였다. 형사들은 짜브또는 황소라고 부르는 것과는 별도로 그는 짜브 황소라 불리고 있었다. 몸도 건장할 뿐만 아니라 식성도 그렇고, 힘도 그러했고, 코로 숨쉬는 것까지 거칠었다. 그가 사나운 황소라는 데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성질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황소 형사였다.

그가 좋은 형사였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 자신마저도 잊고 있으니까. 언젠가 그는 잡아 온 사나이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입으로만 몇 시간이나 심문한 적도 있었다. 말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악담을 늘어놓지 않은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그도 지난날에는 점잖은 경찰관일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세상에서 불운한 일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분서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싸움을 말리려고 했었다. 그 무렵의 그는 자기의 직무를 하루 24시간 내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양심적인 경관이었다. 싸움은 흔히 있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끼리의 단순한 말다툼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권총 같은 게 얼굴을 내밀 만한 싸움은 아니었다.

그는 그 사이에 끼어들어 조용히 말리려고 했다. 그가 권총을 빼들고 싸우고 있는 무리들의 머리 위로 두세 발 공포를 쏘아올리자 무엇을 어떻게 착각했는지 싸움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그의 오른쪽 손목을 파이프 토막으로 내리쳤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지면서 그에게 불행한 사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싸우고 있던 무리는, 그때까지 상대방의 머리를 때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경관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두들 권총을 잃어 버린 그에게 달려들어 길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잠깐 사이에 마구 짓이겨 놓고 말았다.

파이프를 들고 있던 자는 그의 팔을 네 군데나 꺾어 놓았다.

복합 골절이라는 것은 통증이 심하다. 상처가 쉽게 맞붙지 않아, 할 수 없이 의사는 뼈를 헤치고 처음부터 맞추어 나가야 했다. 이로 인한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하빌랜드는 자기가 경관으로서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수사과의 일반형사가 된 바로 뒤여서 앞일이 그다지 희망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동안 팔의 상처는 다 나았다. 대개 팔은 잘 낫는 편이다. 몸은 옛날과 같이 회복되었으나, 그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옛말에 심술쟁이 하나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라는 말이 있다.

그 파이프를 들고 있던 녀석은 시 전체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이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하빌랜드는 그 뒤로부터 황소같이 완고한 진짜 황소 형사가 되었다. 그 일이 그에게는 좋은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두 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 뒤 하빌랜드가 용의자를 잡는 데는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겸손하게 나가지 않고 상대방을 납작하게 할 방법만 생각하면 곧 고압적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하빌랜드에게 붙잡힌 자로서,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 경관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호의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 책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우직하지만 순수했던 한 경찰이 어떻게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바뀌어 가는지 묘사가 대단하다. 책을 죽 읽다 보면 경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진다. 홈즈나 루팡,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대체로 사설탐정에 미치지 못하는 경찰을 묘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에는 경관 혐오, 한밤의 공허한 시간 두 편이 실려 있는데, 당연히 책의 제목으로 앞세운 경관 혐오가 일품이지만, 한밤의 공허한 시간도 인상적이다. 정말 재미있어서 내가 왜 이 작가를 그동안 몰랐나 싶어서 작가에 대해 조사해 보니, 소개된 이름만 8개이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필명을 써서 글을 썼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썼는지 궁금하다. 이건 나만의 추측인데, 한 이름을 써서 유명해지니까 취재를 하는 데에 제약이 있어서 다른 필명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묘사를 하는데 취재를 대충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의외의 이력은 바로 히치콕의 영화 새의 각본을 썼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에반 헌터라는 이름으로 올라가 있다. 개명을 하긴 했지만 이 이름이 본명이라고 한다. 개명 전 본명은 살바토레 앨버트 롬비노라고. 그 외에 이름으로는 커트 캐넌, 헌트 콜린스, 리처드 마스튼, 에즈라 해넌, 존 에벗 등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소설을 썼는데 범죄 소설은 물론이고 과학 소설과 동화, 극작가로도 활약했다.

얼마나 소설을 많이 썼으면 기관총 작가라고 불린다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87분서 시리즈’, 그리고 가장 알려진 그의 필명은 ‘87분서 시리즈를 쓴 에드 맥베인.’ 이 경관 혐오나 한밤의 공허한 시간도 그 시리즈 안에 들어간다. 후에 드라마화가 되었는데 그 드라마의 각본도 맡았고, 형사 콜롬보 시리즈의 각본도 맡았다고 한다. 가공의 도시 아이솔라에서 형사 캘레라가 있는 87분서 경찰들의 이야기는 후에 나온 거의 모든 경찰 소설과 경찰 드라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페르 발뢰와 마이 셰발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도 영향을 줬다고 하는데, 이전에 동서 미스터리 북스로 이미 읽었던 웃는 경관이 바로 이 시리즈이다. 그때는 읽으면서 독특하고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명성에 비하면 다 읽고 나서 기억에 계속 남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책은 확실히 더 재미있다. 마치 요즘 나오는 수사물, 특히 영미권의 경찰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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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동서 미스터리 북스 63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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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도 아닌 내가 점수를 주는 것은 어차피 철저히 주관에 불과하니까. 이 정도의 명작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은 것은 안다. 그러나 어차피 미스터리 소설은 철저히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 아닌가. 사실상 안락의자 탐정 타입의 효시가 되는 소설인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행동파 주인공들을 보다가 이 책을 읽으니 단정하면서도 독특한 재미에 끌리게 되었다. 저자는 Baroness Emma Magdolna Rozália Mária Jozefa Borbála "Emmuska" Orczy de Orczi 이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면 바로네스 오르티, 바로네스 옥시, 에마 오르치, 엠마 오크시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왜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는지 알 수 있는데, 헝가리 귀족 출신이지만 농민 봉기 때문에 일가가 전부 영국으로 귀화하였고, 이후 영국 남자와 결혼하였다. 이러다 보니 이름이 길어진 것 같은데, 사실 구석의 노인 사건집보다는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원조 히어로물로 더 유명하다고.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이 스칼렛 핌퍼넬은 빨강 별꽃이라는 제목으로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에도 있는 것 같다. 구석의 노인 단편은 훨씬 더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전부 번역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찾아보니 동서에서 선별한 이 작품들 이외의 작품은 다소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평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내 주관적인 인상은 훌륭했다는 것. 그리고 비록 실망하게 될 지라도 다른 단편도 읽어보고 싶다는 것.

 

The Fenchurch Street Mystery 펜처치 거리의 수수께끼

그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가게로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그녀는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인과의 사이에 있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이미 그녀의 점심식사인 큰 컵에 든 커피(3펜스)와 버터를 곁들인 롤빵(2펜스), 그리고 소 혓바닥 요리 한 접시(6펜스)가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그 구석의 자리와 그 테이블 그리고 그녀자리에서 바라보는 멋진 대리석 홀(ABC . 효모를 쓰지 않는빵 제조회사의 노퍽 지점)의 전망은 폴리만의 것이었다. 폴리가 여기서 11펜스짜리 점심을 먹고 1펜스어치의 정보를 얻어가는 습관은, 그녀가 영국 언론계에서도 이름 높은 <이브닝 옵저버>--여기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입사하게 된 잊지 못할 영광의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한순간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고 노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버튼은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지닌 여성으로, 그것을 이 2년 동안 영국 신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그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노인의 풍모에는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뭔가가 있었다. 폴리는 마음속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창백하고, 이토록 바싹 여위고, 이다지도 우스운 엷은 빛깔의 머리털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당히 벗어져올라간 정수리에 엷은 빛깔의 머리털을 얌전히 빗어 붙이고, 무척 수줍고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손에 쥔 끈을 줄곧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랗고 뼈가 불거진 조금 떨리는 손가락은 그 끈을 묶었다풀었다하며,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복잡한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노인의 그런 기묘한 특징을 찬찬히 바라보고 나자 폴리는 얼마쯤 기분이 좋아졌다.

 

The Mysterious Death of the Underground Railway 지하철 괴사건

구석의 노인은 문득 이야기를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아니, 이거 너무 멜로드라마틱하게 되었나?"

노인은 조용하고 마음씨 착해 보이는 웃는 얼굴을 폴리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그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손가락은 조금 전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는 끈에 또 한 개의 매듭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The Case of Miss Elliott 엘리어트 여의사 사건

나는 의학이라는 학문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소. 솜씨 좋은 성공한 의사에게는 공통된 어떤 유쾌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되오. 자기 실력과 업적에 대한 자신감, 그것이 가져다주는 수입에 뒷받침된 관록이라고 할까, 이것은 아주 독특하고 감탄할 만한 것이지요.

 

Tragedy in Dartmoor Terrace 다트무어 테라스의 비극

"신문에 날마다 재미있는 화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결코 법정이나 경찰재판소만이 아니오."

구석의 노인은 언제나처럼 치즈케익을 부지런히 입으로 나르고, 무표정하게 늙어빠진 수고양이처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아주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The Murder of Miss Pebmarsh 페브마슈 살해

증언을 마치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증인석에서 물러났지요. 그 모습은 마치 태엽을 감은 납인형이 태엽이 다 풀려서 움직이지 않게 된 모습 같았소.

 

The Lisson Grove Mystery 리슨 글로브의 수수께끼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 아주 표면적인 것밖에 모른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몇 년 사이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것 가운데 하나지요."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난의 빛을 눈에 담고 말했다.

"그렇겠지요. 사실 신문에서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직접 듣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흐음,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 여기자들보다 얼마쯤 분별이 있는 듯하군요."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비를 맞은 큰 새처럼 구석 자리에 고쳐 앉았다.

 

The Tremarn Case 트레먼 사건

"그렇기는 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요. 범죄는 항상 새로운 범죄를 낳기 마련이오.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사기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으레--그렇지,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그 수법을 흉내내는 녀석이 나오지요. 예를 들어 당신이 몹시 탄복하고 있는 이 사건 말인데……."

노인은 가져온 우유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았잖소? 파리에서 어느 사나이가 마차 안에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 그 사건 말이오. 대단히 기묘한 죽음이었지요. 마치 이탈리아 단검처럼 날이 길고 예리한 칼로, 귀에서 그 아래에 걸쳐 한칼에 찔려 죽었으니. 영국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없었소. 사람들은 대부분 파리의 소란스러움과 프랑스 경찰의 무능함에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지요. 아무튼 프랑스 경찰은 범인--그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취를 감추었소--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끝내 피해자의 신원조차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말이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에 비하면 훨씬 쉽소."

 

The Fate of the Artemis 상선 아르테미스 호의 위난

"놀랍군! 나로서는 도저히……." 이것은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그 뉴스를 보고 내가 내지른, 지적이지 못한 탄성이었다.

"그렇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못할 거요."

구석에서 노인이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찜찜한 일이지만 이 노인은 내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다.

 

The Disappearance of Count Collini 콜리니 백작의 실종

그날 아침 그는 유난히 호전적이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금방 반격해 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우리 둘 다 상대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구석의 노인은 다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되었든 불가능한 일이오. 문명 사회에서 누군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노인은 힘주어 말했다. "그 사람에게 친구나 적이 있어서, 그 남자 또는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한은 말이오."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말이 아닐까요?" 나는 대답했다.

"천만에! 그럴 리가 없소. 이 논쟁의 경우에는."

아주 단호한 말투였다. 그는 방금 뼈가 불거진 손가락이 만들어낸 큼직하고 복잡한 매듭을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그런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아무 단서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그럼, 어디 증명해 보오."

노인은 얇은 입술을 활처럼 오므렸다.

 

The Aysham Mystery 에어셤의 참극

살인 사건이란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 신문을 읽는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아 눈을 접시처럼 크게 뜨고 있는 거요.

얼마 안 있어 런던과 근교의 일간지에는 뉴턴 영감과 그 딸의 과거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되어 에어셤 살인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최대 화제가 되었소.

그 기사에 따르면 술주정뱅이 뉴턴 영감도 전엔 확실한 장사꾼으로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 고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모양이오. 에어셤은 철도역이 있는 곳으로서 미들랜드 선에서는 중요한 환승역이지만, 마을은 쓸쓸하고 자그마하지요.

 

The Tragedy of Barnsdale Manor 반즈데일 장원의 비극

"경찰은 그것을 수수께끼라고 부르지요.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그러나 모든 범죄에는 범인이 있고, 모든 수수께끼에는 해답이 있기 마련이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가장 단순한 대답이 언제나 정답인 거요."

 

The Regent's Park Murder 리젠트 파크의 살인

그리고 노인은 떠났다. 폴리는 그를 다시 불러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초라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이미 유리문 저쪽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의 주장에는 대체 어떤 증거와 사실이 있는 것일까? 결국 그것은 뜻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봐도 그녀는 노인이 이번에도 역시 대범죄 도시 런던에 숨어 있는 검은 수수께끼 하나를 보기 좋게 풀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The Dublin Mystery 더블린 사건

"그러니까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지 않아요. 그 무능한 경찰에 당신의 지혜를 좀 빌려 주면 좋지 않느냐고요."

"알고 있어." 노인은 여전히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이상한 데에 친절하군. 나에게는 경찰을 도와 줄 아무 힘도 없어. 나는 아마추어야. 범죄도 역시 체스의 승부처럼 말을 움직이는 방법은 지극히 복잡하지만, 승부가 판가름날 듯한 최종 판국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 나는 그런 사건이 매우 좋아. 나는 경찰이 아무리 해도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문득 손을 대 보고 싶어지는 성품이어서 말야. 말하자면 더블린 사건이 그런거야. 그토록 위세를 자랑하던 경찰도 그 사건 때만은 완전히 손을 든 꼴이었지."

 

The Mysterious Death in Percy Street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

그러나 지금 폴리에게는 보다 확실한 설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의 눈으로 그 손가락을 보았다. 자신의 무서운 행동으로 떨고 있는 손가락이 무의식 속에서 거의 기계적으로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해 끈을 집어 드는 것을. 그리고는 습관의 힘을 빌려 여윈 손가락이 자동적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지고 복잡한 매듭을 그 끈 위에 만들어가고 있다…….

얼굴을 들어 노인이 앉아 있는 구석 쪽을 볼 용기가 없어 폴리는 눈을 내리뜬 채 말했다.

"나 같으면 쉴 새 없이 끈에 매듭을 만드는 그런 습관은 이제 그만두겠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폴리가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었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구석자리에 없었다. 방금 그가 몇 개의 동전을 놓고 간 카운터 맞은편 유리문 저쪽에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그의 트위드 양복과 이상한 모자, 초라한 뒷모습이 흘끗 보였을 뿐이었다.

여기자 폴리 버튼--<이브닝 옵저버>지의--은 얼마 전 리처드 플로비셔--<런던 메일>지의--와 결혼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의 노인과는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영영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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