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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3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평점 :
평론가도 아닌 내가 점수를 주는 것은 어차피 철저히 주관에 불과하니까. 이 정도의 명작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은 것은 안다. 그러나 어차피 미스터리 소설은 철저히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 아닌가. 사실상 안락의자 탐정 타입의 효시가 되는 소설인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행동파 주인공들을 보다가 이 책을 읽으니 단정하면서도 독특한 재미에 끌리게 되었다. 저자는 Baroness Emma Magdolna Rozália Mária Jozefa Borbála "Emmuska" Orczy de Orczi 이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면 바로네스 오르티, 바로네스 옥시, 에마 오르치, 엠마 오크시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왜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는지 알 수 있는데, 헝가리 귀족 출신이지만 농민 봉기 때문에 일가가 전부 영국으로 귀화하였고, 이후 영국 남자와 결혼하였다. 이러다 보니 이름이 길어진 것 같은데, 사실 구석의 노인 사건집보다는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원조 히어로물로 더 유명하다고.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이 스칼렛 핌퍼넬은 빨강 별꽃이라는 제목으로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에도 있는 것 같다. 구석의 노인 단편은 훨씬 더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전부 번역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찾아보니 동서에서 선별한 이 작품들 이외의 작품은 다소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평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내 주관적인 인상은 훌륭했다는 것. 그리고 비록 실망하게 될 지라도 다른 단편도 읽어보고 싶다는 것.
The Fenchurch Street Mystery 펜처치 거리의 수수께끼
그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가게로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그녀는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인과의 사이에 있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이미 그녀의 점심식사인 큰 컵에 든 커피(3펜스)와 버터를 곁들인 롤빵(2펜스), 그리고 소 혓바닥 요리 한 접시(6펜스)가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그 구석의 자리와 그 테이블 그리고 그녀자리에서 바라보는 멋진 대리석 홀(ABC 숍. 효모를 쓰지 않는빵 제조회사의 노퍽 지점)의 전망은 폴리만의 것이었다. 폴리가 여기서 11펜스짜리 점심을 먹고 1펜스어치의 정보를 얻어가는 습관은, 그녀가 영국 언론계에서도 이름 높은 <이브닝 옵저버>지--여기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입사하게 된 잊지 못할 영광의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한순간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고 노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버튼은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지닌 여성으로, 그것을 이 2년 동안 영국 신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그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노인의 풍모에는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뭔가가 있었다. 폴리는 마음속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창백하고, 이토록 바싹 여위고, 이다지도 우스운 엷은 빛깔의 머리털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당히 벗어져올라간 정수리에 엷은 빛깔의 머리털을 얌전히 빗어 붙이고, 무척 수줍고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손에 쥔 끈을 줄곧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랗고 뼈가 불거진 조금 떨리는 손가락은 그 끈을 묶었다풀었다하며,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복잡한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노인의 그런 기묘한 특징을 찬찬히 바라보고 나자 폴리는 얼마쯤 기분이 좋아졌다.
The Mysterious Death of the Underground Railway 지하철 괴사건
구석의 노인은 문득 이야기를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아니, 이거 너무 멜로드라마틱하게 되었나?"
노인은 조용하고 마음씨 착해 보이는 웃는 얼굴을 폴리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그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손가락은 조금 전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는 끈에 또 한 개의 매듭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The Case of Miss Elliott 엘리어트 여의사 사건
나는 의학이라는 학문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소. 솜씨 좋은 성공한 의사에게는 공통된 어떤 유쾌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되오. 자기 실력과 업적에 대한 자신감, 그것이 가져다주는 수입에 뒷받침된 관록이라고 할까, 이것은 아주 독특하고 감탄할 만한 것이지요.
Tragedy in Dartmoor Terrace 다트무어 테라스의 비극
"신문에 날마다 재미있는 화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결코 법정이나 경찰재판소만이 아니오."
구석의 노인은 언제나처럼 치즈케익을 부지런히 입으로 나르고, 무표정하게 늙어빠진 수고양이처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아주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The Murder of Miss Pebmarsh 페브마슈 살해
증언을 마치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증인석에서 물러났지요. 그 모습은 마치 태엽을 감은 납인형이 태엽이 다 풀려서 움직이지 않게 된 모습 같았소.
The Lisson Grove Mystery 리슨 글로브의 수수께끼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 아주 표면적인 것밖에 모른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몇 년 사이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것 가운데 하나지요."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난의 빛을 눈에 담고 말했다.
"그렇겠지요. 사실 신문에서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직접 듣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흐음,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 여기자들보다 얼마쯤 분별이 있는 듯하군요."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비를 맞은 큰 새처럼 구석 자리에 고쳐 앉았다.
The Tremarn Case 트레먼 사건
"그렇기는 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요. 범죄는 항상 새로운 범죄를 낳기 마련이오.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사기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으레--그렇지,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그 수법을 흉내내는 녀석이 나오지요. 예를 들어 당신이 몹시 탄복하고 있는 이 사건 말인데……."
노인은 가져온 우유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았잖소? 파리에서 어느 사나이가 마차 안에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 그 사건 말이오. 대단히 기묘한 죽음이었지요. 마치 이탈리아 단검처럼 날이 길고 예리한 칼로, 귀에서 그 아래에 걸쳐 한칼에 찔려 죽었으니. 영국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없었소. 사람들은 대부분 파리의 소란스러움과 프랑스 경찰의 무능함에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지요. 아무튼 프랑스 경찰은 범인--그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취를 감추었소--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끝내 피해자의 신원조차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말이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에 비하면 훨씬 쉽소."
The Fate of the Artemis 상선 아르테미스 호의 위난
"놀랍군! 나로서는 도저히……." 이것은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그 뉴스를 보고 내가 내지른, 지적이지 못한 탄성이었다.
"그렇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못할 거요."
구석에서 노인이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찜찜한 일이지만 이 노인은 내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다.
The Disappearance of Count Collini 콜리니 백작의 실종
그날 아침 그는 유난히 호전적이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금방 반격해 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우리 둘 다 상대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구석의 노인은 다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되었든 불가능한 일이오. 문명 사회에서 누군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노인은 힘주어 말했다. "그 사람에게 친구나 적이 있어서, 그 남자 또는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한은 말이오."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말이 아닐까요?" 나는 대답했다.
"천만에! 그럴 리가 없소. 이 논쟁의 경우에는."
아주 단호한 말투였다. 그는 방금 뼈가 불거진 손가락이 만들어낸 큼직하고 복잡한 매듭을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그런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아무 단서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그럼, 어디 증명해 보오."
노인은 얇은 입술을 활처럼 오므렸다.
The Aysham Mystery 에어셤의 참극
살인 사건이란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 신문을 읽는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아 눈을 접시처럼 크게 뜨고 있는 거요.
얼마 안 있어 런던과 근교의 일간지에는 뉴턴 영감과 그 딸의 과거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되어 에어셤 살인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최대 화제가 되었소.
그 기사에 따르면 술주정뱅이 뉴턴 영감도 전엔 확실한 장사꾼으로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 고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모양이오. 에어셤은 철도역이 있는 곳으로서 미들랜드 선에서는 중요한 환승역이지만, 마을은 쓸쓸하고 자그마하지요.
The Tragedy of Barnsdale Manor 반즈데일 장원의 비극
"경찰은 그것을 수수께끼라고 부르지요.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그러나 모든 범죄에는 범인이 있고, 모든 수수께끼에는 해답이 있기 마련이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가장 단순한 대답이 언제나 정답인 거요."
The Regent's Park Murder 리젠트 파크의 살인
그리고 노인은 떠났다. 폴리는 그를 다시 불러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초라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이미 유리문 저쪽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의 주장에는 대체 어떤 증거와 사실이 있는 것일까? 결국 그것은 뜻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봐도 그녀는 노인이 이번에도 역시 대범죄 도시 런던에 숨어 있는 검은 수수께끼 하나를 보기 좋게 풀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The Dublin Mystery 더블린 사건
"그러니까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지 않아요. 그 무능한 경찰에 당신의 지혜를 좀 빌려 주면 좋지 않느냐고요."
"알고 있어." 노인은 여전히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이상한 데에 친절하군. 나에게는 경찰을 도와 줄 아무 힘도 없어. 나는 아마추어야. 범죄도 역시 체스의 승부처럼 말을 움직이는 방법은 지극히 복잡하지만, 승부가 판가름날 듯한 최종 판국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 나는 그런 사건이 매우 좋아. 나는 경찰이 아무리 해도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문득 손을 대 보고 싶어지는 성품이어서 말야. 말하자면 더블린 사건이 그런거야. 그토록 위세를 자랑하던 경찰도 그 사건 때만은 완전히 손을 든 꼴이었지."
The Mysterious Death in Percy Street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
그러나 지금 폴리에게는 보다 확실한 설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의 눈으로 그 손가락을 보았다. 자신의 무서운 행동으로 떨고 있는 손가락이 무의식 속에서 거의 기계적으로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해 끈을 집어 드는 것을. 그리고는 습관의 힘을 빌려 여윈 손가락이 자동적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지고 복잡한 매듭을 그 끈 위에 만들어가고 있다…….
얼굴을 들어 노인이 앉아 있는 구석 쪽을 볼 용기가 없어 폴리는 눈을 내리뜬 채 말했다.
"나 같으면 쉴 새 없이 끈에 매듭을 만드는 그런 습관은 이제 그만두겠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폴리가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었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구석자리에 없었다. 방금 그가 몇 개의 동전을 놓고 간 카운터 맞은편 유리문 저쪽에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그의 트위드 양복과 이상한 모자, 초라한 뒷모습이 흘끗 보였을 뿐이었다.
여기자 폴리 버튼--<이브닝 옵저버>지의--은 얼마 전 리처드 플로비셔--<런던 메일>지의--와 결혼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의 노인과는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영영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