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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의 비밀 ㅣ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아르센 뤼팽의 전집 중에서 (물론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가장 사람들이 첫 손 에 꼽는 책이 이 책과 기암성이라고 알고 있다.
이 책보다 앞서 읽은 기암성은 그야말로, 이 것이 뤼팽이다, 라는 느낌을 주는데 충분했다. 한번 손에 책을 들고나서 숨쉴 틈없이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책의 재미는 뛰어난 소년 탐정의 재치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책은 시기상으로도 기암성의 바로 뒤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다시 또 여인과의 사랑에 빠져서 중요한 순간에 판단력을 상실하는 뤼팽의 모습이 반복되는 장면에서는 약간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철저하게 성적인 부분이나 로맨스를 배제했던 홈스에 비하면, 완벽해보이던 뤼팽이 여자 때문에 스스로 약한 모습을 노출시키고야 마는 장면에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숨이 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예전에 고전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박씨부인전이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봤던 적이 있다. 철저하게 지고야 만 병자호란이지만, 해당 부분의 역사적 사실의 큰 훼손 없이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줌으로서 당시 민중을 위로하고 자존심을 회복한 일종의 정신승리라는 해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당시 복잡한 유럽 정세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설령 알거나 모르거나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813의 비밀」은 이미 인기작가가 된 모리스 르블랑의 경력에서도 아주 새로운 획을 긋는 작품이다. 191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호응이 쏟아졌는데, 이에 힘입어 작가는 1917년과 1932년에 각각 가필, 수정하여 다시 출간했을 정도로 이 작품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미스터리적 기법이 전작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도달했고, 주인공 아르센 뤼팽의 전방위적 활약 또한 눈부실 정도이다. 더구나 20세기 초,
영불독 3국간의 식민지 정책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 독일 왕가와 그에 관련한 3대에 걸친 귀족가문 및 여타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는 작가의
방대하고 세밀한 고증학적 지식에 의해서 소설의 스케일과 깊이를 상상을 초월하는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독일 황제에 맞서는 뤼팽의 엄청난
야망과 처음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로서의 뤼팽의 애틋한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쉴새없는 음모와 반전의 연속은 오늘날의 독자들의 손에도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제 1부
연쇄살인
느닷없이 튀어나온 거물 협객(俠客)의 이름 앞에서 케셀바흐 씨는 다소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뤼팽은 곧장 그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아하, 숨 좀 돌리시겠다 이건가? 아르센 뤼팽은 점잖은 도둑이며, 피는 질색이고, 그저 남의 재산을 좀 실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범죄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범죄라고 할 것도 없다 이건가? 그러니 불필요한 살인 행각이나 일삼는 위인은 결코 아닐 것이라 생각하겠지? 글쎄, 당신의 목숨을 빼앗는 게 불필요한 건지 아닌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지금 난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알아두시구려, 친구.”
르노르망 씨, 작전을 개시하다
아! 아르센 뤼팽......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기상천외한 에기유 크뤼즈의 엄청난 모험 이후 누구든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더는 들어본 적이 없다. 셜록 홈스와 이지도르 보트를레의 눈앞에서, 사랑했던 여인의 시체를 들쳐없고 늙은 유모 빅투아르를 대동한 채, 저 어두컴컴한 적막 속으로 사라져간 바로 그 날 이후로 말이다......
그 날 이후, 일반적인 사람들 생각은 그가 아마도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간 세상 어디에서도 뤼팽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경찰이 편의상 내린 결론에 힘입은 바 컸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가 목숨만은 부지한 상태이며, 이제는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채, 아담한 정원이나 가꾸며 평화로운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따. 그런가 하면, 세상의 덧없음과 시련으로 점철된 인생에 질려버린 나머지 아예 트라지스트 교단(17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수도회/역주)의 수도원에라도 칩거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긴 있었다.
한데 이렇게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렇게 또다시 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결전을 벌이다니! 아르센 뤼팽이 본래의 아르센 뤼팽으로 돌아왔다고나 할까? 기상천외하고 신출귀몰하며 대담무쌍, 호쾌무비한, 저 아르센 뤼팽의 모습으로 말이다!
세르닌 공작의 활약
르노르망 씨의 활약
5월 31일 아침, 모든 신문은 르노르망 씨 앞으로 된 편지에서 뤼팽이 바로 당일 날짜로 경비원 제롬의 탈옥을 예고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그중에서도 한 신문은 작금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썩 잘 요약하고 있었다.
팔라스 호텔의 그 끔찍한 살육은 어언 4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경찰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무엇을 밝혀냈나? 아무것도 없다.
단서는 다음 세 가지. 담뱃갑하고 L과 M이라는 글자, 호텔 관리실에 누군가 흘리고 간 옷 꾸러미. 하지만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냈는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경찰에서는 당시 2층에 투숙하고 있다가 미심쩍게 자취를 감춘 일부 여행객들을 의심하는 모양인데, 그들의 종적은 그 후로 어떻게 된 것인가? 신상 파악이라도 제대로 해놓았는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결국, 처음보다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 상황이고, 수수께끼만 더더욱 완강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리 시 경찰청장과 그 하급자인 르노르망 씨 사이에 불화가 싹트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총리로부터도 그리 시원찮은 대접을 받은 후자께선 현재 잠정적으로 사직서까지 제출해놓은 마당이란다. 따라서 케셀바흐 사건은 현재, 르노르망 씨와는 앙숙관계에 있는 치안국 부국장 베베르 씨에 의해서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후문이다.
요컨대, 엉망진창, 오리무중 그 자체라고나 할까?
하물며 상대는 일관된 정신력과 괴려, 눈부신 수완의 대명사인 뤼팽이다.
그럼 우리의 결론은 무엇일까? 그야 간단하다. 뤼팽은 기필코 5월 31일 바로 오늘, 스스로 예고한 대로, 자신의 공범을 유유히 빼내갈 것이 틀림없다.
르노르망 씨, 침몰하다
파버리-리베이라-알텐하임
“일단 보기에도 황홀할 지경이오. 보기에도 좋은 게 맛도 좋다더니...... 이봐, 시리우스, 너도 좋아할 것 같구나! 로쿠스타(로마시대 유명한 여자 독살[毒殺] 전문가. 네로 황제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도 모두 그녀의 힘을 빌려서 독살을 자행했다/역주)도 이보다는 더 잘 못 만들걸!”
그리고는 얼른 과자 하나를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덥석 집어먹은 시리우스가 잠시 꼼짝 않고 있더니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면서 즉사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세르닌은 하인들 중 하나가 급습할 것에 대비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면서 대차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우하하하하-이보게 남작, 앞으로 누구든 독살하고 싶을 때는, 먼저 자네 그 목소리부터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떠는 손부터 바로잡게나......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의심부터 사지 않는가 말이야......그나저나, 아까 살인은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알렌하임은,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꾸했다.
“칼로 하는 거야 싫어하지. 하지만 독살은 늘 내 구미를 당기거든...... 심지어 죽어가는 희생자가 무슨 맛을 느낄까 궁금하기도 하지......”
“빌어먹을! 러시아 귀족 나리를 실험대상으로 삼았으니 식성 한전 까다롭다고 해야겠구만!”
올리브색 프록코트
생각해보라, 아르센 뤼팽이 지난 4년간 치안국장으로 버젓이 행세를 해왔다니!!!
무려 4년이라는 세월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법적으로 그 직책에 부여되는 온갖 권리와 의무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여러 상관들로부터의 신망과 정부차원의 신임, 모든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아오면서 말이다!
지난 4년간 서민들의 안녕과 재산의 안전은 전적으로 아르센 뤼팽의 손에 맡겨진 셈. 그는 항상 법질서 구현을 대변해왔고, 선량한 다수를 보호해왔으며, 숱한 범죄자를 척결해왔다.
그가 그동안 일궈낸 업적이 어디 한둘인가! 공공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고, 범죄사건은 그보다 더 신속하고 확실하게 해결되어본 적이 없었다!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드니주 사건이라든가, 크레디리요네 도난사건, 오를레앙 특급열차 습격사건, 도르프 남작 살해사건 등......예상을 초월하는 사건해결과 대범한 활약상들은 세상 그 어느 유명한 형사들의 업적과 비교해도 하나 손상이 없는 공권력의 개가가 아니었던가!
언젠가 루브르 박물관 방화사건과 그에 연루된 범인 체포에 즈음하여 행한 연설에서, 총리인 발랑글레마저 르노르망 씨의 다소 임의적인 행동거지를 옹호해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 명석함으로 보나, 넘치는 활력으로 보나, 단호한 결단력과 일 처리 능력, 상상을 초월하는 수사방식과 무궁무진한 수완 등을 미루어볼 때, 무슈 르노르망은 우리에게 단 한 사람, 그가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딱 한 사람 비견될 만한 인물로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무슈 르노르망은 우리 사회에 헌신하기로 개과천선한 아르센 뤼팽 같은 인물이라고......”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그 르노르망 씨가 진짜 아르센 뤼팽이었던 것이다!
제2부
상떼-팔라스
현대사에 얽힌 수수께끼
뤼팽의 거창한 계략
담판
황제의 편지
7인의 도적
방금 들어온 한 남자가 옷걸이에다 펠트 천으로 된 검은 중절모를 건 다음, 작은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가르송이 메뉴를 가져오자 주문을 한 뒤, 그는 냅킨 위로 팔짱을 끼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꼼짝 않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뤼팽은 그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염 한 줌 없는 매끈하고 야윈 얼굴에 깊숙이 틀어박힌 안구에서 강철같은 느낌을 발하는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피부 자체가 마치 뼈와 뼈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양피지라도 되는 듯, 하도 뻣뻣하고 질겨서 어떤 털도 뚫고 자라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은 맥없이 음울하기만 했고, 어떤 표정도 꽃피울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상아와도 같은 느낌의 이마는 그 안에 어떤 생각도 깃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속눈썹조차 거의 없는 눈꺼풀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마치 조각상의 눈처럼 고착된 시선을 내쏘고 있을 뿐이었다.
뤼팽은 가르송 중 한 명을 불러 물었다.
“저 신사 분은 누구시오?”
“저기 점심 드시는 분 말입니까?”
“그렇소.”
“손님인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들르는 분입니다.”
“이름을 혹시 아오?”
“그럼요......레옹 마시에입니다.”
그는 문제의 사내를 열심히 관찰했다. 실제로 사내의 인상은 저 끔찍한 존재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도 일치했다. 다만 이글거리는 불꽃과 활력을 기대했던 눈빛만큼은 전혀 다르게, 완전히 맥이 빠져버린 죽은 눈빛이었다...... 저주받은 자의 고통과 혼란, 강인한 인상을 기대했던 곳에서 돌덩이 같은 무감각함밖에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뤼팽은 다시 가르송에게 말했다.
“저 분이 하는 일을 혹시 알고 있소?”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요......한마디로 좀 괴짜라고 할 수 있어요......늘 혼자 다니고요......말도 전혀 없지요. 심지어 여기서 그의 목소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주문도 메뉴에서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하니까요...... 식사도 20분 만에 후딱 해치우죠......그리고는 돈을 지불하고, 나가버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또 온단 말이죠?”
“4-5일에 꼭 한 번씩은 들르는 편이에요. 반드시 규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바로 그 자가 틀림없어! 그 자일 수밖에 없다구......말레이히 그 자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거야......저기 저 손으로 바로 사람을 죽인 거라구......저 머리 속에는 아직도 피 냄새에 취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괴물 같은 자식! 흡혈귀 같은 놈!......’
뤼팽은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하지만 과연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워낙에 상대를 해괴망측한 존재로만 상상하던 뤼팽에게는, 이렇게 왔다갔다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하며 살아 숨쉬는 모습이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살을 뜯어먹고 펄펄 끓는 생피를 빨아마시는 흉악한 짐승쯤으로 생각했던 존재가 저렇게 정상적으로 빵과 고기를 잘라먹고,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망타진
순간, 아르센 뤼팽은 뭐가 뭔지 그 전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분명 놀랄 만큼 기발한 착상으로 마련된 함정에 자신이 여지없이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되고, 조작된 것이다. 부하들과 격리된 것하며, 하인들이 배신하거나 또는 이유 없이 사라진 것, 그리고 하필 이때 자신이 마담 케셀바흐의 집에 뛰어든 것 모두가 말이다......
분명 모든 상황들이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짜 전화통신문이 이곳의 부하들을 집에서 빠져나가게 만들기 전이라도 뤼팽이 집에 도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전쟁은 뤼팽의 부하들과 알텐하임의 패거리들과의 한판 승부가 되었을 일이다. 한데, 지금까지 말레이히의 행동양식이나, 알텐하임을 살해한 일, 펠덴츠의 소녀를 독살한 일을 돌이켜보건대, 애초부터 함정은 뤼팽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었으며, 말레이히는 대규모 패싸움이랄지, 성가신 패거리들을 몽땅 쓸어버리는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뤼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단 마담 케셀바흐가 당장 위해를 당한 것은 아니라며,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또 울화통이 치미는지, 후닥닥 문을 박차고 옆방으로 건너가 상처를 입고 버둥대는 도적들에게 하나하나 발길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돈 다발들을 일일이 빼앗아 챙긴 다음, 각각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커튼 줄이든 이불이든, 옷감이든 닥치는 대로 주워서 손발을 묶은 뒤, 일곱 명 모두를 양탄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아 마치 소포 꾸러미들처럼 한데 엮어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는 있는 대로 야유와 저주를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꼬치구이가 따로 없구만! 기름이 좔좔 흐르는 요리가 따로 없어! 집단으로 천치들만 모아놓은 꼴이로군! 시체공시장(屍體公示場)에 널려 있는 익사체들 같지 않은가!......그런데도 네 놈들이 감히 뤼팽을 넘봐? 과부와 고아의 수호자이신 이 뤼팽을?......왜, 이제 와서 떨리나?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들......뤼팽은 공연히 사람을 해치진 않아......다만 뤼팽은 악당을 싫어하고, 자신의 의무를 잘 아는 정직 고결한 사람일 뿐이야. 생각해봐, 도대체 네 놈들 같은 깡패들하고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겠나? 뭐가 어째? 남의 목숨을 파리만도 안 여긴다구? 남의 재물은 죄다 네 놈들 걸로 보여? 법도 없고, 사회도 없고, 양심도 없다구?......맙소사, 주여......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가는 겁니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구요?......”
유럽 지도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구? 지난 수개월간에 걸쳐서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면서, 나는 내 원대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한 숱한 인물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각자의 줄을 움직여 조정해 왔었지. 하지만 그동안 그들을 제대로 고개 숙여 들여다보고, 그 머리와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피려고는 전혀 하지 않앗어...... 그러다보니 나는 지금 피에르 르윅이나, 주느비에프나, 돌로레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거야......그저 모두 내 꼭두각시인 줄만 알았는데, 펄펄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단 말이야......세상에, 이제 와서 이런 난관에 부닥칠 줄이야!......”
살인마의 정체
순간, 그에게는 한 가지 이해의 단초가 떠올랐다. 바로 광기! 그렇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텐하임의 동생이자, 이질다의 언니, 말레이히 가문의 여식으로서 정신병자 어머니와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둔 가엾은 운명......그녀 역시 정상적인 정신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면서 미쳤으니 참으로 괴이하기도 하지만, 분명 불균형한 정신적 질환으로 시달리는 정신병자인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든 게 확실해지는 듯했다. 모든 게 정신착란에 의한 범죄였던 것이다! 마치 자동인형처럼 어느 한 고착된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다보니,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 피비린내 나는 행위를 까마득히 의식하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녀가 무언가를 원해서 사람을 죽였고, 자신을 방어하느라고 또 사람을 죽였으며, 죽였다는 것을 감추르나로 또다시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광증을 설명해주는 것은, 그저 죽이기 위해서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녀 안에 잠재하는 살인마가 갑작스럽게 치밀어오르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욕구를 그 순간 충족시켜준 것이다. 그녀 삶의 어느 순간들, 어떤 상황들 속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대상이 느닷없는 적으로 돌변해, 그만 영문 모를 희생제물이 되었다고나 할까?
사람을 공격할 때 그녀는 격렬한 광증과 분노에 잔뜩 취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행각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기이한 광기! 순전한 맹목성 속에서도 늘 명철하고, 엄청난 혼돈 속에서도 항상 논리적이며, 부조리한 가운데 더없이 지적인 정신병자! 지극히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찬탄을 자아낼 만한 그 모든 계략과 집요함과 수완의 장본인!
예리한 통찰력이 다시금 자리잡은 뤼팽의 머리 속에는, 그간의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사건들과 더불어, 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걸어왔을 수수께끼 같은 인생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제일 먼저 남편의 계획에 포섭되고 완전히 사로잡힌 아내, 아마도 그 일부밖엔 이해하지 못했을 계획에 정신이 고착되어버린 돌로레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추적하고 있는 피에르 르뒥이라는 사람을 함께 찾아 헤매는 아내, 더 나아가 그와 결혼해서, 부모가 수치스럽게 쫓겨난 펠덴츠라는 자그마한 왕국으로 여왕처럼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는 돌로레스의 모습 또한 떠올랐다.
다음으로, 모두가 몬테카를로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팔라스 호텔, 자기 오빠인 알텐하임의 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돌로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을 감시하면서, 미로처럼 얽힌 벽을 따라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늘에서 그늘로 서성이는 검은 복장의 돌로레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밤, 꽁꽁 묶인 케셀바흐를 발견하고는, 찔렀다.
다음날 아침, 호텔 사환에 의해서 발각될 처지에 놓이자, 또 찔렀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이번엔 채프먼에 의해서 들통날 것 같자, 그를 오빠의 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역시 찔렀다.
이 모든 것이 전혀 감정의 동요 없이 지극히 잔인하고 맵시 있게 이루어졌다.
“기고만장해진 나는 멍청하게도, 그녀가 만들어놓은 두 창고 사이의 통로를 고발했고,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증거들을 좋다고 제시했으며, 그녀가 위조해놓은 서류들을 토대로, 레옹 마시에가 남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원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이 드 말레이히라고 버젓이 주장을 하고만 거야......결국 루이 드 말레이히는 죽음을 선고받았지! 반면 돌로레스 드 말레이히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말이야. 범인이 붙잡혔으니, 모든 의혹이 단번에 가신 거 아니겠어? 게다가 남편과, 오빠, 동생, 두 하녀와 슈타인벡이 모조리 죽었고, 성가시게 된 부하들은 내가 대신 나서서 베베르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니, 이제 그녀의 범죄와 야욕으로 얼룩진 과거는 깨끗이 청소가 된 셈 아니겠느냐구! 이제 자기를 대신해 내세운 결백한 사람이 나 때문에 교수대에 오르기만 하면, 바야흐로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결정적으로 자유롭게 벗어나서, 앞으로는 피에르 르뒥의 사랑을 받는 백만장자, 당당한 돌로레스 여왕만이 존재하는 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뤼팽은 저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
“아! 그 자가 절대로 죽어선 안 돼! 내 목숨을 걸고 맹세컨대,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구!”
에필로그: 자살
해설: 「813의 비밀」의 역사적 배경
500여 쪽을 뛰어넘는 이 파노라마를 거쳐오면서 머리가 뻐근해지셨을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그 사실적 요소와 허구적 요소를 다시 한 번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는 것도 독후(讀後) 감상을 구체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실적, 즉 다큐멘터리적 요소.
되-퐁(츠바이브뤼켄)은 대대로 영주가 군주로서 군림하다시피 하는 대공령(혹은 대공국)이다. 나폴레옹 시절에 잠깐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19세기 초부터는 다시 헤르만 1세 대공의 영지로 귀속되는데, 불행히도 그 방탕한 아들 헤르만 2세에 와서 독립된 공국(公國)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 즉 독일제국의 일개 변방지역으로 편입된 것. 당시 독일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는 이 헤르만 2세를 자기 휘하에 두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치를 정도로 애지중지한다. 헤르만 2세 역시 전장에서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인 헤르만 3세를 수상에게 맡겼고,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스마르크의 외교밀사로 눈부신 활약을 벌인다. 수상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도 정계를 떠나 드레스덴에 정착했고, 수상이 죽은 뒤 2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뜬다. 모리스 르블랑은, 슈타인벡 영감의 입을 빌려서, 여기까지가 모든 독일인에게 두루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얘기함으로써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임을 암시한다.
이제 저자는 이 대공 가문의 비운의 역사와 잊혀진 땅 되-퐁-펠덴츠 대공령을 거점으로 해서 기상천외한 허구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 허구의 실마리는 소설 속에서 일종의 ‘보물지도’처럼 대접받는 ‘황제의 편지’이다. 비스마르크 수상이 재직할 당시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서 작성되었다는 이 편지는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로 벌인 일종의 외교적 밀약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자고로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이란, 때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으로, 때로는 끼리끼리 나눠먹기식의 밀약으로 세계 여러 지역을 난도질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국가간의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줄다리기가 빈번했을 테고, 그 와중에, 하긴 이와 같은 ‘비밀편지’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특히 당시까지도 예민한 사안이었던 알자스-로렌 문제와 관련한 극비(極祕)의 ‘검은 거래’가 내용이라고 상정함으로써, 그 편지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카이저 황제와 아르센 뤼팽, 그리고 또 하나 허구의 축(軸)인 말레이히 가문이 서로 노리는 그야말로 ‘보물지도’가 된다. 카이저 황제는 알자스-로렌 지방의 안정적 확보와 선왕의 명예를 위해서, 아르센 뤼팽은 딸의 행복과 세계 경영의 야망을 위해서, 그리고 말레이히 가문은 3대에 걸친 한을 풀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역시 되-퐁-펠덴츠 대공령! 광인 집안으로 낙인찍혀 그곳에서 쫓겨났던 말레이히 가문에게는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할 ‘복수의 터전’이며, 뤼팽에게는 딸의 보금자리이자 세계경영의 거점이 바로 그 잊혀진 땅인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원주인이었던 되-퐁가(家)의 마지막 후손 헤르만 4세(피에르 르뒥)를 꼭두각시로 전면에 내세워 현재 독일의 한 지방이 되어 있는 그 땅을 엄연한 공국(公國)으로서 되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의 카이저 황제가 꼼짝 못할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알자스-로렌 관련 밀약이 담긴 ‘황제의 편지’인 셈이다. 결국 모든 야망와 복수극은 좌절되고 편지는 카이저 황제의 수중으로 돌아가게끔 결론지음으로써, 모리스 르블랑은 허구를 허구의 테두리 안으로 되돌리고 역사적 실재는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창작의 묘를 발휘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당대의 현실을 떠나지 않았던 아르센 뤼팽 시리즈......이처럼 분명한 역사적 실재와 황당무계한 허구를 절묘하게 조합하되, 그 각각의 한계를 존중했다는 것도, 수많은 당시 대중의 호응과 사랑을 받았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