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개역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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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이라는 책이 있다. 아마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누구나 겪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똑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하고 공감만 하게 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하고, 또 얼마 전에도 여행을 다녀온 나로서는 매번 여행을 갈망하고 다녀올 때마다 만족하지만 똑부러지게 나의 감정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대지 못해 약간 막연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 감정의 정체를, 이유를...

 

어쩌면, 보통은 피곤한 삶을 자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활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범위보다 훨씬 넘칠 정도의 섬세함, 예민함... 그냥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단순한 삶이 어쩌면 가장 행복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굳이 내 감정의 이유를 똑똑히 알아야만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가 좋을 때, 누군가를 사랑할 때, 특별한 이유를 대지 못 할 때 오히려 더 그 마음이 순수한 것처럼...

 

보통처럼 마음의 정체, 감동의 이유를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뭔가 불편해지는 사람, 에게는 딱인 책이지만 어쩌면 이 책으로 인해 더 상념이 많아질 수도 있겠다. 보통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감탄할 정도의 통찰력과 함께 책을 덮고 난 후에는 내 삶에 대한 사색을 뒤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기대에 대하여...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화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리를 잡았다.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매혹적인 사람이 이국적인 땅에 가게 되면 자신의 나라에서 가지고 있는 매력에 그 사람이 있는 장소가 주는 매력이 보태진다.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사랑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사랑할 때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는 빠져 있는 가치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따라갈 것이다.

 

호기심에 대하여...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듦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숭고함에 대하여...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가보았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곳 또는 무관심하게 지나친 곳들 가운데 어떤 곳들이 가끔 눈에 번쩍 띄면서 우리를 압도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들은 서툴게나마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질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곳은 예쁘지도 않고, 안내 책자에서 아름다운 곳을 설명할 때 흔히 꼽는 분명한 특징 같은 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 [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두 사람이 클레어 시장에 걸어 들어간다고 해 봅시다. 둘 가운데 하나는 반대편으로 나왔을 때도 들어갔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버터 파는 여자의 바구니 가장자리에 파슬리 한 조각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을 간직하고 나왔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그 이미지들을 자신의 일에 반영시킬 것입니다."

 

옮긴이의 글...

 

세상에는 비싼 돈 들여 아까운 시간을 쪼개 여행을 하면서 '왜 나는 여행을 하는가'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며칠만 못 봐도 조바심을 내면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듯이. 그런 질문이 삶을 더 윤택하게 해주는지 피곤하게 만드는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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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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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의 수필은 좋아할 것 같다.

 

나 역시 그렇다.

최근작 1Q84도 그렇고... 그가 과대평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시대의 흐름에 맞추고 있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소설은 나에게 물음표이다.

 

하지만 그의 수필은 확실히 느낌표이다.

 

독특하면서도 생산적인 취미, 거침없어 보이지만 다소 소심한 성격이 있다는 것이 얼핏얼핏 드러나는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하루키는 확실히 수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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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신현림 시인의 흔들리는 청춘들을 위한 힐링 응원 에세이
신현림 지음 / 예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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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의 개정판이다.

 

어디로 간 거야 대체?라는 물음에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구판과 개정판 사이에 아마도 저자의 깨달음이 있었으리라.

 

서른을 앞둔 나와 친구들은 제 2의 사춘기, 최고의 성장통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20대 초반이라, 이 책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었다.

 

서른이라고 하면, 뭔가 지금의 나와는 다른, 깊이라고 할까, 깊은 고독, 깊은 슬픔...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극한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지금의 나는 꿈꿔보지도 못하는 미지의 세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너무 가벼워서(?) 의외로 신선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삼수, 이혼, 싱글맘... 이런 가운데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삶을 긍정할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나 또한 서른을 눈앞에 두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는데, 그래서인지 일부 작가, 특히 젊은 여류 작가(나 또한 여자이면서 이런 분류를 하는 것이 너무나 싫긴 하지만)의 징징대는 듯한 그 느낌이 책에서 읽힐 때마다 정말 싫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외로움, 삶의 좌절등을 마치 자기만이 아는 것처럼 극대화시켜서 구구절절 풀어야 할까, 고작 그 정도 가지고 혼자 삶의 무게를 다 짊어진 것처럼. 이런 생각에.

 

신현림은 여자로서 불행하다면 불행했을 것이고 아마 지금도 마냥 즐거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때 이 책이 참 가볍구나, 하고 생각했던 내가 당시 인생을 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고통을 지나면서도 이렇게 가볍고 산뜻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낼 정도이면 그 동안 얼마나 절절하고 깊은 시간을 견뎌내고 삶을 긍정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지만 기특하게 여겨질 정도다.

 

얼마전 여행프로에서 그녀와딸이 여행을 간 것을 본 적이 있다. 프로 자체는 아주 인기있는 프로가 아니어서 지금도 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정확히 어느 나라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도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초등학생이었던 그녀의 딸과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하고, 또 너무나 평범해보였다. 심지가 굳은 작가, 삶을 긍정할 줄 아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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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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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위로를 받았다.

 

솔직히 나의 꿈이 욕심으로 느껴지고, 이제 슬슬 타협하고 싶다고, 편해지고 싶다고,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그런 내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어쩌면 이 책 때문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지만, 나를 일으켜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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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근사近似하다'는 말. 내가 아는 뭔가와 닮았다는 말. 그래서 거기 아무리 많은 불빛들이 반짝인다고 해도 그중에 무엇이 아름다운 불빛인지 우리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지금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는 청년이 있다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람을 사랑해왔다고 고백하는 셈이에요. 아름다운, 그러니까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과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찬사는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는 말이 아닐까요. 방바닥에 태양계의 그림을 그리든, 공원을 걸어가면서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말하든, 그게 아니라면 지금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가리키든, 어떤 식으로든 "마찬가지로 지금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고 말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우리 인생보다 더 오래가는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의, 또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는다는 점이죠. 그런 까닭에 때로는 그게 훨씬 더 고통스럽기도 해요.

스물일곱 살 무렵이었어요. 소설만 쓰겠어, 라고 맹세하기에는 앞날이 감당이 안 되더군요. 인생, 별거 있겠어? 한 이틀 정도 고민하다가 회사에 취직했어요. 취직이 제일 쉬웠어요, 라고 말하려니까 지금 생각하면 행복한 고민이었네요. 그게 제일 쉬워보여서 회사에 들어갔다가 죽을 고생을 다 했답니다. 그 다음에 다들 아는 진리를 깨달았어요.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오히려 쉽다고 생각해서 더 고생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런 기대일랑은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편해 보이는 길과 힘들어 보이는 길이 있으면 무조건 힘들어 보이는 길을 택했습니다. 뭐, 고민할 게 없어서 좋더군요. 그 뒤로 지금까지는 별 불만이 없어요. 역시 아큐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게 죽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우린 우리 나름의 방식대로 죽을 권리가 있답니다. 남들처럼 살기도 싫지만, 남들처럼 죽기도 싫어요.

뭔가가 우리를 막아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그걸 뚫고 지나가는 일입니다. 계속 달리세요. 끝까지. 멈추지 말고. 계속 움직이세요.

시간이 지나면 우리도 알게 되겠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대신에 돌아보면 그런 시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 됐다는 걸.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어쨌거나 우리는 충분히 살게 될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요. 지나온 모든 시간은 저절로 소중한 시간이 될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들 지지 마시길.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사시길. 다른 모든 일에는 영악해지더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 앞에서는 한없이 순진해지시길. 지난 일 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우리라는 것. 나는 변해서 다시 내가 된다는 것.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자는 말은 결국 그런 뜻이라는 것. 우리는 변하고 변해서 끝내 다시 우리가 되리라는 것. 12월 31일 밤,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겨울나무가 새해 아침 온전한 겨울나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지난 팔 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썼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지난 팔 년 사이에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사람이 돼 갔다는 점이다.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아주 서서히, 하지만 지나고 보니 너무도 분명하게. 소설가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됐다. 그건 전적으로 매일의 글쓰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말하고, 그건 생각으로 들리고, 눈으로 읽힌다. 날마다 우리가 쓰는 글은 곧 우리가 듣는 말이며 우리가 읽는 책이며 우리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쓰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잔인한 고통의 말들을 쓰고, 듣고, 읽고, 생각하겠다고 결정하지 말기를. 그런 건 지금까지 우리가 들었던 부주의한 비판들과 스스로 가능성을 봉쇄한 근거 없는 두려움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뭔가 선택해야만 한다며, 미래를 선택하기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본 뒤에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말들을 쓰고, 듣고, 읽고, 생각할 수 있기를. 그러므로 날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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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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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름답고 눈물겹고 소중한 책이다.


 

-선생님은 이제껏 계속 항암치료 중에 영미시산책을 쓰셨잖아요. 어떻게 견디십니까?

“재미있는 것은, 항암치료도 자격을 필요로 해요. 단단히 맘먹고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백혈구 지수가 낮게 나와서 치료를 못 받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게 제일 안타까웠지요. 방사선 치료 때도 힘들었구요. 척추에 방사선을 쪼이면 식도가 탑니다. 물 한 방울만 먹어도 마치 칼을 삼키는 듯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는 창 밖을 보면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참으로 한심했지요. 그렇지만 오늘 하루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다시 살아보자, 그러면 내일은 나아지겠지, 그런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고통이 끝날 때가 있으리라고 믿었어요.”

-이제 칼럼을 끝내고 나면 무얼 하실 건가요.

“일단은 항암치료를 끝내야겠지요. 아직 반 정도밖에 치료를 받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이 시들로 정말 예쁜 그림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어요...”

위 글은 2005년 5월 말, 조선일보에 1년간 연재하던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을 끝낼 때 박해현 기자님이 쓰신 ‘본지 칼럼 끝내는 장영희 교수’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지금 이 기사를 읽어보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정말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도합 스물네 번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정말로 이렇게 예쁜 그림이 들어간 예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고통이었지만, 분명 끝이 있었습니다.

한 달 전쯤인가요, 이 책의 교정을 보고 있는데 출판사 편집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이 책은 희망에 관한 시들을 모았으니까 제목을 ‘희망’으로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희망에 관한 시들이니까 ‘희망’이라는 제목을 준다-그것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 멋대가리 없고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운치 없고 재미없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시집의 제목인데 너무 ‘시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는 그렇게 사전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정보 위주의 선전문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상을 보고 그냥 ‘이건 책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가 될 수 없지요. 그 책상에서 친구와 함께 공부했던 추억, 그 친구의 얼굴, 그 시간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그 책상에 대해 마음과 이미지로 말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래서 시는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웅변으로 말하기보다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조그만 소리로 말하는 것, 신작로처럼 뻥 뚫린 길을 놔두고 향기로운 오솔길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인 칼 샌드버그는 시란 문을 활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문을 열었다 닫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희망을 그냥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을 활짝 열고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다가 며칠 전 책상에서 문득 사서함 주소가 적힌 봉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였습니다. 선생님이 병중에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읽었다는 말, 평소에 선생님 글을 좋아했는데 참 안타깝다는 말, 용기를 가지라는 말 등을 달필로 적어 내려가다가 그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이곳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축복-갑자기 내 머리위로 향기로운 꽃 폭죽이 처지듯, 그냥 듣기만 해도 마음을 기쁘고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희망이 축복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어쩌면 신이 우리에게 준 최대의 축복입니다. 희망을 가짐으로써 내가 더 아름다워지고,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워진 내가 다시 누군가를 축복하고(축복은 늘 내가 나 스스로에게가 아니라 남에게 주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 눈부신 세상을 만나고 더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신이 내리신 축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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