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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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름답고 눈물겹고 소중한 책이다.


 

-선생님은 이제껏 계속 항암치료 중에 영미시산책을 쓰셨잖아요. 어떻게 견디십니까?

“재미있는 것은, 항암치료도 자격을 필요로 해요. 단단히 맘먹고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백혈구 지수가 낮게 나와서 치료를 못 받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게 제일 안타까웠지요. 방사선 치료 때도 힘들었구요. 척추에 방사선을 쪼이면 식도가 탑니다. 물 한 방울만 먹어도 마치 칼을 삼키는 듯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는 창 밖을 보면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참으로 한심했지요. 그렇지만 오늘 하루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다시 살아보자, 그러면 내일은 나아지겠지, 그런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고통이 끝날 때가 있으리라고 믿었어요.”

-이제 칼럼을 끝내고 나면 무얼 하실 건가요.

“일단은 항암치료를 끝내야겠지요. 아직 반 정도밖에 치료를 받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이 시들로 정말 예쁜 그림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어요...”

위 글은 2005년 5월 말, 조선일보에 1년간 연재하던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을 끝낼 때 박해현 기자님이 쓰신 ‘본지 칼럼 끝내는 장영희 교수’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지금 이 기사를 읽어보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정말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도합 스물네 번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정말로 이렇게 예쁜 그림이 들어간 예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고통이었지만, 분명 끝이 있었습니다.

한 달 전쯤인가요, 이 책의 교정을 보고 있는데 출판사 편집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이 책은 희망에 관한 시들을 모았으니까 제목을 ‘희망’으로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희망에 관한 시들이니까 ‘희망’이라는 제목을 준다-그것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 멋대가리 없고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운치 없고 재미없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시집의 제목인데 너무 ‘시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는 그렇게 사전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정보 위주의 선전문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상을 보고 그냥 ‘이건 책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가 될 수 없지요. 그 책상에서 친구와 함께 공부했던 추억, 그 친구의 얼굴, 그 시간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그 책상에 대해 마음과 이미지로 말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래서 시는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웅변으로 말하기보다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조그만 소리로 말하는 것, 신작로처럼 뻥 뚫린 길을 놔두고 향기로운 오솔길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인 칼 샌드버그는 시란 문을 활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문을 열었다 닫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희망을 그냥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을 활짝 열고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다가 며칠 전 책상에서 문득 사서함 주소가 적힌 봉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였습니다. 선생님이 병중에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읽었다는 말, 평소에 선생님 글을 좋아했는데 참 안타깝다는 말, 용기를 가지라는 말 등을 달필로 적어 내려가다가 그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이곳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축복-갑자기 내 머리위로 향기로운 꽃 폭죽이 처지듯, 그냥 듣기만 해도 마음을 기쁘고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희망이 축복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어쩌면 신이 우리에게 준 최대의 축복입니다. 희망을 가짐으로써 내가 더 아름다워지고,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워진 내가 다시 누군가를 축복하고(축복은 늘 내가 나 스스로에게가 아니라 남에게 주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 눈부신 세상을 만나고 더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신이 내리신 축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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