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맨 앞장에,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적혀 있는 글귀가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영국 런던의 저자가 노자의 도덕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라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의 원제가 Straw dogs, 바로 짚으로 만든 개라고 한다.

 

2008년까지 런던 정경대학의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했다는 이력을 보면, 동양 사상에도 꽤 정통한 학자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하고, 감사의 글에 아내 미에코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있는데, 아마도 아내는 일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간, 2장 기만, 3장 도덕의 악덕, 4장 구원받지 못한 자들, 5장 비非진보, 6장 있는 그대로 이다. 책의 맨 앞장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 또한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책은 절대로 두껍지 않기 때문에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이 책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나면 드는 생각이, 그럼 대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냐, 진보라는 것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면 모든 인간은 지금부터 성장을 멈추고 본능에 충실하며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혹은 그저 그냥 다같이 손잡고 뛰어내리라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다 보고 나서 떠올랐던 영화는 <인터스텔라>였다. 포스터의 그 글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라는 바로 그 문구. 어쩌면 그 영화는 이 책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겠지. 인간은 답을 구할 것이고, 그 답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하며, 가장 밑바닥에는 인류애가 깔려 있음을 전제하는 그 영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의문이 들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이 가능했던, 흑인 노예제를 인정했던, 그것 때문에 전쟁마저 일어났던 미국의 현 대통령은 유색 인종으로 재선에도 성공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가장 큰 미덕이 살림과 육아였던 우리나라 여자들의 경우, 활발한 사회 진출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미국에서 인종 차별의 문제는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범세계적인 연구에서 여권이 후진국에 속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상승하고 있지는 않지만, 때로는 후퇴한 적도 있어서 그 그래프는 삐뚤삐뚤할 지언정 방향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유색 인종, 그리고 유럽의 여성들에게 수십 년 전, 그들의 선조에 비해 당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지, 만약 수십 년 전에 당신이 태어났더라면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지 묻는다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보건대, 48년생, 영국 출신, 백인 남성이라는, 자신의 삶에서 어쩌면 단 한번도 마이너리티에 속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이력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 나온 수많은 논거들은, 사실 이 작가의 사상의 정반대의 논지를 가지고 누군가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에도, 그 논거로 충분히 이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 작가의 논거가 약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의 경우처럼,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수많은 자료와 연구를 통해 키워드를 도출해 낸 방식으로 이 책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작가는 처음 이 책에 착수할 때부터, 아니, 몇 년 전부터 이미 자신의 생각을 정해놓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온갖 근거를 끌어다가 연관성을 도출하여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세상을 살았던 철학자라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모를 수가 없으리라. 속된 말로, 이꼴 저꼴 안 본 게 없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상가들, 소설가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냈다. 마치 진흙 속에 있는 진주를 파내듯이. 솔직히 말하면, 이 작가도, 책도 얄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보았을 때는 선뜻 책을 읽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는 사실. 아니 외면하고픈 이야기.

 

 

불교용어 중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는 말이 있다. 생로병사(生)

 

사람 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큰 고통. 

 

이라고 불교에서는 정의하고 있으며, 사실 인간의 일생을 요약하면 딱 이게 다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병이 들고 마침내 사망하게 되는.

 

인생의 나머지는 전부 곁가지이다.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자손을 남길 수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평생 가난하게 살 수도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고 평생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유명하더라고, 아무리 권력이 있더라도, 태어나서 노화과정을 지나 병들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사실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맞닿아서야 삶은 절실해진다. 질병도 마찬가지. 병이 들었을 때여야 우리는 건강에 대해, 육체에 대해, 삶에 대해 더 진지해질 수 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어쩌면 생로병사일지도 모른다. 목차만 보더라도 유년기와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며, 책의 가장 첫 장의 제목은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이다. 즉 인간의 모든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으며, 그 이야기는 아버지와 작가 자신,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한 가정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소설가이며,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다. 젊은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며 그들의 성적을 매기는 사람이며, 한편으로는 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직업적인 특성이 이 글에 잘 드러난다. 의학적인 지식과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 철학적인 인용과 인생에 대한 각종 통계들이 어우러진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우리'란 당연히 이 책을 읽는 이들을 포함한 인간 전부. 그러나 이 책의 바탕은 자신의 회고록이자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부모와 자녀를 떠올리며 과연 나의 삶은 어떻한가?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가 단순히 에세이에 그치지 않는 것은, 객관적인 통계, 생물학적 지식, 인문학적 사유가 글 전체에서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자 특유의 유머가 곁들어진다. 문학적 향기를 지닌 교양서적. 언젠가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

 

--------------------------------------------------------------------------------------

1. 원시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파악반사와 모로반사. 아마도 번역하는 분이 영어단어 그대로 번역한 것 같은데 '움켜잡기 반사'는 파악반사, '놀람반사' 혹은 '포옹반사'는 모로반사가 정확한 용어이다. 신생아 시절에 있다가 점점 크면서 없어지는 반사인데, 용어와 내용만 알 뿐 어차피 없어질 반사가 왜 있는지 궁금했다. 아기가 어미의 털에 매달려 다녀야 했던 진화단계에서 유용했을 파악반사, 유인원 아기의 몸이 공중으로 떨어질 때, 최대한 펼쳐져서 어미가 떨어지는 아기를 잡아내기 쉽게 해줄 모로반사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이 걸 알고 공부했으면 더 암기하기 쉬웠을 텐데.

 

2. 글쓴이의 아버지의 성은 실드크라우트. 유대계였던 그는 2차 대전 당시 선임 하사관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 실즈라고 줄여서 불렀다고 한다. 36개월 동안 그 이름에 익숙했던 나머지 제대 후 실즈로 개명했다고. 미국은 개명이 쉬운 나라인가보다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얼마전까지 개명이 쉽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 좀 더 절차가 간단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을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유대계라는 것을 감안해서인지, 일제 강점기 시절 창씨개명의 역사가 떠올랐다. 성을 갈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내놓겠다는 선비들도 있었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죽기보다 더한 치욕이라고 생각했던 선조들이었는데, 누구보다 잘 뭉치고 애국심이 강한 유태인들이 의외로 발음하기 힘든 성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좀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아는 경우는 나탈리 포트만처럼 영화배우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3.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 아버지의 병원 방문에 동행한 작가가 의사에게 사춘기 딸에 대해 상담한 내용이다.

나는 철저한 프로이트적 관점을 지닌 아버지의 주치의에게 왜 10대 딸은 엄마에게 그렇듯 비판적이냐고 물어보았다. 의사가 대답했다. "10대의 몸에는 호르몬 에너지가 미친 듯이 돌고 있는데, 그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엄마에 대한 분노로 표출됩니다. 딸은 자신이 가임기가 되면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그 떄문에 가족이 자기를 더 존중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꺠닫는 것 같아요. 가족의 영속은 이제 딸에게 달렸지요. 딸이 그 영역으로 들어옴과 맞물려 엄마는 그 영역을 떠납니다. 엄마와 딸의 분쟁을 놓고 가족이 의논을 한다면 아빠들은 틀림없이 딸 편을 듭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누이에 대해 그런 입장을 취했던 것 같지 않은데. 어머니가 계속 집안을 호령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딸 편을 들지요. 가족이 생산력 높은 여성을 우선 보호하도록 유전자가 몰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딸이 엄마에게 느끼는 분노는 가임 능력을 통해 얻은 권력의 맛과 아이 낳는 사람으로 지정된 데에 대한 부담감이 섞인 것입니다." 옆에 앉은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이고 으흠거리고 간간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른다. 올림포스적 견해를 갖춘 자신의 주치의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실제로 이 현상에 대한 용어가 별도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엘렉트라 컴플렉스에 대해 의사가 쉽게 설명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4. 실드클라우트라는 이름을 가진 배우 두 명이 등장한다. 조지프, 그리고 루돌프. 나는 안네 프랑크에 어느 정도 열중했던 청소년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는 영화에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를 연기했고, 1938년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다는 조지프 실드클라우트가 특히 궁금했다. 그가 출연했다는 <에밀 졸라의 삶>을 검색해보아도 찾기가 힘들었다. 겨우 찾아낸 결과, 그를 우리말 표기법으로 표기하면 조셉 쉴드크라우트, 영화는 <에밀 졸라의 생애>, 그리고 <안네의 일기>였다. 특히나 안네의 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EBS에서 방영이 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1959년 작으로,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고. 평점도 참 좋았다. 흑백 영화 속의 조셉 쉴드크라우트의 젊었을 적 모습은 눈, 코, 입의 윤곽이 뚜렷하고 이마가 반듯하여 지적이면서도 예리한 느낌이었다.

 

5.

중년의 위기를 겪는 남자들이 저지른다는 진부한 행동들, 가령 바람을 피운다거나 빨간 스포츠카를 산다거나 하는 일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볼 때 '희미해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딜런 토마스의 시 「순순히 저 휴식의 밤에 들지 마십시오 Do not gentle into that good nigth」-옮긴이) 류의 심오한 반항이다.

이 부분이 반가웠던 것은, 바로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저 구절이 참 자주도 나왔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무리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영화 전반에서 도드라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더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구 멸망을 눈앞에 둔 노인이 담담하게 저 부분을 읊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아무리 발버둥쳐보았자 피할 수 없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그 무엇,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인간의 노력이 참으로 부질없어 보이는 그 때에도 끝까지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 영화에서 보여주었다. 이 부분에서도 아마 비슷하게 인용되었을 것이고.

 

6. 최근 몇 년, 그러니까 현재 97세인 아버지가 94세까지 육체적 질병을 거의 앓은 적이 없었던 반면, 아직 50대 초반인 저자는 10년 동안 요통으로 수많은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만난 의사와의 만남을 묘사한 부분이다.

처음 면담할 때, 그는 참으로 많은 환자들이 자신은 요통 환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해버린다고 강조했다. 그럼으로써 환자가 아닌 삶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헤링 박사에 따르면 세계무역센터 자살 테러범들도 그런 '프로 환자'들과 비슷하다. 자신의 고통과 피해의식에 대한 도취만이 자기 존재에 질서와 의미를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묘한 주제였지만 나는 이해했다. 자진해서 자살 테러범이 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아, 절묘하다. 환자들 중 자신의 질병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사람들을 테러범과 비교한 이 부분은, 이 책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꼽는 몇 몇 부분 중 하나다.

 

7. 이 책에서는 내내 ~세에는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이 얼만큼 뒷걸음치는지 알려준다. 특히 노년기 장에서 더욱 그런데 예를 들면 60세가 되면 근력이 20퍼센트, 70세가 되면 40퍼센트 떨어지며 심폐능력은 65세쯤 30퍼센트 떨어지고 뇌 세포의 10분의 1이 사라진다는 식이다. 이런 수치들이 책 전반에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솔직히 아직 젊은 나는 이런 수치를 일일이 읽는 것 자체가 귀찮아져서 대강 넘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등장한 문장.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화로 인한 피해를 가장 확실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젊을 때 관리하는 것이다. 노화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때에 말이다.

아마 내가 지금보다 10여년, 혹은 20년 정도 나이가 들었더라면, 읽는 내내 생각이 완전히 달라겠지. 바로 지금부터 관리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 구절대로라면. 관리의 필요성을 몸으로 느낄때는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인가.

 

8.

적포도주에 함유된 항산화제 성분인 레스베라트롤을 섭취한 초파리는 다른 파리들보다 상당히 더 오래 살았다. 레스베라트롤 속의 시트루인이라는 분자는 포유류의 노화 속도를 늦춘다는 칼로리 제한법과 효과가 비슷하다. 살아 있는 생물의 몸은 번식하도록 고정 배선되어 있다. 그런데 저칼로리 식단을 유지하면 지금이 번식에 최적의 상태가 아니라는 신호가 온몸으로 전달된다. 세포의 방어체계가 강화되어 노화가 늦춰진다. 번식에 보다 친화적인 미래 시절을 기약하며 몸을 보전하는 것이다. 칼로리 제한법을 따르면 체내에 저장된 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하고, 몸은 지금이 생존을 위해서 복지부동할 때라고 판단하게 된다. (중략) 기아 상태에 가깝게 식단을 유지하면 종양이나 콩팥 문제,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뇌 장애, 파킨슨병 같은 퇴행성 질환 등 상당수 노화 관련 질병의 발병률이 극히 낮아딘다. 칼로리를 40퍼센트 제한한 쥐들은 수명이 30퍼센트 길어졌다. 15년 동안 칼로리가 30퍼센트 적은 식단을 섭취한 원숭이들은 더 오래 살았고 많은 노화 관련 질병을 면했다. 사람의 경우에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의 발병률은 칼로리 섭취량과 밀접하게 비례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잉여으 수명을 얻고 질병을 피하는 것이 칼로리를 40에서 50퍼센트씩 줄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아버지는 그것이 순전히 수사학적인 질문이라고 대응했다. 나는 지적했다. 20년 동안 치즈케이크를 참아온 삶이 57세에 버스에 치여 죽을 수도 있잖아요. '인생은 늘 6대 5로 지는 도박이다'라고 한 데이먼 러니언(아버지가 영웅으로 받드는 사람들 중하나로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이다)의 말도 인용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나는 그 확률을 반반으로 만들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뿐이야." 아버지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이라면, 소식이 장수의 비결이니 어쩌니 해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 인생의 즐거움중 하나를 줄일 수 있지 못한다. 나만해도 그렇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체중 조절을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수십 년 후 성인병을 걱정해야 할 지도 모른단는 생각이 든다. 사리에 맞는 말 같지는 않지만, 이른바 사회적으로 보기 좋은 몸매, 라는 것이 식탐이 큰 나에게는 어느 정도 식욕을 떨어뜨리는 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9. 인터넷만 들어가면, 장수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는 것은 정말 쉽다. 하도 많이 포털 사이트 메인에 노출되었기에, 이제는 이런 목록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적게 먹고 살을 빼는 확실한 방법 외에도 시골로 이사해야 하고, 회사 일을 집으로 갖고 오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반려동물을 들이고, 휴식하는 법을 배우고, 현재만 생각하고, 웃고, 음악을 듣고, 하루에 예닐곱 시간을 자야 한다. 장수하는 부모와 조부모를 두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수명의 35퍼센트는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결혼을 하고, 포옹하고, 손을 잡고,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고, 많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고,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손자들을 돌봐야 한다. 교육을 잘 받고, 뇌를 자극하고, 새로운 일을 배워야 한다.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화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발산하고, 언제나 옳아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싱겁게 먹고, 때때로 초콜릿을 먹고, 과일과 야채와 올리브기름과 생선과 가금류로 구성되는 지중해식 식단을 따르고, 녹차를 많이 적포도주를 적당량 마셔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아야 하고, 정신과 상담을 꺼리면 안 된다. 자원봉사를 하고, 공동체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에 다니고,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아버지의 점수는 42점 만점에 38점.)

이런 기사를 보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나 도덕교과서 같은 말씀들이라 오히려 신뢰가 가지 않을 떄가 있었다. 이게 정말 맞아? 아닌 거 같은데? 오래 사는 건 결국 일종의 운 아닌가? 그런데 아흔 살이 넘어서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는 저자의 아버지는 100점 만점으로는 90점 이상. 나도 한번 해 봤는데 간신히 70점을 넘는 것 같다. 이뿐만 아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기적인 면도 있나보다.

예전에 내털리의 탁아소 선생님이었던 분이 지금 암센터의 외래병동 관리자로 일하는데, 그분에 따르면 '병을 이기는 것은 항상 재수 없는 인간들이다'. 아버지는 재수 없는 인간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이다.

옆에서 보면 그악스러울만큼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 늙어서도 자신의 권리를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끝까지 투쟁하며 싸우는 사람이 결국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던 일. 결국 삶이란 것은, 불확실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아둥바둥하며 살아남는 것,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아들인 저자와 아버지의 성격은 상당히 다른데, 만약 이 책의 주인공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은 힘들었을 수도 있고 다 읽고 나서는 어쩌면 우울증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면, 그 다음 우리 사고의 진행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죽는 것, 기를 써봤자 뭐해. 이것이 첫번째. 그러니까 더 이 악물고 살아남아야지. 그것도 오래오래. 이것이 두번째. 저자의 아버지는 당연히 두번째 유형이다. 그리고 저자 역시 그런 아버지에 대해 때로는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순간적으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결국 생에 대한 강한 집착이 어느 정도는 유전되어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어차피 허무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인생, 그럴수록 있는 힘껏 기를 써가며, 아둥바둥해가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

 

이 책에는 스포츠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저자의 아버지도, 저자도, 저자의 딸도 학교에서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냈다. 읽으면서 갑자기 내가 떠올랐던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동기였는데, 공부를 굉장히 잘 하던 이 친구가 자신의 SNS에 썼던 글 때문이었다.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만약 자신이 운동마저 잘했다면 아마도 지금쯤 마초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이런 류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점이, 아마도 이 친구는 운동만 빼면 자신이 완벽하다고 느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고, 두번째는 자신이 운동을 못하는 점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구나, 그것도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SNS에서, 그것은 결국 역으로는 스스로 상당한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저자의 아버지는 60대 중반까지 아들에게 팔씨름을 이겼고, 80대 말에도 사귀던 애인과 성관계를 추구했을 정도로 정력적인 삶을 살았다. 저자의 딸도 활달하며 자기 주장이 뚜렷한 성격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스포츠가 삶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다. 미국에서 스포츠란 일종의 삶인 것 같다. 스포츠 비즈니스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물론이고, 스포츠와 관련한 영화가 빈번하게 만들어지며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상당한 인기를 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종종 특정 연도를 거론하며 그때는 무슨 팀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었지, 이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마치 저자를 건너뛰고 성격이 유전된 것처럼, 삼대의 역사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오히려 많이 닮았고, 저자의 성격이 좀 더 도드라져 보이기는 하는데, 아마도 스포츠라는 공통 분모가 아버지와의 연결 고리를 조금이나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아버지에 대한 저자의 애증 관계가 느껴지는데, 연령대상 나는 저자의 딸과 비슷한 나이어서 그쪽으로 감정이입하며 읽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런 할아버지는 상당히 매력적이며, 손녀로서 호감가는 할아버지이다. 요즘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그녀의 책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 중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정력적이고 자신만만한 노인 캐릭터가 많은데, 그래서인 것 같다. 물론 그런 노인들은 모두 부자이며, 보통 책의 초반에 살해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저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어느 날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늑대를 데려와 그 늑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을 함께 산 날들의 기록이다.

 

한 집에서 함께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며, 본인이 가르치는 대학의 강의실까지 늑대와 동행할 정도로 모든 일상 생활을 늑대와 함께 했으며, 그 시간을 통해 얻은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이 책으로 만들어냈다.

 

괴짜도 보통 괴짜가 아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숙한 삶을 살았으며, 작가를 거쳐간 개들이 평범한 개가 아니었다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충분히 서술되어 있기는 하다. 독특하면서도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도 잘 알겠고. 처음 늑대를 집에 데려올 때가 20대라서 젊은 나이에 한번쯤 모험심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가 가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으며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기에 금전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시도라고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건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해볼만한 일은 물론 아니다.

 

아마도 시작할 때는 이 정도까지 올 줄은 본인도 모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긴 시간동안 곁에서 머물며 동반자가 되어주었고, 당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며 죽고 난 이후 작가의 삶에까지 영향을 줄 줄은 몰랐겠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솔직히 읽으면서 이거 글쓴이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아마 나같은 독자를 의식했으리라.

 

어떤 사람들은 개를 훈련시키는 것, 특히 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꺾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나 늑대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리고 브레닌에게는 내가 그 역할을 한느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심오하고 중요하다. 규율은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뜨끔했다. 첫번째 문장의 어떤 사람들 중 하나에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펼쳐지기도 전에 벌써 니체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 대체로 늑대와의 삶을 통해 깨달은 작가 나름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서술하면서 중간 중간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도 소개한다. 어렸을 때 읽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생각이 났다. 물론 형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사람들, 최소한 교양 있는 사람들과 반려동물 사이의 주된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합당한 개념은 소유가 아니라 보호일 것이다. 그러나 브레닌과의 관계에서는 이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 브레닌이 내가 알았던 다른 개들과 확실히 다른 것이 이 때문이다. 브레닌은 특정한 상황과 환경에서만 동생 같았고, 보통은 형으로 느껴졌다.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형 말이다. 언뜻 보아도 알겟지만 그를 본받기는 쉽지 않았고 한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면서 나는 강해졌다. 브레닌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형이 있을까?

이 대목에서는 좀 황당하기도 했다. 동물 애호가들이나 일부 학자들 중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우우월성에 대한 불확실함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지만, 거꾸로 자신이 늑대보다 더 미숙한 동생의 입장에 놓는다는 것은 놀라웠다.

 

보통 개들의 성질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인간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은 인간들마의 고유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개성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다. 개들도 개성이 모두 다르다. 어떤 개들은 사람을 잘 대르고 어떤 개들은 아주 못됐다. 대부분은 성장 과정이 잘못되어 못된 성질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어릴 적에 키웠던 블루가 첫 3년간 겪었던 고통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일부 인간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못된 개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못된 개라고 하면 개별 개체를 말하는 것이지, 견종 전체를 싸잡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경험상, 견종과 성격 간에 약간의 연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부분은 사람으로 바꾸어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인간의 성격은 타고난 것도 어느 정도는 있고, 대부분 성장과정에서 결정되며 동일한 민족, 동일한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끼리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겠지만 절대로 그 집단이 전부 동일하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인간이 지금은 전세계의 모든 종의 생명을 틀어쥘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우리 영장류는 늑대들이 결코 꿈꿀 수도 없는 것을 해낸다. 바로 예술 문학 문화 과학 등 사물의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다. (중략) 인류의 과학적 예술적 지능은 속잉ㅁ수와 계략의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가해자가 되고자 하는 진화의 부산물이다.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지능이 단순히 속임수와 계략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략) 오히려 내 요지는 교향곡도 거짓말에 속기보다는 거짓말을 잘하는, 계략에 속기보다는 계락을 짜는 능력을 키우도록 발전해 온 자원 역사의 연장된 산물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같은 지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망각할 때 다른 존재를 부당하게 대하고 우리 자신을 학대한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늑대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걸은 길을 비난할 수도 없지만 자축할 것도 없다.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부분은 비약이 심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문명의 발전이 단순히 계략을 짜기 위해 발전해 온 역사의 연장이며, 그 이유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알 길도 없다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아무 근거 없이 억지로 끌어댄 느낌이다. 하지만 동물 실험에 대한 끔찍한 역사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대목에 가서는, 왜 이런 사유가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늑대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종들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사이에 서열관계가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를 위한 연구를 위해 무분별하게 동물 실험이 남용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말을 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닌가. 바닥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울타리의 높이를 단계를 거듭할 수록 점점 높여서 벗어나기 힘들게 하고, 설령 벗어나더라도 그 바닥에조차 전기를 흘려서 어느 쪽으로든 고통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실험. 이 실험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짓을 집에서 몰래 했다면 솔로몬, 카민, 와인은 기소되어 벌금형에 처해지고 아마도 향후 5~10년간 동물을 키우지 못하다록 하는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감옥에 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하버드의 실험실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은 학문적 성공이라는 기묘한 보상을 받았다. 편안한 생활, 높은 급여, 학생들의 존경, 심지어 동료의 부러움까지. 개를 고문한 것에 대한 대가로 경력이 쌓였고 이를 흉내 낸 실험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종류의 실험은 30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후계자는 마틴 셀리그먼이다. 그는 최근 미국심리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비록 동반자로서의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완전히 공감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에서의 관계만큼은 인정해주고픈 생각이 든다. 늑대라는 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애환, 거기서 오는 자잘한 일화들, 그리고 철학적 사유. 이 사이에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다 보면 작가의 결론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신정론은 삶에서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 신정론은 전통적으로 신에게 호소한다. 신은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신은 인간을 시험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것도 신이다 등등. 신정론 중에는 신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도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의 철학일 것이다. 그는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모든 신정론은 믿음에 근거한다. 그들은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삶이란 목표나 목적을 지닌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삶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지녔다면, 공포 아픔 고통은 어디쯤 자리해야 하는가를 탐색한다. 단순히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꺠달음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의미를 추구할 때 왜 우리의 삶은 진정 중요한 것에서 더 멀어지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정론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으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의미란 허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아픔이나 고통도 삶의 의미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삶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쫓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대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한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이후 무수히 불편한 순간들이 내 앞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한한 긍정, 그 허상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적하며 삶의 허무를 이론적으로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철학자에게,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대한 명쾌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해지고 마음이 놓이는 결론이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도 저자는 말한다.

 

죽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일까? 주변의 존재들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 자신에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나쁘다는 것일까? 죽음이 무엇이든 간에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시야에 한계가 없듯이 삶도 한계가 없다고 했다. (중략) 그는 죽음이 삶의 한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시야의 한계가 시야에 나타나지 않듯이, 삶의 한계도 삶에서 포착되는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시야의 한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만약에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즉 죽음은 당사자에게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이미 훨씬 오래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제기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다.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닥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죽음은 삶에 속한 사건이 아니라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해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게는 말이다. (중략) 철학자들은 죽음을 박탈의 고통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이해한다. 실제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우리가 박탈당한느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인 우리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박탈할 수 있는지이다. 죽음이 우리를 해치는 이유가 '생명'을 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옳다면, 그리고 죽음이 우리 삶의 한계면, 그래서 우리 일생 동안 닥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죽음이 닥치는 동안 삶이란 없는 것이다. (중략)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가능성'일 것이다. 죽음이 훼손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많은 가능성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늑대와 대조시켰을 때 선명해지며, 늑대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명확해진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보면 인간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의 모습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그에 따라서 얻게 되는 경력에 열심인 이유이다. 우리는 투자한 교육에 비해 일을 해서 얻는 보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고 있다. 전문 교육자인 나 자신만 해도 배움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인 양 연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와 경력 쌓기에 열심이다. 어떤 특정한 것들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욕망들은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는 충족될 수 없지만 능력이 있고, 운이 따르고, 열심히 한다면 특정한 시간 내에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공부이건, 직업과 관련이 있건 없건 간에 비전 잇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행위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이 같은 욕망을 가지려면 미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미래를 미래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묵시적 의미의 미래는, 충족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명시적 의미의 미래는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에 맞추어 나의 삶을 설계하고 조정한다. 그러나 우리 안의 영장류는 이 차이를 알아채고는 자연스럽게 저울질한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종에는 없는, 인간에게만 있는 '미래'라는 개념을 통해 여태껏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저자는 비판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원하는 미래상을 그리며 인내하고 갱신하고 전진하고자 현재의 삶에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보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인간에게 죽는다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더 가혹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다른 어떤 동물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기 때문에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믿었다. 어차피 영장류일 수밖에 없는 내가 집필한 《동물의 역습》에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SF 철학》에서도 이를 잠시 다루고 있다. 지금 나는 선견지명이 없었던 내 자신과 못난 영장류의 편견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투자라니, 어떻게 이 이상 영장류스러울 수 있을까? 이제야 내 눈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투자', 죽음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그때까지 우리가 쏟았던 투자를 한꺼번에 없애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다른 종보다 잃을 것이 많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그 논리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바위를 굴려 언덕 위로 향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하며, 그 행위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아침에 어디론가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몇 년 후 그 자손들이 나와 똑같이 이 행위들을 반복하고... 대체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냐고 작가는 묻는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 목적을 절대로 달성하면 안된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계속 의미를 갖고자 하는 삶의 필요 조건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데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것은 삶의 의미를 하나의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헛된 희망은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 처음에 시지프스는 분명히 언덕 위 그가 올려놓은 장소에 바위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으리라. 하지만 이 희망은 시지프스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의미가 어떤 최후의 지점이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 끝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중략) 브레닌의 죽음과 타협하지 않았을 때, 나는 최상의 모습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간 줄 알았다. 내 눈앞에 펼쳐진 삶보다는 차라리 테르툴리아누스의 지옥이 온당해 보일 정도였다. 거의 격리 수용되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스가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 희망이라는 화살은 미지의 세계인 미래를 향하여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다. 희망 또한 욕망의 한 형태이기에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가 되곤 한다. 가끔은 희망을 원래 들어 있었던 하찮은 상자에 다시 넣어 두어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여기까지 오면 평소에도 막연히 느끼고 있던 삶의 무게,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느껴지는 삶의 허무함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이런 작가는 당연히 종교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나타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생각을 드러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그 삶은 막을 내렸다. 적어도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춥고 어두운 1월의 어느 날 밤, 내가 브레닌을 랑그도크에 묻고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거의 죽을 지경으로 술을 퍼마시던 떄, 나는 가끔 내가 그날 밤 정말로 죽은 것처럼 느낀다. 데카르트는 길고도 어두운 영혼의 밤을 극복하기 위한 안식을 그를 배신하지 않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았다. 데카르트는 거의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그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물리적 신체마저도 의심했으니 말이다. 천부적인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면서도 그는 수학과 논리학에서 말하는 진실을 의심했다. 하지만 마음이 좋고 너그러운신 하나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엇다. 충실한 마음으로 믿음을 평가한다면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을 하나님이었다. 데카르트는 아마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좋은 하나님과 너그러운 하나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좋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그러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고도 남을 것이다. 삶에서 최고의 순간들은 우리를 너무나도 힘들게 하고 약하게 만든다. 우리 삶의 가치가 오직 순간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드러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외의 방법들로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적인 개념의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브레닌이 죽은 그날 밤 브레닌의 무덤 앞에 피운 모닥불 너머로 그의 돌 유령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신이 나에게 '마크, 괜찮네. 항상 그렇게 힘들어 할 필요는 없어. 그만 안심하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것은 좋은 하나님이 아닌 너그러운 하나님이 어떤 죽은 사람에게 하사하신 엄청나게 아름다운 꿈이 아닌가 하고. 이 하나님은 내가 속고 있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너그러운 하나님이 하실 행동이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마도 늑대 브레닌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작가는 절대로 신의 존재나 종교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책 말미에 저자 마크 롤랜드는 결혼을 하고, 아들도 생겼으며, 그 아들에게 11년 동안 동거했던 늑대 브레닌의 이름을 주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권위,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유명세, 안정된 직장의 연봉에서 나오는 경제적 여유, 남편과 아빠라는 가정에서의 위치까지, 종합적으로 다 고루 갖춘 것 같아 보이는, 그래서 너무나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처럼 보이는 현재의 그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나의 커리어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보잘것없는 대학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시한 강사였던 내가 지금은 미국 유수의 대학으로부터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과장된 연봉을 받고 있다. 내 책들은 적어도 학구적 출판계에서 인정받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략)  자랑하기 위해서나 지금의 내 자신에 매우 만족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어지러울 정도로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끝에 가면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가치 있게 해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나는 이 자신감을 경계한다. 이 자신감은 영장류의 자신감이다. 사람들에게 심술부리고 꾀부리는 나의 영장류적 영혼이다. 그 영혼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이며, 이성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산 정상에 서야 한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브레닌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계산이 실패할 때 남는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거짓으로 지껄이던 말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 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자와 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고양이를 키웠더라면 철학자와 고양이가 되었을 것이고, 고래를 키웠다면 철학자와 고래가 되었을 것이다. 우연히 키운 늑대를 통한 철학적 사유. 하지만 이 작가는 대상이 어떤 동물이든, 어떤 식물이든, 그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이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그 자체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얇은 책은 쪽수는 적지만 읽으면서 이해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저자의 생각을 꽉꽉 눌러담았기 때문이다. 주장을 강화할 수 있는 사례, 도표, 연구 결과, 사진이나 그림 자료 등은 아예 없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각각의 목차를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해본다.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 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넌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은 명확히 들어오지만 비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성 질환들이 21세기에 급격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명확한 이유는 밝혀낼 수 없지만, 항생제에도 듣지 않는 박테리아와 완전한 치료가 힘든 바이러스 질병들이 현재에도 있으며, 변종마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 과정을 가로막는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학겨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명쾌하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겅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Hyperaktivitat에서 과잉hyper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첫장을 요약하면, 현대인은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원인은 과다긍정이고 결과는 신경성 질환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호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규율사회는'~하지 마라' 혹은'~해야 한다'의 사회이다. 부정성의 사회인 것이다. 성과 사회는 '~할 수 있다'의 사회, 긍정성의 사회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자발적으로 스스로가 소진될 때까지 혹사시킨다.

 

 

깊은 심심함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과엽,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며, 우리에게 사색의 시간을 뺏는다.

 

 

활동적 삶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보는 법의 교육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오래 천천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바틀비의 경우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해석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장이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예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아니, 부적합하다기보다는 저자의 정반대편에서 사례로 들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를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없는 인물로 보고 있는데 나는 소설 속 그의 모습이 관습과 제도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