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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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았을 때는 선뜻 책을 읽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는 사실. 아니 외면하고픈 이야기.

 

 

불교용어 중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는 말이 있다. 생로병사(生)

 

사람 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큰 고통. 

 

이라고 불교에서는 정의하고 있으며, 사실 인간의 일생을 요약하면 딱 이게 다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병이 들고 마침내 사망하게 되는.

 

인생의 나머지는 전부 곁가지이다.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자손을 남길 수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평생 가난하게 살 수도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고 평생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유명하더라고, 아무리 권력이 있더라도, 태어나서 노화과정을 지나 병들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사실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맞닿아서야 삶은 절실해진다. 질병도 마찬가지. 병이 들었을 때여야 우리는 건강에 대해, 육체에 대해, 삶에 대해 더 진지해질 수 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어쩌면 생로병사일지도 모른다. 목차만 보더라도 유년기와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며, 책의 가장 첫 장의 제목은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이다. 즉 인간의 모든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으며, 그 이야기는 아버지와 작가 자신,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한 가정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소설가이며,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다. 젊은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며 그들의 성적을 매기는 사람이며, 한편으로는 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직업적인 특성이 이 글에 잘 드러난다. 의학적인 지식과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 철학적인 인용과 인생에 대한 각종 통계들이 어우러진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우리'란 당연히 이 책을 읽는 이들을 포함한 인간 전부. 그러나 이 책의 바탕은 자신의 회고록이자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부모와 자녀를 떠올리며 과연 나의 삶은 어떻한가?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가 단순히 에세이에 그치지 않는 것은, 객관적인 통계, 생물학적 지식, 인문학적 사유가 글 전체에서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자 특유의 유머가 곁들어진다. 문학적 향기를 지닌 교양서적. 언젠가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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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시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파악반사와 모로반사. 아마도 번역하는 분이 영어단어 그대로 번역한 것 같은데 '움켜잡기 반사'는 파악반사, '놀람반사' 혹은 '포옹반사'는 모로반사가 정확한 용어이다. 신생아 시절에 있다가 점점 크면서 없어지는 반사인데, 용어와 내용만 알 뿐 어차피 없어질 반사가 왜 있는지 궁금했다. 아기가 어미의 털에 매달려 다녀야 했던 진화단계에서 유용했을 파악반사, 유인원 아기의 몸이 공중으로 떨어질 때, 최대한 펼쳐져서 어미가 떨어지는 아기를 잡아내기 쉽게 해줄 모로반사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이 걸 알고 공부했으면 더 암기하기 쉬웠을 텐데.

 

2. 글쓴이의 아버지의 성은 실드크라우트. 유대계였던 그는 2차 대전 당시 선임 하사관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 실즈라고 줄여서 불렀다고 한다. 36개월 동안 그 이름에 익숙했던 나머지 제대 후 실즈로 개명했다고. 미국은 개명이 쉬운 나라인가보다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얼마전까지 개명이 쉽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 좀 더 절차가 간단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을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유대계라는 것을 감안해서인지, 일제 강점기 시절 창씨개명의 역사가 떠올랐다. 성을 갈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내놓겠다는 선비들도 있었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죽기보다 더한 치욕이라고 생각했던 선조들이었는데, 누구보다 잘 뭉치고 애국심이 강한 유태인들이 의외로 발음하기 힘든 성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좀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아는 경우는 나탈리 포트만처럼 영화배우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3.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 아버지의 병원 방문에 동행한 작가가 의사에게 사춘기 딸에 대해 상담한 내용이다.

나는 철저한 프로이트적 관점을 지닌 아버지의 주치의에게 왜 10대 딸은 엄마에게 그렇듯 비판적이냐고 물어보았다. 의사가 대답했다. "10대의 몸에는 호르몬 에너지가 미친 듯이 돌고 있는데, 그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엄마에 대한 분노로 표출됩니다. 딸은 자신이 가임기가 되면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그 떄문에 가족이 자기를 더 존중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꺠닫는 것 같아요. 가족의 영속은 이제 딸에게 달렸지요. 딸이 그 영역으로 들어옴과 맞물려 엄마는 그 영역을 떠납니다. 엄마와 딸의 분쟁을 놓고 가족이 의논을 한다면 아빠들은 틀림없이 딸 편을 듭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누이에 대해 그런 입장을 취했던 것 같지 않은데. 어머니가 계속 집안을 호령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딸 편을 들지요. 가족이 생산력 높은 여성을 우선 보호하도록 유전자가 몰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딸이 엄마에게 느끼는 분노는 가임 능력을 통해 얻은 권력의 맛과 아이 낳는 사람으로 지정된 데에 대한 부담감이 섞인 것입니다." 옆에 앉은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이고 으흠거리고 간간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른다. 올림포스적 견해를 갖춘 자신의 주치의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실제로 이 현상에 대한 용어가 별도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엘렉트라 컴플렉스에 대해 의사가 쉽게 설명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4. 실드클라우트라는 이름을 가진 배우 두 명이 등장한다. 조지프, 그리고 루돌프. 나는 안네 프랑크에 어느 정도 열중했던 청소년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는 영화에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를 연기했고, 1938년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다는 조지프 실드클라우트가 특히 궁금했다. 그가 출연했다는 <에밀 졸라의 삶>을 검색해보아도 찾기가 힘들었다. 겨우 찾아낸 결과, 그를 우리말 표기법으로 표기하면 조셉 쉴드크라우트, 영화는 <에밀 졸라의 생애>, 그리고 <안네의 일기>였다. 특히나 안네의 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EBS에서 방영이 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1959년 작으로,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고. 평점도 참 좋았다. 흑백 영화 속의 조셉 쉴드크라우트의 젊었을 적 모습은 눈, 코, 입의 윤곽이 뚜렷하고 이마가 반듯하여 지적이면서도 예리한 느낌이었다.

 

5.

중년의 위기를 겪는 남자들이 저지른다는 진부한 행동들, 가령 바람을 피운다거나 빨간 스포츠카를 산다거나 하는 일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볼 때 '희미해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딜런 토마스의 시 「순순히 저 휴식의 밤에 들지 마십시오 Do not gentle into that good nigth」-옮긴이) 류의 심오한 반항이다.

이 부분이 반가웠던 것은, 바로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저 구절이 참 자주도 나왔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무리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영화 전반에서 도드라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더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구 멸망을 눈앞에 둔 노인이 담담하게 저 부분을 읊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아무리 발버둥쳐보았자 피할 수 없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그 무엇,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인간의 노력이 참으로 부질없어 보이는 그 때에도 끝까지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 영화에서 보여주었다. 이 부분에서도 아마 비슷하게 인용되었을 것이고.

 

6. 최근 몇 년, 그러니까 현재 97세인 아버지가 94세까지 육체적 질병을 거의 앓은 적이 없었던 반면, 아직 50대 초반인 저자는 10년 동안 요통으로 수많은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만난 의사와의 만남을 묘사한 부분이다.

처음 면담할 때, 그는 참으로 많은 환자들이 자신은 요통 환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해버린다고 강조했다. 그럼으로써 환자가 아닌 삶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헤링 박사에 따르면 세계무역센터 자살 테러범들도 그런 '프로 환자'들과 비슷하다. 자신의 고통과 피해의식에 대한 도취만이 자기 존재에 질서와 의미를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묘한 주제였지만 나는 이해했다. 자진해서 자살 테러범이 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아, 절묘하다. 환자들 중 자신의 질병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사람들을 테러범과 비교한 이 부분은, 이 책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꼽는 몇 몇 부분 중 하나다.

 

7. 이 책에서는 내내 ~세에는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이 얼만큼 뒷걸음치는지 알려준다. 특히 노년기 장에서 더욱 그런데 예를 들면 60세가 되면 근력이 20퍼센트, 70세가 되면 40퍼센트 떨어지며 심폐능력은 65세쯤 30퍼센트 떨어지고 뇌 세포의 10분의 1이 사라진다는 식이다. 이런 수치들이 책 전반에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솔직히 아직 젊은 나는 이런 수치를 일일이 읽는 것 자체가 귀찮아져서 대강 넘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등장한 문장.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화로 인한 피해를 가장 확실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젊을 때 관리하는 것이다. 노화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때에 말이다.

아마 내가 지금보다 10여년, 혹은 20년 정도 나이가 들었더라면, 읽는 내내 생각이 완전히 달라겠지. 바로 지금부터 관리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 구절대로라면. 관리의 필요성을 몸으로 느낄때는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인가.

 

8.

적포도주에 함유된 항산화제 성분인 레스베라트롤을 섭취한 초파리는 다른 파리들보다 상당히 더 오래 살았다. 레스베라트롤 속의 시트루인이라는 분자는 포유류의 노화 속도를 늦춘다는 칼로리 제한법과 효과가 비슷하다. 살아 있는 생물의 몸은 번식하도록 고정 배선되어 있다. 그런데 저칼로리 식단을 유지하면 지금이 번식에 최적의 상태가 아니라는 신호가 온몸으로 전달된다. 세포의 방어체계가 강화되어 노화가 늦춰진다. 번식에 보다 친화적인 미래 시절을 기약하며 몸을 보전하는 것이다. 칼로리 제한법을 따르면 체내에 저장된 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하고, 몸은 지금이 생존을 위해서 복지부동할 때라고 판단하게 된다. (중략) 기아 상태에 가깝게 식단을 유지하면 종양이나 콩팥 문제,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뇌 장애, 파킨슨병 같은 퇴행성 질환 등 상당수 노화 관련 질병의 발병률이 극히 낮아딘다. 칼로리를 40퍼센트 제한한 쥐들은 수명이 30퍼센트 길어졌다. 15년 동안 칼로리가 30퍼센트 적은 식단을 섭취한 원숭이들은 더 오래 살았고 많은 노화 관련 질병을 면했다. 사람의 경우에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의 발병률은 칼로리 섭취량과 밀접하게 비례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잉여으 수명을 얻고 질병을 피하는 것이 칼로리를 40에서 50퍼센트씩 줄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아버지는 그것이 순전히 수사학적인 질문이라고 대응했다. 나는 지적했다. 20년 동안 치즈케이크를 참아온 삶이 57세에 버스에 치여 죽을 수도 있잖아요. '인생은 늘 6대 5로 지는 도박이다'라고 한 데이먼 러니언(아버지가 영웅으로 받드는 사람들 중하나로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이다)의 말도 인용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나는 그 확률을 반반으로 만들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뿐이야." 아버지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이라면, 소식이 장수의 비결이니 어쩌니 해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 인생의 즐거움중 하나를 줄일 수 있지 못한다. 나만해도 그렇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체중 조절을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수십 년 후 성인병을 걱정해야 할 지도 모른단는 생각이 든다. 사리에 맞는 말 같지는 않지만, 이른바 사회적으로 보기 좋은 몸매, 라는 것이 식탐이 큰 나에게는 어느 정도 식욕을 떨어뜨리는 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9. 인터넷만 들어가면, 장수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는 것은 정말 쉽다. 하도 많이 포털 사이트 메인에 노출되었기에, 이제는 이런 목록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래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적게 먹고 살을 빼는 확실한 방법 외에도 시골로 이사해야 하고, 회사 일을 집으로 갖고 오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반려동물을 들이고, 휴식하는 법을 배우고, 현재만 생각하고, 웃고, 음악을 듣고, 하루에 예닐곱 시간을 자야 한다. 장수하는 부모와 조부모를 두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수명의 35퍼센트는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결혼을 하고, 포옹하고, 손을 잡고,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고, 많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고,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손자들을 돌봐야 한다. 교육을 잘 받고, 뇌를 자극하고, 새로운 일을 배워야 한다.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화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발산하고, 언제나 옳아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싱겁게 먹고, 때때로 초콜릿을 먹고, 과일과 야채와 올리브기름과 생선과 가금류로 구성되는 지중해식 식단을 따르고, 녹차를 많이 적포도주를 적당량 마셔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아야 하고, 정신과 상담을 꺼리면 안 된다. 자원봉사를 하고, 공동체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에 다니고,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아버지의 점수는 42점 만점에 38점.)

이런 기사를 보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나 도덕교과서 같은 말씀들이라 오히려 신뢰가 가지 않을 떄가 있었다. 이게 정말 맞아? 아닌 거 같은데? 오래 사는 건 결국 일종의 운 아닌가? 그런데 아흔 살이 넘어서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는 저자의 아버지는 100점 만점으로는 90점 이상. 나도 한번 해 봤는데 간신히 70점을 넘는 것 같다. 이뿐만 아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기적인 면도 있나보다.

예전에 내털리의 탁아소 선생님이었던 분이 지금 암센터의 외래병동 관리자로 일하는데, 그분에 따르면 '병을 이기는 것은 항상 재수 없는 인간들이다'. 아버지는 재수 없는 인간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이다.

옆에서 보면 그악스러울만큼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 늙어서도 자신의 권리를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끝까지 투쟁하며 싸우는 사람이 결국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던 일. 결국 삶이란 것은, 불확실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아둥바둥하며 살아남는 것,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아들인 저자와 아버지의 성격은 상당히 다른데, 만약 이 책의 주인공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은 힘들었을 수도 있고 다 읽고 나서는 어쩌면 우울증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면, 그 다음 우리 사고의 진행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죽는 것, 기를 써봤자 뭐해. 이것이 첫번째. 그러니까 더 이 악물고 살아남아야지. 그것도 오래오래. 이것이 두번째. 저자의 아버지는 당연히 두번째 유형이다. 그리고 저자 역시 그런 아버지에 대해 때로는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순간적으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결국 생에 대한 강한 집착이 어느 정도는 유전되어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어차피 허무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인생, 그럴수록 있는 힘껏 기를 써가며, 아둥바둥해가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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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스포츠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저자의 아버지도, 저자도, 저자의 딸도 학교에서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냈다. 읽으면서 갑자기 내가 떠올랐던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동기였는데, 공부를 굉장히 잘 하던 이 친구가 자신의 SNS에 썼던 글 때문이었다.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만약 자신이 운동마저 잘했다면 아마도 지금쯤 마초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이런 류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점이, 아마도 이 친구는 운동만 빼면 자신이 완벽하다고 느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고, 두번째는 자신이 운동을 못하는 점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구나, 그것도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SNS에서, 그것은 결국 역으로는 스스로 상당한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저자의 아버지는 60대 중반까지 아들에게 팔씨름을 이겼고, 80대 말에도 사귀던 애인과 성관계를 추구했을 정도로 정력적인 삶을 살았다. 저자의 딸도 활달하며 자기 주장이 뚜렷한 성격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스포츠가 삶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다. 미국에서 스포츠란 일종의 삶인 것 같다. 스포츠 비즈니스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물론이고, 스포츠와 관련한 영화가 빈번하게 만들어지며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상당한 인기를 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종종 특정 연도를 거론하며 그때는 무슨 팀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었지, 이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마치 저자를 건너뛰고 성격이 유전된 것처럼, 삼대의 역사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오히려 많이 닮았고, 저자의 성격이 좀 더 도드라져 보이기는 하는데, 아마도 스포츠라는 공통 분모가 아버지와의 연결 고리를 조금이나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아버지에 대한 저자의 애증 관계가 느껴지는데, 연령대상 나는 저자의 딸과 비슷한 나이어서 그쪽으로 감정이입하며 읽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런 할아버지는 상당히 매력적이며, 손녀로서 호감가는 할아버지이다. 요즘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그녀의 책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 중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정력적이고 자신만만한 노인 캐릭터가 많은데, 그래서인 것 같다. 물론 그런 노인들은 모두 부자이며, 보통 책의 초반에 살해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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