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완전판) - 구름 속의 죽음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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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을 떠올렸다. 1995년 개봉작인 그 영화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포도밭의 풍경이 아름다워 지금까지도 몇 몇 장면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영화다. 전혀 연관이 없는 데도 '구름 속의'로 시작하는 구절만 보아도 그 영화가 자동 재생될 정도이니 내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끝까지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내내 로맨틱한 기운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물론, 크리스티의 상당수 소설처럼 이 소설에도 로맨스는 나온다. 하지만 왠지 사족처럼 느껴지던 멜로 부분이 이 책에서만큼은 왜 그렇게 흐뭇한지 모를 일이다.

 

비슷한 제목의 영화와 소설. 영화 제목에서의 구름은 실제 구름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책 제목에서의 구름은 좀 더 사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살인은 비행기 안에서, 그러니까 지상에서 한참 위인 장소에서 비행 중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기차, <나일 강의 죽음>에서는 배, <구름 속의 살인>에서는 비행기. 그야말로 육해공 모든 교통 수단이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살인 사건의 장소로 등장하는데, 승객들의 수가 많고, 여행 기간이 길기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차나 배에 비해서 비행기라는 장소는 자칫하면 사건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가 누군가. 역시 추리 소설의 여왕답게 일견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고, 예상치 못하게 전개하며, 마지막에 의외의 반전까지 선사한다. 각각 1934년, 1937년, 1935년에 쓰인 이 작품들은 다들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지만,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대중에 다가온 것이 1910년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행기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신문물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는 요즘으로 치면 얼리어답터의 기질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아원 원장인 안젤리크 수녀와 통화를 했소.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건 정말 낭만적인 일이지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런 문장을 보면 신기술에 대한 크리스티의 관심이나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의 크리스티 작품에 급변하는 영국 사회에 대한 쓸쓸함과 크리스티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마플 양과 푸아로의 노년을 묘사하는 부분이 애잔한 것을 비교하면 흥미롭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는 크리스티의 유머가 돋보이는 부분이 많다. 스스로 여유가 있을 때 유머가 나오는 편인데 집필 당시 크리스티가 개인적으로 행복한 때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쪽은 파리 경시청에서 나온 무슈 푸르니에라고 하네. 우리와 함께 이번 사건을 수사할 거야."

"몇 년 전에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무슈 푸아로."

푸르니에가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무슈 지로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푸아로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로(그는 지로를 '인간 사냥개'라고 부르곤 했다.)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터라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무슈 푸르니에도, 무슈 지로도 왠지 낯익은 이름이다. 아니면 그냥 단순한 착시 현상일까? 특히 무슈 지로는 분명히 다른 소설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크리스티는 이런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소설 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는 한다. 아마도 이 전집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한번 더 정주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시가 대통을 구입했다고 했지? 빌어먹을 추리소설 작가들 같으니....... 항상 경찰을 무슨 바보 취급이나 하고, 우리 수사 방식도 엉터리로 적어 놓는단 말이야. 그 자식들 소설에서 경감이 총경에게 말하는 투로 내가 상관을 대한다면 내일 당장 모가지가 달아날걸. 아무것도 모르는 삼류 작가들. 이거야말로 쓰레기 같은 삼류 작가들이 생각해 낼 만한 머저리 같은 살인 사건이야!"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용의자 중 한 명이 바로 추리소설 작가인데, 그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상은 썩 좋지 않다는 점이다. 크리스티 자신이 추리소설 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학 개그 같기도 하다.

 

"그것도 간교한 술수인 게 틀림없어. 오늘 법정에 가져온 대통만 해도 그래. 그게 이 사람이 2년 전에 산 건지 어떻게 알겠나? 내가 보기엔 모든 게 수상쩍네. 범죄나 추리소설 따위에 묻혀 사는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어. 그런 걸 읽다 보니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들어차게 된 거야."

"작가라면 그런 생각만 하는 게 당연하지."

푸아로가 말했다.

 

추리소설 작가를 희화화하는 대목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크리스티는 왜 이런 장면을 의도적으로 넣었던 것일까?

 

"작가인 당신은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슈. 당신은 글로 감정을 분출할 수 있지요. 적들에게 펜의 위력이라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푸아로가 말했다.

클랜시는 의자를 앞뒤로 조용히 흔들었다.

"난 이번 살인 사건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떄 있었던 일을 그대로 소설로 쓰고 있거든요. 물론 가공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목은 '항공우편 미스터리'라고 붙일 생각입니다. 승객들도 그대로 묘사할 거고요. 제때 끝낼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릴 겁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의 힘을 빌어 크리스티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이런 부분도 있다.

 

"무슈 푸아로,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소설을 쓸 때는 누구를 범인으로 만들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지요. 난 진짜 탐정만큼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거든요."

 

이런 장면을 쓰면서 크리스티가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가기도 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또 있다.

 

"지금까지 결론은 이렇습니다. 제인 그레이, 가망성 희박, 가능성 거의 없음. 게일, 가망성 희박, 가능성 역시 거의 없음. 커 양, 가망성 거의 없음, 가능성 의심스러움. 레이디 호버리, 가망성 많음, 가능성 전혀 없음. 무슈 푸아로, 범인이 거의 분명함, 탑승객들 가운데 유일하게 심리적 순간을 조장할 수 있는 인물."

재프는 자기가 한 농담에 큰 소리로 웃었고, 푸아로도 관대한 미소를 지었으며, 푸르니에는 약간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후반부에서 전부 밝혀지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살인자는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으로 범위가 좁혀지는 데다가, 아무도 살해 당시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초반부터 어려워진다. 우스운 것이, 밝혀진 정황과 발견된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푸아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배심원들에게도 의심을 받게 되는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 때 범인이 입은 것으로 보이는 차장 유니폼이 푸아로의 짐에서 발견된 정황과는 다르게, 이 경우는 푸아로에 대한 도전도 피치 못할 절박함도 아닌 그냥 우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이 사건의 묘미는 중요해 보이는 사항들이 사실은 약간 바뀌어도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아니며, 사소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알고 보면 큰 힌트가 된다는 점이다.

 

"기적이든 기적이 아니든, 어쨌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겐 의학적 증거가 있고 살인에 쓰인 도구도 있어요. 만약 일주일 전에 누군가가 내게 뱀독이 묻은 독침으로 여자가 살해된 사건을 수사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난 그 인간 면전에 대고 큰 소리로 웃어 주었을 거요. 모욕을 당한 셈이니까!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그렇단 말입니다. 이건 모욕적인 사건입니다."

재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푸아로가 싱긋 웃었다.

"어쩌면 조금 비틀린 유머 감각을 가진 자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살인 사건을 수사할 때는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게 필수죠."

  

당시로서는 첨단 기계였던 비행기, 그러나 살인 도구는 원시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뱀독. 그 어떤 목격자도 없는 사건. 피살자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인데다가 다른 소설에서도 딱히 본 적은 없는 캐릭터여서 흥미로웠다. 적이 많을 것 같은 여인이라서 수많은 용의자가 떠오르겠구나,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도 반전이 한 번 더 등장한다.

 

"경감님, 이번 사건에 관해 듣자마자, 그러니까 런던 경시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자마자 전 곧장 그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서류는 금고에 들어 있었는데, 모두 태워 버린 후더군요."

프랑스 인이 말했다.

"태워 버렸다고요? 누가? 왜요?"

"마담 지젤에게는 아주 충직한 하녀가 있습니다. 엘리즈라고 하는데, 엘리즈는 만일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금고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모두 태워 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답니다. 그녀는 금고 번호를 알고 있었거든요."

"뭐라고요? 그거 정말 놀라운 소식이군요!"

재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시다시피 마담 지젤은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신의로 보답했어요. 마담 지젤은 고객들에게 양심적이고 공정하게 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자비하긴 했지만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아직 젊고 팔팔하기 때문일까. 이 소설 속의 푸아로는 활기차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며, 자신의 입으로 수사방식과 사건 해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미진했던 부분이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는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내가 한마디 할까요, 마드무아젤 그랑디에? 직업상 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 않지요. 나는 먼저 이 사람을 의심했다가 다음에는 저 사람을 의심하는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난 모든 사람을 의심합니다. 범죄와 연관된 사람이라면 결백하다는 게 밝혀질 때까지 모든 사람을 용의자로 간주하지요."

 

이것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푸아로가 기본적으로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최근 들어서야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지요. 이번 사건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아주 오랫동안 범죄를 다뤄왔고, 그래서 사건을 바라보는 나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죠. 살인 사건을 해결할 떄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인을 찾는 거죠."

제인이 말했다.

"정의입니다."

노먼 게일이 말했다.

푸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범인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정의는 물론 좋은 말이긴 합니다만, 때로는 무엇이 정의인지 확실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결백한 사람들의 무죄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사건 해결시 푸아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이상해 보이는 이 사건을 풀어가면서, 푸아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심리에 집중한다. 심리는 크게 두 가지. 첫번째는 살인 현장에 있던, 살인자와 피해자를 재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심리.

 

푸아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왜 아무도 그 살인자를 보지 못했는지, 거기에 심리적 이유가 있으리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당신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번 사건의 경우, 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오, 친구. 그리고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세요. 자그마한 뇌세포를 작동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될 겁니다."

 

두 번째는 당연히 살인자의 심리.

 

"사실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사람들이 직접 털어놓게 하는 거지요."

제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하려고 하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그건 그래요."

제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돌팔이 의사들이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답니다. 환자가 찾아오면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게 만들죠. 두 살 때 유모차에서 떨어졌다느니, 어머니가 배를 먹다가 자기가 입고 있던 주황색 드레스에 과즙을 흘렸다느니, 그리고 한 살 때 아버지의 턱수염을 잡아당겼다느니 등등. 그런 다음 환자들에게 더 이상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치료비로 2기니를 챙기는 겁니다. 그러면 환자들은 흡족해하며 자리를 뜨죠. 그리고 아마도 환자들은 실제로 잠을 잘 자게 될 겁니다."

"정말 엉터리예요."

제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엉터리는 아니랍니다. 사실 그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거든요. 말하고 싶은 욕구,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말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드무아젤. 당신은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나요? 어머니나 아버지에 관한 추억 같은 것 말입니다."

 

멋지게 해결이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통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그 어떤 소설보다 인간의 '심리'에 집중하고자 했던 소설. 평생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크리스티의 소설은 가장 심리적인 부분이 뛰어난 추리 소설로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사건의 트릭, 범인의 정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죽 따라가다 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울 떄가 많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뜨끔했던 부분을 덧붙인다. 비록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지라도, 이런 요소들 떄문에 이 소설이 빛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말과는 달리 자기가 은밀히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지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 있을 겁니다. '난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에 가서 탐험을 해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는 그런 내용의 소설을 좋아할 뿐, 실제로는 편안하고 안전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추리 소설의 틀에 걸맞는 탄탄한 구성,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낭만적인 분위기, 재치넘치고 매력적인 등장 인물, 곳곳에서 드러나는 유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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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태퍼드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양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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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시태퍼드만 보아서는 지명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암호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크리스티는 책 초반부에 주요 등장 인물과 지명에 대한 확인과 함께 세세한 묘사를 독자에게 선사하여 재빨리 내용에 몰입하게 한다.

 

 버너비 소령은 고무장화를 신고 오버코트의 단추를 목까지 다 채운 후 문 근처 선반에서 강풍 대비용 각등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조 단층집인 방갈로의 앞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카드나 구식 멜로드라마에 묘사된 전형적인 영국 시골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겨우 몇 센티미터 쌓인 정도가 아니라 주위가 파묻힐 정도로 두터운 눈 더미였다. 지난 나흘 동안 영국 전역에 눈이 내렸고 서남부의 다트무어 변두리에 있는 이쪽 고지대에는 1미터도 넘게 쌓였다. 집집마다 가장들은 파이프가 터져서 불평을 터뜨렸다. 그렇다 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배관공을 친구로 둔 사람, 또는 배관공 친구의 친구마저도 지극한 선망의 대상이 돼 버린 형편이었다. 

 

이 책의 첫 문단이다. 호들갑스러운 부사도, 과장된 형용사도 없는 사실적인 문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폭설이 왔을지 대번에 눈에 그려지는 묘사다. 영국인 특유의 침착함이랄까, 작가 혼자 들뜬 것 같은 묘사는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데 크리스티는 늘 담담하게 풍경을 그려내는데도 위압감이나 중압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것 같다.

 

 시태퍼드 하우스는 조지프 트리벨리언 대령이 영국 해군에서 퇴역할 즈음인 10년 전에 지은 저택이다. 재력이 있엇던 그는 늘 다트무어에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작은 마을인 시태퍼드를 여생을 보낼 곳으로 정했다. 대부분 계곡에 몰려 있는 다른 마을이나 농장과는 달리 이곳은 시태퍼드 산의 그늘이 드리워진 황무지 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넓은 택지를 사서 자가발전 설비를 갖춘 데다가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수고를 덜기 위해 전기 펌프까지 설치하는 등 안락한 집을 지었다. 그러고는 투자 방편으로 골목을 따라 한 채당 약 1,000제곱미터씩의 땅을 할애해서 작은 방갈로 여섯 채를 지었다.

 그 방갈로들 중에서 시태퍼트 하우스 정문 곁에 있는 집은 허물없이 지내는 오랜 친구 존 버너비 소령에게 내주었다. 다른 집들은 하나씩 하나씩 팔렸다. 자신이 좋아서든 필요에 의해서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이 집들 말고도 그림같이 아름답긴 하지만 낡은 시골집 세 채와 철공소 하나, 그리고 과자가게를 겸한 우체국이 있었다. 제일 가까운 도시는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익스햄프턴이었다. 그곳까지는 다트무어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운전사들은 기어를 최저속으로 유지하시오'라는 표지가 필요한 한결같은 내리막기로 이어져 있었다.

 

정말 훌륭한 묘사다. 이 정도면 아무리 피곤해도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뒤이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하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히 매끄러우며, 크리스티의 저명한 탐정들이 등장하지 않고 살인 용의자의 약혼녀가 탐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는 신선한 느낌이 있다.

 

 그녀는 죽은 대령을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추리한다는 건 너무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밀리는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자기 판단보다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받았든 자기에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판단이 자기의 것만큼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일을 다루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문단 같은 경우이다. 푸아로라면 이런 고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을 탐정이니까.

 

퇴역 군인이자 상당한 부자인 남자가 살해된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의 재산은 유언대로라면 여동생과 조카에게 나누어 분배될 것이다. 다소 괴팍하기는 해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 때문에, 살인은 원한 관계보다는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마침 유언장에 나와 있는 그의 조카들 중 한 명이 피살자와 당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체포된다. 유약한 용의자와 대비하여, 그의 약혼녀는 의지와 재치를 지닌 여자로, 직접 피살자의 주변을 탐문하며 살인 사건을 파헤치고자 한다. 자신의 약혼자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는, 피살자, 그러니까 약혼자의 외삼촌이 어떤 사람이며 그 주변 인물들은 어떤 사람인지 차근차근 추적해간다.

 

피살자는 트리벨리언 대령이라는 사람. 시태퍼드 하우스와 작은 방갈로 6개의 소유자로 겨울 동안 시태퍼드 하우스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귀국한 윌렛 모녀에게 세를 주었다. 방갈로 6개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다. 1번 방갈로에 사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버너비 소령,  2번 방갈로에 사는 병자인 와이엇 대령, 3번 방갈로에 사는 몸집이 작고 별난 라이크로프트, 4번 방갈로에 사는 거동이 어려운 퍼스하우스와 그녀의 조카 가필드, 5번 방갈로에 사는 시태퍼드 하우스 정원사였던 커티스 부부, 6번 방갈로에 사는 덩치가 크고 조용한 듀크이다. 방갈로는 대령이 살고 있는 익스햄프턴과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살인 사건 당일 버너비 소령, 윌렛 모녀, 라이크로프트, 듀크, 가필드 이렇게 6명은 테이블 터닝(심령의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강령술의 일종으로 참석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손을 위에 올려 놓고 테이블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을 하다가 대령이 그날 살해당했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당시 시간은 5시 25분. 밖에는 어마어마한 폭설. 불안해하던 대령의 친구인 버너비 소령이 폭설을 헤치고 대령의 집으로 가 살해당한 친구를 발견하며, 검시 결과 살해 시점은 5시에서 6시 사이. 그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하며 대령의 조카인 제임스 피어슨이 삼촌을 방문한 시점이다. 대령이 남긴 유언장은 총 4등분되어 여동생 제니퍼 가드너와 사망한 다른 여동생 메리 피어슨의 세 자녀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첫째가 용의자인 제임스, 둘째가 작가 더링과 결혼한 실비아, 셋째가 호주로 갔다는 브라이언이다. 그러나 호주에 있을 것 같던 브라이언이 윌렛 모녀와 같은 배를 타고 영국에 왔으며,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던 실비아의 남편 더링은 경찰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당일 문학인의 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브리지 게임을 하세요?"

"예, 하지요. 왜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자기가 들고 있는 패의 가치를 평가할 때 어떻게 하지요? 수비하는 쪽이면 이기는 패를 세고 공격하는 쪽이면 지는 패를 세라. 지금 우리는 공격을 하는 쪽이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해 왔는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오?"

"음, 지금까지 우리는 이기는 패만 생각했어요, 안 그래요? 내말은 우리가 트리벨리언 대령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 생각했단 말이에요.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까지 말이죠. 어쩌면 그 때문에 이처럼 끔찍하게 엉망진창이 되어있는지도 몰라요."

 

겉으로 드러난 동기를 지닌 유언장 속의 사람들, 그리고 살해 당시 알리바이는 확실히 입증되나 분명히 범죄와 연관이 있어보이는 6명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도저히 살인까지 저지를 성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범인 또는 희생자. 어지럽게 사건이 꼬여갈 무렵, 중반부를 지나 등대의 불빛처럼 반짝하는 순간이 온다. 여주인공 에밀리의 기지가 반짝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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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책 맨 앞에 있던 E.A.B.는 대체 누구일까 생각했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크리스티의 첫 남편의 상관이었던 E.A.벨처로, 이 소설의 유스터스 페들러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크리스티는 영국 박람회 사절단 자격으로 첫 남편과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던 경험을 살려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이 당시에만 하더라도 나중에 남편과 헤어질지 몰랐을 텐데 이혼 후 이 소설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잠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네 번째 소설이다. 네 번째 장편 소설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의 초기 열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20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1922 비밀결사

1923 골프장 살인사건

1924 갈색 양복의 사나이

1924 푸아로 사건집

1925 침니스의 비밀

1926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1927 빅포

1928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

1929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우리말 번역은 전부 황금가지 판을 참고하였다. 황금가지 전집이 연대기 순으로 되어 있지 않기에, 이 중 절반은 아직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초기 열 작품은 10년간 쓰여졌는데, 아직 마플 양이 등장하기 전의 세계이다.

 

첫번째 작품에서 푸아로가 등장하고, 두번째 작품에서는 나중에 부부가 되는 탐정 한 쌍이 등장하며, 다시 세번째 작품에서 푸아로가 등장한다. 네번째 작품이 이 작품으로 레이스 대령이 등장하지만 '탐정'이라고 호칭하기에는 역할이 미미하며 다음 작품인 다섯번째 작품에서 푸아로가 등장한다. 여섯 번째 소설에서는 배틀 총경이 등장하며, 그 이후의 세 소설에서 연달아 푸아로가 등장하고, 마지막 열번째 작품에서는 다시 배틀 총경이 등장하여 이른바 침니스의 두번째 이야기를 풀어간다. 1930년의 <목사관의 살인>에서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크리스티의 1920년대, 초기 10년의 세월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출발시켜야 할 지 가늠하고 있던 시기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계속되는 푸아로의 활약, 배틀 총경의 연이은 등장, 그리고 잠깐 레이스 대령이 얼굴을 비추기도 하였고 딱 10년 후 마플 양의 등장. 그 때부터 이른바 작가 스스로 '감 잡은' 시대가 온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 책의 레이스 대령은 크리스티의 이후 소설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는 <나일 강의 죽음>에 나온다고 한다. 메인 줄거리와 큰 연관이 없어서인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디쯤 나와서 어떻게 활약을 했는지 알아내기가 힘들었는데, 아마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나왔던, 국제 침대차 회사의 중역인 부크와 같은 역할이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확실히 용의자에서는 제외되면서, 푸아로의 조력자가 되는 남자.

 

앤이라는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다. 학문적으로는 뛰어나나 경제적으로는 빈곤했던 원시인 학자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얼마 안 되는 전재산을 가지고 남아프리카로 떠날 정도로 모험심과 자립심이 넘치는 여자. 우연히 역에서 한 남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의문의 쪽지를 추적하여 '킬모튼 캐슬'이라는 배를 탄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유스터스 페들러는 집을 세 놓기 위해 내놓았다가, 집을 보러 온 여성이 바로 자신의 집에서 살인을 당하면서 사건에 휘말린 경우이다. 그 집은 앤이 목격한 죽은 남자와도 관련이 있다.

 

앤이 어떤 여성인지, 그리고 앤을 둘러싼 환경이 어떠한지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배에 타고 난 이후부터는 다소 이야기가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시간이 꽤 길게 이어지는데, 전반부에 톡톡 튀는 부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격차가 더 커서 심심한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아마도 이 당시 크리스티가 자신의 소설을 가지고 이런 저런 실험을 할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어느 정도 크리스티가 숙련된 작가가 된 후에 이 책을 썼더라면 좀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소 떨어지는 긴장감은 <나일 강의 죽음>에서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훨씬 생생해졌다. 크리스티의 팬이 아니라면, 실망할 가능성도 분명히 많은 책이다.

어느 사교계에서 아버지는 침팬지 새끼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인류의 젊은 층은 유인원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어린 침팬지는 성숙한 침팬지보다 인간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조상들이 현재의 우리보다 유인원에 더 가까운 반면에 침팬지의 조상은 현재의 침팬지보다 더 고등한 동물이었음을, 다시 말해 침팬지가 퇴화된 동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진취적인 신문인 <데일리 버짓>은 뭔가 짜릿한 기사에 굶주려 있던 만큼 기다렸다는 듯 이것을 대서특필했다.

우리 인간은 원숭이의 자손이 아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과연 우리 인간의 자손인가? 저명한 한 교수는 침팬지가 퇴화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사가 나간 직후에 한 기자가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그 이론에 관한 대중적인 기사를 연속물로 써 보라고 열심히 권유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나만이 아는 은밀한 슬픔이었지만 특히나 돈이 아쉬웠는데, 아버지는 그 기자를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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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완전판) - 서재의 시체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선영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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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특정한 종류의 소설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판에 박힌 표현들이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머리가 벗겨진 사악한 준남작'이 그렇고, 추리 소설에는 '서재의 시체'가 그렇다. 나는 몇 년 동안 '잘 알려진 주제에 적절한 변화'를 줄 가능성을 분명하게 적어두었다. 그리고 스스로 어떤 조건을 설정했다. 우선 문제의 그 서재는 매우 흔하고 틀에 박힌 것이어야 한다. 반면 시체는 전혀 있을 법 하지 않은 대단히 기상천외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문제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나는 이것을 연습장에 몇 줄 끼적거려 놓은 채 그대로 두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여름에 해변의 멋진 호텔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식당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가족을 보았다. 불구의 노인 한 명이 휠체어에 타고 있엇고, 젊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가족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다음 날 호텔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지식에도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쓸 때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시나요?"라고 물으면 나는 내가 알고 있거나, 얘기를 해본 적이 있거나, 심지어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이유에선지 완전히 죽은 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가공의 인물'을 택해서 그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성격과 상상의 산물을 부여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불구의 노인이 이야기의 중심축이 도었다. 마플 양의 오랜 친구들인 밴트리 대령과 그 부인은 얘기에 딱 어울리는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요리하듯이 테니스 코치, 젊은 댄서, 영화배우, 소녀 단원, 직업 댄서 등과 같은 재료를 넣는다. 그리고 마플 양 식의 식탁을 차려내면 되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을 읽기 좋아한다. 프롤로그든, 에필로그든, 옮긴이의 말이든, 주석이든, 본문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글들에 왠지 작가의 민낯이 보이는 것 같아서이다. 어떤 사람은 작가의 말을 짧으면 짧을 수록 좋으며, 아예 없는 게 가장 좋다는 이도 있다. 자신이 쓰고자 한 글에서 이미 이야기를 다 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작가의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아마도 몇몇 편에만 따로 서문을 남겼다면 특별히 그 작품을 아끼거나, 혹은 반대로 그 작품의 어떤 면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 서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이유는 작가가 평소에 어떻게 영감을 얻고, 어떻게 사건을 구상하며, 어떻게 인물을 창조하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잘 알려진 주제에 적절한 변화'라고 직접 작가가 언급했다는 것은, 이 소설의 특정 부분이 좋든 싫든 작가의 의식에 깊이 박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작가가 직접 언급한 바로 그 부분이 어떻게 등장할까 기대하면서.

 

 마플 양은 그제야 죽은 여자가 현실 속의 사람 같지 않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서재는 집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크고 낡고 어수선한 서재엿다. 서재에는 크고 망가진 팔걸이의자가 몇 개 있었고, 담뱃대, 책, 그리고 지역 신문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오래되고 멋진 가족 초상화 한두 점이 벽에 걸려 있었고, 형편없는 빅토리아 시대의 수채화 몇 점과 익살맞은 사냥 장면들도 있었다. 구석에는 데이지 꽃이 담긴 큰 화병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고, 부드러우면서 격의 없는 분위기였다. 그 방은 오랫동안 편안하게 이용된 전통 있는 장소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엇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 놓인 오래된 곰가죽 양탄자 위에는 생소하고 어설프며 감상적인 무언가가 드러누워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소녀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머리는 세심하게 매만진 모양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은 장식이 달리고 등이 패인 하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에 감싸여 있었다. 짙은 화장이 눈에 띄었다. 흰 분가루는 퍼렇게 부풀어 오른 살갗에서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고, 속눈썹에 바른 마스카라는 일그러진 볼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새빨간 입술은 마치 상처가 난 것처럼 보였다. 손톱에는 진한 핏빛 매니큐어를 칠했고, 싸구려 은색 샌들을 신은 발톱에도 같은 색깔을 바르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천박하고 싸구려 티가 나는 그 모습은 밴트리 대령의 서재가 주는 고지식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편안함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작정하고 보여주는 듯한 꼼꼼한 묘사다. 묘사는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책 전반에 흐르는데, 당시 사회상을 잘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예를 들면, 죽은 여자의 드레스를 이야기하면서

 

"네, 싸구려 새틴 드레스였죠. 옷감도 안 좋았고요."

밴트리 부인이 말했다.

"맞아요. 모든 물건을 1기니에 파는 허름한 1기니 하우스에서 샀겠죠."

 

라는 대화를 통해 마치 요즘의 천원샵과 같은 상점이 당시 영국에도 존재했구나, 하는 사실에 신기했고,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아홉 살 소년 피터 카모디의 말 중

 

"추리소설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해요. 추리소설이라면 전부 읽었고요. 도로시 세이어스, 애거서 크리스티, 딕슨 카랑 H. C. 베일리한테 사인도 받았는걸요."

 

라는 대목에서는 잠시 내가 글자를 잘못 봤나,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소설에 당당하게 집어넣는 저 자신감! 아마도 이 소설이 발표될 때쯤에 크리스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영국에서는 없었나보다. 혹시 저 크리스티의 이름을 빼면 전부 가상의 인물일까? 하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더니 전부 당대의 추리작가들이라고. 하지만 불멸의 위치에 오른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 뿐이다. 생전에 그녀는, 이 소설을 쓸 때의 그녀는, 이 대목을 쓰면서 자신이 역대 최고의 추리 작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이 소설에는 마플 양 시리즈에 나오는 그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밴트리 대령 부부의 서재가 바로 시체가 발견된 그 서재이며, 래드퍼드셔의 경찰서장인 멜쳇 대령, 슬랙 경감, 피살자가 근무한 호텔이 위치한 글렌셔 경찰서의 하퍼 총경에 은퇴한 런던 경시청장인 헨리 클리서링 경까지 합세한다. 헨리 경은 살해된 젊은 여자를 입양하려고 했던 거부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로, 둘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아마도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 나왔던 한 단편의 이야기인 것 같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익사>라는 사건의 이야기이다.

 

"내가 멜쳇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마을에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어. 어느 소녀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이었지. 경찰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제대로 의심하고 있었지. 그들은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마플 양은 안절부절 못하고 당황해 하면서 나를 찾아왔더군. 그녀가 말하길, 경찰이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거야. 그녀에게는 증거가 없었지만, 그녀는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지. 놀랍게도 제퍼슨, 그녀가 옳았어!"

 

크리스티의 세계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목사관의 살인>에서 젊고 발랄했던 목사 부인이 이 책에서는 기어다니는 아들을 둔 어머니로 잠깐 등장하는데 크리스티 팬이라면 이런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기쁜 일이다. 순서 상으로 이 책은 아마도 40년대 이전에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변화하는 영국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 토지는 우리 집안에서 한 300년 정도? 네, 틀림없이 그 정도 살다가 팔아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일가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던 거죠. 형은 뉴욕으로 갔어요. 출판업을 하고 있죠.......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사람드롣 여기저리고 뿔뿔이 흩어졌어요. 요즘은 사립 중학교를 나온 거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직장을 얻기가 힘든 것 같아요. (중략)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댄스와 테니스 밖에 없었습니다. (중략) 주로 하늘이 무너져도 테니스를 칠 수 없을 뚱뚱한 여자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파트너가 없는 부자 관객들의 따님들과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일도 하죠."

 

몰락한 가문의 청년의 신세한탄이다. 갑자기 우디 앨런 영화의 <매치포인트>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도 부잣집 자제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다 결국 그 집의 사위까지 되지 않았나? 영국의 세태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사실 가진 것이라고는 외모와 테니스 실력 밖에 없는 젊은이가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는데, 크리스티의 소설을 보면 그런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았나보다. 물론 그 영화 속 마이어스는 데뷔하지 못한 테니스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야 시대가 다르니까. 사실 더 놀라운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왔다.

 

"이 집은 베이즐 블레이크 씨의 별장이죠?"

"네, 그리고 저는 다이나 리예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마을에서는 처녀 때 이름을 계속 쓰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다이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마플 양은 진지하게 말했다.

"머지않아 아가씨는 동정과 호의가 무척이나 많이 필요한 처지가 될지도 몰라요. 남편 분도 이웃에게 좋게 보이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보수적인 시골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두 분 모두 부부가 아닌 동거 관계인 척하면서 재미있어 했을 것 같네요. 그러면 아가씨가 '구닥다리 할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지레 접근하지 않을 테니 방해받는 일도 없었겠죠. 하지만 구닥다리 할망구들도 다 필요한 때가 있답니다."

다이나가 물었다.

"우리가 결혼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마플 양은 얕보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허, 이것 참."

 

분명히 크리스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보수적이었는데, 논란이 있든 없든 당대에 부부가 아닌 동거 관계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 당시 영국이 급변하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호기심이 붙었다. 이 시대가 언제일까, 궁금했는데 본문 중에 답이 나왔다. 영화에 관심이 많던 소녀를 꾀어내기 위해 악당들이 했던 말, 비비안 리가 어떻게 순식간에 런던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일약 유명 여배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고. 영국 국적의 비비안 리가 오디션을 통해 따낸 할리우드 데뷔작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 영화는 1939년작이고 이 책은 1942년에 발표되었다. 당시의 비비안 리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소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영화에 매혹되었을 것이고. 영국 사회의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를 때가 아니었을까.

 

소설 속 살인 사건에만 집중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좀 헐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느낄 수 있는 여러 단어와 문장, 단락을 보다 보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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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6 (완전판) - 침니스의 비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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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터니는 이제 자기 일에 제법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가 맡은 일에는 여행 일정을 책임지는 일 말고도, 체면이 구겨진 노신사들의 언짢은 기분을 달래주고 나이 지긋한 부인들에게 그림엽서 살 시간을 넉넉히 주는 일도 포함되었다. 물론 40대 부인들의 넉넉함에 기대어 온갖 말장난을 섞어가며 시시덕거리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앤커니는 그중에서 마지막 일이 가장 쉬웠다. 별 생각 없이 한 마디 던지면 수많은 여자들이 혹시 그 안에 무슨 은밀한 의도라도 숨어 있지 않나 하고 귀를 쫑긋거리기 때문이었다.

 

발칸제국의 위대한 노 영웅.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 교수형을 모면한 거물급 악당. 그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오로지 어떤 신문을 구독하느냐에 달려 있지. 하지만 제임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스틸프티치 백작이란 사람은 너나 내가 먼지와 재로 변한 뒤에도 오래 오래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을 인물이라는 점이야.

 

런던 경시청의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 <0시를 향하여>의 바로 그 사람. 소설 속에서 마플 양이 등장한다는 뜻은 한적한 시골 마을인 세인트 메리 미드의 주민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 유산 상속 등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할리 퀸이 등장한다면 남녀상열지사가 어떻게든 끼어 있을 확률이 높다. 파커 파인이 등장한다면 살인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건일 가능성이 높고, 푸아로의 경우에는 영국의 촌구석으로부터 전세계에 이르기까지 무대는 자유자재이지만, 확률적으로 엮여 있는 사람들이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인 푸아로에게 사건을 의뢰하려면 상당한 보수가 필요할 테니까.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는 것은 푸아로와 같은 사립 탐정이 종종 맡곤 하는 은밀한 영역의 사건이 절대 아니라는 것. 대대적인 탐문, 공개적인 수사 과정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슬랙 경감이나 멜쳇 경찰 서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더 강력한 공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가 사건을 지휘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기밀, 외교 극비 사항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만약, 그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면, 아마도 친분 관계에서 부탁을 받았거나 우연한 기회로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0시를 향하여>는 후자에 속할 것이고 <침니스의 비밀>은 명백히 전자다.

 

이야기가 다소 튄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 수록 그런 느낌이 강했다. 결말이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지나치게 꼬여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앤터니의 다소 의문스런 초반의 행동들이 후반에 가서 확실하게 해결은 되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작품의 구성 자체가 좀 아쉽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름 때문에 반전을 눈치 채기가 좀 쉬웠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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