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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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대학생쯤 되면 연인이 있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대학생쯤 되면 연인이 있다'라는 편견에 등 떠밀린 어리석은 학생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신분을 번지르르 치장한 결과 누구에게나 연인이 생기는 괴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편견을 조장한다.

나또한 그 편견에 등 떠밀린 건 아닐까. 고고한 남자임을 내세우면서 실은 유행에 취해 사랑을 쫓아다닌 것은 아닐까. 사랑을 탐하는 아가씨는 귀엽기나 하지. 하지만 사랑, 사랑, 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남자들의 그 으스스함이란!

도대체 나는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눈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바라본 뒤통수 외에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반했다고 하는가. 근거가 불분명하다. 그건 단지 내 마음의 공허에 그녀가 어쩌다 빨려 들어온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입학 이후 결코 올라간 적 없고 앞으로도 전혀 올라갈 기미가 없는 학업 성적, 취직 활동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구실을 높이 내건 채 뒤로 미룰 뿐, 융통성도 없다. 재능도 없다. 저축한 돈도 없다. 완력도 없다. 근성도 없다. 카리스마도 없다. 사랑스러워 뺨을 갖다 대고 비비고 싶어지는 새끼 돼지 같은 귀염성도 없다. 이렇게 ‘없다, 없다의 행렬’이 이어져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너무나도 초조한 나머지 이부자리에서 기어 나와 한동안 두 평 남짓한 방안을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돌아다니면서, 어디 귀중한 재능이 굴러다니지 않나 살폈다. 그러다 문득 1학년 때 ‘능력 있는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말을 믿고 ‘재능의 저금통’을 옷장 속에 숨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있었어! 오오, 그거야!”하고 나는 신이 났다. 옷장을 열자 그 안은 온통 웃자란 버섯투성이었다. 나는 “언제 이런 꼴이 됐지?”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미끈거리는 버섯을 밀어제쳤다. 그 속에서 꺼낸 ‘재능의 저금통’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내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나는 저금통을 거꾸로 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보았지만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꾸준히’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만 이부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읽어 본 청춘 소설 중 가장 공감이 많이 갔다. 스물, 스물 하나의 연애 감정을 이렇게 마음에 들게 표현해 내다니, 그 당시 나의 고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마냥 놀고 먹는 청춘이 아니라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자신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쓰러져 울음을 터뜨리는 과정에서는 나도 불쑥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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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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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최고의 책이다. 평도 좋았고 팔리기도 많이 팔렸고 선물하기도 무난하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그만큼 보편적이고 반면에 논란거리도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추천하는 글에서 이적이 말하듯 엄마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원죄가 있으니까. 

사실상 작가의 이야기로 봐도 무관할 '나'의 이야기를 '너'로 표현한 것은 누군가의 특정한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신경숙의 엄마는 나의 엄마가 아니다. 나의 엄마의 엄마이다. 극 중 '너'로 표현된, 사실상 작가 자신일 신경숙이나, 엄마가 항상 미안해하는 형철이가 바로 나의 '엄마'에 가깝다. 무조건 희생적인 엄마의 모습이 낯선 것은 그 때문이다.  

아마도 요새의 엄마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서 자식 앞에서 눈물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학원에서부터 대학 전공까지, 나아가 결혼하고 그 이후까지 책임져 주는 엄마이다. 물론 애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팽개치거나,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 있는 법이다. 중간중간 내가 울컥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표현은 바뀔지라도, 외양은 변할지라도, 엄마는 변하지 않는다. 엄마는 엄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이 소설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고 싶다. 그리고 나의 엄마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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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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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섯 명의 요리사들은 내가 없을 때 내 이야기를, 내가 다시 자리에 돌아왔을 때 딱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했다. 나는 그들 틈에 끼어 있는 나를 K라는 사람으로 한번 가정해 보았다... K의 삶은 이렇게 몇 문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요약되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나라도 K가 없으면 K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도리어 안도가 되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K는 최소한 아무도 화제로 삼지 않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은 모양이니까.




이것은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체념에 가까운 관조적 자세일까. 나는 처음에 이 부분을 읽고 묘하게 마음이 탁 놓이면서 슬며시 미소도 지어졌다. 조경란의 소설은 약자, 정확히 말하면 패배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는 점에서 나에게 늘 힘이 된다. 이 부분을 보니 삶의 실패들은 모두 훈장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도, 최소한 아무도 화제로 삼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소설로 치면 최소한 읽다가 책을 던져버리지는 않을 성장 소설쯤은 될 게다. 조금 지루해도 끝까지는 일단 읽어볼만한 정도라면 괜찮지 않은가. 원래 실패를 겪고 난 타인의 이야기만큼 정감 가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나를 H라고 가정했을 때, 나라도 H 얘기를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정말 묘하게 마음 편해진다.




삶이란 게 다 이런 것일 게다. 지원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죽여주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 삼순이가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이렇게 다짐한 것처럼.




하지만 미리 두려워하진 않겠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이크를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사랑하는 것.




책을 읽으면서 내내 삼순이가 떠올랐다. 요리사와 파티시에. 30대의 노처녀. 무엇보다도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까지 집어던지지는 않은 씩씩한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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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의사 고로와 유령 고로
가와후치 게이이치 지음, 한성례 옮김 / 바이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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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의사, 그것도 현재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개원의가 쓴 다섯 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 후 7년간의 방황이 그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의사로서 작가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나도 언젠가는 꼭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한편으로는 격려가 되고 한편으로는 위로가 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끝이 없는 것 같은 이 혼란도 훗날 내가 선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 날이 꼭 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의술을 질타하는 책은 너무나도 많다. 이 소설도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특별히 뛰어난 문학적 내용을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나와 다른, 그러나 또 다른 나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을 유령을 통해 주인공이 의사로서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독특했다. 결국 ‘더 나은 내’가 된다는 것은, 그전과는 다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내 안에 있던 것을 끄집어낸다는 의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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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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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네벨하임식 유머입니다. 모든 일에는 다 가치가 있다는 거죠. 당신은 어땠나요? 그 일이 가치가 없던가요? 

지금은 그렇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가치가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저는 빈털터리가 되었어요. 

 

이자는 대체 누굽니까?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지요. 

이건, 정말 심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는 너를 믿는다. 

너의 최초의 작품을 큰 기대를 갖고 기다리겠다. 

그리고 언제나 이걸 기억해요. 

우리는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 

삶이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일 뿐이다. 
 

 

그래... 어떤 일이든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머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빈털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삶이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기에, 항상 허둥대고 정신없을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돌아가야만 할 때도 있고, 때로는 한참을 멈춰서서 다른 이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다다른다는 것, 그리고 지나오는 길목길목에서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내 가슴에 새겨 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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