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집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동화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4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마리아 타타르 주석, 이나경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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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통 아주머니에서 나온 구절

"내가 시보다 더 세다는 걸 이제 인정할 테냐?"

에 대한 주석이다.

 

치통 아주머니는 육체적 고통의 사도로, 일레인 스케리가 지적했듯이 이는 언어를 차단하고 세상을 뒤집는 힘을 지닌다. 스케리는 두통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통찰력 있는 묘사를 인용하면서, 그것이 보다 극심한 형태의 고통에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햄릿의 고민과 리어의 비극을 표현할 수 있는 영어지만 오한이나 두통을 표현할 단어는 없다... 아무리 어린 여학생도 셰익스피어와 키츠에 반하면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있지만, 두통을 겪는 환자가 어떻게 아픈지 의사에게 묘사하려면 갑자기 표현할 말이 없어진다."(스케리, 1987, 4쪽)

치통 아주머니는 시, 철학, 수학, 그리고 대체로 음악을 포함한 예술 및 학문 분야와 대조를 이루는데, 그녀가 전적으로 유령 같은 존재이자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창조성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학생의 인생에서는(안데르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창조성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내용이다.

 

어릴 때 보았던 익숙한 동화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의미, 작가와의 관계, 그리고 새로운 동화를 읽는 즐거움. 그래서 이 책은 두 장으로 분리된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와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이를 위한 동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린 시절에 한번쯤은 읽었을 '소년소녀를 위한 세계명작동화'였을 것이고 어른을 위한 동화는 다소 잔인하고, 다소 적나라한, 그래서 아무리 각색을 하고 의도적으로 내용을 빠뜨려도 아이에게 읽히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그 중의 하나가 치통 아주머니였다.

 

사랑받기를 갈구했으나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고 외국에서는 인정받았으나 모국 덴마크에서는 외면받았으며 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나 사실은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던 안데르센은 모순되는 요소를 참 많이 갖춘 사람인 것 같다. 우리 중 누가 안 그렇겠냐만은 안데르센은 유독 어린아이와 같은 특징이 많았고 그것은 양면의 날이 되어 길이길이 남을 동화를 만들어내는 창조성과 더불어 평생 어른들 사이에서는 크게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둘다 초래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요즘에는 가장 성공한 복지국가의 모델인 덴마크가 한때는 이렇게나 사회적 모순이 심한 나라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고, 또 치통아주머니를 보면서 언어의 한계, 특히 인간의 고통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한계를 실감했고 그 고통 또한 양면성을 지녀 창조성을 선사하기도 앗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도 반드시 나에게 마이너스만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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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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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사랑 3부작 중 이 책이 최고인 것 같다.

 

다른 두 책은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놓았는데 이 책은 힘들다.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후벼파는 느낌이라서 아예 구매하고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의 단면을 낱낱이 잘라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인데 다른 두 책과는 달리 이 책은 읽는 내내 달콤하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부분이 전혀 없었고 그저 읽는 내내 아프기만 했다. 그래도 다른 두 책은 사랑할때의 달달한 순간도 잘 드러냈던 것 같은데.

 

여자 주인공이 너무 가여웠고, 안쓰러웠고, 내 동생이라면, 내 친구라면, 아니 나라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고 속수무책인 그녀 때문에 먹먹했다.

 

그래서 마지막 상황이 통쾌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나보다.

 

사랑일까. 과연 에릭은 앨리스에게 사랑이었을까. 읽는 내내 이건 사랑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도 사랑이지. 그 또한 사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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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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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에서 인용하였다.

 

남자 입장에서 남자 주인공의 시각으로 쓰여져 더 재미있고, 사랑에 대한 섬세한 발견도 놀라운데,

중간중간 저렇게 마음에 드는 구절까지 나오니 더 인상적이다.

 

이런 구절도 있었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있는 힘껏 삶을 영위하느라 미쳐 우리도 몰랐던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 말하면 입만 아픈 보통의 장기이자 특기이자 취미고 개성이겠지만, 이 책이 고작 스물 다섯에 쓰여졌다는 것은 질투날 정도로 그가 천재적인 작가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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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나
스티브 헬리 지음, 황소연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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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옮긴이의 말

문학의 진정성에 관한 유머러스하고도 진지한 성찰

 

진실에 물음표를 던지다

작가(作家, artist)는 ‘문학 작품이나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을 총칭한다. 좀 더 범위를 좁혀서 창작의 대상을 문학 작품에 국한시켜 생각해보자. 책을 저술하는 ‘저술가’ 혹은 책을 쓴 지은이인 ‘저자’란 어떤 사람들일까?

저술가나 저자는 영어로 ‘Author’라 할 수 있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author의 어원은 ‘무언가를 발명하거나 유발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autor’와 라틴어 ‘auctor’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15세기 무렵 본원의 뜻에 ‘진짜’ 혹은 ‘진품’이라는 뜻을 가진 ‘authentic’의 영향을 받아 현재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술가, 즉 글을 쓰는 작가들은 가짜나 허위보다는 진짜,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을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정말 그럴까?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통념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 과연 대중의 사랑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들은 정말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의 서투른 글을 다듬어주고 비용을 받는 일종의 대필 회사에서 일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우리의 주인공 피트 타슬로는 냉소적인 이 시대의 젊은이다. 그는 인기 소설가들을 대중에 영합하는 소설가 나부랭이, 사기꾼이라 비웃으며 자신도 베스트셀러 한 편을 보란 듯이 써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명예와 부를 거머쥐어 남은 평생을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꿈에 부푼다.

그가 이렇게 건방진(?) 꿈을 감히 꿀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뭐 대단한 진리가 존재하겠느냐는 일종의 회의론과 인간은 진실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싫어한다. 온 우주를 통틀어 사람들이 가장 치를 떠는 것이 바로 진실이다. 사람들은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대면하느니 차라리 3박 4일 동안 수천 가지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중략) 누구든 붙잡고 인생에 대한 진실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해보아라. 당신이 빗속에서 쫄쫄 굶어 죽어가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틀거나 넷플릭스의 예약을 조정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점으로 달려가서 24달러 95센트를 지불하는 이유는 진실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59쪽)

 

의견이 분분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문제를 풀자면, 우선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다각도로 필요한 듯하다. 많은 학문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다양한 해석과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우리의 주인공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론은 아마도 세간에 잘 알려진 ‘생존편의(survivorship bias)’와 ‘블랙 스완(black swan)’ 이론이 아닐까 싶다.

주로 금융공학 쪽에서 통계의 오류를 지적할 때 쓰이는 생존편의는 생존에서 살아남은 것을 과신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 개념은 부지 불식간에 우리의 생활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 우리는 생존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지나치게 집중함으로써 성공의 가능성을 과대 평가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직장인들이 1등에 당첨된 자들의 소문을 듣고 복권을 사서 일주일 동안 지갑 안에 고이 넣어 다닌다거나, 청소년들이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들의 성공 신화를 보고 연예인의 꿈을 키우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휴지 조각이 된 수많은 복권과 빈곤에 시달리는 무명 연예인들은 우리의 의식 바깥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이솝(Aesop)도 인간의 이런 속성을 간파했다. 우유를 한 양동이 얻은 시골 처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우유를 팔아 병아리를 사고,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되고, 닭이 또 병아리를 낳고....... 하는 식으로 미리 김칫국을 마시다가 그만 우유를 쏟아, 일을 그르치고 마는 우화도 넓게 보면 생존편의가 초래한 비극이다.

그렇다고 복권을 사고 연예인이 되는 꿈을 키우는 것이 꼭 잘못이기만 할까?

영국의 위대한 현자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희망은 경험을 압도하고 승리를 거둔다”고 말했다. 그리고 희망이 없으면 노력도 없다면서 희망이 없는데 어찌 노력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생활 속에 존재하는 생존편의적 측면은 비록 허황된 희망일지라도 삶을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는 우리의 주인공 피트 타슬로의 야심찬 꿈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그 헛된 꿈이 결국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도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행운의 여신

미국의 철학자 나심 탈레브가 주창한 블랙 스완 이론은,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1697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검은색 백조가 처음 발견되면서 백조는 흰색이라는 기존의 개념이 송두리째 뒤집어졌다. 그때부터 검은 백조는, 진귀한 것 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상황이 실제 발생하는 것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블랙 스완이란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 존재나 개연성을 따지기 어려운 것, 즉 운을 의미한다. 인간의 실력이나 능력은 행운이나 불운 앞에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속된 말로, 노력하는 자와 즐기는 자는 이 운이 좋은 자를 당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한데 버무려 소설 ‘회오리 바람 장례 클럽’을 탄생시킨다. 그가 그럭저럭 봐줄만한 글 솜씨를 밑천으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자, 웬걸, 행운의 여신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준다. 책의 출간을 결정짓는 자리에서, 주인공이 자기 소설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의 친구 루시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뭐?”

“말 못해. 좋은지 나쁜지 나는 모른다고.”

(중략)

“그들도 몰라. 내 상사는 절대 모르고. 상사의 상사는 더더욱 모르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앞에 고생길이 훤한 거야.”

“잠깐.......”

“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원고를 받는지 짐작이 가? 수천, 수만건이야!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어떤 사람들은 책상은 없어도 원고 더미는 쌓여 있어. 원고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는 일만 하는 사람도 있어. 어마어마하게 큰 쓰레기통에! 삽으로 퍼서! 그래도 원고는 끊임없이 들어와.”(156쪽)

 

정말 허무하고 황당한 장면이지만,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만큼 현실적으로 대중이 기호와 훌륭한 작품을 판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남대서양주식회사에 투자해 큰 손실을 입고 나서 “나는 천체의 운동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결국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해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복수하겠다는 불순한 동기와 약간의 글발(?)로 탄생한 주인공의 소설은 운이 좋아 출간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출판사의 벽이라는 첫 번째 난관을 넘고 나서, 다시 이 운이란 놈이 작용하는 덕분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우연히 어느 목사에 의해 광고가 되고, 우연히 미국의 서평 문화에 불만을 품은 어느 독자가 평론가에게 호되게 물어뜯긴 주인공의 소설을 예로 거론하는 바람에 세간의 이목을 끌어 재판을 찍고, 우연히 어느 유명한 여배우의 스캔들 사진에 등장하는 엄청난 행운을 잡는 덕분에 판매에 가속도가 붙더니, 우연히 인기 드라마에서 살인마가 읽고 있었다는 이유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고, 친구 루시의 인맥으로 인기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를 인터뷰하게 되면서 그의 소설은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그만큼 실력과 재능이 빼어난 경우가 워낙 많기 때문에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힘들다는 뜻도 되겠다.

 

그래도 진실이 승리한다? 아니, 진실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행운의 여신의 간택을 받아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주인공은 정상에서 계속 버티지 못하고 역시나 운명의 수레바퀴 밑에 깔려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주인공이 사기꾼이라 그토록 비웃던 거물 작가 프레스턴 브룩스와의 맞대결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데다(대중은 냉소적인 주인공보다 진실과 희망을 노래하는 프레스턴 브룩스를 선택한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뒤통수를 맞고(과거에 다니던 회사 사장의 부탁으로 어떤 펀드의 소개문을 써준 일 때문에) 뮤추얼펀드 사기꾼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역시 행운의 여신이 뒤에서 밀어주면 성공의 고지에 오를 수는 있어도, 진실(적어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런 신념이 없이는, 정상에서 버티기는 힘든 모양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고작 3,400부 팔린 ‘베이징’이라는 소설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리를 담은 그 작품의 문학적인 가치를 칭송함으로써, 그동안 줄곧 문학에 퍼붓던 냉소와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고 희망을 노래한다.

이 이야기는 얼핏 말도 안 되는 코미디 같기는 해도 아주 그럴싸하다. 또한 이 책에 등장하거나 언급된 소설가들은 거의 모두 허구의 인물들임에도 실존 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며 생생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소설과 같은 일이 진짜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흥망성쇠가 사실 본인의 잘잘못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또는 운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못난 자의 비겁한 변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니까.

옛말에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했는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가 잘나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은 듯하다.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훨씬 더 겸손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이 사기꾼 취급했던 프레스턴 브룩스는 정말 사기꾼일까? 그는 거짓으로 희망을 노래하며 단지 대중에게 사탕발림을 한 것에 불과했을까?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로 믿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즉, 그가 진실로 희망을 품고 있었다면, 그래서 진실로 그 희망을 믿고 대중에게 설파한 것이라면, 그는 진실한 작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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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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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저울 한 벌을 가지고 다니는군요. 안 그렇소? 모든 것을 자세히 재보는 버릇이죠. 안 그래요? 자, 친구, 마음을 결정하시오. 이젠 콱 정해버리라니까요!”

 

당신을 어떤 정열에서 해방시켜 좀 더 고상한 정열에 휩쓸리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것 또한 어떤 노예 상태가 아닐까? 사상이나 인종이나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동경의 모델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를 옥죄는 노예의 쇠사슬이 길다는 뜻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재미를 보고 까불다가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게 아닐까? 그럼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유일까?

 

“그렇소, 나는 아무것도 안 믿습니다. 나는 믿는 것도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조르바만 믿습죠.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서가 아닙니다. 천만에, 조금도 나을 게 없죠! 그도 다른 놈과 매한가지 짐승이죠. 하지만 나는 조르바를 믿어요. 왜냐하면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존재이고 내가 아는 하나밖에 없는 놈이니까. 그 밖의 모든 것은 허깨비지요.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들으며 이 창자로 먹은 것을 삭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지. 그렇고말고요.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싹 죽어 없어집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조르바의 말은 나를 채찍처럼 후려갈긴 것이다. 나는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그토록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존경했다. 그들과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도록 나는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모두 가짜 깃털로 장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사람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다.’나는 생각했다. 그러니 그의 두뇌는 괴상하게 뒤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온갖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다. 마음이 확 틔었고 원시적인 대담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으면서도 심장은 크게 성장해 있었다. 우리가 아주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풀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에, 그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칼로 끊어내듯이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그에게는 표적을 놓치는 일이 오히려 힘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두 다리는 온몸의 무게를 받아 힘차게 대지를 꽉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뱀을 숭배하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들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틀림없이 지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뱀은 그의 배로, 그의 꼬리로 그리고 그의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그것은 늘 대지의 어머니와 접촉하거나 어울려 지내는 것이다. 조르바의 경우도 그와 같을 게 틀림없다. 우리 교육받은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새 대가리처럼 골이 비어 있는 것이다.

 

“말썽이 나는 게 질색이라고요?” 조르바는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럼 도대체 주인님이 원하는 게 뭡니까? 사는 것 자체가 말썽입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요. 산다는 것-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알기나 해요? 당신의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찾아나선다는 뜻이라고요!”

 

“만약 확대경으로 당신이 마시는 물을 들여다보면-언젠가 한 기술자가 말해줬는데-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벌레가 물속에 우글거린대요. 그 벌레를 보면 마시지 못하겠죠. 물을 마시지 않으면 갈증으로 속이 타들어 가겠지요. 당신의 확대경을 부숴요. 그럼 작은 벌레들이 없어질 테니까. 그러면 마실 수 있고 정신도 번쩍 들 겁니다!”

 

미래가 다가오기도 전에 미래를 엿보려고 들었던 그날 아침의 지각없는 행동이 신을 모독하는 행위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아침 나뭇등결에 붙어 있는 나비 번데기를 발견했던 적이 있었다. 나비는 빠져나오려고 번데기에 구멍을 내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한참 기다렸다. 하지만 집을 뚫고 나오는 것이 너무 더뎌서 참기 힘들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입김으로 번데기를 덥히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급히 나비집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더니 바로 내 눈앞에서 생명의 속도보다 빠른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멍이 열리고 나비가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나는 그때, 뒤로 붙은 채 구겨진 그 날개를 본 순간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불쌍한 나비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날개들을 펴보려고 기를 썼다. 나는 그놈 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입김으로 날개 펴는 것을 도우려고 들었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나비가 부화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어야 했다. 그리고 날개를 펴는 일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는 작업이어야 했다.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내 입김이 나비로 하여금 날개가 온통 구겨진 채 때가 되기도 전에 앞당겨 나오도록 강요한 셈이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바동거렸지만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오늘 나는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어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달았다. 함부로 덤비지 않고, 성급하게 굴지 말며, 영원의 리듬을 굳게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그 모든 것에 피도 눈물도 없으며 아무 냄새도 풍기지 못하고 전혀 인간적인 내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푸르뎅뎅 창백하고 진공에 담긴 것처럼 텅 빈 언어들. 잡균 하나 없이 완전히 깨끗한 증류수이지만 영양분 또한 없었다.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 가슴에서 불타는 열망이, 대지와 씨앗을 품은 열망이 그의 시에서는 그만 하나의 티 없이 정연한 지적 놀음, 기발하고 몽환적이며, 복잡한 건축물이 되고 만 것이다. 순수한 시! 인생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더럽힐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이가 되어 있었다. 인간적 요소는 야만스럽고 거칠며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육체 그리고 불만이 지르는 비명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 전에는 그토록 나에게 매력적이던 것들이 오늘 아침에는 그저 단순한 지적 광대놀음이거나 세련된 사기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사나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살아왔다.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오직 펜과 잉크로 배우려고 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살아왔다. 내가 고독하게 의자에 눌어붙어 차근차근 하나하나 풀어보려고 했던 모든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 들고 공기 맑은 산 속에서 해결해버린 것이다.

 

“아! 내가 당신만큼만 젊다면 얼마나 좋겠소! 나는 모든 것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거요! 곧장 정면으로, 일이건 술이건 사랑이건 모든 것을 붙들겠어요.”

 

매순간 죽음은 죽어가고 생명은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삶과 같았다. 수천 년 동안 봄이 오면 신록이 우거진 나무 그늘에서 처녀 총각들이 모여 춤을 추었다. 포플러 밑에서, 전나무 밑에서, 떡갈나무 밑에서, 플라타너스 그리고 날씬한 종려수 그늘에서 그들은 정욕에 이글거리는 얼굴로 앞으로 또 수천 년을 계속 춤출 것이다. 얼굴은 바뀌고 허물어져 땅으로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기계입니까! 그에게 빵과 술과 물고기, 홍당무 따위를 가득 먹여놓으면 그 속에서 한숨과 웃음과 꿈이 되어 쏟아져 나오잖아요. 무슨 공장 같다니까요. 발성영화가 우리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위험한 순간에 놓였다고 생각하자 트렁크에서 하얗게 윤이 나는 뼈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서 그걸 베개 밑에 넣어뒀던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것은 다 찢어진 슈미즈와 벨벳과 걸레쪽에 뒤섞여 트렁크 맨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예수란 무섭도록 아플 때만 먹는 약 같았다.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동안 그것은 필요없는 약이었다.

 

“아니, 그 염병할 많은 책을 다 읽었는데도-도대체 그 책들이 무슨 소용이오? 당신은 뭐하러 그걸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답도 쓰여 있지 않다면 어떤 것을 당신에게 가르쳐 준단 말이오? 우리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말을 해달란 말이오.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은 마술이 적힌 검은 책들을 읽느라 몸을 불살랐으니까. 50톤의 종이쯤은 거뜬히 씹어먹은 셈일 텐데! 거기서 얻은 게 뭡니까?”

 

“세상에 세 가지 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돈 벌고 유명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보다는 인류 전체 생활에 더 관심을 쏟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모든 인간은 같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인류를 계몽하려고 하며 사랑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랑하려 들고,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 인간은 전 우주의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죠. 모든 사물의 목숨, 인간과 동물과 나무와 별들, 우리는 모두가 한 목숨이고, 우리는 다같이 무서운 싸움에 말려든 한 물질이라는 겁니다. 무슨 싸움이냐고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꿔놓기 위한 싸움이죠.”

 

사위어가는 불 곁에서 나는 조르바의 말을 저울질하고 재봤다. 뜻이 많은 그 말들은 따뜻한 흙냄새를 풍겼다. 그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그 말은 인간의 따스함을 아직 지니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나의 말은 책에서 나온 종이로 만든 말, 그것들은 내 머리에서 떨어지는 것일 뿐 거의 핏방울 하나 묻어 나오지 않는 그런 말들이다. 말 속에 만약 어떤 조그마한 가치가 있다면 그 속에 묻어 있는 한 점의 핏자국 덕분이다.

 

모든 것이 빗나가고 뒤틀리고 있을 때 당신의 정신을 시험하고 정신의 인내력과 용기를 관찰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노릇인가! 보이지 않는 가장 강력한 적이-어떤 이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어떤 이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지만-우리를 파괴하려고 기습을 가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파괴되지 않았다. 비록 겉으로는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져도 그때마다 안에서는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인간은 형용할 수 없는 자부심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외부의 재앙은 더할 수 없이 높고 뒤흔들어놓을 수 없는 행복감으로 변한다.

 

운이 없는 사람은 가련한 자기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스스로 믿는 방벽을 쌓아놓게 마련이다. 그는 그 속에 숨고 그의 생활에 작은 질서와 안정을 구축하려고 든다. 자그마한 행복감이다. 모든 일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처리된다.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일과를 이루며 그는 안전하고 단순한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미지의 세계로부터 밀어닥치는 맹렬한 공격을 막기 위해 견고히 방어된 이 테두리 안에서 그의 왜소한 확신은 도전을 받지 않는 지네처럼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기적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정말 무서워하고 미워해 마지않는 커다란 필연적인 사실이다.

 

“천만에,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그는 말했다.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이 묶인 줄보다 더 길지도 몰라요. 그것뿐이죠. 당신은 긴 줄에 묶여 있어요, 주인님. 당신은 그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니까 자유롭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당신은 그 줄을 절대 자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려면 한물 살짝 간 바보가 돼야 합니다. 모든 걸 위험에 내맡겨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강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니 언제나 그 머리가 당신을 다스리게 될 거예요. 사람의 머리는 식료품상 같지요. 계산을 합니다. 내가 얼마를 쓰고 얼마를 내었다, 그건 곧 이 정도의 이윤 아니면 저 정도의 손해다! 머리는 조심스러운 장사꾼이지요. 절대로 가진 물건을 모두 거는 도박은 않습니다. 언제나 예비금이 조금은 있거든요. 속박의 줄은 결코 못 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아, 어림없는 소리지요! 녀석은 팽팽히 줄에 매달려 있는 거예요. 잡았던 줄을 놓치면 머리라고 하는 작은 악마는 갈 곳을 잃고 끝장이 나버리고 마는 거죠! 그러나 사람이 그런 유대의 끈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인생은 무슨 맛이 남겠습니까? 카모밀차의 맛밖에 남는 게 없겠지요! 럼주 같은 향기, 당신 인생의 안팎을 뒤집어놓고 맛본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조르바가 한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어렸을 때 나에게는 온갖 광기, 초인간적인 욕망이 가득하여 도무지 세상에 만족하질 못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침착해졌다. 나는 한 개의 줄을 긋게 되었다. 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과 분리했고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것에서 구분하면서 나는 내 연을 꼭 잡아당겼다. 달아나지 못하게.

 

이성이라는 영원한 소매상인은 마치 우리가 마녀와 늙은 여자를 비웃듯이 정신과 영혼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괴벽이 있는 노파들을 비웃듯이 말이다.

 

처음 나는 화가 났다. 수백만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지탱할 빵 한 쪽이 없어 쓰러져가고 있는데 나더러 예쁜 녹옥 하나를 보러 수천 마일의 여행길을 떠나라고 전하는 전보가 오다니! 아름다움 따위는 지옥에나 가라지! 도무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선 한 가닥 관심조차 없거든.......하지만 나는 곧 너무 놀라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야생의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나더러 가자고 보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나는 대담하게 나서질 못했다. 나는 속에서 외치는 신성한 야만의 목소리에 따르지 않았다. 나는 생각 없는 고상한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성의, 온건을 취하며 차디찬 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고 조르바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조르바의 답장이 왔다.

당신은 고작 펜대 놀리는 재간밖에는 없는 사람이오. 당신도 일생의 한 번쯤은 녹옥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련만 가련하게도 그걸 보지 못했던 거예요. 참 환장할 노릇이죠. 할 일이 없을 때면 나는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세상에 지옥이라는 게 있을까 없을까? 하지만 당신의 편지가 오고 난 다음 나는 말했습니다. 정말 몇 사람 안 되는, 주인님 같은 펜대 운전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지옥이 있을 거라고요.

 

창문을 바다 쪽으로 열어놓으니 교교한 달빛이 방 안에 넘치고 바다 또한 행복한 듯 속삭이고 있었다. 수영을 너무 많이 해서 내 몸은 관능적으로 피로해 있었으며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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