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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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저울 한 벌을 가지고 다니는군요. 안 그렇소? 모든 것을 자세히 재보는 버릇이죠. 안 그래요? 자, 친구, 마음을 결정하시오. 이젠 콱 정해버리라니까요!”

 

당신을 어떤 정열에서 해방시켜 좀 더 고상한 정열에 휩쓸리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것 또한 어떤 노예 상태가 아닐까? 사상이나 인종이나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동경의 모델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를 옥죄는 노예의 쇠사슬이 길다는 뜻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재미를 보고 까불다가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게 아닐까? 그럼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유일까?

 

“그렇소, 나는 아무것도 안 믿습니다. 나는 믿는 것도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조르바만 믿습죠.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서가 아닙니다. 천만에, 조금도 나을 게 없죠! 그도 다른 놈과 매한가지 짐승이죠. 하지만 나는 조르바를 믿어요. 왜냐하면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존재이고 내가 아는 하나밖에 없는 놈이니까. 그 밖의 모든 것은 허깨비지요.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들으며 이 창자로 먹은 것을 삭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지. 그렇고말고요.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싹 죽어 없어집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조르바의 말은 나를 채찍처럼 후려갈긴 것이다. 나는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그토록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존경했다. 그들과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도록 나는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모두 가짜 깃털로 장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사람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다.’나는 생각했다. 그러니 그의 두뇌는 괴상하게 뒤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온갖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다. 마음이 확 틔었고 원시적인 대담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으면서도 심장은 크게 성장해 있었다. 우리가 아주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풀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에, 그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칼로 끊어내듯이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그에게는 표적을 놓치는 일이 오히려 힘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두 다리는 온몸의 무게를 받아 힘차게 대지를 꽉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뱀을 숭배하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들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틀림없이 지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뱀은 그의 배로, 그의 꼬리로 그리고 그의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그것은 늘 대지의 어머니와 접촉하거나 어울려 지내는 것이다. 조르바의 경우도 그와 같을 게 틀림없다. 우리 교육받은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새 대가리처럼 골이 비어 있는 것이다.

 

“말썽이 나는 게 질색이라고요?” 조르바는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럼 도대체 주인님이 원하는 게 뭡니까? 사는 것 자체가 말썽입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요. 산다는 것-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알기나 해요? 당신의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찾아나선다는 뜻이라고요!”

 

“만약 확대경으로 당신이 마시는 물을 들여다보면-언젠가 한 기술자가 말해줬는데-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벌레가 물속에 우글거린대요. 그 벌레를 보면 마시지 못하겠죠. 물을 마시지 않으면 갈증으로 속이 타들어 가겠지요. 당신의 확대경을 부숴요. 그럼 작은 벌레들이 없어질 테니까. 그러면 마실 수 있고 정신도 번쩍 들 겁니다!”

 

미래가 다가오기도 전에 미래를 엿보려고 들었던 그날 아침의 지각없는 행동이 신을 모독하는 행위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아침 나뭇등결에 붙어 있는 나비 번데기를 발견했던 적이 있었다. 나비는 빠져나오려고 번데기에 구멍을 내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한참 기다렸다. 하지만 집을 뚫고 나오는 것이 너무 더뎌서 참기 힘들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입김으로 번데기를 덥히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급히 나비집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더니 바로 내 눈앞에서 생명의 속도보다 빠른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멍이 열리고 나비가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나는 그때, 뒤로 붙은 채 구겨진 그 날개를 본 순간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불쌍한 나비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날개들을 펴보려고 기를 썼다. 나는 그놈 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입김으로 날개 펴는 것을 도우려고 들었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나비가 부화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어야 했다. 그리고 날개를 펴는 일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는 작업이어야 했다.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내 입김이 나비로 하여금 날개가 온통 구겨진 채 때가 되기도 전에 앞당겨 나오도록 강요한 셈이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바동거렸지만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오늘 나는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어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달았다. 함부로 덤비지 않고, 성급하게 굴지 말며, 영원의 리듬을 굳게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그 모든 것에 피도 눈물도 없으며 아무 냄새도 풍기지 못하고 전혀 인간적인 내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푸르뎅뎅 창백하고 진공에 담긴 것처럼 텅 빈 언어들. 잡균 하나 없이 완전히 깨끗한 증류수이지만 영양분 또한 없었다.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 가슴에서 불타는 열망이, 대지와 씨앗을 품은 열망이 그의 시에서는 그만 하나의 티 없이 정연한 지적 놀음, 기발하고 몽환적이며, 복잡한 건축물이 되고 만 것이다. 순수한 시! 인생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더럽힐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이가 되어 있었다. 인간적 요소는 야만스럽고 거칠며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육체 그리고 불만이 지르는 비명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 전에는 그토록 나에게 매력적이던 것들이 오늘 아침에는 그저 단순한 지적 광대놀음이거나 세련된 사기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사나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살아왔다.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오직 펜과 잉크로 배우려고 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살아왔다. 내가 고독하게 의자에 눌어붙어 차근차근 하나하나 풀어보려고 했던 모든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 들고 공기 맑은 산 속에서 해결해버린 것이다.

 

“아! 내가 당신만큼만 젊다면 얼마나 좋겠소! 나는 모든 것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거요! 곧장 정면으로, 일이건 술이건 사랑이건 모든 것을 붙들겠어요.”

 

매순간 죽음은 죽어가고 생명은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삶과 같았다. 수천 년 동안 봄이 오면 신록이 우거진 나무 그늘에서 처녀 총각들이 모여 춤을 추었다. 포플러 밑에서, 전나무 밑에서, 떡갈나무 밑에서, 플라타너스 그리고 날씬한 종려수 그늘에서 그들은 정욕에 이글거리는 얼굴로 앞으로 또 수천 년을 계속 춤출 것이다. 얼굴은 바뀌고 허물어져 땅으로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기계입니까! 그에게 빵과 술과 물고기, 홍당무 따위를 가득 먹여놓으면 그 속에서 한숨과 웃음과 꿈이 되어 쏟아져 나오잖아요. 무슨 공장 같다니까요. 발성영화가 우리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위험한 순간에 놓였다고 생각하자 트렁크에서 하얗게 윤이 나는 뼈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서 그걸 베개 밑에 넣어뒀던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것은 다 찢어진 슈미즈와 벨벳과 걸레쪽에 뒤섞여 트렁크 맨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예수란 무섭도록 아플 때만 먹는 약 같았다.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동안 그것은 필요없는 약이었다.

 

“아니, 그 염병할 많은 책을 다 읽었는데도-도대체 그 책들이 무슨 소용이오? 당신은 뭐하러 그걸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답도 쓰여 있지 않다면 어떤 것을 당신에게 가르쳐 준단 말이오? 우리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말을 해달란 말이오.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은 마술이 적힌 검은 책들을 읽느라 몸을 불살랐으니까. 50톤의 종이쯤은 거뜬히 씹어먹은 셈일 텐데! 거기서 얻은 게 뭡니까?”

 

“세상에 세 가지 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돈 벌고 유명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보다는 인류 전체 생활에 더 관심을 쏟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모든 인간은 같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인류를 계몽하려고 하며 사랑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랑하려 들고,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 인간은 전 우주의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죠. 모든 사물의 목숨, 인간과 동물과 나무와 별들, 우리는 모두가 한 목숨이고, 우리는 다같이 무서운 싸움에 말려든 한 물질이라는 겁니다. 무슨 싸움이냐고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꿔놓기 위한 싸움이죠.”

 

사위어가는 불 곁에서 나는 조르바의 말을 저울질하고 재봤다. 뜻이 많은 그 말들은 따뜻한 흙냄새를 풍겼다. 그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그 말은 인간의 따스함을 아직 지니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나의 말은 책에서 나온 종이로 만든 말, 그것들은 내 머리에서 떨어지는 것일 뿐 거의 핏방울 하나 묻어 나오지 않는 그런 말들이다. 말 속에 만약 어떤 조그마한 가치가 있다면 그 속에 묻어 있는 한 점의 핏자국 덕분이다.

 

모든 것이 빗나가고 뒤틀리고 있을 때 당신의 정신을 시험하고 정신의 인내력과 용기를 관찰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노릇인가! 보이지 않는 가장 강력한 적이-어떤 이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어떤 이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지만-우리를 파괴하려고 기습을 가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파괴되지 않았다. 비록 겉으로는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져도 그때마다 안에서는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인간은 형용할 수 없는 자부심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외부의 재앙은 더할 수 없이 높고 뒤흔들어놓을 수 없는 행복감으로 변한다.

 

운이 없는 사람은 가련한 자기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스스로 믿는 방벽을 쌓아놓게 마련이다. 그는 그 속에 숨고 그의 생활에 작은 질서와 안정을 구축하려고 든다. 자그마한 행복감이다. 모든 일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처리된다.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일과를 이루며 그는 안전하고 단순한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미지의 세계로부터 밀어닥치는 맹렬한 공격을 막기 위해 견고히 방어된 이 테두리 안에서 그의 왜소한 확신은 도전을 받지 않는 지네처럼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기적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정말 무서워하고 미워해 마지않는 커다란 필연적인 사실이다.

 

“천만에,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그는 말했다.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이 묶인 줄보다 더 길지도 몰라요. 그것뿐이죠. 당신은 긴 줄에 묶여 있어요, 주인님. 당신은 그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니까 자유롭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당신은 그 줄을 절대 자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려면 한물 살짝 간 바보가 돼야 합니다. 모든 걸 위험에 내맡겨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강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니 언제나 그 머리가 당신을 다스리게 될 거예요. 사람의 머리는 식료품상 같지요. 계산을 합니다. 내가 얼마를 쓰고 얼마를 내었다, 그건 곧 이 정도의 이윤 아니면 저 정도의 손해다! 머리는 조심스러운 장사꾼이지요. 절대로 가진 물건을 모두 거는 도박은 않습니다. 언제나 예비금이 조금은 있거든요. 속박의 줄은 결코 못 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아, 어림없는 소리지요! 녀석은 팽팽히 줄에 매달려 있는 거예요. 잡았던 줄을 놓치면 머리라고 하는 작은 악마는 갈 곳을 잃고 끝장이 나버리고 마는 거죠! 그러나 사람이 그런 유대의 끈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인생은 무슨 맛이 남겠습니까? 카모밀차의 맛밖에 남는 게 없겠지요! 럼주 같은 향기, 당신 인생의 안팎을 뒤집어놓고 맛본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조르바가 한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어렸을 때 나에게는 온갖 광기, 초인간적인 욕망이 가득하여 도무지 세상에 만족하질 못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침착해졌다. 나는 한 개의 줄을 긋게 되었다. 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과 분리했고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것에서 구분하면서 나는 내 연을 꼭 잡아당겼다. 달아나지 못하게.

 

이성이라는 영원한 소매상인은 마치 우리가 마녀와 늙은 여자를 비웃듯이 정신과 영혼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괴벽이 있는 노파들을 비웃듯이 말이다.

 

처음 나는 화가 났다. 수백만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지탱할 빵 한 쪽이 없어 쓰러져가고 있는데 나더러 예쁜 녹옥 하나를 보러 수천 마일의 여행길을 떠나라고 전하는 전보가 오다니! 아름다움 따위는 지옥에나 가라지! 도무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선 한 가닥 관심조차 없거든.......하지만 나는 곧 너무 놀라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야생의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나더러 가자고 보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나는 대담하게 나서질 못했다. 나는 속에서 외치는 신성한 야만의 목소리에 따르지 않았다. 나는 생각 없는 고상한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성의, 온건을 취하며 차디찬 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고 조르바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조르바의 답장이 왔다.

당신은 고작 펜대 놀리는 재간밖에는 없는 사람이오. 당신도 일생의 한 번쯤은 녹옥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련만 가련하게도 그걸 보지 못했던 거예요. 참 환장할 노릇이죠. 할 일이 없을 때면 나는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세상에 지옥이라는 게 있을까 없을까? 하지만 당신의 편지가 오고 난 다음 나는 말했습니다. 정말 몇 사람 안 되는, 주인님 같은 펜대 운전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지옥이 있을 거라고요.

 

창문을 바다 쪽으로 열어놓으니 교교한 달빛이 방 안에 넘치고 바다 또한 행복한 듯 속삭이고 있었다. 수영을 너무 많이 해서 내 몸은 관능적으로 피로해 있었으며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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