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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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서 <나목>에 대한 이야기가 슬쩍 나왔었다. 원고 부피에 끔찍한 생각이 났다는, 그래서 지긋지긋해졌다는, 우송까지 끝마친 뒤에 너무 허전해 울고 싶었다는 그 소설을. 독서모임에서 <나목>이 지정도서가 된 걸 알고는 나도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도서관에 간 김에 제일 먼저 찾았다. 하지만 책의 연도와 그 역사에 걸맞게 책의 상태는 더럽혀져 있었다. 내가 책의 구매를 망설였던 것은 필시 이전에 작가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에서 왔는데, 책 구매를 실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대부분의 책을, 사전 지식을 갖추지 않은 채로 읽는다. 알게 된 것은 모르겠지만, 부러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전 지식을 갖추고 읽으면 보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기존보다 넓어질 것을 모르지 않지만, 성격상 그것과 이것을 별개로 두지 못하고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꼴이 되는 것 같아서 어느 순간 내 입맛에 맞게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교집합이 되어 결국은 과부하가 되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한 채로, 끄적거렸던 독서노트만 준비해서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어느 부분들에 마음을 두고 이 책을 읽었는지를.

유난히 소설에는 부연, 회색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쓰인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연 하늘, 부연 화면, 부연 혼돈, 부연 눈, 그리고 회색빛 고집, 회색 머리, 회색 건물, 회색 휘장, 회색빛 절망. 그 부연 것과 회색은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이루고 있는 부연 회색을 미워하는 이경인 까닭이다.

321. “나 때문이었을까?”

오빠들이 머물고 있었던 곳을 큰아버지와 그 아들에게 내어주고 오빠들은 행랑채에 머물게 하자고 한 것이 이경이었고, 그 행랑채가 폭격을 당해 오빠들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에 의해 더 선명해지고 만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살아 있다는 것이 거리낌 없이 좋았던 날들은, 그 말에 의해 살아 있다는 것을 송구스럽다고 느끼게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이경은, 가끔은 처절하고 가끔은 가엾고 가끔은 처량하게까지 느껴진다.

51. “식기 전에 잡숴보셔요. 식을까 봐 가슴에 품고 왔어요.”

이번에야말로 설마 어머니의 눈빛이 무슨 뜻을 지녀오겠지 기대하며 주시했다. 어머니는 시들하게 받아놓고 습관화된 딴 일을 시작했다. 국을 데우고 상에다 수저와 그릇들을 올려놓고. 어머니의 눈은 결코 딴 뜻을 지니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라는 완강한 고집 외에는. 나는 빈대떡 산 것을 후회했다. 가슴에 품고 왔음도.

특히 내가 한 나중 말, “식을까 봐 가슴에 품고 왔어요”를 후회했다. 물건이라면 뺏고 싶도록 그 말을 돌려받고 싶었다.

이경은 그렇게 어머니를 원하지만, 결국은 미워하게 되고, 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겉에서 맴돌며 보살피는 건 이경이다. 다만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집요하게 나를 쫓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 부연 눈에 공포와 증오를 동시에 느끼는 이경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시절, 그렇게 아들이 중요했던 걸까. 장가는 급하지 않아도 손주는 급하다던, 더구나 세상이 이러니 빨리 씨를 받아놓고 봐야 한다던 그 말이, 그 시대를 짐작게 했지만, 종족 보존과 번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좀 질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종족에 대한 열망이 아니더라도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한숨을 자주 내쉬어야만 했다. 결국 이경이 어머니에게 원했던 것이, ‘때때로 아주 가끔만이라도, 자상한 시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옥희도 씨의 부인이 건넨 자상한 시중은, 때로는 샘이 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위안이었고 위로였으며 따듯한 손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360. “오, 어떡하면 자네가 알아줄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미칠 듯이 암담한 몇 년을, 그 회색빛 절망을, 그 숱한 굴욕을, 가정적으로가 아닌 예술가로서 말일세. 나는 곧 질식할 것 같았네. 이 절망적인 회색빛 생활에서 문득 경아라는 풍성한 색채의 신기루에 황홀하게 정신을 팔았대서 나는 과연 파렴치한 치한일까? 이 신기루에 바친 소년 같은 동경이 그렇게도 부도덕한 것일까?”

옥희도 씨와 이경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옥희도에게 이경은 본인이 가질 수 없었던 풍성한 색채였고, 이경에게 옥희도는 어머니가 주는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버지이자 오빠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행보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나는, 가난을 궁상맞지 않게 다스리는 부인이 자꾸만 떠올랐으므로.

소설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결국은 전쟁을 겪었고, 겪어냈고, 겪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깊은 밤,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내일, 삶과 죽음을 번갈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 날들, 결국 나로서 살고 싶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망들이, 그들의 삶 깊숙이 숨어들었고, 스며들었다. 우리는 모든 것들에 노크를 할 수 있다. 이미 지나왔던 시간, 지나가는 시간, 머물러있는 시간, 다가올 시간들에. 새로운 생활에의 노크들을 망설이지 않기를, 그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그 노크에 마음이 가닿았기를.

덧_ 이후 박완서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몇 가지 사소한 이유로 에세이를 좀 더 가까이 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좀 더 강해서) 뜬금없이 이번 소설 전집 표지가 마음에 든다. 어릴 적에 신문에 있는 글자들을 오려 글씨조합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이건 내가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참.

 

 

 

 

*책 속의 문장

62. 그는 난리 통에 하나도 다치지 않은 그의 아들딸의 이름을 나열하며 완전히 주름을 폈다. 순간 그는 거침없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 집의 처지와 자기들과를 비교함으로써 그의 행복은 완벽한 것 같았다.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해야 더욱더 고소하고, 맛난 자기의 행복…….

65. 나는 할 수 없이 옥희도 씨를 생각했다. 그리고 주문처럼 ‘그는 딴 사람과 다르다. 그는 딴 사람과 다르다’고 외었다.

나는 그런 되풀이를 통해 어쩌면 새로운 생활에의 노크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23. 난 쓰기를 그쳤다. 밤이 깊다. 밤은 텅 빈, 무엇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텅 빈 내일을 몰고 오리라. 차라리 내일이 없었음 좋겠다.

바람은 아직도 멎지 않은 채 고가의 허술한 곳들, 함석 차양, 수많은 문짝과 창문을 흔들었다. 설음질을 끝마친 어머니가 분합문을 드르륵 닫으며.

124. 나는 여기서 기억의 소급을 정지시켰다.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갈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지금도 그것이 궁금할 뿐 내 기억의 소급은 노오란 빛 속에 용해되어 다시는 헤어나질 못했다.

145. 육친이라서 주저되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받쳤다.

그 놀라운 인색, 무서운 고집,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을 그토록 참담하게 만들 권리는 없으리라. 그토록 자혜롭기에 인색할 수가.

227. “사람이고 싶어. 내가 사람이라는 확인을 하고 싶어.”

“내가 아직도 화가인가 알고 싶어.”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어.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 정진과 몰두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261. 그 그림은 물론 그녀 때문일 리는 없었다. 그것은 필경 그 회색 휘장 대문일 게다. 부옇게 그의 시선을 가로막은 휘장 때문일 게다. 그 휘장이 그의 영감을, 그의 상상력을 억압했을 게다.

257.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부연 화면에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그뿐이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부연 혼돈 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257. 나는 그런 그림들에서 어떤 언어를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냥 그 빛과 빛깔을 즐겼었다. 삶의 기쁨이 여러 형태의 풍성한 빛깔로 나타난 그림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나의 그림에 대한 눈은 오색 풍선을 동경하는 아이들처럼, 포목점 앞에서 아름다운 천을 선망하는 여인처럼 소박하고 단순했다.

322. 내가 내 허물에 관대해졌다 해서 어머니의 허물에까지 관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결코 어머니를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다.

329. 우리는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인 것이다. 유쾌한 구경꾼들이 자꾸만 몰려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무런 재주도 부릴 줄 모르는 무능한 원숭이일 뿐, 우리의 절망이 그들에게 미칠 리 없고 또한 그들의 애환이 우리에게 생소하다. 우리는 휘장을 밀었다.

366. “어렸을 땐 맴을 돌고, 커가면 술을 배우고, 사람들은 원래가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권태롭고 답답해 못 견디게 태어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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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드로잉 내가 좋아하는 것들 4
황수연 지음 / 스토리닷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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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노래를 못 불러 음악시간을 싫어했고, 모든 운동에 겁을 내기도 했고 체력이 안 되기도 하여 체육시간을 싫어했고, 손재주가 없어 미술시간과 가정시간을 싫어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과목은 너무나도 협소했다. 아니, 어떻게 신은 내게 이렇다 할 재주 하나 주지 않은 걸까, 많이 원망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도대체 내가 잘 하는 건 뭐지? 하고 깊은, 정말 아주아주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져 생각을 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지만, 본질적으로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운동신경이 뛰어나지 않고 손재주가 없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10. 정말 닿고 싶지만 닿지 않아 애틋함까지 느꼈다. 미술은 나와 거리가 먼 영역이니 바깥에서 우러러볼 뿐, 그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중에 미술을 말하자면, “두 시간 동안 그린 게 이거야?”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선을 그렸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원을 그렸다가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그러다 보니 스케치북은 금세 너덜너덜해졌고 주위에 완성된 그림을 제출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주 조급함을 느꼈고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다 보면 스케치북을 찢고 도망을 가고 싶을 때도 여러 번이었으나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대충 아무렇게나 그려서 제출하기 일쑤였다. 점점 그렇게 재미없는 과목이 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더 이상 강제로 그리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비로소 자발적으로 그림을 보기 시작했고 감상하는 것을,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찾아다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경외심을 가지며 존경하게 되었고 그뿐이었다.

 

 

어느 날 글을 쓰다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게 있는데, 그것을 글로 나열하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런 일은 빈번하게 찾아왔지만, 그때는 왜인지 글로 써낼 수 없는 그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가 처음 그림을 배워볼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게 세 달 전이었다. 바로 실천에 옮길 수도 있었지만, 아직 적절한 학원을 찾지 못해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내게 학원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림을 더 숙제처럼 생각하고 더 두렵게 생각해서 멀어질까 봐인데, ‘잘 못 그릴까 봐’, ‘실패할까 봐’라는 두려움을 걷어내면 그림은 재미있는 놀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하지만, 쉽게 배워봐야지!라고 생각하기에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유튜브로 배워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책으로도.

 

 

 

이번에 읽은 책이 단순히 드로잉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었다면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드로잉이 있었다. 그림을 못 그려 보는 것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와는 달리,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아, 좋아하는 게 그림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림’이 주제인 책이다 보니,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곳곳에서 그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도 많아서 어쩐지 슬몃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책에는 표지 외에 저자의 그림이 실려있는 페이지가 없어 아쉬웠는데 찾아보니 다른 그림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참 다채로운 색감을 쓰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그런지 통통 튀는 생동감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걸 보니,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내 그림 실력이 생각나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못 그린 그림은 없다.는 문장이 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그게 언제가 되든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작가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이런 나도 반가워해주시려나. 하하.

 

 

 

163. 저는 뭔가 선택을 할 때 어려움에 놓이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질투하고 있는가.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그게 제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거든요. - 유튜버 ‘이연’

그런데 글을 읽다가 문득, 좋아하는 것들은 어떻게든 삶을 살게 해주고 삶의 자세를, 삶의 매무새를 고쳐주는 역할을 하는구나. 좋아하는 것들을 꽉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를 살게 하는 것을, 나의 기쁨이 되는 것들을, 다시 하나둘씩 적어본다.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척도는 될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마음에.

 

 

 

 

덧, 몇 달 전에 j랑 핸드폰으로 코끼리를 그렸는데... 내가 그린 코끼리를 보고 j가, “넌 코끼리를 본 적이 없어?”라고 물었다. 아무래도 그이는 나의 안티인 것 같으니 무찔러야겠고(!)

 

 

 

 

 

 

 

 

 

 

*책 속의 글

103. 끝이 정해지지 않은 자유 속에 던져진 나를 겪어보니 나는 별로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소한 것까지 미리 정하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그럴 때 안정감을 느꼈다. 계획이 차근차근 실현될 대 행복감을 느꼈고 정해둔 일정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발견했다.

더욱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웠다. 스스로 생산적인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행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흐지부지 지나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고자 했다.

 

168. 결과를 갈망하는 욕심들을 지나고 지나 다시 과정을 잘 겪어 내며 살고 싶은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렇다 할 결과를 손에 쥔 누군가를 보면 잔잔했던 마음이 소란해질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목표했던 결과를 얻는 것보다, 과정 내내 나를 잃지 않고 나답게 살아나가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매 순간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며, 타인에 상관없이 내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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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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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들이 툭툭 끊어져내리는 무료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다 말다 가다 말다 하는 억지스러운 마음들을 부여잡고 책 한 권을 간신히 읽어내렸다. 무척 좋았지만, 단편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해져버려 그 감정들이 소멸되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 소설을 읽는 게 아니었나 하며 혼자 툴툴대고 있었는데, 이건 단순히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좀 깊숙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 장편을 찾았다. 그렇게 읽기 시작했고, 한 챕터가 끝났다. 이게 웬걸, 이거 단편이었어?

편혜영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어떤 책이 가장 좋았나 하고 물으면 궁색해지는 대답이 그 이유를 대신한다. 하지만 어떤 점이 좋은가 하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다. 인물의 형상이 아니라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들이 책을 아우르는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그런데 이번 책을 읽다가, 나는 첫 번째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 지나간다>도 아니고, <저녁의 구애>도 아니고, <선의 법칙>도 아니고, <홀>도 아니고, 이 책, <어쩌면 스무 번>이라는 것을. 한 단편씩 서평을 쓰고 싶었는데,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몇 번을 더 읽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이해라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뒤편에 있는 이야기의 결말을 조심스럽게 상상해보기도 하고, 내 이야기를 껴넣어보기도 하고, 그냥 놔둬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단편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나 그랬다. 이 책이.

올여름은 옥수수를 많이 될 것 같다. <어쩌면 스무 번>

“여기가 어쩌다 이렇게 됐어?” <호텔 창문>

“소령님 덕에 우린 좀 좋아졌잖아요.” <홀리데이 홈>

“항아리 다음에 말이야. 차라리 이름을 부를걸.” <리코더>

남편은 선택했다. 돌아오지 않기로. <플리즈 콜 미>

우리가 불리해서 키운 전장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낱낱이 드러낸다고. <후견>

흘러가는 건 다 좋은 거라고. 좋은 건 다 흘러간다고 말했다. <좋은 날이 되었네>

아줌마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구했다. <미래의 끝>

읽는 내내 등 뒤가 서늘해져 자주 뒤를 돌아보아야 했고, 으슬으슬함에 이불을 목까지 덮어야만 했다. 뒤를 돌아보면 머리카락이 다섯 가닥만 남고 혀가 꼬부라진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좀비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내 안의 괴물을 닮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건 정말이다. 크고 작은 몰락이 만들어낸 커다란 ‘홀’은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었고 우리는 그 구멍에 발을 내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시작한 일을 끝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 구멍은 내가 만들었을 수도, 니가 만들었을 수도, 제3자가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구멍을 만든 이를 힐난하고 책망하다가, 우리는 곧 현실을 깨닫고 체념하고야 만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깨닫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나... 하고 자문한다.

근래에 내가 가장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가족, 가족이란 무엇일까였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거였나, 하고 절망스러울 때가 종종 있는데, 장인을 대하는 아내(<어쩌면 스무 번>)를 보면서, 나를 구하고 죽은 형의 이름을 나에게 부르는 큰어머니(<호텔 창문>)를 보면서, 누군가 그를 알은척을 할 때면 두려움이 먼저 든다는 아내(<홀리데이 홈>)를 보면서, 깨진 항아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남편(<플리즈 콜 미>)을 보면서, 도울 방법이 없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하는 엄마(<플리즈 콜 미>)를 보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솔하려는 아버지(<후견>)를 보면서, 아는 바가 없었기에 사이가 좋았을 어머니와 아들(<좋은 날이 되었네>)을 보면서, 바깥의 부모가 미래를 만들고 깨뜨리는 것을 보는 딸(<미래의 끝>)을 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그 생각들은 완전하지 못하고 흩어져서 종착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그 덕분에 조금 덜 절망스러워질 수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언제 다시 절망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이야기들에서 삶의 애환이 녹아있었다. 그들의 삶의 가지를 천천히 상상했고, 내 삶의 가지는 어느 부분에 있는지 점쳐보며 어떤 구멍이 있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구멍이 있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지. 분명 그 가지의 어느 부분에는 내가 예견하지 못한 자리에 구멍을 만들기도 하고, 이곳에는 구멍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부분의 구멍은 메꿔지기도 하며, 어떤 예상치 못한 부분에 다른 어린 가지를 만들어내 더 풍성하고 다양한 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_책 속의 문장

28. 조금 더 기다리면 하늘에 희미하게 달이 떠올랐다. 운 좋게 둥근 달을 보는 날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33. “오늘은 옥수수 없어?”

“가서 따올게.”

“아니, 이제 옥수수는 없어.”

49. 운오는 간혹 형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지만 결코 형이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자기를 죽일 줄 알았던 형이 자신을 살린 것을 ㅇ라고 운오는 구역질을 했다. (…) 그렇기는 해도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무섭고 겁이 났다. 죽기 전에도 형은 그런 존재였는데 죽고 나니 더 두려운 사람이 됐다. 고마운 적은 없었다. 자신을 구해줬어도 마찬가지였다. 형이 자신을 살린 걸 생각하면 언제나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82. “소령님 덕에 우린 좀 좋아졌잖아요.”

“소령님이 멀리서 걸어오시기만 해도 우린 다 쫄았어요.”

이진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권위와 위계를 칭찬으로 여겼다.

“우릴 엄청 팼으니까요. 툭하면 팼잖아요. 우리더러 악마에 씌웠다면서요.”

83. “사진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남아 있잖아요. 나를 때린 사람도 있고 내가 잘못한 사람도 있고요. 심지어 죽은 사람도 있어서 기분이 이상해져요. 소령님도 그럴 때가 있어요?”

86. “그런데 소령님.”

“소령님.”

“예? 소령님.”

106. 그후 수오와 무영은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둘이 있으면 적어도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미안해지는 일은 없었다. 서로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있었다. 죽을까봐 무서웠지만 죽지 않아 더 무섭다는 말 같은 것.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는 이유나 밤에도 불을 켜고 자는 사정을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 살아났다는 것에 감동받은 적 없지만 적어도 안심은 됐다.

113. 어떤 말은 내내 품고 있지만 결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도.

118. 미조가 거짓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하기 싫은 말을 하지 않았다.

121. 술은 미조가 온종일 잠을 자든 소리 죽여 울든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잠을 자도록 도왔고 마음껏 울도록 도와주었다. 미조에게 그렇게 해주는 건 술이 유일했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느긋하고 애틋하게 지난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금 더 마시면 금세 낙담에 빠져들었다. 취하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찾아왔고 알고도 간과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126. 딸은 요즘 들어 그런 말투를 썼다. 달래고 어르는 말투.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설득하고 안심시키려는 말투.

미조는 웃었다. 누군가 가까이 있기만 해도 충분할 때가 있다는걸, 미조에게 딸이 그런 존재라는 걸 딸은 모르는 것 같았다.

130. 남편은 황당하거나 불쾌한 일을 겪으면 화를 내는 대신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남편이나 미조나 어떤 일은 겪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경험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130. 여보.

어서 와요.

그래, 알았어요. 잘 있어요.

133. 여보, 나는 돈 새는 깨진 항아리가 되었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기껏 깨진 항아리라니.

미조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자신에게 부쩍 다가와 있는 미래에 가느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134. 남편은 순전히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헤매다가 종내는 스스로를 잃게 되는 일도 있으니까.

138. 미조는 모른 척했을 뿐이다.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울 방법이 없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해버린 것이다.

139. 아무리 말해도 달라지지 않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걸까. 자신이 그랬듯 딸 역시도 도울 수 없으니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일까.

189.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이가 괜찮았다.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했다.

195. 어머니가 가고자 했던 곳이, 멈추려던 곳이 어디인지, 날카로운 가위를 휘두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윤에게 가위를 휘둘렀을 때, 어린아이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을 때,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상처 입은 마음과 가위뿐이었으리라는 것을 막연히 이해했다.

201. 부모는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다.

209. 무엇보다 아줌마는 바깥의 공기를, 미래라 부를 수 있는 들뜬 마음을 환기시켜주었다.

210. 미래를 위한 보험이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달래지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집에는 언제나 나 혼자뿐이었다.

221. 아줌마는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거라고 했지만, 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자 여러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 미래는 바닥나버렸다.

223. 우리 미래를 부순 돈이 아주 적은 액수가 되어 돌아왔다.

224. 어떤 더한 일이 생겨야 엄마가 아줌마를 찾을지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생기기를 바랐고 더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아줌마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시련이 닥치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도움이 필요치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

작가의 말 _ 내게 있어 소설은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 낙차가 소설 쓰는 나를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는 것도. 그렇기는 해도 나아진 채로 삶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이 낙차와 실패를 잘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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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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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쯤 서러운 일이 다시 생겼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문자로 상황을 설명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면 연락하지 말라는 내 말에, 기어이 다시 한번 나에게 그 말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 서러움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순도 높은 서러움이 나를 에워싸며 그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닌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고 왜 창피해야 하고 왜 쪽팔려야 하는 거지... 생각을 하다가 그 생각을 차단하기로 했지만 기어이 그 말들은 내 귀에 끈덕지게 들러붙어 나를 괴롭혔고 나를 그렇게도 많이 울렸다. 그 말은 나의 모든 상황이 안정화로 접어든다 하더라도 따라붙을 말이었다. 이제껏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했던, 하지만 자발적으로 수고했다거나 고맙다고 말 한마디 듣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그 대상이었다. 이전에도 서운한 일이 생길 때마다 표현에 서툴러서 그런 거겠지, 원래 그랬으니까, 공감에 부족한 사람이니까 하고 그를 미워하지 않기 위한 이유들을 지어냈다. 하지만 그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응당 부모라면 자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이 깨어졌다. 농담처럼 나는 부모의 부모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적이 있는데, 그게 진실로 수렴되어버릴 것 같게 되자 나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서러움이 길게 갈 것 같다.

마침 j한테 전화가 왔고, 나는 엉엉 울었다. 혼자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j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 상황을 설명하면서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서러움이 나를 옥죄어온다. 그날 j는 퇴근이 좀 늦을 예정이었고, 나는 집에 혼자 있기가 싫어 카페를 가기로 했으나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감금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나 혼자만 외로운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다. 그래서 난 가장 안온한 나의 공간에서 집에 있는 필라델피아 치즈케이크를 꺼냈고, 아메리카노를 휘휘 저었고, 풍성한 로즈마리 대신 듬성듬성한 올리브를 올려놓고 보면서 내 슬픔들도 듬성듬성해져 거리가 멀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던 책이 있었지만 내가 이날 읽기로 한 것은 전전날에 도착한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라는 책이었다. 딱 시의적절하게 나를 찾아왔네. 싶어서 서글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책에 대한 내용을 어렴풋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읽고 싶었고, 그래서 읽기가 두려웠다. 책을 읽다가 내 알몸을 내보이게 되면 어쩌지, 하는 공포감도 나를 후려쳤다.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머리를 먼저 뉘어야 했다. 하지만 머리를 비울 방법을 나는 몰랐고, 그렇다면 차라리 더 깊이 들어가 버려 이 문장들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조금이라도 벗겨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가 아닌 모부라는 단어 선택만으로도 알았다. 아, 페미니즘. 언젠가부터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은 일부러 거부하고 있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인데, 그 부분을 깊이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멀리서 응원을 하는 선택지를 택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1부에 있었다.

8.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원래 특별한 거라고들 하지만 내 엄마는 아들을 ‘영혼의 동반자’ 같은 걸로 여겼다. 부계와 얼굴부터 체형까지 닮은 나와는 달리 엄마의 무언갈 날 때부터 좀 더 많이 지닌,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하늘이 점지해준 엄마의 사랑.

나 역시 어릴 때 엄마에게서 남동생과의 차별을 수시로 받았다. 의사가 아빠에게, 자칫하다 산모가 죽을 수 있으니 아이를 포기하라고 권유했지만 엄마는 끝까지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 내 남동생이었다. 남동생은 세 누나에게 둘러싸일 아이였는데, 바로 위 두 누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더라 하고 옆에서 주워듣기만 했고, 나는 그 사실들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남동생은 엄마의 보호와 보살핌과 넓은 아량과 배려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여러 차별들을 겪으며 남동생을 지독히 미워했다. 어느 날은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느 날은 자고 있는 동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기도 했다. 엄마의 차별이 심할수록 나는 남동생에게 더 야박해졌고,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너는 애가 참 못돼 처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분고분했던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의 머리통이 둥그렇게 변하면서는 반항이 시작되었다. 나는 입으로 싸웠고, 남동생은 나를 때렸고 그 자리는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당시 엄마가 내게 내뱉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니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 걔는 순한데 그냥 때릴 리가 있냐.” 그 말을 들으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던 나를, 공포스럽게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안다. 남동생이 미웠다기보다 차별하는 엄마가 미웠고, 엄마가 사랑하는 남동생을 어떻게든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났었다는 것을. 아무리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도 사람이기에 더 예쁘고 덜 예쁜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혹여라도 우리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단 한 명의 자식만 두겠다고 했다. 모든 사랑을 그 아이에게만 다 쏟아붓겠다고 다짐했었던 이유였다.

16. 가족이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를 겁주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불안에 떨지 않고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얘기를 딸들에게 하고 싶다. 원가족을 벗어나 김장철에 김치 얻을 데가 없고 명절에 전화할 데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골백번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라.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사랑을 인질로 잡은 어떤 관계도 나를 살리는 관계가 될 수는 없다. 그 밖에도 세상이 있다고, 훨씬 넓고 깊고 무섭고 가슴이 뛰는, 그리고 정말 생각보다는 친절한 진짜 세상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다.

원가족에서도 떨어져 보기도 했고 현재는 j와 결혼해서 잘 살고도 있지만, 나는 이제야 혼자 살 자신이 생겼다. 부모와 살 때나 j와 살 때 모두 집을 나가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혼자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해본 적도 없고, 혼자 살아보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지금의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안온함과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그런 마음이 생긴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혼자 산다는 것은 실행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야 혼자서도 나는 잘 살 수 있는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변화다. 아마 이 마음이 10년 전의 내게도 있었다면, 나는 원가족에서 벗어나 혼자 살았을 텐데.

책에서도 말한다. ‘그래도 가족이잖아’라는 해괴망측한 문장이 주는 뾰족함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싶어서 씁쓸한 웃음을 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자그마치 삼십 년이다. 내가 간절히 원했지만 가질 수 없을뿐더러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에 대한 동경은 이제까지 했으면 됐다.

85. 복수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원가족과의 거리를 멀찍이 두고 넓혀나가기로 했다. 내가 힘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더 이상 나는 나 외의 사람들을 변호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과 연락을 지속하면서 미움이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어쩌면 그게 내가 내 안에 있는 병을 키우지 않는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그들을 여전히 미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불행을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했으면 한다.

2부를 읽을 때는 공감을 하지는 못하고 물 흐르듯 책장을 빠르게 넘겨나갔다. 곳곳에서 남성에 대한 혐오를 발견했고 그것은 엄마가 남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끼는 차별성이, 훗날 작가가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화석화되며 일반화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억측을 하게 했다. 여성과 남성을 꼭 자로 재듯 그어놓고 서술한 부분들을 보면서 결국은 같은 인간인데 싶으면서도, 문득 가치관을 형성함에 있어 유년시절에 내가 처해있던 환경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언젠가부터 경험의 다소(多少)와 유무(有無)가 인생을 살면서 크게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험이 많아도 본인이 경험한 것을 우선순위로 두어 그 안에서 타인의 경험을 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은 타인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결핍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게 생각을 하는 것. 하지만 많이 어렵다. 우리가 석가모니,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聖人)도 아닌데.

_책 속의 문장

13. 내가 집을 나오기 직전 아빠에게 들은, 최후의 버튼을 누른 마지막 한마디는 “너 피해의식 있다”였다. 나는 이 단어가 여자들에게 어떤 감정적 족쇄를 채우고 어떤 상처를 무효로 만드는지 책도 한 권 쓸 수 있다. ‘너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는 건 피해를 지우는 말이다. 아주 흔하게 너 미쳤다는, 예민하다는, 별스럽다는, 까다롭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내면을 파헤치면 ‘아무것도 되묻지 말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뜻의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에 딸이 갈 곳이라고는 가족밖에 없는데 가족을 의심하다니 너에게는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15. 이제는 안다. 딸이 겪는 가족은 아들이 겪는 가족과는 다르다. 마치 같은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그 미묘한 차이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그렇게 얻은 기억들은 극복하기 힘든 결절이 된다. 마땅한 내 것을 달라고 말하면서도 송구해하는 비굴한 인간이 되거나 파워 게임에 귀신같이 능한 학대자가 되기 딱 좋은 토양이다.

28. 애초 가족계획을 세우기 전에, 투입하되 거둬들이지 못한 만큼 가엾고 허무해지는 그들 자신의 인생과 자식 사이에 어떻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아파트 사기 전에 대출 이자 계산해보는 정도만큼의 진지함으로도 염려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28.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있지도 않은 며느리나 사위에 손자까지를 끼워넣은 가족사진을 상상하고 그 안에서 재생산에 성공한 당당한 자신의 미소를 상상한다. 그렇게 마치 남들도 다 가졌다는 집이나 차처럼 가족을 갈망한다.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에 반드시 있을, 당연하다는 듯이 약속받은 그 가족을.

29.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와 겹칠 수밖에 없다. 혈육에 대한 애정을 다른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 터무니없는 기대에 다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65. 매일 매시간 매초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부터 너무도 잘못 안 나머지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전부 잘못이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로 깨어 있는 시간 모두를 보냈다. 아니 깨어 있지 않은 시간에도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생각했다.

69. 책은 조금 읽고 술은 많이 마시고 밤공기는 더 많이 마셨던, 핑계도 없이 만난 그 사람들이 나를 살렸다.

88.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저주와 앙심을 품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기방어에 가깝다.

91. 내가 지금 아는 것은 가족을 용서하고 가족에게 이해받고 딸로서 어떤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을 온전히 포기한 후에 내가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상상해온 고급하고 성스러운 용서와 사랑 같은 장면은 나에게 영영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혼자서 그들을 이해하려 분투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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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든 우리가 있어
김혜정 지음 / 리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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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날 때마다 비울 것들을 찾곤 한다. 비움을 시작하며 들이는 것을 적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단지 나의 착각이었음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돈을 적게 썼으니까, 이번 주엔 택배도 거의 안 왔잖아-라고 했지만, 하루에 한 개의 물건을 비우면 꾸준하게 하루에 두어 개의 물건이 집으로 들어왔다. 이는 집에 들어오는 물건을 기록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그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하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도 환경에 대한 책을 꾸준하게 읽으며 경각심을 번쩍번쩍 일으켜 세우자는 내 취지에 맞게 책을 고르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매우, 무척이나 무겁게 다가오는 책, 작가 이력 밑에 '지구라는 별 위에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을 위해 앉아서 눈물만 흘리기보다는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그렸습니다.’라고 쓰여있었던 책, <어디에든 우리가 있어>

 

 

 

빛나는 도시를 위해 빛을 잃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이 강이 되어 흐른다.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선행학습을 해야 하는 책이었다. 핵 발전, 비자림로 도로 확장, 설악산 국립공원 오색 케이블카 설치, 평창동계올림픽을 위해 500년 된 가리왕산의 원시림이 훼손된 것 등에 관한 내용들도 짤막하게 한 페이지 정도에 담아내었다. 그것들을 보며, 그야말로 눈앞에 “이건 명백하게 니네들이 잘못한 일이야.”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씩 그 사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움과 혼란스러움에 그 사실들을 자꾸만 옆으로 밀어냈다. 변명하고 핑계를 대는 애처럼, 아니야.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라고 하다가 금세, 결국은 포기하게 된다. 그래, 맞아. 우리가 그랬지. 내가 그랬어. 하고.

 

 

 

우리가 만나기까지 오백 년이 넘게 걸렸어.

나는 너희들의 현재이자 과거이고 다가올 미래야.

나를 지켜줘. 내가 너희를 지킨 것처럼.

 

 

 

최근에 동화사를 다녀왔다. 그곳에는 여러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는데, 바로 ‘구름다리 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다녀온 이후에 찾아보니 철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 어떤 이유보다 수행 환경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조계종의 동의가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고, 동화사 소유 부지 매입이나 사용승인 없이는 현실적으로 사업 추진이 어렵기 때문에 철회를 한 요인이 컸을 테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여 철회를 위해 반대를 해준 많은 이들의 덕택으로 많은 나무들을 살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고 기쁜지 모른다. 동화사는 개인적으로 많이 뜻깊어서 더욱 기쁜지도.

 

 

 

곧, 식목일이 다가온다. 새로운 묘목을 심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있는 나무들을 지켜야만 한다. 인간의 욕심으로 모든 자연을 훼손하면 안 됨을 알아야 한다. 집에 있는 식물이 조금만 주눅 들어있거나 토라져있어도, 얘가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하게 된 나는, 세상의 나무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인간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마셔 산소로 내뿜는 나무들의 기특함에 우리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며 응원해야만 한다. 가장 최근에 리나가 수명을 다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집의 온도가 문제가 된 것 같은데 겨울을 이겨냈다면 따듯한 봄을 함께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서운함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책에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들에 관해서도 나온다. 새끼에게 플라스틱을 먹이로 물어다 주는 새, 물에 떠있는 비닐봉지를 먹으려는 곰, 기형인 발을 가지고 있는 비둘기,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갈매기, 닭장에서 알만 낳게 되는 닭, 겨울 외투가 되는 너구리, 그리고 우리를 떠날지도 모르는 사과...

우리 함께 살자. 사람도, 식물도, 동물도. 함께 어우러져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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