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나였다 - 웃프고 찡한 극사실주의 결혼생활
햄햄 지음 / 씨네21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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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만 8년, 햇수로는 9년이 되었다.

내가 너를 입양해왔잖아. 너는 나랑 결혼 안 했으면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아마 엄마님한테 어이고 이제 그만 시집 좀 가~ 하면 안 가!! 하며 승질내고 있을 무직미혼서른몇살벨라야.

나는 아마 그가 상상하는 것처럼 무직도, 미혼도 아닐 것 같지만,

나와 결혼해서 나를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있다는 것에 반발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물음표로 반발 중)

가끔은 “내가 너를 입양해왔는데 이렇게 고생만 시키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J가 나를 입양해왔다고 말하는 것이나 햄햄님이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은 의미라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이 우리 집에서 데려오다, 데리고 온다, 데리고 왔다.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J는 내게 꼭 모시러 갈까? 모시러 갈게. 라는 문장을, 나는 내가 갈까? 어디로 갈까? 라는 문장을 구사해왔었다. 대부분 J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집에 들였다, 집에 데리고 왔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을, 서평을 쓰며 처음 알게 되었다. 오, 낯서네...

아무튼.

웃프고 찡한 극사실주의 결혼 생활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널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나였다>라는 웹툰을 보게 되었다.

사람 사는 거 비슷비슷해서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각자의 방식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타인의 삶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내가, 최근 일주일 새에 타인의 삶을 보는 것에 흥미를 잃었었다.

내가 행복해서 타인의 삶이 시시해 보인다거나 내가 불행해서 타인의 삶을 보면서 시기나 질투를 느낀다거나 내 감정에 어떤 변화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 삶에 조금 더 집중하는 시기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유추해 보는 것뿐이다. 삶의 권태도 약간 가미되어 있는 것 같고... (이게 얼마 가지 않겠지만 사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상태라 이 책을 잘 읽을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웹툰이니까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슬렁슬렁 읽어내려갔다.

아무래도 웹툰이다 보니 글줄이 짧아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은 직후에 J와 다투고 집을 나가 혼자 길지 않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집을 나갈 때는 씩씩거리면서, 그래 한 번 해보라지!라는 심정이었는데,

오히려 여행지에서 비로소 나를 바라볼 수 있었고 그동안 내가 외면했던 그를 수면 위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가 내게 보여주고 행동해 준 사랑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시간들을 체감하게 되었다.

무 가까워서 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는 감사한 일들뿐이었다.

사랑하는, 다시 사랑하게 된 당신에게. 라는 한 줄의 편지를 시작으로 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내비쳤다.

내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 사랑들에 고마움을 전하고 보답하기 위해서였지,

결단코 어쩌겠어, 같이 살아야지...라는 심정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내 일탈은 무척 유의미했다.

(J는 그렇게 말하는 내게, 그래? 그럼 또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뭬야?)

하, 부부 관계라는 건 참 오묘하다.

하, 라는 한숨을 무작정 쉴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부부라는 관계망은 그만큼 복잡하고 미묘하고 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 고리타분한 강제성이나 억압성이 부여되지 않는데도 이런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니 말이다. 신사임당의 포도화를 닮은 곰팡이와 같은 부부의 세계에 들어온 시바와 판다의 행보를 응원한다.

“결혼하면 좋아요?”

예전에도 좋았고,

지금도 좋고,

앞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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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는 동안에 부에나도 지꺼져도
오설자 지음 / 푸른향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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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마음이 복작거렸던 한글날이었다. 특유 한국인의 조급성에서 비롯되었을 법한 ‘말줄임’을 알지 못해서 그게 무엇이냐고 묻기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과 나는 여전히 말줄임을 알지 못하고 싶다는 소망이 충돌해 마음이 어지러웠다. 분명히 내가 아는 국어인데, 자꾸 다른 나라 국어를 듣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의사소통마저 힘들 지경이 오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했다.

작은 땅덩어리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다양한 지역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또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대한민국이 그리 작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경상남도 진주에서 길을 묻던 내게 친절하게 알려주던 아주머니의 사투리를 대면하던 때, 태어나서 경상도 사투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울고 싶기도 했고 얼른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택시 기사님의 조그마한 입이 열릴까 두려웠다. 누군가 나를 빼놓고 몰래카메라라도 하는듯했던 그날.

이제는 경상도의 사투리가 영 낯설지는 않지만, 경상도에 8년째 살다 보니 본래의 고향 사투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끔 나에게서 경상도의 억양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올 때면 헉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틀어막기도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대부분 이곳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내 억양이 조금 바뀐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과 융화되고자 했던 결과물이 아닐까 하지만, 입안의 까슬거림이 좀처럼 뱉어지지가 않는다. 이러다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억양이 입에서 흘러나오면 어쩌지? 라는 생각은 몇 년 전에 만난 J의 지인을 만나고서였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억양이 이상하게 바뀌었다고 그의 아내가 한탄했다. 단편적으로 그것만 경험해봐도 나를 온전하게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했다. 무언가를 가지고 버리는 일보다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품이 든다는 걸 이제야 안다. 그래서 제주어를 지키고자 이 제주에세이를 출판했을 저자의 마음을 조금 헤아리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책의 제목인 <우리 사는 동안에 부에나도 지꺼져도>를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 <우리 사는 동안에 화나고 기뻐도>라고 번역해 볼 수 있다. 책 제목만 봐도 물음표가 떠다니는데, 책 안은 더욱 복잡하다. 도대체 우리가 같은 한국어를 쓰는 한 민족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결집해있는데, 유추할 수 있는 단어보다 유추할 수 없는 단어들이 더 많았다. 한 챕터에 가득 제주어만 있는 경우에는 두어 줄까지 읽고 실패 실패,를 외치며 뒷장을 넘겨 해석을 읽고 다시 돌아와 읽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제주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보니 억양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고민하다가 혼저옵서예가 떠올랐고 그 억양과 비슷하게 속으로 읽어내려갔는데 이건 아무래도 경상도 억양 같고? 혼자 이게 맞는지에 대해 사뭇 진지해지고 말았다. 결국 유튜브를 틀어 다시 제주어를 들어보았다. 같은가? 다른가? 아, 잘 모르겠다...

제주어는 2010년에 유네스코에서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언어가 존재할 수 없기에 제주어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 제주어가 사라지면 유일하게 남아 있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고어들이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제주에서는 아직 상호를 제주어로 지어 사용하고, 제주어 생활수기 공모나 제주어 말하기 대회를 열어 학계와 일반 십시일반 힘을 합쳐 제주어를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게 느껴졌다.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일상에 대한 소중함이 책 속에 녹아있다. 저자의 따듯한 마음과 소중한 염원들이 나풀나풀 날아와 손바닥에 앉는다.

책에서 제주에서 가장 큰 사건인 4.3이 거론되었다. 내가 힘들어했던 일과 관련하여 내 뒤에서 어떤 말을 발설한 이와 내게 전해주었던 이 모두 차단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풀리지 않아 흐느낌을 자처했던 빼곡하게 지난했던 밤들을 기억한다. 물론 타인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 고통에 대해 무심하게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는 사라지거나 소멸되거나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는 마음을, 우리는 더불어 소중하게 생각해줄줄 알아야 한다. 제주어가 망울망울 허공을 유영하고 나는 그것들을 손으로 잡아본다. 같은 한국어지만, 낯선 단어들이 손안에 있다.

ㅈ.(아래아)들지 맙서.

살당 보민 조은 날 이실거우다.

늬영 나영 손 심엉 벵삭이 웃으멍

조은 시절 잊어불지 말게

걱정하지 마세요.

살다 보면 좋은 날 있겠지요.

너와 나 손잡고 웃으며

좋은 시절 잊지 말자





_책 속의 문장

43. 지나간 것들은 모두 그리운 풍경입니다. 희미해질 때도 되었으련만 해가 갈수록 그 시절이 여름날 빨래처럼 마음속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85.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지나고 나면 모든 날들은 좋게만 느껴집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분쉬어신(철없던) 그 시절처럼 우리들 삶 전체가 ‘참 좋은 하루’이길 바라는 마음이 되곤 합니다.

97. 태풍은 인간들의 오만한 태도를 응징하는 신의 입김쯤으로 여겼습니다. 재해가 오면 삶을 돌아보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시련을 딛고 다시 삶을 이어갔습니다. 쓰러진 농작물을 일으켜 거두고, 멜라진(무너진) 담을 다시 쌓았습니다. 새봄이 돌아오면 여전히 씨를 뿌리고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141. “난 그냥 하루하루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밤에는 당신과 함게 잠들고요.”

142. 외로운 순간에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삶고 그렇게 작은 것들로 위로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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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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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단어집을 만든 적이 있다. 나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글이 아닌,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 싶었던 때였다. 동의어 사전, 유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나만의 단어집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조금 더 어렵고, 조금 더 낯선 단어들을 그러모아 작은 수첩에 꽉꽉 채워 넣었다. 그 언젠가 볼 때마다 내가 이 단어를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무용한 얼굴로 그 수첩을 바라봤고 그 이후에 나는 단어집을 만드는 일을 자연스레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 욕심이 없어졌느냐 물어오면,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마음을 다할 만큼의 시간을 들여 글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라고까지 쓰다가, 시간을 어디에 그렇게 쓰길래 글을 쓸 시간도 없는 걸까 싶어서 공허한 마음을 내려둘 곳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단어 하나에도 인생의 주요점들을 하나씩 찍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풀어내는 것이 성가시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온 탓인가, 아니면 게을러진 탓인가. 타인에게 건넨 나의 이야기들이 흩어지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면 입을 다물게 되고 결국 반쯤 귀를 열어두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안락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과한 몰입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게 된 책, <단어의 집>

단어생활자 안희연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파편들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그 파편에는 파닥임과 반짝임, 그 마주침의 순간들을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조각되어 있다. 나는 책의 중반쯤 이르자 시인의 이야기는, 아픔을 꾸역꾸역 눌러가며 쓴 글이구나 싶었다. 인생의 크고 작은 힘든 일을 안고 살다보니 언젠가부터 마음의 눈물 호수에 잔잔한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시인의 글들은 그저 읽어달라고 내게 정중하게 기대어옴을 느꼈다. 그랬기 때문에 단어와 나를 연관을 지으며 책을 읽기보다 오롯하게 시인의 단어들을 읽었다.

11월 11일, “가을도 없이 겨울이 왔네.”라고 말하던 S선생님의 말에 화가 불끈 난 적이 있다. 그게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것이냐는 J의 말에, 본인이 알아채지 못한 걸 가을 탓을 하잖아. 지금도 밖은 가을이라고.라고 대답했다. 나는 잊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를 선생님의 상황을. 내 안에 가을이 있어야 바깥의 가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올해(2021) 가을은 길었고 넓었고 깊었다. 크게 힘든 일이 없었는데도 어쩐지 과분한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실 때, 햇볕을 받으며 걸을 때, 벤치에 앉아있을 때 가을이 살금살금 곁에 와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윽고 비가 내렸다. 올해는 가을이 자기 이제 갈 거라며 인사도 하고 가네. 하며 빙긋 웃었다. 겨울이 온 지금, 가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역시 그토록 다정한 가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에야, 비단 가을만 그런 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단어들은 까꿍 하며 튀어나오고, 어떤 단어들은 토라져있고, 어떤 단어들은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고, 어떤 단어들은 숨죽여 울고 있다. 그 단어들 역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일 테니까.

우리 모두는 있었거나 지금 있거나 있어야 하거나 있을 삶들을 늘 지나친다.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이 되고 삶이 된다지만 그 하루들이 바쁜 이들에게는 한가로이 나에 대해 사유할 시간조차 부담으로 다가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툭툭 튀어나오는 단어들에 나를 개입하면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위로하고, 다독여줄 수도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비로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슬픔으로 박제된 어떤 단어에 충분한 위로를 한 뒤 그 자리에 시간을 주어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넣을 수도 있다.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단어에서 단어로 미끄러지는 도미노 놀이는 까다로운 작은 소망들을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고 비김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비록 내 손에 독일의 블라이기센 키트가 없더라도 82.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 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하고.

_책 속의 문장

72.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그 우주의 섭리와 질서를 인정하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인간 종에 대한 환멸이 커져갈수록 내가 미지라 여겼던 세상에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고민하게 된다. 얼굴을 가진, 무엇보다 두 ‘눈’을 가진 존재들과 눈 맞추는 일. 그건 나를 흔들고 부수는 과정이다. 확고부동하게 여겨졌던 나,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나를 텅 비우는 과정이다.

89.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시간이든 썩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 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119. 기억이란, 시간이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홀로였던 순간의 추위는 영원에 가까운 상흔이다. 가시처럼 박힌 기억은 수시로 따끔거리며 제 존재를 증명하려 들 것이다.

126.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135. 그 어떤 타인의 삶도 함부로 측량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잣대는 세상에 없다.

151. 변해서 슬픈 이유는 다름아닌 그것이다. 응전할 힘이, 무기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168.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인간은 아주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린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누름돌, 당신의 한 점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178. “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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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블로그 일 방문자 수 1,000명 만들기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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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블로그를 언제 시작했더라? 하고 보니, 2009년부터였다. 서평책을 신청하면서 서평을 블로그에도 올려야 했기 때문에 만들어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는 블로그보다 (네이버) 카페에서 시간을 더 보냈었기 때문에 블로그를 키워야지 라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타이밍이 맞아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적었고 다행히도 그때의 사람과 결혼을 했다. 아이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면 어쩔 뻔했어...

그때의 블로그를 향한 마음이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나 혼자) 굳건히 믿고 있다. 책을 제외하고는 해야 하는 리뷰보다 하고 싶은 리뷰를 했다. 누가 읽어도 상관없는 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웃 공개로 일상에 관한 포스팅을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읽히고 싶지 않은 그런 글. 그러다보니 이웃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내는 오래된 이웃이지만 분명 오래전에는 활발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묻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국한된다. 그분은 더 이상 블로그를 하지 않아서 나는 그분의 근황도 모르는데,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분은 나의 근황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게 살살살 마음을 긁어댔다. 그래서 이웃을 끊은 적이 있는데, 왜 끊었냐고 물어오기에 시답지 않은 말을 한 적도 있다. 지금은 솔직하게 ‘다시 친해지면 이웃하려고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다.

 

 

사람은 타인의 좋지 않은 일에 더 공감하기가 쉬운 모양인지, 좋지 않은 일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그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물론 당시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내가 느낀 감정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나의 본인이 타인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 같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말들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웃을 고민하고 정리하고 새로 만들고 하는 작업들을 귀찮지만 몇 달에 한 번씩 꾸준히 한다. 블로그를 지금보다는 더 오래 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불편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이웃추가를 함으로써 그들에게 내 이웃공개 포스팅이 다 보인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웃이더라도 그룹별로 볼 수 있는 포스팅이 달랐으면 하는 (나에게만 필요할 쓸데없는) 소망을 가져본다.

 

 

 

 


 

 

사족이 길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 달 만에 블로그 일 방문자 수 1,000명 만들기>라는 책을 조금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다. 이제는 읽어볼까 싶어 책을 펼쳤는데 블로그 방문자 수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실려있어 꽤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는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는 많은 분들이 고민해 봤음직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어떻게 블로그를 하지? 다만 나는 처음 블로그를 할 때 막무가내로 포스팅을 시작해서 그런지 다른 분들의 그런 마음에 많이 공감할 수는 없지만, 뭐든 처음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때문에 충분히 고민을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블로그만 10년 이상을 한 내 기준에도 블로그가 다른 SNS보다 조금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다른 SNS에는 몇 분이면 업로드할 수 있는 하나의 글이 블로그에만 오면 조금 더 신중해지기 때문이다. 같은 사진이더라도 더 수다쟁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못 했던 말들을 쏟아내기도 하고 그렇다. 또 블로그를 할 때 크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종종 느꼈던 건 블로그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잔뜩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는 내가 이걸 좋아했구나. 내가 이걸 싫어했어? 지금은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라는 뜻밖의 나의 발견.

 

 

책에서도 블로그를 ‘나’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가장 처음 꼽았다. 그리고 블로그의 정체성.

나는 일상 블로그를 지향하는데, 여기에서 나는 ‘소소한 일기장’에 속한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보자면 ‘글쓰기 및 자기계발’ 정도? 아... 자기계발? 잘 모르겠네. 글을 쓰는 것도 책 감상인 서평 말고는 딱히 쓰지 않는 것 같고. 내 블로그의 성격은 뭘까.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봤는데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뜬금없지만, 내 작고 시시한 글을 읽어주시는 이웃님들께 감사를)

 

 

 

 

블로그 이름과 닉네임을 짓는 사소한 것부터 상위노출을 위한 키워드, 높은 조회수 만들기, 수익창출까지 블로그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블로그 저품질에 대해서는 종종 몇몇의 이웃님들한테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 블로그 이사를 간다고 하여 혼자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한 적 있었으나 책을 읽어보니 타인에게 나를 노출시키기 위해 블로그를 만든 이들에게 저품질에 걸려 내가 더 이상 노출이 되지 않는다면 블로그 이사를 갈 수밖에 없구나,하고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나는 상위노출을, 높은 조회수를, 수익창출을, 블로그에 있는 글로 책을 내는 일도, 인플루언서도 원하지 않고, 적어도 이 블로그에는 체험단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단순하게 ‘와 진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블로그 세상이네’ 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다른 블로그마케팅 책은 읽어보지 못해서 비교는 어렵지만, 책도 어렵지 않고 쉽게 잘 읽혀서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거나 블로그의 몸집을 키우고 싶은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 아, 근데 닉네임 짓기 부분을 읽다가, 닉네임이 너무 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내 적고 소중한 이웃님 중에는 벨라나 밸라나 baella나 bella나 vella가 없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벨라가 있는 것.... 나는 내 이름에서 따온 별명이라 너무 당연했는데 갑자기 당연해지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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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더운 우리 집
공선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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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에서 자랐어요.”라는 사실이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자랑거리가 되었다. 친구가 아파트에 살던 것을 부러워하던 내가? 정말로? 왜? 어째서 말야?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주택에 사는 것이 로망이 된 시대가 되면서부터겠지.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그치곤 했다. 자세한 내막을 말하게 되면 좋았던 게 더 이상 좋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커지기 때문에.

유년 시절, 엄마가 “저녁을 지어야 하니 친구들이랑 좀 더 놀다 와.”라고 말을 하면 나는 부리나케 골목길을 와다다다 내달리며 모기차를 따라나섰다.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겠지만) 동네 엄마들은 아이들의 활동에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서 500m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놀아도. (가장 기억에 깊이 박혀있는 것은 (아마도 겁이 많아서 혹은 운동신경이 없어서) 나 혼자만 담을 넘지 못해 빙 둘러 가야 했던 그 길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었나 보다 하고 지금과는 너무 다른 그때를 회상해 본다.

집,하면 떠오르는 것이 참 많은데 그중 한여름에 너무나도 더웠던 집안의 꽉 막힌 공기. 아, 지금 다시 생각해도 숨이 턱 막혀버릴 정도로 습하고 눅눅하고 어쩐지 떽떽거리는 것 같던 더운 공기 말이다. 자다가도 몇 번이나 찬물을 온몸에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 짓을 스물다섯 살까지 했다. 내가 번 돈으로 집에 에어컨을 놓기 전까지. 아니, 그마저도 에어컨 평형수를 잘못 구매해서(에어컨을 처분할 때까지 그 이유를 몰랐다) 에어컨 구매한답시고 돈은 돈대로 쓰고, 집은 시원하지도 않고, 주택이라 누진세는 열심히 붙고, 에어컨이 있는데도 집이 시원하지 않다며 에어컨이 고장 난 거 아니냐는 부모님의 볼멘소리에 그럴 거면 아빠 엄마가 사지 왜 안 샀냐고 버럭 하던 나. 그 여름. 나는 그전까지 여름에는 다들 이러고 사나보다, 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J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그때가 생각이 나서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그 시절 여름이 싫은 이유와 지금 여름이 싫은 이유는 너무나도 다르다. 지금은 물먹은 솜사탕 같은 습도가 싫다면, 그때는 여름 그 자체가 싫었다. 정말이지, 덥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좋아할 수 없는 계절이었다.

게다가 겨울에는 또 얼마나 춥냐면, 웃풍이 엄청났다. 아파트의 웃풍과 오래된 주택의 웃풍이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몸이 덜덜덜 떨리는데 오죽하면 이놈의 집이 잘못 지어진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보일러를 틀어도 확 따듯해지지도 않았고, 따듯하지 않은 채로 가스비는 20만 원을 훌쩍 넘어 30만 원, 40만 원도 우스웠다. 매해 겨울은 추웠기에, 보일러실의 보일러가 얼어서 부모님은 드라이기와 뜨거운 물들을 받아다가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물을 뜨겁게 데우면서 저놈의 보일러는 얼어도 문제고 터져도 문제네 생각했었다. 그걸 못 봐주겠다 생각했는지 엄마는 어느 날 집에 난로를 들였는데, 그게 연탄난로였다. 그 안에 고구마도 넣어 구워 먹기도 하고, 그 위에는 떡을 구워 먹기도 하고, 주전자를 올려놓고 끓이며 집안에 수증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게 따듯했냐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훈훈했지만, 전기매트는 필수적으로 틀어놔야 하는 정도. 아마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은 여전히 그 연탄난로를 쓰고 계셨겠지.

책 제목을 보자마자 그때의 집이 생각이 났다.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웠던 우리 집. 하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기 때문에 (게다가 적어도 이웃 주민들은 우리와 똑같이 살고 있었으니까) 그것 자체를 불우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공선옥 작가의 글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내 유년 시절에 대해 민망하게도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불우했다고 표현하는 작가의 유년 시절에 대해 어쭙잖게 연민을 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쓰인 문장들과 내 생각이나 감정이 일치할 때마다 나는 안타깝게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라는걸.

11. 뭔가 포근하고 좋은 것들이 아니라 불안을 유발하는 조건들에 둘러싸여 살았고 자연히 내 의식을 형성하는 것은 초조, 긴장, 두려움들. 나는 나의 장소, 나의 공간, 나의 시간, 나의 생활을 한편으로 연민하면서 또 한편으로 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살았다.

나도 딱 그랬다.

특히 집 밑에 있는 슈퍼에서 동네 아저씨들의 싸움이 일어날 때면 그 소리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어둠을 타고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거의 대부분 딴짓을 하고 있는 내 방 창문에 똑똑 노크를 해왔다. 혹여라도 나의 아빠도 그곳에 끼어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사춘기였던 나는 그 생각도 잠시, 그러거나 말거나 귀를 틀어막고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새벽이 되면 신탄진역과 대전역을 오가는 기차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 소리가 내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동네를 떠나고 싶었는데, 지긋지긋하게 참 오래 살았다. 가끔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으려나 하고.

79. 나에게 내 집이란 어떤 집인가. 내게 내 집이란 어떤 집이어야 하는가. 내게 집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떠나도 언제고 돌아올 수 있는 집,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내 물건들이 편히 자리 잡고 있는 공간, 그곳이 내 집이라고 난 생각했다. 가지고 있다가 값 오르면 팔고 나올 ‘부동산’이 아닌, 비 오는 날의 우산으로서의 집. 눈 오는 날의 베이스캠프.

작가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한다.

집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집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집과 나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내가 노년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고향을 꼽았다. 그 생각은 몇 년째 굳건했고 그렇기에 변하지 않았는데, 최근에 불현듯 그때의 그곳이 지금의 그곳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장소도, 많이 바뀌고 있고 바뀔 테니까. 내가 모르는 곳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것 하나를 고집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문인 화가 송현숙도 고향 무월리는 언제든지 돌아갈 곳, 돌아가야 할 곳,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을 테지만 직접 목격한 무월리는 그곳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결국은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겠지. 그래서 조금 유연하게 흘러가는대로 두려 한다. 아직 노년이 멀기도 했거니와 세상에는 살아보고 싶은 곳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어쩌면 안일한 생각을 기반으로.

몇 년 전에 읽은 김미월 작가의 <여덟 번째 방>과 최근에 읽은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가 차례로 떠올랐다.

지금은 모든 이들이 집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다. 기승전 집이 되는 세상. 결국 집은 무엇인가ㅡ 다시 원질문으로 돌아왔다.

오탈자 ; 79. 가지고 있다가 값 오르면 팔고 나올 ‘부동산’이 아닌, 비 오는 날의 우산으로서의 집 ▶ 우산으로써



_책 속의 문장

8. 고향을 생각하고, 집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 깊숙한 곳에 또아리 틀고 있는 스산함. 황량함의 감정을 나는 쉽게 말해오진 못했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93. 산다는 것은 복불복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그러니,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과연 천운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99. 인생에도 확실히 막간은 필요하다.

잠시 쉬는 시간, 독일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파우제라고 했다. 파우제, 잠시 쉬었다 가자는 것이다.

221. 돈을 벌기 위해 집 밖으로 떠돌았던 아버지는 집에 오면 늘 ‘이방인’ 같을 수밖에 없었다.

- 뚜덕뚜덕 지은 집

- 싸목싸목 : 천천히의 방언(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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