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든과 앙가부, 치쿠와 펭귄을 기억하기 위해서 귀차니즘에게 휴전을 선언하고 쓴다.


노든이 극진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고 그들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너의 말년은 어떠니,하고 노든에게 물어보지 않았잖아.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노든에게 선택의 날이 다가왔다. 갈팡질팡하다가 코끼리 고아원에 남겠다는 결정을 한 노든에게 할머니 코끼리는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라고 말하고 그 말에 힘을 얻은 노든은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로 한다. 할머니 코끼리의 말과 다른 코끼리의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다는 말이 노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응원과 지지를 받았던, 그리고 보냈던 순간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 그의 두 번째 사회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4. 노든은 아내와 딸에 대해서는 항상 말을 아꼈다. 아내와 딸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이었고, 그 눈부신 반짝임에 대해 노든은 차마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노든도 가족을 이루었다. 그렇게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지만 인간들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면서 아내와 딸을 잃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노든은 동물원에 갇히게 되며 그곳에서 앙가부를 만난다. 하지만 삶이 송두리째 뽑혀버린 노든은 숨을 쉬는 매 순간 화가 나있고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있어 낮에 동물원에 찾아오는 인간들을 사납게 노려보느라 여념이 없다. 악몽을 꾸는 노든에게 앙가부가 먼저 다가가고 둘은 친구가 된다. 노든은 복수를 하기 위해, 앙가부는 초원을 달리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다시 계획을 세우고 남몰래 조금씩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든이 잠시 치료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뿔이 잘려 나간 채 숨이 멎은 코뿔소를 발견한다. 나의 친구 앙가부. 노든의 복수심은 이전보다 더 차올랐다. 앙가부의 죽음에서 나는 멈춰버렸다. 꼭 그래야만 했나, 싶어서. 어디까지일까, 이 상실의 고통은.


상실감과 복수심에 차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날들에, ‘전쟁’이 터졌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동물원을 빠져나오며 치쿠를 만났다. 치쿠는 입에 알이 담긴 양동이를 물고 있었다. 배려라고는 코끼리 눈곱만큼도 없이, 한참을 말 한마디 않고 걷다가, 느닷없이 자기 사정만 늘어놓고, 상대방의 생각은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바다를 찾아야 한다던 펭귄 치쿠. 치쿠는 노든을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라고 불렀고, 노든은 치쿠를 ‘코끼리 코딱지만 한 펭귄’이라고 불렀다. 치쿠는 노든과 자신을, ‘우리’라고 불렀고 노든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함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그 긴긴밤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그들이 찾는 ‘바다’는 어디에 있는 걸까.


67. 그저 다시 모래를 떨고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노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노든은 옛날 기억에 사로잡힐 때마다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노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노든의 상실감과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있던 문장들.

최근에 <아침의 피아노>를 필사하면서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라는 문장과 마주했다. 일상을 지키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도 하니까. 그 일상을 소중하게 지키고 실천하고 지내는 것이 가끔은 힘에 부칠 때가 있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쉬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쉬게 될까 봐, 다시 끙챠ㅡ 힘을 내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나도, 노든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또 살아낸다고.


치쿠의 말대로, 노든은 알을 지켜냈다. 새로운 펭귄이 태어난 것이다. 펭귄은 노든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치쿠가 그렇게도 바라던 ‘바다’를 찾으러 나섰다. 노든은 펭귄에게 말하곤 했다. “이리 와, 안아줄게.” 그 어떤 말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말이다. 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앉았다. 잘 익은 망고 열매 색 하늘 밑에서 그들은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다. 그들이 왔다. (ㅡ)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 심정을,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 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나는 다 알 수 없고,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또,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다. 이보다 더 우스운 말은 없겠지만, 힘든 일들을 겪고 싶지 않다. 더 단단한 내가 되고 싶지도 않다. 아직까지는 이전보다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 마음들을 알기에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그 어떤 마음도 내가 아니었던 적 없고, 그 어떤 마음도 내가 갖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들을. 알게 모르게 내 마음들과 닮아있던 그 마음들을 말이다.

대상이 누가 되었든,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 있다. 그리곤 코와 부리를 맞대고 인사를 나누겠지, 매우 반갑게. ‘우리’의 재회를 응원한다.

주어진 생에 대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평온한 마음에 대해,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실체로 있을 것만 같은 하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예정 자매 12주기 추도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열일곱 살이었던 언니, 여섯 살이었던 나.

둘이 있던 집에 불이 났다. 언니는 나를 물에 적신 이불로 둘둘 감싸서 11층에서 던졌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나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살았다. 하지만 나를 받으면서 아저씨는 오른쪽 다리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일 년 넘게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했고 그렇게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14. 언니는 그래도 생일을 축하받고 떠났다. 그게 엄마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언니가 죽은 지 12년이 지났다. 언니의 생일과 기일은 사흘 간격이었기 때문에 생일만 챙긴다. 꾸준히 언니를 추모하러 오는 교회 사람들과 신아언니와 아저씨로 인해 한층 더 소란스러워진다. 스물아홉 살이 되었어야 하지만 여전히 열일곱 살로 남아있는 언니와 열여덟 살이 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지, 고마움을 가져야 할지 의문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오늘은 그 생각이 더더욱 진해진다.




103. 내일 만나면 수현에게 조카가 생겼다고 얘기해야지. 아기 사진을 보여 줘야지. 나도 모르게 내일 얘기할 것들의 리스트를 정하고 있었다. 이런 게 처음이라 쑥스러웠다. 그 애의 반응이 기대됐다. 생생한 표정, 기분 나쁘지 않게 핀잔을 주는 그 애의 말투가.


옥상에 올라갔다가 수현을 만났다. 신수현.

그 애는 98. “다 아는 내용이고 뻔한 내용이니까 보는 거야. 치킨이랑 짜장면도 아는 맛이니까 먹는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삶도 다 알고 뻔하니까 살아가는 걸까? 삶을 어떤 자세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며 살아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단지, 엄마의 하나 남은 딸이자, 119.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이다.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러면서도 106. 나는 조금도 내 삶을 양보하지 못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순발력이 있는 수현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렇다면 그 애는 어떻게든 답을 내려줄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 수현에게 아저씨를 변호했다. 그게 내 마음이 그렇게 생각해서는 정말 아니었는데 그와는 별개로 내 혀는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수현에게 이런 것들을 말할 수는 없다. 24. 터무니없어. 나는 터무니없다는 말을 혼자서 계속 되뇌다가 터무니없다는 말의 뜻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차라리 아저씨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더라면, 내게 상처가 있었더라면, 내가 살지 않았더라면, 언니가 날 던지지 않았더라면, 아파트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133. 언니가 불길 속에서 견뎠을 공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나는 나를 알 수 없다. 나를 살린 언니와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고,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한다.




191.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윤이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당분간 우리 보지 말자. 내가 자신감을 찾으면 언니 만나러 올게.”


197-198. “그때, 재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신아언니에게, 그리고 아저씨에게 고백했다. 그 고백이 닿을 거라는 생각도,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것을 계기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고 그저 내 안에 있던 말들을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198.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는 내가 아니라, 단지 나로 살고 싶어졌다. 223.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는, 225. 어딘가의 바깥에서 드디어 안으로 들어온 느낌을 받았다. 수현의 덕분이었다. 나는 수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지만, 수현이 무심한 듯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내게는 위안이 되었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218.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내가 될 것이었다.





- 오랜만에 성장소설을 읽었다. 이런 방식의 서평을 쓰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소설을 요약하다 보니, 내가 유원이 되었다. 유원을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정말 나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내 얘기를 하기가 싫어졌다. 타자는 이야기를 하면 그 힘듦과 고통, 상처가 조금은 나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명백하게 그들은 그들이었고, 나는 나였다. 가끔 나에 대해 말을 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 공간에 내가 갇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이렇게 먹어도 되나, 이렇게 웃어도 되나,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수많은 이렇게...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그래서, 굳이 나에 대해 말해도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입을 다문다. 그 프레임에서 당당해진 유원이 멋있다.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멋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에서 나를 본다는 것은, 내 마음을 투명하게 비춰본다는 것은, 나를 다독이는 것은, 그게 얼마간의 기간이라 하더라도 희망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또 하나의 용기가 마음에 생긴다는 것은, 순간순간, 시시때때로 매우 근사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덧_ 몇 해 전, 읽다가 시간이 다 되어 반납할 수밖에 없었던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아마 내용은 다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김숨 작가의 <너는 너로 살고 있니>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기도 했다. 읽어봐야지라고 말하기에는,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책이 너무 많으니 우선 생각만 해본다, 생각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만의 시간을 탐닉하다 - 때로는 노골적이고 때로는 기쁜
프란체스카 스펙터 지음, 김나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2. 혼자만의 시간은 열정이나 취미를 탐구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거리 두기를 실천함으로써 혼자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코로나19 이전부터 그 시간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던 중에 사소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고, 그래서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지기도 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스스로가 되는 능력’으로 혼자만의 시간은 다른 사람의 요구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책에서 소개하고 있기에 혼자라는 단어가 낯선 이들에게 이 책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혼자인 시간들을 못 견뎌 했던 내가,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더 평온하고 안정된다고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즐기게 해준 계기는 결혼 후 타지로 오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혼자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인 시간이 지속되면 심심할 때도 있다. 혼자인 시간을 즐긴다면서 심심하다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말로 그렇다. 완전하게 혼자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리에만 속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건 분명 양가감정이지만, 그런 감정이 드는 것에 대해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 시간들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시간을 들여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었다. (아 물론 회사 생활은 논외로 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면서 얼른 집에 가고 싶다거나 혼자 있고 싶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 시간은 그 시간대로 즐겁고, 나의 시간들은 나의 시간들대로 즐겁다.

 

 

 

71. 그렇게 우리는 타인을 우리의 삶, 저녁 식사, 직장으로 초대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큰 수확은 순간의 감정들이 소중하게 생각되어 실시간으로 업로드할 수 있는 인스타를 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 감정들은 꾹꾹 눌러 담아 블로그에 올렸다. 몇 년 동안 블로그에 올리던 매일매일의 기록을 멈추게 되었다. 그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지만, 쉽게 멈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이유가 있어 기록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조금 우스운 말일 수도 있지만 기록을 멈춤으로써 나는 좀 자유롭다는 단어를 쓸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과거를 찾아볼 때는 일기장이 아닌 블로그를 들여다볼 때가 훨씬 더 많고 기록을 멈춘 것이 좀 아쉬울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상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고 메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 혼자만 볼 수 있는 기록들은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다.)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 문장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딱히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내게 주어진, 내가 만들어낸 시간들에 한다. 그것들을 다 한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에 발전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할 때마다 즐겁기에 느리지만 꾸준하게,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하루를, 매일을, 일상을, 삶을 영위해가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굉장히 멋진 일이니까. 혼자 무언가를 하는 능력에 대해 책에서는 ‘혁신적인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혁신적일까 생각해 보다가 혁신적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매력 있고 섹시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헤헤, 웃음이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언니 - 언니들 앞에서라면 나는 마냥 철부지가 되어도 괜찮다 아무튼 시리즈 32
원도 지음 / 제철소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삭의 몸으로 노동에 시달리던 엄마는 임신 7개월 만에 조산했고, 병원 과실로 산소 공급 미확보로 뇌병변 1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아들을 낳았다. 또 다른 희망과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으면 어쩌나의 고민에서 전자를 택하여 딸을 낳았다. ‘오빠 때문에 너를 낳았다.’라는 필터 되지 않은 문장이 주는 폭력성은 ‘장애인 오빠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위해 설계된 목숨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겠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오빠의 수발을 들라고 하면 들었고, 대소변을 치우라고 하면 군말 없이 치울 수밖에 없었을 어린 여자아이를, 대형마트에서 오빠의 휠체어를 밀다가 학교 친구와 마주쳤고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장애인 동생이라는 소문을 견뎌야 했던 어린 여자아이를, 학교폭력을 당하는 것을 언니에게 털어놓았을 때 ‘니가 그러니까 왕따를 당하는 거’라던 언니의 말을 듣고 상처를 입었을 어린 여자아이를, 너무 어린 나이부터 나를 잃어버린 어린 여자아이를 상상했다. 읽으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장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대상은 가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못내 쓰렸다.

나도 언니가 갖고 싶었다. 친구에게 다 하지 못하는 은밀한 말들을 속닥거리기도 하고 일상을 나누기도 하는 그런 언니. 주변에 보면 언니랑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이럴 때 남동생은 정말 필요 없어... 나도 언니가 갖고 싶다는 말에 j는 자기가 언니 해주겠단다.

<아무튼, 언니>에서 자신의 혈육인 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언니들을 구원자라고 믿는 저자를 보면서 언니라는 대상이 타인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114. 가족끼리는 좀 더 타인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말에 조심스럽지만 완강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으로 힘들어하던 언니가 동생의 책을 내준 독립서점에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택배를 보냈다는 부분을 읽으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혈육만이 줄 수 있는 온기가 따로 있는 모양이라고, 언니 없는 나는 또 언니가 갖고 싶어진다.

44. 운전이 단순히 먼 거리를 빨리 갈 수 있게 해주는 것만은 아니다. 기동성이 확보되는 순간, 세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다. 특히 대중교통의 종류나 노선이 서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지방에서는 자동차가 확장해주는 생의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버스로 한 시간이 걸리는 곳을 내 차로 15분 만에 주파하는 쾌감이라니… 그건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j라는) 기사를 두고 운전하지 않는 삶을 꿈꿨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운전을 함으로써 내 세계가 확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와서 많이 힘들었고, 이곳은 있는 동안 적응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느껴서 그 사실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살만하네?라고 생각했다.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8km 떨어진 도서관을 운전해서 가는 것뿐이었는데 내가 아무 때나 아무렇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 있네.라는 생각과 함께 편안해지던, 그때를 잊을 수 없다. 거길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했다면, 그 마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대중교통을 두어 번 갈아타야 하고, 도서관까지 직진으로 1km를 걸어서 가야 하니까 오히려 귀찮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곳을 차로 15분 만에 갈 수 있다는 것! 이거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운전은 제대로 배우고 거리에 나오자. 깜빡이는 버릇처럼 켜주고, 무슨 일 있거나 후진할 거면 비상 깜빡이도 좀 켜고, 밤에는 라이트도 좀 켜고... 억지로 끼어들지 좀 말고...

84.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스크린 속을, 어떤 말이든 얹기 쉬운 휴대전화 액정 속을 벗어나 진짜 현실에서 마주하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딱 한 발자국만큼만 앞으로 가는 사람이다.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앞만 보고 가는 장군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가끔 현실에 타협하고 자주 자괴감이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옳은 방향을 향해 엔진 없는 오리 배의 페달을 낑낑거리며 밟는 사람이다. 악을 쓰고 욕을 하면서도 결국엔 가슴이 시키는 정의를 따르는 사람이다.

나도 열심히 오리배 굴리고 있다. 영차영차.

14. 어디에든 언니들이 있었다.

그 언젠가 j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몇십 년이 더 지나면, 세상은 좀 더 그로테스크해질 것 같아. 더 냉담해질 것도 같고. 나는 중년 아줌마들의 오지랖이 너무나도 싫거든. 지금도 그런 아줌마들이 너무 싫어. 그런 거 하나도 듣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나에 대해 신경을 꺼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가 났다고 앉으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도 아줌마고, 가방이 무거워 보이니 들어주겠다는 것도 아줌마야. 길을 가다 위치를 물어봐도 마음을 다해 알려주려고 하는 것도 아줌마야. 진짜 웃기지 않아?

아줌마들한테도 언니가 있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언니라고 불릴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면 좀 의아해진다. 그렇다면 지금의 언니들이 그런 아줌마가 될 수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언니가 갖고 싶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인데도 언니, 그놈의 언니에 대해서는 자꾸만 미련이 생긴다.

나만 언니가 없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 농산물 MD의 우리 작물 이야기 : #사계절 #힐링 #리틀포레스트
전성배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의 책 냄새를 몸의 안에 깊숙이 채워 넣으며 책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작고 귀여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계절을 팔고 있다니, 무엇을 파는 걸까. 하며 책을 꺼내는데 책을 꺼내기 전부터 알겠다. 과일이구나. 책의 옆 귀퉁이와 표지에는 한라봉이 채도 높은 주황빛으로 칠해져있었다. 어쩐지 한라봉의 달큼함이 입속에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표지에는 농산물 MD의 우리 작물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과일을 팔며 글을 쓰는 사람, 퍽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책에는 계절에 나는 과일과 채소들을 하나씩 열거하며 그에 따른 유년시절과 경험들과 기타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봄 : 대저 토마토, 설향 딸기, 산채, 황매

여름 : 수박, 참외, 대석 자두, 토마토, 복숭아, 샤인머스캣, 패션프루트

가을 : 무화과, 홍로 사과, 보은 대추, 배, 석류, 단감, 참다래, 홍시

겨울 : 귤, 유자, 한라봉, 곶감

농업의 발전과 부지런한 농부 덕분에 우리는 제철 과일을 원하는 때에 손쉽게 구해서 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있는데, 재작년 겨울에 그렇게 먹고 싶던 복숭아와 캠벨포도가 그랬다. 요즘은 다 파니까 하며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기가 너무 어려웠었다. 파는 곳을 찾아서 기뻐서 들어가 보면 이미 품절이어서, 왜 나한테 포도를 안 팔지, 왜 복숭아를...하며 억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먹고 싶던 포도와 복숭아를 작년에는 죄책감 때문에 사먹지 못했는데, 올해는 기필코 사먹고야 말 거라며 나는 다짐을 한다. 올해는 좋아하는 거봉도 많이 먹어야지. 그런데 왜 거봉은 이름이 거봉일까? 꺼벙이도 아니고... (별 걸 다 시비)

결혼을 한 순간부터는 집에 과일을 두는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과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과일을 사두고 초반에 열심히 먹다가 며칠이 지나면 무르거나 곰팡이가 펴서 버리기 일쑤였다. 어떤 과일은 처음에 구매해서 너무 잘 먹어서 똑같은 과일을 두 번째 사면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버림을 당했다. 그러다보니 과일을 사는데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고, 고민하다가 어차피 다 못먹는데 하며 구매하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한번은 귤이 먹고 싶어서 지역에 있는 조금 큰 농산물 시장엘 갔더니, 한 박스가 아니면 팔지 않는다고 하여 당황한 채로 돌아 나온 적도 있다.

19. 나는 소망한다. 현재의 고난과 시련에 우리가 맞서는 것이 허사가 되지 않기를. 대저 토마토와 같은 결실을 보기를.

이번 달부터 토마토를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토마토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재작년에 토마토를 먹기 시작했을 땐 기껏해야 한 팩 또는 한 봉지 정도였는데 한 박스씩 구매를 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토마토를 구매하게 되면서 대저 토마토(짭짤이)라는 것도 처음 먹어보았고, 흑토마토도 처음 먹어보았다. 나는 딱히 어떤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j는 흑토마토가 신맛과 짠맛이 덜하다고 했다. 난 그냥 열심히 먹기만 했나보다. 나는 아마 j의 요청에 의해 앞으로도 토마토를 꾸준히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일년감’이라는 것에 조금 낙담을 했다. 일 년 내내 나오는 채소라니...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 “먹고 남은 꼭지를 저렇게 던져두어도 내년이면 토마토가 열리더라. 신기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한편으로는 정말 꼭지를 흙에 심어두면 토마토가 열릴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도 해볼까?

5월 초, 갈비뼈가 골절된 것을 알고는 그동안 먹고 싶던 참외가 트럭에서 파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사왔다. 참외가 10개도 안 되는데 만 원이었고, 그렇다면 개당 어림잡아 천 원 정도였다. 과일을 자주 사지 않으니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 감도 안 오지만, 참외가 비싼 채소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조금 놀랐던 기억이다. 참외가 이렇게 비쌌었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년 전에도 참외가 먹고 싶어 구매했다가 맛이 없어서 실망했는데, 이번에는 그 보상을 해주는 건지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런데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꼭 맞게도, 점점 냉장고에서 물러가고 있어서 한 알 남은 거 오늘 저녁에 먹어야겠다.

책을 읽으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지금 집에 있어 심심할 때마다 한 알씩 먹고 있는 토마토도, 추운 겨울에 먹는 게 이상하지 않게 된 맛있는 딸기도, 민소매 입고 먹어야 할 것 같은 시원한 수박도,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맛있는 참외도, 신맛을 본 뒤로 자주 찾지 않게 된 자두도, 올해는 꼭 딱딱이와 황도와 백도를 먹어볼 예정인 복숭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사과도, 결혼할 때 처음 맛보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눈이 동그래진 대추도, 뜬금없이 먹고 싶어지는 배도, 한 알만 먹어도 몇 년은 생각이 나질 않는 석류도, 매년 겨울이 되면 찾게 되는 귤도. 읽는 것만으로도 맛있는 책이었다. (책에는 있지만 나열하지 않은 것은 좋아하지 않거나 먹어보지 않았거나. 감, 홍시, 곶감은 너무나도 성실하게 빠뜨린 걸 보니 나는 감은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나보다. 매우 성실해...)

책에 의하면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기온 상승이 가파른 나라 중 하나라고 말한다. 지구 지표면의 온도가 평균 1˚미만으로 상승한 반면, 한국은 1.8˚가량이 상승해서 열대 과일이 강세를 보이는 사이에 한국의 작물은 점점 밀려나고 있다. 한국의 재배 한계선이 기온 상승과 함께 남에서 북으로 빠르게 올라가면서 제주의 전유물이었던 감귤은 전남과 경남으로, 멜론은 곡성에서 강원도로, 무화과는 전남에서 충북으로, 사과는 대구에서 강원도로 북상했다. 이대로 간다면 작물의 재배지 북상이 아니라 소멸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염려가 책에 들어있다. 다시 한번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 도서관에서 빌려온 환경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

오탈자 56p. 교실 한쪽에서는 삽겹살을 구웠고 ▶ 삼겹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