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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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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899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그 모티브에서 얻은 것이다. 라고 작가 소개란의 끝에 쓰여있다. 우리는 처음 책을 집어들면 표지부터 보게 된다. 표지를 보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혹은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표지때문에 더욱 끌렸던 책이었지싶다. 책의 표지에 있는 저들 각각의 모습은 유령처럼 다들 흐릿흐릿한 모습뿐인지라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등을 좀 더 자세히 보려면 책을 눈앞으로 끌어당겨 보아야 하지만, 가운데에 유독 못생긴 여자 난쟁이에게만큼은 관대하게 스포트라이트까지 비추고 있는 것을 우리는 깊이 관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 왜 박민규는 어째서 소재가 될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보잘 것 없어보이는 캐릭터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궁금해하며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한 장 , 한 장 읽어내려갔다.

 

 

 

이 책은 중간중간 말꼬리를 잘라먹기에 충분한 term을 가지고 있기에 읽으며 도무지 집중을 하려 애를 써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덜컹거리는 무궁화호 기차는 도무지 집중을 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던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기차에 몸을 맡기고 될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을 가지며 읽고 있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박민규 작가가 써놓은 그 글을 따라 호흡을 내뱉으며 문장들을 음미하며 읽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이 책은 사회적측면을 독자에게 빠르고 부담스럽게 안기기 보다는 누구나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연애소설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른바 '외모 지상주의'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저자는 여주인공에게 이름조차 쥐어주지 않았음에 (물론 내가 찾지 못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난 그 여주인공을 '못생긴 여자'라 칭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 '못생긴 여자'가 배우를 할 정도의 페이스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둔 '잘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편지를 읽다보면 아래의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중략) 저같은 여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마취를 해도 고통을 이길 수 없는... 결국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는 여자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마음 속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도려낸 여자입니다. 이젠 어쩔 수가 없구나... 마음의 단두대에 올라 스스로를 절단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피... 흥건히 세상을 적시던 마음의 출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발밑을 뒹구는 저 얼굴을 이제 누가 찌르고 찬다 해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봉합을 끝내고 몸통만 남은 마음으로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택한 진통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여자를... 도대체 누가 사랑해 줄 수 있겠어요. (중략) (p274)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의 뇌는 엄청난 진동으로 인한 여파로 현기증을 남겼고, 그 후 몇분간은 몽롱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못났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기에 바쁘지는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나가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저 사람보단 내가, 저 사람보다도 내가' (...) 라며 자신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서 구제시켜주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우리는 그들을 또 나를 비난할 수 없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외모 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게 인간이야.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미모를 준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때는 또 방바닥에 거울을 깔아놓고 내 항문의 주름은 왜 정확한 쌍방 대칭 데칼코마니가 아닐까, 머릴 쥐어뜯는게 인간이라구. 신이여, 당신은 왜 나에게 좌우비대칭 소음순을 주신 건가요... 당신은 왜 나에게 짝부랄을 달아준 건가요 따지고 드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多數結)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p174)

 

 

 

나는 아주 미안하게도 박민규 작가의 의도와 벗어나서 - 벗어났는지 아닌지 요한의 말을 보면 아리송할 때가 많다 - 사회 속의 외모 지상주의를 탓하고 싶진 않다. 저자가 만들어놓은 '못생긴 여자' 그 여자의 못난 생각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문제점부터 찾아야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문제점으로만 치부해버리기에는 현실은 가혹하게도 외모 지상주의가 남발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란 참 많은 힘듦을 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머리스타일부터 발사이즈까지 맞추려면 인형이 아니고는 탄생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물어보고 싶다. 그들이 정해놓은 - 아무리 동화같다 해도 자칫하면 깨질지도 모르는 그런 - 스노우볼에서만 살 작정인가?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 안에서 매력적인 면을 찾아 그것을 발휘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못생긴 여자'는 말한다. 자신은 그러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하지만 나는 '하면 얼마나 했을까?' 라는 의문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겨우 몇 장의 편지에서조차 말투에서부터 자신감 부족이 뚝뚝 묻어져나오는 글을 읽으며 여주인공이 앞에 있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고 좁히고 끝까지 좁혀서 혀를 끌끌 차는 둥 한심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저런 여자가 있다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얼굴이 못생겨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이 매말라서. '못생긴 여자'는 다행스럽게도 편지의 끝에서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p289) 아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타인을 감싸줄 수 있는거야. 라고 귓가에 나긋나긋하게 말해주고 싶어졌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땐 새벽에 잠도 못자고 축구를 봤는데 골 결정력이 아쉬워서 동점으로 비겼을 때와 같은 비스무리한 탄식이 터져나왔다. 왠지 자꾸만 뭔가가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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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여섯 남녀가 북유럽에 갔다 -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섯 남녀의 북유럽 캠핑카 여행기
배재문 글 사진 / 라이카미(부즈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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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라는 사람은 워낙 낯가림이 심한터라 낯선 사람을 대할 땐 그 사람이 난색을 표할 정도로 경계를 할 때도 있기에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는 '낯선 사람과의 여행'이라는 소재가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과연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기에 지인들과 여행할 때보다 무조건 자주 갈등을 빚게 될까? 여기서 '무조건'이라는 수식어만 제외한다면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갈등이 적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일행들과의 어색함을 가장한 불편함이 뜻밖에도 안전장치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편함은 곧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고, 그 때문에 서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게 만들기도 한다. (p9) 그는 그럴 듯한 이유로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아, 이거 좀 괜찮겠는데?'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책 소개를 살펴보던 중  유독 내 시선이 머무르던 건 낯선 여섯 남녀가 함께 떠난 북유럽 캠핑카 여행기! 캠핑카를 타고 여행하는건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박은경 작가의 미안해 쿠온, 엄마 아빠는 히피야! 에서 만나고 왔던 터라 설레임이 몽글몽글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인원 _ 4명~6명(남녀 비율 5:5) · 여행기간 _ 30일~45일 · 출발일 _ 빠르면 7월 20일 이후 · 여행지 _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라는 글로서 인터넷에 공지를 했고,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해주실 분,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신 분, 운전· 특히 수동 변속기 차량 운전 가능하신 분, 모험심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차 주체가 안 되시는 분, 그 어떤 것보다도 다른  일행들을 이해하고 배려해주실 수 있는 분 이라는 기본 명제 하에 사람들을 선정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선착순으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인원이기에 문제는 터지기 마련인가보다. 일정이 맞지 않아 갈 수 없는 사람이 생기고, 다시 두 명의 사람들을 다시 모집하게 되고 가까스로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들.

 

 

 

 

'덴마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안데르센,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안데르센 박물관'엘 그들이 갔다. 하지만 개폐하기 10분 전에 가서 그만큼 볼거리가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진이 마음에 쏙 들 만큼 많지도 않아서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다. N양의 노트에 주소, 휴무, 입장료까지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어서 나중에 갈 기회가 있다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다. 매우 부끄럽게도 1유로, 1크로네, 1크로나가 얼마인지 몰랐던 나는 책을 읽던 때의 시세를 인터넷에서 찾아 수첩에 적어놓고, 계산을 하며 읽어내려가던 도중,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려면 외레순 대교를 건너야해서 건넜는데 덴마크에선 고속도로 통행료를 일체 지불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790크로네 (13만원)라는 것을 보며 살인적인 물가를 경험했다. 겨우겨우[?] 넘어간 '스웨덴'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18세기 스웨덴의 낭만 시골이라 불리는 '프레드릭스달'이다. 이 곳에서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어보는데 그저 사진을 볼 뿐임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곳에 몸도 마음도 지친 현대인들의 휴양지로 딱 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들을 감상했다. 그리고 세번째 여행지였던 '핀란드'에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곳을 발견했다. 이름하야 '산타클로스 마을'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어야 할 그 공간이 상업성을 띄게 된 것이 조금 아쉽다는 그의 평은 나조차도 조금은 불만이었다. 산타클로스 오피스에서 산타클로스와 사진을 찍는 건 무료지만 그 사진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25유로 (38,659원)라는 돈을 내야하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카메라도 가지고 갈 수 없기에 사진을 간직하고 싶으면 그에 마땅한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이들 앞에서 돈을 꺼내 드는 모습만은 보이지 말았으면 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를 표한다. 마지막 여행지인 '노르웨이'는 저자가 여행한 곳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 중 단연 돋보였던 건 '덴 감레 비'라는 곳이었는데, 하나같이 분위기있는 사진들은 내 눈길을 머무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으로서 첫번째는 아무래도 매끄럽지 못한 여행 경로가 아니었나 싶다. 조금 더 있을 것만 같은데 벌써 핀란드고 벌써 노르웨이라니, 길지 않은 시간에 여행을 다녀온 건 알고 있지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그 나라의 문화를 알기보다는 그들의 에피소드에 너무 치중되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제목 역시 그들 위주로 돌아가는 듯 했고, 그들의 여행보다는 한 사람을 지목하여 소개하는 등의 친목모임을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도 자꾸자꾸만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가고 싶은 여행지가 생겼다는 생각에 괜찮은 여행서적 한 권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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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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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내리는 비에 하던 공사마저 멈춘 오늘, 서평을 쓸까하고 폼잡고 앉아서 공책을 펴놓고 끄적끄적. 연필이 사각사각거리는 소리는 오전 내내 공사일정때문에 곤두서있던 머리카락과 엉키고 설켰던 마음들이 이내 사르르 가라앉으며 녹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래,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말고 서평을 쓰자 다짐했다. 사각사각사각... . 자꾸만 그 소리가 좋아서 싱글생글 웃으며 MR을 틀어놓고 서평을 써내려갔다. 그 때 들리는 곡은 'July - 바람에 쓰는 편지' 그리고 몇 분이 흘렀을까. 노래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사각사각대는 소리마저 내 귀를 떠나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서평을 쓰려는데 이유모를 눈물이 흘렀다. 뭐지, 왜 이러지. 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멍하니 꺼진 모니터에 비치는 나를 보며 되물었다. 너, 왜, 그래? 그 때 마침 들려온 곡은 '이루마 - If I could see you again' 만일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곡은 애린이를 내 앞에 데려다놓았고, 어느 새 마음이 벅차올랐다. 나는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을 읽으며 희재언니의 모습에서 애린이를 보았기 때문에 <외딴방>이라는 어두침침한 그 곳에 애정을 둘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 책의 느낌은 딱, 이애린 그 자체였고, 그 속에서 허우덕대며 방황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로 시작된 이 책은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로 마무리하며 이 글의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의아함을 만들어낸다. 나는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으며 이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 작품을 씀으로 인해 그녀의 외딴방에서 나올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으며, 나 역시도 그런 그녀를 의지하여 내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나의 외딴방에서 움츠린 어깨를 꼿꼿하게 펴고 당당하게 걸어나올 수 있기를 바랬다. 누구에게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킬레스건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내비추어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소위 외딴방이라고 불리는 곳에 감추기에 급급하고 그 문고리를 자물쇠로 꼭꼭 걸어잠궈 아무에게도 열어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보호막을 형성하게 된다. 나 역시도 그런 아킬레스건이 하나쯤은 있고,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에 더더욱 힘든 싸움이기도 하다. 화자는 감정이 없는 듯 매우 무신경하게 말하는 듯 하면서도 아픔과 슬픔, 고통은 혼자 다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괜시리 짜증이 났다. 힘들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나이임에도 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화자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을 것 같아서? 아니, 외면하고 살았던거지. 우리 역시 직면한 고통에 외면하듯이 말이야.

 

 

신경숙 작가일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는 이제 막 서른 셋이 된 화자는 좀처럼 화해되지 않는 열여섯 ― 열아홉의 사 년을 한 권의 책에 모조리 쏟아붓고 있다. 혹여 나에게 화해되지 않는 시간이 있을까 - 생각해보았다. 일 년, 일 년, 기억을 더듬으며 가만가만 생각하려고 했던 의지와는 달리 그 때의 영상들이 머릿 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의 2007년 스무 살의 봄. 그 여느 때보다 찬란했던 봄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눈부셔서 손을 이마의 끝에 동등하게 두고 손등이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딱 그 때였지 싶다. 눈 부시게 내리쬐던 햇살을 앗아간 사건들은. 언제나 행복함만이 가득할거라 믿었고 , 또 그랬어야 했다. 지금도 그 때처럼 비가 온다. 주룩주룩. 희재언니는 화자에게 햇볕같이 표정이 없는 무심한 얼굴. (p146) 이라는 첫인상을 안겨주었다고 했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아이는 아마 그들로 각인되었을 것 같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첫인상이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이 짜여진 그 학교의 교복을 입고 튀지 않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32명의 아이들은 다 똑같아보였기에 어떠한 첫인상을 집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글을 서평에 쓰고 있자니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고 그보다 먼저 와있었던 자책감들이 아우성을 치며 나를 외딴방으로 다시 밀어넣기 때문에 멈춰야겠다. 그보다 이런 글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한 척 쓰자니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 속이 어지럽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쓸 수가 없다. 그로부터 흘러간 시간들의 몇배쯤 더 지나고 마음이 무뎌질 때쯤 - 그 날이 언제 오려나 모르겠지만 - 나도 화자처럼 호흡을 길게 내 뱉으며 한 자, 한 자 잊어서는 안되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그녀를 추억하며 ……상실의 깊은 멍으로부터, 그 깊디깊은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금빛 잉어 한 마리가 푸른 물방울을 털어대며, 삶의 표층으로 솟아오르는 환각. (p231)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그 날을 기약하고 싶다.

 

 

 

"죽은 사람이 쓴 글을 읽는다거나 그림을 본다거나 할 땐 별 감정이 없는데 노래를 들을 땐 좀 이상하지 않아요?" "육성이라서 그러겠죠. 너무나 생생해서요. 꼭 노래만 그런 건 아니에요. 언젠가 선배의 시 낭송하는 목소리를 그가 죽은 후에 들었는데 되게 이상하대요. 섬뜩했다고 하면 맞을 거예요. 목소리는 육체의 일부 같아요. 그 사람이 살아서 바로 앞에 서 있는 것 같더라구요." (p156) 가끔은 짧은 통화임에도 불구하고 녹음버튼을 누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날따라 그들의 목소리가 예쁘게 들린다던가, 꼭 기억해야하는 그런 것이 아닌데도 그냥 불현듯 그런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 것들은 가끔 가족, 연인, 친구 혹은 몇번 보지않은 그런 사람들까지도 그런 것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이 대화를 읽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아는 그 누군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그것이 내 핸드폰 음성메모에 저장되어있다면… 섬뜩할까? 그래, 그건 생생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때? 이 세상에 없는데 그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섬뜩함을 일으킬 것 같아? 적어도 나에겐 아니야, 그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더라. 그곳을 떠나와서도 언니와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그 방과 비슷한 방을 보게 되면 내 가슴은 뛰고 숨이 막히곤 했지. 갑자기 멍해지거나 안절부절못했지. 주위가 산만해지고 잠이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어. 때때로 갑자기 어린애가 돼버린 것같이 판단력이 흐려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그 사람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기도 했어…… 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졌고…… 다리를 지날 때는 그 난간 밑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지…… 커튼자락이나 빨랫줄 따위들이 내게 달려드는 것 같기도 했어. 알아? 언니는 나의 장애였어. 그와 행복했다가도 그를 밀어내게 하는 관계맺기의 장애였어…… 지나친 각성상태가 주는 피로는 언니가 더 잘 알겠지…… 그곳엘 다시는 가지 않았지. 그 근처에도. (p327) 이것만큼 그 때 절박했던 내 상황을 표현해주는 문장이 있을까. 화자는 왜 하필 자신이냐고 물어보았고, 나 역시도 왜 나냐고 원망스런 눈길로 하늘을 쳐다본다. 그 모든 짊을 나에게 맡기고 그렇게 갔냐고, 왜 하필 나에게 오다가였냐며, 미치도록 뼈에 사무치게 원망했었지. 화자와 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그들은 이제 없다. 그것을 잊고 살든, 합리화시키고 살든, 죽을 때까지 원망하고 살든 그건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나는 아직 어떤 답도 내리지 못했다. 가끔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모두들 잠든 새벽에 또 한번 울음을 토해낼 뿐, 더 이상의 노력도 시도도 할 수조차 없음을 나 자신이 잘 알기에 그것을 끌어안고 사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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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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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6.25의 60주년이라고 해서 그것에 관한 책이나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대중의 밑바닥에 깔려 자기들을 좀 봐달라며 요동을 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뼈 아픈 상처를 남긴 그 때의 그것을 잊지말고 기억하자는 좋은 취지로 만들었을게다. 하지만 통일이 되고 나서 '그래, 그땐 그랬었지'하는 마음에 그 악순환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전보다 똘똘 뭉칠 수 있을테지만 아직 통일도 되지않은 분단 상태에서의 그것들은 사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수십권씩 쏟아져나오고 있고 이번에 읽은 책 역시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조금 다른 것이라면 한국전쟁을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이 이 책의 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교자>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1964년에 이미 뉴욕에서 출간되었으나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과 故 김은국 작가의 타계 1주기를 기념을 동시에 문학동네가 세계문학전집 속에 <순교자>를 포함시켜 작품을 읽었을 때의 경이로움을 독자로 하여금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재평가할 좋은 기회라고 하여 한층 더 성숙해진 번역으로 재출간하기로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나는 두번이나 읽었다. 저번 주에 읽을 땐 분명 2,3일이 걸렸던 책이건만 두번째랍시고 3시간 반만에 다 읽은 것 같다. 한번 읽었을 때는 앞뒤 정황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생각도 못하고 '이 책에 왜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가'에 대해 고심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 책을 두번 읽고 난 지금은 '아, 그럴만도 하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더 정확한 이유는 서평쓰기 전에는 별 세개에서 그치고서 이 책에 대한 내용을 쓰긴 써야겠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맙소사. 내가 도대체 책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읽은거지? 혹시 책을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고 읽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 그저 눈으로 활자만 훑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며 이 책을 읽을 당시 최악의 컨디션으로 인해 불편한 마음을 끌어안고 읽음으로 이 책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했던 거였던 것 같다는 생각에 두번 째 이 책을 들었다. 책은 한번 더 곱씹을 때에야 비로소 그 맛을 알게 된다고,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번 읽을 때 아무 생각없이 읽었던 것들이 마음 표면에 가 닿아서 마음을 짜르르 울리기에 충분했다.

 

 

 

전쟁 직전에 공산군에 끌려간 14명의 목사들 가운데 12명은 총살당하고 단 두명만 살아서 귀환한다.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부에서는 이들의 긴급 체포와 집단 처형의 사건 경위를 조사하게 된다. 이 사건의 담당자는 정보장교인 이대위와 육본 정보국 평양 파견대장인 장대령과 그 처형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신목사의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간다. 이대위에게 주어진 임무는 처형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중 정신이 오롯한 신목사에게 '사건의 진상규명'을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목사는 어찌된 영문인지 입을 앙 다물고 그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신목사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을까?

 

 

 

"신의 개입이었소" (p34) 12명이 처형당하는 현장에서 어떻게 신목사와 한목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 묻자 분명 신목사는 신의 개입이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p37) 라는 이대위의 물음에 신목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읽을 땐 생각지 못했는데 서평을 쓰려고 찬찬히 흐름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그도 그때부터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은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p255) 신목사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의 조합은 이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신목사의 그런 대답은 나조차도 흔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위태롭게 끄나풀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고, 그의 형상이 그려졌다. 그를 보고 있노라니 윤리에서 흘러가듯 배웠었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떠올랐다. 아! 이 책은 실존주의를 다루고 있었다. 처음 손에 들고 몇 장 읽었을 땐 추리일 것만 같았던 이 책은 사실은 실존주의라는 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당황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역량으로 조금씩 물꼬를 터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목사는 이대위에게 마음 뭉클한 이야기를 전한다. 혹은 나와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름모를 이들에게 저자가 전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용기를 가지시오, 대위.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절망에 맞서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 (p256,257)

 

 


저자의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저자도 'The  Martyred'이라는 제목을 <순교자>로 지을 수 없음을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장 곳곳에 가미되어 있는 종교짙은 문장들이 나에게까지 미치기엔 부담스러워서 주춤했던 것이 사실이다. 종교가 없는 나는 사실 책 속의 신도들이 신목사에게 '유다! 유다!'라고 소리쳤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흐름을 쫓아가기에도 바쁜데 사전까지 뒤적뒤적거릴 필요성을 못느꼈기에 본연의 활자 그대로를 따라 눈이 움직였고 그 활자 속에서 의미를 파악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유다라는 단어가 가진 어원을 찾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찬송을 받을지어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라는 단어을 찾으면서 오만상이 찌푸려졌고 짜증이 밀려왔다. 곧바로 explore를 꺼버렸지만 구겨진 인상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일부분 , 1/3 , 1/2 혹은 이 작품의 전부라 할지라도 이 소설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 대립에 대한 첨예한 인식을 꺾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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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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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를 첫 작품으로 시작했다. 그 책은 당시 '13계단'을 읽고 사형제도에 관심이 부쩍 많아진 내가 선택했던 작품이었다. 그 책을 읽었을 당시 꽤 발랄한 상태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 들자마자 극도의 우울함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누군가 이 책 어때? 하고 물어온다면 나는 단호하게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 중 한 권인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쓴 작가가 '쓰리'를 쓴 작가와 동일한 작가라는 것을 이 책을 다 읽고 이 작가의 이력을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다. 맙소사, 낭패다. 작가의 전작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안난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실패작을 쓴 작가로 남아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의 작품을 품에 안고 읽게 된 계기는 지인의 선물 덕택이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 제목을 보고 쓰리가 무슨 뜻이냐며, 책을 읽고 알아주겠다며, 단단히 벼르며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쓰리는 우리에게 흔히 3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로 다가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세가지의 mission을 바탕에 두고 있어서 쓰리라는 제목을 지은건가, 그게 아니라면 니시무라, 기자키, 이시카와 이 셋을 두고 쓰리라고 하는건가 하는 의구심에 빠졌고, 좀처럼 해답이 나오지 않아 이 책에 대한 검색을 하는 도중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쓰리는 일본어로 <すり>라고 쓰는데, 이것은 '소매치기'라는 뜻이 있다는 말에 나의 생각에 혀를 내두르며 실소를 지었다.

 

 

 

니시무라. 그는 소매치기꾼(남의 몸이나 가방을 슬쩍 뒤져 금품을 훔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최소한 밑바닥의 인생을 살지않는다는 증거는, 부유한 사람들의 지갑만을 탈취한다는 것이다. 지하철(부유한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는지 의심스럽지만) , 공연장 , 공원 등 부유한 계층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처음에 이시카와가 속해있는 조직에서 만난 기자키.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인해 다시 마주치게 되고, 기자키는 누가 들어도 실패할만한 제안을 하게된다. 그것을 거절하면 전에 만났던 꼬마와 그의 엄마가 죽고, 실패하면 그가 죽는다. 그는 그 일을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때문에 애꿎은 사람이 죽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 그 일을 맡게 된다. 그 일을 맡게 된 이상 그의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했다. 하지만 매우 불가능한 일. 실현시킬.. 수 있을까?

 

 

 

난 작가의 무엇에도 감탄할 수 없다. 스릴감? 등장인물의 묘사? 그리고 책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재미? 모든게 결여된 쓰리. 한 서평을 보는데, 스릴감이 넘친다, 라는 작가가 듣고 싶어하는 최고의 칭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문한다. 도대체 어디가? …… 기자키는 시한을 정해놓고 그의 숨통을 죄여오는데, 그는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일이라며 체념한다. 그러나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계획이 아닌 우연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그는 한가로이 먹고 싶은 위스키를 먹으며 그 미션들을 수행시켰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곳에서 스릴감을 느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또한 등장인물의 위치기 애매모호했다. 나는 그 (이름이 나왔는지도 모르는) 꼬마아이와 그 엄마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등장시켰는지 의아해졌다. 책이 클라이맥스를 달려가고, 마지막 남은 한장을 넘길 때까지도 모자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한 단어도 없다. 그 아이를 아동보호시설로 보냈는지 어쨌는지 결말을 지은 상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나는 기자키가 하는 말들이 조금 속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미친놈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을 지껄이고 있구나. 라는 생각뿐, 그의 말 중 단 한 문장조차 동조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대체 그의 문장 중간중간 활자 위에 점은 왜 붙어있는 것인지, 이해불가의 것이었다. 나보고 그 문장을 곱씹으라고? 그럴 가치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됐던 결말은 어느 독자에게는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열린 문장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답답함에 가슴이 턱 막혔고, 한계에 다다르며 너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책을 써낸거냐며 작가후기를 읽고 한동안 그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이 책 또한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와 같이 덮을 수 없어서 읽었던 책 중 한 권이었다. 요즘 내 상태를 생각한다면 매우 부정적인 마인드로 써낸 서평인데, 감정적으로 써낸 서평에 조금 멋쩍어진다. 이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손꼽은 작가에겐 참 미안하지만 애석하게도 책을 읽은 독자 중에 내가 끼어있어서 이런 평밖에 내지못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또한, 책이란 것은 읽었을 때 뭔가 남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사실 그런 책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책을 읽은 후에 내가 이 책을 왜 시간까지 할애해서 읽어야하나, 라는 생각은 접어둘 수 있는 그런 책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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