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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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쯤 서러운 일이 다시 생겼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문자로 상황을 설명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면 연락하지 말라는 내 말에, 기어이 다시 한번 나에게 그 말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 서러움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순도 높은 서러움이 나를 에워싸며 그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닌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고 왜 창피해야 하고 왜 쪽팔려야 하는 거지... 생각을 하다가 그 생각을 차단하기로 했지만 기어이 그 말들은 내 귀에 끈덕지게 들러붙어 나를 괴롭혔고 나를 그렇게도 많이 울렸다. 그 말은 나의 모든 상황이 안정화로 접어든다 하더라도 따라붙을 말이었다. 이제껏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했던, 하지만 자발적으로 수고했다거나 고맙다고 말 한마디 듣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그 대상이었다. 이전에도 서운한 일이 생길 때마다 표현에 서툴러서 그런 거겠지, 원래 그랬으니까, 공감에 부족한 사람이니까 하고 그를 미워하지 않기 위한 이유들을 지어냈다. 하지만 그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응당 부모라면 자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이 깨어졌다. 농담처럼 나는 부모의 부모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적이 있는데, 그게 진실로 수렴되어버릴 것 같게 되자 나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서러움이 길게 갈 것 같다.

마침 j한테 전화가 왔고, 나는 엉엉 울었다. 혼자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j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 상황을 설명하면서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서러움이 나를 옥죄어온다. 그날 j는 퇴근이 좀 늦을 예정이었고, 나는 집에 혼자 있기가 싫어 카페를 가기로 했으나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감금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나 혼자만 외로운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다. 그래서 난 가장 안온한 나의 공간에서 집에 있는 필라델피아 치즈케이크를 꺼냈고, 아메리카노를 휘휘 저었고, 풍성한 로즈마리 대신 듬성듬성한 올리브를 올려놓고 보면서 내 슬픔들도 듬성듬성해져 거리가 멀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던 책이 있었지만 내가 이날 읽기로 한 것은 전전날에 도착한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라는 책이었다. 딱 시의적절하게 나를 찾아왔네. 싶어서 서글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책에 대한 내용을 어렴풋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읽고 싶었고, 그래서 읽기가 두려웠다. 책을 읽다가 내 알몸을 내보이게 되면 어쩌지, 하는 공포감도 나를 후려쳤다.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머리를 먼저 뉘어야 했다. 하지만 머리를 비울 방법을 나는 몰랐고, 그렇다면 차라리 더 깊이 들어가 버려 이 문장들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조금이라도 벗겨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가 아닌 모부라는 단어 선택만으로도 알았다. 아, 페미니즘. 언젠가부터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은 일부러 거부하고 있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인데, 그 부분을 깊이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멀리서 응원을 하는 선택지를 택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1부에 있었다.

8.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원래 특별한 거라고들 하지만 내 엄마는 아들을 ‘영혼의 동반자’ 같은 걸로 여겼다. 부계와 얼굴부터 체형까지 닮은 나와는 달리 엄마의 무언갈 날 때부터 좀 더 많이 지닌,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하늘이 점지해준 엄마의 사랑.

나 역시 어릴 때 엄마에게서 남동생과의 차별을 수시로 받았다. 의사가 아빠에게, 자칫하다 산모가 죽을 수 있으니 아이를 포기하라고 권유했지만 엄마는 끝까지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 내 남동생이었다. 남동생은 세 누나에게 둘러싸일 아이였는데, 바로 위 두 누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더라 하고 옆에서 주워듣기만 했고, 나는 그 사실들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남동생은 엄마의 보호와 보살핌과 넓은 아량과 배려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여러 차별들을 겪으며 남동생을 지독히 미워했다. 어느 날은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느 날은 자고 있는 동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기도 했다. 엄마의 차별이 심할수록 나는 남동생에게 더 야박해졌고,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너는 애가 참 못돼 처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분고분했던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의 머리통이 둥그렇게 변하면서는 반항이 시작되었다. 나는 입으로 싸웠고, 남동생은 나를 때렸고 그 자리는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당시 엄마가 내게 내뱉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니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 걔는 순한데 그냥 때릴 리가 있냐.” 그 말을 들으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던 나를, 공포스럽게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안다. 남동생이 미웠다기보다 차별하는 엄마가 미웠고, 엄마가 사랑하는 남동생을 어떻게든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났었다는 것을. 아무리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도 사람이기에 더 예쁘고 덜 예쁜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혹여라도 우리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단 한 명의 자식만 두겠다고 했다. 모든 사랑을 그 아이에게만 다 쏟아붓겠다고 다짐했었던 이유였다.

16. 가족이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를 겁주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불안에 떨지 않고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얘기를 딸들에게 하고 싶다. 원가족을 벗어나 김장철에 김치 얻을 데가 없고 명절에 전화할 데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골백번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라.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사랑을 인질로 잡은 어떤 관계도 나를 살리는 관계가 될 수는 없다. 그 밖에도 세상이 있다고, 훨씬 넓고 깊고 무섭고 가슴이 뛰는, 그리고 정말 생각보다는 친절한 진짜 세상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다.

원가족에서도 떨어져 보기도 했고 현재는 j와 결혼해서 잘 살고도 있지만, 나는 이제야 혼자 살 자신이 생겼다. 부모와 살 때나 j와 살 때 모두 집을 나가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혼자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해본 적도 없고, 혼자 살아보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지금의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안온함과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그런 마음이 생긴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혼자 산다는 것은 실행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야 혼자서도 나는 잘 살 수 있는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변화다. 아마 이 마음이 10년 전의 내게도 있었다면, 나는 원가족에서 벗어나 혼자 살았을 텐데.

책에서도 말한다. ‘그래도 가족이잖아’라는 해괴망측한 문장이 주는 뾰족함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싶어서 씁쓸한 웃음을 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자그마치 삼십 년이다. 내가 간절히 원했지만 가질 수 없을뿐더러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에 대한 동경은 이제까지 했으면 됐다.

85. 복수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원가족과의 거리를 멀찍이 두고 넓혀나가기로 했다. 내가 힘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더 이상 나는 나 외의 사람들을 변호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과 연락을 지속하면서 미움이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어쩌면 그게 내가 내 안에 있는 병을 키우지 않는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그들을 여전히 미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불행을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했으면 한다.

2부를 읽을 때는 공감을 하지는 못하고 물 흐르듯 책장을 빠르게 넘겨나갔다. 곳곳에서 남성에 대한 혐오를 발견했고 그것은 엄마가 남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끼는 차별성이, 훗날 작가가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화석화되며 일반화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억측을 하게 했다. 여성과 남성을 꼭 자로 재듯 그어놓고 서술한 부분들을 보면서 결국은 같은 인간인데 싶으면서도, 문득 가치관을 형성함에 있어 유년시절에 내가 처해있던 환경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언젠가부터 경험의 다소(多少)와 유무(有無)가 인생을 살면서 크게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험이 많아도 본인이 경험한 것을 우선순위로 두어 그 안에서 타인의 경험을 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은 타인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결핍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게 생각을 하는 것. 하지만 많이 어렵다. 우리가 석가모니,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聖人)도 아닌데.

_책 속의 문장

13. 내가 집을 나오기 직전 아빠에게 들은, 최후의 버튼을 누른 마지막 한마디는 “너 피해의식 있다”였다. 나는 이 단어가 여자들에게 어떤 감정적 족쇄를 채우고 어떤 상처를 무효로 만드는지 책도 한 권 쓸 수 있다. ‘너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는 건 피해를 지우는 말이다. 아주 흔하게 너 미쳤다는, 예민하다는, 별스럽다는, 까다롭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내면을 파헤치면 ‘아무것도 되묻지 말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뜻의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에 딸이 갈 곳이라고는 가족밖에 없는데 가족을 의심하다니 너에게는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15. 이제는 안다. 딸이 겪는 가족은 아들이 겪는 가족과는 다르다. 마치 같은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그 미묘한 차이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그렇게 얻은 기억들은 극복하기 힘든 결절이 된다. 마땅한 내 것을 달라고 말하면서도 송구해하는 비굴한 인간이 되거나 파워 게임에 귀신같이 능한 학대자가 되기 딱 좋은 토양이다.

28. 애초 가족계획을 세우기 전에, 투입하되 거둬들이지 못한 만큼 가엾고 허무해지는 그들 자신의 인생과 자식 사이에 어떻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아파트 사기 전에 대출 이자 계산해보는 정도만큼의 진지함으로도 염려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28.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있지도 않은 며느리나 사위에 손자까지를 끼워넣은 가족사진을 상상하고 그 안에서 재생산에 성공한 당당한 자신의 미소를 상상한다. 그렇게 마치 남들도 다 가졌다는 집이나 차처럼 가족을 갈망한다.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에 반드시 있을, 당연하다는 듯이 약속받은 그 가족을.

29.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와 겹칠 수밖에 없다. 혈육에 대한 애정을 다른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 터무니없는 기대에 다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65. 매일 매시간 매초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부터 너무도 잘못 안 나머지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전부 잘못이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로 깨어 있는 시간 모두를 보냈다. 아니 깨어 있지 않은 시간에도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생각했다.

69. 책은 조금 읽고 술은 많이 마시고 밤공기는 더 많이 마셨던, 핑계도 없이 만난 그 사람들이 나를 살렸다.

88.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저주와 앙심을 품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기방어에 가깝다.

91. 내가 지금 아는 것은 가족을 용서하고 가족에게 이해받고 딸로서 어떤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을 온전히 포기한 후에 내가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상상해온 고급하고 성스러운 용서와 사랑 같은 장면은 나에게 영영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혼자서 그들을 이해하려 분투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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