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어보기 부끄러워 묻지 못한 생활 속 소송상식 - 소송의 기초부터 실제 사건 대처법까지 누구나 알아야 하는 소송상식 A to Z
추헌재 지음 / 새로운제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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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이제는 웬만해서는 말할 수 없다. 혹자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도 있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법에 저촉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고 있다. 무단횡단을 하는 것도, 불법주정차도, 누군가에게 공개적으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도, 누군가의 동의 없이 함부로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려주는 행위 또한 모두 법에 위반되는 상태임을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법을 처음 알게 되었던 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1학년, 자리에서 일어나 대한민국헌법을 강제로 외워야만 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법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법에 대해 알아야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늘 다른 법을 살펴봐야 했지만 법을 찾아보는 순간들은 한 번도 빠짐없이 부정적인 상태에 놓여있을 때였다. 민사든 형사든 법적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일단 긴장을 하게 된다.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니까.

책에서는 우리가 경험해보기 전에 일상에서는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수 있는 법률용어들, 이를테면 신분이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피고소인, 용의자, 피의자, 피고인 등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또 소송의 종류에는 민사와 형사를 구분하고 조금 더 세밀하게 알려주고 있다.

초반에 내용증명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나는 이제껏 총 세 번의 내용증명을 보내봤다. 내용증명은 소송 전 최후통첩으로 보내는 것인데, 내용증명 자체로는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내 의사를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하고 이후에 확인받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카카오톡이나 이메일로 동일한 내용을 보내더라도 발신인이나 수신인, 내용, 발송일이 명확하기 때문에 같은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용증명을 우선시했다. 까닭은 심리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 책에서는 내용증명의 예시를 보기 쉽고 깔끔하게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뒤로 넘어갈수록 기본적인 소송지식과 절차에 대해 알려주고 지급명령, 합의, 조정 등처럼 딱딱한 이야기들은 쉽게 풀어써내어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서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그밖에 합의 시에 알면 좋을 팁이라든지, 상대가 돈을 안 받으려고 할 때 어떤 방법이 있는지, 현직 변호사가 알려주는 변호사 선임법 등 팁을 쏙쏙 알려주기 때문에 정말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법에 대해 알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책임을 전제로 하고 있고 나의 자유만이 자유가 아니기에 어느 한 국가의 국민인 이상에야 법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또한 현재 법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보니 전부를 알 수는 없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있을 법한 법은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물어보기 부끄러워 묻지 못한 생활 속 소송상식>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가 조금씩은 알고 있어야하는 그런 소송상식을 알려주고 있으니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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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 - 똑바로 볼수록 더 환해지는 삶에 대하여
박광우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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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저히 뭔가를 쓸 기운이 나질 않지만 지금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모르겠기에 우선 써보기로 한다. 언제까지 미뤄둘 수는 없을 테니까. 죽음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으나 실상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느껴본 이들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최근에 죽음이 주제였던 간호사 수기를 한 편 읽는 것 같았던 오은경 간호사의 <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를 읽고 이번엔 말기 암, 파킨슨병에서 명의라 불리는 박광우 교수의 <죽음 공부>를 읽었다.


사실 죽음을 바탕에 깔아둔 두 편의 책을 연달아 읽는 게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두 권의 책 모두 생각할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두 책 모두 추천한다. 다만 어떤 책을 먼저 읽더라도 텀을 두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둘의 공통점은 웰다잉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웰빙은 곧 웰다잉을 뜻한다. 잘 산다. 잘 죽는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책을 오늘에야 다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원래 몇 년 전 갑상선암을 진단받았을 때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착한 암이라고 말하던 사람들, 그거 별거 아니라는 사람들이 생각났고 그들의 말은 미웠지만 수술 후에는 한동안 그것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체력이 조금 더 떨어졌다 뿐이지, 수술 후에 이전과 다르지 않는 생활들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암의 크기가 0.5cm였고 왼쪽에만 있어서 반절제가 가능했으며 다행히 최소침습이 가능한 교수님이라서 흉터 역시 작았다. 임파선이나 폐로 전이된 케이스도 아니었기에 방사선치료나 항암치료도 필요하지 않았다. 흉터에 예민하지 않아서 수술 부위에 레이저 시술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살성이 좋아서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도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고 지금처럼 유지한다면 완치 판정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예로 회사에서 안전 교육을 할 때에도 반장님들이 잘 해서 살아있다기보다 운이 좋아서 아직까지 사고가 났더라도 살아있는 것이라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이전까지 산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운이 좋았다’라는 말로 퉁치곤 했는데 삶과 죽음을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깊은 어둠으로 나를 몰아넣는다.



52. 죽음은 생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대부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을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죽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슬픔에 빠뜨린다. 그게 내가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몇 개월 전에 아빠를 잃을 뻔했을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어붙고 만다. 아빠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주변의 공기, 피부에 닿는 바람, 초여름이었는데도 덜덜 떨리던 몸의 진동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



147. 환자의 상태는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생명을 붙잡아두려 했다. 인공호흡기가 아니면 숨을 쉬지 못하고, 강심제가 아니면 심장이 뛰지 않는 환자의 생명을 붙잡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뇌사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는 것이 무슨 치료냐고 누군가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환자가 단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이라도) 삶의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러한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웰다잉은 비단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모든 보호자들이 이렇게 생을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또 다른 의미의 웰다잉이다.

조금씩 꺼져가는 생명을 겨우 붙잡아둔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일은 보호자들을 위해 더욱 자주 면담을 하고 환자를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넋두리를 자주 들어주고,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면회를 허락해주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환자에 대한 마음 정리를 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 글은 이전에 읽었던, 자가호흡을 하지 않는 환자에게 의료기기를 달고 있게 하는 것이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의료연명결정에 대해 찬성하는 책과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차이일 수도 있고,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박광우 교수는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생각했기 때문에 ‘잘 간병할 것’이 아니라 ‘잘 헤어질 것’을 조언하는 의사였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병원이 진료를 하는 시간에는 얼마든지 면담은 가능하다며 매번 희망을 가지고 묻는 똑같은 질문에도(아빠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아빠의 초점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빠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아빠가 걸을 수 있을까요, 아빠가, 아빠가, 아빠가...) 물론 희망적이지는 않았지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들어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도 했던 아빠가 처음에 입원했던 병원의 주치의와 지금 재활병원의 주치의에게.


지금 나는 아빠의 산업재해를 신청하고 서류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아빠의 행적을 함께 걷고 있다. 아빠가 쓰러진 전날까지 한 일에 대해 전부 정리가 되어있고 일 처리가 되어있는 것을 보면서, 아빠는 이럴 줄 알았을까. 몰랐겠지. 다음날이 되면 얼굴을 맨손으로 부빈 후 피곤한 얼굴로 집을 나섰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엉엉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포스팅을 하는 오늘 오전에 무안공항에 착륙하려던 비행기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유들로) 동체 착륙 후에 폭발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우연히 탑승객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떤 사고를 접하고 눈물이 난 건 처음이었다. 연말이다. 2024년의 끝은 어떻게 보낼 것인지, 다가오는 2025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집에 갈 때 차가 많이 막히겠네, 내일 출근하기 싫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를 생각했을 그들이었을 테다. 그들의 여행 기록은 핸드폰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 채 영원히 봉인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고가 잘 수습되고 실종자도 모두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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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 - 수만 가지 죽음에서 배운 삶의 가치
오은경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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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 ‘죽음’에 대해 좀 더 집중했다. 나는 이전까지 준비된 죽음을 생각해왔지만, 세상에 준비된 죽음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재작년에 외할아버지를, 작년에는 외할머니와 시외할아버지를 여의었다. 세 분 모두 각별히 좋아하던 분들이었기에 그 상실감으로 몇 날 며칠을 힘겨워했었는데, 올해 아빠를 잃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릴 적부터 엄마를 잃는 꿈을 많이 꾸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거나 엄마가 없어지거나 엄마가 세상에 없는 그런 꿈들. 그런 꿈을 꾸면 자다 일어나서 엉엉 울면서 엄마를 찾아 엄마에게 파고들어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다 잠이 들었다.


내가 꿈에서 잃는 대상이 아빠는 아니었다. 그것도 그렇게 갑자기. 주치의로부터 아빠가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아빠의 눈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멈추어버릴 것 같은 순간들을 지나왔다. 아빠는 깨어났고, 오랜 시간 동안 초점이 맞지 않았던 눈도 돌아왔고, 지금은 우리를 보며 웃고 인사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빠가 말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아빠가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전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언젠가는 해낼 것을 알고 있고 아빠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조금 많이 느리고 더딘 것뿐이지, 분명히 갈 때마다 아빠의 발전된 모습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으니까. 인내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우리는 아빠를 통해 인내심을 배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빠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막연했던 죽음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달 전 해외여행을 앞두고 나는 온 집안을 다 끄집어내어 정리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인데, 그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지저분한 우리 집을 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용케 살아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기는 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두렵지 않은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나의 모든 것들이 거리낌 없이 발가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다. 올곧게 살아오지 못해서일까.


지난번 어디선가 지인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이 감사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 글자 하나하나가 굉장히 섬뜩하게 느껴졌다. 타인의 죽음 위에 쌓는 감사라니. 그런 감사가 진실한 감사가 맞을까.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러면서 최근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가 엄마에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아?”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했는데 더 기가 막힌 건 몇 년 전에 본인도 엄마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그걸 자기 딴에는 위로라고 얘기했다는 점이었다. 엄마가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평소 욕을 거의 하지 않는 나지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듣다가 끝내 씨발년아, 라고 시작하는 값싼 문장들을 구사했었다. 말로 인해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뱉은 것보다 훨씬 더 큰 벌을 받기를 바란다.



죽음에 집중해서 글을 쓰다보니 말이 자꾸만 새서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아 다시 책으로 돌아가본다. 저자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38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응급실, 보라매병원 행려병동, 신경외과, 외과, 성형외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한 병동을 거치면서 삶과 죽음의 본질을 직접 마주한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보다 사는 게 녹록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는 것은 분명 성스러운 축복이었을 텐데 죽는 것은 그와 별개로 너무 쓸쓸하고 처참하게 느껴졌다. 많은 이유로 태어난 생명체는 언젠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름답지 못하니 죽음에 대해 반감이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책을 덮고 나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명의료결정법이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2018년에 시행되었는데 시행착오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환자가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고 동의를 했더라도 보호자가 극구 해달라고 한다면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부분에 대해 나도 남편이랑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 모두 각자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쪽이 거의 100%였다. 하지만 상황이 닥쳤을 때 남편의 의사를 오롯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만 더요, 한 번만 더요,라고 간곡하게 외치고 있을 내가 너무 당연하게 떠오른다. 


그런 보호자들로 인해 환자의 존엄과 결정권은 사라져간다는 글이 책에 실려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는 걸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료진들은 그런 경험을 수없이 해보았으니 이렇게 해서도 가망이 없다는 것들을 판단할 수 있겠지만, 보호자는 그런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입장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간다. 전에 아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빠만 버텨준다면. 그리고 힘을 내준다면. 나도 끝까지 버틸 수 있다. 그때 나의 아빠는 간헐적으로 눈만 뜨고 내내 잠만 잘뿐, 살았다고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그랬다. 그게 보호자 마음이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고,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은 마음. 비록 그게 이기적이라고 말한대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나는 아빠 덕분에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졌고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모든 이들의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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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그 두 번째, 포르투갈 길 - 리스본에서 피니스테레까지 순례길 700km
정선종 지음 / 작가와비평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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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무언가 목표를 설정해두고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바람에 따라 되는대로 흐지부지 걷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작년인가 재작년 즈음에, 남편이 그런 말을 해왔다. 본인 퇴직 전에 주어지는 1년이라는 기간에서 한 달 정도를 할애하여 도보여행을 하고 싶다고. 그 말에 “나는?”이라는 말을 되묻지 않은 까닭은,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혼자 하는 여행이 꼭 필요하고 그게 걷기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운동 부족인지) 발목이 약한 데다가, 발가락이 약간 기형이라 (생긴 건 멀쩡한데 좀 오래 걸으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퉁퉁 부어 며칠을 고생하는 편) 장시간 오래 걷는 걸 지향하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하는 며칠이 아닌 기간 동안 걷는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남편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템포를 맞추기가 굉장히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고 혼자 가고 싶다고 말을 한 것이리라.


여전히 나는 긴 시간 동안의 도보가 목적인 여행을 '함께'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조금 흥미는 생겼다. 그래서 이전부터 순례길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들어봤을 때 감흥이 없던 것과 달리 약간의 흥미를 가진 채로 <산티아고 그 두 번째, 포르투갈 길>을 읽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까지의 여정, 그리고 번외로 땅끝마을 피니스테레에 이르기까지의 여정들을 따라가고 그 끝에서 나는 한숨이 폭- 쉬어졌다. 여보 미안해, 혼자 다녀와.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신 우리는 간간이 등산이나 둘레길을 걷는 거로 대신하자.



나는 그동안 순례길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시작점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자와 저자의 아내는 60대 중반이라는 나이로 800km의 프랑스 루트를 완주한 바 있고, 이번에는 70대의 나이로 721km의 포르투갈 루트를 완주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목표를 설정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이 시작점인 순례길에서는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끔 등산을 할 때나 둘레길을 걸을 때에도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은 곳이 더러 있어서 난감한 적이 많았는데 순례길이니 장기전을 목표로 가는 것일 텐데 가다가 되돌아오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게 된다. 중간마다 이벤트가 한 번씩 있어서 조마조마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순례길을 무사히 완주하게 된다는 점은 매우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저자의 나이가 있다보니 더욱 응원하게 되는 것도 있기도 했고.

책의 마지막에는 순례길을 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부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순례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순례길인데도 읽는 것에 이질감 없이 술술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중간마다 실려있는 사진과 그림이 있어 지루함 없이 읽을 수 있었다. 특히나 아내분이 그린 그림들은 따뜻하고 예뻐서 한참을 봤다. 그런데 아내분은 스트레스를 적잖이 받으셨다고. 흐흣.



책을 읽으며 사는 게 뭘까, 생각했다. 요즘 들어 더욱 그런 생각이 깊게 든다. 정말 사는 게 뭘까. 사는 게 재미가 없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살다보니 재미도 있고 잔바람도 있고 행복도 있고 풍파도 있다. 어느 날은 웃음들에 그릇이 깨어질 것 같더니 어느 날은 눈물을 바다 삼아 배영을 할 것도 같다. 누구나 행복해보이고 누구나 불행해보여도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달라서 감히 비교조차도 할 수가 없다. 각자에 맞는 행복과 불행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잘 어루만져 달래가며 살아가는 게 삶이 아닐까. 앞으로도 사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될 테고 최선을 다해 살아볼 테지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렇게도 사는구나. 하는 것들을 좀 더 깊이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하지만 중간에 저자가 말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현재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굳이 이 책에 들어갈 내용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남을 평가하는 데 있어 조금은 조심스러워진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기반이었다.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을진대 본인이 살아본 삶이 아닌 삶에 대해 그것이 아니라고, 틀렸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닌 삶도 없고 틀린 삶도 없다.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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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정한 행복 - 하버드 행복학 교수가 찾아낸 인생의 메커니즘
아서 C. 브룩스.오프라 윈프리 지음, 박다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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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내가 아주 잘 읽었던 책은 <우리가 결정한 행복>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최근에는 실천하지 못했다. 좋고 기쁘고 뿌듯한 것들이 있어도 그 감정을 표현하기는커녕 마음에 가책을 느껴 일부러 모른척할 때가 훨씬 많았다. 기타 다른 감정들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시에는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대한 (누구도 채찍질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갖는, 또 생성되는 죄책감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평소에 교양 심리를 겉으로만 핥고 신뢰하지 못한 나였는데, 이 책을 오래도록 읽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심리 상태가 안녕했다면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최근에 내게 놓인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4. 행복이란 최종 목적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서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

평소에도 너무나도 잘 인지하고 있는 말이다. 이거만 하면 나는 행복해질 거야, 라는 주문은 이제는 하지 않는다. 행복은 순간 반짝 차오르는 느낌이었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것도 순간의 행복을 느낄 줄 알아야 그러잡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책에서 ‘파나스’ 척도를 통해 내가 어떤 유형인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 모두에서 높은 점수였던 미치광이 과학자였다. 내가 양극적 장애인 조울증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맞닥뜨릴 줄은 몰랐네. 그러다보니 내게는 '생각에 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메타인지가 굉장히 중요해지는데, 감정을 의식적 수준에서 경험하고, 감정과 행동을 분리하고, 감정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 안되는 일이지 않은가. 난 그렇다. 난 미치광이 과학자니까...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겪는 방식을 바꿔라.라고 책에서 말을 하고 있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나는 현재 상태를 고수한 채 타인을, 상황을, 세상을 바꾸려고만 한다. 내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타인도, 상황도, 세상도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그렇게 고집을 피운다.

최근에 남편과 다투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내가 힘든 게 싫다고 했다. 힘들어하는 내가 안쓰럽다고도 했다. 힘든 일들을 본인들은 하지 않으면서 인정도 해주지 않는 내 원가족에게 화가 나고, 그걸 못 본 척하지 않고 자처하는 나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가족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혹은 하지 않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너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모두 맞는 말이기는 했는데, 맞는 말인만큼 마음이 쓰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책의 가족 챕터를 읽게 되었는데, 원숭이 덫을 예를 들어둔 걸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말뚝에 코코넛을 매달고, 속을 파서 안에 쌀을 조금 넣어둔다. 코코넛 위족에는 원숭이가 손을 넣을 수는 있되 쌀을 움켜쥔 주먹을 뺄 수는 없을 만한 크기의 구멍을 뚫는다. 배고픈 원숭이가 코코넛에 다가갔다가 덫에 걸리게 되었다. 손에 쥔 쌀을 놓으면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지만, 원숭이는 쌀을 놓지 못한다. 놓을 생각이 없다. 결국은 감정이라는 쌀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느라 화나고 쓰라린 마음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 모습이 내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다. 안쓰러우면서도 왜 이렇게 등신같은지...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을 때리고 싶어서 불이 붙은 숯을 집어들고 (…) 스스로 화상을 입는 사람”이라고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오게 되면서 원가족 중 엄마를 더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족 챕터를 읽을 때는 마음껏 엄마를 미워하면서 읽었는데, 책의 결말이 충격이었다.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족이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니. 그게 결론이라니.... 머리가 띵했다. 대체 왜 위로해주는 척을 한 거야... 난 지금 누구보다 포기하고 싶은데. 아예 전처럼 모른척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그 마음을 가로막는 게 뭔지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인데...

요즘의 나는 모든 면에서 예민하고 민감하다. 타인의 단어 선택 하나, 행동 하나에도 왜 그딴 식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냐고 지나치지 못하고 따지게 되는 앵그리버드가 되었다. 109. 당신이 지닌 부정 편향의 "민감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부정적 신호들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정말 중요한 소수의 신호에만 주의를 기울이려면 민감도를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높은 부정 민감도는 인생의 좋은 것들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든다. 민감도를 낮추는 방법 하나는, 감정 수용체에 부정적 감정이 결합하지 못하게 다른 긍정적 느낌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감사다.

다투고 나서 생각을 정리할 때 내가 남편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했었다. ‘내가 천성이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인 것을 잘 안다.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어서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해왔고 그중 하나가 감사일기였다. 그런데 그것도 그때뿐이더라. 어떤 상황을 감사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감사를 동전의 양면처럼 한 번에 불행으로 바꿀 수 있는 구제불능 인간이기도 하다. 천성은 바꿀 수가 없는 걸까. 그런 내가 나는 자주 끔찍하다.’고.

194. 만일 당신이 불행한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당신을 돕고 싶어 한다는걸 반드시 기억해라. (…)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괴롭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서 나만큼이나 더 힘들었을 남편이다. 항상 내 기분을 살피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너무 잦다보니 남편이 불만을 토해낸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125. 때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당신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당신과 가까운 사람의 감정이다. 가족의 일원, 배우자, 친구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당신과 그 사람의 관계는 상대의 괴로움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로 인해 당신의 기분마저 가라앉기 일쑤다. 그러던 와중에 시의적절하게 책에서 위와 같은 문장을 보게 되었고 내가 내 감정에만 너무 골몰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많이 미안했다.

101. 일기장에 고통스러운 경험을 적는 칸을 마련해 그런 일을 겪으면 바로 그 칸에 적어라. 아래 두 줄은 비워두자. 한 달이 지나면 다시 일기장을 펼치고, 비워두었던 첫 줄에 그동안 나쁜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적어라. 6개월 뒤, 비워두었던 둘째 줄에 그 경험이 낳은 긍정적인 결과를 적어라. 이런 훈련을 통해 과거를 보는 관점이 놀랄 만큼 달라질 수 있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했던 부분이다. 한 달 뒤, 6개월 뒤에 배운 것과 긍정적인 결과를 적으라니... 고통스러운 경험을 적는 건 쉬우나, 그곳에서 얻은 것을 적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은데. 하다못해 최근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이 3개월이 지난 지금도 배운 게 없는 것만 같고 벗어나고만 싶고 꿈이었으면 싶은데...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서 그런 걸까. 다음에 한번 해봐야지. 생각하고 독서노트에도 써두고 형광펜을 그어두었다. 책에는 그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필요할 때마다 챕터별로 천천히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도저히 행복을 찾지 못하겠을 때 추천하는 책_ 행복의 뿌리에 자꾸 물을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물만 자꾸 주면 뿌리가 썩을 텐데, 이 책을 통해 기존에 행복을 심어두었던 흙을 걷어내고 새로운 흙으로 덮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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