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아이 로빈의 그림책장
안드레스 칼라우스키 지음, 무리엘 미란다.후고 코바루비아스 연출, 주하선 옮김 / 안녕로빈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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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칠레 산티아고 출신의 작가인 안드레스 칼라우스키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동화책, 「보이지 않는 아이」는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일이 생겼지만 그 일에 대해 말하면 안 되기 때문에 꽁꽁 감추며 함구하는 가족들. 무섭고 슬픈, 그 일이 생긴 후 몸이 점점 투명해져가는 펠리페. 그리고 펠리페를 찾아다니는 막스. 그런 아이들에게 정원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한다.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건 중요해.”



이 동화를 한 번 읽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마 그 이상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이 책은 아이들만이 느끼는 아픔과 공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 동의할 수 없어 그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 나는 신탁상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신탁상자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대체 뭐였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다만, 아이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짐작할 뿐.



책을 읽으며 초등생이었을 때가 생각났다. 어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잠깐 나에게 뭔가를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지금 생각해보건대) 낡고 축 늘어진, 축축한 성기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처음 본 남성의 성기였을 것이다. 그걸 몇 날 며칠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말했다. 더러운 것이니 그런 건 잊어버리라고. 아마 그런 류의 것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당시 세상모르고 순수했던 나는 그게 성기인 줄도 몰랐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 일이 당시에 크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엄마가 나에게 한 말로 인해 내가 더러운 것을 본 거였구나. 라고 짐작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그것이 더러워졌으니까.


아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나의 엄마뿐만 아니라, 나도 그랬던 적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평소에 나는 아이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대신 나의 하나뿐인 조카에게, 어떤 고모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의 지붕에서 잠시 일탈하고 싶을 때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우산 정도는 되어주고 싶은데 말이 쉽지, 어쩌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아이든 어른이든 상처는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회복하게 도와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아이들은 그 상처를 회복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신탁상자의 무리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하기도 하고 어른들의 말들 속에서 어지럽게 헤엄치고 만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유년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조금 더 아이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품을 넉넉하게 꾸려보기로 한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나를 다독이는 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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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면 열을 세어 봐 - 어린이 감정 조절 그림책 다봄 사회정서 그림책
앨리슨 스체친스키 지음, 딘 그레이 그림, 한혜원 옮김 / 다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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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 감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 반면에 요즘에는 감정을 제대로 보고, 다룰 수 있게 동화책으로 나오는 걸 보며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인 나도 배울 점이 많겠구나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블록을 친구 파커가 실수로 부수어서 화가 난 라일리. 화는 풀리지 않고 자꾸만 커져 주변에 화를 내고 블록을 던지는 등의 영향을 주고 선생님은 라일리의 화가 나는 마음에 공감해주며 화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해 다정하게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건 바로 열을 세는 일. 동화책의 내용은 짤막하지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화를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점과 화가 나는 상태는 언제든 있을 수 있다는 점, 화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아직 감정에 서툰 아이들에게 시시때때로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고 스스로 화를 조절하는 것까지 시도해보기에 적합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기

열까지 세어 보기

팔을 쭉 뻗고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기



“누구나 화가 날 수 있어. 선생님도 그래. 하지만 화가 나도 함부로 행동하면 안 돼!”


나는 다혈질이다. 라고 써두고 다혈질에 대한 어학사전을 찾아보니 감정의 움직임이 빨라서 자극에 민감하고 곧 흥분되나 오래가지 아니하며 성급하고 인내력이 부족한 기질이라고 나온다. 한편으로는 감정을 빠르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성격으로 감정을 잘 숨기지 않고 금방 표가 난다. 열정적인 성향을 지녔다.로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지만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내가 느끼기로는 긍정적인 면을 크게 느낄 수가 없다. 난 내가 다혈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 직업이 내가 다혈질이라는 사실을 더 부각시키고 인정하게 만든 것 같다. 분노조절장애까지는 아니지만 화는 내내 잠재되어있어 언제든 톡-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폭탄을 늘 가지고 있으니 나 역시 조심해야한다. 그런 내게 남편은 물 마시고 와, 혹은 물 마실래?라고 물으며, 멈춤을 실행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우리의 감정은 한 번씩 그런 멈춤,이 필요하다.



#어린이감정조절책 #감정다루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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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만 않아도 오래 살 수 있다 - 도쿄도 건강장수의료센터 김헌경 박사가 알려주는 건강자립의 비밀
김헌경 지음 / 비타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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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나는 골절이 잦은 편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폼롤러를 하다가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거나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허리 횡돌기 3개가 부러지는 일이 3년 안에 생긴 일이기 때문에 골절이 잦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평소에도 자주 무언가에 걸리거나 넘어져서 남아나질 않는 내 무릎을 보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내 걸음걸이가 좀 이상한가? 싶어서 체형교정 재활운동센터를 찾은 적도 있었고 현재는 필라테스를 통해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3n년의 시간 동안 틀어져버린 몸을 올곧게 만들어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게 사실이다.



건강에 부쩍 관심이 많아서 요즘은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일부러 찾아보고 있는 와중에 내 눈길이 간 것은 <넘어지지만 않아도 오래 살 수 있다>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었다. 근래의 내 모습,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해보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기에 자연스레 책에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35년 동안 진행한 노화 연구 과정에서 낙상과 골절 예방을 집중적으로 다뤘다고 하니 기대가 증폭되었다.



책에서는 노화와 노쇠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노화란 성장, 발달 단계를 지나 여러 기능이 약화되고 저하되어 가는 삶의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국어사전에서는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체 구조와 기능이 퇴화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면, 노쇠는 노화처럼 개인의 생리적 항상성과 생활 습관에 따라 선택적으로 발생하는 증상으로 잘못된 건강 관리와 생활 습관으로 인해 생리적 예비력이 떨어지고 그 결과로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력이 약해서 장애나 장기 요양 상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태를 말한다.


“노년기는 노쇠와의 싸움이다”라고 말할 만큼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것은 노화가 아닌 노쇠였다. 노쇠를 가속화하는 3가지 주요 원인은 신체 활동량 감소로 인한 근력 저하, 영양 부족, 사회적 고립을 꼽고 있다. 고령에게 흔히 나타나는 노인증후군은 인지기능 저하, 낙상과 골절, 보행 장애, 근감소증, 노쇠, 구강 기능 저하, 저영양으로 다른 노인성 질환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은데 생각해보면 이는 각자 다른 위치지만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덩어리와도 같다.



Part 1. 백세 시대, 당신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Part 2.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노인성 질환의 모든 것

Part 3. 건강수명 10년 늘리는 노후 연금 3가지

Part 4. 평생 쓸 수 있는 근육통장을 만들어라


각 파트별로 잘 정리를 해두어서 술술 읽을 수 있었는데, 내가 특히나 집중해서 봤던 건 part 2 중 낙상과 골절, 와병 생활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유독 발목을 삐거나 넘어지는 일이 잦다보니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문항 중 ‘지난 1년 동안 몇 번이나 넘어졌습니까’라는 문장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1년? 한 달도 아니고?... 나는 한 달에 두 번 이상 넘어지거나 넘어질 뻔하는데...하면서 자못 심각해져버렸다. 지금도 그러는데 나중에 나이 먹어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낙상은 특히, 매우 위험하다. 나 역시 낙상에 대한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오토바이에서 낙상하여 등뼈가 부러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폐암은 폐암대로 커졌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골절로 인해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고 결국 골절이 할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낙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근력운동을 통해 근육을 키우라고 말한다. 근육을 기르는 방법들은 그림으로 표현이 되어있어 접근하기가 쉬웠고, <백세까지 건강자립을 위한 4주 플랜>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내가 짐이 되지 않도록 좀 더 열심히 근육을 길러 건강한 노년을 꿈꿀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부터라도 건강을 지켜보고자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필라테스에 가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하고 온 나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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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책방 책방할머니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 책방 할머니가 되기까지, 100일의 기록
남미숙 지음 / 공명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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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무얼 하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양평에 책방할머니가 되기로 한 저자가 책방할머니가 되기까지 100일간의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에세이다.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이유는 너무나도 여러가지였다. 이 책은 책 제목만으로도 메리트가 있었다. 당연히 행복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독서를 하는 이들은 책방에 대한 로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과 나 역시 노후에는 전원주택에 살겠다는 점과 가까운 시일에 양평에 방문할 일이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는 본업이 있으니 지금 당장은 책방에 대한 로망은 자연스레 내려두었지만 책방을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경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양평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평책방 책방할머니>가 어떤 곳인 줄도 모르고 단순히 책방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남편에게 양평에 가면 꼭 들르자- 말했는데, 책을 읽고나니 그렇게 방문할 곳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곳은 마음이 지친 여성들을 위한 공간을 대여해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책을 읽어도 되고 잠을 자도 되고 멍하니 있어도 되고 잡초를 뽑아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공간, 그곳은 바로 여성 한 명을 위한 그림책방이었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떠올랐고, 실제로 그 책을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치이며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집이라는 공간은 결국, 내가 해야하는 것들이 보이는 공간이기 때문에 집에서 온전한 쉼을 가지기는 조금 어려우니까. 자발적 추방이랄까. 그러면서 내 마음에 안식을 얻고,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 마음을 읽고… 그렇게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여성들이 가지기를, 저자 책방할머니는 원하고 그 공간을 만들어 대여하고 있다.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양평책방 책방할머니가 되었는데, 저자는 책방할머니와 할머니책방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해주기를 원한다. 크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엄연히 책방할머니와 할머니책방은 너무나도 다르니까. 양평책방이라고는 하지만, 양평책방에 책은 그림책뿐이다. 쉬러 오는 사람들에게 빽빽한 글씨가 들어차있는 책보다는 그림책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한 책방할머니 남미숙씨.

어릴 적에 내가 알던 동화에는 모두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하는 그런 동화책들이 대부분이어서 현실 역시 동화처럼 끝이 아름다울 줄로만 알았던 나였는데, 막상 현실은 너무나도 차갑고 냉혹하기 때문에 동화와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요즈음은 시대에 맞게 동화책도 변화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동화책은 짧은 글과 그림으로 여전히 우리의 언 마음을 살살 녹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책에는 단순하게 책방이야기만 들어있는 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이, 일상이, 가치관을 아우르고 있던 「양평책방 책방할머니는 오늘도 행복합니다」을 읽으며 나는 어떤 어른,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타인의 행복보다는 불행을 먼저 감지하게 된 세상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며 나도 덩달아 행복을 느낀 게 참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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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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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래에 관리자들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같은 관리자라고 불리는 것이,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는 것이 치가 떨릴 정도였다. 어쩌면 저렇게 무능력할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무능력한 인간으로 비칠까, 갈팡질팡하게 만든 장본인들을 두고 나는 떠났다. 하지만 어디에나 그런 관리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의지력을 상실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도 어째서 나는 도서관에서 이 책에 눈길을 보냈던가. 이야기는 망설임이 없고 가독성이 좋았는데 어쩐지 자꾸만 멈추게 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자꾸 움츠러드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선길은 아픈 아들을 두었다. 아들과 관련된 전화를 자주 받아야만 했기에 자주 자리를 비웠고 핸드폰을 내내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장은 함바집의 비리를 감추려고 멧돼지를 내려보냈다. 그렇게 있지도 않은 멧돼지를 잡아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선길. 멧돼지를 잡기 위해 보초를 서던 날들이 이어지고 와중에 아들의 수술 날짜가 다가왔다. 아들의 수술을 마쳤는데도 연락이 없던 선길은 개 두 마리를 데려왔다. 멧돼지는 개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일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선길은 멧돼지 보초를 그만두고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길은 초짜였다. 책에서도 선길을 직접적으로 초짜라고 말하고 있지만, 굳이 그렇게 짚어내지 않아도 같은 직종을 가진 내가 본 시각에서는 하는 말부터 행동까지 초짜였다. 책의 이야기를 전혀 모른 상태에서 읽어 내려가던 나조차도 선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설 현장에서 초짜들은 위험하다. 물론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뭉뚱그려 얘기할 수밖에 없지만, 실질적으로 위험을 예견하는 능력과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안전 수칙이 없는 현장이라면 더더욱. 모든 일은 운전과 같다. ‘오, 나 좀 익숙해진 것 같은데?’ 싶을 때 사고가 난다. 같은 맥락으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모든 위험을 간과할 수 없는 건설 현장에서는 칭찬 한 마디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 결국 사고를 일으키기에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하다.


결국 선길은 사고가 났다. 아니, 선길에게 사고가 났다. 그냥 조금 다친 정도가 아니라 즉사. 안타깝다보다 어떻게 할까를 먼저 생각한 나는 독자이면서 관리자였다.

106. 개죽음 중의 개죽음이었다. 흙막이 공사를 하지 않아 사면이 그대로 빗물받이까지 이어져 있었고 안전수칙이나 시공 기준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사고가 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 선길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선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고의 경위는 확실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소장은 그걸 완전히 뒤바꿔버린다.

109. 이런 일에 책임을 안 만들려고 하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오히려 먼저 책임을 지겠다고, 사고의 발생과 책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다. 다만 그 책임을 작게, 가능한 한 아주 작게 만들어야 했다.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 낸 것처럼 보일 만큼 작게, 충분히 작게, 그러자면 아주 대담해야 했다. 거침없이, 단숨에 해치워야 했다. 거푸집 안에 콘크리트를 쏟아붓듯.

모든 것이 매끄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반발과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매끄럽지 않다고 안 되는 것은 없었다. 반발하든 저항하든 모두 귀결하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이제 선길은 이곳에 없다.



일이 착착 진행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누구의 입장도 되지 못했다. 목 씨도, 현경도, 한 대리도, 소장도, 그 누구도. 전에는 이런 불합리한 일에 분노를 하고 광분을 했을 나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고가 발생하게 된 경위에는 모순이 많았다.

크게는 안전교육 미실시, 흙막이 공사 미이행, 관리감독자의 비상주, 근로자 개인보호구 착용 불량이 있겠고, 세부적으로는 사전작업허가(PTW), 위험성평가교육, 특별 교육, 건설기계 작업계획서 미실시가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 이 사고는 관리자와 근로자의 공동책임이나 비율로 따지자면 9:1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현장에서 근로자 스스로 본인이 안전수칙을 지키기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어서 그런 비율을 매겨도 되나 갸웃거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책장을 제대로 넘기기가 힘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현경.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64. 여자는 벽 이쪽에 있지 않았다. 물론 저쪽에도 없었다. 여자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었다. 여자가 속한 곳은 복도였고 진창이었다. 남은 평생 동안 죄책감의 진창을, 끝없이 이어지는 잠긴 방들의 복도를 계속 그렇게 걸어야 했다. 선길이 남긴 캐리어를 끌며, 어디에서도 안식하지 못한 채. 그것이 여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고 어떤 보상금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형벌, 그것도 가짜인 형벌이었다.

내가 선길의 아내였다면 처음부터 내 남편이 술을 먹고 작업을 했다는 말에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끝까지 싸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의 방증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해봤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남편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어떤 것의 형벌이 덜한 것일까,하고.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형벌을 받아야하는 선길의 아내였는데, 내가 현경이었다면 그 사실을 선길의 아내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저 말해주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전제는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경은 선택의 몫을 선길의 아내에게 돌림으로써 등기를 보낸다. 선길의 아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168. 각자가 각자 져야 할 짐을 지는 것뿐이다. 진실이란 오직 그렇게 스스로 짊어지는 것으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몸만큼, 각자의 몫만큼.

이 책을 읽은 뒤에 계속해서 머릿속이 복잡하다. 무언가를 바꾸려고 들기에는 우리는 고작 ‘개미새끼’가 맞으니까.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소장의 말이 귀에 웅웅거린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내 직업에 따라붙는 거머리 같은 존재인데, 그게 유난히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책 속 밑줄


36. 고생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각자의 고생이라는 생각에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것을 보듬고 다독인 경험도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45. “인마, 해 줄 거 다 해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주는 게, 그게 관리야? 그게 시중드는 거지, 관리야? 해 줄 거 다 해 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줘야 일하겠다는 놈은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놈이야. 그런 놈들부터 제일 먼저 솎아 내는 게 관리고 걔네들은 관리가 안 되니까! 황 반장도 그런 놈이니까 내 진즉 솎아 낸 거야. 알겠어? 그런 놈들은 해 주고 챙겨 줄수록 지가 상전인 줄 안다고. 아쉬운 게 있어야, 뭐 하나 빠지고 부족한 게 있어야, 그걸 내가 쥐고 흔들 수 있어야 관리가 되는 거야.”


46. “(…)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멍청한 것들이나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55. “익혀 먹으면 괜찮대요…….”


55. 이 현장 저 현장 구르며 세상이 계약서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보고 겪은 사람, 젊었을 때는 자기만 한 일꾼 구해 볼 수 있으면 어디 구해보라며 빳빳이 고개를 치켜들고 다녔지만 이제는 깎이고 닳아 둥글넙적해진 바위가 된 사람. 노가다를 했지만 감히 노가다나 한다고 말할 수 없게, 무엇을 시켜도 시킨 것 이상으로 해내서 아무도 시키는 대로 하라 말할 수 없게 일해 왔지만 그것으로는 고작 자신을 지킬 수만 있을 뿐이었다. 바위는커녕 살고 겪을수록 작고 동글동글한 하천의 조약돌밖에, 아니 여느 때는 모래 한 톨밖에 안 돼 보이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125. 인생이야말로 연약한 거라니, 참 고상하고 그럴싸한 말이었다. 그렇지, 인생이야말로 연약하고 위로받고 서로 부둥켜안아 줘야 하는 것이지. 산 사람은 계속 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니가. 산다는 건 비용이 들고 계속 비용이 들어가야 하는 거니까. 인생이란 단지 비용의 문제였다. 전기비, 수도비부터 세금, 교육비, 생활비까지 온갖 비용이 들어갔고 더 많은 비용이 들수록 더 가치 있고 한번 살아볼 만한 인생처럼 보이니까. 그러니 모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이 청구하는 비용에,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는 노예 운반선에.


166. 허전했다. 뿌듯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완전히 비어 버린 듯했다.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죽음에 합당한 것은 진실밖에 없다.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번복할 수 없는 진실이므로. 진실이란 말은 소장 같은 사람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고 현실이란 늘 그랬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달라질 수도 없었다. 하거나, 하지 않을 뿐.


171. “너 왜 사람이 안 변하는지 아니?”

“사는 덴 ‘그런데’가 없어서야. ‘그랬으니까’ 그것만 있거든, 사는 덴. 세상에 공짜가 없어. 비용을 꼬라박고 때려박아야 가까스로 살아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손절을 칠 수가 없는 거야. 안 그러면 지금까지 처박은 게 말짱 황이 되니까. 사람이란 그걸 참 무서워한단다. 말짱 황이 되는 거, 죄다 도루묵이 되는 거.”

“뭔가를 하면 계속 더 그렇게 해야 돼. 이미 했으니까, 이미 했는데가 아니라. 그게 계속된다는 거고. 그렇게 계속되는 게 인생이야. 안 그렇습니까, 유 반장님?”


176. “가요, 가서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요. 아무도 시켜서도 안 되고 시켰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에요. 누구라도 이런 걸 다시 시키면 두말하지 말고, 아무리 늦었다 생각해도 빠져나와요. 그게 제일 빠른 거예요. 안 그러면 끝까지 끌려 들어 갈 테니까, 지금처럼.”

“감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래야 하고. 늘 그다음은 있고 그래야 그다음에 오는 것도 감당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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